마술사

마술 주머니가 자꾸만 저를 쏟던 성탄절에는너도 너를 쏟아낸다 전부 흘려내면새 주머니를 선물받지 않을까지겨운 물이 들고 나는 동안빈 주머니에 차오르던 남의 모래 쌓여든 모래성은 단지 쌓여 있는 것만으로 족하다고제 모래에 잠겨들던 아이들의 재를들이붓던 행인에게는 주머니가 없었다모르는 모래알이 가려운 너는 아니요 모래 대신새 주머니를 주세요 쉬운 몸이 너는 어려워서 쌓다 질려 묻다 질려 차라리잠가 두었던 모래는 쉽사리 … Continue reading 마술사

쓰레기 성

아이들은 노래로 성을 쌓는다헌집 줄게 새집 다오각각의 기일에 쓰러져간 집으로새 집을 지을 수 있을 거라고검은 재로 지은 모래성도 희다고 믿던 애들어제 죽은 새가 모래성으로 기어들면미리 죽은 새들은 제 재로 애도한다새들의 유골로 지은 모래성은 이른 밀물에도 쉽게 무너졌다 죽은 성의 잔해로 아이들은 다시 성을 쌓았다이른 밀물이 성을 허무는 동안 흥건한 땀을 닦아내는손짓은 모래 범벅이었다재투성이 얼굴 부끄런 … Continue reading 쓰레기 성

아홀로틀 로드킬, 헬레네 헤게만

발신 : 오펠리아수신 : 미프티제목 : Re : Re : Re : 그그저께​친구야, 난 다른 존재를 숭배할 줄 몰라 - 설령 너라고 해도 말이지 -,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지? 어떻게 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우월하다고 생각할 수 있느냐고? 어떤 기준에 의해서 그게 가능한 거야? 아마도 너의 그 랭킹 시스템에 따르면 나는 저 … Continue reading 아홀로틀 로드킬, 헬레네 헤게만

아베 토모미, 치이는 조금 모자라

치이는 착한 아이다. 모자라기 때문에 착한 아이다. 치이의 클래스메이트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학급에서 걷은 돈이 사라졌을 때 치이를 의심하는 것은 죄악시된다. 치이를 보호/동정/훈육 하는 친구들은 치이를 의심하는 일진애를 비난하면서 치이를 옹호(보호)한다. ​ 돈을 훔친 건 치이였다. ​ 치이는 그녀의 단짝 A에게 훔친 돈 일부를 자랑스럽게 건넨다. 그것은 치이의 범죄고 치이의 소유다. A는 치이의 돈을 받아들인다. 그녀들은 … Continue reading 아베 토모미, 치이는 조금 모자라

소노 시온, 지옥이 뭐가 나빠

 "영원한 영화를 만들 수 있으면 죽어도 좋아. 살해당해도 좋아." 그러나 영원은 없다. 영원한 순간도 영원한 망상도 없다. <<안티 포르노>>에서 여주인공은 그녀의 첫 섹스신을 찍던 카메라를 떠올린다. 그런 것은 없다. 내려뜨려진 스크린에는 풍경밖에 없다.(심지어 그녀 자신의 자위씬도 없다.) (소노 시온의 욕망이 그만의 것으로 흡수되는 부분은 지루하다.. 길고 지루한 싸움과 살인과 출혈과 유사섹스..) 현실은 초현실이다. 현실은 … Continue reading 소노 시온, 지옥이 뭐가 나빠

김언희, 배신하기

소리를 질러주어야 할 순간을 깜빡 놓치고 번번이 놓치고, 에잇, 똥이나 처먹어라! 가나의 첫 대사이자 마지막 대사야(김언희, <아주 특별한 꽃다발>) 배신하기.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적합한 말과 적합한 순간을. 그래서 아주 무례해져버리기. 머리카락에 불이 붙는데, 개가 짖는다(...) 개가 짖는다(...) 개가 짖는다(...) 개가 짖는다(...) 개가 짖는다(...) 개가 짖는다(...) 개가 짖는다(...) 개가 짖는다(...) 개가 짖는다(김언희, <Ver. 1. 발화>) 나는 … Continue reading 김언희, 배신하기

초록장마의 물방울 – 우주의 유배지 초록 행성의 비가

평생을 앓던 장마가 새삼스런 장마가 내린대요 잘 자라나요 아니요 그럴 리가요 하잘 것 없는 내력은 묻지 마세요쉽게 벌어지고 쉽게 젖어들고 쉽게 썩는답니다 쉽게 피고마는 싸구려랍니다비도 없이 우산꽃 틔우고 축축한 대가리가 버거워목을 꺾고 실핏줄로 머리칼을 묶고밟지 않음 자라나요 내일부턴 장마라는데 계절 내내 하늘에 고여 있는 저 초록저게 장마구름인가요?그래 장마전선이라고 하지안개가 아니고요그래 다 젖어놓고선 모르겠니 아직도?흐르질 않는데요 … Continue reading 초록장마의 물방울 – 우주의 유배지 초록 행성의 비가

그로테스크, 기리노 나쓰오

 A에게는 아름다운 여동생 유리코가 있다. 유리코는 너무나 아름다워서 A는 유리코를 미워하는 것을 그만둘 수가 없다. A는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유리코에게서 도망치려 한다. 거리를 취함으로써 생존하려 하는 것이다. A는 필사적으로 공부하여 명문 Q 고등학교에 입학한다. 아름답고 또 더 아름답기 위해서 멍청하게 구는 유리코는 Q 고등학교에 입학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유리코는 스위스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와 … Continue reading 그로테스크, 기리노 나쓰오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 로베르트 볼라뇨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 파시스트 작가들의 허구적 전기다. 서글픈 집요함에 대한 스케치. 이미 죽은 사람들, 파시즘(과) 문학에 대한 집요함의 프레임 바깥에는 존재하지 않을 작가들에 대한 묘사는 서글프고 쓸쓸하다. 그들은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집요했다. 현재형 시제의 문장들이 건조한 느낌을 준다. 볼라뇨의 소설들은 건조하면서 아름답다. 《야만스러운 탐정들》과 《2666》에서 불쑥 튀어나오던, 견딜 수 없이 서글픈 대화와 묘사들.

사막

가뭄 든 눈에는 자꾸만 마른 모래가 차올라요 참지 말고 울라는 전문가의 조언에 따라 주기적으로 무너지던 너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꼬마애와 눈이 마주쳤을 때 아이는 제 마른 눈을 자랑하며 히죽대었다 그래도 너는 울어야 했다 울어야 한다 울 수밖에 없다 그래요 이건 건강한 눈물이에요 친환경적인 눈물이에요 싸구려 패스트푸드로 흘려내는 기름진 눈물과는 다르지요 나는 채식주의자랍니다 이슬과 풀잎으로 달여낸 눈물은 … Continue reading 사막

멸종된 동물의 서 – 나비의 물방울

감히 누가 흘러가라 충고하는가. 못 위에 자글자글한 파문을 찍어대며 발버둥치는 벌레들, 우아히 잠겨들지 못하고 떠올라버린 그 많은 다리들을 보고서도? 봄을 잃은 나비들은 뜬 눈으로 봄을 지샜다. 이상한 계절이다.노랗게 변색되어버린 시절을 직감한 너희는 이상기후가 끝나기만 기다렸다.낯선 종말을 그리는 사이 번데기에 초록 장마가 고여들었다. 차게 식은 너희 번데기를 찢어내고 나왔을 때, 갓 태어난 몸들은 쭈글쭈글했다.오래 고여 늙은 … Continue reading 멸종된 동물의 서 – 나비의 물방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