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 묻은 치마가 발목에 감겨 장님 여자는 몇 번이고 넘어졌다. 두툼했던 뱃살이 꺼져 치맛단이 자꾸만 너저분하게 흘러내렸다. 도중에 지팡이를 잃어버린 탓에, 여자는 직녀성의 엷게 새는 음성만을 쫓아 나아가야 했다. 새로 뜬 북극성의 굵은 노래가 보드라운 목소리를 짓뭉개는 탓에 여자는 여러 갈래로 핏물을 쪼개어 귀를 감쌌다. 세밀한 핏줄에 걸러진 사근사근한 소릿결을 따라 걸음을 내디뎠다. 절벽에 굴러 … Continue reading 피나무 유령-4회
[월:] 2021년 10월
피나무 유령-3회
장님 여자가 유령을 찾은 것은 냉랭한 냄새 때문이었다. 신랄한 냉기가 구부러뜨린 철쭉 내음이 시린 기억을 흘리며 시들어가고 있었다. 서러운 냄새로 일그러진 공간에는 체온이 없었다. 그것은 그저 주변의 향취들을 썩지 않는 냉기로 감염시키고 있을 뿐이었다. 열 없는 갈증에 붙는 이름을 여자는 잘 알고 있었다. 유령이었다.“여자야, 나를 찾은 여자야. 네가 나를 볼 수 없듯 나도 너를 볼 … Continue reading 피나무 유령-3회
피나무 유령-2회
관리소장은 햇빛 한 방울도 튀어 묻지 않은 눈가를 껄껄한 손가락으로 비비며 401호 아줌마와 마주했다. 그녀는 새벽동안 아파트 카페에 올라온 글들을 들이밀며 간밤의 유령 노래에 대해 말했다.“정말 들었어요. 이상한 짐승이라도 들어온 건 아닌지. 불안해서 살 수가 있어야죠. 확인 좀 해주세요.”이후로 몇 주간 수척한 얼굴 몇 쌍이 더 찾아들었다. 소위 유령 노래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다는 … Continue reading 피나무 유령-2회
화상에 대응하는 몸의 기억
김신록에 뫼르소 비평 발등에 뜨뜻한 햇볕이 쏟기었다. 그는 백치처럼 턱을 늘어뜨린다. 혀가 굳어 간지럼 타지 않는 여자를 두고 빛무리는 돌아간다. 아니, 돌아온다. 뫼르소는 차라리 달리며 비웃는다. 온몸을 흠씬 적신 땀은 덥기보다는 차다. 햇빛의 체온을 튕겨내며 뫼르소는 오한에 바르르 떤다. 다시, 햇빛이 밝아 나는 눈을 뜰 수가 없다. 마침내 나는 정박으로 신음한다. 햇볕의 수효에 꼭 들어맞는 … Continue reading 화상에 대응하는 몸의 기억
피나무 유령-1회
피나무 유령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1층에 사는 장님 여자였다. 여자는 여느 때처럼 신경질적으로 흙을 튀기며 걷다가 멈춰 서서는 몇 번 심호흡을 했다.“유령이다!”비명을 들은 이웃들은 여자가 드디어 미쳐버렸다고 생각했다. 관리소장이 여자를 아파트 안으로 끌고 들어가, 이웃에 피해를 주는 소란행위는 자제해 달라며 에둘러 방송할 때까지도 주민들은 유령에 대해 조금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튿날 502호에 사는 대학생이 같은 … Continue reading 피나무 유령-1회
사마귀
막 쉬어가는 추억막 변색되어 하얀해에 들떠 흰 피부몸부림치는 하얀 살을 보았다검은 얼룩 고양이는 긴 혀 다 데어가며발광하는 하양을 물려고소스라치다 할퀴어대다 응시하다다시 거울 너머 힐끔 보고입안 가득 살아 있는 백합을 꽂아 넣다여직 살아 있는 유령껍질째 으스러뜨리며나를 보고 으스대더라먹지 않을 사마귀풀잎 못 된 갈퀴들구태여 살해하는 스펙타클빛에 들떠 막 바래가는 흰 살이가장 희다 파드득 몸부림치는 몸휘어가는 살섬세하게 소스라치는 … Continue reading 사마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