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하루살이들 4회

바깥이라고? 그럼 안은 어딘데? 황당해하며 중얼거리는 소리의 눈 앞에서 유리는 제 몸을 가리켰다. 여기, 이 안쪽. 숨과 물이 들어가는 곳. 아니야, 바깥은 이 방 바깥이야. 이 좁은 방을 바깥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유리에게 있어서 첫 일출을 맞이한 곳, 언어와 날숨이 새어나가는 곳, 피부를 둘러싼 것들이 모이고 흩어지는 외부는 아무리 좁은 공간이라도, 아무리 … Continue reading 내일의 하루살이들 4회

섬 신화

젖가슴 주렁주렁 매달고 고래는 헤엄친다꼬릿짓이 만들어낸 비행운은 언제나 가난한 섬의 경계다끓는 얼음으로 지은 섬에는 얼어붙은 구균만 끓이며 사는 빈민들이보글보글불면에 분홍 꿈으로 절여진 고래 얼굴들버릇없는 빈민들은 버릇든 잠조차 자지 않고 병들었다병밖에 가진 것이 없는 섬 주민들은그라도 수출하러 나섰지만 국경을 넘기도 전에 모조리 아사해 버렸다응급실에 실려온 순교자들을 병원장은 제 아들에게 유산으로 물려주었고아들은 그 병균들로 섬의 신화를 샀다 … Continue reading 섬 신화

내일의 하루살이들 3회

나는 처음을 기억해. 너를 두고 혼자 밤을 건너가던 날에 했던 약속을 기억하고 있어. 난 아무것도 잊지 않으니까. 내 것이 아닌 하루들까지도. 전부. 그래. 너는 나보다 많은 유리들을 가지고 있지. 너는 내가 헤아릴 수도 없는 처음들을 전부 기억하고 있잖아. 응. 그런데, 그게 처음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어쩌면 그보다 더 이전도 존재하지 않았을까? 기억하지 못하는데도? … Continue reading 내일의 하루살이들 3회

치매

꽃 꽃 꽃이름뿐인 꽃이름은 꽃이어서꽃처럼 가만히 사랑하던 꽃님은가만히 눈 붙이던 직녀성흐려지는 기억의 시력에 도망가는 줄 알고노망든 기대로 이름만 이름만별님 별님 별님꽃님들 만발한 묘지에는 꽃말도 한창이어서부끄런 고백 들킬까 수줍어차라리 목을 꺾고뿌리 음순 코 박은 머리 음순으로아아 별님 별님 별님오르키 수음 자가생식하며꽃 꽃 꽃 이름 뿐인 꽃이름 자꾸 불어나요별꽃 같은 건 없죠그저 별님 별님 별님노망든 꽃 꽃 … Continue reading 치매

내일의 하루살이들 2회

이건 내 입으로 문 거야. 아팠어? 아니. 무슨 맛이 났어? 아무 맛도 안났어. 자, 어서. 너도 깨물어 봐. 이빨자국이 더럽다면 손톱이라도 괜찮을 거야. 이제 고작해야 몇 시간만 넘길 수 있으면 되니까. 너희는 붉게 출혈하며 뭉그러지는 별을 지켜보면서 서로의 손등을 깨물었다. 맨살은 짜지도 달지도 않았다. 돌아갈 곳이 없다. 소리가 무심코 집, 이라는 말을 했을 때 유리는 … Continue reading 내일의 하루살이들 2회

하얀 섬

스물 네 시간 박제된 알바트로스 무리가늙은 별의 무능을 쪼아 벗겨내던 일몰에육지는 마른 사막으로 급히 몸을 숨겼지만차마 돌지 못하고 바들바들 떨어대던 무인도에서는 하이얀 물만 물결쳤다물 속 물도 물 밖 물도 물로 잠겨들어 이제는문둥병 든 피부도 그을러 벗겨진 피부도 수공품의 상처로 장식한 피부도 서툴게 배양된 흉터의 피부도 짓무른 욕창으로 물렁한 피부도 훔쳐온 오르키로 애도된 피부도 정당한 값으로 … Continue reading 하얀 섬

내일의 하루살이들 1회

1장 모든 이야기는 네가 시작한 것이다. 굳이 숨을 쉬지 않아도 욕망하지 않아도 움켜쥐지 않아도. 제 밑을 찢어내며 같은 겨울을 맴도는 열차에는 누구도 막아낼 수 없는 창문들이 돋아나 있어. 죽음에는 등도 뼈도 없는데 등이 굽은 방랑자를 보고 헤어지지 못한 귀신의 얼굴을 떠올린 사냥꾼은 무엇을 쫓고 있었던 것일까. 창에는 내부도 외부도 없다. 그저 너머와 너머 서로의 금과 … Continue reading 내일의 하루살이들 1회

내일의 하루살이들 서문

모든 이야기는 네가 시작한 것이다. 굳이 숨을 쉬지 않아도 욕망하지 않아도 움켜쥐지 않아도. 제 밑을 찢어내며 같은 겨울을 맴도는 열차에는 누구도 막아낼 수 없는 창문들이 돋아나 있어. 죽음에는 등도 뼈도 없는데 등이 굽은 방랑자를 보고 헤어지지 못한 귀신의 얼굴을 떠올린 사냥꾼은 무엇을 쫓고 있었던 것일까. 창에는 내부도 외부도 없다. 그저 너머와 너머 서로의 금과 금의 … Continue reading 내일의 하루살이들 서문

동물은 동작한다

박쥐를 피하기 위해개구리들은 공명한다개굴 개굴혀 짧아 개골혀 길어 개애구울구애하는 개구리를박쥐가 물어간다자그마한 두개골을 뱉어내고동작 없이 쉬이 우는 개구리들은개굴개굴 애도하지만비스듬한 중력을 살아본개구리는개골 개애굴 환호하며추락한다비행했기에미끄러질 수 있는비뚤어진 날개 위에서개골개골개애구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