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있는 사물은 아무것도 생산해낼 수 없는 당신들, 제 목을 맬 올가미조차도, 자신의 죽음조차도 매듭짓지 못하는 당신들, 내가 하얗고 질긴 탯줄을 내려뜨리기 전에는 자살조차 할 수 없을 당신들, 당신들은, 너무도 못생기고 무용한, 그래서 예술조차 될 수 없는 당신들은 내 아름다움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엄마는 허둥거리면서 끝맺지 못한 협박문을 움켜쥐고 울부짖기 시작했다. 딱정벌레처럼 은밀하게 밀어닥치기 시작한 경찰들이 … Continue reading 아름다운 소녀의 물방울 2
[월:] 2022년 07월
아름다운 소녀의 물방울 1
구름처럼 희고 통통한 쥐가 한 마리 지나갈 때 소녀는 소년이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쥐가 두 마리 지나갈 때 소녀는 소년이 검게 변하는 것을 보았다. 쥐가 다섯 마리 지나갈 때 소녀는 소년이 눈을 감고 죽어 있는 것을 보았다. 쥐가 열다섯 마리 지나갈 때 엄마아빠의 비명을 들었다. 너 대체 뭘 한 거니? 그리고 오빠의 대답, 여전히 흐느끼면서. … Continue reading 아름다운 소녀의 물방울 1
혼자의 물방울
살인범을 만난다고 해서 두려워할 필요는 없었으니, 어차피 소녀는 혼자였으므로, 그녀의 곁에는, 그녀의 위, 그녀의 옆, 그녀의 앞, 그녀의 뒤와 그녀의 아래, 그녀의 내부와 그녀의 외부, 그녀로부터 먼 곳과 그녀 가까이에는 아무도 없었으므로. 바라지 않는 것도 바라는 것도 아무것도 없었으므로.
엔젤 스테이크 16
촬영이 끝났을 때, 여자는 처음부터 모든 카메라들이 꺼져 있었음을 알아차렸다. 그들이 문을 열고 들어서기 전부터. 유령 같은 이미지들 유령같은 배우들 유령 같은 방송들. 여자와 스텝들과 우주복을 입은 배우들은 미동도 없이 마네킹처럼 정지해 있었다. 그들은 촬영의 끝을 선언하지 않았지만 여자는 촬영이 끝났음을 알아차렸다. 여자들은 여전히 무대 주위를 돌고 있는 소녀들을 하나씩 불러세웠다. 여자가 소녀들에게 촬영이 끝났다고 … Continue reading 엔젤 스테이크 16
공공의 자살의 물방울 3
그들은 암실에 있다. 쭈글쭈글한 암막 커튼과 투명한 레이스처럼 넘실거리는 검붉은 빛무리. 소녀는 무언가를 보았다고 믿는다. 그녀, 깨진 창문 너머로 떨어져서 파손된 휠체어의 부품이 굴러다녔고 여자 아이의 죽음을 애도하는 자들은 휠체어의 죽음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휠체어를 고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죽은 자가 입던 옷은 죽은 자와 함께 불태워야 하는 것이 맞기에, 아무도 그 휠체어, 산산조각 … Continue reading 공공의 자살의 물방울 3
공공의 자살의 물방울 2
선생의 가죽이 그녀를 굽어보며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주름이 졌다가 펴지기를 반복하는 검붉은 가죽. 너는 왜 사진을 찍느냐고 묻는 목소리. 소녀는 사진을 찍는 일을 한 번도 선택한 적이 없었음에도, 사진을 제출하라는 과제, 명령과도 같은 선언은 오로지 당신에게서 비롯된 것이었다고 이야기하는 대신, 잊고 싶어서요, 하고 말한다. 잊고 싶어서. 너는 퍼포먼스를 하려는 거니? 사라지고 싶다고? 움찔거리는 가죽주머니 사이에서 … Continue reading 공공의 자살의 물방울 2
유폐되어 태어난 감옥 아이 : 꿈꾸는 괴물을 꿈꾸다 대화를 몽상하며
감옥에서 태어난 감옥 아이들은 미리 갚은 죄값 계속해서 살아가야 하지요권태기의 모세들은 제 발로 강에 뛰어들고 뤼크레티아는 처녀혈 쏟기도 전에 목을 꺾어 봄을 불러요 미리 타버린 여린 자궁 제전의 횃불 속에서 낄낄거리고 한 바퀴 먼저 부른 봄은 지난 여름에 미리 피어났지요 지겨운 처녀들 차라리 화형대로 기어들고 얼려놓은 플라스틱 별님은 벌써 부패한 야광빛으로 반짝거려요 치매 걸린 달이 … Continue reading 유폐되어 태어난 감옥 아이 : 꿈꾸는 괴물을 꿈꾸다 대화를 몽상하며
공공의 자살의 물방울 1
인체의 코드를 복제해낼 방법을 찾게 된 이후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 존재를 백업해두기를 원했다. 생의 중요한 기억들을 저보다 단단한 사물 위에 기록해놓으려 애쓰던 오랜 습성처럼. 하지만 누구에게나 특권이 허락된 것은 아니었다. 고대부터 살아남은 글은, 삼천 년 전부터 전해져내려오는 글은 언제나 몇몇 작품뿐이었듯, 바로 이 순간 써내려가는 글이 아닌 수천 년 전에 누군가 특별한 이가 써내려간 특별한 … Continue reading 공공의 자살의 물방울 1
고백의 물방울
당신은 내가 모르는 걸 알고 있어요. 그렇죠? 언제나 대담하고 오만하던 소년은 처음으로 수줍게 물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작고 달콤한 목소리. 알려줘요. 다시 당신에게 속을 수 있게.
정신병동의 물방울
선생님,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당신은 날 진찰하려 하고 있죠? 내 분열과 광증을 분석하면서 결국에는 날 정상으로 되돌려놓으려고 하는 게 아니에요? 그게 치료잖아요. 난 기호가 아니라 몸들이에요. 아무도 내 의미를 대신 읽어낼 수 없어요. 아무도 내 의미를 변질시킬 수 없어요. 지상에서 치러야 할 일은 죽음뿐이라는 걸 숨기려 하지 말아요.
레몬캔디와 바이올린의 물방울
우린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요. 레몬캔디는 갑작스레 격분한 듯 소리쳤다. 당신이 네오소다팝시티를 없애버렸기 때문에, 디지털 세계 속에 떠돌던 우리 유령들은 형체를, 아바타를, 목소리를, 눈과 코와 얼굴 픽셀들을 모조리 잃고 사라져버렸어요. 왜 그걸 없애버린 거예요? 난 이제 돌아갈 곳이 없어요. 레몬캔디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우린 몸도 정신도 영혼도 없으니까. 우린 당신의 세계 속에서만 살아갈 수 있었는데, 우린 … Continue reading 레몬캔디와 바이올린의 물방울
현과 소년의 물방울
깊은 바다처럼 일렁거리는 푸른 빛깔의 살덩이는 아름답다. 바다는 거대하게 춤추는 푸른 살덩이이다. 벌어진 입과 푸른 물이 밀려들어가며 내는 전도된 목소리. 숨을 내뱉어 내는 소리가 아니라 살이 밀려들어가며 내는 소리. 푸른 바다의 살을 삼키며 흐느끼는 소리. 세이렌의 노래. 혹은 밤의 파도소리. 현은 소년이 바다의 살처럼 유동적인 몸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그 애의 얼굴은 날마다 다른 기류를 맞아 … Continue reading 현과 소년의 물방울
레몬캔디의 물방울 – 죄의 소외
죄를 고백하러 오는 사람 중에 진정한 살인자는 없었다고 했죠, 하고 레몬캔디가 말했다. 죄에서 어떠한 회한도, 절망도, 고독도 찾지 못한 학살자들은 한 번도 고해성사실에 찾아오지 않았다고 해요. 어느날 삼촌은 수도원 기숙사 구석에서 개들을 장난삼아 죽이던 소년을 본 적이 있었는데 그 소년은 한 번도 고해성사실에 찾아오지 않았대요. 소년이 비닐봉지, 검은 수의 속에 새끼 강아지들을 밀어넣고 매듭을 단단히 … Continue reading 레몬캔디의 물방울 – 죄의 소외
소녀와 홀로 남은 언어의 물방울
소녀는 쥐처럼 역병을 몰고 온 두 개의 상반된 이미지를 떠올렸다. 소년과 사내. 유령과 살. 죽음과 삶. 그녀가 악몽 속에서 불러들여 끌어안은 푸른 꽃의 뿌리에서 그녀가 원한 바 없이 딸려온 검고 축축한 내장을. 코코펠리의 군인들은 기어이 그 검은 숲을 차지하고 말았다. 그들은 아름답고 기묘한 언어가 흘러나오는 목들을 모두 불태웠다. 그러나 소녀만은, 황금빛 머리칼과 검은 눈 속에서 … Continue reading 소녀와 홀로 남은 언어의 물방울
검은 숲과 혁명의 바깥의 물방울
베푸는 눈, 수치를 가르치는 눈, 응시만을, 환각만을, 보이지 않는 것만을 내버리고 떠나가버린 눈. 대지의 내장 속에서 피어난 초록이 배설하는 공기를 들이마시고 또다시 배설하며 그들은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느꼈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으며, 무엇이라고 이해하고 싶다는 갈증을 느꼈지만 기실 아무것도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다만 비참하게, 무엇보다도 무참하게 살해당하고 싶었고 상처받고 싶었다. 살해하고 … Continue reading 검은 숲과 혁명의 바깥의 물방울
노인과 거울의 물방울 2
노인은 언젠가 그가 썼던 단편을 떠올렸다. 나치 부대가 생명정치로서의 우생학을 구현하기 위해 가련한 쥐들처럼 은밀한 구석자리에 숨어든 유대인들을 찾아 도시를 누비고 있을 때, 피아니스트는 청중의 부재를 의아해하고 있었다. 그가 어릴 적에는 이토록 주위가 한산하지 않았다. 그가 소나티네를, 쇼팽을, 베토벤을 매끄럽게 연주해내고 나면 누군가가 박수를 쳤고 박수 소리는 전염병처럼 순식간에 번져나갔다. 소년은 항상 열병과도 같은 연주와 … Continue reading 노인과 거울의 물방울 2
엔젤 스테이크 15
암오소리는 전문 화가가 되어 전시회를 여는 일은 완전히 포기했지만 아직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자신이 작업하고 있는 그림의 구상을 이상스러울 정도로 구체적으로 이야기했다. 눈부시게 하얀 해변에 창백한 여자가 누워 있어요. 그녀는 시체예요. 심장이 멎었고 호흡하지 않으며 피조차 응고되어 버린 시체요. 그녀는 벌거벗은 채이고 그녀의 몸 위로 물결이 오가요. 파도가 그녀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지고 다시 물러나기를 … Continue reading 엔젤 스테이크 15
노인과 거울의 물방울 1
노인은 거울에서 쥐 한 마리를 발견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숲에서 나고 자라면서 그는 한 번도 쥐를 본 적이 없었고 그의 집에는 거울이 없었다. 거울에 비친 쥐의 형상은 그에게 있어 이중의 불가능성을 지닌 것이었다. 노인은 그 부조리한 광경을 보지 않고 지나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혹은 보더라도 보지 않았던 것처럼 무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노인은 소스라치며 … Continue reading 노인과 거울의 물방울 1
검은 숲과 혁명의 바깥의 물방울 3
천사의 날개처럼 냉혹하면서도 감미로운 결정들을, 각자의 자리에서 돌이킬 수 없는 불연속성에 갇혀 있는 구제할 길 없는 가련한 단자들을, 아플라 위 고립된 형상들을, 단단하게 굳어가는 혀와 바이올린의 날카로운 현, 벌려진 가랑이 사이 부드러운 항문과 질의 점막과 차갑고 딱딱한 건반, 죽어버린 살갗과 살을 탐닉하는 작은 벌레의 허리를, 무력하게 버려진 새하얀 살과 살 속에 파묻혀 저를 칭칭 감아대는 … Continue reading 검은 숲과 혁명의 바깥의 물방울 3
검은 숲과 혁명의 바깥의 물방울 2
사내는 하얗고 불가해한 밀실 안에 갇혀 칙사의 열띤 연설을 듣고 있는 이 순간 역시도 생애 내도록 반복되어온 기호 중 하나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와 같이 이곳까지 밀려온 이들, 나체도 양복도 아닌, 자연도 비자연도 아닌 옷을 입고 있는 이들, 자연의 얼룩을 위장한 옷을, 자연스럽지 않은 자연의 피부를 걸치고 있는 이들도 사내와 같은 종류의 기호들에 둘러싸여 있다는 사실을 … Continue reading 검은 숲과 혁명의 바깥의 물방울 2
어부
어젯밤엔 제법 열렸지 지느러미 거품그래, 먼 구름 좇던 늙은 인어도다릿짓 멈추고 입맛 다셨으니싯누런 이빨 들이밀어도어림 없지, 바꾸어 줄 리가자네 무얼 하나 젖은 비늘 짜 말리지조만간 동그라니 무지개가 필 걸세어이 그만 두시게 마른 꼬리뼈엔 헤엄을 걸면 안 돼시린 발짓은 쉬이 꺾여버린다오그럼 어디에? 으흐, 흠 이리 주시게짠물 서린 자리 봐 두었지퉁퉁한 별빛 서너개는 걸리어도지느러미질 찰박 신명나더군그렇게 시퍼런 … Continue reading 어부
검은 숲과 혁명의 바깥의 물방울 1
지긋지긋한 가상훈련이 끝나던 날 그들은 총을 지급받았다. 총의 의미를 곧바로 해석해내지 못한 이들은 그들에 손에 놓인 운명을 타인의 것을 바라보듯 멍한 얼굴로 내려다보았지만 총의 즉물적인 본질을 간파해낸 이들, 손가락의 미세한 움직임만으로 목숨을 끊을 수 있다는 황홀감에 사로잡힌 이들은 입속에 총구를 쑤셔박고 축포를 터뜨렸다. 바늘에 찔린 풍선처럼 순식간에 쪼그라는 머리를, 피와 골수액, 절망과 불안, 기대와 회한을 … Continue reading 검은 숲과 혁명의 바깥의 물방울 1
코코펠리와 정복과 혁명의 바깥의 물방울 – 사내와 폭력 4
안락사 기계에 대해 생각한 건 여왕이 즉위하고 시간과 숫자에 대해 처음으로 발표했을 때예요. 난 시간을 인공적으로 측량화하는 단계에 이르렀으면 당연히 죽음의 시간도 자의적으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래요. 마치 언어처럼 말이에요. 시간이나 숫자를 익힐 때처럼 혼란기를 겪을 필요도 없어요. 아주 간단하니까. 시계 바늘보다도 간단한 원리죠. 바늘이 가리키는 숫자의 생김새와 의미를 외울 필요도 없으니까. 자, … Continue reading 코코펠리와 정복과 혁명의 바깥의 물방울 – 사내와 폭력 4
코코펠리와 정복과 혁명의 바깥의 물방울 – 사내와 폭력 3
형상과 배경 양쪽의 경계를 동시에 가르는 윤곽들 중력과 습기, 열기와 타자들에 잠식되어 짓물러가는 살에 대한 연민은 어디에도 없었다. 한때 그들은 그 모든 작용들을 서툴게 연민하는 체 하였으나 아무도 믿지 않았다. 지금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폭력이었다. 반성치 않는 폭력. 목적도 이유도 없는 폭력. 무위에 대한. 아무런 목적도 의미도 없는 문양들로 그 무용한 형상들의 관계로 비로소 … Continue reading 코코펠리와 정복과 혁명의 바깥의 물방울 – 사내와 폭력 3
코코펠리와 정복과 혁명의 바깥의 물방울 – 사내와 폭력 2
그들은 검은 숲 너머 산 위에 하얀 성당처럼 빛나고 있는 호스피스 건물에 들어섰다. 입구를 찾는 일도, 입구 안으로 들어서는 일도 어렵지 않았다. 폭도들은 버릇처럼 잔뜩 수그린 머리를 들이밀며 접수대로 다가섰다. 희게 질린 여자가 그곳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입구라면 그들은 그녀를 망설임 없이 부술 것이었다. 여자는 무언가를 직감한 듯 접수대에서 일어나 그녀 뒤쪽에 있는 하얀 벽면을 독특한 … Continue reading 코코펠리와 정복과 혁명의 바깥의 물방울 – 사내와 폭력 2
코코펠리와 정복과 혁명의 바깥의 물방울 – 사내와 폭력 1
겁탈당한 소녀가 헐벗은 몸으로, 끔찍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지르는 비명소리를 듣고 나서, 고수머리 사내는 중절모 아래에 죽어 있던 새끼 비둘기를 보았을 때와 같은 비참한 기분을 느꼈다. 사랑과 기쁨, 환희와 같은 긍정적인 단어들을 현화하고자 했던 의지가 선의지일 수 없다는 깨달음. 홀로가 되지 않기 위해, 마음껏 사랑받고 이해받기 위해 버둥거렸던 몸부림은 누군가를 해치지 않고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적막감. … Continue reading 코코펠리와 정복과 혁명의 바깥의 물방울 – 사내와 폭력 1
엔젤 스테이크 14
문지기는 적어도 그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안다고 믿을 수 있었어요. 시골 사람은 적어도 마지막 순간에 자기가 어디에 있었는지 알 수 있었어요. 거미 서기는 이렇게 말해요. 그것은 합법적인, 그러나 동시에 범죄적인 예속관계라고요. 그리고 이렇게도 말하죠. 끔찍하고 불가능한 노력을 통해 당신은 문지기가 될 수 있을 거예요. 그러한 희망은 개연적이며 심지어는 현실적이기도 하죠. 극히 낮은 확률이지만 그래도 … Continue reading 엔젤 스테이크 14
헤다야트와 소녀의 물방울
서로 다른 악몽을 지켜보며 밤의 찢긴 베일이 내려앉기를 기다린 그날 이후, 소녀는 종종 페터 할아버지의 오두막에 찾아갔다. 여느 살가운 손녀가 그리하듯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노인을 위해 집안 정리를 해주고 정원에 자라난 잡초를 뽑아주며, 침이 말라 굳은 더러운 입가를 훔쳐주는 일은 없었다. 소녀는 그저 고기의 냄새를 잊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내의 옆에서 그녀의 속에 있는 개의 피 … Continue reading 헤다야트와 소녀의 물방울
소녀와 가족의 물방울 – 잠자는 여자와 소문
땅거미가 꺼질 무렵 소년을 만날 채비를 하기 위해 집에 들어온 소녀는 나무문 바로 맞은 편, 통나무 식탁에 앉아 있는 여자를 보고 몸을 굳혔다. 붉은 루즈와 흰 분을 바른 얼굴이 유령의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그녀는 도시에서 사는 소녀의 고모였다. 소녀는 인사도 하기 전에 고모에게 어쩐 일이냐고 물었다. 오랜만에 고모를 만난 기쁨보다 예기치 못한 방문에 소년을 만나러 … Continue reading 소녀와 가족의 물방울 – 잠자는 여자와 소문
페터 할아버지와 소녀의 물방울
페터 할아버지는 천성적인 몽상가였다. 어렸을 적부터 거식을 앓았던 그는 아이처럼 작은 몸에 말라 비틀어져 주름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늙어빠진 소년처럼 보였다. 소녀의 부모는 매일 하릴없이 빨랫더미 옆에 앉아 붉은 하늘만을 바라보는 그를 경멸했지만 소녀는 그의 반짝거리는 눈이 응시하는 꿈의 세계를 남몰래 염탐하며 신기해하곤 했다. 그는 대기와 별에 대해 연구한다고 말하고 다녔는데 그에게 그 직업에 … Continue reading 페터 할아버지와 소녀의 물방울
고래 아이
고래는 단 숨만 삼킨다. 줄무늬가 닳은 노인들은 짭조름한 핏물만을 주워 먹었다. 미끈한 피부를 반짝 자랑하는 신사 숙녀들. 늙어 닳은 모공은 터럭들을 떨군다. 질긴 고래 수염을 배배 꼬며, 그 애 집에는 단 물이 샜다지. 할머니는 비내음으로 옷을 빨았대. 시꺼먼 아이는 누구보다 빨리 살이 쪘다. 울퉁한 아스팔트 사마귀를 흰 배로 뒤덮고, 보드라운 파도살을 찢어내며 틔워낸 꼬리뼈. 소년은 … Continue reading 고래 아이
붉은대기 소녀의 물방울
황홀한 심연을 굽어보는 그의 빛나는 눈, 한 줄기의 빛이 더 매혹적으로 빛나는 암흑에 파묻힌 그, 영원한 질식 속에 떨어진 소년, 소녀는 연한 물빛의 피부를 어루만졌다. 소년의 입술 속에 혀를 들이밀었다. 호수물이 그득 들어찬 소년의 입속에서는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소녀는 소년을 먹어치울 수도 그를 흙으로 덮어 묻어 놓을 수도 없었다. 소년의 하늘빛 피부는 호수의 물과 … Continue reading 붉은대기 소녀의 물방울
마술사-군인의 물방울
시간의 발명을 코코펠리 주민들은 여왕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라며 칭송했다. 그녀가 전한 수의 개념 중 시간만큼 유용한 개념은, 수천의 사람들을 살릴 만큼 쓸모있는 개념은 없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연인 사이의 만남을 순전한 우연에 치부하는 것을 거부했고, 만남의 날짜와 장소, 시간을 지정함으로써 필연적인 만남, 의도와 결부되는 만남을 가능케 했다.-물론 변덕이라는 의도에 의해 지켜지지 않는 약속들도 있었지만. 촌각을 다투는 … Continue reading 마술사-군인의 물방울
붉은대기 소녀의 물방울 – 육식
믿을 수 없어, 소녀는 계속해서 되뇌었다. 황홀하고 끔찍한 붉은 안개 속을 서성이면서. 나뭇잎들이 내쉬는 숨의 지문과 같이 새하얀 눈의 결정들이 떨어져내리던 오후였다. 소녀가 차가운 공기 속에 목을 누이고 바람이 그녀의 머리를 매만지도록 놔두는 오후, 하얀 햇빛이 붉은 대기를 뒤덮으며 부드럽게 제 뼈를 으스러뜨리는 오후, 동물들이 물컹한 외피를 공중에 파묻고 내밀한 수다를 지껄이는 오후. 그 오후, … Continue reading 붉은대기 소녀의 물방울 – 육식
코코펠리 전쟁의 물방울 – 붉은대기 혹성
버스 안에서 떨리는 몸을 다잡으며 환상과 싸우고 있던 군인들이 정복할 수 없는 혹성들로 보내질 때도 그들은 익숙한 멀미에 헛구역질을 하며 흔들리고 있었다. 군인들은 질려버린 낯으로 검은 숲 한복판에서 내렸다. 그들의 얼굴에 더 이상의 공포는 없었다. 수백 번 되돌아오는 시간 속에서 하나의 단순한 사건과 정서는 무한히 증폭되어 견딜 수 없는 무게를 가지게 되므로 그들은 두려움을 포기하였다. … Continue reading 코코펠리 전쟁의 물방울 – 붉은대기 혹성
코코펠리 전쟁의 물방울 – 지상훈련
버스는 무자비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너희는 버스 손잡이와 좌석, 창문의 깨진 유리에까지 손을 박으며 버텼다. 무척이나 어린 소년도 너희들 사이에서 바들바들 떨리는 여린 팔을 어딘가에 얹어둔 채 안간힘을 다해 중력의 품 속에 기어들고 있었다. 너희를 이곳까지 내몬 것은 중력인데도. 중력이 붙들고 있는 시간 속에 너희는 무력하게 끼어 흔들리고 있는데도. 아무도 중력을 탓하지는 않았다. 소년은 일곱 살 … Continue reading 코코펠리 전쟁의 물방울 – 지상훈련
얼룩의 물방울
어쩌면 너희는 다만 얼굴에 남아 있는 흉측한 얼룩을, 출생의 순간 너희의 얼굴에 깊이 배어들었던 붉은 피의 흔적을 지워내기 위해 얼굴을 견디며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얼룩을, 그리고 얼굴을. 사내는 식물의 벗겨놓은 피부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종이는 이미 오래전부터 죽어있었으나 그는 죽은 피부에 죽어가는 문자를 써넣는 일에 대해 죄책감을 느낄 수 없었다. 음표들은 나날이 균처럼 번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음표들이 … Continue reading 얼룩의 물방울
유령의 물방울
도굴꾼이 무덤을 망가뜨리는 순간 무덤 바깥으로 쫓겨나 있던 귀신은 살아남았다. 척박한 땅에서 쫓겨난 사람들은 이제 어디로 가면 좋죠? 무덤에서 쫓겨난 유령들은 이제 어디로 가서 죽음을 계속할 수 있나요? 이미 죽은 사람은 죽어가는 사람의 곁에 있을 수 없다는 걸, 죽어가는 사람은 죽은 사람을 찾을 수 있어도 죽은 사람은 죽어가는 사람을 찾을 수 없다는 걸 우리는 오래전부터 … Continue reading 유령의 물방울
발화욕망의 물방울
우리의 대화는 어떠한 논문도, 학적인 연구도 될 수 없을 거예요. 우리에게는 구체적인 실명도 신원도 존재하지 않으니까. 우리의 세부는 모두 허구의 투명한 거미줄 위에 짜 내려간 환상의 직조물에 불과하니까. 회피와 응시를 얽어놓은 복잡한 거미줄 바깥의 어떠한 삶도, 역사도 우리는 가지고 있지 않아요. 우리 자신의 삶조차도. 우리의 의지도, 목소리도, 우수도 전부 허구일뿐이죠. 실재하는 것은 고독뿐이에요. 그래도 글을 … Continue reading 발화욕망의 물방울
고해성사의 물방울
어쩌면 네 죄는 글일지도 몰랐다. 네가 견뎌야 하는 실존을 네가 낳은 글들도, 너의 환상들도 감내해야 하는 걸까? 넌 네 환상들에 실존의 죄를 지우고 있는 것일까? 죽음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망각의 얼굴 가까이 기어간 이들이 자신의 글을 모두 불태워달라고 한결같이 부탁했던 것 역시 베가 낳은 아이의 실존을 짊어지고 옥상에서 함께 뛰어내려 산산조각난 거울로, 누구의 실존도 생명도 … Continue reading 고해성사의 물방울
고해성사의 물방울 – 사드의 여인
한번은, 하고 여자의 고백이, 짙고 퀴퀴한 악취를 풍기는 목소리가 갑작스럽게 시작되었다. 관악기의 차가운 내장에서 줄줄 흘러내리는 음률처럼. 마리가 내게 말을 건 적이 있었어요. 내 이름을 부르면서요. 아니요. 내게 죽여달라고 이야기하기 훨씬 전의 일이에요. 그즈음 우리는 가혹하긴 해도 이후에 치러야 했던 끔찍스러운 모욕에 비하면 견줄 수도 없는 악행에 몸을 적시고 있었죠. 우리에게는 아직 바깥에서의 기억이, 신이 … Continue reading 고해성사의 물방울 – 사드의 여인
연과 레몬캔디의 물방울
내가 글을 쓰고 싶은 욕망을, 멍든 육체가 아니라면 다른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갈망을 앓게 된 것도 삼촌 때문이라고 할 수 있어요. 삼촌의 낡고 삐걱거리는 어둠 속에 머무르면서 난 그의 이야기에 완전히 빠져들었죠. 삼촌은 재능 있는 이야기꾼이었어요. 비록 나 말고는 다른 누구도 그의 그런 재능을 발견하진 못한 것 같지만, 난 이야기꾼으로서의 삼촌의 재능을 질투하기도 했죠. … Continue reading 연과 레몬캔디의 물방울
연과 레몬캔디의 물방울 – 고해성사 3
삼촌은 그녀를 벌하고 싶지도, 구원하고 싶지도 않았다고 했다. 다만 유령처럼 비열하고 고독한 소년은 그녀의 고백이, 이 괴상한 신도의 고백이 흥미로웠기에 계속 들을 수밖에 없었다고 이야기했다. 그러고서는 무척이나 기이한 첨언을 덧붙였다. 고해성사실에 들어가는 죄인들이 바랄 수 있는 것은 다만 들어주는 일뿐이라고. 그들은 그들의 죄가 사해지는 것도, 더해지는 것도 바라서는 안 되며 오직 그들의 죄에 대한 충실한 … Continue reading 연과 레몬캔디의 물방울 – 고해성사 3
연과 레몬캔디의 물방울 – 고해성사 2
그 일이 있고 난 뒤에도 삼촌은 고해성사실에 숨어드는 버릇을 버릴 수 없었어요. 삼촌은 잠을 청하듯 습관적으로 고해성사실로 들어가 타인의 악몽에 귀를 기울이곤 했죠. 죄인들은 밤낮없이 고해성사실로 들어왔어요. 삼촌은 마른 몸을 잔뜩 웅크리고 피아노 현들 위에서 날카로운 음률이 제 몸을 가르는 것을 즐기며 잠에 든 쥐처럼 죄인들의 흐느낌이 피부를 갈라내는 감각을 만끽했죠. 신부님, 저는 아내를 죽이고 … Continue reading 연과 레몬캔디의 물방울 – 고해성사 2
엔젤 스테이크 13
너는, 남자아이는 여자의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네 죽음을 내게 맡겼어. 나라도 그렇게 했을 거야. 내가 죽을 작정이었다면 난 나의 죽음을 엄마도 아빠도 심지어는 나 자신의 운에도 맡기지 않고 너에게 맡겼을 거야. 네 작은 손이 내 목을 잘 조를 수 있도록 난 네 손 위에 손을 얹었을 거야. 하지만 그건 아마 실패로 끝났겠지. 나는 졸도에 가까운 … Continue reading 엔젤 스테이크 13
연과 레몬캔디의 물방울 – 고해성사 1
분명 삼촌이 그의 유년에 대해 낱낱이 털어놓은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침묵만을 고수했던 것도 아니에요. 당신한테 말한 적이 있죠. 삼촌은 사람들 생각과는 달리 꽤 수다스러운 사람이었다고. 삼촌이 어릴 적, 그러니까 서커스에서 도망쳐나온 뒤 한동안 수도원 소유의 고아원에 들어갔다는 걸 내게 이야기해 준 것은 이모가 연인을 찾아 집을 나서고 삼촌이 지상에 선 박쥐처럼 구석자리의 그늘에 … Continue reading 연과 레몬캔디의 물방울 – 고해성사 1
레몬캔디의 물방울 – 서커스의 짐승
레몬캔디는 종종 그의 고향 마을-그가 고향이라고 믿었던-에 찾아오곤 했던 서커스단에 대해 이야기했다. 본래는 대도시의 유원지에서 공연을 하던 서커스단이라고 했는데, 사막에서 붉은 보석이나 신비한 향신료들을 가지고 오는 행상들처럼 간혹 우리 마을에도 들리곤 했죠. 특히 노인들과 어린 아이들이 그들의 방문을 손꼽아 기다리곤 했는데, 그건 그들의 흐린 시야로 뒤덮인 삶에 있어 그토록 화려하게 반짝이는 것은 기껏해야 서커스 단원들이 … Continue reading 레몬캔디의 물방울 – 서커스의 짐승
레몬캔디의 물방울 – 여자의 다리수술
난 한 번도 내가 죄를 지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지금도, 마을사람들을 독살한 무시무시한 범죄를 저질렀다는 이야기를 들은 지금에도 그때의 내가 그리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설령 그들이 죽음을 원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우리는 타인을 해치면서 살아가잖아요. 헤집을 수 없는 속을 헤집고 상대에게 제 타액을 흘려넣어 감염시키는 일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부르지 않았던가요? 그게 아니야, 하고 레몬캔디의 … Continue reading 레몬캔디의 물방울 – 여자의 다리수술
피안개 만찬
삼촌은 뜨끈한 손가락을 자꾸만 베어냈다. 말라붙은 손가락에서 둥근 지문이 뻐끔, 맴을 도는 날갯짓. 뜬 눈으로 잠든 비늘들만이 푸흐흐, 설운 입질을 삼켜낸다. 익지 않는 고기는 이미 썩은 쓰레기 뿐이지. 몽글한 살내음 달게 차오른다. 발간 기억을 덜렁이며, 이제 내겐 마른 혀조차 없소. 흰 비늘을 한 겹 한 겹 섧게 게워낸다. 얼멍 뒤얽힌 체온이 어지러워. 다리를 벌리고 방만한 … Continue reading 피안개 만찬
레몬캔디의 어린시절의 물방울 – 유년과 우물
나도 더 이상 빈대들의 삶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아요. 그렇지만 죽음에 대해서는 더 할 말이 있어요. 레몬캔디는 모르는 어릴 적의 이야기에요. 그 애는 무척이나 천진하고 사랑스러운 아이였어요. 당신의 이야기와는 모순되게, 슬플 때는 언제든지 울고 욺으로써 무언가를 요구할 줄 아는 아이였죠. 물가에 떠내려온 아이들이 대개 그렇듯 거뭇한 우수를 지니고 있는 아이긴 했지만, 그래도 그 애는 이웃들을 … Continue reading 레몬캔디의 어린시절의 물방울 – 유년과 우물
여자와 레몬캔디의 물방울
아무것도,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는다. 아무것도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을 너희는 종종 잊는다. 하메른의 강에 빠진 쥐떼들은 다시는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지금까지 하수구에서 바글거리는 쥐들은 그때의 우수를 공유하지 않는다. 너희들이 반복한다고 믿는 생들은, 또다시 출몰했다고 믿는 사자들은 이전의 그와는 전혀 다른 존재이다. 너희 자신조차도. 너희는 하나의 생을 반복하지 않는다. 어제의 네가 가졌던 고독을 오늘의 너는 결코 … Continue reading 여자와 레몬캔디의 물방울
자살자 쥐들의 물방울
비는 쉽게 그치지 않았다. 그건 사막의 저주일지도 모른다고, 속삭이는 여자의 목소리. 비 웅덩이에 코를 박고 끔찍스러운 얼굴을 들여다보다 물 속으로 머리부터 고꾸라져 들어가는 검은 쥐를 바라보며 너희는 침묵한다. 나르시스가 천사와도 같은 미소년을 보고 사랑에 빠져 입을 맞추었던 성스러운 액체 위에서 흐물거리며 얇고 더러운 콧수염들을 움찔거리는 작고 혐오스러운 괴물을 본 순간, 쥐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너희는 … Continue reading 자살자 쥐들의 물방울
맹목의 물방울
파르메니데스가 갈라놓은 ‘좋음’의 세계, 가볍고 부드러우며 선명한 빛이 내리쬐는 존재들의 세계에 우리는 평생 진입하지 못할 것이다. 존재의 책임만큼이나 무거운 비존재의 응달에서 우리는 빛을 헤매는 존재들을, 무수한 날개를 맞비비며 가벼운 빛을 따라 상승하는 하루살이들을 하염없이 올려다보기만 할 것이다. 그들의 날개에서 날리는 분진들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가볍겠지. 존재하지 않는 자들의 몸은 우리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여리고 … Continue reading 맹목의 물방울
연과 레몬캔디의 물방울
레몬캔디의 갈라진 목소리. 버려진 목소리들의 결속. 사람은 들을 수 없는 목소리. 유령도 들을 수 없는 목소리. 하지만 너는 듣는 체 한다. 유령이 유령을 들을 수 없다면 지친 음성으로, 작게 쉬어버린 목소리로 소곤소곤거리며 집단적인 독백을 하는 유령들에 대한 꿈조차 꿀 수 없으므로. 악몽을 꿀 수 없다면 더 이상 악몽에 대해 쓸 수도 없으므로. 어쩌면 난 삼촌보다 … Continue reading 연과 레몬캔디의 물방울
죄의 물방울
하나의 잘못을 고치면 모든 일이 곧바른 길을 찾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다. 하나의 잘못된 저주를 삭이고, 하나의 잘못된 생각을 없애고, 하나의 잘못된 선택을 지우면 모든 일이 괜찮아질 거라고. 무참한 수압을 향해 피어나던 뿌리들을 제대로 목격했더라면, 그곳에 너희 대신 네가 갔더라면, 네가 갖지 못했던 고래의 검고 거대한 자궁을 기억했더라면, 고래는 너보다 깊은 심해를 기억할 아이들을 낳았을 … Continue reading 죄의 물방울
목소리들의 물방울
유리병에 간절한 이름들을 담아 망망대해에 띄워보내는 심정으로, 보야저 호에 인간의 육성과 믿음, 그들이 가장 아름다운 노래라고 믿던 음악을 함께 담아 우주 속으로 무책임하게 띄워보내던 이들의 심정으로, 새로운 세계를 구걸하는 심정으로, 설령 보야저호를 받아든 누군가가 있더라도 절대 그와 눈짓을 주고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설령 유리병에 모래와 함께 담긴 더러운 쪽지를 펼쳐보는 자가 있더라도 그가 자신을 … Continue reading 목소리들의 물방울
연과 레몬캔디의 물방울
변명 같겠지만 다시 한번 말할게요. 내 증언이 뒤죽박죽인 건 당신도 이해해 주어야 해요. 혼란스러운 건 당신과 나의 존재도 마찬가지이니까. 우린 결국 아무것도 겪은 적이 없고 따라서 경험에 따라 기억을 반추해내는 일은 불가능하니까. 내 증언은 내 내면의 바깥에서 벌어진, 어떻게 보면 나와는 전혀 무관한 세계에 대한 이야기니까. 난 내 어린 시절을, 잃어버린 어린시절을, 어쩌면 존재한 적조차 … Continue reading 연과 레몬캔디의 물방울
네크로필리아 음악가의 물방울
할아버지가 삼촌을 얼마나 신뢰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적어도 이모에 대한 그의 사랑을 완전히 믿지 않았다는 것만은 확실해요. 할아버지의 연구실 바닥에 앉아 한없이 위로 떠오르는 금빛 먼지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면 할아버지가 유령에게 말을 건네듯 중얼거리곤 했거든요. 사랑받지 못하고 자란 사람은 사랑을 할 수 없는 법이야. 그런 사람들은 꼭 누군가를 배신하게 되어 있지. 그게 저 자신이라 할지라도. 할아버지가 … Continue reading 네크로필리아 음악가의 물방울
너희, 들의 물방울
여자는 숨을 들이쉰다. 눈꺼풀 속에서 붉은 얼룩들이 흩어진다. 피부를 잃고 질주하는 말의 혈류처럼. 기억들의 마을에서 무엇을 찾으려고 했는지, 그녀로서는 알 길이 없다. 그곳은 그녀의 고향도 아니었고, 한 잔의 홍차와 마들렌에서 피어오르는 장미 정원을 돌보던 사내가 찾아나선 진리는 그녀가 속해 있지 않은 세상의 것이었으므로. 날짜와 시간이 표시되지 않은 필름사진과 같은 기억들, 죽은 자도 산 자도 모두 … Continue reading 너희, 들의 물방울
연과 현의 물방울
너는 어느덧 현과 함께 오래도록 햇빛에 노출되어 희게 바래가는 옥상의 초록색 방수 페인트 위에 앉아 있었다. 너희 사이를 오가던 유구한 전통에 따라 너는 입을 다물고 그 애의 옆에 앉아 있었다. 마치 너희가 모두 살아있을 때처럼. 현은 네가 알지 못하는 어린 시절부터 글을 써왔다고 말했다. 그는 처음에는 식물을 기르고 분갈이를 하는, 일정한 생의 주기에 따라 아무것도 … Continue reading 연과 현의 물방울
연금술사와 광인들의 물방울
할아버지의 연금술을 이해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지도 몰라요. 무엇보다도 시간을 내키는 대로 조율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그를 마치 신과 같이 받들어지던 고대의 왕처럼 보이게 했던 것 같아요. 할아버지는 시계의 원리를 안다면 누구라도 시간을 바꿀 수 있다고, 그건 연금술 고유의 영역조차 아니라고 설명했지만 아무도 할아버지의 말을 믿지 않았죠. 그의 말을 들을 때마다 사람들은 다소 자조적인 어투로 할아버지를 … Continue reading 연금술사와 광인들의 물방울
연과 현, 레몬캔디의 물방울
현과 네가 공유한 것이 침묵뿐인 것은 아니었다. 현이 병원에서 퇴원했을 무렵, 그는 자신이 퇴원한다는 소식을 교묘한 방식으로 가족들에게 숨겼고 학교 옥상에 작은 침낭과 과자들을 꾸려 노숙을 했다. 그 애를 용서하기 위해 학교로 찾아온 가족들이 현을 찾아 거뭇하게 그을은 그 애의 손을 끌고 돌아가기 전까지 너희는 모두가 그의 소재를 알고 있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 애를 … Continue reading 연과 현, 레몬캔디의 물방울
코코펠리 전쟁의 물방울 – 소녀와 언어
코코펠리 여왕이 전쟁을 치를 무렵의 일이였죠. 처음에 그녀는 선한 의도를 관철시키기 위해, 투쟁하는 인간상을 완성시키기 위해 전쟁에 매달렸어요. 초록 혹성에서 학대받는 여자들을 해방하고 사람의 죽은 시체를 품고 있는 검은 나무들을 하얗고 가벼운 송진 가루로 되돌리는 것 이외에 여왕이 바라는 일은 더 없었어요. 여자들이 잠을 청하던 밤 몰래 로켓을 만들고 빌어먹을 대지를 탈출한 것도 그 때문이었죠. … Continue reading 코코펠리 전쟁의 물방울 – 소녀와 언어
출혈의 물방울
다섯 개의 총구 앞에서 사자들이 춤을 추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날 집으로 돌아간 이들은 모두 잠시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했다고 웃었을 뿐이었어. 그들이 다시 그 골목으로 돌아갔을 때, 사자들의 시체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있었고 더위에 지쳐 잠이 든 다섯 명의 아이들만이 헐벗은 채로 드러누어 있었으니까. 열사병에 걸려 쓰러진 아이들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기삿거리가 … Continue reading 출혈의 물방울
개와 연극의 물방울
우리는 거미줄 속에서, 자신이 직접 짜내려간 아름다운 관 속에서 먹이와 함께 죽어가는 거미처럼 앞으로 내달리며 기꺼이 우리가 파 놓은 함정에 걸려들었어요. 누군가 우리의 사진을 찍었지만, 붉은색과 흰색, 검은색의 자그마한 물방울들로 가득찬 흐린 안개 속에서 우리의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거예요. 우린 진짜 사자가 아니었지만 우리의 울음만은 진짜였어요. 예술은 진실한 가짜여야 한다고, 현의 목소리가 네 … Continue reading 개와 연극의 물방울
존재와 모순의 물방울
난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눈을 감고 내 노래를 따라 부르는 사람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어요. 그들이 나를 모욕하고 있다고 느낄 정도였죠. 현실과 모순되는 제 존재의 모순성을 즐기며, 신체의 내부를 아프게 찔려오는 꼭짓점이 깊어져가는 것을 느끼며 당신에게 말을 걸었죠. 당신의 목소리는 내 안에서 자라났어요. 난 당신이 점차 확실한 존재로 변해감에 따라 항상적인 자아를 유지하고 있던 고정된 … Continue reading 존재와 모순의 물방울
현의 커튼콜의 물방울
넌 현의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었다. 현의 죽은 머리는 네 머릿속에서 고개를 숙이고 청중들에게 인사를 했다. 아이들은 희미한 윤곽선을 깜빡거리며 졸음을 참다가 꿈의 무대에서 하나 둘 사라졌다. 그 애들은 교실문도 창문도 열지 않고, 오로지 스스로의 경계를 지우며 그 안쪽의 살과 얼굴, 입술을 희끄무레한 온기로 바꾸며 사라졌다. 끓는 물이 천장과 냄비 그 중간 부위에서 흐릿한 연기로 … Continue reading 현의 커튼콜의 물방울
엔젤 스테이크 12
어떤 날은 다른 꿈을 꾸기도 하지. 여자는 남자아이가 여자의 꿈에 대해 질문을 했다는 듯, 언제나 파리의 꿈을 꾸느냐고 묻기라도 했다는 듯 말을 이었다. 나는 긴 복도 위에 서 있어. 복도가 지상으로부터 떨어져 공중을 부유하고 있음을 나는 느껴. 난 중심을 잃지 않고 바닥에 단단히 들러붙어서 서 있지만, 내가 고착되어 있는 바닥은 지상으로부터 떨어져 있음을 나는 느껴. … Continue reading 엔젤 스테이크 12
사자가면의 물방울
우리는 함께 사자 가면을 만들기 시작했어. 연극 소품에 사용하려고. 우리는 포르말린에 말린 사자의 얼굴을 연기하려고 했어. 이런저런 시도를 해봤지만 다 실패했지. 주황색 골판지에 갈색 털실을 덕지덕지 붙인 가면은 사자보다는 도깨비처럼 보였으니까. 프린트로 인쇄한 사자는 털 한 올조차 없이 민둥맨둥했어. 마치 피부를 도려내 여린 속살을 드러낸 것만 같았어. 박제하기 전에 가죽을 벗겨놓은 것처럼. 인터넷에서 사자 가면을 … Continue reading 사자가면의 물방울
학창시절의 물방울
학교에 다닐 때, 미술시간에 학생들 앞에 나가 어떠한 인물의 생김새를 설명했던 기억이 난다. 네가 그 인물의 코와 얼굴 윤곽, 눈썹이나 입술의 모양에 대해 묘사하면 학생들은 네 설명에 따라 그림을 그리고 그것을 비교하는 것이다. 평소 글을 쓴다고 했던 너는 아이들의 추천을 받아 교단 앞으로 나가 선생님이 준 사진 속 인물의 생김새를 묘사했다. 그의 코는 크고 둥글어. … Continue reading 학창시절의 물방울
환각과 망각, 결핍의 물방울
수천 마리의 하루살이들이 리본처럼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흘러나온다. 파동을 묘사하듯, 창백한 선영을 이어나가듯. 무수히 겹쳐 검게 보이는 투명한 날개들에 손을 집어넣고 옷장의 문을 열자 목소리가 들린다. 토성의 고리처럼 어디에도 없는 흔한 상징. 메타포. 너희는 상징을 사용하지 않기로 약속했지만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 언어를, 보이지 않는 대상을 지시하는 언어를 무어라고 불러야 할지 너는 알지 못한다. 여자의 상징이 … Continue reading 환각과 망각, 결핍의 물방울
마네킹의 물방울
초록 혹성이 불에 타 사라진 뒤 네 꿈은 정착할 곳을 잃었다. 산만한 이미지들이 고장난 만화경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며 너를 어지럽혔지만, 인격을 잃은 의식 너머언어의 파편들은 이미지들을 엮어 놓을 적합한 논리조차 갖추지 못한 채 잔상을 따라 흔들렸다. 여자는 마네킹이 늘어져 있던 진열대 안쪽에 짐승의 침처럼 미지근한 액체를 들이부었다.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지만 넌 그녀가 무얼 하는지 알 … Continue reading 마네킹의 물방울
출산과 탄생의 물방울
난 아이를 낳지 않을 거야. 그래도 한 번 태어난 사람이라면 돌이킬 수 없이 겪어야 하는 출산의 과정이 있어요. 마치 아이를 출산하듯 제 자신을 죽음으로 낳으며 새벽을 내내 앓다 가는 사람들을 본 적 없나요. 부모의 출산을 번복하듯, 허벅다리 안쪽에 새겨놓았던 문신을 지져 지우듯, 고통스럽고 지난한 과정을 견뎌 죽음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은 적 없나요. 당신도 언젠가는 … Continue reading 출산과 탄생의 물방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