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과 장미 23

Act. 25. 김현경은 TV를 보고 있다. 클로즈업된 인간의 얼굴들. 그녀는 그 속에서 돼지들을 찾는다. 그녀가 보기에 모든 배우들은 돼지들이고 늑대를 기다리고 있다. 혹은, 모든 배우들은 돼지들을 연기함으로써만 늑대를 기다릴 수 있다. 인간의 실존의 양식을 결정짓는 제스처와 표정과 언어들. 김현경은 그곳에 머리를 삽입하고 싶다. TV의 표면에 얼굴을 밀어넣고 다른 얼굴들과 충돌하기를 그녀는 원한다. 그녀는 미치지 않았다. … Continue reading 양과 장미 23

양과 장미 22

Act. 1. 이곳에는 배울 수 있는 무수한 사물들과 배우지 않아도 좋을 무수한 언어들이 있다. 읽을 언어들과 읽지 않아도 좋을 사물들과 깨달을 수 있는 진리들과 깨달을 필요 없는 진리들과 맞을 수 있는 아침들과 지새울 필요 없는 밤들과 알게 될 것들과 알지 않아도 상관없는 것들과 불변하는 결핍과 감미롭고 절망적인 망상과 받은 적이 없으므로 줄 필요도 없는 말들, … Continue reading 양과 장미 22

양과 장미 21

Delusion level 2.0. 언어 교재 나는/우리는/그녀는/그는/그들은 천국에/지옥에/미래에/죽음에/삶에/돼지 농장에/29번 채널에/옥상에/추락에/살인 현장에/질액과 체액이 엉겨붙은 침대 시트 위에/자궁에/목을 매단 자살자의 발이 점점 아래로 미끄러지고 있는 연극 무대에 갔다/가고 있다/간다/갈 것이다/갔을지도 모른다/갈지도 모른다/가게될 지도 모른다/갔어야만 한다/가야만 한다/가야 한다 . She danced her dance. She did her dance. She will live her death. She died her life. She did her … Continue reading 양과 장미 21

양과 장미 20

Delusion level 10.0. 페이디피데스는 달렸다. 아테네는 승리했고 그는 끔찍하게 목이 말랐다. 그는 달렸다. 달리다가 마침내 아테네에 도착했을 때, 그는 목이 말라서 그곳에 왔는지 아니면 승전보를 전하기 위해 왔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죽었고 그가 한 말은 이후의 사람들이 정해 주었다. 안녕, 친구들. 오늘은 딸기 생크림 케이크 먹방을 할 거야. 딸기 생크림 케이크를 먹으려면 우선 딸기 … Continue reading 양과 장미 20

양과 장미 19

Act. 2. 초인종 소리. 앨리스가 문을 연다. 택배 배달원 남자가 그녀를 밀치고 현관 안으로 들어온다. 그의 낡은 운동화에서 질척질척한 흙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살해당하고 있어. 남자가 울부짖는다. 뭐라고요? 살해당하고 있어. 나, 살해당하고 있다고. 남자가 갑자기 실어증 환자처럼 입술을 달싹거리면서 거샌 숨을 내뱉는다. 앨리스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의 입술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도와줘. 혹은 왔어. 혹은 갈래. 혹은 … Continue reading 양과 장미 19

엔젤 스테이크 20

하지만 맹세를 하면서 그 애는 조금도 즐거워 보이지 않았어요. 오, 그 애는 정말 다정했어요. 나를 위해서 독방에 있는 숨겨진 통로를 알려주기도 했답니다. 선생님, 내가 이 말을 하는 건 당신들이 그 통로를 막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통로로 진입하는 방법은 순전히 관념적인 것이므로 꿈을 사라지게 만들 수 없는 자들은 비밀스러운 통로로 진입하는 것을 결코 막을 수 없습니다. … Continue reading 엔젤 스테이크 20

양과 장미 18

스승의 날에 그녀는 선생님을 위해 편지를 썼다. 편지를 읽고 그는 당황해 굳은 얼굴로 그녀를 불렀다. 그는 이 말을 하기까지 많이 고민했다고 했다. 그는 부드럽고 정확한 발음으로 그녀가 얼마나 무례하고 얼마나 못된 아이이고 그녀의 문장들이 얼마나 병신같고 얼마나 시시콜콜하고 얼마나 미쳤고 얼마나 구질구질한지 하나하나 조목조목 설명해준다. 그는 그녀가 울음을 터뜨릴까 봐 걱정하며 모두 그녀를 위한 말이라고 … Continue reading 양과 장미 18

양과 장미 17

Act. 25. 하얀 에나멜 색 이빨들을 드러낸 채로 돼지들은 씩 웃고 있었다. 김현경은 실패하고 말 것을 예측했다. 그녀는 바보가 아니었으니까. 그녀가 내기를 해야 했다면 그녀는 실패하는 쪽에 걸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투자할 수밖에 없었다. 돼지들은 웃고 있었다. 유혹하듯이, 그녀를 초대하듯이. 김현경은 오디션 지원 서류들을 수백 군데 제출했다. 기업에 자소서를 뿌리는 취업준비생, 혹은 절망적으로 원고들을 출판사에 … Continue reading 양과 장미 17

백야

오이디푸스의 저주 메아리 울리는 안개 바다에서귀신들은 날 적부터 귀신이었다동굴의 향일한 사랑 기꺼이 사산하고창백해진 윌리들은 안개를 뒤적이며 수음한다지겨운 상실을 목도하러 땅 끝에 주렁주렁 매달린 관중들 앞에서태양은 안티고네의 신방에 볕 째로 묻히고 귀머거리 노인들이 도로 게워낸 유언의 미광만이무지개의 미련으로 잔존했다볕의 음부는 덜 썩어 뜨끈했다폴리네이케스의 질구는 오랜 비극을 시음해 보려는미식가들의 혀에 으무른지 오래였다차라리 오빠 자궁으로 안티고네는 오빠를 낳았다오이디푸스는 … Continue reading 백야

양과 장미 16

Act. 17. B는 비둘기처럼 쉽게 믿었다. 그녀가 그 애의 친구가 될 것이라고. 결정적인 순간 그 애는 배신당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애를 배신할 수 없었다. 앨리스는 이제 B의 존재를 확신할 수도 없었다. 그 애는 그녀가 만들어낸 인물일지도 몰랐다. 모르겠다. 그 애를 찾아볼 수 있는 곳은 오직 그녀의 텍스트와 기억뿐이었으니. 초등학교 졸업사진에도 B는 없었다. B는 졸업하기 전에 … Continue reading 양과 장미 16

양과 장미 15

Act. 25. 김현경은 수십 년 전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삶은 집요함으로 요악될 수 있다. 그녀는 사랑에나 어울리는 집요함으로 불가능을 갈구했다. 그녀는 (자칭) TV 칼럼니스트이자 (자칭) 여배우였다. 7살 무렵부터 그녀는 TV 편성표에 맞추어 하루를 분할하였다. 원하는 프로그램을 보기 위해 새벽부터 일어나 TV 앞에 앉아 있을 정도였다. 그녀의 부모는 다정한 사람들이었으므로 그녀의 방에 작은 사과 박스 같은 … Continue reading 양과 장미 15

양과 장미 14

Act. 23. 그녀는 종교를 만들 것이다. 자비와 원한, 용서나 복수와는 무관한 사랑으로 짜인 종교를. 아무도 다른 누군가를 원망하지 않으므로 신은 누군가를 대신해 희생할 필요가 없다. 신이 희생하지 않으므로 사람들은 무한한 죄책감이 둥둥 떠다니는 허공을 향해 기도할 필요가 없다. 신은 그 누구도 용서할 필요가 없다. 아무도 용서받을 필요가 없다. 용서 없는 사랑들. 수업이 끝난 뒤 앨리스는 … Continue reading 양과 장미 14

양과 장미 13

Act. 22. 백내장 걸린 눈동자처럼 흐릿한 거울 앞에서 앨리스는 그녀가 준비한 긴 대사를 읊었다. 거울은 창문이 아니어서 바깥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려주지 못했다. 달걀 노른자가 묻어 질척거리는 소맷자락으로 그녀는 눈물을 닦았다. 희망 없음 희망 없음 희망 없음 희망 없음 희망 없음 희망 없음 그녀는 그녀의 엄마고 그녀의 아이며 그녀의 남편이고 그녀의 아빠며 그들의 가능한 모든 관계들이다. … Continue reading 양과 장미 13

양과 장미 12

Act. 21. 암쥐는 교실의 비밀스러운 틈 속에서 울고 있었다. 그녀의 눈물이 사진들 위로 떨어졌다. 붉거나 보랏빛이거나 검거나 갈색으로 벌어진 음부들의 이미지들 위로. 그것은 실종된 소녀들의 사진들이었다. 사진들의 뒷면에는 소녀들의 이름이 필기체로 적혀 있었다. 불온한 농담처럼. 암쥐는 소녀들의 음부 위에서 흐느끼며 수음했다. 그녀는 쥐들이 실종된 소녀들보다 그녀를 먼저 발견하기를 바랐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듯이 큰 소리로 찍찍거리며 … Continue reading 양과 장미 12

엔젤 스테이크 19

여자는 맞다고, 정말로 TV는 짐승들을 미치게 만든다고. 즉, 신을 망각했던 짐승들을 신과 같은 상태로 만든다고 말했다. 녹색 바다의 왕은 천체 망원경에 광적인 시간 혹은 망상이 들어 있다고 믿어서 천체 망원경들을 사형에 처했죠. 사형 집행자들은 천체 망원경을 가장 더러운 구둣발로 밟아 모욕하였고 망가진 기계장치를 불태웠어요. 망원경의 잔해에서는 역겨운 기름 냄새가 진동했는데 태우고 남은 재를 왕은 가장 … Continue reading 엔젤 스테이크 19

양과 장미 11

(여기, 여자이고 중학생인 A가 있다. 그녀는 인스타 스타를 꿈꾼다. 그녀는 고화질로 촬영한 셀카들을 포토샵으로 편집하여 눈부시게 아름답게 바꾸어놓았다. 그녀가 사진들을 인스타 계정에 올린다. 그녀는 그녀의 본래 얼굴을 알아차린 누군가가 그녀에게 욕설을 퍼붓기를 황홀함에 가까운 긴장 속에서 기다린다. 고발당하기를, 폭로당하기를, 어둠 속에서 벌겋게 만개해서 진물을 질질 흘리는 비밀들을 모조리 들켜버리기를 기다린다. 그러나 아무도 그녀의 인스타를 팔로우하지 … Continue reading 양과 장미 11

양과 장미 10

Act. 16. 앨리스는 악몽을 유달리 좋아했다. 악몽에는 그녀만을 위해 준비된 카메라들과 그녀를 위해 안배된 배역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목을 서서히 조여오는 서늘한 질식감이 그녀를 집요하게 추적했고 귀신의 응시들이 그녀와 동반했다. 독이 든 사과와 함께 주어지는 죽음은 부드럽고 절박하고 달콤했다. 악몽 이후에도 악몽처럼 존재할 수 있다면 그녀는 황홀로 멎어버렸으리라. 악몽 속에는 그녀를 원하고 그녀를 죽이고 싶어하는 하얀 … Continue reading 양과 장미 10

고등어잡이

올해 고등어잡이는 풍작이다 못 팔고 남은 고등어들은 여분의 유언을 섞다가푸른 등 수줍게 붉히며 썩어갔다서로의 여운이 버거운 생선들갈무리 못 한 바다 비린내찬 살 녹아가면배 곯은 새끼들은 제 살을 삼킨다어부들이 그물을 펼쳤을 때침이 묻어 상해버린 고등어 허파에서는고등어 비린내가 났다안개도 없이 서린 숨이 역겹던 어부들은 질식사했고터진 허파에서 새어나던 어부 비린내겨우내 너희 비린내를 동결시켰던살과 숨이 물러가며 흘린 비린내봄 내내 … Continue reading 고등어잡이

양과 장미 9

Act. 15. 옷장 속에서 앨리스는 글을 쓴다. 노트북 화면의 불빛이 그녀의 매끄러운 표면을 날카롭게 찌른다. 불가능한 갈망의 우울한 쾌락 속에서 그녀는 (아마) (영원히) 알려지지 않을 것들을 쓴다. (영원히)의 괄호를 허물기 위해서는 몇 단계의 물리적인 변화가 필수적이다. 1. 마조히즘적 죽음충동의 사디즘적 가공(이리가레) 2. 자살에 선행하는 타살 3. 음부의 봉합. 모든 구멍들, 뻐끔거리며 혐오스러운 비명을 속삭이는 구멍들의 … Continue reading 양과 장미 9

양과 장미 8

앨리스, 삶은 그녀의 것이 아닌 에피소드들이다. 참을 수 없이 외로운, 그러나 견디어지는. 계속되는 견딜 수 없음. 그녀가 히스테리컬하게 헤집어 찢어놓고 있는 구멍에서 벌건 피와 진물이 질질 흐른다. 그것은 그녀의 것이 아닌 에피소드들이지만 그녀의 것처럼 아프다. 앨리스, 그녀는 히스테리 여자다. 그녀가 꺽꺽거리면서 신음하는 언어를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녀는 가족의 길게 벌어진 상처지만 스스로 봉합된 척을 할 … Continue reading 양과 장미 8

양과 장미 7

ACT. 12. 그는 결코 알 수 없을 것이었다. 그가 사랑한 것이 거짓된 죽음임을, 그가 그녀를 모방하는 데 영원히 실패했음을. 로미오가 줄리엣의 몸을 끌어안는다. 그녀의 심장은 멎었고 숨은 새어나오지 않는다. 그녀는 죽었다. 그녀 입술의 채도 낮은 보랏빛과 영원한 잠으로 감긴 눈. 그의 품에서 움직이지 않는. 그는 이전에 그녀를 그리 사랑하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내장이 울렁거리며 엉망으로 엉겨붙는다. … Continue reading 양과 장미 7

양과 장미 6

간혹 두 곡의 놀랄 만큼 유사한 전개를 들으면서 놀라곤 해. 딜루젼 레벨이라는 말은 Airen의 글을 훔친 헬레네 헤게만에게서 훔친 것이다. 그녀는 딜루젼 레벨이 아니라 리얼리티 레벨이라고 했지만. (그렇지만 앨리스에게는 현실 감각따위 없다.) 헬레네 헤게만. 그녀는 벌써 자기 작품으로 끝내주는 영화를 한 편 찍었다. 그녀는 천재 감독이고 천재 여배우고 천재 작가이다. SCENE 01. 정장과 드레스를 걸친 … Continue reading 양과 장미 6

양과 장미 5

ACT. 10. 정민 : 나 아파 너무 아픈데 그래도 여기 있을래. 여기 있게 해줘. 은수 : 왜? 정민 : 사랑하니까 은수 : 넌 고통을 사랑하게 된 것뿐이야. 정민 : 여기 있을래. 은수 : 여기가 어딘데? 정민 : 우리집 은수 : 나한테 말할 필요 없어. 정민 : 여기 있게 해줘. 은수 : 나한테 말할 필요 없다고. … Continue reading 양과 장미 5

엔젤 스테이크 18

재판정 내부는 시체 안치소처럼 추웠다. 여자는 어깨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남자아이는 여자에게 긴장하지 말라고 거듭 중얼거렸지만 그런 위로는 변호사에게 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변호사의 창백한 얼굴은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변호사는 습관적으로 웃옷을 더듬다가 셔츠에 주머니가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깨달은 듯 당황하며 셔츠 소매로 얼굴을 닦았다. 그들이 재판정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동안 회랑을 … Continue reading 엔젤 스테이크 18

양과 장미 4

Act. 1. 살인자가 떠나간 현관. - 절실한 이해자를 찾는 일만큼이나 절실한 타자를 찾는 일은 불가능하다. - 앨리스 - 우리는 너무 죽어 있어 - 우리는 너무도 이상한 뒤틀림 읽어낼 수 없는 균열 아주 평범한 너무 이상해서 평범한 - 여자가 떨어지고 있다 프레임에서 조각난 살들이 떨어지고 있다 떨어지고 있다 - 한 쌍의 검은 눈. 앨리스가 식탁에 앉는다. … Continue reading 양과 장미 4

양과 장미 3

영화 개봉일까지 그녀는 기다려야 했다. 시사회 초대권을 받지도 못했고 시사회 티켓을 구하지도 못했다. 그녀는 신년 그리고 또 신년을 멍하니 기다렸다. 촬영팀이 오지 않을 때도 그녀는 매일 같은 자리로 출근했다. 그녀는 새벽과 아침과 점심과 저녁과 밤 내내 기다렸다. - 난 벌을 받아야 해 - 앨리스는 자기 입을 때리면서 흐느꼈다. - 엄마 난 벌을 받아야 해 - … Continue reading 양과 장미 3

공시의 문법

<월간문학, 2022년 12월호> 역 앞 베이커리에서는 오토바이 사고가 난다영영 망가지고 있는 유리창 속에서살려줘요 살려줘요이름 잃은 야광별 다닥다닥 늘러 붙은 헬멧에서리 드는 유리조각덜 구운 젤라틴 단내굶어 죽은 마음들은 빵내음이 역겨워너를 쫓아내 버렸다 귓불 아래 덜렁대는 비명은멀리 길 잃은 별유언도 없이 주름진 낯 그대로박제된 늙은 별이질질대었던 소음싸구려 야광별 스티커 조각내던 새벽덜 저문 어둠이 징그럽던 낮들그 소리가 부끄럽고 … Continue reading 공시의 문법

양과 장미 2

Act. 5. ​ ​ ​ 살인자가 가까운 교회에 들어간다. 기도한다. 성상이 불안하게 경련하다가 깨진다. 돌 밑에 잠들어 있던 천사가 흐느적거리며 살인자의 앞까지 기어 온다. 희고 깨끗한 깃털들이 남자의 얼굴을 간지럽힌다. 살인자의 눈에서 피가 흘러나온다. 천사의 날개 끝이 피로 젖어든다. 붉게 변한 깃털이 남자의 얼굴 위에 붉은 선들을 덧그린다. 자살처럼, ​ 용서할 수 없이 아름다운. ​ … Continue reading 양과 장미 2

양과 장미

앨리스가 처음 살해당하던 날은 그녀의 생일이 아니었다. 그녀의 마지막 날도 아니었다. 그녀는 정오 즈음 일어나 창밖을 일정한 보폭으로 지나가는 행인들을 바라보며 글을 쓰고 있었다. 습관적으로 인터넷 검색창에 그녀의 이름과 닉네임과 그녀가 기억하는 그녀에 대한 온갖 세부사항들을 검색하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하늘은 파랬고 그녀는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 현기증으로 기어드는 개미 떼들의 매스꺼운 행렬처럼. … Continue reading 양과 장미

소녀의 물방울

그녀는 조용함을 훈련받았다. 작은 울타리 내부에서의 세계는 끔찍하게도 고적하였으나 이곳에서의 울음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녀의 울음을 반향하는 대답도, 사물의 시체들을 되비추는 흔적도, 엄습하는 침묵을 밀어내는 소란도 여기에는 없었다. 울타리는 그리 높지 않았으나 소녀는 울타리를 넘어설 수 없었다. 울타리 바깥의 세계는 진열장 유리에 가로막힌 것처럼 단단하고 차가웠다. 소녀는 투명하게 가로놓인 테두리의 내부와 외부가 다른 세계라는 것을 … Continue reading 소녀의 물방울

숲 속의 자살자의 물방울

당신은 4월 5일 오후 2시까지 호텔 람세스에 오라고 했다. 편지는 받자마자 찢어버렸다. 당신의 초대에 응한 것은 특별한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자살자의 폐속에 뿌리를 박아넣은 나무의 생에 특별한 이유가 없듯. 내게는 차가 없었기에 호텔까지는 걸어서 갔다. 그곳까지 가는 길에는 두세 개의 숲이 있었고 두 번째인지 세 번째인지 기억나지 않는 숲에서 나는 길을 잃었다. 밤과 어둠과 습기, … Continue reading 숲 속의 자살자의 물방울

샴쌍둥이의 물방울 2

그녀의 푸른 혀 밑에서는 개구리의 시꺼먼 다리가 설탕처럼 진한 향기를 풍기며 녹아가고 있었어요. 나는 아무것도 용서할 수 없었고 용서함으로써 내 안에서 내보내는 일도 없었죠. 그래서 의사는 그녀의 머리를 절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했을 거예요. 의사는 썩어가는 그녀와 함께 죽어가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어요. 당신들은 내가 가엾다고 했죠. 그녀의 아름다움은 돌이킬 수 없는 불치의 병으로 변해버렸으니까. 어쩌면 그녀는 … Continue reading 샴쌍둥이의 물방울 2

엔젤 스테이크 17

1번 채널은 뉴스 채널이었다. 검은 정장을 차려입은 여자가 창문닦이 남자의 살해 사건을 보도했다. 소녀들과 남자아이는 여자 주변에 그림자처럼 모여들어 함께 TV 화면을 응시했다. 그곳에 비밀스러운 암호들이 감추어져 있는 것처럼, 혹은 투명한 투계를 바라보고 있는 군중들처럼. 아나운서는 청소 노동자가 49세의 남자이며 죽음 당시에 5명의 아이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고 보도했다. 그는 고층 빌딩의 창문을 닦고 있었으며 로프를 … Continue reading 엔젤 스테이크 17

샴쌍둥이의 물방울 1

당신이 쓴 글을 읽어 봤어요. 내가 자기혐오에 못 이겨 언니를 죽였다고요. 내가 나를 죽이듯이, 종려나무에 목을 매고 검은 호수에 뛰어들고, 축축한 전선을 맨손으로 움켜쥐고, 처량하게 흐느끼는 사자 우리에 맨몸으로 들어간 것처럼 그렇게 자살을 한 거라고요. 소년이 알을 깨고 나오듯이, 소녀가 배설해낸 알을 무참히 깨뜨리며 세계로 진입하듯이 그렇게 내 경계를 부수고 삶으로 나온 거라고요. 지하실에 갇혀 … Continue reading 샴쌍둥이의 물방울 1

쥐의 물방울

그녀의 안에서 최초의 사유가 발발하는 순간, 태양은 여느 때와 같이 검고 축축했다. 반신이 잘린 지렁이들은 하수구 내부로 기어들고 있었고 검거나 더 검거나 더 검은 어둠이 술렁이고 있었으며 모든 것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소녀는 처음으로 절망했다. 잿빛 터럭 사이에 밤처럼 검은 눈이 달린 다른 시궁쥐들과 그녀가 다르다는 것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처음, 갈대처럼 등이 … Continue reading 쥐의 물방울

떨어져나간 깃털을 모아 하늘의 눈을 실어 나르려 했던 포유동물의 물방울

그의 눈은 달처럼 희어서 난 별을 세던 어린 강아지들처럼 UFO를 타고 낯선 사막으로 도망치던 미국애들처럼 그의 눈을 타고 먼 곳으로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요. 먼 곳. 아주 먼 곳. 비행기를 타도, 유람선을 타도, 길거리를 지나다니던 황금빛 사자들이 지프차를 부수고 그 속에서 움틀거리는 고깃덩이의 팔을 찢어내어도 도달할 수 없는 곳. 수만 편의 시를 써도 … Continue reading 떨어져나간 깃털을 모아 하늘의 눈을 실어 나르려 했던 포유동물의 물방울

선생님,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피를 마시고 자랐어요

콩쥐는 옹이 구멍에 꿈을 누었다오줌이 산맥을 적시었다 공주의 꿈냄새를 맡고 초혼된 왕자는 밤눈이 어두웠다물렁한 질에서 팥쥐를 낳던 밤에야계모는 낡은 집 그득 들어찬 왕자 무리를 보았다구원을 어음받고 기어든 두꺼비들이 두 다리로 걸어 나가고앉은뱅이들이 프로이트에게 히브리어를 가르쳐대는 아수라장에서갓 난 팥쥐는 어미처럼 왕자를 믿었다아비를 닮아 팔다리 하나씩은 유령이었지만세 손 세 발 타고 난 탓에 누구도 이상히 여기지 않았다다만 … Continue reading 선생님,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피를 마시고 자랐어요

살해자의 물방울

나는 정말이지 참아야만 했다. 보이지 않는 바닥을 술렁거리며 기어다니던 개미들이 달을 찢어발기고 내 신발 위로 타고 올라와 내 맨발을 찢어발겨도 나는 참아야 했다. 내가 작고 부드러운 발가락이 잡아 뜯기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면 이모들은 낄낄거리면서, 무슨 일이니. 설마 겨우 개미 때문은 아니겠지. 귀여운 루시, 하고 물었다. 나는 개미를 고발할 수도 비난할 수도 없었다. 개미에게는 … Continue reading 살해자의 물방울

사육사의 물방울

각자의 사료통에 고개를 쳐박고 먹이를 먹고 있는 세 마리 짐승들. 그들의 궁둥이와 그 바로 앞에 놓인 먹이통에 머리를 쳐박고 쩝쩝대며 오물을 마시듯 삶을 흡입하고 있는 그것들 사이의 놀랍도록 천박하고 정확한 경계를 사육사는 알아야 한다. 한 마리의 개가 돼지의 뒷발 앞으로 고개를 내밀면 돼지는, 그 순응적이고 부드러운 살은 순식간에 포악한 육식짐승으로 돌변하여 가련한 침범자의 머리를 물어뜯고 … Continue reading 사육사의 물방울

복제의 물방울

연구기관에서는 보통의 사람과는 다른 방식의 사고와 창조를 하는 특별한 인물들, 특히 지식에 대한 사드적 욕망을 가지고 있는 자들을 몇 명이고 복제해내기를 원했다. 수십 명의 벤야민과 수십 명의 헤겔, 수십 명의 미켈란젤로가 각자의 창작에 몰두할 수 있도록. 쉽게 짐작할 수 있듯 혹성은 포화 상태가 되었고 인구 조절 문제가 가장 시급한 화제로 변하기에 이르렀다. 보건복지부 장관이었던 프란츠 … Continue reading 복제의 물방울

항해의 물방울 2

그가 낡아빠진 방수시트 위에 드러누워 구석자리에 정육점 고기처럼 매달린 보랏빛 젖을 바라보고 있을 때 똑똑하던 노크소리. 거울을 깨고 나오는 태아의 울음소리처럼 섬뜩하고 애석한 노크소리. 이등 항해사는 늪처럼 끈적이는 입을 벌려 긴히 할 이야기가 있다고 속삭였다. 그 순간 선장은 모든 것을 직감했다. 장마의 전조처럼 떨어져내리는 물방울 두 방울. 화부는 선장의 부름을 받고 조타실로 올라갔다. 어둠 속에 … Continue reading 항해의 물방울 2

항해의 물방울 1

하나의 이야기가 언제 끝나는지 소녀는 도저히 물을 수 없었다. 아이들의 웅성거림은 치명적일 정도로 커져간다. 선생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귀를 틀어막는다. 안 되겠어, 이렇게 시끄러운 곳에서는 예술을 할 수 없어. 간신히 잡은 천사도 박쥐도 나방도 도망가 버릴 거야, 날개란 날개는 전부 도망가 버릴 거야. 선생은 갑자기 고개를 쳐들고는 교단으로 성큼성큼 걸어올라가 죽은 화부의 사진을 노란 원형의 … Continue reading 항해의 물방울 1

아름다운 소녀의 물방울 3

그들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지쳐 있었다. 당장에라도 저년을 잡아넣으려면 일단은 시체를 찾아야 할 것인데 어느새 그녀는 다시 울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녀가 눈물을 닦다가 오른손날에 묻은 잉크가 지워질까봐 허둥거릴 정도로 멍청해졌다. 소녀들과 여자들은-간혹은 소년들- 그들에게 일거리를 던져주기 위해, 오직 그들의 불면을 연장시키기 위해 도처에서 매일같이 죽어가는 것 같았다. 어찌나 자주 죽어가던지 한 번이 아니라 두 … Continue reading 아름다운 소녀의 물방울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