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11년 3월 4일

i11년 3월 4일 그 애가 또 말을 걸었다. 하지만 쉬는 시간에 말을 걸지는 않았다. 점심시간과 하교시간. 그 외의 시간에 그 애는 다른 애들을 보고 있었다. 친구를 가진 다른 애들이 말을 걸기 시작하면 그 애는 더 이상 내게 말을 걸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 그 애의 이름을 알아내려 애쓰지 않아도 될 것이다. 하얀 원피스를 입고 있는 … Continue reading i11년 3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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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착같은 장미들』에 대하여

​ 소녀는 인어를 갖고 싶어한다. 남자가 해산물로 볼 뿐인 인어를, 소녀는 폭력적일 정도로 원한다. 소녀의 욕망, 소유하려는 욕망은 폭력적이다. 그 욕망의 폭력성이 소녀를 아프게 한다. 학대받는 소녀들이 가지고 있는 욕망, 아무도 보려고 하지 않았던 욕망. 감미로운 고통으로 분명히 그녀들에게 속해 있는.​ 그런 불가능한 욕망을 소설의 발화자들은 꺽꺽거리면서 말한다. 말이 되지 않는, 말이 될 수 없는 … Continue reading 『악착같은 장미들』에 대하여

i11년 5월 7일

i11년 5월 7일 ​ 그 애의 집에 갔다. 우리는 함께 TV를 보았다. 그 애의 엄마는 주방 식탁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시를 쓰고 있는 거라고 그 애가 말했다. 우리는 29번 채널을 보았다. 세 마리 돼지가 늑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장면은 없는 거냐고 나는 투덜거렸다. 다른 장면도 있어. 그 애가 말했다. 저녁 9시가 지나면 옷장에서 외과의가 돼지들의 … Continue reading i11년 5월 7일

i11년 3월 3일

i11년 3월 3일 ​ 그 애는 작년 담임선생님과 내가 함께 있는 걸 봤다고 말했다. 현기증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건 비밀이야. 나는 그 애에게 말했다. 하지만 어째서 비밀이어야 하는가? 집에 와서 혼자 울었다. 나는 비밀을 원치 않았는데, 어째서 비밀이어야 하는가? 그 애가 내게 말을 거는 게 싫다. 벌레 먹은 과일을 주워 먹듯이 나와 함께 … Continue reading i11년 3월 3일

a-5년 7월 2일

a-5년 7월 2일 ​ ​ 아이는 내게 무얼 하느냐고 물었다. 난 시를 쓴다고 말했다. 시가 뭐냐고 그 애가 물었다. 나는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말하면서 구역질이 났다. 아이는 점점 많은 것들을 묻기 시작했다. 아이와 나는 교차로에서 만났다. 내가 아이를 들어올리던 순간, 아이가 나를 들어올리던 순간을 우리는 끝내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시는 갈수록 어려워진다. 강박적으로 … Continue reading a-5년 7월 2일

i11년 3월 3일

i11년 3월 3일 ​ ​ 머리가 조약돌처럼 둥글고 새까만 남자아이가 내게 말을 걸었다. 그 애는 내가 처음에 앉았던 자리, 맨 끝 줄의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안녕? 내 이름은 ...이야. 그 애는 교과서에 나오는 대화문을 읊듯이 말했다. 그 애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애는 내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 애는 반 아이들의 이름을 전부 … Continue reading i11년 3월 3일

i11년 3월 2일

i11년 3월 2일 오늘부터는 정규수업을 하는 날이었다. 세계사와 수학, 영어, 국어, 미술 수업을 받았다. 교사가 아즈텍 문명에 대해 설명하는 동안 나는 교과서에 실려 있는 사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즈텍의 유리 피라미드 꼭대기에서 피를 흘리며 녹아가는 태양의 그림은 천사처럼 아름다웠다. 태양신은 매일 태어나 지평선을 질주해야 하므로 우유를 마시는 갓난아이처럼 많은 피를 필요로 한다고 담임교사는 말했다. 수학과 영어 … Continue reading i11년 3월 2일

i11년 3월 1일

i11년 3월 1일 ​ ​ 작년 담임선생님은 내게 남들에 대해 생각하라고 했다. 난 반 아이들의 이름을 잘 외우지 못한다. 수업 시간에 종종 잠을 잔다. 잠을 자고 있을 때는 오렌지빛으로 팽창하는 은하의 꿈을 꾼다. ​ 맨 끝줄에 앉았다. 창가 자리였다. 하지만 곧 자리를 옮겨야 했다. 청소 시간에 책상과 의자들은 모서리가 잘려나간 별처럼 어지럽게 늘어져 있다. 자기소개를 … Continue reading i11년 3월 1일

엔젤 스테이크 3

쥐는 미시적인 생물들-날파리들과 곰팡이, 음지식물-밖에 없는 음험한 검은 골목에 차를 대고 운전석 시트를 뒤로 젖힌 뒤 여자 쪽으로 건너와 여자의 머릿가죽을 물어뜯었다. 그의 붉고 더러운 성기가 여자의 어린 성기 속을 파고들었다. 남자는 피투성이의 신경 덩어리를 날카롭고 정밀하게 베어내었고 여자는 피로 침수된 기계장치 속에서 온실 속의 빙하처럼 멍청하게 떠다녔다. 저열한 전류의 파동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여자는 속삭였다. 여름방학 때 난 교실에 … Continue reading 엔젤 스테이크 3

달나라行 분홍 로켓 돌연사

갑작스런 무기력에 뇌수를 게워내고 순교한하이-브리드 음속의 탈것에서한 쌍 청년이 흘렀다지쳐버린 청년들 권태에 전염되어관성조차 잊고 조용히 쏟기었다243년 전에 죽은 어린 별만 끼이익비명지르고 있다 플라스도 레비도 모르던 두 쌍둥이 성운만말갛게 얼어 분홍과 파랑 백조자리가 되었다그보다 늙은 청년에게 분홍은 차라리 없는 색이다톨레렁-스 별나라 공주님 왕자님 DNA에 각인된사이-보그 형질 개화해버릇처럼 변신하기에는 권태로운 청년들은폐된 불안을 숨겨 놓은 베이커리에서남의 베이킹소다를 훔쳐 … Continue reading 달나라行 분홍 로켓 돌연사

사라 케인

Crave M : 흑인 소녀가 주차된 차의 조수석에 앉아 있어. 그녀의 나이든 할아버지가 바지를 벗어. 그리고 그게 바지에서 튀어나와. 크고 보라색인. C : 난 아무것드 느끼지 않아, 아무것도, 아무것도 느끼지 않아. A : 그리고 그녀가 울 때, 뒷자석에 있는 아빠가 말해. 미안해요. 얘가 원래 이렇지 않은데. ​ Phaedra's Love (테세우스가 자기 딸인 것을 못 알아본 … Continue reading 사라 케인

엔젤 스테이크 2

몽상과 악몽의 꿈이 내게는 훨씬 직관적이며 즉물적인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직관과 즉물은 환상이에요. 모든 것은 매개되어 있으며 심지어는 꿈이나 환상과 같이 추상적인 이미지조차도 그렇죠. 여자는 초조하게 중얼거렸다. 난 응급실에서 살며 수혈을 하는 늙은 개에 대해 적었어요. 그건 내가 유년부터 반복해서 꾸던 집요한 악몽이었죠. 꿈 속에서 나는 붉고 축축한 피를 예고 없이 뽑히는 가엾은 개였고 동시에 그 개의 배에 날카로운 바늘을 꽂고 … Continue reading 엔젤 스테이크 2

우산

유령이 하혈하는 저녁에는 고래 비린내가 난다난쟁이는 우산을 쓰고 빗속으로 기어든다첫 생리로 흐느끼는 유령들이 질질대기 전에어디로든 숨어야 한다풋내기들은 상처를 떠벌리려 운다여직 덜 무른 살점과 기억으로 아장아장달 먼 밀물에도 어미 없이 앓는 걸음마가라앉은 노인들과 떠오른 갓난애들 배에서는혀 풀린 유언이 샌다머리카락 머리카락 머리카락유령을 믿는 유령마저 잊어버린머리카락 머리카락 머리카락이제는 물거품 뿐이다 꼬마들 민머리 유령을 노래하고유족들 유전될 탈모증 은근히 걱정하는짠물에서는 … Continue reading 우산

엔젤 스테이크 1

나는 학대당한 틴에이저. 사실 나 자신은 스스로 완벽하게 만들어낸 오만하고 버르장머리 없는 피학대 청소년의 역할을 마음껏 즐기고 있다. 이것이 내 삶이다. 네 글은 로드킬 같아, 미프티. (헬레네 헤게만, 혹은 미프티 in 『아홀로틀 로드킬』.) 기꺼이 미치는, 가장 붉은 여자들에게. 그녀는 피해자이며 동시에 가해자였다. 빌어먹을, 그녀는 미성년이었다. 열다섯 혹은 열넷, 혹은, 아무도 그녀가 무엇인지, 그녀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 자신조차도. 왜냐하면 … Continue reading 엔젤 스테이크 1

내일의 하루살이들 15회

빛에 교살당한 어둠이 드러나는 날 사내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무덤가를 건넜다. 너를 보고 있었어. 노래를 불러야 할 입술이 여물기 전부터, 하나뿐인 음악이 시작되기 전부터. 빛의 언저리를 날벌레처럼 떠도는 하얀 먼지들이 제 자리를 찾아 가라앉기 전부터. 여자는 사내의 노래만을 듣고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 깊은 밤이라 사내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밤보다 시꺼먼 개가 사내의 왼쪽 귓바퀴를 물어뜯었을 때에도 … Continue reading 내일의 하루살이들 15회

초콜릿 레시피

열대의 거미는 초콜릿으로 그물을 짓는다 갑작스레 비어버린 초콜릿 공장에서는 초콜릿 열매 그 내밀한 살결을 태워내는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초콜릿색 연기를 들이켰다 초콜릿 냄새가 났다 따끈한 살이 녹아가는 비린내 낯선 열매의 재는 달았다 너무 달아서 그걸 마시고 조금 살이 쪘던 아이들 부른 뱃살은 초콜릿 살결 성급히 포장된 초콜릿들은 얼굴이 안으로 곱아든 불량이었다 질질 끌려가면 찢긴 … Continue reading 초콜릿 레시피

내일의 하루살이들 14회

그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소리와 함께 할 때처럼 불을 켜고 책을 읽었는데 참을 수 없는 육성의, 그녀의 지친 목소리에 치를 떠는 중 눈앞에서 쥐색 머리칼을 쥐어뜯고 있는 노인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그녀는 곧 거울 속에 비친 그녀가 자신의 육성이었으며, 그 거울 때문에 혼잣말이 그대로 되비치는 것이었음을 깨닫고 들고 있던 책을 원시 시대의 돌망치처럼 사용해 거울을 내리찍어 산산조각냈다고 … Continue reading 내일의 하루살이들 14회

명왕성의 열대

없는 행성에 불시착한 너희헤엄쳐야 한다이상기후에 조숙한 열대 주민들알알이 익어 떨어지거든과일들이 저를 쪼개는 소리 저를 삼키는 숨결야광 과즙에 물들던 낯선 물달려드는 날벌레도 낯선 야광이라 쉽게 들키는 열대의야간 수영 먼저 가라앉은 과일의 향토병을나누어 마시던 너희는쉬운 야광 들켜버린 맛질질댄 과즙 자꾸만 되삼키느라목 마른 줄도 모르고자꾸만 토해내던 울음에헤엄길은 쉬운 야광 네게 고여든 너를 흘려보내던 물질잊힌 행성의 과일은 잊힌 맛이라삼키는 … Continue reading 명왕성의 열대

내일의 하루살이들 13회

소리. 모두가 너를 두고 갈 거야. 허공에서 춤을 추던 여자가 눈을 감고 발을 내저으며 달려가던 곳으로, 육체와 마음의 공간을 잊고 돌아간 순수한 공간으로, 난 너를 데려갈 수 없어. 어째서? 그녀를 가장 먼저 생각한 건 나야. 네게 내려앉은 눈송이들을 하나하나 관찰한 건, 그래서 당장이라도 눈송이들이 표상하던 비극들을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수백의 유리들을 모두 기억하는 건 … Continue reading 내일의 하루살이들 13회

조르주 페렉, 인생사용법

 한 백만장자는 그의 생애 전체를 하나의 필연적인 공백의 생산에 바치려 한다. 그것은 하나의 강박적인 프로젝트다. 한 화가는 그의 생애 전체를 아우르는 공간과 사람들의 모든 편린들을 하나의 화폭에 담으려 한다. 백만장자의 프로젝트는 다음과 같다. 그는 수채화 그리는 법을 배워 세계일주를 하며 세계 곳곳의 항구 풍경들을 그리고 그것을 퍼즐로 만든다. 이후 그는 퍼즐 제작자가 그에게 전해준 … Continue reading 조르주 페렉, 인생사용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