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의 물방울

그녀는 조용함을 훈련받았다. 작은 울타리 내부에서의 세계는 끔찍하게도 고적하였으나 이곳에서의 울음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녀의 울음을 반향하는 대답도, 사물의 시체들을 되비추는 흔적도, 엄습하는 침묵을 밀어내는 소란도 여기에는 없었다. 울타리는 그리 높지 않았으나 소녀는 울타리를 넘어설 수 없었다. 울타리 바깥의 세계는 진열장 유리에 가로막힌 것처럼 단단하고 차가웠다. 소녀는 투명하게 가로놓인 테두리의 내부와 외부가 다른 세계라는 것을 … Continue reading 소녀의 물방울

숲 속의 자살자의 물방울

당신은 4월 5일 오후 2시까지 호텔 람세스에 오라고 했다. 편지는 받자마자 찢어버렸다. 당신의 초대에 응한 것은 특별한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자살자의 폐속에 뿌리를 박아넣은 나무의 생에 특별한 이유가 없듯. 내게는 차가 없었기에 호텔까지는 걸어서 갔다. 그곳까지 가는 길에는 두세 개의 숲이 있었고 두 번째인지 세 번째인지 기억나지 않는 숲에서 나는 길을 잃었다. 밤과 어둠과 습기, … Continue reading 숲 속의 자살자의 물방울

샴쌍둥이의 물방울 2

그녀의 푸른 혀 밑에서는 개구리의 시꺼먼 다리가 설탕처럼 진한 향기를 풍기며 녹아가고 있었어요. 나는 아무것도 용서할 수 없었고 용서함으로써 내 안에서 내보내는 일도 없었죠. 그래서 의사는 그녀의 머리를 절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했을 거예요. 의사는 썩어가는 그녀와 함께 죽어가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어요. 당신들은 내가 가엾다고 했죠. 그녀의 아름다움은 돌이킬 수 없는 불치의 병으로 변해버렸으니까. 어쩌면 그녀는 … Continue reading 샴쌍둥이의 물방울 2

샴쌍둥이의 물방울 1

당신이 쓴 글을 읽어 봤어요. 내가 자기혐오에 못 이겨 언니를 죽였다고요. 내가 나를 죽이듯이, 종려나무에 목을 매고 검은 호수에 뛰어들고, 축축한 전선을 맨손으로 움켜쥐고, 처량하게 흐느끼는 사자 우리에 맨몸으로 들어간 것처럼 그렇게 자살을 한 거라고요. 소년이 알을 깨고 나오듯이, 소녀가 배설해낸 알을 무참히 깨뜨리며 세계로 진입하듯이 그렇게 내 경계를 부수고 삶으로 나온 거라고요. 지하실에 갇혀 … Continue reading 샴쌍둥이의 물방울 1

쥐의 물방울

그녀의 안에서 최초의 사유가 발발하는 순간, 태양은 여느 때와 같이 검고 축축했다. 반신이 잘린 지렁이들은 하수구 내부로 기어들고 있었고 검거나 더 검거나 더 검은 어둠이 술렁이고 있었으며 모든 것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소녀는 처음으로 절망했다. 잿빛 터럭 사이에 밤처럼 검은 눈이 달린 다른 시궁쥐들과 그녀가 다르다는 것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처음, 갈대처럼 등이 … Continue reading 쥐의 물방울

떨어져나간 깃털을 모아 하늘의 눈을 실어 나르려 했던 포유동물의 물방울

그의 눈은 달처럼 희어서 난 별을 세던 어린 강아지들처럼 UFO를 타고 낯선 사막으로 도망치던 미국애들처럼 그의 눈을 타고 먼 곳으로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요. 먼 곳. 아주 먼 곳. 비행기를 타도, 유람선을 타도, 길거리를 지나다니던 황금빛 사자들이 지프차를 부수고 그 속에서 움틀거리는 고깃덩이의 팔을 찢어내어도 도달할 수 없는 곳. 수만 편의 시를 써도 … Continue reading 떨어져나간 깃털을 모아 하늘의 눈을 실어 나르려 했던 포유동물의 물방울

살해자의 물방울

나는 정말이지 참아야만 했다. 보이지 않는 바닥을 술렁거리며 기어다니던 개미들이 달을 찢어발기고 내 신발 위로 타고 올라와 내 맨발을 찢어발겨도 나는 참아야 했다. 내가 작고 부드러운 발가락이 잡아 뜯기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면 이모들은 낄낄거리면서, 무슨 일이니. 설마 겨우 개미 때문은 아니겠지. 귀여운 루시, 하고 물었다. 나는 개미를 고발할 수도 비난할 수도 없었다. 개미에게는 … Continue reading 살해자의 물방울

사육사의 물방울

각자의 사료통에 고개를 쳐박고 먹이를 먹고 있는 세 마리 짐승들. 그들의 궁둥이와 그 바로 앞에 놓인 먹이통에 머리를 쳐박고 쩝쩝대며 오물을 마시듯 삶을 흡입하고 있는 그것들 사이의 놀랍도록 천박하고 정확한 경계를 사육사는 알아야 한다. 한 마리의 개가 돼지의 뒷발 앞으로 고개를 내밀면 돼지는, 그 순응적이고 부드러운 살은 순식간에 포악한 육식짐승으로 돌변하여 가련한 침범자의 머리를 물어뜯고 … Continue reading 사육사의 물방울

복제의 물방울

연구기관에서는 보통의 사람과는 다른 방식의 사고와 창조를 하는 특별한 인물들, 특히 지식에 대한 사드적 욕망을 가지고 있는 자들을 몇 명이고 복제해내기를 원했다. 수십 명의 벤야민과 수십 명의 헤겔, 수십 명의 미켈란젤로가 각자의 창작에 몰두할 수 있도록. 쉽게 짐작할 수 있듯 혹성은 포화 상태가 되었고 인구 조절 문제가 가장 시급한 화제로 변하기에 이르렀다. 보건복지부 장관이었던 프란츠 … Continue reading 복제의 물방울

항해의 물방울 2

그가 낡아빠진 방수시트 위에 드러누워 구석자리에 정육점 고기처럼 매달린 보랏빛 젖을 바라보고 있을 때 똑똑하던 노크소리. 거울을 깨고 나오는 태아의 울음소리처럼 섬뜩하고 애석한 노크소리. 이등 항해사는 늪처럼 끈적이는 입을 벌려 긴히 할 이야기가 있다고 속삭였다. 그 순간 선장은 모든 것을 직감했다. 장마의 전조처럼 떨어져내리는 물방울 두 방울. 화부는 선장의 부름을 받고 조타실로 올라갔다. 어둠 속에 … Continue reading 항해의 물방울 2

항해의 물방울 1

하나의 이야기가 언제 끝나는지 소녀는 도저히 물을 수 없었다. 아이들의 웅성거림은 치명적일 정도로 커져간다. 선생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귀를 틀어막는다. 안 되겠어, 이렇게 시끄러운 곳에서는 예술을 할 수 없어. 간신히 잡은 천사도 박쥐도 나방도 도망가 버릴 거야, 날개란 날개는 전부 도망가 버릴 거야. 선생은 갑자기 고개를 쳐들고는 교단으로 성큼성큼 걸어올라가 죽은 화부의 사진을 노란 원형의 … Continue reading 항해의 물방울 1

아름다운 소녀의 물방울 3

그들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지쳐 있었다. 당장에라도 저년을 잡아넣으려면 일단은 시체를 찾아야 할 것인데 어느새 그녀는 다시 울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녀가 눈물을 닦다가 오른손날에 묻은 잉크가 지워질까봐 허둥거릴 정도로 멍청해졌다. 소녀들과 여자들은-간혹은 소년들- 그들에게 일거리를 던져주기 위해, 오직 그들의 불면을 연장시키기 위해 도처에서 매일같이 죽어가는 것 같았다. 어찌나 자주 죽어가던지 한 번이 아니라 두 … Continue reading 아름다운 소녀의 물방울 3

아름다운 소녀의 물방울 2

쓸모있는 사물은 아무것도 생산해낼 수 없는 당신들, 제 목을 맬 올가미조차도, 자신의 죽음조차도 매듭짓지 못하는 당신들, 내가 하얗고 질긴 탯줄을 내려뜨리기 전에는 자살조차 할 수 없을 당신들, 당신들은, 너무도 못생기고 무용한, 그래서 예술조차 될 수 없는 당신들은 내 아름다움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엄마는 허둥거리면서 끝맺지 못한 협박문을 움켜쥐고 울부짖기 시작했다. 딱정벌레처럼 은밀하게 밀어닥치기 시작한 경찰들이 … Continue reading 아름다운 소녀의 물방울 2

아름다운 소녀의 물방울 1

구름처럼 희고 통통한 쥐가 한 마리 지나갈 때 소녀는 소년이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쥐가 두 마리 지나갈 때 소녀는 소년이 검게 변하는 것을 보았다. 쥐가 다섯 마리 지나갈 때 소녀는 소년이 눈을 감고 죽어 있는 것을 보았다. 쥐가 열다섯 마리 지나갈 때 엄마아빠의 비명을 들었다. 너 대체 뭘 한 거니? 그리고 오빠의 대답, 여전히 흐느끼면서. … Continue reading 아름다운 소녀의 물방울 1

혼자의 물방울

살인범을 만난다고 해서 두려워할 필요는 없었으니, 어차피 소녀는 혼자였으므로, 그녀의 곁에는, 그녀의 위, 그녀의 옆, 그녀의 앞, 그녀의 뒤와 그녀의 아래, 그녀의 내부와 그녀의 외부, 그녀로부터 먼 곳과 그녀 가까이에는 아무도 없었으므로. 바라지 않는 것도 바라는 것도 아무것도 없었으므로.

공공의 자살의 물방울 3

그들은 암실에 있다. 쭈글쭈글한 암막 커튼과 투명한 레이스처럼 넘실거리는 검붉은 빛무리. 소녀는 무언가를 보았다고 믿는다. 그녀, 깨진 창문 너머로 떨어져서 파손된 휠체어의 부품이 굴러다녔고 여자 아이의 죽음을 애도하는 자들은 휠체어의 죽음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휠체어를 고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죽은 자가 입던 옷은 죽은 자와 함께 불태워야 하는 것이 맞기에, 아무도 그 휠체어, 산산조각 … Continue reading 공공의 자살의 물방울 3

공공의 자살의 물방울 2

선생의 가죽이 그녀를 굽어보며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주름이 졌다가 펴지기를 반복하는 검붉은 가죽. 너는 왜 사진을 찍느냐고 묻는 목소리. 소녀는 사진을 찍는 일을 한 번도 선택한 적이 없었음에도, 사진을 제출하라는 과제, 명령과도 같은 선언은 오로지 당신에게서 비롯된 것이었다고 이야기하는 대신, 잊고 싶어서요, 하고 말한다. 잊고 싶어서. 너는 퍼포먼스를 하려는 거니? 사라지고 싶다고? 움찔거리는 가죽주머니 사이에서 … Continue reading 공공의 자살의 물방울 2

공공의 자살의 물방울 1

인체의 코드를 복제해낼 방법을 찾게 된 이후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 존재를 백업해두기를 원했다. 생의 중요한 기억들을 저보다 단단한 사물 위에 기록해놓으려 애쓰던 오랜 습성처럼. 하지만 누구에게나 특권이 허락된 것은 아니었다. 고대부터 살아남은 글은, 삼천 년 전부터 전해져내려오는 글은 언제나 몇몇 작품뿐이었듯, 바로 이 순간 써내려가는 글이 아닌 수천 년 전에 누군가 특별한 이가 써내려간 특별한 … Continue reading 공공의 자살의 물방울 1

정신병동의 물방울

선생님,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당신은 날 진찰하려 하고 있죠? 내 분열과 광증을 분석하면서 결국에는 날 정상으로 되돌려놓으려고 하는 게 아니에요? 그게 치료잖아요. 난 기호가 아니라 몸들이에요. 아무도 내 의미를 대신 읽어낼 수 없어요. 아무도 내 의미를 변질시킬 수 없어요. 지상에서 치러야 할 일은 죽음뿐이라는 걸 숨기려 하지 말아요.

레몬캔디와 바이올린의 물방울

우린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요. 레몬캔디는 갑작스레 격분한 듯 소리쳤다. 당신이 네오소다팝시티를 없애버렸기 때문에, 디지털 세계 속에 떠돌던 우리 유령들은 형체를, 아바타를, 목소리를, 눈과 코와 얼굴 픽셀들을 모조리 잃고 사라져버렸어요. 왜 그걸 없애버린 거예요? 난 이제 돌아갈 곳이 없어요. 레몬캔디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우린 몸도 정신도 영혼도 없으니까. 우린 당신의 세계 속에서만 살아갈 수 있었는데, 우린 … Continue reading 레몬캔디와 바이올린의 물방울

현과 소년의 물방울

깊은 바다처럼 일렁거리는 푸른 빛깔의 살덩이는 아름답다. 바다는 거대하게 춤추는 푸른 살덩이이다. 벌어진 입과 푸른 물이 밀려들어가며 내는 전도된 목소리. 숨을 내뱉어 내는 소리가 아니라 살이 밀려들어가며 내는 소리. 푸른 바다의 살을 삼키며 흐느끼는 소리. 세이렌의 노래. 혹은 밤의 파도소리. 현은 소년이 바다의 살처럼 유동적인 몸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그 애의 얼굴은 날마다 다른 기류를 맞아 … Continue reading 현과 소년의 물방울

레몬캔디의 물방울 – 죄의 소외

죄를 고백하러 오는 사람 중에 진정한 살인자는 없었다고 했죠, 하고 레몬캔디가 말했다. 죄에서 어떠한 회한도, 절망도, 고독도 찾지 못한 학살자들은 한 번도 고해성사실에 찾아오지 않았다고 해요. 어느날 삼촌은 수도원 기숙사 구석에서 개들을 장난삼아 죽이던 소년을 본 적이 있었는데 그 소년은 한 번도 고해성사실에 찾아오지 않았대요. 소년이 비닐봉지, 검은 수의 속에 새끼 강아지들을 밀어넣고 매듭을 단단히 … Continue reading 레몬캔디의 물방울 – 죄의 소외

소녀와 홀로 남은 언어의 물방울

소녀는 쥐처럼 역병을 몰고 온 두 개의 상반된 이미지를 떠올렸다. 소년과 사내. 유령과 살. 죽음과 삶. 그녀가 악몽 속에서 불러들여 끌어안은 푸른 꽃의 뿌리에서 그녀가 원한 바 없이 딸려온 검고 축축한 내장을. 코코펠리의 군인들은 기어이 그 검은 숲을 차지하고 말았다. 그들은 아름답고 기묘한 언어가 흘러나오는 목들을 모두 불태웠다. 그러나 소녀만은, 황금빛 머리칼과 검은 눈 속에서 … Continue reading 소녀와 홀로 남은 언어의 물방울

검은 숲과 혁명의 바깥의 물방울

베푸는 눈, 수치를 가르치는 눈, 응시만을, 환각만을, 보이지 않는 것만을 내버리고 떠나가버린 눈. 대지의 내장 속에서 피어난 초록이 배설하는 공기를 들이마시고 또다시 배설하며 그들은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느꼈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으며, 무엇이라고 이해하고 싶다는 갈증을 느꼈지만 기실 아무것도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다만 비참하게, 무엇보다도 무참하게 살해당하고 싶었고 상처받고 싶었다. 살해하고 … Continue reading 검은 숲과 혁명의 바깥의 물방울

노인과 거울의 물방울 2

노인은 언젠가 그가 썼던 단편을 떠올렸다. 나치 부대가 생명정치로서의 우생학을 구현하기 위해 가련한 쥐들처럼 은밀한 구석자리에 숨어든 유대인들을 찾아 도시를 누비고 있을 때, 피아니스트는 청중의 부재를 의아해하고 있었다. 그가 어릴 적에는 이토록 주위가 한산하지 않았다. 그가 소나티네를, 쇼팽을, 베토벤을 매끄럽게 연주해내고 나면 누군가가 박수를 쳤고 박수 소리는 전염병처럼 순식간에 번져나갔다. 소년은 항상 열병과도 같은 연주와 … Continue reading 노인과 거울의 물방울 2

노인과 거울의 물방울 1

 노인은 거울에서 쥐 한 마리를 발견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숲에서 나고 자라면서 그는 한 번도 쥐를 본 적이 없었고 그의 집에는 거울이 없었다. 거울에 비친 쥐의 형상은 그에게 있어 이중의 불가능성을 지닌 것이었다. 노인은 그 부조리한 광경을 보지 않고 지나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혹은 보더라도 보지 않았던 것처럼 무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노인은 소스라치며 … Continue reading 노인과 거울의 물방울 1

검은 숲과 혁명의 바깥의 물방울 3

천사의 날개처럼 냉혹하면서도 감미로운 결정들을, 각자의 자리에서 돌이킬 수 없는 불연속성에 갇혀 있는 구제할 길 없는 가련한 단자들을, 아플라 위 고립된 형상들을, 단단하게 굳어가는 혀와 바이올린의 날카로운 현, 벌려진 가랑이 사이 부드러운 항문과 질의 점막과 차갑고 딱딱한 건반, 죽어버린 살갗과 살을 탐닉하는 작은 벌레의 허리를, 무력하게 버려진 새하얀 살과 살 속에 파묻혀 저를 칭칭 감아대는 … Continue reading 검은 숲과 혁명의 바깥의 물방울 3

검은 숲과 혁명의 바깥의 물방울 2

사내는 하얗고 불가해한 밀실 안에 갇혀 칙사의 열띤 연설을 듣고 있는 이 순간 역시도 생애 내도록 반복되어온 기호 중 하나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와 같이 이곳까지 밀려온 이들, 나체도 양복도 아닌, 자연도 비자연도 아닌 옷을 입고 있는 이들, 자연의 얼룩을 위장한 옷을, 자연스럽지 않은 자연의 피부를 걸치고 있는 이들도 사내와 같은 종류의 기호들에 둘러싸여 있다는 사실을 … Continue reading 검은 숲과 혁명의 바깥의 물방울 2

검은 숲과 혁명의 바깥의 물방울 1

지긋지긋한 가상훈련이 끝나던 날 그들은 총을 지급받았다. 총의 의미를 곧바로 해석해내지 못한 이들은 그들에 손에 놓인 운명을 타인의 것을 바라보듯 멍한 얼굴로 내려다보았지만 총의 즉물적인 본질을 간파해낸 이들, 손가락의 미세한 움직임만으로 목숨을 끊을 수 있다는 황홀감에 사로잡힌 이들은 입속에 총구를 쑤셔박고 축포를 터뜨렸다. 바늘에 찔린 풍선처럼 순식간에 쪼그라는 머리를, 피와 골수액, 절망과 불안, 기대와 회한을 … Continue reading 검은 숲과 혁명의 바깥의 물방울 1

코코펠리와 정복과 혁명의 바깥의 물방울 – 사내와 폭력 4

안락사 기계에 대해 생각한 건 여왕이 즉위하고 시간과 숫자에 대해 처음으로 발표했을 때예요. 난 시간을 인공적으로 측량화하는 단계에 이르렀으면 당연히 죽음의 시간도 자의적으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래요. 마치 언어처럼 말이에요. 시간이나 숫자를 익힐 때처럼 혼란기를 겪을 필요도 없어요. 아주 간단하니까. 시계 바늘보다도 간단한 원리죠. 바늘이 가리키는 숫자의 생김새와 의미를 외울 필요도 없으니까. 자, … Continue reading 코코펠리와 정복과 혁명의 바깥의 물방울 – 사내와 폭력 4

코코펠리와 정복과 혁명의 바깥의 물방울 – 사내와 폭력 3

형상과 배경 양쪽의 경계를 동시에 가르는 윤곽들 중력과 습기, 열기와 타자들에 잠식되어 짓물러가는 살에 대한 연민은 어디에도 없었다. 한때 그들은 그 모든 작용들을 서툴게 연민하는 체 하였으나 아무도 믿지 않았다. 지금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폭력이었다. 반성치 않는 폭력. 목적도 이유도 없는 폭력. 무위에 대한. 아무런 목적도 의미도 없는 문양들로 그 무용한 형상들의 관계로 비로소 … Continue reading 코코펠리와 정복과 혁명의 바깥의 물방울 – 사내와 폭력 3

코코펠리와 정복과 혁명의 바깥의 물방울 – 사내와 폭력 2

그들은 검은 숲 너머 산 위에 하얀 성당처럼 빛나고 있는 호스피스 건물에 들어섰다. 입구를 찾는 일도, 입구 안으로 들어서는 일도 어렵지 않았다. 폭도들은 버릇처럼 잔뜩 수그린 머리를 들이밀며 접수대로 다가섰다. 희게 질린 여자가 그곳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입구라면 그들은 그녀를 망설임 없이 부술 것이었다. 여자는 무언가를 직감한 듯 접수대에서 일어나 그녀 뒤쪽에 있는 하얀 벽면을 독특한 … Continue reading 코코펠리와 정복과 혁명의 바깥의 물방울 – 사내와 폭력 2

코코펠리와 정복과 혁명의 바깥의 물방울 – 사내와 폭력 1

겁탈당한 소녀가 헐벗은 몸으로, 끔찍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지르는 비명소리를 듣고 나서, 고수머리 사내는 중절모 아래에 죽어 있던 새끼 비둘기를 보았을 때와 같은 비참한 기분을 느꼈다. 사랑과 기쁨, 환희와 같은 긍정적인 단어들을 현화하고자 했던 의지가 선의지일 수 없다는 깨달음. 홀로가 되지 않기 위해, 마음껏 사랑받고 이해받기 위해 버둥거렸던 몸부림은 누군가를 해치지 않고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적막감. … Continue reading 코코펠리와 정복과 혁명의 바깥의 물방울 – 사내와 폭력 1

헤다야트와 소녀의 물방울

서로 다른 악몽을 지켜보며 밤의 찢긴 베일이 내려앉기를 기다린 그날 이후, 소녀는 종종 페터 할아버지의 오두막에 찾아갔다. 여느 살가운 손녀가 그리하듯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노인을 위해 집안 정리를 해주고 정원에 자라난 잡초를 뽑아주며, 침이 말라 굳은 더러운 입가를 훔쳐주는 일은 없었다. 소녀는 그저 고기의 냄새를 잊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내의 옆에서 그녀의 속에 있는 개의 피 … Continue reading 헤다야트와 소녀의 물방울

소녀와 가족의 물방울 – 잠자는 여자와 소문

땅거미가 꺼질 무렵 소년을 만날 채비를 하기 위해 집에 들어온 소녀는 나무문 바로 맞은 편, 통나무 식탁에 앉아 있는 여자를 보고 몸을 굳혔다. 붉은 루즈와 흰 분을 바른 얼굴이 유령의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그녀는 도시에서 사는 소녀의 고모였다. 소녀는 인사도 하기 전에 고모에게 어쩐 일이냐고 물었다. 오랜만에 고모를 만난 기쁨보다 예기치 못한 방문에 소년을 만나러 … Continue reading 소녀와 가족의 물방울 – 잠자는 여자와 소문

페터 할아버지와 소녀의 물방울

페터 할아버지는 천성적인 몽상가였다. 어렸을 적부터 거식을 앓았던 그는 아이처럼 작은 몸에 말라 비틀어져 주름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늙어빠진 소년처럼 보였다. 소녀의 부모는 매일 하릴없이 빨랫더미 옆에 앉아 붉은 하늘만을 바라보는 그를 경멸했지만 소녀는 그의 반짝거리는 눈이 응시하는 꿈의 세계를 남몰래 염탐하며 신기해하곤 했다. 그는 대기와 별에 대해 연구한다고 말하고 다녔는데 그에게 그 직업에 … Continue reading 페터 할아버지와 소녀의 물방울

붉은대기 소녀의 물방울

황홀한 심연을 굽어보는 그의 빛나는 눈, 한 줄기의 빛이 더 매혹적으로 빛나는 암흑에 파묻힌 그, 영원한 질식 속에 떨어진 소년, 소녀는 연한 물빛의 피부를 어루만졌다. 소년의 입술 속에 혀를 들이밀었다. 호수물이 그득 들어찬 소년의 입속에서는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소녀는 소년을 먹어치울 수도 그를 흙으로 덮어 묻어 놓을 수도 없었다. 소년의 하늘빛 피부는 호수의 물과 … Continue reading 붉은대기 소녀의 물방울

마술사-군인의 물방울

시간의 발명을 코코펠리 주민들은 여왕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라며 칭송했다. 그녀가 전한 수의 개념 중 시간만큼 유용한 개념은, 수천의 사람들을 살릴 만큼 쓸모있는 개념은 없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연인 사이의 만남을 순전한 우연에 치부하는 것을 거부했고, 만남의 날짜와 장소, 시간을 지정함으로써 필연적인 만남, 의도와 결부되는 만남을 가능케 했다.-물론 변덕이라는 의도에 의해 지켜지지 않는 약속들도 있었지만. 촌각을 다투는 … Continue reading 마술사-군인의 물방울

붉은대기 소녀의 물방울 – 육식

믿을 수 없어, 소녀는 계속해서 되뇌었다. 황홀하고 끔찍한 붉은 안개 속을 서성이면서. 나뭇잎들이 내쉬는 숨의 지문과 같이 새하얀 눈의 결정들이 떨어져내리던 오후였다. 소녀가 차가운 공기 속에 목을 누이고 바람이 그녀의 머리를 매만지도록 놔두는 오후, 하얀 햇빛이 붉은 대기를 뒤덮으며 부드럽게 제 뼈를 으스러뜨리는 오후, 동물들이 물컹한 외피를 공중에 파묻고 내밀한 수다를 지껄이는 오후. 그 오후, … Continue reading 붉은대기 소녀의 물방울 – 육식

코코펠리 전쟁의 물방울 – 붉은대기 혹성

버스 안에서 떨리는 몸을 다잡으며 환상과 싸우고 있던 군인들이 정복할 수 없는 혹성들로 보내질 때도 그들은 익숙한 멀미에 헛구역질을 하며 흔들리고 있었다. 군인들은 질려버린 낯으로 검은 숲 한복판에서 내렸다. 그들의 얼굴에 더 이상의 공포는 없었다. 수백 번 되돌아오는 시간 속에서 하나의 단순한 사건과 정서는 무한히 증폭되어 견딜 수 없는 무게를 가지게 되므로 그들은 두려움을 포기하였다. … Continue reading 코코펠리 전쟁의 물방울 – 붉은대기 혹성

코코펠리 전쟁의 물방울 – 지상훈련

버스는 무자비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너희는 버스 손잡이와 좌석, 창문의 깨진 유리에까지 손을 박으며 버텼다. 무척이나 어린 소년도 너희들 사이에서 바들바들 떨리는 여린 팔을 어딘가에 얹어둔 채 안간힘을 다해 중력의 품 속에 기어들고 있었다. 너희를 이곳까지 내몬 것은 중력인데도. 중력이 붙들고 있는 시간 속에 너희는 무력하게 끼어 흔들리고 있는데도. 아무도 중력을 탓하지는 않았다. 소년은 일곱 살 … Continue reading 코코펠리 전쟁의 물방울 – 지상훈련

얼룩의 물방울

어쩌면 너희는 다만 얼굴에 남아 있는 흉측한 얼룩을, 출생의 순간 너희의 얼굴에 깊이 배어들었던 붉은 피의 흔적을 지워내기 위해 얼굴을 견디며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얼룩을, 그리고 얼굴을. 사내는 식물의 벗겨놓은 피부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종이는 이미 오래전부터 죽어있었으나 그는 죽은 피부에 죽어가는 문자를 써넣는 일에 대해 죄책감을 느낄 수 없었다. 음표들은 나날이 균처럼 번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음표들이 … Continue reading 얼룩의 물방울

유령의 물방울

도굴꾼이 무덤을 망가뜨리는 순간 무덤 바깥으로 쫓겨나 있던 귀신은 살아남았다. 척박한 땅에서 쫓겨난 사람들은 이제 어디로 가면 좋죠? 무덤에서 쫓겨난 유령들은 이제 어디로 가서 죽음을 계속할 수 있나요? 이미 죽은 사람은 죽어가는 사람의 곁에 있을 수 없다는 걸, 죽어가는 사람은 죽은 사람을 찾을 수 있어도 죽은 사람은 죽어가는 사람을 찾을 수 없다는 걸 우리는 오래전부터 … Continue reading 유령의 물방울

발화욕망의 물방울

우리의 대화는 어떠한 논문도, 학적인 연구도 될 수 없을 거예요. 우리에게는 구체적인 실명도 신원도 존재하지 않으니까. 우리의 세부는 모두 허구의 투명한 거미줄 위에 짜 내려간 환상의 직조물에 불과하니까. 회피와 응시를 얽어놓은 복잡한 거미줄 바깥의 어떠한 삶도, 역사도 우리는 가지고 있지 않아요. 우리 자신의 삶조차도. 우리의 의지도, 목소리도, 우수도 전부 허구일뿐이죠. 실재하는 것은 고독뿐이에요. 그래도 글을 … Continue reading 발화욕망의 물방울

고해성사의 물방울

어쩌면 네 죄는 글일지도 몰랐다. 네가 견뎌야 하는 실존을 네가 낳은 글들도, 너의 환상들도 감내해야 하는 걸까? 넌 네 환상들에 실존의 죄를 지우고 있는 것일까? 죽음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망각의 얼굴 가까이 기어간 이들이 자신의 글을 모두 불태워달라고 한결같이 부탁했던 것 역시 베가 낳은 아이의 실존을 짊어지고 옥상에서 함께 뛰어내려 산산조각난 거울로, 누구의 실존도 생명도 … Continue reading 고해성사의 물방울

고해성사의 물방울 – 사드의 여인

한번은, 하고 여자의 고백이, 짙고 퀴퀴한 악취를 풍기는 목소리가 갑작스럽게 시작되었다. 관악기의 차가운 내장에서 줄줄 흘러내리는 음률처럼. 마리가 내게 말을 건 적이 있었어요. 내 이름을 부르면서요. 아니요. 내게 죽여달라고 이야기하기 훨씬 전의 일이에요. 그즈음 우리는 가혹하긴 해도 이후에 치러야 했던 끔찍스러운 모욕에 비하면 견줄 수도 없는 악행에 몸을 적시고 있었죠. 우리에게는 아직 바깥에서의 기억이, 신이 … Continue reading 고해성사의 물방울 – 사드의 여인

연과 레몬캔디의 물방울

내가 글을 쓰고 싶은 욕망을, 멍든 육체가 아니라면 다른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갈망을 앓게 된 것도 삼촌 때문이라고 할 수 있어요. 삼촌의 낡고 삐걱거리는 어둠 속에 머무르면서 난 그의 이야기에 완전히 빠져들었죠. 삼촌은 재능 있는 이야기꾼이었어요. 비록 나 말고는 다른 누구도 그의 그런 재능을 발견하진 못한 것 같지만, 난 이야기꾼으로서의 삼촌의 재능을 질투하기도 했죠. … Continue reading 연과 레몬캔디의 물방울

연과 레몬캔디의 물방울 – 고해성사 3

삼촌은 그녀를 벌하고 싶지도, 구원하고 싶지도 않았다고 했다. 다만 유령처럼 비열하고 고독한 소년은 그녀의 고백이, 이 괴상한 신도의 고백이 흥미로웠기에 계속 들을 수밖에 없었다고 이야기했다. 그러고서는 무척이나 기이한 첨언을 덧붙였다. 고해성사실에 들어가는 죄인들이 바랄 수 있는 것은 다만 들어주는 일뿐이라고. 그들은 그들의 죄가 사해지는 것도, 더해지는 것도 바라서는 안 되며 오직 그들의 죄에 대한 충실한 … Continue reading 연과 레몬캔디의 물방울 – 고해성사 3

연과 레몬캔디의 물방울 – 고해성사 2

그 일이 있고 난 뒤에도 삼촌은 고해성사실에 숨어드는 버릇을 버릴 수 없었어요. 삼촌은 잠을 청하듯 습관적으로 고해성사실로 들어가 타인의 악몽에 귀를 기울이곤 했죠. 죄인들은 밤낮없이 고해성사실로 들어왔어요. 삼촌은 마른 몸을 잔뜩 웅크리고 피아노 현들 위에서 날카로운 음률이 제 몸을 가르는 것을 즐기며 잠에 든 쥐처럼 죄인들의 흐느낌이 피부를 갈라내는 감각을 만끽했죠. 신부님, 저는 아내를 죽이고 … Continue reading 연과 레몬캔디의 물방울 – 고해성사 2

연과 레몬캔디의 물방울 – 고해성사 1

분명 삼촌이 그의 유년에 대해 낱낱이 털어놓은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침묵만을 고수했던 것도 아니에요. 당신한테 말한 적이 있죠. 삼촌은 사람들 생각과는 달리 꽤 수다스러운 사람이었다고. 삼촌이 어릴 적, 그러니까 서커스에서 도망쳐나온 뒤 한동안 수도원 소유의 고아원에 들어갔다는 걸 내게 이야기해 준 것은 이모가 연인을 찾아 집을 나서고 삼촌이 지상에 선 박쥐처럼 구석자리의 그늘에 … Continue reading 연과 레몬캔디의 물방울 – 고해성사 1

레몬캔디의 물방울 – 서커스의 짐승

레몬캔디는 종종 그의 고향 마을-그가 고향이라고 믿었던-에 찾아오곤 했던 서커스단에 대해 이야기했다. 본래는 대도시의 유원지에서 공연을 하던 서커스단이라고 했는데, 사막에서 붉은 보석이나 신비한 향신료들을 가지고 오는 행상들처럼 간혹 우리 마을에도 들리곤 했죠. 특히 노인들과 어린 아이들이 그들의 방문을 손꼽아 기다리곤 했는데, 그건 그들의 흐린 시야로 뒤덮인 삶에 있어 그토록 화려하게 반짝이는 것은 기껏해야 서커스 단원들이 … Continue reading 레몬캔디의 물방울 – 서커스의 짐승

레몬캔디의 물방울 – 여자의 다리수술

난 한 번도 내가 죄를 지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지금도, 마을사람들을 독살한 무시무시한 범죄를 저질렀다는 이야기를 들은 지금에도 그때의 내가 그리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설령 그들이 죽음을 원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우리는 타인을 해치면서 살아가잖아요. 헤집을 수 없는 속을 헤집고 상대에게 제 타액을 흘려넣어 감염시키는 일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부르지 않았던가요? 그게 아니야, 하고 레몬캔디의 … Continue reading 레몬캔디의 물방울 – 여자의 다리수술

레몬캔디의 어린시절의 물방울 – 유년과 우물

나도 더 이상 빈대들의 삶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아요. 그렇지만 죽음에 대해서는 더 할 말이 있어요. 레몬캔디는 모르는 어릴 적의 이야기에요. 그 애는 무척이나 천진하고 사랑스러운 아이였어요. 당신의 이야기와는 모순되게, 슬플 때는 언제든지 울고 욺으로써 무언가를 요구할 줄 아는 아이였죠. 물가에 떠내려온 아이들이 대개 그렇듯 거뭇한 우수를 지니고 있는 아이긴 했지만, 그래도 그 애는 이웃들을 … Continue reading 레몬캔디의 어린시절의 물방울 – 유년과 우물

여자와 레몬캔디의 물방울

아무것도,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는다. 아무것도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을 너희는 종종 잊는다. 하메른의 강에 빠진 쥐떼들은 다시는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지금까지 하수구에서 바글거리는 쥐들은 그때의 우수를 공유하지 않는다. 너희들이 반복한다고 믿는 생들은, 또다시 출몰했다고 믿는 사자들은 이전의 그와는 전혀 다른 존재이다. 너희 자신조차도. 너희는 하나의 생을 반복하지 않는다. 어제의 네가 가졌던 고독을 오늘의 너는 결코 … Continue reading 여자와 레몬캔디의 물방울

자살자 쥐들의 물방울

비는 쉽게 그치지 않았다. 그건 사막의 저주일지도 모른다고, 속삭이는 여자의 목소리. 비 웅덩이에 코를 박고 끔찍스러운 얼굴을 들여다보다 물 속으로 머리부터 고꾸라져 들어가는 검은 쥐를 바라보며 너희는 침묵한다. 나르시스가 천사와도 같은 미소년을 보고 사랑에 빠져 입을 맞추었던 성스러운 액체 위에서 흐물거리며 얇고 더러운 콧수염들을 움찔거리는 작고 혐오스러운 괴물을 본 순간, 쥐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너희는 … Continue reading 자살자 쥐들의 물방울

연과 레몬캔디의 물방울

레몬캔디의 갈라진 목소리. 버려진 목소리들의 결속. 사람은 들을 수 없는 목소리. 유령도 들을 수 없는 목소리. 하지만 너는 듣는 체 한다. 유령이 유령을 들을 수 없다면 지친 음성으로, 작게 쉬어버린 목소리로 소곤소곤거리며 집단적인 독백을 하는 유령들에 대한 꿈조차 꿀 수 없으므로. 악몽을 꿀 수 없다면 더 이상 악몽에 대해 쓸 수도 없으므로. 어쩌면 난 삼촌보다 … Continue reading 연과 레몬캔디의 물방울

죄의 물방울

하나의 잘못을 고치면 모든 일이 곧바른 길을 찾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다. 하나의 잘못된 저주를 삭이고, 하나의 잘못된 생각을 없애고, 하나의 잘못된 선택을 지우면 모든 일이 괜찮아질 거라고. 무참한 수압을 향해 피어나던 뿌리들을 제대로 목격했더라면, 그곳에 너희 대신 네가 갔더라면, 네가 갖지 못했던 고래의 검고 거대한 자궁을 기억했더라면, 고래는 너보다 깊은 심해를 기억할 아이들을 낳았을 … Continue reading 죄의 물방울

목소리들의 물방울

유리병에 간절한 이름들을 담아 망망대해에 띄워보내는 심정으로, 보야저 호에 인간의 육성과 믿음, 그들이 가장 아름다운 노래라고 믿던 음악을 함께 담아 우주 속으로 무책임하게 띄워보내던 이들의 심정으로, 새로운 세계를 구걸하는 심정으로, 설령 보야저호를 받아든 누군가가 있더라도 절대 그와 눈짓을 주고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설령 유리병에 모래와 함께 담긴 더러운 쪽지를 펼쳐보는 자가 있더라도 그가 자신을 … Continue reading 목소리들의 물방울

연과 레몬캔디의 물방울

변명 같겠지만 다시 한번 말할게요. 내 증언이 뒤죽박죽인 건 당신도 이해해 주어야 해요. 혼란스러운 건 당신과 나의 존재도 마찬가지이니까. 우린 결국 아무것도 겪은 적이 없고 따라서 경험에 따라 기억을 반추해내는 일은 불가능하니까. 내 증언은 내 내면의 바깥에서 벌어진, 어떻게 보면 나와는 전혀 무관한 세계에 대한 이야기니까. 난 내 어린 시절을, 잃어버린 어린시절을, 어쩌면 존재한 적조차 … Continue reading 연과 레몬캔디의 물방울

네크로필리아 음악가의 물방울

할아버지가 삼촌을 얼마나 신뢰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적어도 이모에 대한 그의 사랑을 완전히 믿지 않았다는 것만은 확실해요. 할아버지의 연구실 바닥에 앉아 한없이 위로 떠오르는 금빛 먼지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면 할아버지가 유령에게 말을 건네듯 중얼거리곤 했거든요. 사랑받지 못하고 자란 사람은 사랑을 할 수 없는 법이야. 그런 사람들은 꼭 누군가를 배신하게 되어 있지. 그게 저 자신이라 할지라도. 할아버지가 … Continue reading 네크로필리아 음악가의 물방울

너희, 들의 물방울

여자는 숨을 들이쉰다. 눈꺼풀 속에서 붉은 얼룩들이 흩어진다. 피부를 잃고 질주하는 말의 혈류처럼. 기억들의 마을에서 무엇을 찾으려고 했는지, 그녀로서는 알 길이 없다. 그곳은 그녀의 고향도 아니었고, 한 잔의 홍차와 마들렌에서 피어오르는 장미 정원을 돌보던 사내가 찾아나선 진리는 그녀가 속해 있지 않은 세상의 것이었으므로. 날짜와 시간이 표시되지 않은 필름사진과 같은 기억들, 죽은 자도 산 자도 모두 … Continue reading 너희, 들의 물방울

연과 현의 물방울

너는 어느덧 현과 함께 오래도록 햇빛에 노출되어 희게 바래가는 옥상의 초록색 방수 페인트 위에 앉아 있었다. 너희 사이를 오가던 유구한 전통에 따라 너는 입을 다물고 그 애의 옆에 앉아 있었다. 마치 너희가 모두 살아있을 때처럼. 현은 네가 알지 못하는 어린 시절부터 글을 써왔다고 말했다. 그는 처음에는 식물을 기르고 분갈이를 하는, 일정한 생의 주기에 따라 아무것도 … Continue reading 연과 현의 물방울

연금술사와 광인들의 물방울

할아버지의 연금술을 이해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지도 몰라요. 무엇보다도 시간을 내키는 대로 조율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그를 마치 신과 같이 받들어지던 고대의 왕처럼 보이게 했던 것 같아요. 할아버지는 시계의 원리를 안다면 누구라도 시간을 바꿀 수 있다고, 그건 연금술 고유의 영역조차 아니라고 설명했지만 아무도 할아버지의 말을 믿지 않았죠. 그의 말을 들을 때마다 사람들은 다소 자조적인 어투로 할아버지를 … Continue reading 연금술사와 광인들의 물방울

연과 현, 레몬캔디의 물방울

현과 네가 공유한 것이 침묵뿐인 것은 아니었다. 현이 병원에서 퇴원했을 무렵, 그는 자신이 퇴원한다는 소식을 교묘한 방식으로 가족들에게 숨겼고 학교 옥상에 작은 침낭과 과자들을 꾸려 노숙을 했다. 그 애를 용서하기 위해 학교로 찾아온 가족들이 현을 찾아 거뭇하게 그을은 그 애의 손을 끌고 돌아가기 전까지 너희는 모두가 그의 소재를 알고 있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 애를 … Continue reading 연과 현, 레몬캔디의 물방울

코코펠리 전쟁의 물방울 – 소녀와 언어

코코펠리 여왕이 전쟁을 치를 무렵의 일이였죠. 처음에 그녀는 선한 의도를 관철시키기 위해, 투쟁하는 인간상을 완성시키기 위해 전쟁에 매달렸어요. 초록 혹성에서 학대받는 여자들을 해방하고 사람의 죽은 시체를 품고 있는 검은 나무들을 하얗고 가벼운 송진 가루로 되돌리는 것 이외에 여왕이 바라는 일은 더 없었어요. 여자들이 잠을 청하던 밤 몰래 로켓을 만들고 빌어먹을 대지를 탈출한 것도 그 때문이었죠. … Continue reading 코코펠리 전쟁의 물방울 – 소녀와 언어

출혈의 물방울

다섯 개의 총구 앞에서 사자들이 춤을 추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날 집으로 돌아간 이들은 모두 잠시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했다고 웃었을 뿐이었어. 그들이 다시 그 골목으로 돌아갔을 때, 사자들의 시체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있었고 더위에 지쳐 잠이 든 다섯 명의 아이들만이 헐벗은 채로 드러누어 있었으니까. 열사병에 걸려 쓰러진 아이들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기삿거리가 … Continue reading 출혈의 물방울

개와 연극의 물방울

우리는 거미줄 속에서, 자신이 직접 짜내려간 아름다운 관 속에서 먹이와 함께 죽어가는 거미처럼 앞으로 내달리며 기꺼이 우리가 파 놓은 함정에 걸려들었어요. 누군가 우리의 사진을 찍었지만, 붉은색과 흰색, 검은색의 자그마한 물방울들로 가득찬 흐린 안개 속에서 우리의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거예요. 우린 진짜 사자가 아니었지만 우리의 울음만은 진짜였어요. 예술은 진실한 가짜여야 한다고, 현의 목소리가 네 … Continue reading 개와 연극의 물방울

존재와 모순의 물방울

난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눈을 감고 내 노래를 따라 부르는 사람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어요. 그들이 나를 모욕하고 있다고 느낄 정도였죠. 현실과 모순되는 제 존재의 모순성을 즐기며, 신체의 내부를 아프게 찔려오는 꼭짓점이 깊어져가는 것을 느끼며 당신에게 말을 걸었죠. 당신의 목소리는 내 안에서 자라났어요. 난 당신이 점차 확실한 존재로 변해감에 따라 항상적인 자아를 유지하고 있던 고정된 … Continue reading 존재와 모순의 물방울

현의 커튼콜의 물방울

넌 현의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었다. 현의 죽은 머리는 네 머릿속에서 고개를 숙이고 청중들에게 인사를 했다. 아이들은 희미한 윤곽선을 깜빡거리며 졸음을 참다가 꿈의 무대에서 하나 둘 사라졌다. 그 애들은 교실문도 창문도 열지 않고, 오로지 스스로의 경계를 지우며 그 안쪽의 살과 얼굴, 입술을 희끄무레한 온기로 바꾸며 사라졌다. 끓는 물이 천장과 냄비 그 중간 부위에서 흐릿한 연기로 … Continue reading 현의 커튼콜의 물방울

사자가면의 물방울

우리는 함께 사자 가면을 만들기 시작했어. 연극 소품에 사용하려고. 우리는 포르말린에 말린 사자의 얼굴을 연기하려고 했어. 이런저런 시도를 해봤지만 다 실패했지. 주황색 골판지에 갈색 털실을 덕지덕지 붙인 가면은 사자보다는 도깨비처럼 보였으니까. 프린트로 인쇄한 사자는 털 한 올조차 없이 민둥맨둥했어. 마치 피부를 도려내 여린 속살을 드러낸 것만 같았어. 박제하기 전에 가죽을 벗겨놓은 것처럼. 인터넷에서 사자 가면을 … Continue reading 사자가면의 물방울

학창시절의 물방울

학교에 다닐 때, 미술시간에 학생들 앞에 나가 어떠한 인물의 생김새를 설명했던 기억이 난다. 네가 그 인물의 코와 얼굴 윤곽, 눈썹이나 입술의 모양에 대해 묘사하면 학생들은 네 설명에 따라 그림을 그리고 그것을 비교하는 것이다. 평소 글을 쓴다고 했던 너는 아이들의 추천을 받아 교단 앞으로 나가 선생님이 준 사진 속 인물의 생김새를 묘사했다. 그의 코는 크고 둥글어. … Continue reading 학창시절의 물방울

환각과 망각, 결핍의 물방울

수천 마리의 하루살이들이 리본처럼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흘러나온다. 파동을 묘사하듯, 창백한 선영을 이어나가듯. 무수히 겹쳐 검게 보이는 투명한 날개들에 손을 집어넣고 옷장의 문을 열자 목소리가 들린다. 토성의 고리처럼 어디에도 없는 흔한 상징. 메타포. 너희는 상징을 사용하지 않기로 약속했지만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 언어를, 보이지 않는 대상을 지시하는 언어를 무어라고 불러야 할지 너는 알지 못한다. 여자의 상징이 … Continue reading 환각과 망각, 결핍의 물방울

마네킹의 물방울

초록 혹성이 불에 타 사라진 뒤 네 꿈은 정착할 곳을 잃었다. 산만한 이미지들이 고장난 만화경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며 너를 어지럽혔지만, 인격을 잃은 의식 너머언어의 파편들은 이미지들을 엮어 놓을 적합한 논리조차 갖추지 못한 채 잔상을 따라 흔들렸다. 여자는 마네킹이 늘어져 있던 진열대 안쪽에 짐승의 침처럼 미지근한 액체를 들이부었다.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지만 넌 그녀가 무얼 하는지 알 … Continue reading 마네킹의 물방울

출산과 탄생의 물방울

난 아이를 낳지 않을 거야. 그래도 한 번 태어난 사람이라면 돌이킬 수 없이 겪어야 하는 출산의 과정이 있어요. 마치 아이를 출산하듯 제 자신을 죽음으로 낳으며 새벽을 내내 앓다 가는 사람들을 본 적 없나요. 부모의 출산을 번복하듯, 허벅다리 안쪽에 새겨놓았던 문신을 지져 지우듯, 고통스럽고 지난한 과정을 견뎌 죽음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은 적 없나요. 당신도 언젠가는 … Continue reading 출산과 탄생의 물방울

우주조난자의 물방울

생은 우주보다 깊은 환각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생은 입체가 아닌 평면이라는 걸, 모든 방향으로 끊임없이 증폭되고 복제되는 종이들이라는 걸 당신도 알고 있겠죠. 우주 비행사의 이야기를 더 해볼까요. 토성의 고리 끝자락을 보고 싶어 손가락을 깨물고 살끝에서 비어져나온 유치한 피를 삼키고 유치한 눈물을 흘리고 유치한 오줌을 질질거렸던 사내 이야기를 말이에요. 그가 바랐던 것이 초록색 사과였거나 붉은 흙이었다면 상황이 … Continue reading 우주조난자의 물방울

레몬캔디의 물방울

곧 사연 많은 남자를 죽일 수 있을 거예요. 너는 옷장 속에 방치된 침묵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며 익숙한 메일을 확인했다. 다시, 그녀의 메일이었다. 넌 이미 한때 네온소다팝시티의 이야기꾼이었던 레몬캔디의 사연을 다시 떠올렸다. 병원이 붕괴되고 나서 우린 무너진 잔해 속에서 그녀들을 찾았어요. 짓이겨진 멍울들은 제 몸을 트고 피어나는 꽃처럼 아렸고, 붉고 노랗게 번져간 꽃잎들은 아름다웠어요. 우리는 그녀들의 짙게 … Continue reading 레몬캔디의 물방울

사내의 물방울

흉측하게 비어 있는 사내의 일상에 분주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침마다 사랑을 나누기 위하여 연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을 일도, 여린 속살을 간지럽히며 거리로 나가 병든 연인의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일상을 내다버리는 일도 그에게는 없었다. 사내의 얼굴을 자세히 지켜본 이는 없었지만 만약 그와 입을 맞추기 위해 그의 눈을 지긋이 응시한 이가 있었더라면 그는 끝이 뜯겨져나간 태엽장치처럼, 톱니와 … Continue reading 사내의 물방울

연과 여자의 물방울

사막의 야생동물은 비명을 질렀다. 짐승은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울고 있었다. 그러나 짐승의 울음은 사막의 밤이 듣기에는 너무 고요했고, 사막 경계의 캠프를 지키는 늙은 원주민들이 듣기에는 너무 높았다. 사막의 야생동물은 길들여진 적도 사냥된 적도 없었다. 짐승은 늘 같은 자리를 유령처럼 떠돌았다. 사내가 사막의 밤에 불시착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사내의 황금빛 머리칼과 커다랗고 둥근 눈, 사막의 은빛 달과는 … Continue reading 연과 여자의 물방울

매장의 물방울

남자는 비명을 질렀다. 너는 그의 옆에 주저앉아 흐느꼈다. 치아를 딱딱 맞부딪히는 소리. 서늘하고 달콤한 흙의 향기. 밤을 쏘다니는 짐승의 울음. 멀어졌다 가까워지는 그림자들. 손을 맞잡고 사랑을 속삭이는 유령들. 너희에게는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예고. 잡음 사이로 섞여드는 목소리. 그녀에게 대안이 있었다면 당신은 죽지 않았을까? 그렇지만 누구도 죽음을 선택할 수는 없어. 삶을 선택할 수 있는 … Continue reading 매장의 물방울

옷장의 물방울

눅눅한 옷장과 그 틈새는 너희와 분리할 수 없는 너희의 살이었다. 너는 옷장을 두고 나갈 수 없었다. 옷장 속에 남자를 밀어넣었다. 난 거울 앞에서 태어났어요. 끊임없이 복제되던 표정들을 기억해요. 막과 막 사이에서 비어져나오던 살들을 기억해요. 무수하게 증폭되던 빛이 내 피부를 갈기갈기 찢어놓던 아픔을 기억해요. 잠깐, 너무 서두르진 말아요. 우리가 타인보다 많이 가진 건 시간뿐이니까. 그동안 난 … Continue reading 옷장의 물방울

사막의 물방울

너희는 옮길 수 없는 병만을 앓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입술을 부비고 혀를 섞고 성기를 포개어도 나눌 수 없는 병이 너희의 속에서 잊히지 않은 고독처럼 매섭게 썩어가고 있었다는 생각. 그런 상상을 하면, 당신과 손을 잡았든지 당신 속으로 들어갔든지 당신과 밀어를 속삭였든지 당신과 같은 은어를 나누었든지 모두 상관없이 우리는 이대로였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 어쩐지 위로가 되는 것 같아요. … Continue reading 사막의 물방울

붉은 고래 엄마의 물방울

구석자리에 사는 괴물들을 너는 어릴 적부터 보아왔다. 괴물을 보는 사람은 괴물이 될 수 없다. 괴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괴물을 죽일 수 없다. 너는 오랫동안 구석자리에서 곰팡이처럼 번져가는 괴물들과 함께 살아왔다. 옷장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난 그를 미워하지 않아요. 그가 사랑하는 여자는 내가 아니니까. 난 그가 포기한 그녀의 마음이에요. 아냐. 넌 그녀가 아니야. 우린 아무도 해치지 … Continue reading 붉은 고래 엄마의 물방울

너-여자-레몬캔디, 너희, 들의 물방울

네가 여자를 만나듯 현도 요제프 칼을 만난 것일까? 계절마다 현의 앞에서 투신하는 소년이 요제프 칼일까? 어느새 옷장 속에서 기어나온 여자가 네 발가락을 깨물었다. 검은 눈이 너를 올려다 보았다. 그녀는 현을 긋듯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요제프 칼의 연주가 그렇게 아름답기만 했던 것은 아니에요. 확실히 기묘하고 탐미적인 소리였지만, 20세기 이후부터 그런 연주는 제법 흔하지 않나요. 난 그와 … Continue reading 너-여자-레몬캔디, 너희, 들의 물방울

현의 미로의 물방울

다시, 잘려 죽은 나무의 텅 빈 창자 속에서 웅크리고 숨어 있는 페이지들. 너는 현의 책을 꺼내 펼친다. 그 애가 네게 해주었던 말들은 모두 그 속에 있었다. 그 애가 네게 해주지 않았던 말들은 모두 그 속에 있었다. 삭아서 희미할 정도로 얇은 선의 흔적만 남은 E 현이 돌연 끊어지며 사내의 얼굴을 할퀴었다. 난자당한 얼굴, 벗겨진 껍질에는 어떤 … Continue reading 현의 미로의 물방울

시신의 물방울

맨손은 비에 젖어 있었다. 거뭇한 등을 움칠거리면서 기어가던 벌레가 네게 다리를 들여 보였다. 너는 시체를 자주 보게 되었다. 유령은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다. 죽음과 눈을 마주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너에게 보이는 시체들은 온전히 죽은 것도 죽지 않은 것도 아닌, 죽음이 증류되어 떠나간 뒤 여남은 삶인 것이다. 그녀가 지시하는 곳에 매달린, 널브러진, 조각난, 불탄 모든 시신들은 … Continue reading 시신의 물방울

연과 아이의 물방울

이야기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믿지도 않는 꿈을 더 꿀 수는 없었다. 울먹이며 종이를 찢듯 날카롭게 옮겨적었던 어휘들을 기억할 수도 없었다. 너는 초인종을 누르는 대신 현관문을 안쪽으로 밀었다. 잠금장치가 망가져 있는 문은 쉽게 속을 들여다보였다. 탐정 행세를 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어떠한 음성을 들은 듯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을 뿐이었다. 현관문 앞, 자그마한 낚시 의자 위에 … Continue reading 연과 아이의 물방울

연과 현의 물방울

햇빛이 매몰되어 뜨겁게 이글거리는 아지랑이 속에 현은 주저앉았다. 초록색 방수 페인트에서 한여름처럼 진진하고 역한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그 애는 네게 손짓하지 않았다. 너희는 늘 그랬다. 서로의 속에 깊이 파고들지 않았다. 서로를 해치는 법도 없었다. 침묵을 보듬어주는 그 애의 곁에서 너는 늘 편했지만 그뿐이었다. 그 애는 한 번도 너를 앓지 않았고 너를 미워한 적도 없으며, 네 … Continue reading 연과 현의 물방울

연과 여자의 물방울

옷장 속에서 여자가 중얼거렸다. 당신은 나를 경멸하고 있죠. 이제는 편지도 보내지 않잖아요. 아니야. 너는 여자를 달래듯 속삭였다. 네가 맡은 역할이 불만족스러웠지만 어찌할 수 없었다. 네게도 역할이 주어졌다는 사실만으로도 안도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난 너를 경멸하지 않아. 알잖아. 내게 남은 건 어설픈 문장들 뿐인걸. 소리도 없이 줄줄 흐르는 말들. 나를 경멸하는 게 아니라면 내 행동을 … Continue reading 연과 여자의 물방울

연과 아이의 물방울

개연성도 핍진성도 상관없다. 지금껏 썼던 글, 네 멋대로 짜내려갔던 어휘들은-너는 날실과 씨실을 배열하는 기본적인 상식도 모르지.- 없는 것이니까. 발자국이 곰보처럼 패인 골목 바닥을 밟으면서 했던 생각들처럼. 혹시 너는 비둘기가 아니었을까, 그렇지 않으면 네 머리칼을 스치고 날아가는 시원하고 더러운 바람이 이렇게 그리울 수는 없지 않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아도 네 어깨는 뭉툭한 뼈와 살 뿐이었던 것처럼. 덜컹거리면서 … Continue reading 연과 아이의 물방울

푸른 아이의 물방울

어디까지 이야기했는지 기억해? 아이는 네 손가락을 움켜쥐고 이야기했다. 응. 그녀가 끝내 춤을 추지 못했다는 데까지 이야기했어. 그래. 피륙을 구겨 넣은 유리병에서는 값비싼 향기가 났어. 난 그걸 머리에 끼얹고 바깥으로 나갔지. 지나가던 사람들 모두 나를 쳐다봤어. 거리를 떠돌던 개들은 눈물을 흘리며 얼굴을 찡그렸지. 벌집 모양으로 생긴 후각 신경들 때문에 그들은 사람보다 더 괴로웠을거야. 난 향기에 괴로워하는 … Continue reading 푸른 아이의 물방울

편지의 물방울

병동의 사람들은 소독약 냄새가 짙게 배어든 침상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등 뒤에 짙은 빛깔로 내려앉은 시간의 상흔. 너희는 서로의 등을 숨긴 채 더 이상 감기지 않는 눈으로 빈 곳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빈 곳은 이제 남아있지가 않아. 허우적거리는 눈짓들. 그녀는 침대 위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언젠가 지상을 떠날 날을 위하여 하는 연습이라고. 네가 매일 글을 … Continue reading 편지의 물방울

네크로필리아 음악가의 물방울

사내의 실험은 성공적이었다. 한때 그는 냉동고에 보관되어 있는 여인이, 마음을 잃은 몸이 죽음이라고 생각했다. 가늠할 수 없는 세월 동안 여자를 찾아 헤맬 정도로. 붉은 숲에서 그녀의 얼굴을 가진 꽃을 보고 꿈을 꾸듯 그 옆에서 잠들었을 때에도, 밤새도록 이슬처럼 내려앉은 꿀이 가슴팍에서 반짝였을 때에도, 굶주린 개미들이 그를 애무하며 갉아먹었을 때에도 E flat의 진폭은 그의 머릿속에서 흐느끼고 … Continue reading 네크로필리아 음악가의 물방울

초록혹성의 물방울

같은 몸에 거주하는 두 개의 인격은 그 정의상 서로를 모르고 있다. 서로의 기억을 공유하는 두 개의 인격은 그 정의상 하나이다. 초록 혹성이 불타 사라지는 동안 아무도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너희의 사랑스러운 패잔병들은 뭉근한 머리를 꺼떡거리면서 잔해로 변해가는 마을을 둘러보았다. 꿈의 최후는 그리 낭만적이지도 비극적이지도 않았다. 소년의 귓바퀴에 모래를 흘려넣던 사내는 소년의 귓가에 입을 맞추었다. 소년은 … Continue reading 초록혹성의 물방울

네오소다팝시티의 물방울

안녕, 안녕, 안녕. 안녕. 네온소다팝시티의 주민들이 인사한다. 너희는 반가움에 얼굴을 찡그리며 서로의 주위를 맴돈다. 파랗거나 노랗거나 붉거나 무르거나 질기거나 끈적한 풍선껌들이 너희의 얼굴이다. 변조한 목소리로 레몬캔디가 네게 묻는다. 말을 꺼내는 그의 눈이 붉게 반짝인다. 네온소다팝시티의 시스템 상에서 말이 겹치는 일은 불가능하다. 만질 수 없는 피사체를 서글프게 바라보는 카메라의 붉은 램프처럼 저 홀로 차고 붉게 물드는 … Continue reading 네오소다팝시티의 물방울

현의 물방울

옆 침대에서 풍기는 여름 냄새. 달큰한 오물의 냄새와 뒤얽힌 냄새가 역겨워서 그 애의 목을 조르고 두툼한 베개로 얼굴을 짓누르고 싶었다고, 현은 말하지 않았다. 상상의 감실에서 그 애를 가장 모욕적이고 잔혹한 방식으로 고문한 적이 있다고, 현은 말하지 않았다. 너는 그 애에게 향긋한 침묵 너머의 비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너희에게 비밀이 필요 없었던 것이 … Continue reading 현의 물방울

서커스의 물방울

오래도록 서커스에서 일했던 아버지는 폭죽 소리에 귀가 멀고 말았어요. 어머니는 의자보다도 키가 작은 난쟁이었다고 해요. 하루는 그녀가 아버지의 공연을 도와 무대에 섰어요. 붉은 술을 주렁주렁 매단 그녀는 탐스럽고 아름다웠다고 하지요. 사람이 아닌 짐승들에게도 그렇게 보였나봐요. 무대 한가운데에서 저가 지나가야 할 비좁은 불구덩이를 묵묵하게 지켜보던 사자가 갑자기 몸을 돌려 그녀에게 향한 거예요. 오랫동안 동물원에서 공수해온 죽은 … Continue reading 서커스의 물방울

수수께끼의 물방울

이야기에 해답은 없을 것이다. 이건 정답이 없는 수수께끼이다. 중요한 것은 신호가 도착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너는 메일을 구태여 읽어 보며 그 속에 담긴 상징들을 유추해내려 애썼다. 오래전에 죽어버린 별이 쏘아보냈던 빛을 읽어내듯 너는 자의적으로 메일의 내용을 해석했다. 눈맞춤에 이어지는 성좌구조에는 별과 눈과 시선이 모두 담겨 있을까, 별의 마음과 눈의 마음이 제대로 연결되어 있는 것일까, 그런 걱정을 … Continue reading 수수께끼의 물방울

한밤의 이야기의 물방울

늙은 왕비는 백설공주를 사랑했어요. 죽어버린 공주에게 입을 맞추는 왕자는 그녀의 입술이 얼마나 붉었는지 알지 못했어요. 그녀의 눈이 얼마나 반짝였는지, 그녀에게서 얼마나 향기로운 냄새가 났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어요. 공주가 눈을 떴을 때, 그녀의 입술은 더이상 납과 같이 창백하고 아름다운 푸른 빛깔이 아니었고, 독을 배설해낸 그녀의 혀는 더이상 밤처럼 검은 빛깔이 아니었어요. 왕자의 눈앞엔 살아 있는 … Continue reading 한밤의 이야기의 물방울

다시, 메일의 물방울

기다리고 있었어요? 제목이 없는 메일이었다. 너는 미련없이 메일을 삭제하고는 생각했다. 이럴거면 처음부터 읽지 않고 버려도 상관없었을 텐데. 우스운 일이었다. 너는 매일 조금씩 늙어가는 사람들이, 너에게 닿지도 않는 궤도의 사람들이 어디에서 태어나 빛나고 사라지는지 조금도 관심이 없었으면서. 다만, 혹시 네게 도달하는 글자들이 네가 기다려온 미지에서 출발한 것일까 봐. 모든 불확실성 가운데서도 확실히 이루어질 수 없는 기적이, … Continue reading 다시, 메일의 물방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