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 돼지는 TV에서 당신을 본 적이 있다고 수줍게 말했다. 당신은 나처럼 어린 아이를 죽였죠. 뉴스에서 당신이 사건을 재연하는 모습을 봤어요. 당신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어요. 당신 얼굴은 돼지처럼 불그죽죽해 보였어요. 당신 얼굴은 천사의 심장처럼, 인육처럼 보였어요. 당신은 울고 있었어요. 당신은 아마 첫 번째보다 두 번째 연기를 더 잘 해냈을 거예요. 소년 돼지는 키득거리며 그럴 거야, 하고 … Continue reading 엔젤 스테이크 30
[카테고리:] 소설
엔젤 스테이크 29
보호소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어린 교사들이 유달리 길고 하얀 얼굴들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여자는 다녀왔다고 말하지 않았고 교사들은 여자를 반기지 않았다. 그들은 한참 동안 마네킹을 들여다보듯 서로를 낯설게 바라보며 서 있었다. 여자는 보호소의 긴 복도를 따라 걸었다. 열린 문틈으로, 철제 침대에 누워 복도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소녀들이 보였다. 교사들은 복도 중간중간에 놓인 나무 의자들에 각자 앉아 … Continue reading 엔젤 스테이크 29
엔젤 스테이크 28
남자아이는 여자의 이마에 입을 맞춘 뒤 교실 앞문을 열고 나갔다. 교사는 남자아이가 유령이라는 듯 아무런 동요 없이 계속해서 원을 교차하고 탈주하는 직선에 대한 시를 설명하고 있었다. 여자는 귓속에서 녹아내리는 액상의 고요를 느꼈다. 고양이의 부드러운 미소가 공기를 주름잡았다. 여자는 악몽이 비운 눈들의 틈을 보았다. 그녀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미래에 대한 향수가 그녀를 짓눌렀다. 별을 찢어발기는 … Continue reading 엔젤 스테이크 28
엔젤 스테이크 27
소녀는 창문에 사과를 내밀고 웃듯이 어울리지 않는 밝음으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래, 너도 어떻게 된 건지 알고 있잖아. 여자는 흐느끼며 속삭였다. 꿈은 항상 나를 저주해. 꿈 속에서 우리는 언제나 갈기갈기 찢기고 저주받고 냉장고처럼 추운 우주에서 영원히 부유하며 병든 채 죽어갈 것을 선고받지. 그건 우리가 남의 꿈 속에 잠입한 불청객이기 때문일까? 꿈 얘기를 더 해 봐. 소녀는 … Continue reading 엔젤 스테이크 27
엔젤 스테이크 26
점심식사를 마친 아이들이 우글거리며 복도로 밀려나왔고 남자아이는 군중 속에 파묻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여자는 남자아이를 찾으려 하지 않았다. 남자아이가 떨어뜨린 마론인형이 여자의 발치에 있었다. 여자는 벌거벗은 마론인형을 주워들었다. 마론인형의 이마에 새겨져 있던 붉은 글씨는 흐릿하게 지워져 있었다. 여자는 마론인형의 이마를 조심스럽게 쓸어 보았다. 붉은 글씨는 립스틱으로 쓰인 것 같았다. 여자는 붉은 립스틱이 묻은 엄지손가락을 입술에 … Continue reading 엔젤 스테이크 26
엔젤 스테이크 25
그 애가 암캐이고 내가 그 애의 무관심한 학대자이던 시절에 그 애는 내게 한 마리의 작은 새를 선물했어. 연분홍빛의 입술 사이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작은 새의 날개가 물려 있었지. 새는 내 손바닥 위에서 미친 듯이 박동하고 있었어. 믿을 수 없이 작은 심장, 믿을 수 없이 뜨거운, 순식간에 증발해버릴 것 같은 투명한 살. 새는 내 위에서 … Continue reading 엔젤 스테이크 25
엔젤 스테이크 24
교사는 차분하게 말했다. 하나의 죽음과 하나의 현실, 결코 현실들을 뒤섞어서는 안 돼. 유리, 너는 정말 심각한 상태구나. 네가 다른 친구들과 함께 계속 공부해도 괜찮을지 잘 모르겠어. 다른 아이들은 죽음에 잘 적응하고 있단다. 아이들은 죽음이 하나의 악몽이라는 걸 잘 알고 있어. 그게 사실이 아니라도 그걸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단다. 미치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단 … Continue reading 엔젤 스테이크 24
엔젤 스테이크 23
영사된 여자의 흰 몸이 흔들렸다. 검은 개의 마스크를 쓴 알몸의 남자아이가 그녀의 마른 척추를 걷어찼다. 여자는 몸을 더욱 움츠렸고 남자아이는 작고 단단한 발로 그녀의 배를 걷어찼다. 여자는 헐떡이며 비명을 질렀다. 사물의 뼈를 부수고, 그리고? 뭘 해야 하죠? 여자는 울부짖었다. 사물이 부서지고 죽음이 찾아오고 동공이 풀어지고 유령들이 다가들고 희곡은 끝났습니다. 희곡은 거기까지였습니다. 하지만 연극은 끝나지 않았어요. … Continue reading 엔젤 스테이크 23
엔젤 스테이크 22
오래전에, 하고 여자는 속삭였다. 내가 죽기 전에 나를 사랑하는 남자를 꿈꾼 적 있어. 그 꿈에서 나는 순진한 여자아이였고 그는 부드럽게 웃을 줄 아는 다정한 남자였어. 그는 내가 다니는 학교의 교사였어. 우리 반은 아니었고 옆 반의 교사였지. 아이들은 다정하고 아름다운 그 남자를 사랑했어. 나 역시 그를 사랑했어. 웃을 때, 그는 어린 소년처럼 보였어. 우린 옛 교정의 … Continue reading 엔젤 스테이크 22
양과 장미 32
Delusion level 8.8. 길게 찢어진 입술은 보지를 닮았어요. 선생님. 어린 산딸기에 칼집을 내서 상처가 벌어진 모습도요. 아이들이 만지작거리다가 찢어버리는 꽃잎도요. 눈꺼풀도요. 모든 상처는 보지를 닮았어요. 가장 선량한 생물이 입술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좀 좋아져요. 당신들의 인생이 단순하고 보잘 것 없다고 생각하면요. 하지만 아주 유명한 사람들, 우울로 성공한 사람들이 보기보다 더 우울하다고 생각하면 질투로 미쳐버릴 … Continue reading 양과 장미 32
양과 장미 31
Act. 17. 앨리스는 못생긴 여자아이였다. 교복을 입고 가지런히 앉은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감탄하면서 출석을 부르며 한명씩 너무 예쁘다고 칭찬을 하던 영어 교사도 앨리스의 얼굴을 당황스럽게 바라보며 성실하게 생겼네, 하고 말을 얼버무렸다. 아이들이 키득거렸다. 급식실에서 반찬을 나눠주던 여자들이 앨리스를 보면서 뭐라고 말을 건넸고 앨리스는 듣지도 이해하지도 못한 그 말을 듣고 앨리스 주변에 있던 여학생들이 키득거리면서 앨리스의 … Continue reading 양과 장미 31
양과 장미 30
Delusion level 10.0. 아이가 골목을 걸어간다. 늙은 남자가 아이의 손을 잡고 공중화장실로 끌고 간다. 아이는 비명을 지르려다가 실수로 혀를 깨물어버린다. 남자가 아이의 몸 속에 성기를 집어넣는 동안 아이는 계속해서 비명을 지르지만, 아이가 비명을 지르는 순간 늙은 남자가 그보다 더 큰 소리로 비명을 지르기 때문에 아이의 비명은 들리지 않는다. 아이가 비명을 지르고, 남자가 비명을 지른다. 남자가 … Continue reading 양과 장미 30
양과 장미 29
Act. 1.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사유의 둔감화, 인지 능력의 저하. 의사는 그녀에게 치료될 것이라고 했다. 삼촌은 모두 쏴버리겠다고 했다. 삼촌은 모두 죽여버리겠다고 했다. 삼촌이 사라졌고 앨리스는 그를 위해 울지 않는다. 왜냐하면 키티, 나는 울지 않게 되어버렸기 때문이야. 왜냐하면 키티, 나는 무엇을 위해 울어야 하는지 잊어버렸기 때문이야. 죽음이 간절하다가도 그 간절함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린다. 연기만이 그녀의 … Continue reading 양과 장미 29
양과 장미 28
죽고 싶어요. 다시 생각해 봐. 넌 착각하고 있는 거야. 넌 살고 싶은 거라고. 죽고 싶어요.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이기적인 년. 죽고 싶어요. 제발 그만해. 내가 더 힘들어. 죽고 싶어요. 그만해. 내가 더 죽고 싶어. 내가 먼저 죽어버릴 것 같아. 죽고 싶어요. 넌 잔인해. 난 아무것도 안 했어요. 당신을 다치게 할만한 일은 아무것도. … Continue reading 양과 장미 28
양과 장미 27
제발, 이제 그만두고 싶어. 시작도 한 적 없는 일을. 내 것이 아니었던 시작을. 물컵의 액체 속을 부드럽게 유영하는 먼지들을 삼킨 뒤, 앨리스는 말한다. 이건 극단적으로 이기적인 글쓰기일지도 모릅니다. 극단적으로 이기적인 연기요. 자기가 사랑하고 살해했던 소녀들을 사진으로 박제하는 살인자처럼. 살인자의 카메라를 죽어가는 눈으로 응시하는 희생자의 불가능한 시선처럼. 그 둘의 차이는 뭐죠? 청중이 질문한다. 그는 석고로 만들어진 … Continue reading 양과 장미 27
양과 장미 26
Act. 25. 김현경은 그녀가 돼지들과 어떻게 서로 강간했는지 그들이 어떻게 서로를 위해 강간하고 강간당했는지, 그들이 얼마나 즐겼는지 쓴다. 차례로 늑대 행세를 하면서. 늑대에게 먹히는 척을 하면서. 그녀는 TV 비평을 위해 개설한 개인 블로그에 애무와 삽입의 상세한 과정을 적어 올린다. 김현경의 블로그를 매일 확인하는 김현경의 부모는 그녀가 해킹당했다고 생각한다. 김현경이 그것을 직접 겪었다고 말하자 김현경의 아버지는 … Continue reading 양과 장미 26
엔젤 스테이크 21
그리고, 초록은 헐떡이며 속삭였다. 죽은 의사들을, 어쩌면 살아남은 의사들을. 우주는 점점 멀어지고 있어. 하나의 점과 하나의 점은 영원히 합류할 수 없는 방향으로 멀어지고 있어. 점들은 지워지지만 사라지지는 않아. 우주는 희미한 얼룩들로 더러워진 유리창과 같아. 아빠의 어머니는 아빠에게 그걸 알려주었어. 많은 꿈들은 서로를 잊고 많은 꿈들은 서로를 기억하며 많은 꿈들의 그림자는 거미줄처럼 어지러이 얽혀 있다고. 미로 … Continue reading 엔젤 스테이크 21
양과 장미 25
Act. 10.5. 어촌의 순박한 소녀가 횟집에서 부모님의 일을 돕는다. 그녀는 살아서 꿈틀거리는 낙지를 천사처럼 웃으며 매운탕 냄비에 떨어뜨린다. 낙지가 몸부림치고 중년의 손님이 소녀의 드러난 갈색 종아리를 만지작거린다. 소녀가 매운탕 냄비의 뚜껑을 덮는다. 신선한, 끓어서 삶아지기 전까지 살아 있을 생물을 손님들이 직접 볼 수 있도록 마련된 투명한 냄비그릇에 수증기가 번지고 낙지가 꿈틀거린다. 전복이 꿈틀거린다. 몸부림친다. 천국이 … Continue reading 양과 장미 25
양과 장미 24
Act. 1. 결국 그녀는 혼자다.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죽음들을 낳으려는 광기. 그녀의 연기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그녀는 알지 못한다. 고개를 숙인 채로 걸어가는 남자아이. 횡단보도에는 어떤 삶이 있었다. 트럭은 그것을 짓밟고 지나갔다. 아이의 뼈와 내장을 뭉개고 지나가면서 트럭기사는 무엇을 느꼈을까. 트럭은 그것을 완전히 박살내고 지나갔다. B는 죽었다. B는 죽었다. B의 죽음은 그녀의 존재보다도 확실한 것이다. … Continue reading 양과 장미 24
양과 장미 23
Act. 25. 김현경은 TV를 보고 있다. 클로즈업된 인간의 얼굴들. 그녀는 그 속에서 돼지들을 찾는다. 그녀가 보기에 모든 배우들은 돼지들이고 늑대를 기다리고 있다. 혹은, 모든 배우들은 돼지들을 연기함으로써만 늑대를 기다릴 수 있다. 인간의 실존의 양식을 결정짓는 제스처와 표정과 언어들. 김현경은 그곳에 머리를 삽입하고 싶다. TV의 표면에 얼굴을 밀어넣고 다른 얼굴들과 충돌하기를 그녀는 원한다. 그녀는 미치지 않았다. … Continue reading 양과 장미 23
양과 장미 22
Act. 1. 이곳에는 배울 수 있는 무수한 사물들과 배우지 않아도 좋을 무수한 언어들이 있다. 읽을 언어들과 읽지 않아도 좋을 사물들과 깨달을 수 있는 진리들과 깨달을 필요 없는 진리들과 맞을 수 있는 아침들과 지새울 필요 없는 밤들과 알게 될 것들과 알지 않아도 상관없는 것들과 불변하는 결핍과 감미롭고 절망적인 망상과 받은 적이 없으므로 줄 필요도 없는 말들, … Continue reading 양과 장미 22
양과 장미 21
Delusion level 2.0. 언어 교재 나는/우리는/그녀는/그는/그들은 천국에/지옥에/미래에/죽음에/삶에/돼지 농장에/29번 채널에/옥상에/추락에/살인 현장에/질액과 체액이 엉겨붙은 침대 시트 위에/자궁에/목을 매단 자살자의 발이 점점 아래로 미끄러지고 있는 연극 무대에 갔다/가고 있다/간다/갈 것이다/갔을지도 모른다/갈지도 모른다/가게될 지도 모른다/갔어야만 한다/가야만 한다/가야 한다 . She danced her dance. She did her dance. She will live her death. She died her life. She did her … Continue reading 양과 장미 21
양과 장미 20
Delusion level 10.0. 페이디피데스는 달렸다. 아테네는 승리했고 그는 끔찍하게 목이 말랐다. 그는 달렸다. 달리다가 마침내 아테네에 도착했을 때, 그는 목이 말라서 그곳에 왔는지 아니면 승전보를 전하기 위해 왔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죽었고 그가 한 말은 이후의 사람들이 정해 주었다. 안녕, 친구들. 오늘은 딸기 생크림 케이크 먹방을 할 거야. 딸기 생크림 케이크를 먹으려면 우선 딸기 … Continue reading 양과 장미 20
양과 장미 19
Act. 2. 초인종 소리. 앨리스가 문을 연다. 택배 배달원 남자가 그녀를 밀치고 현관 안으로 들어온다. 그의 낡은 운동화에서 질척질척한 흙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살해당하고 있어. 남자가 울부짖는다. 뭐라고요? 살해당하고 있어. 나, 살해당하고 있다고. 남자가 갑자기 실어증 환자처럼 입술을 달싹거리면서 거샌 숨을 내뱉는다. 앨리스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의 입술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도와줘. 혹은 왔어. 혹은 갈래. 혹은 … Continue reading 양과 장미 19
엔젤 스테이크 20
하지만 맹세를 하면서 그 애는 조금도 즐거워 보이지 않았어요. 오, 그 애는 정말 다정했어요. 나를 위해서 독방에 있는 숨겨진 통로를 알려주기도 했답니다. 선생님, 내가 이 말을 하는 건 당신들이 그 통로를 막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통로로 진입하는 방법은 순전히 관념적인 것이므로 꿈을 사라지게 만들 수 없는 자들은 비밀스러운 통로로 진입하는 것을 결코 막을 수 없습니다. … Continue reading 엔젤 스테이크 20
양과 장미 18
스승의 날에 그녀는 선생님을 위해 편지를 썼다. 편지를 읽고 그는 당황해 굳은 얼굴로 그녀를 불렀다. 그는 이 말을 하기까지 많이 고민했다고 했다. 그는 부드럽고 정확한 발음으로 그녀가 얼마나 무례하고 얼마나 못된 아이이고 그녀의 문장들이 얼마나 병신같고 얼마나 시시콜콜하고 얼마나 미쳤고 얼마나 구질구질한지 하나하나 조목조목 설명해준다. 그는 그녀가 울음을 터뜨릴까 봐 걱정하며 모두 그녀를 위한 말이라고 … Continue reading 양과 장미 18
양과 장미 17
Act. 25. 하얀 에나멜 색 이빨들을 드러낸 채로 돼지들은 씩 웃고 있었다. 김현경은 실패하고 말 것을 예측했다. 그녀는 바보가 아니었으니까. 그녀가 내기를 해야 했다면 그녀는 실패하는 쪽에 걸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투자할 수밖에 없었다. 돼지들은 웃고 있었다. 유혹하듯이, 그녀를 초대하듯이. 김현경은 오디션 지원 서류들을 수백 군데 제출했다. 기업에 자소서를 뿌리는 취업준비생, 혹은 절망적으로 원고들을 출판사에 … Continue reading 양과 장미 17
양과 장미 16
Act. 17. B는 비둘기처럼 쉽게 믿었다. 그녀가 그 애의 친구가 될 것이라고. 결정적인 순간 그 애는 배신당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애를 배신할 수 없었다. 앨리스는 이제 B의 존재를 확신할 수도 없었다. 그 애는 그녀가 만들어낸 인물일지도 몰랐다. 모르겠다. 그 애를 찾아볼 수 있는 곳은 오직 그녀의 텍스트와 기억뿐이었으니. 초등학교 졸업사진에도 B는 없었다. B는 졸업하기 전에 … Continue reading 양과 장미 16
양과 장미 15
Act. 25. 김현경은 수십 년 전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삶은 집요함으로 요악될 수 있다. 그녀는 사랑에나 어울리는 집요함으로 불가능을 갈구했다. 그녀는 (자칭) TV 칼럼니스트이자 (자칭) 여배우였다. 7살 무렵부터 그녀는 TV 편성표에 맞추어 하루를 분할하였다. 원하는 프로그램을 보기 위해 새벽부터 일어나 TV 앞에 앉아 있을 정도였다. 그녀의 부모는 다정한 사람들이었으므로 그녀의 방에 작은 사과 박스 같은 … Continue reading 양과 장미 15
양과 장미 14
Act. 23. 그녀는 종교를 만들 것이다. 자비와 원한, 용서나 복수와는 무관한 사랑으로 짜인 종교를. 아무도 다른 누군가를 원망하지 않으므로 신은 누군가를 대신해 희생할 필요가 없다. 신이 희생하지 않으므로 사람들은 무한한 죄책감이 둥둥 떠다니는 허공을 향해 기도할 필요가 없다. 신은 그 누구도 용서할 필요가 없다. 아무도 용서받을 필요가 없다. 용서 없는 사랑들. 수업이 끝난 뒤 앨리스는 … Continue reading 양과 장미 14
양과 장미 13
Act. 22. 백내장 걸린 눈동자처럼 흐릿한 거울 앞에서 앨리스는 그녀가 준비한 긴 대사를 읊었다. 거울은 창문이 아니어서 바깥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려주지 못했다. 달걀 노른자가 묻어 질척거리는 소맷자락으로 그녀는 눈물을 닦았다. 희망 없음 희망 없음 희망 없음 희망 없음 희망 없음 희망 없음 그녀는 그녀의 엄마고 그녀의 아이며 그녀의 남편이고 그녀의 아빠며 그들의 가능한 모든 관계들이다. … Continue reading 양과 장미 13
양과 장미 12
Act. 21. 암쥐는 교실의 비밀스러운 틈 속에서 울고 있었다. 그녀의 눈물이 사진들 위로 떨어졌다. 붉거나 보랏빛이거나 검거나 갈색으로 벌어진 음부들의 이미지들 위로. 그것은 실종된 소녀들의 사진들이었다. 사진들의 뒷면에는 소녀들의 이름이 필기체로 적혀 있었다. 불온한 농담처럼. 암쥐는 소녀들의 음부 위에서 흐느끼며 수음했다. 그녀는 쥐들이 실종된 소녀들보다 그녀를 먼저 발견하기를 바랐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듯이 큰 소리로 찍찍거리며 … Continue reading 양과 장미 12
엔젤 스테이크 19
여자는 맞다고, 정말로 TV는 짐승들을 미치게 만든다고. 즉, 신을 망각했던 짐승들을 신과 같은 상태로 만든다고 말했다. 녹색 바다의 왕은 천체 망원경에 광적인 시간 혹은 망상이 들어 있다고 믿어서 천체 망원경들을 사형에 처했죠. 사형 집행자들은 천체 망원경을 가장 더러운 구둣발로 밟아 모욕하였고 망가진 기계장치를 불태웠어요. 망원경의 잔해에서는 역겨운 기름 냄새가 진동했는데 태우고 남은 재를 왕은 가장 … Continue reading 엔젤 스테이크 19
양과 장미 11
(여기, 여자이고 중학생인 A가 있다. 그녀는 인스타 스타를 꿈꾼다. 그녀는 고화질로 촬영한 셀카들을 포토샵으로 편집하여 눈부시게 아름답게 바꾸어놓았다. 그녀가 사진들을 인스타 계정에 올린다. 그녀는 그녀의 본래 얼굴을 알아차린 누군가가 그녀에게 욕설을 퍼붓기를 황홀함에 가까운 긴장 속에서 기다린다. 고발당하기를, 폭로당하기를, 어둠 속에서 벌겋게 만개해서 진물을 질질 흘리는 비밀들을 모조리 들켜버리기를 기다린다. 그러나 아무도 그녀의 인스타를 팔로우하지 … Continue reading 양과 장미 11
양과 장미 10
Act. 16. 앨리스는 악몽을 유달리 좋아했다. 악몽에는 그녀만을 위해 준비된 카메라들과 그녀를 위해 안배된 배역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목을 서서히 조여오는 서늘한 질식감이 그녀를 집요하게 추적했고 귀신의 응시들이 그녀와 동반했다. 독이 든 사과와 함께 주어지는 죽음은 부드럽고 절박하고 달콤했다. 악몽 이후에도 악몽처럼 존재할 수 있다면 그녀는 황홀로 멎어버렸으리라. 악몽 속에는 그녀를 원하고 그녀를 죽이고 싶어하는 하얀 … Continue reading 양과 장미 10
양과 장미 9
Act. 15. 옷장 속에서 앨리스는 글을 쓴다. 노트북 화면의 불빛이 그녀의 매끄러운 표면을 날카롭게 찌른다. 불가능한 갈망의 우울한 쾌락 속에서 그녀는 (아마) (영원히) 알려지지 않을 것들을 쓴다. (영원히)의 괄호를 허물기 위해서는 몇 단계의 물리적인 변화가 필수적이다. 1. 마조히즘적 죽음충동의 사디즘적 가공(이리가레) 2. 자살에 선행하는 타살 3. 음부의 봉합. 모든 구멍들, 뻐끔거리며 혐오스러운 비명을 속삭이는 구멍들의 … Continue reading 양과 장미 9
양과 장미 8
앨리스, 삶은 그녀의 것이 아닌 에피소드들이다. 참을 수 없이 외로운, 그러나 견디어지는. 계속되는 견딜 수 없음. 그녀가 히스테리컬하게 헤집어 찢어놓고 있는 구멍에서 벌건 피와 진물이 질질 흐른다. 그것은 그녀의 것이 아닌 에피소드들이지만 그녀의 것처럼 아프다. 앨리스, 그녀는 히스테리 여자다. 그녀가 꺽꺽거리면서 신음하는 언어를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녀는 가족의 길게 벌어진 상처지만 스스로 봉합된 척을 할 … Continue reading 양과 장미 8
양과 장미 7
ACT. 12. 그는 결코 알 수 없을 것이었다. 그가 사랑한 것이 거짓된 죽음임을, 그가 그녀를 모방하는 데 영원히 실패했음을. 로미오가 줄리엣의 몸을 끌어안는다. 그녀의 심장은 멎었고 숨은 새어나오지 않는다. 그녀는 죽었다. 그녀 입술의 채도 낮은 보랏빛과 영원한 잠으로 감긴 눈. 그의 품에서 움직이지 않는. 그는 이전에 그녀를 그리 사랑하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내장이 울렁거리며 엉망으로 엉겨붙는다. … Continue reading 양과 장미 7
양과 장미 6
간혹 두 곡의 놀랄 만큼 유사한 전개를 들으면서 놀라곤 해. 딜루젼 레벨이라는 말은 Airen의 글을 훔친 헬레네 헤게만에게서 훔친 것이다. 그녀는 딜루젼 레벨이 아니라 리얼리티 레벨이라고 했지만. (그렇지만 앨리스에게는 현실 감각따위 없다.) 헬레네 헤게만. 그녀는 벌써 자기 작품으로 끝내주는 영화를 한 편 찍었다. 그녀는 천재 감독이고 천재 여배우고 천재 작가이다. SCENE 01. 정장과 드레스를 걸친 … Continue reading 양과 장미 6
양과 장미 5
ACT. 10. 정민 : 나 아파 너무 아픈데 그래도 여기 있을래. 여기 있게 해줘. 은수 : 왜? 정민 : 사랑하니까 은수 : 넌 고통을 사랑하게 된 것뿐이야. 정민 : 여기 있을래. 은수 : 여기가 어딘데? 정민 : 우리집 은수 : 나한테 말할 필요 없어. 정민 : 여기 있게 해줘. 은수 : 나한테 말할 필요 없다고. … Continue reading 양과 장미 5
엔젤 스테이크 18
재판정 내부는 시체 안치소처럼 추웠다. 여자는 어깨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남자아이는 여자에게 긴장하지 말라고 거듭 중얼거렸지만 그런 위로는 변호사에게 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변호사의 창백한 얼굴은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변호사는 습관적으로 웃옷을 더듬다가 셔츠에 주머니가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깨달은 듯 당황하며 셔츠 소매로 얼굴을 닦았다. 그들이 재판정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동안 회랑을 … Continue reading 엔젤 스테이크 18
양과 장미 4
Act. 1. 살인자가 떠나간 현관. - 절실한 이해자를 찾는 일만큼이나 절실한 타자를 찾는 일은 불가능하다. - 앨리스 - 우리는 너무 죽어 있어 - 우리는 너무도 이상한 뒤틀림 읽어낼 수 없는 균열 아주 평범한 너무 이상해서 평범한 - 여자가 떨어지고 있다 프레임에서 조각난 살들이 떨어지고 있다 떨어지고 있다 - 한 쌍의 검은 눈. 앨리스가 식탁에 앉는다. … Continue reading 양과 장미 4
양과 장미 3
영화 개봉일까지 그녀는 기다려야 했다. 시사회 초대권을 받지도 못했고 시사회 티켓을 구하지도 못했다. 그녀는 신년 그리고 또 신년을 멍하니 기다렸다. 촬영팀이 오지 않을 때도 그녀는 매일 같은 자리로 출근했다. 그녀는 새벽과 아침과 점심과 저녁과 밤 내내 기다렸다. - 난 벌을 받아야 해 - 앨리스는 자기 입을 때리면서 흐느꼈다. - 엄마 난 벌을 받아야 해 - … Continue reading 양과 장미 3
양과 장미 2
Act. 5. 살인자가 가까운 교회에 들어간다. 기도한다. 성상이 불안하게 경련하다가 깨진다. 돌 밑에 잠들어 있던 천사가 흐느적거리며 살인자의 앞까지 기어 온다. 희고 깨끗한 깃털들이 남자의 얼굴을 간지럽힌다. 살인자의 눈에서 피가 흘러나온다. 천사의 날개 끝이 피로 젖어든다. 붉게 변한 깃털이 남자의 얼굴 위에 붉은 선들을 덧그린다. 자살처럼, 용서할 수 없이 아름다운. … Continue reading 양과 장미 2
양과 장미
앨리스가 처음 살해당하던 날은 그녀의 생일이 아니었다. 그녀의 마지막 날도 아니었다. 그녀는 정오 즈음 일어나 창밖을 일정한 보폭으로 지나가는 행인들을 바라보며 글을 쓰고 있었다. 습관적으로 인터넷 검색창에 그녀의 이름과 닉네임과 그녀가 기억하는 그녀에 대한 온갖 세부사항들을 검색하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하늘은 파랬고 그녀는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 현기증으로 기어드는 개미 떼들의 매스꺼운 행렬처럼. … Continue reading 양과 장미
소녀의 물방울
그녀는 조용함을 훈련받았다. 작은 울타리 내부에서의 세계는 끔찍하게도 고적하였으나 이곳에서의 울음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녀의 울음을 반향하는 대답도, 사물의 시체들을 되비추는 흔적도, 엄습하는 침묵을 밀어내는 소란도 여기에는 없었다. 울타리는 그리 높지 않았으나 소녀는 울타리를 넘어설 수 없었다. 울타리 바깥의 세계는 진열장 유리에 가로막힌 것처럼 단단하고 차가웠다. 소녀는 투명하게 가로놓인 테두리의 내부와 외부가 다른 세계라는 것을 … Continue reading 소녀의 물방울
숲 속의 자살자의 물방울
당신은 4월 5일 오후 2시까지 호텔 람세스에 오라고 했다. 편지는 받자마자 찢어버렸다. 당신의 초대에 응한 것은 특별한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자살자의 폐속에 뿌리를 박아넣은 나무의 생에 특별한 이유가 없듯. 내게는 차가 없었기에 호텔까지는 걸어서 갔다. 그곳까지 가는 길에는 두세 개의 숲이 있었고 두 번째인지 세 번째인지 기억나지 않는 숲에서 나는 길을 잃었다. 밤과 어둠과 습기, … Continue reading 숲 속의 자살자의 물방울
샴쌍둥이의 물방울 2
그녀의 푸른 혀 밑에서는 개구리의 시꺼먼 다리가 설탕처럼 진한 향기를 풍기며 녹아가고 있었어요. 나는 아무것도 용서할 수 없었고 용서함으로써 내 안에서 내보내는 일도 없었죠. 그래서 의사는 그녀의 머리를 절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했을 거예요. 의사는 썩어가는 그녀와 함께 죽어가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어요. 당신들은 내가 가엾다고 했죠. 그녀의 아름다움은 돌이킬 수 없는 불치의 병으로 변해버렸으니까. 어쩌면 그녀는 … Continue reading 샴쌍둥이의 물방울 2
엔젤 스테이크 17
1번 채널은 뉴스 채널이었다. 검은 정장을 차려입은 여자가 창문닦이 남자의 살해 사건을 보도했다. 소녀들과 남자아이는 여자 주변에 그림자처럼 모여들어 함께 TV 화면을 응시했다. 그곳에 비밀스러운 암호들이 감추어져 있는 것처럼, 혹은 투명한 투계를 바라보고 있는 군중들처럼. 아나운서는 청소 노동자가 49세의 남자이며 죽음 당시에 5명의 아이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고 보도했다. 그는 고층 빌딩의 창문을 닦고 있었으며 로프를 … Continue reading 엔젤 스테이크 17
샴쌍둥이의 물방울 1
당신이 쓴 글을 읽어 봤어요. 내가 자기혐오에 못 이겨 언니를 죽였다고요. 내가 나를 죽이듯이, 종려나무에 목을 매고 검은 호수에 뛰어들고, 축축한 전선을 맨손으로 움켜쥐고, 처량하게 흐느끼는 사자 우리에 맨몸으로 들어간 것처럼 그렇게 자살을 한 거라고요. 소년이 알을 깨고 나오듯이, 소녀가 배설해낸 알을 무참히 깨뜨리며 세계로 진입하듯이 그렇게 내 경계를 부수고 삶으로 나온 거라고요. 지하실에 갇혀 … Continue reading 샴쌍둥이의 물방울 1
쥐의 물방울
그녀의 안에서 최초의 사유가 발발하는 순간, 태양은 여느 때와 같이 검고 축축했다. 반신이 잘린 지렁이들은 하수구 내부로 기어들고 있었고 검거나 더 검거나 더 검은 어둠이 술렁이고 있었으며 모든 것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소녀는 처음으로 절망했다. 잿빛 터럭 사이에 밤처럼 검은 눈이 달린 다른 시궁쥐들과 그녀가 다르다는 것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처음, 갈대처럼 등이 … Continue reading 쥐의 물방울
떨어져나간 깃털을 모아 하늘의 눈을 실어 나르려 했던 포유동물의 물방울
그의 눈은 달처럼 희어서 난 별을 세던 어린 강아지들처럼 UFO를 타고 낯선 사막으로 도망치던 미국애들처럼 그의 눈을 타고 먼 곳으로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요. 먼 곳. 아주 먼 곳. 비행기를 타도, 유람선을 타도, 길거리를 지나다니던 황금빛 사자들이 지프차를 부수고 그 속에서 움틀거리는 고깃덩이의 팔을 찢어내어도 도달할 수 없는 곳. 수만 편의 시를 써도 … Continue reading 떨어져나간 깃털을 모아 하늘의 눈을 실어 나르려 했던 포유동물의 물방울
사육사의 물방울
각자의 사료통에 고개를 쳐박고 먹이를 먹고 있는 세 마리 짐승들. 그들의 궁둥이와 그 바로 앞에 놓인 먹이통에 머리를 쳐박고 쩝쩝대며 오물을 마시듯 삶을 흡입하고 있는 그것들 사이의 놀랍도록 천박하고 정확한 경계를 사육사는 알아야 한다. 한 마리의 개가 돼지의 뒷발 앞으로 고개를 내밀면 돼지는, 그 순응적이고 부드러운 살은 순식간에 포악한 육식짐승으로 돌변하여 가련한 침범자의 머리를 물어뜯고 … Continue reading 사육사의 물방울
복제의 물방울
연구기관에서는 보통의 사람과는 다른 방식의 사고와 창조를 하는 특별한 인물들, 특히 지식에 대한 사드적 욕망을 가지고 있는 자들을 몇 명이고 복제해내기를 원했다. 수십 명의 벤야민과 수십 명의 헤겔, 수십 명의 미켈란젤로가 각자의 창작에 몰두할 수 있도록. 쉽게 짐작할 수 있듯 혹성은 포화 상태가 되었고 인구 조절 문제가 가장 시급한 화제로 변하기에 이르렀다. 보건복지부 장관이었던 프란츠 … Continue reading 복제의 물방울
항해의 물방울 2
그가 낡아빠진 방수시트 위에 드러누워 구석자리에 정육점 고기처럼 매달린 보랏빛 젖을 바라보고 있을 때 똑똑하던 노크소리. 거울을 깨고 나오는 태아의 울음소리처럼 섬뜩하고 애석한 노크소리. 이등 항해사는 늪처럼 끈적이는 입을 벌려 긴히 할 이야기가 있다고 속삭였다. 그 순간 선장은 모든 것을 직감했다. 장마의 전조처럼 떨어져내리는 물방울 두 방울. 화부는 선장의 부름을 받고 조타실로 올라갔다. 어둠 속에 … Continue reading 항해의 물방울 2
항해의 물방울 1
하나의 이야기가 언제 끝나는지 소녀는 도저히 물을 수 없었다. 아이들의 웅성거림은 치명적일 정도로 커져간다. 선생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귀를 틀어막는다. 안 되겠어, 이렇게 시끄러운 곳에서는 예술을 할 수 없어. 간신히 잡은 천사도 박쥐도 나방도 도망가 버릴 거야, 날개란 날개는 전부 도망가 버릴 거야. 선생은 갑자기 고개를 쳐들고는 교단으로 성큼성큼 걸어올라가 죽은 화부의 사진을 노란 원형의 … Continue reading 항해의 물방울 1
아름다운 소녀의 물방울 3
그들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지쳐 있었다. 당장에라도 저년을 잡아넣으려면 일단은 시체를 찾아야 할 것인데 어느새 그녀는 다시 울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녀가 눈물을 닦다가 오른손날에 묻은 잉크가 지워질까봐 허둥거릴 정도로 멍청해졌다. 소녀들과 여자들은-간혹은 소년들- 그들에게 일거리를 던져주기 위해, 오직 그들의 불면을 연장시키기 위해 도처에서 매일같이 죽어가는 것 같았다. 어찌나 자주 죽어가던지 한 번이 아니라 두 … Continue reading 아름다운 소녀의 물방울 3
아름다운 소녀의 물방울 2
쓸모있는 사물은 아무것도 생산해낼 수 없는 당신들, 제 목을 맬 올가미조차도, 자신의 죽음조차도 매듭짓지 못하는 당신들, 내가 하얗고 질긴 탯줄을 내려뜨리기 전에는 자살조차 할 수 없을 당신들, 당신들은, 너무도 못생기고 무용한, 그래서 예술조차 될 수 없는 당신들은 내 아름다움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엄마는 허둥거리면서 끝맺지 못한 협박문을 움켜쥐고 울부짖기 시작했다. 딱정벌레처럼 은밀하게 밀어닥치기 시작한 경찰들이 … Continue reading 아름다운 소녀의 물방울 2
아름다운 소녀의 물방울 1
구름처럼 희고 통통한 쥐가 한 마리 지나갈 때 소녀는 소년이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쥐가 두 마리 지나갈 때 소녀는 소년이 검게 변하는 것을 보았다. 쥐가 다섯 마리 지나갈 때 소녀는 소년이 눈을 감고 죽어 있는 것을 보았다. 쥐가 열다섯 마리 지나갈 때 엄마아빠의 비명을 들었다. 너 대체 뭘 한 거니? 그리고 오빠의 대답, 여전히 흐느끼면서. … Continue reading 아름다운 소녀의 물방울 1
혼자의 물방울
살인범을 만난다고 해서 두려워할 필요는 없었으니, 어차피 소녀는 혼자였으므로, 그녀의 곁에는, 그녀의 위, 그녀의 옆, 그녀의 앞, 그녀의 뒤와 그녀의 아래, 그녀의 내부와 그녀의 외부, 그녀로부터 먼 곳과 그녀 가까이에는 아무도 없었으므로. 바라지 않는 것도 바라는 것도 아무것도 없었으므로.
엔젤 스테이크 16
촬영이 끝났을 때, 여자는 처음부터 모든 카메라들이 꺼져 있었음을 알아차렸다. 그들이 문을 열고 들어서기 전부터. 유령 같은 이미지들 유령같은 배우들 유령 같은 방송들. 여자와 스텝들과 우주복을 입은 배우들은 미동도 없이 마네킹처럼 정지해 있었다. 그들은 촬영의 끝을 선언하지 않았지만 여자는 촬영이 끝났음을 알아차렸다. 여자들은 여전히 무대 주위를 돌고 있는 소녀들을 하나씩 불러세웠다. 여자가 소녀들에게 촬영이 끝났다고 … Continue reading 엔젤 스테이크 16
공공의 자살의 물방울 3
그들은 암실에 있다. 쭈글쭈글한 암막 커튼과 투명한 레이스처럼 넘실거리는 검붉은 빛무리. 소녀는 무언가를 보았다고 믿는다. 그녀, 깨진 창문 너머로 떨어져서 파손된 휠체어의 부품이 굴러다녔고 여자 아이의 죽음을 애도하는 자들은 휠체어의 죽음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휠체어를 고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죽은 자가 입던 옷은 죽은 자와 함께 불태워야 하는 것이 맞기에, 아무도 그 휠체어, 산산조각 … Continue reading 공공의 자살의 물방울 3
공공의 자살의 물방울 2
선생의 가죽이 그녀를 굽어보며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주름이 졌다가 펴지기를 반복하는 검붉은 가죽. 너는 왜 사진을 찍느냐고 묻는 목소리. 소녀는 사진을 찍는 일을 한 번도 선택한 적이 없었음에도, 사진을 제출하라는 과제, 명령과도 같은 선언은 오로지 당신에게서 비롯된 것이었다고 이야기하는 대신, 잊고 싶어서요, 하고 말한다. 잊고 싶어서. 너는 퍼포먼스를 하려는 거니? 사라지고 싶다고? 움찔거리는 가죽주머니 사이에서 … Continue reading 공공의 자살의 물방울 2
공공의 자살의 물방울 1
인체의 코드를 복제해낼 방법을 찾게 된 이후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 존재를 백업해두기를 원했다. 생의 중요한 기억들을 저보다 단단한 사물 위에 기록해놓으려 애쓰던 오랜 습성처럼. 하지만 누구에게나 특권이 허락된 것은 아니었다. 고대부터 살아남은 글은, 삼천 년 전부터 전해져내려오는 글은 언제나 몇몇 작품뿐이었듯, 바로 이 순간 써내려가는 글이 아닌 수천 년 전에 누군가 특별한 이가 써내려간 특별한 … Continue reading 공공의 자살의 물방울 1
고백의 물방울
당신은 내가 모르는 걸 알고 있어요. 그렇죠? 언제나 대담하고 오만하던 소년은 처음으로 수줍게 물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작고 달콤한 목소리. 알려줘요. 다시 당신에게 속을 수 있게.
정신병동의 물방울
선생님,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당신은 날 진찰하려 하고 있죠? 내 분열과 광증을 분석하면서 결국에는 날 정상으로 되돌려놓으려고 하는 게 아니에요? 그게 치료잖아요. 난 기호가 아니라 몸들이에요. 아무도 내 의미를 대신 읽어낼 수 없어요. 아무도 내 의미를 변질시킬 수 없어요. 지상에서 치러야 할 일은 죽음뿐이라는 걸 숨기려 하지 말아요.
레몬캔디와 바이올린의 물방울
우린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요. 레몬캔디는 갑작스레 격분한 듯 소리쳤다. 당신이 네오소다팝시티를 없애버렸기 때문에, 디지털 세계 속에 떠돌던 우리 유령들은 형체를, 아바타를, 목소리를, 눈과 코와 얼굴 픽셀들을 모조리 잃고 사라져버렸어요. 왜 그걸 없애버린 거예요? 난 이제 돌아갈 곳이 없어요. 레몬캔디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우린 몸도 정신도 영혼도 없으니까. 우린 당신의 세계 속에서만 살아갈 수 있었는데, 우린 … Continue reading 레몬캔디와 바이올린의 물방울
현과 소년의 물방울
깊은 바다처럼 일렁거리는 푸른 빛깔의 살덩이는 아름답다. 바다는 거대하게 춤추는 푸른 살덩이이다. 벌어진 입과 푸른 물이 밀려들어가며 내는 전도된 목소리. 숨을 내뱉어 내는 소리가 아니라 살이 밀려들어가며 내는 소리. 푸른 바다의 살을 삼키며 흐느끼는 소리. 세이렌의 노래. 혹은 밤의 파도소리. 현은 소년이 바다의 살처럼 유동적인 몸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그 애의 얼굴은 날마다 다른 기류를 맞아 … Continue reading 현과 소년의 물방울
레몬캔디의 물방울 – 죄의 소외
죄를 고백하러 오는 사람 중에 진정한 살인자는 없었다고 했죠, 하고 레몬캔디가 말했다. 죄에서 어떠한 회한도, 절망도, 고독도 찾지 못한 학살자들은 한 번도 고해성사실에 찾아오지 않았다고 해요. 어느날 삼촌은 수도원 기숙사 구석에서 개들을 장난삼아 죽이던 소년을 본 적이 있었는데 그 소년은 한 번도 고해성사실에 찾아오지 않았대요. 소년이 비닐봉지, 검은 수의 속에 새끼 강아지들을 밀어넣고 매듭을 단단히 … Continue reading 레몬캔디의 물방울 – 죄의 소외
소녀와 홀로 남은 언어의 물방울
소녀는 쥐처럼 역병을 몰고 온 두 개의 상반된 이미지를 떠올렸다. 소년과 사내. 유령과 살. 죽음과 삶. 그녀가 악몽 속에서 불러들여 끌어안은 푸른 꽃의 뿌리에서 그녀가 원한 바 없이 딸려온 검고 축축한 내장을. 코코펠리의 군인들은 기어이 그 검은 숲을 차지하고 말았다. 그들은 아름답고 기묘한 언어가 흘러나오는 목들을 모두 불태웠다. 그러나 소녀만은, 황금빛 머리칼과 검은 눈 속에서 … Continue reading 소녀와 홀로 남은 언어의 물방울
검은 숲과 혁명의 바깥의 물방울
베푸는 눈, 수치를 가르치는 눈, 응시만을, 환각만을, 보이지 않는 것만을 내버리고 떠나가버린 눈. 대지의 내장 속에서 피어난 초록이 배설하는 공기를 들이마시고 또다시 배설하며 그들은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느꼈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으며, 무엇이라고 이해하고 싶다는 갈증을 느꼈지만 기실 아무것도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다만 비참하게, 무엇보다도 무참하게 살해당하고 싶었고 상처받고 싶었다. 살해하고 … Continue reading 검은 숲과 혁명의 바깥의 물방울
노인과 거울의 물방울 2
노인은 언젠가 그가 썼던 단편을 떠올렸다. 나치 부대가 생명정치로서의 우생학을 구현하기 위해 가련한 쥐들처럼 은밀한 구석자리에 숨어든 유대인들을 찾아 도시를 누비고 있을 때, 피아니스트는 청중의 부재를 의아해하고 있었다. 그가 어릴 적에는 이토록 주위가 한산하지 않았다. 그가 소나티네를, 쇼팽을, 베토벤을 매끄럽게 연주해내고 나면 누군가가 박수를 쳤고 박수 소리는 전염병처럼 순식간에 번져나갔다. 소년은 항상 열병과도 같은 연주와 … Continue reading 노인과 거울의 물방울 2
엔젤 스테이크 15
암오소리는 전문 화가가 되어 전시회를 여는 일은 완전히 포기했지만 아직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자신이 작업하고 있는 그림의 구상을 이상스러울 정도로 구체적으로 이야기했다. 눈부시게 하얀 해변에 창백한 여자가 누워 있어요. 그녀는 시체예요. 심장이 멎었고 호흡하지 않으며 피조차 응고되어 버린 시체요. 그녀는 벌거벗은 채이고 그녀의 몸 위로 물결이 오가요. 파도가 그녀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지고 다시 물러나기를 … Continue reading 엔젤 스테이크 15
노인과 거울의 물방울 1
노인은 거울에서 쥐 한 마리를 발견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숲에서 나고 자라면서 그는 한 번도 쥐를 본 적이 없었고 그의 집에는 거울이 없었다. 거울에 비친 쥐의 형상은 그에게 있어 이중의 불가능성을 지닌 것이었다. 노인은 그 부조리한 광경을 보지 않고 지나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혹은 보더라도 보지 않았던 것처럼 무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노인은 소스라치며 … Continue reading 노인과 거울의 물방울 1
검은 숲과 혁명의 바깥의 물방울 3
천사의 날개처럼 냉혹하면서도 감미로운 결정들을, 각자의 자리에서 돌이킬 수 없는 불연속성에 갇혀 있는 구제할 길 없는 가련한 단자들을, 아플라 위 고립된 형상들을, 단단하게 굳어가는 혀와 바이올린의 날카로운 현, 벌려진 가랑이 사이 부드러운 항문과 질의 점막과 차갑고 딱딱한 건반, 죽어버린 살갗과 살을 탐닉하는 작은 벌레의 허리를, 무력하게 버려진 새하얀 살과 살 속에 파묻혀 저를 칭칭 감아대는 … Continue reading 검은 숲과 혁명의 바깥의 물방울 3
검은 숲과 혁명의 바깥의 물방울 2
사내는 하얗고 불가해한 밀실 안에 갇혀 칙사의 열띤 연설을 듣고 있는 이 순간 역시도 생애 내도록 반복되어온 기호 중 하나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와 같이 이곳까지 밀려온 이들, 나체도 양복도 아닌, 자연도 비자연도 아닌 옷을 입고 있는 이들, 자연의 얼룩을 위장한 옷을, 자연스럽지 않은 자연의 피부를 걸치고 있는 이들도 사내와 같은 종류의 기호들에 둘러싸여 있다는 사실을 … Continue reading 검은 숲과 혁명의 바깥의 물방울 2
검은 숲과 혁명의 바깥의 물방울 1
지긋지긋한 가상훈련이 끝나던 날 그들은 총을 지급받았다. 총의 의미를 곧바로 해석해내지 못한 이들은 그들에 손에 놓인 운명을 타인의 것을 바라보듯 멍한 얼굴로 내려다보았지만 총의 즉물적인 본질을 간파해낸 이들, 손가락의 미세한 움직임만으로 목숨을 끊을 수 있다는 황홀감에 사로잡힌 이들은 입속에 총구를 쑤셔박고 축포를 터뜨렸다. 바늘에 찔린 풍선처럼 순식간에 쪼그라는 머리를, 피와 골수액, 절망과 불안, 기대와 회한을 … Continue reading 검은 숲과 혁명의 바깥의 물방울 1
코코펠리와 정복과 혁명의 바깥의 물방울 – 사내와 폭력 4
안락사 기계에 대해 생각한 건 여왕이 즉위하고 시간과 숫자에 대해 처음으로 발표했을 때예요. 난 시간을 인공적으로 측량화하는 단계에 이르렀으면 당연히 죽음의 시간도 자의적으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래요. 마치 언어처럼 말이에요. 시간이나 숫자를 익힐 때처럼 혼란기를 겪을 필요도 없어요. 아주 간단하니까. 시계 바늘보다도 간단한 원리죠. 바늘이 가리키는 숫자의 생김새와 의미를 외울 필요도 없으니까. 자, … Continue reading 코코펠리와 정복과 혁명의 바깥의 물방울 – 사내와 폭력 4
코코펠리와 정복과 혁명의 바깥의 물방울 – 사내와 폭력 3
형상과 배경 양쪽의 경계를 동시에 가르는 윤곽들 중력과 습기, 열기와 타자들에 잠식되어 짓물러가는 살에 대한 연민은 어디에도 없었다. 한때 그들은 그 모든 작용들을 서툴게 연민하는 체 하였으나 아무도 믿지 않았다. 지금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폭력이었다. 반성치 않는 폭력. 목적도 이유도 없는 폭력. 무위에 대한. 아무런 목적도 의미도 없는 문양들로 그 무용한 형상들의 관계로 비로소 … Continue reading 코코펠리와 정복과 혁명의 바깥의 물방울 – 사내와 폭력 3
코코펠리와 정복과 혁명의 바깥의 물방울 – 사내와 폭력 2
그들은 검은 숲 너머 산 위에 하얀 성당처럼 빛나고 있는 호스피스 건물에 들어섰다. 입구를 찾는 일도, 입구 안으로 들어서는 일도 어렵지 않았다. 폭도들은 버릇처럼 잔뜩 수그린 머리를 들이밀며 접수대로 다가섰다. 희게 질린 여자가 그곳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입구라면 그들은 그녀를 망설임 없이 부술 것이었다. 여자는 무언가를 직감한 듯 접수대에서 일어나 그녀 뒤쪽에 있는 하얀 벽면을 독특한 … Continue reading 코코펠리와 정복과 혁명의 바깥의 물방울 – 사내와 폭력 2
코코펠리와 정복과 혁명의 바깥의 물방울 – 사내와 폭력 1
겁탈당한 소녀가 헐벗은 몸으로, 끔찍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지르는 비명소리를 듣고 나서, 고수머리 사내는 중절모 아래에 죽어 있던 새끼 비둘기를 보았을 때와 같은 비참한 기분을 느꼈다. 사랑과 기쁨, 환희와 같은 긍정적인 단어들을 현화하고자 했던 의지가 선의지일 수 없다는 깨달음. 홀로가 되지 않기 위해, 마음껏 사랑받고 이해받기 위해 버둥거렸던 몸부림은 누군가를 해치지 않고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적막감. … Continue reading 코코펠리와 정복과 혁명의 바깥의 물방울 – 사내와 폭력 1
엔젤 스테이크 14
문지기는 적어도 그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안다고 믿을 수 있었어요. 시골 사람은 적어도 마지막 순간에 자기가 어디에 있었는지 알 수 있었어요. 거미 서기는 이렇게 말해요. 그것은 합법적인, 그러나 동시에 범죄적인 예속관계라고요. 그리고 이렇게도 말하죠. 끔찍하고 불가능한 노력을 통해 당신은 문지기가 될 수 있을 거예요. 그러한 희망은 개연적이며 심지어는 현실적이기도 하죠. 극히 낮은 확률이지만 그래도 … Continue reading 엔젤 스테이크 14
헤다야트와 소녀의 물방울
서로 다른 악몽을 지켜보며 밤의 찢긴 베일이 내려앉기를 기다린 그날 이후, 소녀는 종종 페터 할아버지의 오두막에 찾아갔다. 여느 살가운 손녀가 그리하듯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노인을 위해 집안 정리를 해주고 정원에 자라난 잡초를 뽑아주며, 침이 말라 굳은 더러운 입가를 훔쳐주는 일은 없었다. 소녀는 그저 고기의 냄새를 잊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내의 옆에서 그녀의 속에 있는 개의 피 … Continue reading 헤다야트와 소녀의 물방울
소녀와 가족의 물방울 – 잠자는 여자와 소문
땅거미가 꺼질 무렵 소년을 만날 채비를 하기 위해 집에 들어온 소녀는 나무문 바로 맞은 편, 통나무 식탁에 앉아 있는 여자를 보고 몸을 굳혔다. 붉은 루즈와 흰 분을 바른 얼굴이 유령의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그녀는 도시에서 사는 소녀의 고모였다. 소녀는 인사도 하기 전에 고모에게 어쩐 일이냐고 물었다. 오랜만에 고모를 만난 기쁨보다 예기치 못한 방문에 소년을 만나러 … Continue reading 소녀와 가족의 물방울 – 잠자는 여자와 소문
페터 할아버지와 소녀의 물방울
페터 할아버지는 천성적인 몽상가였다. 어렸을 적부터 거식을 앓았던 그는 아이처럼 작은 몸에 말라 비틀어져 주름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늙어빠진 소년처럼 보였다. 소녀의 부모는 매일 하릴없이 빨랫더미 옆에 앉아 붉은 하늘만을 바라보는 그를 경멸했지만 소녀는 그의 반짝거리는 눈이 응시하는 꿈의 세계를 남몰래 염탐하며 신기해하곤 했다. 그는 대기와 별에 대해 연구한다고 말하고 다녔는데 그에게 그 직업에 … Continue reading 페터 할아버지와 소녀의 물방울
붉은대기 소녀의 물방울
황홀한 심연을 굽어보는 그의 빛나는 눈, 한 줄기의 빛이 더 매혹적으로 빛나는 암흑에 파묻힌 그, 영원한 질식 속에 떨어진 소년, 소녀는 연한 물빛의 피부를 어루만졌다. 소년의 입술 속에 혀를 들이밀었다. 호수물이 그득 들어찬 소년의 입속에서는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소녀는 소년을 먹어치울 수도 그를 흙으로 덮어 묻어 놓을 수도 없었다. 소년의 하늘빛 피부는 호수의 물과 … Continue reading 붉은대기 소녀의 물방울
마술사-군인의 물방울
시간의 발명을 코코펠리 주민들은 여왕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라며 칭송했다. 그녀가 전한 수의 개념 중 시간만큼 유용한 개념은, 수천의 사람들을 살릴 만큼 쓸모있는 개념은 없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연인 사이의 만남을 순전한 우연에 치부하는 것을 거부했고, 만남의 날짜와 장소, 시간을 지정함으로써 필연적인 만남, 의도와 결부되는 만남을 가능케 했다.-물론 변덕이라는 의도에 의해 지켜지지 않는 약속들도 있었지만. 촌각을 다투는 … Continue reading 마술사-군인의 물방울
붉은대기 소녀의 물방울 – 육식
믿을 수 없어, 소녀는 계속해서 되뇌었다. 황홀하고 끔찍한 붉은 안개 속을 서성이면서. 나뭇잎들이 내쉬는 숨의 지문과 같이 새하얀 눈의 결정들이 떨어져내리던 오후였다. 소녀가 차가운 공기 속에 목을 누이고 바람이 그녀의 머리를 매만지도록 놔두는 오후, 하얀 햇빛이 붉은 대기를 뒤덮으며 부드럽게 제 뼈를 으스러뜨리는 오후, 동물들이 물컹한 외피를 공중에 파묻고 내밀한 수다를 지껄이는 오후. 그 오후, … Continue reading 붉은대기 소녀의 물방울 – 육식
코코펠리 전쟁의 물방울 – 붉은대기 혹성
버스 안에서 떨리는 몸을 다잡으며 환상과 싸우고 있던 군인들이 정복할 수 없는 혹성들로 보내질 때도 그들은 익숙한 멀미에 헛구역질을 하며 흔들리고 있었다. 군인들은 질려버린 낯으로 검은 숲 한복판에서 내렸다. 그들의 얼굴에 더 이상의 공포는 없었다. 수백 번 되돌아오는 시간 속에서 하나의 단순한 사건과 정서는 무한히 증폭되어 견딜 수 없는 무게를 가지게 되므로 그들은 두려움을 포기하였다. … Continue reading 코코펠리 전쟁의 물방울 – 붉은대기 혹성
코코펠리 전쟁의 물방울 – 지상훈련
버스는 무자비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너희는 버스 손잡이와 좌석, 창문의 깨진 유리에까지 손을 박으며 버텼다. 무척이나 어린 소년도 너희들 사이에서 바들바들 떨리는 여린 팔을 어딘가에 얹어둔 채 안간힘을 다해 중력의 품 속에 기어들고 있었다. 너희를 이곳까지 내몬 것은 중력인데도. 중력이 붙들고 있는 시간 속에 너희는 무력하게 끼어 흔들리고 있는데도. 아무도 중력을 탓하지는 않았다. 소년은 일곱 살 … Continue reading 코코펠리 전쟁의 물방울 – 지상훈련
얼룩의 물방울
어쩌면 너희는 다만 얼굴에 남아 있는 흉측한 얼룩을, 출생의 순간 너희의 얼굴에 깊이 배어들었던 붉은 피의 흔적을 지워내기 위해 얼굴을 견디며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얼룩을, 그리고 얼굴을. 사내는 식물의 벗겨놓은 피부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종이는 이미 오래전부터 죽어있었으나 그는 죽은 피부에 죽어가는 문자를 써넣는 일에 대해 죄책감을 느낄 수 없었다. 음표들은 나날이 균처럼 번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음표들이 … Continue reading 얼룩의 물방울
유령의 물방울
도굴꾼이 무덤을 망가뜨리는 순간 무덤 바깥으로 쫓겨나 있던 귀신은 살아남았다. 척박한 땅에서 쫓겨난 사람들은 이제 어디로 가면 좋죠? 무덤에서 쫓겨난 유령들은 이제 어디로 가서 죽음을 계속할 수 있나요? 이미 죽은 사람은 죽어가는 사람의 곁에 있을 수 없다는 걸, 죽어가는 사람은 죽은 사람을 찾을 수 있어도 죽은 사람은 죽어가는 사람을 찾을 수 없다는 걸 우리는 오래전부터 … Continue reading 유령의 물방울
발화욕망의 물방울
우리의 대화는 어떠한 논문도, 학적인 연구도 될 수 없을 거예요. 우리에게는 구체적인 실명도 신원도 존재하지 않으니까. 우리의 세부는 모두 허구의 투명한 거미줄 위에 짜 내려간 환상의 직조물에 불과하니까. 회피와 응시를 얽어놓은 복잡한 거미줄 바깥의 어떠한 삶도, 역사도 우리는 가지고 있지 않아요. 우리 자신의 삶조차도. 우리의 의지도, 목소리도, 우수도 전부 허구일뿐이죠. 실재하는 것은 고독뿐이에요. 그래도 글을 … Continue reading 발화욕망의 물방울
고해성사의 물방울
어쩌면 네 죄는 글일지도 몰랐다. 네가 견뎌야 하는 실존을 네가 낳은 글들도, 너의 환상들도 감내해야 하는 걸까? 넌 네 환상들에 실존의 죄를 지우고 있는 것일까? 죽음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망각의 얼굴 가까이 기어간 이들이 자신의 글을 모두 불태워달라고 한결같이 부탁했던 것 역시 베가 낳은 아이의 실존을 짊어지고 옥상에서 함께 뛰어내려 산산조각난 거울로, 누구의 실존도 생명도 … Continue reading 고해성사의 물방울
고해성사의 물방울 – 사드의 여인
한번은, 하고 여자의 고백이, 짙고 퀴퀴한 악취를 풍기는 목소리가 갑작스럽게 시작되었다. 관악기의 차가운 내장에서 줄줄 흘러내리는 음률처럼. 마리가 내게 말을 건 적이 있었어요. 내 이름을 부르면서요. 아니요. 내게 죽여달라고 이야기하기 훨씬 전의 일이에요. 그즈음 우리는 가혹하긴 해도 이후에 치러야 했던 끔찍스러운 모욕에 비하면 견줄 수도 없는 악행에 몸을 적시고 있었죠. 우리에게는 아직 바깥에서의 기억이, 신이 … Continue reading 고해성사의 물방울 – 사드의 여인
연과 레몬캔디의 물방울
내가 글을 쓰고 싶은 욕망을, 멍든 육체가 아니라면 다른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갈망을 앓게 된 것도 삼촌 때문이라고 할 수 있어요. 삼촌의 낡고 삐걱거리는 어둠 속에 머무르면서 난 그의 이야기에 완전히 빠져들었죠. 삼촌은 재능 있는 이야기꾼이었어요. 비록 나 말고는 다른 누구도 그의 그런 재능을 발견하진 못한 것 같지만, 난 이야기꾼으로서의 삼촌의 재능을 질투하기도 했죠. … Continue reading 연과 레몬캔디의 물방울
연과 레몬캔디의 물방울 – 고해성사 3
삼촌은 그녀를 벌하고 싶지도, 구원하고 싶지도 않았다고 했다. 다만 유령처럼 비열하고 고독한 소년은 그녀의 고백이, 이 괴상한 신도의 고백이 흥미로웠기에 계속 들을 수밖에 없었다고 이야기했다. 그러고서는 무척이나 기이한 첨언을 덧붙였다. 고해성사실에 들어가는 죄인들이 바랄 수 있는 것은 다만 들어주는 일뿐이라고. 그들은 그들의 죄가 사해지는 것도, 더해지는 것도 바라서는 안 되며 오직 그들의 죄에 대한 충실한 … Continue reading 연과 레몬캔디의 물방울 – 고해성사 3
연과 레몬캔디의 물방울 – 고해성사 2
그 일이 있고 난 뒤에도 삼촌은 고해성사실에 숨어드는 버릇을 버릴 수 없었어요. 삼촌은 잠을 청하듯 습관적으로 고해성사실로 들어가 타인의 악몽에 귀를 기울이곤 했죠. 죄인들은 밤낮없이 고해성사실로 들어왔어요. 삼촌은 마른 몸을 잔뜩 웅크리고 피아노 현들 위에서 날카로운 음률이 제 몸을 가르는 것을 즐기며 잠에 든 쥐처럼 죄인들의 흐느낌이 피부를 갈라내는 감각을 만끽했죠. 신부님, 저는 아내를 죽이고 … Continue reading 연과 레몬캔디의 물방울 – 고해성사 2
엔젤 스테이크 13
너는, 남자아이는 여자의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네 죽음을 내게 맡겼어. 나라도 그렇게 했을 거야. 내가 죽을 작정이었다면 난 나의 죽음을 엄마도 아빠도 심지어는 나 자신의 운에도 맡기지 않고 너에게 맡겼을 거야. 네 작은 손이 내 목을 잘 조를 수 있도록 난 네 손 위에 손을 얹었을 거야. 하지만 그건 아마 실패로 끝났겠지. 나는 졸도에 가까운 … Continue reading 엔젤 스테이크 13
연과 레몬캔디의 물방울 – 고해성사 1
분명 삼촌이 그의 유년에 대해 낱낱이 털어놓은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침묵만을 고수했던 것도 아니에요. 당신한테 말한 적이 있죠. 삼촌은 사람들 생각과는 달리 꽤 수다스러운 사람이었다고. 삼촌이 어릴 적, 그러니까 서커스에서 도망쳐나온 뒤 한동안 수도원 소유의 고아원에 들어갔다는 걸 내게 이야기해 준 것은 이모가 연인을 찾아 집을 나서고 삼촌이 지상에 선 박쥐처럼 구석자리의 그늘에 … Continue reading 연과 레몬캔디의 물방울 – 고해성사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