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번 채널 1-그것은 소녀가 즐겨 보는 애니메이션 채널이었다. 29번 채널을 틀면 나오는 클레이 애니메이션을 소녀는 좋아했다. 악몽처럼, 희망처럼 이상하고 매혹적인 이야기들. 붉은 점토와 흰 점토를 섞어 만든 포동포동한 아기 돼지들과 잿빛의 날카롭고 부드러운 가시털로 뒤덮인 늑대들의 검고 무광인 눈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얼굴과 가슴에 열이 오르고 목 안쪽이 찢어발겨지는 듯했고 서글플 정도로 기뻐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미 … Continue reading 29번 채널 1→
29번 채널 2-불그죽죽한 살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림자에는 원뿔 형태의 점토가 쌓여들었다. 그 애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어요. 믿고 싶지 않았어요. 그 애는 너무 작았고 간혹 벌레처럼 헐벗었어요. 걸레 빤 쉰내가 진동했고 머리에 이가 있다는 소문도 있었어요. 그 애의 목소리는 너무 부드러웠고 난 29번 채널에서 무얼 보느냐고 물었죠. 그 애는 다짜고짜 편지를 보냈다고 했어요. 29번 채널에 편지를 보냈다고 … Continue reading 29번 채널 2→
29번 채널 3- 장미의 가장 깊은 속까지도 언젠가는 썩어서 떨어지고 말 거야. 왜냐하면 사막에서 영원히 살아남을 수 있는 생명은 없으니까. 모래가 되지 못한 꽃잎들은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 먹구름이 될 거야. 궤도에서 이탈한 달들이 모여드는 검고 아득한 해안에 모인 머리칼들은 더 이상 우리가 아닐 거야. 더 이상 그 누구도 아닐 거야. 아무도 그 머리칼을 세지 않을 거고 … Continue reading 29번 채널 3→
29번 채널 4-교사는 소녀를 조심스럽게 불러내었다. 교단 앞에 선 여자와 소녀를 아이들은 소리 없이 응시하였다. 언제 왁자지껄하게, 천박하고 향기롭게 웃었냐는 듯 그들은 조용하게 교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는 소녀에게 교무실, 여자의 자리에 있는 가방을 가져다달라고 속삭였다. 아이들은 여자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들은 당장이라도 여자가 그들에게 화를 내기를 비명을 지르며 그들을 꾸짖고 비난하고 때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녀는 … Continue reading 29번 채널 4→
29번 채널 5-풀밭 위를 위태롭게 뛰어가며 물통을 출렁이는 얼룩덜룩한 물감 투성이 손들. 여러 빛깔의 물감이 섞여 잿빛으로, 혹은 흙빛으로 엉글어진 물이 가득 담긴 물통. 손들을 부드럽게 스치며 떨어지는 물을 탐욕스럽게 받아먹고 반질거리는 녹빛으로, 감탄이 나올 만한 축축함으로 빛나는 질기고 단단한 풀들. 축축한 물감과 율동적인 손들이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는 동안 소녀는 손가락 끝만을 조심스럽게 움직이며 글을 썼다. 짐승들이 뛰노는 … Continue reading 29번 채널 5→
29번 채널 6-그건 백조의 고기였어요. 이름을 기억할 수 없는 역의 지하철 3번 출구로 나왔을 때, 그곳에는 불가해할 정도로 사람이 없었고 끔찍한 악취를 풍기는 부랑자 한 명만이 계단 중턱에 걸터앉아 구걸을 하고 있었죠. 물론 구걸을 하고 있다는 건 그의 앞에 그처럼 지저분하고 역겨운 동전들이 잔뜩 들어있는 녹슨 철그릇을 보고 내가 추측해낸 것이었죠. 사실 그는 돈을 달라거나 자비를 베풀어달라거나 … Continue reading 29번 채널 6→
비명을 지르는 아이들 1-교실에는 열다섯 명의 아이들이 있었다. 그들의 이름은 모두 현진이었다. 그들의 성이 무엇인지 어째서 그들이 하나같이 현진인 것인지 소녀는 알 수 없었다. 교사는 알 수 없는 글자들을 새까만 우주와도 같은 평면에 삐걱삐걱 그려넣으며 그것이 제 이름이라고 했으나 소녀는 읽을 수 없었다. 여자는 소녀의 이름을 물어보았으나 소녀는 대답할 수 없었다. 고개를 젓는 소녀에게 여자는 매서운 얼굴로 무례하다고 … Continue reading 비명을 지르는 아이들 1→
비명을 지르는 아이들 2-옆자리 현진은 소녀를 뚫어지게 관찰하며 무엇인가를 빈 공책에 끄적거리고 있었다. 소녀는 옆자리 현진이 가장 치욕적인 묘사로 소녀의 텅 빈 현존을 메꾸고 있음을 짐작했다. 현진들은 소녀를 사랑하지 않았다. 소녀 역시 모든 현진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사랑하는 것은 이미 사라진 현진, 그럼에도 이 비좁은 교실 어딘가에 얌전히 앉아 짝을 형용할 수 있는 어휘들을 어떠한 인과도 개연성도 … Continue reading 비명을 지르는 아이들 2→
죽음의 교실-소년은 물지 않는 개였다. 6반 아이들 모두 소년이 이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쓰레기를 쏟아부어도, 볼을 꼬집고 가슴을 할퀴어도, 바지를 벗기고 성기를 주물러도, 자지를 빨라고 강요해도, 오줌을 입속에 쏟아부어도 소년은 물지 않는다. 소년은 온순하고 손쉬운 죄악이었다. 현존의 기만적인 전회와 조작에 서툰 아이들도 얼마든지 짊어질 수 있을 정도로. 6반 아이들은 소년을 중심으로 짜인 정교한 테피스트리처럼 … Continue reading 죽음의 교실→
거울과 소녀 1-소녀는 눈처럼 희었다. 여자는 눈 위에 다리를 벌리고 하혈하며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여느 아이처럼 핏빛의 붉은 아이가 아닌, 눈처럼 흰 아이, 마치 한 줄기의 더러운 피도 흐르지 않는 것처럼 희고 깨끗한 아이를 여자는 원했다. 어떠한 불순물도 섞이지 않는 얼음과도 같은. 여자는 눈이 뒤덮인 앞마당에 드러누워 홀로 출산하였다. 신음도 비명도 없이. 아무도 그녀를 발견하지 못하였다. 전조 … Continue reading 거울과 소녀 1→
거울과 소녀 2-사냥꾼은 셰퍼드의 울음소리를 듣고 깨어났다. 아이가 그를 두고 떠날 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냥꾼은 황급히 일어나 더러운 담요를 밀어내며 침대 밖으로 기어나왔다. 함께 사냥을 나설 때마다 그의 셰퍼드를 질시섞인 눈으로 들여다보던 사냥꾼들이 의심스러웠으나 그가 불시에 들어닥쳤을 때 그들은 하나같이 빌어먹을 무고한 눈으로 고개를 젓곤 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군가가 그의 아이를 납치했다는 사실은 변명할 … Continue reading 거울과 소녀 2→
거울과 소녀 3-왕비는 소녀의 이름을 백설공주라고 지었습니다. 백설공주는 무척이나 작고 연약한 아이였습니다. 새벽조차 견디지 못하고 바스러질 눈처럼. 왕비는 소녀를 낳자마자 죽고 말았습니다. 왕비가 어째서 죽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하였으며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았습니다. 죽은 왕비의 생명, 한때 왕비로 살았던 여자의 몸이 백설공주의 탄생 이후에도 계속 숨을 쉬고 음식을 우물거리며 흐느끼며 살아갔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았습니다. 말년의 왕비, 아이를 … Continue reading 거울과 소녀 3→
거울과 소녀 4-그런 곳에서 애를 낳고 버렸다면 아무도 외고조할머니를 고소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런 곳에서. 누구나 죽고 누구나 버려지는 곳에서. 하지만 왕비님, 그녀는 그렇게 홀연히 사라질 수 없었어요. 엄마는 끝까지 외고조할머니가 어디에서 애를 낳았는지 말해주지 않았죠. 하지만 내가 짐작하기로는 그녀는 스스로의 의지로 광장 한복판에서, 누구도 애를 낳지 않는 곳에서, 모두에게 노출된 곳, 다리 사이에서 피를 흘리는 여자가, 알몸의 … Continue reading 거울과 소녀 4→
헨젤과 그레텔 1-엄마 아빠는 우릴 사랑했어요. 엄마는 떡갈나무처럼 부드럽고 아름다운 여자였고 아빠는 끔찍할 정도로 마음이 여린 사내였죠. 아빠는 목수였는데 떡갈나무를 베어낼 때마다 날이 뭉툭한 도끼로 거짓말 않고 백번은 찧어대어야 부러져 떨어지는 떡갈나무를 보면서 흐느낄 정도로 여렸죠. 목수라는 사람이 말이에요. 다른 사람의 손에 동물이 잡혀 죽는 꼴을 볼 수가 없어 구역질을 하고, 울음을 터뜨리고, 악몽에 시달리면서도 도살업을 계속해나가는 … Continue reading 헨젤과 그레텔 1→
헨젤과 그레텔 2-당신 책을 읽어본 적이 있어요.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세계의 불가해성뿐이다. 세계의 묵시적인 연관은 인과의 편협한 망으로는 포착할 수 없으므로. 당신 말처럼 기후가 인류를 둘러싼 인류의 현상이라면, 인류의 종말과 기후변화가 동시적인 것이었다면, 처음부터 나무들의 여름은 미래에 도사리고 있었다고 생각해도 좋을까요? 아니요, 대답할 필요는 없어요. 난 우리의 여름 바깥에 무형으로 잠재하던, 현실은 아닌 형태로 존재하던 … Continue reading 헨젤과 그레텔 2→
헨젤과 그레텔 3-그녀의 입술은 숲의 짙은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드러날 정도로 붉었어요. 그녀는 등이 굽은 곱추였고 등 위에는 가슴보다도 크게 튀어나온 혹이 세 개나 달려 있었지만 끔찍할 정도로 관능적이었어요 우리는 순식간에 새의 유령을 새의 흰빛을 잊고, 어둠 속에서 에메랄드 빛으로 사랑스러운 분홍빛으로 상상하며 먹어치우던 생크림을 잊고, 딸기잼을 잊고, 돌처럼 단단하던 비스킷을 잊고 그녀를 그녀의 음란한 세 개의 … Continue reading 헨젤과 그레텔 3→
헨젤과 그레텔 4-아무도 거미줄을 치우고 끊어내지 않았죠. 아무도, 정말 아무도요. 오빠는 거미들에 대해 신기할 정도로 무심했어요. 나무집을 갉아먹는 흰개미들은 다른 싱싱한 나무들, 살아 있는 진짜 나무들에도 분산되었기에 그리 많지 않았지만 오빠는 언제나 흰개미들만을, 그리 눈에 띄지도 않는 흰개미들만을 찾아내어 귀신같이 잡아 죽이곤 했죠. 난 오빠가 흰개미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흰개미들을 죽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 거미들을 죽이지 않은 건 … Continue reading 헨젤과 그레텔 4→
핸젤과 그레텔 5-오빠는 버려진 놀이터의 꿈에 대해서 재잘거렸어요. 난 수십 번도 더 들은 이야기였죠. 얘기의 골자는 이래요. 붉은 시소가 여섯 쌍 연결되어 있는 놀이기구에 아이들이 하나씩 올라타요. 오빠는 숲의 입구, 나무가 시작되고 나무가 번져나가는 그늘에 서서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어요. 그 애들은 언제나 오빠 또래의 아이들이에요. 오빠가 네 살 무렵일 때는 네 살 무렵이었고 여섯 살 무렵일 때는 … Continue reading 핸젤과 그레텔 5→
헨젤과 그레텔 6-우리는 여자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여자의 말을 들었죠.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난 그녀가 한 말을 신기할 정도로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어요. 이해할 수 없지만 매혹적인 언어는 우리를 두렵게 하잖아요. 난 그녀가 하는 말을 전부 외우고 전부 믿고 싶었어요.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아무런 반론도 하지 않고 그녀를 그대로 맹신하고 싶었던 거예요. 사막의 선인장들이 희고 날카로운 … Continue reading 헨젤과 그레텔 6→
헨젤과 그레텔 7-불을 끄기 전에 여자는 세헤라자데처럼 이야기를 들려주었어요. 그녀는 세헤라자데처럼 현명하고 아름다웠지만 그 둘이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면 세헤라자데는 죽음을 조금이라도 늦추기 위해 이야기했고 그녀는 죽음을 조금이라도 서두르기 위해 이야기를 했다는 점일 거예요. 그녀는 다른 어떤 시간보다도 잠자는 시간, 그리고 잠들기 직전의 시간을 가장 좋아했는데 왜냐하면 잠드는 순간에도 계속해서 죽어간다는 사실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고, 아무런 사유도 … Continue reading 헨젤과 그레텔 7→
헨젤과 그레텔 8- 대중들은 그에게 살해당한 소년 서른세 명의 이름을 알지는 못해도 그의 이름은 확실히 알고 있어. 그런 그를, 자신의 지하실을 굴착하고 창조하고 소년들의 시신으로 악취나는 소굴로 꾸민 그를, 아무런 비밀도 없이 황량할 수 있었던 오로지 콘크리트와 흙먼지 냄새만으로 퀴퀴할 수 있었던 지하실을 썩어가고 분해되는 유기물의 고약한 냄새로, 비밀로, 흔적으로 가득 채울 수 있었던 그의 삶을 예술이라고 할 … Continue reading 헨젤과 그레텔 8→
헨젤과 그레텔 9-하지만 피아니스트일 때보다 삼촌은 구걸할 때 더 유명해졌단다. 삼촌은 피아노 연주보다 구걸로 더 성공했어. 그는 누구든 자신을 듣게 만드는 놀라운 재능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런 재주는 피아니스트에게는 흔하디 흔하지만 거지들에게는 무척 드무니까. 그는 전국에서 가장 유명하고 성공한 구걸꾼이 되었어. 그의 곁을 지나가는 행인 누구나 그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어. 여가수 요제피네가 흔하디 흔한 찍찍거림, 그것도 다른 쥐들보다도 … Continue reading 헨젤과 그레텔 9→
헨젤과 그레텔 10-다른 곳에선 들리지 않았어. 집안을 서성일 때도, 창문 없는 방 안에 틀어박혀 악보를 넘기지 않는 일을 하고 있을 때도, 오빠의 벌거벗은 등에서 꽃처럼 돋아나는 붉은 종기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도 들을 수 없었어. 검은 나무로 만들어진 피아노 의자에 앉을 때만 E flat이 들렸지. 난 피아니스트가 갈무리하지 못하고 남은 음이 그곳에서 계속 전율하고 있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 Continue reading 헨젤과 그레텔 10→
부활자-어슴푸레한 수증기와 격자무늬 타일. 붉은 얼룩으로 어지러운 거울과 음울한 밤의 노래. 바닥과 벽면은 희뿌연 안개로 온통 젖어 있었고 소년은 안개에 가만히 고개를 기대었다. 이곳을 나갈 수 있을까? 소년은 자신에겐 잘못이 없다고 생각했다. 잘못이 없는 자는 죽지 않는다. 그러나 여자는 잘못이 없기 때문에 소년이 죽을 것이라고 했다. 소년은 꿈처럼 흔들리는 욕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는 눈부신 검은 … Continue reading 부활자→
샴쌍둥이 1-무언가 잘못됐어요. 선생님. 우리는 이러려던 게 아니었어요. 끔찍한 실수예요 다른 모든 실수가 그렇듯 돌이킬 수 없는. 어째서 미리 일러주지 않으셨어요? 우리 뇌 사진을 찍어가실 때 선생님은 전부 아셨을 거예요. 선생님은 우리 뇌 구조가 유사하지만 치명적으로 다르다고 말씀하셨죠. 그녀는 언제나 살고 싶어했고 난 언제나 죽고 싶어했죠. 그녀가 삶을 사랑하는 만큼 난 죽음을 사랑했고 그녀가 삶에 대해 … Continue reading 샴쌍둥이 1→
샴쌍둥이 2-반쯤 열린 진료실 문밖으로 하늘빛 간호복을 입은 간호사들이 서성거린다. 그들은 소문처럼 무성하고 소문처럼 흐릿하고 소문처럼 아름답다. 여자는 의사의 유독 크고 부드러운 머리가 당장이라도 고꾸라져 꺾여버릴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의 얼굴은 지독히 붉은빛이고 그의 얼굴은 아이처럼 매끄러우며 왼쪽 귀에는 종유석 모양의 긴 살점이 늘어져 있다. 선생님은 내가 아는 사람을 닮았어요, 하고 여자는 참지 못하고 말한다. … Continue reading 샴쌍둥이 2→
메두사 1-거울 바깥과 거울 내부 깊숙한 곳의 균열. 소녀는 눈을 감고 그녀를 마주 보았다. 치명적인 균열이 입을 벌려 미소 지을 때까지. 부드럽고 관능적인 비명. 우리는 함께 비명을 질렀다. 지울 수 없는 자국이 하얀 숨으로 번져가고 줄어드는 동안 우리는 비명을. 쥐처럼 많은 남동생들이 어린시절을 만끽하며 우는 동안 소녀는 그녀에게로 향했다. 현관을 나선 뒤 엘리베이터를 건너 반대편 복도 … Continue reading 메두사 1→
메두사 2-소녀는 남동생들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아홉이나 되는 남자아이들을 단 한 번도 사랑해 본 적이 없다고 고백했다. 여자가 그녀의 뱀들을 저주한다고 말하기를 은밀히 기대하며. 그러나 그녀는 그런 식으로 동조하지 않았다. 뱀들은 입을 벌렸고 여자는 침묵하였다. 소녀는 참을 수 없는 수치심을 느꼈다. 소녀가 홀로 식어버린 찻물을 홀짝거리는 소리만이 축축한 방 안에 울려퍼졌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한 시간, 두 … Continue reading 메두사 2→
메두사 3-안에 있을 때, 하고 소녀는 말했다. 우린 언제나 바깥을 떠올려. 그러나 바깥에 있을 때 항상 안을 생각하는 건 아니야. 바깥은 괴로울 정도로 춥지만 우린 언제나 바깥에 대해 생각해. 이 베란다는 무척 애매한 높이지. 여기서 뛰어내려서 온전하게 착지할 수 있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어. 아마 다리나 머리가 깨지고 우린 돌이킬 수 없이 망가져버릴 거야. 하지만 우린 언제나 … Continue reading 메두사 3→
메두사 4-소녀는 다리를 넓게 벌려 소녀들의 베란다로 곧장 뛰어내렸다. 소녀들은 소녀가 그녀들의 열쇠라도 되는 듯 반겼으나 소녀는 아직 열쇠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소녀의 예상과는 달리 열쇠를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소녀들이 절망하여 주머니만 하염없이 뒤진 것이 이해가 될 정도로 그리 넓지 않은 베란다는 난장판이었다. 베란다 바닥은 낙엽들로 뒤덮여 있었으며 심지어 몇몇 이파리들은 아직 살아 있는 것처럼 … Continue reading 메두사 4→
개 여자-그녀는 개였고 여자였다. 개, 그리고 여자. 그녀의 주인은 종종 그녀가 개라는 사실을, 그리고 여자라는 사실을 견디지 못했다. 그녀가 개처럼 흐느낄 때, 개처럼 네 다리로 돌아다니고 개처럼 똥을 싸고 개처럼 오물을 흘릴 때, 개처럼 탐식하고 개처럼 체하고 개처럼 구토할 때, 주인은 그녀를 경멸하며 몰아붙였다. 넌 나쁜 개야, 넌 개야, 넌. 그녀가 첫 생리를 하던 무렵 주인은 … Continue reading 개 여자→
메리의 방-그녀가 어디에서 왔는지, 어떻게 이곳에 있게 되었는지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가 메리인 이유를 아는 이가 없었던 것처럼. 오직 파편적으로만 관련되어 있는 사람들, 오직 부분적인 죄와 책임의 연쇄들이 그녀를 이곳으로 몰아붙였다. 그녀는 죄와 책임, 사유와 탐구가 모여드는 장소였다. 한없이 검은 방, 폭발할 듯한 검은 빛으로 일렁거리는 방, 빛은 갈수록 비등하고 있었고 메리는 오직 목소리만을 들었다. … Continue reading 메리의 방→
맹아원 1-소녀와 부모는 긴 복도를 따라 걸었다. 베이지색 벽지에는 분홍빛의 꽃무늬들이 반점처럼 퍼져 있었다. 소녀는 꽃무늬들을 따라 걸었다. 부모는 소녀가 자신의 세계에 몰두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으나 희미한 웃음소리가 소녀의 내부로 번져와 종종 간신히 붙잡고 있던 숫자를 놓칠 수밖에 없었다. 내부는 습했다. 부모는 소녀를 놓치지 않기 위해, 소녀는 꽃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소녀의 무릎이 느슨해졌다. … Continue reading 맹아원 1→
맹아원 2-소녀는 사탕을 그대로 호주머니에 넣고서는 소년을 따라 두 번째 방으로 건너갔다. 꽃잎은 백아흔세 개였다. 두 번째 방은 모래와 작은 공들로 뒤덮여 있었다. 소년은 그곳이 놀이방이라고 말했다. 구석자리에서 맨발을 쪼그리고 앉아 모래성을 만들던 소년 두 명이 그들을 건너다보았다. 소년은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그들에게 소녀를 소개했다. 소년은 그들이 모두 교사라며 소녀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할 것을 요구했다. 소녀는 … Continue reading 맹아원 2→
맹아원 3-소녀는 대담하게도 눈 먼 소녀들의 곁에서 책을 읽었다. 소녀들 누구도 소녀만이 그들과 다른 책, 다른 세계, 다른 이야기에 파묻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소녀는 이야기들 속에서 기꺼이 죽었다. 소녀는 페이지 곳곳에 덫처럼 숨겨진 파열과도 같은 죽음들을 두 눈의 어렴풋한 빛으로 조심스럽게 쓸어넘겼다. 불안정한, 그러나 완전한 몰입. 소녀는 페이지의 날카로운 날들에 기꺼이 베였고 기쁘게 출혈하였다. 그러나 … Continue reading 맹아원 3→
발 없는 아이-소녀의 발은 작고 부드러웠다. 어여쁜 발을 간직하기 위해 소녀의 부모는 소녀의 발에 붕대를 감았다. 다른 여자아이들이 하는 식으로 전족을 한 것이었다. 그러나 소녀의 연약한 발은 압력을 견뎌내지 못하고 썩어버렸다. 소녀는 보랏빛으로 부풀어오른 발이 잘려나가는 모습을 목격하지 못했으나 몇 번이고 보았다. 발은 부풀어오른 희멀건 살로 소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소녀의 엄마는 곧 발이 자라날 것이라고 위로했다. 발은 … Continue reading 발 없는 아이→
감옥, 여자 1-그녀의 생은 안과 바깥에 속해 있었다. 그녀는 감옥의 주민이었고 거리의 시민이었다. 일 년의 절반, 여자는 감옥 바깥에 살았고 나머지 절반은 감옥 안에서 살았다. 그녀는 수인이었고 또 시민이었다. 수인들은 그녀와 함께 밤을 보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잠들지 않은 순간, 그녀는 그들과 함께 감옥을 견뎌내야 했다. 그들의 감옥에는 그녀가 있었다. 또, 그녀가 없었다. 그녀는 감옥으로 출근했고 … Continue reading 감옥, 여자 1→
돼지재판-재판은 있었으나 재판은 없었다. 그녀는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돼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돼지들의 법정이 아닌 사람들의 법정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무엇을 바라고 여자를 이곳까지 끌고 온 것일까? 죽은 소녀의 아버지는 그녀를 그 자리에서 심판할 수 있었다. 그가 그녀를 죽였다면, 다른 돼지들과 마찬가지로 고기로 만들었다면 그녀는 지금 죽지 않아도 되었을 … Continue reading 돼지재판→
죽ㅡ아이-아이가 울고 있었다. 여자는 아이를 품에 안고 어르며 진정시키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아이는 계속해서 울고 있었다. 아이는 울고 있었다. 아이가 여자의 가슴을 물었을 때 여자는 아이가 그녀를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이는 아직 죽지 않은 아이 살아서 울고 있는 아이 귓속을 찢을 듯이 울고 있는 그 아이는 여자를 원하고 있었다. 아이는 여자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을까? 여자는 … Continue reading 죽ㅡ아이→
소녀와 옷장 속 남자(맹아원4)-아이들에게는 환상이 있다. 환상은 현상이다. 소녀는 몽상가가 아니었지만 그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환상을 보고 있었다. 옷장 속 남자와 처음 마주친 것은 혼자 하는 술래잡기라는 기묘한 놀이에 대해 들었을 때였다. 소녀는 학습방 한구석에 앉아 소녀들이 이상한 의식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그녀들은 모두 그 놀이를 해보았다고 말했다. 곰인형의 배나 눈을 식칼로 찌르고 이제 네가 술래라고 … Continue reading 소녀와 옷장 속 남자(맹아원4)→
죽음의 교실 2-네게는 슬픔을 부르는 흔적이 있어, 네 슬픔이 슬픔을 갈구하는 것이라고 아이들은 속삭였다. 소년의 피부는 아이들이 숨겨 놓은 비밀로, 은밀한 상처들로, 증오의 표식들로 가득했다. 소년은 아이들의 현존을 지시하는 가련하고 뚜렷한 붉은 흔적이었다. 아이들은 소년이 그들의 삶인 양 굴었다. 마치 자신의 몸을 대하듯 가혹하게, 고통스럽게, 집요하게 남기는 흔적들. 소년을 둘러싼 흐느낌과 상처들 피부가 되어버린 상처들. 그러나 소년은 … Continue reading 죽음의 교실 2→
돼지목장-소년은 돼지목장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도 아버지의 아버지도 돼지목장에서 태어났다. 그랬기에 아무도 소년이 돼지목장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소년에게 있어 돼지목장에서의 탄생은 경이로울 정도로 우연적인, 유일한 사건이었다. 분홍빛의 두툼하고 풍만한 살들에 파묻혀서 소년은 나날이 돼지처럼 부풀었다. 소년이 돼지들의 분뇨와 진흙으로 가득한 진창에서 돼지들의 매혹적인 살 속에 파묻혀 지내는 것을 그의 부모는 못마땅해했다. 돼지목장을 지나가던 … Continue reading 돼지목장→
죽음의 교실 3-소년은 밀도 높은 비밀로 보호받고 있었다. 교실에 있을 때,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때 소년이 가장 편안하다는 사실을 교사는 이해하지 못했다. 범죄의 한복판에서 소년은 더 이상 미칠 듯한 불확실성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아이들은 소년에게 속해 있었고, 소년은 어둠의 깊은 창자에서 가만히 눈을 감고 그를 덮쳐오는 그 수많은 손들을 견디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텅 빈 방 안에서, … Continue reading 죽음의 교실 3→
고해성사(재림 예수 2,죽ㅡ아이 2)-그 애는 여자를 보고 있었다. 신처럼 무감하고 검은 눈, 그건 여자를 보고 있었다. 여자가 낳은 적 없는 눈, 다시 돌아간다면 그녀는 결코 그 눈을 주워오지 않을 것이다. 소년은 아무런 말도 없이 여자를 보고 있었다. 그녀의 모든 것을, 그녀의 파열을,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요구하는 무방비한 검은 눈, 여자는 악몽에서도 아이의 눈을 보았다. 끔찍하게 순수한 눈, 그것은 … Continue reading 고해성사(재림 예수 2,죽ㅡ아이 2)→
공중곡예-매달린 채로, 소녀는 숨을 멈추었다. 그녀는 갈수록 오랫동안 숨을 참을 수 있었다. 숨을 참는 동안에는 이곳이 아닌 다른 곳을 상상할 수 있었다. 여자는 아직도 소녀를 보고 있었고 소녀는 아직도 매달려 있었다. 그 이외에 소녀가 더 바라는 것은 없었다. Series Navigation << 고해성사(재림 예수 2,죽ㅡ아이 2)하멜른(낚시꾼) >>
하멜른(낚시꾼)-서글프게, 그러나 담담하게 일족은 자신들의 절멸에 동의하였다. 그들은 끔찍하게 긴 역사를 가지고 있었고 이제는 역사에 짓눌려 압사당할 지경이었다. 노인들은 가느다란 갈비뼈를 겨우 추스르며 가느랗게 헐떡이는 것이 고작이었고 젊은이들까지도 기형적으로 구부러진 등을 곧추세우지도 못한 채 절룩거리며 기어다니고는 했다. 그들은 더 이상 역사적인 존재 바깥의 세계를 상상할 여력조차 없었다. 쥐들은 죽어가고 있었다. 쥐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몰락하고 … Continue reading 하멜른(낚시꾼)→
잠수함1(람세스 호텔)-충분히 잘 상상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녀는 숨을 참았다. 승객들은 여자에게 무심했다. 소년은 해치에 고개를 내밀고 주저앉아 있었다. 그의 목이 잘려나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주에 맨 얼굴을 내밀고 살아남을 수 있는가? 그러나 곧 소년은 해치의 틈에서 고개를 빼내고 무어라 중얼거렸다. 람세스 호텔에 대해, 그곳을 구성하는 기묘한 규칙들에 대해, 그곳을 통과하는 다른 몸들에 부착된 서로 다른 … Continue reading 잠수함1(람세스 호텔)→
잠수함 2(람세스 호텔)-우리는 울고 있었어요, 하고 소녀는 속삭였다. 비가 내리고 있었고 한참을 울다가 우는 게 나뿐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그 애는 이미 죽어 있었을지도 몰라요. 선생님은 끝까지 문을 열어주지 않았죠.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에요. 난 그 애가 왜 다쳤는지 알고 있었어요. 난 그 애를 보고 있지 않았지만 그 애는 날 끈질기게 따라왔죠. 내 발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 … Continue reading 잠수함 2(람세스 호텔)→
목격자 1 (헨젤과 그레텔, 그라쿠스)-버스 창가에 기대어 그는 사드를 읽었다. 조금만 그에게 주의를 기울인다면 그가 읽는 것이 사드라는 사실을 누구라도 알아차릴 수 있었을 것이다. 버스기사의 면허증을 유심히 살펴보는 정도의 관심, 달의 흐릿한 얼룩을 더듬어 살피는 정도의 관심만. 책등은 끔찍할 정도로 굵었고 한 광인이 저주와 관능과 신념으로 지어올린 시간은 차 안에서 읽기에는 지나치게 길었다. 잔혹한 고문을 당하는 소년과 소녀들, 육체를 … Continue reading 목격자 1 (헨젤과 그레텔, 그라쿠스)→
목격자 2-그는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담담하게 사드를 읽었다. 소녀가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끊임없는 취약한 생명력으로 소녀는 무호흡의 상태에서 한없이 이야기하고 있었다. 슈바르츠발트에서 우리는 행복할 거예요. 우리는 갈기갈기 찢기지 않은 척할 거예요. 한 번도 망가진 적이 없는 척할 거예요. 엄마가 죽어버렸다고 믿지 않는 척할 거예요. 죽음을 바라지 않는 척할 거예요. 한 번도 죽지 않은 척할 거예요. 실존하지 … Continue reading 목격자 2→
부활자 2(목격자)-그녀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마치 훼손되지 않은 것처럼, 파괴되지도 와해되지도 찢어발겨지지도 않은 것처럼 그녀는 천천히 눈을. 그녀의 부활을 기뻐해주는 신도들은 없었다. 그녀는 잊혀진 신처럼 시체안치소에서 홀로 눈을 떴다. 끔찍이 차가운 냉동 장치로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희미한 부패의 냄새, 그것이 그녀가 처음 맡은 냄새였다. 그녀는 눈을 떴고 비좁은 냉동고 안에서 몸을 빼내었고 그녀와는 달리 죽음의 영속적인 … Continue reading 부활자 2(목격자)→
창녀의 무운시 1 (29번 채널, 맹아원)-너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 난 무언가를 죽을 정도로 바라본 적이 없어. 너를 가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 왜냐하면 가장 향기로운 장미, 속이 둥글게 접혀들어 분홍빛을 풍기는 취약한 아름다움, 아름다움은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솔직히 너는 잘생기지 않았어. 하지만 난 네가 아름답다는 걸 알았어. 넌 바퀴벌레의 밀지에서 갓 태어난 희고 축축한 알처럼, 거미줄에 매달린 … Continue reading 창녀의 무운시 1 (29번 채널, 맹아원)→
창녀의 무운시 2-샴쌍둥이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어. 오직 천사들만이 지극히 절제된 무호흡으로 노래를 부를 뿐이었지. 메시아는 뒤돌아보며 날갯짓한다 메시아는 오래도록 나는 동작을 연마해온 암캐다 메시아는 비상하는 암캐다 우리가 지상에 남겨진 암캐들이 오랫동안 기다려온 암캐 우리는 메시아의 날개를 찢고 장미처럼 검붉은 황홀한 피가 흘러내리는 어깻죽지에 입맞추며 그녀를 잡아먹을 것이다 그녀는 반쯤 잘려나간 날개를 퍼덕거리면서 그 날카로운 뼈와 날개로 우리를 … Continue reading 창녀의 무운시 2→
창녀의 무운시 3-여자는 화면을 가득 채운 영상을 알아볼 수 있었다. 활짝 열린 커다란 옷장의 실루엣. 정말 그것이었을까? 여자가 뒤늦게 채워넣은 절박한 기대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왜냐하면 모텔 주인 여자가, 시골 출신의 중년 여자가 어린이들을 위해 온몸에 분홍빛 클레이를 덕지덕지 바른 두 마리의 어린 돼지들과 말도 안 되는 수술을 한다고 나서는 무명 배우가 등장하는 프로그램을 보고 있을 리는 … Continue reading 창녀의 무운시 3→
창녀의 무운시 4-심부름을 다녀온 날부터 아이들은 소녀를 눈에 띄게 거북하게 여기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소녀의 착각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소녀는 더 이상 전처럼 무람없이 아이들에게 말을 걸 수 없었다. 그 애들이 29번 채널을 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수치스러운 거리를 깨부수고 다가갈 정도로 그 애들에게 절박하게 할 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절박한 것은 이해할 수 없는 거리뿐이었다. 대체 … Continue reading 창녀의 무운시 4→
여교사와 아이들(고해성사)-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우리는 당신을 완전히 소유하기보다 당신을 잃어버리기를 택했다. 당신은 너무도 그녀를 닮았고 우리는 당신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들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졸도할 듯 기뻤다. 당신은 어른이었고 여자였고 슬펐고 축축했다. 개를 연기하는 여교사를 연기하는 당신의 부드러운, 젖은 턱을 우리는 쓰다듬어 주었다. 당신의 턱과 가슴은 형편없이 젖어 있었다. 선생님을 가진다는 것, 그건 금지된 일이었다. 선생님을 … Continue reading 여교사와 아이들(고해성사)→
삐에로 1-그가 친구가 되어주겠다고 했을 때 난 그가 나를 위해 내려온 천사라고 생각했다. 난 어젯밤도 그젯밤도 셀 수 없는 오래전의 밤도 계속 기도했으니까. 그를 갖게 해 달라고. 그는 다정하고 상냥한 삐에로였다. 천사처럼 흰 분을 칠하고 붉은 미소를 달고 있는 그는 장미처럼 아름다웠다. 그를 보면 가슴 밑이 욱신거렸다. 난 그처럼 아름다운 것을 한 번도 가져본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 Continue reading 삐에로 1→
삐에로 2-우리는 함께 서 있었다. 그 애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서 나는 가만히, 그 애가 내 이름을 부르지 않기만을 바라며, 그래서 내가 그 애의 이름을 불러야 하지 않기만을 바라며 서 있었다. 당신이 어떤 밤에 속해 있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오늘은 화요일이 아니었으므로. 수요일에 하루를 넘긴 밤에 모든 것이 어제와 같을 수 있을까? 달에 새겨진 빛의 날인이 … Continue reading 삐에로 2→
개를 연기하는 교사를 연기하는 여자-교사는 소녀의 종아리를 때리며 비명처럼 날카롭게 소리 질렀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믿을 수 없게도 그녀는. 우리는 그녀를 해고하고 싶었다. 무대에서 쫓겨난 연극배우처럼 우스꽝스러운 명찰을 달고 그녀가 어디로 갈지, 음험하고 비정한 순진함으로 구경하고 싶었다. 소녀는 여자를 때리면서 울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녀를 해고했으니까! 그녀는 더 이상 우리의 개가 아니었다. 개의 역할을 잃어버린 그녀는 우리의 교사였다. 소녀는 그녀를 … Continue reading 개를 연기하는 교사를 연기하는 여자→
용서 1-달은 여자를 응시하고 있었다. 달은 여자가 죽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용서해 줘. 절망적으로 거대한 달 앞에서 여자는 수화기에 입술을 붙인 채 다급하게 속삭였다. 나를 용서해 줘. 수화기 너머에서는 불가해한 빛과도 같은 침묵이 번져들고 있었다. 누구시죠? 난 네 친구야. 내겐 친구가 없어요. 난 당신을 몰라요. 나를 용서해 줘. 뭘요? 나를 용서해 줘. 여자는 흐느끼고 있었다. 너를 … Continue reading 용서 1→
용서 2-여자의 입술이 야릇하게 벌어졌다. 그녀는 유리 너머의 불투명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평선은 보이지 않았다. 아주 오래 전부터 지평선은 그곳에 없었다. 최초의 정복자들이 도착하기 전에 그곳에 땅이 없었던 것처럼. 여자의 몸 위에 천사들의 분진처럼 투명하고 무한한 날개들이 내려앉았다. 교실 문 앞에서 마주친 너는 사탕을 줬어. 레몬맛 노란 사탕을 너는 입 속에서 꺼내 내게 건네 줬어. 난 … Continue reading 용서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