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하루살이들

  • 내일의 하루살이들 서문 - 모든 이야기는 네가 시작한 것이다. 굳이 숨을 쉬지 않아도 욕망하지 않아도 움켜쥐지 않아도. 제 밑을 찢어내며 같은 겨울을 맴도는 열차에는 누구도 막아낼 수 없는 창문들이 돋아나 있어. 죽음에는 등도 뼈도 없는데 등이 굽은 방랑자를 보고 헤어지지 못한 귀신의 얼굴을 떠올린 사냥꾼은 무엇을 쫓고 있었던 것일까. 창에는 내부도 외부도 없다. 그저 너머와 너머 서로의 금과 금의 … Continue reading 내일의 하루살이들 서문
  • 내일의 하루살이들 1회 - 1장 모든 이야기는 네가 시작한 것이다. 굳이 숨을 쉬지 않아도 욕망하지 않아도 움켜쥐지 않아도. 제 밑을 찢어내며 같은 겨울을 맴도는 열차에는 누구도 막아낼 수 없는 창문들이 돋아나 있어. 죽음에는 등도 뼈도 없는데 등이 굽은 방랑자를 보고 헤어지지 못한 귀신의 얼굴을 떠올린 사냥꾼은 무엇을 쫓고 있었던 것일까. 창에는 내부도 외부도 없다. 그저 너머와 너머 서로의 금과 … Continue reading 내일의 하루살이들 1회
  • 내일의 하루살이들 2회 - 이건 내 입으로 문 거야. 아팠어? 아니. 무슨 맛이 났어? 아무 맛도 안났어. 자, 어서. 너도 깨물어 봐. 이빨자국이 더럽다면 손톱이라도 괜찮을 거야. 이제 고작해야 몇 시간만 넘길 수 있으면 되니까. 너희는 붉게 출혈하며 뭉그러지는 별을 지켜보면서 서로의 손등을 깨물었다. 맨살은 짜지도 달지도 않았다. 돌아갈 곳이 없다. 소리가 무심코 집, 이라는 말을 했을 때 유리는 … Continue reading 내일의 하루살이들 2회
  • 내일의 하루살이들 3회 - 나는 처음을 기억해. 너를 두고 혼자 밤을 건너가던 날에 했던 약속을 기억하고 있어. 난 아무것도 잊지 않으니까. 내 것이 아닌 하루들까지도. 전부. 그래. 너는 나보다 많은 유리들을 가지고 있지. 너는 내가 헤아릴 수도 없는 처음들을 전부 기억하고 있잖아. 응. 그런데, 그게 처음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어쩌면 그보다 더 이전도 존재하지 않았을까? 기억하지 못하는데도? … Continue reading 내일의 하루살이들 3회
  • 내일의 하루살이들 4회 - 바깥이라고? 그럼 안은 어딘데? 황당해하며 중얼거리는 소리의 눈 앞에서 유리는 제 몸을 가리켰다. 여기, 이 안쪽. 숨과 물이 들어가는 곳. 아니야, 바깥은 이 방 바깥이야. 이 좁은 방을 바깥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유리에게 있어서 첫 일출을 맞이한 곳, 언어와 날숨이 새어나가는 곳, 피부를 둘러싼 것들이 모이고 흩어지는 외부는 아무리 좁은 공간이라도, 아무리 … Continue reading 내일의 하루살이들 4회
  • 내일의 하루살이들 5회 - 잘려나간 살점을 입 안에 넣고 짓씹었다. 시큼한 물이 입 속으로 배어들었다. 뜨끈한 체액은 역겹지 않았다. 살점은 누군가의 내부였을 것이다. 유리의 방, 유리의 몸, 유리의 오른팔이었을 것이다. 깨물린 자국이 듬성듬성 얼룩져 있는 유리의 팔목. 유리의 팔에서는 아무런 맛도 나지 않았지만, 오래도록 구워 양념이 되어 있는 살에서는 역하지 않은 비린내가 났다. 소리는 잇새로 끼어드는 살결을 우물우물 씹어 … Continue reading 내일의 하루살이들 5회
  • 내일의 하루살이들 6회 - 너와 나는 사람이고, 너희들은 모두 유리고. 그래도 유리, 나는 아주 가까이에 있는 외로움, 불안, 서글픔처럼 단단한 감정들만 알고 있으니까. 이름이나 색, 향기를 표현하는 구체적인 어휘들은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 그래서 논리적으로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유리, 나는 내가 불안하고 외로운 만큼, 서글픈 만큼, 네가 유리로 있어줬으면 좋겠어. 너는 어제를 잊어도. 네게 어제는 영원히 사라져버렸어도, 그래도 … Continue reading 내일의 하루살이들 6회
  • 내일의 하루살이들 7회 - 누구도 유리를 대신할 수는 없어요. 그래. 그리고 누구라도 유리를 대신할 수 있지. 당신도? 아니. 이름 없는 사람을 대신 할 수는 없어. 아무도. 그게 유리라도. 우리는 영영 뒤집어질 수 없을 것이다. 추락과 비상, 중력과 부력은 반대항이 될 수 없다. 비틀린 것들은 기울어진 채로 떨어지고 있다. 그뿐이다. 사내의 팔목은 상처 하나 없이 깨끗했다. 우리는 잊을 수 없을 … Continue reading 내일의 하루살이들 7회
  • 내일의 하루살이들 8회 - 한 명 한 명이 물방울을 연기하는 거야. 그래서 짙은 초록의 장마를 만들어내는 거야. 무지개가 아니고요? 응. 무지개를 기대할 정도로 어리석진 않아. 우리는 무대 위에서 꿈을 쫓지도 않을 거고 성공하지도 않을 거야. 우리는 무대 위에서 실패 할거야. 하얀 꽃, 붉은 꽃, 노란 꽃, 어떤 색이든 좋아, 어떤 색의 꽃이든 끝내 피지 못하고 우중충한 초록 이파리만을 떨구며 … Continue reading 내일의 하루살이들 8회
  • 내일의 하루살이들 9회 - 그들은 실망한 기색조차 아니었다. 악수를 청하지도 않았다. 유년 이전의 세계에 대해 온전히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너는 두 개의 다리로 짐승들의 군내가 진동하던 등대의 다락에서 내려갔다. 찍찍, 찍, 찍 하는 쥐들의 울음이 너를 배웅했다. 너는 먼 곳까지 펼쳐진 등대 빛의 그늘에 주저앉아 날 비린내가 풍기는 살을 모두 게워내었다. 얼음도 모래도 없는 얼음사막에서 유리의 방까지 가는 … Continue reading 내일의 하루살이들 9회
  • 내일의 하루살이들 10회 - 소녀는 그곳에서 연극을 할 계획이라고 속삭였다. 무대도 관객도 없이. 대본도 연출도 없이. 너희는 사막의 축축하고 끈적한 하얀 모래에 손을 담그고 너희의 손을 애처롭게 붙잡는 젖은 흙을 파헤치며 아래로 아래로 파고들었다. 너는 무얼 찾는지도 모르면서 손톱이 부러질 때까지 흙을 파내었다. 조개와 식물의 뿌리, 화석과 진주, 갑작스레 흙 아래에는 세계를 피해, 출현을 피하여 잠들어 있는 뱀과 쥐, … Continue reading 내일의 하루살이들 10회
  • 내일의 하루살이들 11회 - 그럼 붕어도 사람이면 안 되는 거니. 안되죠. 우리는 사람 아닌 것들을 사람이 아니게 만들기 위해서 사람으로 사는 건데요. 여자는 구역질을 해댔다. 소리의 웃옷이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쉰내가 진동했다. 오래도록 묵혀서 더 이상 붉지 않은 피의 냄새. 어째서 우리의 이야기에는 구정물을 토하고 배설하는 사람들 뿐일까요. 여자는 알아듣지 못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고요한 그물 속에서 몸을 뒤집으며 제 복부를 … Continue reading 내일의 하루살이들 11회
  • 내일의 하루살이들 12회 - 가랑이? 갈비뼈가 뻐근하게 벌어지고 그 사이로 서늘한 어휘들이 네 안을 베며 들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네가 한 번도 들은 적 없는 어휘들이. 혹시 그녀가 두려운, 두려운, 침묵으로 고함에 질려 찢겨져버린 귓속의 얇은 베일로 찢겨버린 일상의 바깥으로 도망가려는 것은 아닐까. 가지 마요, 나를 버리고. 그녀는 누구지? 그녀는 너를 버려두고 오래 전에 사라지지 않았던가. 너는 더 … Continue reading 내일의 하루살이들 12회
  • 내일의 하루살이들 13회 - 소리. 모두가 너를 두고 갈 거야. 허공에서 춤을 추던 여자가 눈을 감고 발을 내저으며 달려가던 곳으로, 육체와 마음의 공간을 잊고 돌아간 순수한 공간으로, 난 너를 데려갈 수 없어. 어째서? 그녀를 가장 먼저 생각한 건 나야. 네게 내려앉은 눈송이들을 하나하나 관찰한 건, 그래서 당장이라도 눈송이들이 표상하던 비극들을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수백의 유리들을 모두 기억하는 건 … Continue reading 내일의 하루살이들 13회
  • 내일의 하루살이들 14회 - 그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소리와 함께 할 때처럼 불을 켜고 책을 읽었는데 참을 수 없는 육성의, 그녀의 지친 목소리에 치를 떠는 중 눈앞에서 쥐색 머리칼을 쥐어뜯고 있는 노인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그녀는 곧 거울 속에 비친 그녀가 자신의 육성이었으며, 그 거울 때문에 혼잣말이 그대로 되비치는 것이었음을 깨닫고 들고 있던 책을 원시 시대의 돌망치처럼 사용해 거울을 내리찍어 산산조각냈다고 … Continue reading 내일의 하루살이들 14회
  • 내일의 하루살이들 15회 - 빛에 교살당한 어둠이 드러나는 날 사내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무덤가를 건넜다. 너를 보고 있었어. 노래를 불러야 할 입술이 여물기 전부터, 하나뿐인 음악이 시작되기 전부터. 빛의 언저리를 날벌레처럼 떠도는 하얀 먼지들이 제 자리를 찾아 가라앉기 전부터. 여자는 사내의 노래만을 듣고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 깊은 밤이라 사내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밤보다 시꺼먼 개가 사내의 왼쪽 귓바퀴를 물어뜯었을 때에도 … Continue reading 내일의 하루살이들 15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