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 돼지는 TV에서 당신을 본 적이 있다고 수줍게 말했다. 당신은 나처럼 어린 아이를 죽였죠. 뉴스에서 당신이 사건을 재연하는 모습을 봤어요. 당신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어요. 당신 얼굴은 돼지처럼 불그죽죽해 보였어요. 당신 얼굴은 천사의 심장처럼, 인육처럼 보였어요. 당신은 울고 있었어요. 당신은 아마 첫 번째보다 두 번째 연기를 더 잘 해냈을 거예요. 소년 돼지는 키득거리며 그럴 거야, 하고 … Continue reading 엔젤 스테이크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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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젤 스테이크 29
보호소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어린 교사들이 유달리 길고 하얀 얼굴들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여자는 다녀왔다고 말하지 않았고 교사들은 여자를 반기지 않았다. 그들은 한참 동안 마네킹을 들여다보듯 서로를 낯설게 바라보며 서 있었다. 여자는 보호소의 긴 복도를 따라 걸었다. 열린 문틈으로, 철제 침대에 누워 복도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소녀들이 보였다. 교사들은 복도 중간중간에 놓인 나무 의자들에 각자 앉아 … Continue reading 엔젤 스테이크 29
엔젤 스테이크 28
남자아이는 여자의 이마에 입을 맞춘 뒤 교실 앞문을 열고 나갔다. 교사는 남자아이가 유령이라는 듯 아무런 동요 없이 계속해서 원을 교차하고 탈주하는 직선에 대한 시를 설명하고 있었다. 여자는 귓속에서 녹아내리는 액상의 고요를 느꼈다. 고양이의 부드러운 미소가 공기를 주름잡았다. 여자는 악몽이 비운 눈들의 틈을 보았다. 그녀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미래에 대한 향수가 그녀를 짓눌렀다. 별을 찢어발기는 … Continue reading 엔젤 스테이크 28
엔젤 스테이크 27
소녀는 창문에 사과를 내밀고 웃듯이 어울리지 않는 밝음으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래, 너도 어떻게 된 건지 알고 있잖아. 여자는 흐느끼며 속삭였다. 꿈은 항상 나를 저주해. 꿈 속에서 우리는 언제나 갈기갈기 찢기고 저주받고 냉장고처럼 추운 우주에서 영원히 부유하며 병든 채 죽어갈 것을 선고받지. 그건 우리가 남의 꿈 속에 잠입한 불청객이기 때문일까? 꿈 얘기를 더 해 봐. 소녀는 … Continue reading 엔젤 스테이크 27
엔젤 스테이크 26
점심식사를 마친 아이들이 우글거리며 복도로 밀려나왔고 남자아이는 군중 속에 파묻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여자는 남자아이를 찾으려 하지 않았다. 남자아이가 떨어뜨린 마론인형이 여자의 발치에 있었다. 여자는 벌거벗은 마론인형을 주워들었다. 마론인형의 이마에 새겨져 있던 붉은 글씨는 흐릿하게 지워져 있었다. 여자는 마론인형의 이마를 조심스럽게 쓸어 보았다. 붉은 글씨는 립스틱으로 쓰인 것 같았다. 여자는 붉은 립스틱이 묻은 엄지손가락을 입술에 … Continue reading 엔젤 스테이크 26
엔젤 스테이크 25
그 애가 암캐이고 내가 그 애의 무관심한 학대자이던 시절에 그 애는 내게 한 마리의 작은 새를 선물했어. 연분홍빛의 입술 사이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작은 새의 날개가 물려 있었지. 새는 내 손바닥 위에서 미친 듯이 박동하고 있었어. 믿을 수 없이 작은 심장, 믿을 수 없이 뜨거운, 순식간에 증발해버릴 것 같은 투명한 살. 새는 내 위에서 … Continue reading 엔젤 스테이크 25
엔젤 스테이크 24
교사는 차분하게 말했다. 하나의 죽음과 하나의 현실, 결코 현실들을 뒤섞어서는 안 돼. 유리, 너는 정말 심각한 상태구나. 네가 다른 친구들과 함께 계속 공부해도 괜찮을지 잘 모르겠어. 다른 아이들은 죽음에 잘 적응하고 있단다. 아이들은 죽음이 하나의 악몽이라는 걸 잘 알고 있어. 그게 사실이 아니라도 그걸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단다. 미치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단 … Continue reading 엔젤 스테이크 24
엔젤 스테이크 23
영사된 여자의 흰 몸이 흔들렸다. 검은 개의 마스크를 쓴 알몸의 남자아이가 그녀의 마른 척추를 걷어찼다. 여자는 몸을 더욱 움츠렸고 남자아이는 작고 단단한 발로 그녀의 배를 걷어찼다. 여자는 헐떡이며 비명을 질렀다. 사물의 뼈를 부수고, 그리고? 뭘 해야 하죠? 여자는 울부짖었다. 사물이 부서지고 죽음이 찾아오고 동공이 풀어지고 유령들이 다가들고 희곡은 끝났습니다. 희곡은 거기까지였습니다. 하지만 연극은 끝나지 않았어요. … Continue reading 엔젤 스테이크 23
엔젤 스테이크 22
오래전에, 하고 여자는 속삭였다. 내가 죽기 전에 나를 사랑하는 남자를 꿈꾼 적 있어. 그 꿈에서 나는 순진한 여자아이였고 그는 부드럽게 웃을 줄 아는 다정한 남자였어. 그는 내가 다니는 학교의 교사였어. 우리 반은 아니었고 옆 반의 교사였지. 아이들은 다정하고 아름다운 그 남자를 사랑했어. 나 역시 그를 사랑했어. 웃을 때, 그는 어린 소년처럼 보였어. 우린 옛 교정의 … Continue reading 엔젤 스테이크 22
엔젤 스테이크 21
그리고, 초록은 헐떡이며 속삭였다. 죽은 의사들을, 어쩌면 살아남은 의사들을. 우주는 점점 멀어지고 있어. 하나의 점과 하나의 점은 영원히 합류할 수 없는 방향으로 멀어지고 있어. 점들은 지워지지만 사라지지는 않아. 우주는 희미한 얼룩들로 더러워진 유리창과 같아. 아빠의 어머니는 아빠에게 그걸 알려주었어. 많은 꿈들은 서로를 잊고 많은 꿈들은 서로를 기억하며 많은 꿈들의 그림자는 거미줄처럼 어지러이 얽혀 있다고. 미로 … Continue reading 엔젤 스테이크 21
엔젤 스테이크 20
하지만 맹세를 하면서 그 애는 조금도 즐거워 보이지 않았어요. 오, 그 애는 정말 다정했어요. 나를 위해서 독방에 있는 숨겨진 통로를 알려주기도 했답니다. 선생님, 내가 이 말을 하는 건 당신들이 그 통로를 막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통로로 진입하는 방법은 순전히 관념적인 것이므로 꿈을 사라지게 만들 수 없는 자들은 비밀스러운 통로로 진입하는 것을 결코 막을 수 없습니다. … Continue reading 엔젤 스테이크 20
엔젤 스테이크 19
여자는 맞다고, 정말로 TV는 짐승들을 미치게 만든다고. 즉, 신을 망각했던 짐승들을 신과 같은 상태로 만든다고 말했다. 녹색 바다의 왕은 천체 망원경에 광적인 시간 혹은 망상이 들어 있다고 믿어서 천체 망원경들을 사형에 처했죠. 사형 집행자들은 천체 망원경을 가장 더러운 구둣발로 밟아 모욕하였고 망가진 기계장치를 불태웠어요. 망원경의 잔해에서는 역겨운 기름 냄새가 진동했는데 태우고 남은 재를 왕은 가장 … Continue reading 엔젤 스테이크 19
엔젤 스테이크 18
재판정 내부는 시체 안치소처럼 추웠다. 여자는 어깨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남자아이는 여자에게 긴장하지 말라고 거듭 중얼거렸지만 그런 위로는 변호사에게 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변호사의 창백한 얼굴은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변호사는 습관적으로 웃옷을 더듬다가 셔츠에 주머니가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깨달은 듯 당황하며 셔츠 소매로 얼굴을 닦았다. 그들이 재판정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동안 회랑을 … Continue reading 엔젤 스테이크 18
엔젤 스테이크 17
1번 채널은 뉴스 채널이었다. 검은 정장을 차려입은 여자가 창문닦이 남자의 살해 사건을 보도했다. 소녀들과 남자아이는 여자 주변에 그림자처럼 모여들어 함께 TV 화면을 응시했다. 그곳에 비밀스러운 암호들이 감추어져 있는 것처럼, 혹은 투명한 투계를 바라보고 있는 군중들처럼. 아나운서는 청소 노동자가 49세의 남자이며 죽음 당시에 5명의 아이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고 보도했다. 그는 고층 빌딩의 창문을 닦고 있었으며 로프를 … Continue reading 엔젤 스테이크 17
엔젤 스테이크 16
촬영이 끝났을 때, 여자는 처음부터 모든 카메라들이 꺼져 있었음을 알아차렸다. 그들이 문을 열고 들어서기 전부터. 유령 같은 이미지들 유령같은 배우들 유령 같은 방송들. 여자와 스텝들과 우주복을 입은 배우들은 미동도 없이 마네킹처럼 정지해 있었다. 그들은 촬영의 끝을 선언하지 않았지만 여자는 촬영이 끝났음을 알아차렸다. 여자들은 여전히 무대 주위를 돌고 있는 소녀들을 하나씩 불러세웠다. 여자가 소녀들에게 촬영이 끝났다고 … Continue reading 엔젤 스테이크 16
엔젤 스테이크 15
암오소리는 전문 화가가 되어 전시회를 여는 일은 완전히 포기했지만 아직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자신이 작업하고 있는 그림의 구상을 이상스러울 정도로 구체적으로 이야기했다. 눈부시게 하얀 해변에 창백한 여자가 누워 있어요. 그녀는 시체예요. 심장이 멎었고 호흡하지 않으며 피조차 응고되어 버린 시체요. 그녀는 벌거벗은 채이고 그녀의 몸 위로 물결이 오가요. 파도가 그녀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지고 다시 물러나기를 … Continue reading 엔젤 스테이크 15
엔젤 스테이크 14
문지기는 적어도 그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안다고 믿을 수 있었어요. 시골 사람은 적어도 마지막 순간에 자기가 어디에 있었는지 알 수 있었어요. 거미 서기는 이렇게 말해요. 그것은 합법적인, 그러나 동시에 범죄적인 예속관계라고요. 그리고 이렇게도 말하죠. 끔찍하고 불가능한 노력을 통해 당신은 문지기가 될 수 있을 거예요. 그러한 희망은 개연적이며 심지어는 현실적이기도 하죠. 극히 낮은 확률이지만 그래도 … Continue reading 엔젤 스테이크 14
엔젤 스테이크 13
너는, 남자아이는 여자의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네 죽음을 내게 맡겼어. 나라도 그렇게 했을 거야. 내가 죽을 작정이었다면 난 나의 죽음을 엄마도 아빠도 심지어는 나 자신의 운에도 맡기지 않고 너에게 맡겼을 거야. 네 작은 손이 내 목을 잘 조를 수 있도록 난 네 손 위에 손을 얹었을 거야. 하지만 그건 아마 실패로 끝났겠지. 나는 졸도에 가까운 … Continue reading 엔젤 스테이크 13
엔젤 스테이크 12
어떤 날은 다른 꿈을 꾸기도 하지. 여자는 남자아이가 여자의 꿈에 대해 질문을 했다는 듯, 언제나 파리의 꿈을 꾸느냐고 묻기라도 했다는 듯 말을 이었다. 나는 긴 복도 위에 서 있어. 복도가 지상으로부터 떨어져 공중을 부유하고 있음을 나는 느껴. 난 중심을 잃지 않고 바닥에 단단히 들러붙어서 서 있지만, 내가 고착되어 있는 바닥은 지상으로부터 떨어져 있음을 나는 느껴. … Continue reading 엔젤 스테이크 12
엔젤 스테이크 11
그 뒤 밀레나가 어떻게 되었는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 상상할 수조차 없습니다. 나는 그녀에게 안부를 묻는 편지를 보냈고 그녀는 결코 답장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뒤늦게야 내가 그녀에게 안부를 묻는 편지를 보낸 적이 없음을, 나는 분명히 그녀에게 안부를 묻는 편지를 썼지만 그것이 그녀에게 도달한 적도, 그녀를 향한 적조차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내가 밀레나의 주소를 알지 못한다는 것을 … Continue reading 엔젤 스테이크 11
엔젤 스테이크 10
여자는 남자아이가 그녀가 죽인 여자아이와 놀랄 정도로 닮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자아이의 눈은 여자처럼 검었고 남자아이의 눈은 투명한 푸른색이었지만 그들의 흰 얼굴과 부드러운 콧날, 붉은 입술은 쌍둥이처럼 닮았다. 예를 들어, 여자아이가 남자아이의 쌍둥이 동생이며 남자아이에게 목이 졸려 살해당한 여자아이가 골목에서 고양이의 목을 조르고 있는 것을 여자가 발견하였고 여자아이를 여자가 살해한 것이라면, 남자아이가 발견한 것은 그의 죽은 … Continue reading 엔젤 스테이크 10
엔젤 스테이크 9
여자는 어항처럼 검고 축축한 경찰차에 담겨 보호소로 돌아갔다. 쥐의 얼굴에 창녀의 화장은 잘 어울릴 것이라고 여자는 생각했다. 쥐 경찰의 집에는 실제로 창녀의 가면들이 있을지 몰랐다. 그는 창녀를 연기하는 것을 즐겼으므로. 첫 번째 인터뷰 이후 여자에게 접근하는 매체는 더 많아졌다. 첫 번째 방송출연, 다섯 명의 남자 패널들이 여자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세트장 내부에는 남자들뿐이었다. 조명이 비추어지는 반원 형태의 무대 바깥에는 카메라를 들고 있거나 … Continue reading 엔젤 스테이크 9
엔젤 스테이크 8
남자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건 터무니 없는 착각이야. 난 모든 쥐들만큼이나 오래 살았으니까. 난 너보다 적어도 수십억 년은 더 살았을 거야. 난 내 어머니만큼이나, 아니, 내 조상들만큼이나 늙었단다. 물론 내게도 어린 시절은 있었지. 하지만 어느 밤부터는 아직 죽지 않고 내 뼈와 근육 속에 남아 있는 목소리들이 이렇게 속삭이는 거야. 네 증조모는 처음으로 달에 도달한 쥐였어. 그녀는 훈련조차 받지 않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우주선 속으로 숨어들었지. 최초의 우주인은 … Continue reading 엔젤 스테이크 8
엔젤 스테이크 7
삶이 일회적인 것이라고 믿을 때는 모든 게 쉬웠죠, 하고 교사는 말했다. 아이들은 옥상에서 뛰어내린 뒤 천사가 되리라는 희망에 잠겨 사라질 수 있었어요. 하지만 바스라져 산산조각난 몸은 여전히 살아 있고 이제 우리는 천사가 정신이 아니라 육체, 그것도 가장 새빨간 고기라는 것을 알죠. 교사는 슬프게 웃었고 그녀의 자줏빛 잇몸이 드러났다. 신원미상의 시체들은 실습용으로 기증되고 냉동고 속에서 눈꺼풀의 근육이 돌이킬 수 없이 손상되어가는 것을 … Continue reading 엔젤 스테이크 7
엔젤 스테이크 6
판사는 이번 안건과는 무관한 내용을 들먹이지 말라고 권위적으로 말했고 검사와 변호사는 더 이상 그녀가 피해자였던 다른 사건들에 대해 말하지 않았으나 검사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눈치였다. 그는 준비해온 대사를 잊은 듯 종종 말을 더듬고 버벅거렸다. 이미 그가 준비한 서류의 내용을 알고 있는 판사나 변호사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여자와 청중들은 검사의 백치같은 말더듬증을 경악하며 듣고 있었다. 그녀는 최,악의. 최악의 살인자, 살인자입니다. 밤은, 그러니까 비가 … Continue reading 엔젤 스테이크 6
엔젤 스테이크 5
여자는 차들 사이를 쏘다니는 남자가 얼마나 위험해 보였는지 말하고 싶었다. 당신이 당장이라도 로드킬을 당할 것 같아서 난 속이 메스꺼웠다고. 그러나 여자는 말하지 않았다. 로드킬 당한 모든 짐승들을 위해 울 수는 없음을 여자는 알고 있었다. 누군가는 로드킬 하고 누군가는 로드킬 당한다. 그러나 누가 누구의 꿈 속에서 헤매는지 꿈의 주인이 누구인지 확언할 수 있는 짐승은 없다. 기억과 의지를 잃은 채 긴 악몽을 꾸는 … Continue reading 엔젤 스테이크 5
엔젤 스테이크 4
너는 시궁창에서 피어오르는 잘려나간 꼬리야. 여자는 꿈을 꾸듯 몽롱하게 중얼거렸다. 아이들은 쥐 꼬리를 잘라 오라는 숙제를 받아오지. 부유한 아이들은 가정부의 꼬리를 잘라 학교에 제출해. 가정부를 가질 정도로 부유하지 못한 아이들은 엄마의 꼬리를 제출하고 엄마도 아빠도 없는 고아들은 제 꼬리를 잘라서 숙제로 내지. 선생님은 편지들을 보관할 때 쓸 법한 커다란 종이 박스에 꼬리를 담아. 출석번호 순으로 한 명씩 줄을 서서 쥐 꼬리를 … Continue reading 엔젤 스테이크 4
엔젤 스테이크 3
쥐는 미시적인 생물들-날파리들과 곰팡이, 음지식물-밖에 없는 음험한 검은 골목에 차를 대고 운전석 시트를 뒤로 젖힌 뒤 여자 쪽으로 건너와 여자의 머릿가죽을 물어뜯었다. 그의 붉고 더러운 성기가 여자의 어린 성기 속을 파고들었다. 남자는 피투성이의 신경 덩어리를 날카롭고 정밀하게 베어내었고 여자는 피로 침수된 기계장치 속에서 온실 속의 빙하처럼 멍청하게 떠다녔다. 저열한 전류의 파동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여자는 속삭였다. 여름방학 때 난 교실에 … Continue reading 엔젤 스테이크 3
엔젤 스테이크 2
몽상과 악몽의 꿈이 내게는 훨씬 직관적이며 즉물적인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직관과 즉물은 환상이에요. 모든 것은 매개되어 있으며 심지어는 꿈이나 환상과 같이 추상적인 이미지조차도 그렇죠. 여자는 초조하게 중얼거렸다. 난 응급실에서 살며 수혈을 하는 늙은 개에 대해 적었어요. 그건 내가 유년부터 반복해서 꾸던 집요한 악몽이었죠. 꿈 속에서 나는 붉고 축축한 피를 예고 없이 뽑히는 가엾은 개였고 동시에 그 개의 배에 날카로운 바늘을 꽂고 … Continue reading 엔젤 스테이크 2
엔젤 스테이크 1
나는 학대당한 틴에이저. 사실 나 자신은 스스로 완벽하게 만들어낸 오만하고 버르장머리 없는 피학대 청소년의 역할을 마음껏 즐기고 있다. 이것이 내 삶이다. 네 글은 로드킬 같아, 미프티. (헬레네 헤게만, 혹은 미프티 in 『아홀로틀 로드킬』.) 기꺼이 미치는, 가장 붉은 여자들에게. 그녀는 피해자이며 동시에 가해자였다. 빌어먹을, 그녀는 미성년이었다. 열다섯 혹은 열넷, 혹은, 아무도 그녀가 무엇인지, 그녀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 자신조차도. 왜냐하면 … Continue reading 엔젤 스테이크 1
내일의 하루살이들 15회
빛에 교살당한 어둠이 드러나는 날 사내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무덤가를 건넜다. 너를 보고 있었어. 노래를 불러야 할 입술이 여물기 전부터, 하나뿐인 음악이 시작되기 전부터. 빛의 언저리를 날벌레처럼 떠도는 하얀 먼지들이 제 자리를 찾아 가라앉기 전부터. 여자는 사내의 노래만을 듣고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 깊은 밤이라 사내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밤보다 시꺼먼 개가 사내의 왼쪽 귓바퀴를 물어뜯었을 때에도 … Continue reading 내일의 하루살이들 15회
내일의 하루살이들 14회
그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소리와 함께 할 때처럼 불을 켜고 책을 읽었는데 참을 수 없는 육성의, 그녀의 지친 목소리에 치를 떠는 중 눈앞에서 쥐색 머리칼을 쥐어뜯고 있는 노인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그녀는 곧 거울 속에 비친 그녀가 자신의 육성이었으며, 그 거울 때문에 혼잣말이 그대로 되비치는 것이었음을 깨닫고 들고 있던 책을 원시 시대의 돌망치처럼 사용해 거울을 내리찍어 산산조각냈다고 … Continue reading 내일의 하루살이들 14회
내일의 하루살이들 13회
소리. 모두가 너를 두고 갈 거야. 허공에서 춤을 추던 여자가 눈을 감고 발을 내저으며 달려가던 곳으로, 육체와 마음의 공간을 잊고 돌아간 순수한 공간으로, 난 너를 데려갈 수 없어. 어째서? 그녀를 가장 먼저 생각한 건 나야. 네게 내려앉은 눈송이들을 하나하나 관찰한 건, 그래서 당장이라도 눈송이들이 표상하던 비극들을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수백의 유리들을 모두 기억하는 건 … Continue reading 내일의 하루살이들 13회
내일의 하루살이들 12회
가랑이? 갈비뼈가 뻐근하게 벌어지고 그 사이로 서늘한 어휘들이 네 안을 베며 들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네가 한 번도 들은 적 없는 어휘들이. 혹시 그녀가 두려운, 두려운, 침묵으로 고함에 질려 찢겨져버린 귓속의 얇은 베일로 찢겨버린 일상의 바깥으로 도망가려는 것은 아닐까. 가지 마요, 나를 버리고. 그녀는 누구지? 그녀는 너를 버려두고 오래 전에 사라지지 않았던가. 너는 더 … Continue reading 내일의 하루살이들 12회
내일의 하루살이들 11회
그럼 붕어도 사람이면 안 되는 거니. 안되죠. 우리는 사람 아닌 것들을 사람이 아니게 만들기 위해서 사람으로 사는 건데요. 여자는 구역질을 해댔다. 소리의 웃옷이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쉰내가 진동했다. 오래도록 묵혀서 더 이상 붉지 않은 피의 냄새. 어째서 우리의 이야기에는 구정물을 토하고 배설하는 사람들 뿐일까요. 여자는 알아듣지 못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고요한 그물 속에서 몸을 뒤집으며 제 복부를 … Continue reading 내일의 하루살이들 11회
내일의 하루살이들 10회
소녀는 그곳에서 연극을 할 계획이라고 속삭였다. 무대도 관객도 없이. 대본도 연출도 없이. 너희는 사막의 축축하고 끈적한 하얀 모래에 손을 담그고 너희의 손을 애처롭게 붙잡는 젖은 흙을 파헤치며 아래로 아래로 파고들었다. 너는 무얼 찾는지도 모르면서 손톱이 부러질 때까지 흙을 파내었다. 조개와 식물의 뿌리, 화석과 진주, 갑작스레 흙 아래에는 세계를 피해, 출현을 피하여 잠들어 있는 뱀과 쥐, … Continue reading 내일의 하루살이들 10회
내일의 하루살이들 9회
그들은 실망한 기색조차 아니었다. 악수를 청하지도 않았다. 유년 이전의 세계에 대해 온전히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너는 두 개의 다리로 짐승들의 군내가 진동하던 등대의 다락에서 내려갔다. 찍찍, 찍, 찍 하는 쥐들의 울음이 너를 배웅했다. 너는 먼 곳까지 펼쳐진 등대 빛의 그늘에 주저앉아 날 비린내가 풍기는 살을 모두 게워내었다. 얼음도 모래도 없는 얼음사막에서 유리의 방까지 가는 … Continue reading 내일의 하루살이들 9회
내일의 하루살이들 8회
한 명 한 명이 물방울을 연기하는 거야. 그래서 짙은 초록의 장마를 만들어내는 거야. 무지개가 아니고요? 응. 무지개를 기대할 정도로 어리석진 않아. 우리는 무대 위에서 꿈을 쫓지도 않을 거고 성공하지도 않을 거야. 우리는 무대 위에서 실패 할거야. 하얀 꽃, 붉은 꽃, 노란 꽃, 어떤 색이든 좋아, 어떤 색의 꽃이든 끝내 피지 못하고 우중충한 초록 이파리만을 떨구며 … Continue reading 내일의 하루살이들 8회
내일의 하루살이들 7회
누구도 유리를 대신할 수는 없어요. 그래. 그리고 누구라도 유리를 대신할 수 있지. 당신도? 아니. 이름 없는 사람을 대신 할 수는 없어. 아무도. 그게 유리라도. 우리는 영영 뒤집어질 수 없을 것이다. 추락과 비상, 중력과 부력은 반대항이 될 수 없다. 비틀린 것들은 기울어진 채로 떨어지고 있다. 그뿐이다. 사내의 팔목은 상처 하나 없이 깨끗했다. 우리는 잊을 수 없을 … Continue reading 내일의 하루살이들 7회
내일의 하루살이들 6회
너와 나는 사람이고, 너희들은 모두 유리고. 그래도 유리, 나는 아주 가까이에 있는 외로움, 불안, 서글픔처럼 단단한 감정들만 알고 있으니까. 이름이나 색, 향기를 표현하는 구체적인 어휘들은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 그래서 논리적으로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유리, 나는 내가 불안하고 외로운 만큼, 서글픈 만큼, 네가 유리로 있어줬으면 좋겠어. 너는 어제를 잊어도. 네게 어제는 영원히 사라져버렸어도, 그래도 … Continue reading 내일의 하루살이들 6회
내일의 하루살이들 5회
잘려나간 살점을 입 안에 넣고 짓씹었다. 시큼한 물이 입 속으로 배어들었다. 뜨끈한 체액은 역겹지 않았다. 살점은 누군가의 내부였을 것이다. 유리의 방, 유리의 몸, 유리의 오른팔이었을 것이다. 깨물린 자국이 듬성듬성 얼룩져 있는 유리의 팔목. 유리의 팔에서는 아무런 맛도 나지 않았지만, 오래도록 구워 양념이 되어 있는 살에서는 역하지 않은 비린내가 났다. 소리는 잇새로 끼어드는 살결을 우물우물 씹어 … Continue reading 내일의 하루살이들 5회
내일의 하루살이들 4회
바깥이라고? 그럼 안은 어딘데? 황당해하며 중얼거리는 소리의 눈 앞에서 유리는 제 몸을 가리켰다. 여기, 이 안쪽. 숨과 물이 들어가는 곳. 아니야, 바깥은 이 방 바깥이야. 이 좁은 방을 바깥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유리에게 있어서 첫 일출을 맞이한 곳, 언어와 날숨이 새어나가는 곳, 피부를 둘러싼 것들이 모이고 흩어지는 외부는 아무리 좁은 공간이라도, 아무리 … Continue reading 내일의 하루살이들 4회
내일의 하루살이들 3회
나는 처음을 기억해. 너를 두고 혼자 밤을 건너가던 날에 했던 약속을 기억하고 있어. 난 아무것도 잊지 않으니까. 내 것이 아닌 하루들까지도. 전부. 그래. 너는 나보다 많은 유리들을 가지고 있지. 너는 내가 헤아릴 수도 없는 처음들을 전부 기억하고 있잖아. 응. 그런데, 그게 처음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어쩌면 그보다 더 이전도 존재하지 않았을까? 기억하지 못하는데도? … Continue reading 내일의 하루살이들 3회
내일의 하루살이들 2회
이건 내 입으로 문 거야. 아팠어? 아니. 무슨 맛이 났어? 아무 맛도 안났어. 자, 어서. 너도 깨물어 봐. 이빨자국이 더럽다면 손톱이라도 괜찮을 거야. 이제 고작해야 몇 시간만 넘길 수 있으면 되니까. 너희는 붉게 출혈하며 뭉그러지는 별을 지켜보면서 서로의 손등을 깨물었다. 맨살은 짜지도 달지도 않았다. 돌아갈 곳이 없다. 소리가 무심코 집, 이라는 말을 했을 때 유리는 … Continue reading 내일의 하루살이들 2회
내일의 하루살이들 1회
1장 모든 이야기는 네가 시작한 것이다. 굳이 숨을 쉬지 않아도 욕망하지 않아도 움켜쥐지 않아도. 제 밑을 찢어내며 같은 겨울을 맴도는 열차에는 누구도 막아낼 수 없는 창문들이 돋아나 있어. 죽음에는 등도 뼈도 없는데 등이 굽은 방랑자를 보고 헤어지지 못한 귀신의 얼굴을 떠올린 사냥꾼은 무엇을 쫓고 있었던 것일까. 창에는 내부도 외부도 없다. 그저 너머와 너머 서로의 금과 … Continue reading 내일의 하루살이들 1회
내일의 하루살이들 서문
모든 이야기는 네가 시작한 것이다. 굳이 숨을 쉬지 않아도 욕망하지 않아도 움켜쥐지 않아도. 제 밑을 찢어내며 같은 겨울을 맴도는 열차에는 누구도 막아낼 수 없는 창문들이 돋아나 있어. 죽음에는 등도 뼈도 없는데 등이 굽은 방랑자를 보고 헤어지지 못한 귀신의 얼굴을 떠올린 사냥꾼은 무엇을 쫓고 있었던 것일까. 창에는 내부도 외부도 없다. 그저 너머와 너머 서로의 금과 금의 … Continue reading 내일의 하루살이들 서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