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애가 암캐이고 내가 그 애의 무관심한 학대자이던 시절에 그 애는 내게 한 마리의 작은 새를 선물했어. 연분홍빛의 입술 사이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작은 새의 날개가 물려 있었지. 새는 내 손바닥 위에서 미친 듯이 박동하고 있었어. 믿을 수 없이 작은 심장, 믿을 수 없이 뜨거운, 순식간에 증발해버릴 것 같은 투명한 살. 새는 내 위에서 … Continue reading 엔젤 스테이크 25
[월:] 2022년 09월
엔젤 스테이크 24
교사는 차분하게 말했다. 하나의 죽음과 하나의 현실, 결코 현실들을 뒤섞어서는 안 돼. 유리, 너는 정말 심각한 상태구나. 네가 다른 친구들과 함께 계속 공부해도 괜찮을지 잘 모르겠어. 다른 아이들은 죽음에 잘 적응하고 있단다. 아이들은 죽음이 하나의 악몽이라는 걸 잘 알고 있어. 그게 사실이 아니라도 그걸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단다. 미치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단 … Continue reading 엔젤 스테이크 24
엔젤 스테이크 23
영사된 여자의 흰 몸이 흔들렸다. 검은 개의 마스크를 쓴 알몸의 남자아이가 그녀의 마른 척추를 걷어찼다. 여자는 몸을 더욱 움츠렸고 남자아이는 작고 단단한 발로 그녀의 배를 걷어찼다. 여자는 헐떡이며 비명을 질렀다. 사물의 뼈를 부수고, 그리고? 뭘 해야 하죠? 여자는 울부짖었다. 사물이 부서지고 죽음이 찾아오고 동공이 풀어지고 유령들이 다가들고 희곡은 끝났습니다. 희곡은 거기까지였습니다. 하지만 연극은 끝나지 않았어요. … Continue reading 엔젤 스테이크 23
엔젤 스테이크 22
오래전에, 하고 여자는 속삭였다. 내가 죽기 전에 나를 사랑하는 남자를 꿈꾼 적 있어. 그 꿈에서 나는 순진한 여자아이였고 그는 부드럽게 웃을 줄 아는 다정한 남자였어. 그는 내가 다니는 학교의 교사였어. 우리 반은 아니었고 옆 반의 교사였지. 아이들은 다정하고 아름다운 그 남자를 사랑했어. 나 역시 그를 사랑했어. 웃을 때, 그는 어린 소년처럼 보였어. 우린 옛 교정의 … Continue reading 엔젤 스테이크 22
양과 장미 32
Delusion level 8.8. 길게 찢어진 입술은 보지를 닮았어요. 선생님. 어린 산딸기에 칼집을 내서 상처가 벌어진 모습도요. 아이들이 만지작거리다가 찢어버리는 꽃잎도요. 눈꺼풀도요. 모든 상처는 보지를 닮았어요. 가장 선량한 생물이 입술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좀 좋아져요. 당신들의 인생이 단순하고 보잘 것 없다고 생각하면요. 하지만 아주 유명한 사람들, 우울로 성공한 사람들이 보기보다 더 우울하다고 생각하면 질투로 미쳐버릴 … Continue reading 양과 장미 32
양과 장미 31
Act. 17. 앨리스는 못생긴 여자아이였다. 교복을 입고 가지런히 앉은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감탄하면서 출석을 부르며 한명씩 너무 예쁘다고 칭찬을 하던 영어 교사도 앨리스의 얼굴을 당황스럽게 바라보며 성실하게 생겼네, 하고 말을 얼버무렸다. 아이들이 키득거렸다. 급식실에서 반찬을 나눠주던 여자들이 앨리스를 보면서 뭐라고 말을 건넸고 앨리스는 듣지도 이해하지도 못한 그 말을 듣고 앨리스 주변에 있던 여학생들이 키득거리면서 앨리스의 … Continue reading 양과 장미 31
양과 장미 30
Delusion level 10.0. 아이가 골목을 걸어간다. 늙은 남자가 아이의 손을 잡고 공중화장실로 끌고 간다. 아이는 비명을 지르려다가 실수로 혀를 깨물어버린다. 남자가 아이의 몸 속에 성기를 집어넣는 동안 아이는 계속해서 비명을 지르지만, 아이가 비명을 지르는 순간 늙은 남자가 그보다 더 큰 소리로 비명을 지르기 때문에 아이의 비명은 들리지 않는다. 아이가 비명을 지르고, 남자가 비명을 지른다. 남자가 … Continue reading 양과 장미 30
양과 장미 29
Act. 1.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사유의 둔감화, 인지 능력의 저하. 의사는 그녀에게 치료될 것이라고 했다. 삼촌은 모두 쏴버리겠다고 했다. 삼촌은 모두 죽여버리겠다고 했다. 삼촌이 사라졌고 앨리스는 그를 위해 울지 않는다. 왜냐하면 키티, 나는 울지 않게 되어버렸기 때문이야. 왜냐하면 키티, 나는 무엇을 위해 울어야 하는지 잊어버렸기 때문이야. 죽음이 간절하다가도 그 간절함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린다. 연기만이 그녀의 … Continue reading 양과 장미 29
양과 장미 28
죽고 싶어요. 다시 생각해 봐. 넌 착각하고 있는 거야. 넌 살고 싶은 거라고. 죽고 싶어요.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이기적인 년. 죽고 싶어요. 제발 그만해. 내가 더 힘들어. 죽고 싶어요. 그만해. 내가 더 죽고 싶어. 내가 먼저 죽어버릴 것 같아. 죽고 싶어요. 넌 잔인해. 난 아무것도 안 했어요. 당신을 다치게 할만한 일은 아무것도. … Continue reading 양과 장미 28
양과 장미 27
제발, 이제 그만두고 싶어. 시작도 한 적 없는 일을. 내 것이 아니었던 시작을. 물컵의 액체 속을 부드럽게 유영하는 먼지들을 삼킨 뒤, 앨리스는 말한다. 이건 극단적으로 이기적인 글쓰기일지도 모릅니다. 극단적으로 이기적인 연기요. 자기가 사랑하고 살해했던 소녀들을 사진으로 박제하는 살인자처럼. 살인자의 카메라를 죽어가는 눈으로 응시하는 희생자의 불가능한 시선처럼. 그 둘의 차이는 뭐죠? 청중이 질문한다. 그는 석고로 만들어진 … Continue reading 양과 장미 27
양과 장미 26
Act. 25. 김현경은 그녀가 돼지들과 어떻게 서로 강간했는지 그들이 어떻게 서로를 위해 강간하고 강간당했는지, 그들이 얼마나 즐겼는지 쓴다. 차례로 늑대 행세를 하면서. 늑대에게 먹히는 척을 하면서. 그녀는 TV 비평을 위해 개설한 개인 블로그에 애무와 삽입의 상세한 과정을 적어 올린다. 김현경의 블로그를 매일 확인하는 김현경의 부모는 그녀가 해킹당했다고 생각한다. 김현경이 그것을 직접 겪었다고 말하자 김현경의 아버지는 … Continue reading 양과 장미 26
엔젤 스테이크 21
그리고, 초록은 헐떡이며 속삭였다. 죽은 의사들을, 어쩌면 살아남은 의사들을. 우주는 점점 멀어지고 있어. 하나의 점과 하나의 점은 영원히 합류할 수 없는 방향으로 멀어지고 있어. 점들은 지워지지만 사라지지는 않아. 우주는 희미한 얼룩들로 더러워진 유리창과 같아. 아빠의 어머니는 아빠에게 그걸 알려주었어. 많은 꿈들은 서로를 잊고 많은 꿈들은 서로를 기억하며 많은 꿈들의 그림자는 거미줄처럼 어지러이 얽혀 있다고. 미로 … Continue reading 엔젤 스테이크 21
양과 장미 25
Act. 10.5. 어촌의 순박한 소녀가 횟집에서 부모님의 일을 돕는다. 그녀는 살아서 꿈틀거리는 낙지를 천사처럼 웃으며 매운탕 냄비에 떨어뜨린다. 낙지가 몸부림치고 중년의 손님이 소녀의 드러난 갈색 종아리를 만지작거린다. 소녀가 매운탕 냄비의 뚜껑을 덮는다. 신선한, 끓어서 삶아지기 전까지 살아 있을 생물을 손님들이 직접 볼 수 있도록 마련된 투명한 냄비그릇에 수증기가 번지고 낙지가 꿈틀거린다. 전복이 꿈틀거린다. 몸부림친다. 천국이 … Continue reading 양과 장미 25
양과 장미 24
Act. 1. 결국 그녀는 혼자다.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죽음들을 낳으려는 광기. 그녀의 연기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그녀는 알지 못한다. 고개를 숙인 채로 걸어가는 남자아이. 횡단보도에는 어떤 삶이 있었다. 트럭은 그것을 짓밟고 지나갔다. 아이의 뼈와 내장을 뭉개고 지나가면서 트럭기사는 무엇을 느꼈을까. 트럭은 그것을 완전히 박살내고 지나갔다. B는 죽었다. B는 죽었다. B의 죽음은 그녀의 존재보다도 확실한 것이다. … Continue reading 양과 장미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