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3년 2월 1일
여자는 흰 벽처럼 순수했다. 그들이 여자로 씹질을 해대는 동안에도 여자는 순수했다. 그녀가 흰 벽처럼 단단하고 순수하지 않았다면, 빌어먹을 순수함이 없었다면 그녀는 검고 차가운 거리에 정물처럼 서 있지 않았을 것이다. 몇 개의 그림자가 그녀를 스쳐 지나가는 동안에도 그녀는 가만히 서 있었다. 유리알처럼 번들거리는 연푸른 눈동자와 장미비누처럼 매끈하고 부드러운 살. 여자는 쇼윈도 밖으로 쫓겨나온 마네킹처럼 서 있었다. 검은 벤츠가 여자 앞에 정차했고 여자는 조수석 자리에 탔다.
남자는 젊지 않았으나 특별히 늙지도 않았다. 여자는 빌어먹을 침묵을 질주하는 차량의 속도를 느끼며 허공을 묵묵히 응시했다. 남자는 희고 마른 손으로 여자의 허벅지를 쓸었다. 여자는 허벅지와 허벅지 사이의 공간으로 드러난 가죽을 내려다보았다. 이건 어떤 짐승의 가죽일까. 이건 어떤 짐승의 가죽을 모방한 가죽일까.
그들은 지중해의 장난감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보이는, 일종의 저속한 농담처럼 보이는 모텔로 들어섰다. 남자는 서랍에서 딸기색 콘돔을 꺼낸 뒤 침대 위에 드러누웠다. 여자는 처녀처럼 드러누운 남자의 옷가지를 추위에 얼어붙은 손으로 간신히 벗겼다. 남자의 희고 연약한 살이 공기중에 노출되었다. 여자는 인간의 가죽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남자는 여자의 뒷머리를 그러쥐고 제 사타구니로 이끌었다. 여자는 어미 젖을 빠는 포유동물처럼 남자의 성기를 빨았다. 그래, 이 전형적인 공간, 이 전형적인 인물들, 태고를 모사한 전형적인 행위를 어떻게 할 것인가? 여자는 생각했다. 여자의 애무를 받는 동안 홀로 셔츠를 벗고 의복의 바깥으로 나온 남자는 어린 벌레처럼 희고 부드러웠다. 그는 끔찍하게 연약해 보였다. 기이한 투명함으로 번들거리는 그의 얼굴은 수중에서 부풀어오른 흰 꽃처럼 너울거렸다.
여자는 남자의 푸르스름한 입술에 혀를-그의 좆을 빨던-밀어넣으며 그가 그녀의 늙은 아이 같다고 생각했다. 과연 그는 흰 주름으로 뒤덮인 여린 애벌레처럼, 배설하지 못한 체액으로 부풀어오른 새벽의 잎사귀처럼 연약하였다. 털 한 올 없는 희고 미끈한 몸.
남자는 여자의 안에 오줌을 누고 싶어 했다. 여자는 그가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미지근하고 투명한 오줌 줄기가 여자의 안에 쏟아졌다.
남자는 여자의 품 속에 매달려 어린아이처럼 흐느꼈다. 나는 살고 싶었어 나는 살고 싶었어 남자는 반복해서 속삭였다.
여자는 남자의 뒷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아가씨 당신을 죽인 건 정말 미안해요 하지만 나는 살고 싶어서 그런 거야. 아니 아니야 당신은 아직 살아 있군요. 내가 죽인 건 당신이 아니었어 하지만 당신과 빌어먹게 닮은 여자였지. 사실 여자들은 전부 닮았어 당신들은 전부 사람 숨통을 조이고 익사시키는 검은 물질로 되어 있단 말이야. 나는 살고 싶었어. 그뿐이야. 그년은 매일 나를 봤어 빌어먹을 검은 눈으로 매일 매일 나를 봤어. 나는 그만하라고 애원했어. 제발 그만두라고 사정했단 말이야. 숨이 막혔고 검은 우유가 내 목구멍으로 흘러들었고 나는 숨을 쉴 수가 없었고 나는 제발 그만 두라고 사정했어. 이제 그만 둬 난 더 견딜 수가 없어. 하지만 그녀는 그만두지 않았지. 그녀는 검고 둥근 눈으로 나를 바라봤어. 그것은 달처럼 폭파할 수 없는 것이었어. 그년은 미쳤어 미치지 않고서는 사람을 그렇게 바라볼 수는 없는 거야. 창문 밖에도 창문 안에도 화장실 안에도 변기 속에도 항상 그 검은 눈이 떠다녔어 계속 나를 따라다녔어 어디로 가도 도망칠 수가 없었어. 밤에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아도 나는 그 검은 곡률을 봤어 그건 사라지지 않았어 천장 위에 싱크대 속에 내 창자 속에 거울 위에 둥둥 떠다니는 그년 눈동자 제발 그만 해 그만 하라고 나는 애원했는데 그건 도저히 사라지질 않았어. 난 결혼 사진 속 눈깔들을 전부 파냈어 그런데 파낸 눈깔 조각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어 찾을 수가 없었어. 그걸 라이터로 태워버렸어야 했는데. 푸르고 붉은 불꽃 속에서 그게 검게 검게 더 검게 타들어가는 모습을 봐야 했는데. 그런데 사라지지 않았어. 찾을 수도 없었고 사라지지도 않았어. 그년은 계속 그 빌어먹게 둥근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어. 그만해 그만해 너는 달이 아니잖아 어째서 나를 따라오는 거야 밤이 지나고 달이 희끄무레한 시신 같은 하늘 속에 파묻혀 사라진 시간에도 눈동자는 사라지지 않았어. 그년은 나를 사랑한다고 말했어. 아 그렇군. 너는 나를 사랑해서 계속 나를 보는 거야. 그렇지? 나를 사랑해서 너는 나를 질식시키려는 거야. 봐. 나는 그년 손가락을 내 목구멍에 처넣으면서 울었어. 내 목구멍이 이만큼이나 좁아졌어 이제는 숨을 쉴 때마다 쉭쉭거리는 빌어먹을 소리가 들려 이제 그만 둬. 알았지? 나를 정말 사랑한다면 내가 계속 살아 있기를 원한다면 이제 그만 둬. 난 소름이 끼쳐서 죽어버릴 것 같았어 내 목구멍 속에서 그녀가 그녀의 손가락을 올려다보고 있었던 거야 내 목구멍은 음부처럼 그녀의 손가락을 조였고 그년 눈동자는 자기 손가락을 그 빌어먹을 검고 불투명한 곡률로 마주보고 있었어. 난 비명을 지르면서 그년 손가락을 내 목구멍에서 빼냈어 구역질이 나 구역질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어 난 그 자리에서 위액을 토해냈고 그년은 울면서 시치미를 뗐어. 나는 다 알고 있는데 그녀는 마치 나를 보지 않은 척했어 그 검은 눈동자가 계속해서 떠 있는데 마치 그녀는 그녀 시선이 어디서 내 목을 조르고 있는지 모르는 것처럼 굴었어. 제발 그만둬. 그 시선이 나를 죽음으로 데려가고 있어. 나는 내 목구멍이 녹아 없어질 때까지 비명을 질렀어. 내 목구멍 속에서 내 비명 속에서 그년이 나를 지켜보고 있었어.
I11년 1월 1일
그림자들의 구렁텅이 속에서 남자는 천사를 발견했다. 벌거벗었고 남루한 차림이었지만 그건 분명히 천사였다. 남자는 순종하는 자의 부드럽고 특히 물질적인 시선으로 천사를 바라보았다. 천사는 아이처럼 연한 젤리의 눈동자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남자는 자신이 사형장 같은 돼지들의 요람-이자 무덤-에서 발견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장미, 보물, 기적, 사막의 우물, 그것을 지칭할 말들은 무한하였고 그렇기에 단 하나의 말도 그것을 완전히 표현할 수 없었다.
남자는 천사의 이마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었다. 천사는 순진하고 사랑스러운 신음소리를 흘렸다. 남자는 천사를 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자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그녀를 깨끗이 씻겨 유리병에 꽂아둘 것인가? 아니면 그녀의 고귀한 가죽을 벗겨 벽에 붙여 놓을 것인가? 허공의 굴절들, 허공에 가득한 구멍 속에서 꿈틀거리는 차가운 물방울들, 피부 속에서 인간의 기름을 갉아먹고 있는 차고 흰 벌레들.
남자는 노인의 발을 닦는 성녀처럼 정성스럽게 천사의 육신을 씻겼다. 갈빛의 축축한 점액이 천사의 몸에서 흘러내렸고 곧 희고 아름다운 살이 드러났다. 천사가 가볍게 경련하며 작은 비명을 흘렸고-오 물론 그녀에게는 비명을 지를 권리가 있었다- 남자는 곧 자신이 끔찍하게 차가운 물줄기를 천사의 연약한 살갗 위에 뿌려대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남자의 손은 추위로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는 천사의 피부 위로 떨어져 그보다 더 깊은 곳으로 스며드는 물을 황홀한 무기력으로 더듬거렸다. 벼 잎사귀에 희생자의 피를 발라 풍요를 기원하는 주술적인 의식처럼 남자는 빛을 받아 희게 빛나는 차가운 물방울들을 천사의 몸에 정성껏 펴발랐다. 천사는 그의 몸 쪽으로 차갑고 정결한 육신을 기대며 가련하게 떨었다.
남자는 형용할 수 없는 환희를 느꼈다. 격렬한 절망처럼 음탕하고 서글픈 환희. 비극의 절정, 메데이아가 그녀 아이들의 뱃속에 칼을 쑤셔 넣는 순간 도래할 법한 환희. 그는 천사를 데리고 있었다. 천사의 차갑고 흰 육체가, 그 속의 신비로운 생명의 비밀이 오롯이 그의 곁에 있었다. 천사는 그의 절박하고 아름다운 비밀이었다. 그러나 그는 천사를 그의 비밀로 남겨둘 생각이 없었다. 오 물론이다. 세계 속 가장 아름다운 유사성을 발견한 예술가는 그것을 하얀 벽 위에 제 피로 써내려간다. 희고 단단한 벽을 더럽히고 또 그것을 애무하는 붉은 마찰. 남자는 여기 그의 곁에 있는 천사, 이제 그에게 속해 있는 천사를 고통스러운, 차라리 공포를 닮은 환희로 세계에 내보일 것이었다. 남자는 행복한 고뇌 속에서 세계 밖에 나온 천사의 모습을 떠올렸다. 모든 상상 속에서 천사는 항상 그의 곁에 있었다. 예수가 처음 자신을 신이라고 소개할 때 그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던가? 그는 어떤 옷차림에 어떤 목소리에 어떤 장소에 있었던가. 빵과 포도주의 지긋지긋한 기적에 그는 관심이 없었다. 남자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천사의 관념과 천사의 육체 사이의 비밀스럽고도 무시무시한 유사성이었다. 유사성은 오로지 순수한 유사성만으로 현전해야 했다. 그 이외의 잡다한 기적들은 그녀의 신비를 부식시킬 뿐이었다.
남자는 곧장 갤러리에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저 전시를 하려고 하는데요. 침묵. 잠시만요. 침묵. 혹시 성함을 여쭤봐도 될까요? 침묵. 저는 이름이 없지만 제가 전시하러 하는 것은 이름이 있습니다. 침묵. 죄송하지만 저희는 이미 전시하기로 예정되어 있는 작품들 이외에는 추가로 (전시품을 혹은 빌어먹을 언어들을) 받지 않습니다. 전화가 꺼졌고 남자는 105개 갤러리들의 이메일 주소로 메일을 보냈다.
천사를 전시하려 합니다. 천사입니다. 진짜 천사입니다. 되도록 빨리 회신 주세요.
남자는 한 달을 기다렸고 단 한 통의 답장도 받지 못했다. 천사는 그의 옆에서 사랑스럽게 칭얼대었다. 남자는 체념과 공포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며 천사의 사진을 찍었다. 그는 그 사진을 126개 갤러리들에 전송하였다.
천사입니다. 진짜 천사입니다. 되도록 빨리 회신 주세요.
남자는 한 달을 기다렸고 단 한 통의 답장도 받지 못했다. 남자는 한 장의 사진만으로는 천사의 본질적인 완전성이 표현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여러 각도에서 찍은 사진들을 덧붙여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사진들은 총체성의 비밀을 숨기고 있는 단면의 은밀한 매혹으로 빛나고 있었다. 남자는 그가 찍은 서른세 장의 사진을 첨부하여
한 달을 기다렸고 단 한 통의 답장도 받지 못했다. 남자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천사의 육신이 얼마나 오래 버틸지 그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천사에게 무엇을 먹여야 하는지 천사가 병들면 어떻게 치료해야 하는지 몰랐다. 그는 천사의 천사성이 순식간에 퇴색되어버릴까 두려웠다. 그는 날마다 비밀의 훼손에 대한 치명적인 공포 속에서 잠들었다. 아니, 그는 잠들지 못했다. 그의 두 눈은 계속해서 천사의 천사다움을 확인해야 했다. 천사는 변하지 않았으나 그는 그 불변성을 확인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그는 고통스러웠고 그래서 자기 가슴을 찢어발기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의 사지를 토막내어 돼지 먹이로 주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의 신체가 돌이킬 수 없이 훼손되는 것을 집요하게 지켜보지 않으면 죽어버릴 지경이었다. 천사는 변함없이 희고 찬 살로 그를 마주하고 있었다. 그것은 너무나 완벽해서 순식간에 부패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참을 수 없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기에 그는 어느 한낮에 천사를 끌고 바깥으로 나섰다.
시내로 나가는 버스 정류장까지 이르러서야 그는 지갑을 챙겨오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어린아이의 두개골처럼 창백한 태양이 그의 머리 위로 천천히 비상하고 있었다. 추위로 이글거리는 땅 위에서 말라 비틀어진 곤충의 껍질이 파도거품처럼 너울거렸다. 나에 대한 사실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그는 생각했다. 그는 몇 개의 버스를 지나쳐 보냈다. 버스 기사의 어리둥절한 눈빛. 세계의 다소 어리둥절한, 그리고 경멸하는 눈빛. 정류장 표지판으로부터 선회하는 빛의 기이한 반영들. 이곳에서는 얼어죽고 말 것이다. 무덤에는 남은 자리가 없고 그는 쓰레기들이 모여드는 그림자들의 섬에 남겨지게 될 것이다. 남자는 생각했다. 꿈처럼 고속도로를 스쳐가던 흰 트럭이 그의 앞에 멈추어섰다. 여기 있다 얼어 죽는다 (웃음) 무덤엔 남은 자리가 없어 (멋쩍은 웃음)
남자는 천사를 끌어안고 짐칸에 올랐다. 너는 천사를 끌어안고 짐칸에 올랐어. 운전석에 앉은 노인의 목소리는 놀랍도록 선명하게 들렸다. 그래요. 남자는 어린아이의 가늘고 높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부모님은 어디 계시니? 노인은 짐짓 다정스럽게 물었다. 부모님은 먼저 갔어요. 남자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노인 : 부모님은 먼저 갔어. 너를 두고?
남자 : 그래요. 나를 두고.
노인은 남자와 녹음기처럼 기이하게 똑같은 방식으로 대답했다. 그들은 일그러진 반영처럼 대화했다.
남자 : 선생님 나는 기적을 가지고 있어요
노인 : 너는 기적을 가지고 있어.
남자 : 부모님은 먼저 가셨고 이제는 나밖에 없어요 혹은 나만이 없어요. 아이들은 내가 모르는 노래를 부르고 나는 소리 없이 입을 뻐끔거리다가 어느 순간 내가 입을 다물고 있어도 아무도 나를 비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돼요. 왜냐하면 아무도 나를 보고 있지 않으니까. 그렇지만 오 내가 기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이 알게 되면, 그러면 기적 이외의 다른 것은 아무래도 좋은 거예요. 목소리 없는 노래도 피 없는 출혈도.
노인 : 부모님은 먼저 가셨고 이제는 너밖에 없어 혹은 너만이 없어. 아이들은 네가 모르는 노래를 부르고 너는 물고기처럼 소리 없이 입을 뻐끔거리다가 어느 순간 네가 입을 다물고 있어도 아무도 너를 바라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너는 기적에 대해 말해. 목소리 없는 노래와 피 없는 출혈에 대해.
남자 : 기적이 있으면 기적이고 그리고 그것이 있다면 그것으로 된 거예요.
노인 : 기적이 있다면 그걸로 된 거야.
남자 : 나만이 있을 필요도 없어 나만이 없을 필요도 없어
노인 : 너만이 있을 필요도 너만이 없을 필요도 없어
남자 : 나는 최선을 다했어요. 적어도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했어요. 천사가 내게 왔고 난 그 순간 모든 것이 끝난 줄 알았지만 그렇지 않았어. 내게 온 천사가 천사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내가 뭘 할 수 있겠어요? 천사는 천사고 그것뿐인데. 신이 신이 아니라면 무엇이겠어요? 내가 내가 아니라면. 당신이 당신이 아니라면. 오 하지만 물론 그럴 수도 있죠. 나는 내가 아니고 오직 나만이 내가 아니고 당신이 당신이 아닐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녀는 달라요. 천사는 천사이고 그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천사가 아닌 천사는 천사가 아닌 모든 것이며 천사는 다만 천사일 뿐이죠. 달리 뭐겠어요? 천사가 천사가 아니라면. 기적을 증명하기 위한 천박한 속임수 같은 것은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아요. 우유 위에 자기 흔적을 남기려고 발버둥치는 파리의 춤처럼. 어린아이가 화장실의 흰 벽 위로 던지며 노는 거품처럼.
노인 : 너는 최선을 다했어 혹은 적어도 너는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했어천사가 네게 왔고그뿐이야그외에 뭐가 있겠어
남자 : 고마워요. 선생님. 우리가 핏방울처럼 닮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여기서 당신 얼굴을 볼 방법은 없지만 그런 생각이 드는군요. 우리는 정말 잘 통해요. 그렇지 않나요? 솔직히 말하면 이렇게까지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은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두렵기까지 해요. 그래요. 선생님. 나는 당신이 내게 실망하게 될까봐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당신에게 실망하게 될까봐 두려워요.
노인 : 우리가 핏방울처럼 닮았다고 생각하지 않아너는 네가 내게 실망하게 될까봐 두려워 그것이 두려워서 너는 핏방울처럼 닮았다고 생각해.
남자가 트럭에서 내려 오줌을 누는 동안 트럭은 그를 두고 사라졌다. 천사는 아직 그의 곁에 있었다. 남자는 놀라지 않았다. 그가 더 이상 무엇으로 놀라겠는가. 그는 다만 서글플 뿐이었다. 새벽의 검은 우유-그 유명하고 지긋지긋한-위에 놓인 장미 꽃잎 서너 개. 남자는 천사의 몸에 날벌레들이 달라붙지 않도록 손부채질을 하며 걸었다. 천사는 소리 없이 노래하고 있었다. 그는 달콤하고 음울한 음성 속에서 걸었다. 시장 한복판에 도달한 뒤 그는 가만히 멈추어 섰다. 소금에 절여 끔찍하게 느린 속도로 부패해가는 살의 냄새가 허공을 떠돌았다. 대기는 껍질과 그 속의 투명한 피로 축축했다. 이제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그는 터질 것 같은 심장을 느꼈다. 투명한 죽음을 두드리고 저미며 팽창하는 어떤 갈망. 당장이라도 누군가 그에게 다가올 것 같았다. 그는 그의 주위를 물밀듯 뒤덮는 군중의 징후를 느꼈다. 그들은 올 것이다. 왜냐하면 이곳에 기적이 있으니까. 그들은 기적을 알아볼 것이다. 그는 뺨 위로 떨어져내리는 미지근하고 축축한 눈물을 느꼈다. 천사는 검고 음탕한 입 속을 드러낸 채 소리 없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는 비등하는 갈망으로 죽을 것 같았다. 오 누구라도 그의 어깨를 끌어안고 그에게 기적의 아름다움에 대해 속삭인다면. 그와 같은 기적으로 고통스러운 이들이 그와 함께 비명을 질러준다면.
그러나 아무도 오지 않았다. 그는 기다렸고 시장은 오가는 그림자들로 분주하였고 아무도, 아무도 그의 곁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그의 기적과 함께 기다리고 기다렸으나 아무도 그의 기적을 향해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그는 그의 경이와 함께 홀로 남겨졌다. 그는 어쩔 줄 모르며 천사의 부드러운 피부를 쓰다듬고 그녀를 품에 안아 들어올렸다가 그녀의 벌어진 입가에서 흐르는 침을 닦아내리며 중얼거렸다. 기적이야 기적 기적이야 기적 기적 남자는 가쁜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끔찍한 현기증을 느꼈다. 이 기적을 대체 어떻게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그의 앞에 기적이 있는데 어째서 아무도 그를 돌아보지 않는 것인가. 오 사람들은 마치 일말의 기적도 없는 것처럼 마치 한 마리의 작은 새도 이곳에서 울고 있지 않은 것처럼 마치 아무도 이곳에서 찢어지며 죽어가지 않는 것처럼 그를 스쳐지나갔다. 마치 그의 천사가 이곳에 전시된 수천 덩어리의 고기 중 하나인 것처럼. 마치 그의 천사가 그 고기조차 아닌 것처럼.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불가해성이 그의 목을 고통스럽게 졸라왔다. 천사는 그의 옆에 여전히 천사인 채로, 여전히 천사의 모든 것인 채로 당당히 서 있었다. 그녀의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두 뺨, 지옥보다 깊은 입 구멍과 기적 같이 둥근 두 개의 눈. 그것이 그를 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천국의 가장 내밀한 지옥으로 떨어졌다. 그는 소름끼치는 추락의 잔상에 마른 두 무릎을 떨어대었다. 그녀는 이곳에 있어 천사가 진짜 천사가 진짜 천사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그녀가 이곳에 있어.
그는 정신없이 천사의 밝은 분홍빛 피부를 더듬거렸다. 다소 질기고 부드러우며 뜨뜻한 살이 느껴졌다. 그것은 그림자와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 있었다. 뼈와 살을 가진 육체의 방식으로, 피를 흘리는 생명의 방식으로 살아 있었다. 기적이었다. 기적 그 무엇보다도 완벽하고 불가해한 기적이었다. 그는 눈가까지 칼날 같은 소름이 끼쳐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작고 오돌토돌한 소름이 그의 망막을 뒤덮었다. 그는 거북스러운 현기증으로 신음했다. 있어 있어 여기에 그녀가 있어 천사가 기적이 보물이 여기에 베어내면 피를 흘리는 살로 살아 있어. 그의 피부와 뼈를 날카롭게 저미며 스쳐지나가는 천개의 얇고 투명한 바람. 남자는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조각나는 것을 조각난 그가 미동도 없이 이곳에서 생각하는 것을. 천사는 여전히 천사인 채로 살아 있었다. 그것은 분명히 기적이었다. 그를 미치게 만들고 찢어발기는 빌어먹을 기적. 그의 목구멍에 걸려 있는 붉고 뜨거운 갈망이 그를 고통스럽게 녹여내고 있었다. 해갈되지 않는 불덩이로 그는 점차 검은 지면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아무도 오지 않았다.
아무도 그의 기적을 보고 불덩이 같은 비명을 내지르지 않았다. 그는 소리 없이 구역질했다. 현기증, 현기증, 미칠 듯한 현기증. 그녀는 여전히 이곳에 있었다. 차라리 그녀를 잃어버렸다면 그녀가 처음부터 없었다면 그녀를 잊었다면 이렇게 고통스럽지는 않았을까. 천사는 여전히 천사인 채로. 남자는 침을 질질 흘리며 흐느꼈다. 부모를 잃은 어린아이처럼 엉엉거리며. 그는 누군가 그의 기적에 경악하고 갈망하고 고통스러워하기 위해 그의 곁으로 오기를 기다렸다. 그는 기다리고 기다렸다. 절망적인 환희로 활짝 열린 그의 상처는 닫히지 않은 채 소리 없는 비명을 쏟아내고 있었다. 기다리는 동안 그는 죽어버릴 듯 괴로웠다 허공은 냉혹한 맹목으로 그를 베어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천사는 아름다웠다. 천사는 연한 핏빛의 풍만한 몸으로 그녀의 연약한 그림자를 뒤덮고 있었다. 기적은 여전히 그의 곁에 있었다. 그는 얼음처럼 차갑게 타들어가는 갈망을 느꼈다. 그는 느끼는 것을, 원하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황홀로 그는 살았고 삶으로 그는 죽어가고 있었다. 오직 기적 같은 삶으로.
그의 눈을 녹여내는 세계의 창백한 중립성. 햇빛으로 끈적이는 아스팔트 위로 흘러내리는 짐승의 피. 남자는 상처투성이 열매를 벌려 축축한 미소를 지었다. 숨이 멎을 것 같은 기적. 그의 숨을 멎게 하고 그를 존재함으로 고통스럽게 돌려놓는 기적. 새의 심박과 쥐의 가쁜 숨, 충혈된 두뇌를 가리는 수 제곱센티미터의 피부와 그의 무방비한 내부를 들여다보고 있는 모공들의 서글픈 출혈. 남자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누군가의 비명소리를 듣고 싶었다. 갈망으로 그는 미칠 것 같았다. 갈망으로 벌어진 상처는 걷잡을 수 없이 크게 뜨였다. 그는 도저히 눈을 감을 수 없었다. 상처에서는 엷은 막과 함께 빛이 끊임없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견딜 수 없이 느린 속도로.
남자는 개처럼 헐떡이며 울먹였다. 말해야 할까? 진실을 까발려야 할까? 그러나 천사가 천사라는 것 이외에 어떤 진실이 있단 말인가? 여기 천사가 있소 여기 천사가 있어요 제발 여기 천사가 있어요. 남자는 축축하고 더러운 바닥에 비참하게 무릎 꿇으며 소리쳤다. 혹은 소리쳤다고 믿었다. 그런데 그가 정말 소리를 낸 것이 맞을까? 그가 소리를 질렀다면 이곳이 이토록 고요할 수 있을까? 아니 이 끔찍한 소란 속에서 오직 그의 말만이 이토록 조용할 수 있을까? 남자는 빛을 견디지 못하고 사라진 유령처럼 가련하게 몸을 떨어댔다. 물질들은 주체할 수 없는 생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경이와 체념으로 지쳤다.
그는 다만 천사를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다. 그가 천사를 데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을 뿐이다. 금을 가지고 있는 남자가 도둑들의 방문을 받듯, 새로 산 모자를 쓴 신사에게 그의 친구들이 그의 새로운 모자에 대해 인사처럼 말하듯. 오 그는 다만 천사를 데리고 있는 남자가 받을 법한 어떤 경악, 공포, 매혹에 찬 눈길들을 원했을 뿐이다. 그의 눈은 경이로 길게 찢어져 고통스럽게 뜨였는데 어째서 다른 이들은 마치 잠 속에서 걷는 것처럼 평온하게 그를 지나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의 눈은 부드럽고 미지근한 막으로 덮여 있다. 빛을 흡수하고 그 양분을 체내 깊숙한 곳으로 전달하는 축축한 피막들. 그러나 그의 눈 위에 얹힌 막은 찢겼다. 그는 기적으로 눈 멀었고 기적으로 눈 떴다. 남자는 천사의 부드러운 넓적다리를 애처롭게 더듬거렸다. 소시지빛 색소로 더러워진 허공 속에서 그의 이마는 낡고 수수께끼 같은 형태의 주름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붉은 콧수염을 리본처럼 매단 남자가 그의 어깨를 두드릴 때 남자는 천사의 습하고 따뜻한 음부 속에 손을 밀어넣고 있었다. 붉은 콧수염 남자는 자신을 과일장수라고 소개했다. 과일장수를 보고 기계적인, 그러나 죽을 듯한 기대와 체념으로 헐떡였던 남자는 몇 차례의 의례적인 질문과 대답들이 이어짐에 따라 거의 울 듯한 얼굴이 되었다.
과일장수는 음탕하게 벌어진 귓바퀴를 문지르며 물었다. 너희 부모님은 어디 계시냐?
부모님은 돌아가셨어요. 남자는 가쁜 숨을 내쉬며 소년처럼 높은 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과일장수는 희미하고 불안하게 미소지었다.
너 그걸 팔러 나온 거지? 그보다 너 몇 살이냐? 이상하게 늙어 보이는군.
남자는 과일장수와 공모하듯 웃으며 말했다. 저는 가장 늙은 쥐만큼이나 늙었죠.
과일장수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남자를 노려보았다. 당신은 아이가 아니군. 아이가 아니야.
과일장수는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남자에게 모욕으로 주름잡힌 얼굴을 들이밀었다. 말해봐. 당신 왜 나를 속였지?
난 속인 적 없어요. 남자는 백치처럼 대답했다. 속인 적 없다고요.
과일장수 : 됐어. 차라리 잘 됐군. (기적을 손가락질하며)내게 그걸 파시오.
기적을 손가락질하며, 과일장수는 남자를 노려보았다. 남자는 견딜 수 없는 슬픔에 흐느끼기 시작했다. 과일장수는 그에게 기적을 팔아넘기라고 하고 있었다. 그들은 타원의 비밀을 토의하는 아이들처럼 기적의 가격에 대해 논했다. 사실 그런 논쟁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었다. 기적을 줄 것이라면 남자는 아무런 대가도 없이 기적을 넘겨야 했다. 적어도 그가 받게 될 돈은 기적의 헌정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것이었다. 과일장수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우는 남자를 개처럼 몰아붙이며 흥정했다. 남자에게 도래한 것이 시간의 간헐적인 멈춤, 사물과 사물 틈새에서 서식하는 흐느낌 같은 잡다한 기적이었다면 남자는 망가지되 완전히 파괴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은 천사였다. 진짜 천사. 남자는 그가 가진 혹은 가졌다고 믿는 모든 것을 걸고 그녀가 천사임을 선언할 수 있었다. 인간은 그의 가장 큰 보물을 오직 절망과 슬픔만으로 이름 모를 누군가에게 주어버릴 수 있는가?
남자는 이제 아이처럼 울고 있었다. 과일장수는 마치 남자의 울음소리가 그들의 거래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것처럼 남자의 흐느낌을 무시했다. 남자의 절망은 존재 때문인가, 혹은 존재의 불가능 때문인가. 얼마나 많은 기적들이 존재할 수 없음 때문에 혹은 너무나 미칠 듯한 존재로 터져버렸는지 남자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차라리 모든 기적을 심연에 던져버리고 싶었다.
그는 그의 천사를 너무나 사랑하였고 그녀의 음부는 그의 손을 치명적인 중립성으로 적시었고 남자는 물 속에서 헤엄치는 새처럼 흐느꼈다. 짐승의 피와 오물로 젖어든 아스팔트 바닥에는 아이의 큼직하고 거친 글씨로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불법적인 꿈을 꾸는 것은 불법이다. 남자는 그의 작은 발을 오른쪽으로 옮기며 발 밑에서 드러나는 문장들을 읽었다. 나른한 정적, 눈이 멀 것 같은, 관 속에서 끓어오르는 우유의 짙은 향기가 남자를 뒤덮었다. 언어에 대한 자살적 사랑. 모든 욕망-사랑은 자살인가? 네가 듣는 것을 나도 듣고 있었어 주지하다시피 나는 내가 아닙니다. 보는 자의 실존은 눈이 아닌 모든 곳에 있다. 병 속에 밀봉된 젖은 언어. 빛의 원뿔을 쓰고 수조 속을 비상하는 루셀의 고양이와 인큐베이터 속 양 아이들의 검은 눈동자. 납치범의 부드러운 목소리와 숨을 참으며 날아오르거나 추락하는 존재들. 자기 자궁에 길고 차가운 막대기를 밀어넣으며 흐느끼는 창녀들과 아직은 아무런 시작도 갖지 못한 세포들의 핏빛 거품과 어린 쥐의 목구멍에서 솟아오르는 크림색 독약. 도저히, 도저히 닫히지 않는 상처에서 체액을 질질 흘리며 남자는 울었다. 나는 어째서 나를 사랑하는 것을 그만둘 수 없을까? 나는 어째서 인간의 언어로 우는 것을 그만둘 수 없을까? 나는 어째서 기적을 사랑하는 것을 기적을 원하는 것을 그만둘 수 없을까? 나는 어째서 인간의 언어를, 인간의 언어로 흐느끼는 나의 언어를 사랑하는 것을 그만둘 수 없을까? 남자는 생각했다. 나는 기적을 포기할 수 없을 것이다. 기적을 심연에 떨어뜨리고 나는 곧장 심연으로 뛰어들 것이다.
과일장수는 하염없이 울기만 하는 남자를 붙들고 닦달하더니 곧 체념한 듯 사라져버렸다. 남자는 눈을 감고 그의 체액으로 끈적거리는 바닥을 상상했다. 밤의 캔버스 위에 묻은 희미한 얼룩 같은 소녀가 그의 눈꺼풀을 두드렸다.
소녀 : 당신이 그걸 언제 잡을지 보고 있었소.
남자 :
소녀는 남자의 품에 무엇인가를 수줍게 밀어넣었다. 길고 연약한 장미 줄기 같은 것이 만져졌다. 남자는 고통스럽게 눈꺼풀을 벌렸고 그의 손에 들린 검고 날이 무딘 칼을 보았다. 소녀는 나른한 정적 속에서 끓어오르는 태양의 흰 거품처럼 그의 귓바퀴에 입술을 붙이고 소곤거렸다. 나는 당신 집행인의 딸이오. 소녀는 남자를 집요하고 장난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소녀 : 당신은 당신 동생을 닮았군.
남자 : 내겐 동생이 없어요.
소녀 : 가끔은 그런 일도 있지. 존재하지 않는 동생을 닮는 일 말이오. 드물긴 하지만 그런 일도 있어.
남자 :
아, 눈이 녹아내릴 것 같아. 남자는 생각했다. 진부하고 미친 환영 속에서 나는 언제쯤 죽을 수 있을까. 내 집행인은 언제 오는 것일까. 내가 나의 집행인이 되는 일 이외에 어떤 기적이 있을 수 있을까. 소녀는 무엇인가를 조르듯 남자에게 고갯짓했다. 남자는 검은 칼을 어린아이의 고집스러운 주먹으로 꼭 움켜쥐었다. 소녀는 남자의 주먹 속에 희고 부드러운 손가락을 억지로 밀어넣으며 깔깔거렸다.
소녀 : 당신은 헛되이 힘쓰고 있어. 하지만 삶이라는 것은 그런 고집 이외에 아무것도 아닐지 모르지. 당신은 무정부주의자처럼 보이는군. 하지만 당신은 무정부주의자처럼 보인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무정부주의자가 아닐 것이오.
남자 : 당신 아버지는 언제 오나요?
소녀 : (남자의 손가락을 잡아당기며 웃는다) 보채지 마. 아버지는 오고 있소. 천국에서. 새들의 입 속에서. 신부의 눈알 뒷면에서.
소녀는 퉁명스러운 어린아이를 상대하듯 남자의 축축한 턱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남자는 메스꺼움 속에서 신음하며 생각했다. 소녀. 그의 앞에는 소녀가 있다. 그녀는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지? 천사는, 오 그래 천사는 여전히 그의 옆에 있다. 사람들은 사과나무에 걸린 거대한 새의 심장을 보고도 아무런 경계나 의심 없이 지나친다. 까마귀가 기적 같은 심장을 모두 쪼아 먹기 전에 파리들이 심장 속에 희고 득시글한 구더기들을 낳기 전에 이 기적이 모두 소진되어버리기 전에 제발 누군가 이곳으로 왔으면. 남자는 칼을 움켜쥐지 않은 손을 사용해 신경질적으로 그의 피부를 긁어내리며 소녀에게 물었다.
남자 : 제발 말해줘. 이렇게 빌게. (무릎을 꿇고 흐느끼며) 그가 언제 오는지 말해줘. 말해줘요.
소녀 : 일어나시오. (기분 좋게 폭소하며) 당신이 좋다면 그렇게 앉아 있어도 좋소. 사실 그런 건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 하지만 당신이 지금 어린아이처럼 굴고 있다는 건 알아 두시오. 오 물론 걱정할 필요는 없소. 당신이 살아남는다면 당신은 곧 조급함에 익숙해질 것이오. 당신은 기적을 잊을 것이고 당신은 당신의 천사를 보지 못하게 될 것이오. 당신은 당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소.
오 물론 남자는 알고 있었다. 그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힘을 주어 새하얘진 손가락이 검고 미끈한 칼을 붙잡고 있었다. 파란 새를 삶는 것처럼 희끄무레하고 거북스러운 냄새가 허공을 떠돌았고 남자는 새의 희귀한 색소로 젖어든 하늘의 음탕하게 짓푸른 색채를 알아볼 수 있었다. 아직 그인 무엇인가가 의미심장하게 흥얼거렸다. 오 집시여 나의 어린 집시여 슬픔의 바이올린에 그대의 납빛 손가락을 얹어 주시오. 그의 검은 발이 짓밟고 있는 빛나는 황금색 평행사변형. 엷고 끔찍한 물질들의 칼날. 소녀는 남자의 검고 곱슬거리는 머리칼을 어루만지며 웃었다. 천사는 여전히 그들의 곁에 있었다. 이제는 약간의 희끄무레한 그림자조차 없이. 그녀는 이미 그녀의 젖은 그림자를 전부 먹어치웠다. 소녀가 남자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었고 남자는 경악으로 크게 뜨인 눈으로 천사의 축축한 미소를 바라보았다. 소녀의, 그리고 천사의 미소.
남자는 끓어넘치는 어두운 곳으로 그 자신을 데려가는 상처투성이 포옹을 몸서리치며 느꼈다. 아이들의 둥근 입술 속으로, 태양을 직시하는 새의 황금색 눈동자 뒷면으로. 남자는 아이들의 원환 바깥에 멍하니 선 채로 아이들의 입 속 깊은 동굴에 머물고는 했다. 아이들이 그의 육체를 그들의 그림자 바깥으로 밀어낼 때, 목소리와 목소리 바깥으로 그의 침묵이 미끄러질 때 남자는 아이들이 집요하게 씹다가 뱉어버린 타원의 비밀 깊은 곳으로 숨어들었다. 죽처럼 묽게 변한 푸른 새의 연기.
남자는 그것으로 그의 눈을 잘랐다. 부드러운 점액질이 그의 광대뼈 위로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