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11년 3월 8일
오늘은 어떤 여자아이의 생일이었다. 여자아이의 친구들이 여자아이의 주위를 둥글게 둘러싸고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 노랫소리는 교실 전체로 번져나갔다.
여자아이는 쑥스럽게 웃으며 고맙다고 속삭였다.
여자아이는 친구들이 건네준 삼단 케이크 위의 촛불을 불었고 책상이 가득 찰 정도로 선물을 받았다.
태어나 줘서 정말 고마워. 누군가가 여자아이에게 그렇게 말했다.
여자아이의 눈은 밤처럼 젖어 있었다. 여자아이의 몸에서 나는 축하의 냄새를 맡고 교사는 여자아이에게 기쁘게 축하를 건넸다.
그 애의 생일은 언제일까? 혹시 오늘이 그 애의 생일인 것은 아닐까? 어떤 사람들은 같은 날 태어나기도 하니까. 사람은 일 년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태어난다. 365개의 숫자들을 꽉꽉 메우고 흘러넘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태어난다. 넘쳐흐른 사람들은 생일 케이크를 받을 수도 케이크 위에 꽂힌 촛불을 불어 끌 수도 소원을 빌 수도 없다.(그들의 소원은 어쩌면 생일 케이크 위의 촛불을 불어 끄며 소원을 빌고 싶다는 소원일 수도 있다!)
내 생일은 언제였지? 잘 모르겠다. 내가 생일을 가지고 있었던가? 어렸을 때 가족들이 둘러앉아 생일 축하 파티를 했던 적도 있다. 하지만 차츰차츰 우리는 태어난 날을 잊어갔다.
엄마는 나를 낳은 날을 더 이상 기억하지 못했다. 어째서 나를 낳았던 것인지도. 나는 무엇을 바라며 태어났는지 더 이상 기억하지 못한다. 나 스스로 태어남을 축하한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무엇을 태어났는지, 무엇을 축하할만한 것인지.
내게도 케이크와 촛불의 달달한 냄새가 났으면 좋겠다. 내게서도 감미로운 향연의 냄새가 풍겼으면 좋겠다. 누구라도 나를 보면 축하받는 아이임을 알았으면 좋겠다. 그것은 황홀한 특별함이다. 달콤하고 기분 좋은 특별함.
그 애의 생일은 언제인가? 나는 네가 아닌 아이와 함께 생일을 축하하고 싶어. 네가 아닌 아이에게 생일을 축하받고 싶어. 네가 아닌 아이와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속삭이고 싶어. 나는 너와 생일을 축하하고 싶어.
작년 담임 선생님은 내게 친구를 사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상담 선생님도 그렇게 말했다. 네가 친구들에게 다가가지 않기 때문에 친구들은 널 낯설고 멀게 느끼는 거야. 네가 먼저 다가가야 해.
그래서 나는 그렇게 했다. 웃는 모습이 예쁘고 밤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를 가진 여자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난 네 얼굴이 하얀 종이처럼 질기고 부드러워 보여서 좋아. 너와 함께 악어 샌드위치를 먹고 싶어. 너와 함께 목이 좁은 유리병에 갇히고 싶어. 네게 수영복을 빌려줄 수도 있어. 내게는 빨간 수영복과 노란 수영복이 있어.
여자아이는 검고 반들반들한, 곤충의 등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미안, 네가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어.
난 황급하게 말했다. 너와 친구가 되고 싶어.
여자아이는 웃으면서 미안, 내 친구들이 기다려서, 하고 말하며 나로부터 도망쳤다.
그건 정말 우스운 일이었다. 나는 그 여자아이의 이름조차 알지 못했다. 그래도 나는 누군가와 함께 악어 샌드위치를 먹고 싶었다. 누군가의 태어남을 축하해주고 싶었다.
악어가 거대한 입을 벌리고 나면 새들은 악어의 부드러운 입 속을 조롱하듯 작게 웃음짓는다. 새들은 악어를 사랑하고 악어는 새들을 사랑한다. 내게는 다정한 말들과 흘러넘치는 부드러움이 있는데 그것을 쏟아낼 자리가 없다. 내 안에 고여 부풀어가는 부드러움은 점점 썩어들어 검푸르고 치명적인 독으로 변한다. 그 독은 나를 죽인다.
맹독성의 침샘에서 뱉어낸 말들은 끔찍한 것이다. 나도 너희처럼 웃고 싶어. 나도 너희처럼 노력하고 싶어. 반들반들하게 잘 닦아 놓은 가면을 너희와 맞부딪히고 싶어. 나도 너희처럼 축하할 필요가 없는 것을 축하하고 싶어. 나도 너희처럼 가벼운 인형극을 하고 싶어! 나도 너희에게 속고 싶어. 나도 너희를 속이고 싶어. 나도 너희를 사랑하고 싶어. 나도 너희를 사랑한다고 믿고 싶어. 무엇보다도 이름 모를 너와 함께 악어 샌드위치를 먹고 싶어. 악어 샌드위치 안에 악어의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아니? 처음에 악어 샌드위치는 악어의 이빨로 만들었지. 하지만 그런 악어 샌드위치는 이가 강철보다 튼튼한 사람이 아니면 씹어 넘길 수 없었어. 이제 악어 샌드위치 안에는 악어의 단 하나뿐인 심장이 들어가지. 그러니까 하나의 악어 샌드위치에는 악어 한 마리의 생명이 들어 있는 거야. 붉고 통통한 심장을 깨물면 턱 아래로 악어의 생명이 줄줄 흘러넘쳐. 우리는 악어의 쥬스를 함께 마시면서 악어의 언어가 묻은 입을 맞추는 거야. 초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나는 나와 함께 악어 샌드위치를 먹어줄 아이를 기다리면서 밤을 지새웠어. 악어 샌드위치의 비밀을 함께 나눠줄 친구를 기다리면서! 악몽 속에서 나는 혼자 2인분의 악어 샌드위치를, 두 사람 몫의 악어 심장을, 두 마리의 악어들을 통째로 먹어 치워야 했어. 내 입은 검은 피로 진득하게 늘러붙었고 절망적인 악취가 새어나왔지. 난 누군지도 모르는 너를 기다리고 있었어.
그 애는 나와 함께 악어 샌드위치를 먹어줄 수 있을까? 하지만 그 애에게서 나는 주변부의 악취를 견디기 어렵다. 그 애 역시 나를 견디기 어려운 것이다. 그렇기에 쉬는 시간에는 결코 내게 말을 걸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가진 그림자는 하나뿐이다. 우리의 몸과 탄생을 선택할 수 없었듯 우리는 말을 나눌 대상조차 선택할 수 없는 것이다. 어째서 내가 원하는 아이들은 나를 두려워 하는 것일까? 무리 속의 순한 양 같은 여자아이들은 나와 함께 있으면 끔찍한 옴이 옮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두려움과 그늘의 옴, 혹은 죽음 같은 독이다. 혹은 모든 죽음을 비껴가는 저주와 같은 독이다.
나는 정말 오래 기도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아이가 갖고 있는 것을 나는 가질 수 없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해서 그들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보다 광범위한 외로움, 절망과 곰팡이에 오염된 언어뿐이다. 그러나 고통과 외로움의 언어가 행복과 일상의 언어보다 우월한 것은 아니다. 고통과 외로움의 언어는 언제까지나 고통과 외로움의 편에 있을 것이다. 그것은 나의 비밀과 나의 구석으로 남을 것이다. 나는 남의 고통을 내 것처럼 느끼고 내 고통을 남의 것처럼 느낀다. 나는 남을 나처럼 살해하고 나를 남처럼 살해한다. 나는 남을 나처럼 아파하고 나를 남처럼 아파한다. 나는 남을 나처럼 슬퍼하고 나를 남처럼 슬퍼한다. 남의 죽음은 나의 것이고 나의 죽음은 남의 것이다.
여자아이에게 말을 걸던 날, 나는 그 애들이 둥글고 투명한 유리구슬 같은 관계를 지키기 위해 내게 칼날 같은 말을 던질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애들은 우정을 위해 기꺼이 나를 발길질하고 추방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광대 노릇을 하며 원 안으로 기어들어가는 아이도 있다. 그런 아이들은 너무나 외로운 것이다. 심부름을 하고 개 노릇을 하면서도 그런 아이들은 친구들의 손을 잡고 춤을 춘다.
작년 학기 초, 체육 시간에 다섯 명 정도의 원을 그리고 있던 어떤 무리의 여학생이 내게 공을 물어오라고 말했다.
물어오라고? 나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물었지만 사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여학생은 내게 개처럼 공을 물어오라고 지시한 것이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는 여학생을 무시했고 여학생은 내게 화를 냈다. 어째서 공을 물어오지 않은 거야?
마치 공을 물어오는 것이 내가 타고난 직분이며 내가 그녀의 명령을 무시함으로써 모든 관계들을 깨뜨린 양.
상담 선생님과 담임 선생님은 내게 친구들에게 먼저 다가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들이 내민 관계항을 나는 순순히 받아들여야 했던 것이다. 그러면 나는 그 애들의 개 역할을 하면서 무리 속에 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새로 개 역할을 할 만한 아이가 나타나면 나는 개 역할을 넘겨주고 엄한 주인 역할을 할 수도 있었겠지.
내가 공을 물고 무리 안으로 기어들어가지 않은 건, 무엇보다도 내게 연기의 재능이 없기 때문이다. 다른 아이들이 자연스럽고 능숙하게 해 내는 가면 놀이를 나는 잘 할 수 없었다. 내게는 가면이 피부처럼 느껴졌고 가면을 뜯어내는 것은 살을 뜯어내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그래서 나는 가면을 순식간에 바꾸어쓸 수도 없었고 다른 목소리로 이야기할 수도 없었다.
가면 놀이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어야 하는 필수적인 행위다. 가면 놀이를 할 수 있는 것은 인간뿐이다. 가면 놀이는 인간의 본질이다. 가면 놀이가 무엇인지 알고 있든 모르고 있든 거의 모든 인간들이 가면놀이를 한다. 하지만 개중에는 나처럼, 가면을 서툴게 바꾸어 쓰는 인간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은 이질적이고 거북스러운 가면이 실재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느끼면서도 가면 안이 텅 비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없다. 그들은 살로 만든, 신경다발에 단단히 밀착되어 있는 가면을 느낀다. 가면은 분명히 있지만 가면을 바꾸어 쓰는 것은 미칠 정도로 고통스러운 일이다. 우리는 평생 하나의 가면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나는 다른 아이들이 매혹적인 경극 배우처럼 하는 일, 가면을 바꾸어쓰는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가면을 바꾸어 쓰는 데에 죄악감이나 모멸감을 느꼈던 것은 아니다. 그저 내게 재능이 없었을 뿐이다. 나는 필요한 가면들을 하나씩 헤아리면서도 순간순간 바꾸어 쓸 수는 없었다. 그것은 이성과 계산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바이올리니스트가 음의 위치를 계산하지 않고도 추상적인 형태로 숨어 있는 음계를 손가락으로 짚어내듯, 본능적인 언어로 사람들은 가면을 바꾸어 쓰는 것이다. 가면은 술어의 호응을 기다리고 있는 주어부와 같다. 주어를 먼저 뱉어낸 뒤에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술어의 호응을 맞춘다. 하지만 나는 주어가 무엇인지 확인하고 그 얼굴을 한참을 뜯어본 뒤에야 술어를 말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내가 술어부에 놓일 단어들을 고민할 즈음 이미 내 문장은 토막난 채로 허리에서 피를 흘리고 죽어가고 있다.
하나의 가면이 다른 가면을 쓸 때까지 걸리는 버벅거리는 시간을 사람들은 인내심있게 기다리지 않는다. 내가 손가락 없이 피아노를 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이 안다면! 내가 손가락 첫 번째 마디가 모두 잘려나간 채로 바이올린을 켜고 있다는 걸 그 애들이 안다면 나를 좀 더 기다려 줄까? 하지만 오랜 시간이 걸려 가면을 바꾸어 쓴 뒤에도 나는 능숙하게 연기해내지 못한다. 그것은 나의 대사가 아니고 나의 행위도 아닌 것 같다. 나는 나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훌륭한 배우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내 연기는 끔찍하게 어색하고 서툴다. 연출가가 내 목을 조르고 길거리에 내던져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하지만 나는 벌거벗은 걸인의 역할조차 제대로 할 수 없을 것이다.
다른 아이들이 열 살 무렵부터 자연스럽게 몸에 익힌 가면술을 나는 배우지 못했다. 연기를 언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런 친구를 만날 때는 어떤 어조로 말해야 하고 친구를 괴롭히는 건 어떤 주기로 어떤 상황에서 해야 하는지, 무리의 중앙에서 노래를 부르기 위해서는 어떤 방식으로 행동해야 하는지, 개를 바꾸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 요구해야 하는지 가르쳐주는 교사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다른 아이들은 말 없이 자연스럽게 그 모든 것을 익혔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교사가 가르쳐 주는 것을 대부분 잘했지만 공을 피하고 던지는 법은 끝내 이해하지 못했다. 다른 가면과의, 그리고 자기 가면과의 관계라는 것은 예컨대, 공을 가지고 하는 게임 같은 것이다. 나는 명시화되지 않는 게임의 룰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게임의 룰을 겨우 외우고 난 뒤에는 게임을 능숙하게 하지 못해 애를 먹었다. 나는 곧장 포기해버리고 말았다.
생일을 맞은 여자아이에게 다가가 친해지는 방법은 따로 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 적합한 목소리와 어조와 말의 내용과 제스처와 표정은 따로 있는 것이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자연스럽게 알고 있는 것을 나는 알지 못했다. 아무도 내게 알려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다른 아이들은 룰 없이도 자연스럽게 룰을 익혀 행하고 있었으므로. 처음부터 물 속에서 자연스럽게 헤엄치는 물고기들이 뭍의 짐승들에게 영법을 설명할 수 없듯, 뭍의 짐승들이 물의 짐승들에게 물 밖에서 어떻게 걸어야 하는지, 어떻게 숨을 쉬어야 하는지 설명할 수 없듯, 교사들은 가장 중요한 것을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들, 걷고 숨 쉬는 법, 사냥하는 법을 익히지 못한 짐승들은 버려지고 죽음을 맞이한다. 내가 아직 살아 있는 것은 인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괴로운 것도, 내가 서툴게 살아 있는 것도 모두 내가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찢어져 덜렁거리는 사람의 얼굴을 매달고 있는 사람이다. 가면을 얼기설기 꿰매 놓은 실밥은 튿어져버렸다. 얼굴과 머리 틈새에는 끔찍한 심연이 있다. 검붉은 피딱지가 앉은 역겨운 틈이 있다. 말을 할 때마다, 말을 하지 않을 때마다, 행동을 할 때마다, 행동을 하지 않을 때마다, 웃을 때마다, 웃지 않을 때마다, 울 때마다, 울지 않을 때마다 나는 실수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다른 아이들이 종종 다른 아이에게 그렇듯 끔찍하게 무례하거나 다정스럽게 굴지 못한다. 나는 다정하게 굴지 않음으로써 무례하게 행동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무례하게 말하지 않음으로써 무례하고 오만하게 굴고 있는 것이다!
작년에, 그 여자아이에게 했던 말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 나는 오천 번 넘게 같은 상황을 시뮬레이션해 보았다. 대체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말했어야 그 여자아이와 친구가 될 수 있었을까? 대체 어떤 타이밍에 어떻게 그 여자아이를 불러내어서 어떤 말을 했어야 여자아이는 내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까?
1) 악어 샌드위치 운운하는 말들은 모두 삭제한다.
2) 친구가 되자는 말도 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친구가 되자는 말 없이도 이미 친구가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친구가 되자는 말은 끔찍하게 깊어지자는 말이다. 여자아이는 나와 깊은 사이가 되고 싶지 않으므로 가장 얇은 표면을 두드리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3) 같이 집에 가지 않을래? 하지만 여자아이가 곧장 곤란해하는 얼굴로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것을 떠올릴 수 있다. 미안. 난 친구들이랑 같이 집에 가야 해.
4) 죄책감을 유발해야 할까? 우리 엄마 아빠는 실종되었어! 오, 그럼 여자아이는 얼굴을 찡그리면서 도망치고 말 것이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말하겠지. 그 애는 해서는 안 될 말을 해. 그 애는 이상한 거짓말을 해. 그게 거짓말이 아니라면 더 끔찍할 거야. 대체 우리가 무슨 사이라고 그런 말을 하는 거지? 나는 만난지 며칠 되지 않은 친구들에게 자신의 지병과 우울에 대한 이야기를 해서 경멸받은 여자애를 본 적이 있다.
5) 선물을 건넬까? 그러면 여자아이는 내게 점점 더 많은 선물을 요구할 것이고 선물을 요구하면서 동시에 내게 개의 배역을 선물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개를 잘 연기할 줄 모른다.
6) 청소를 해줄까? 그 애의 자리를 대신 청소해주겠다고 할까? 그리고 정말 개가 될까?
7) 난 예전부터 너를 좋아했어. 너와 함께 목이 긴 유리병에 갇히고 싶어. 네 걸음걸이는 수은처럼 투명해. 난 내 생명에 끈적하게 달라붙을 정도로, 그의 몸에 내가 묶여버릴 정도로 사랑할 사람을 찾고 있어. 이건 가장 끔찍하다. 여자아이는 내가 미쳐버렸다고 생각할 것이다.
8) 이 모든 난관을 넘어 여자아이와 친구가 된다고 해도, 그 다음 순간에는 다음 다음 순간에 저지를 실수들은? 결국 어느 분기점에서 나는 낙오할 것이다. 나는 다른 아이들이 쉽고 감미롭게 음을 짚어 연주하는 순간순간 어느 음을 짚어야 하는지 그 음이 어디에 있는지 헤매고 헤매며 합주를 완전히 망쳐놓을 것이다.
초등학교 때 학예회 연주를 위해 몇 명의 아이들과 함께 연주 연습을 한 적이 있었다. 나는 지나치게 빠르게 연주해서 아이들의 비난을 샀다.
우리의 연습을 봐 주던 교사는 단단하게 굳은 어두운 얼굴로 나를 질책했다. 그럴 거면 너 혼자 연주해.
하지만 나는 내 연주와 다른 아이들의 연주를 동시에 들을 수 없었다. 나는 귀머거리처럼 연주했고 다른 아이들은 틀리더라도 모두 같은 순간에, 같은 방식으로 틀렸다.
결국 유행병 때문에 학예회는 무산되었지만 나는 교사의 일그러진 얼굴을 잊을 수 없었다. 교사는 적절한 순간에 분노와 질책의 가면을 쓸 줄 알았다. 조금만 늦거나 빨랐더라도 그의 분노는 자연스럽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오, 내 연기는 언제나 분노를 유발할 정도로 서툴렀다. 내가 다정함의 가면을 쓰고 있을 때 아이들은 내가 착한 척을 한다며 불쾌해했고 내가 다정함의 가면을 포기했을 때 아이들은 내가 오만한 척을 한다며 얼굴을 찡그렸다.
하지만 모두가 가면을 쓰고 있지 않아? 모두가 분노한 척을, 공포스러운 척을, 역겨워하는 척을 하고 있지 않아? 하고 내가 묻는다면 그 애들은 이렇게 답했을 것이다. 그럴 리가. 우리는 정말로 분노하고 공포했고 역겨워하는 거야!
대부분의 아이들은 메소드 연기자들이다. 그 애들은 분노와 공포와 역겨움과 행복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단단히 밀착된 상태로 연기를 한다. 하지만 나는 분노와 공포와 역겨움과 행복을 그다지 믿지 않는 상태로 연기를 한다. 그 때문에 그 애들의 가면은 그토록 자연스럽고 매끄러우며-심지어는 주름조차도 매끄럽다- 내 가면은 틈이 벌어진 채 흉측하게 보이는 것이다. 피를 뚝뚝 흘리는 얼굴과 머리 사이의 벌어짐. 하지만 얼굴과 머리 사이의 심연에서 흘러나오는 피와 아픔과 외로움은 진짜이다.
나는 정말로, 훌륭한 연기자가 되고 싶다. 훌륭한 연기만큼이나 아름답고 대단한 재능이 또 있을까? 아이들은 대부분 훌륭한 연기자들이다. 아이들은 연출가와 배우의 역할마저 자연스럽게 뒤바꿔 연기하며 살아간다. 아이들이 역할놀이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아이들은 순식간에 역할에 몰입하고 또 순식간에 역할로부터 빠져나와 바깥의 역할을 맡는다. 그 애들은 게임의 룰에 완전히 집중하면서도 게임의 본질을 잊지 않는다. 밤이 지날 때까지 역할놀이를 하는 아이들은 드물다. 하나의 역할놀이가 끝나면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다른 가면으로 건너간다. 그처럼 정교하고 가벼운 뜀박질을 하지 못하는 아이들은 가면과 가면 사이의 심연으로 떨어져 피를 흘리는 것이다.
나는 심연에서 피투성이로 벌레처럼 기어가면서 내 머리 위에 달처럼 희게 떠 있는 가면들을 올려다본다. 다시 가면들의 위로 올라갈만한 여력이 없다. 가면들 사이를 유유히 뛰어다닐 자신이 없다. 다시 떨어져 피를 흘릴 것이라면 무표정을 뜯어내고-유리, 너는 너무 무표정해. 너는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거니? 마치 로봇처럼. 아니야. 나는 끔찍하게 느끼고 있어. 나는 무표정한 것을, 수은처럼 투명한 독을 끔찍하게 느끼고 있어.-신경과 근육이 드러난 고통스러운 맨얼굴로 다시 다른 가면을 쓸 필요가 있을까? 뜯어내고 뜯어내고 피를 흘리고 죽어가야 할 그 많은 가면들. 부패해가는 가죽 얼굴들. 어떤 가면의 턱과 이마 부분에는 절망적으로 시퍼런 곰팡이가 폈다. 구역질이 나오는, 역겨운 가면이다. 새 가면을 구한다고 해도 곧 그렇게 더러워질 것이다. 내 머리는 피와 눈물로 젖어 있으므로 어떤 가면이라도 금세 피투성이로 부패해갈 것이다. 그러므로 여자아이에게
9) 더 이상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았다. 여자아이는 나를 원하지 않았고 나는 어린아이를 집요하게 괴롭히는 벌레처럼 굴고 싶지 않았다. 나는 누군가를 고통스럽고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여전히, 누군가와 함께 악어 샌드위치를 먹고 싶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다. 어린 짐승의 부드러운 뿔을 맞대고 잠들고 싶다. 고통으로 벗겨진 이마를 서로 문질러대고 싶다.
나는 언젠가 바닷물을 마시고 말 것이다. 갈증으로 죽어가는 표류자는 독과 같은 해수를 마시고 죽는다. 나는 죽음과 같이 고통스러운 생명을 들이마시고 말 것이다. 나는 아마 가면이 모두 썩어버린 뒤에도 살아 있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피투성이의, 부패한 가면은 남아 있을 것이다. 가면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으니까. 심지어 짐승조차도, 신이나 고기의 가면을 쓰고 있다. 그들이 원하든 원치 않든.
그 애는 어제처럼 점심시간과 하교시간에 내게 말을 걸었다. 그 애가 내게 황당무계하고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했으므로 나도 그렇게 했다. 그 애와 말하고 있으면 마음이 편하다. 그 애에게서는 견딜 수 없는 악취가 나지만 그래도 그 애의 목소리는 다정하고 깨끗하다. 어리고 병든 새처럼 높고 가느다란 음성이다.
젖은 속을 가진 선인장의 뱃속에 손가락을 넣어 봤어? 그 애는 이렇게 물었다. 구름들의 힘줄을 만져본 적이 있어? 우리 엄마는 매번 베스트셀러 문학 작품들을 만들어내는 대형 출판사에 삼백오십네 번 투고했어. 엄마는 항상 우편으로 원고를 보내다가 삼백오십네 번째에는 직접 출판사 건물까지 찾아가서 원고를 받아왔는데 담당자는 엄마의 원고를 읽지도 않았대. 어떻게 알았냐고?
그 애는 마치 대본을 외우는 것처럼, 혹은 같은 말을 수백 번 반복한 것처럼 기계적이고 능숙한 어투로 말을 이어나갔다. 10, 53, 79, 157, 263페이지의 원고지가 뒤집어진 채로 있었기 때문이지. 엄마는 담당자가 원고를 읽지도 않으리라고 의심하고는 그런 속임수를 썼던 거야. 결국 엄마에게만 끔찍한 상처를 줄 속임수였지. 엄마는 담당자에게 따질 수도 없었어. 엄마가 담당자에게 어째서 원고를 읽지 않았느냐고 따진다면 담당자는 이렇게 말할 테니까. 우리 출판사에서는 등단 작가의 원고만을 받습니다.
담당자는 엄마의 원고를 쓰레기통에서 찾아내지 않아도 된 것만으로도 관대한 처사라는 듯 말할 거야. 엄마는 너무 많은 시를 썼어. 그래서 미쳐가고 있는 거야. 엄마는 소설처럼 긴 시를 쓰고 있지. 요즈음에는 행과 연 구분조차 없이 글을 쓰고 있을 때가 많아. 샤이닝에 나온 남자처럼 말이야. 샤이닝, 알아?
나는 안다고 말했다.
거기서 남자는 같은 문장을 수만 번 반복해서 적어내리지. 그것이 무언가의 진리나 계시라도 되는 것처럼. 어쩌면 엄마도 그런 식으로 시를 쓰고 있을지도 몰라. 하나의 어휘 혹은 하나의 시행을 반복해서 계속 써내려가는 거지.
언젠가 엄마가 칼을 들고 내 방문 앞에 서 있어도 난 놀라지 않을 거야. 엄마는 나를 죽이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언젠가 엄마는 자살하겠지. 엄마는 내게 충분히 많은 암시들을 주었어. 나한테 시체 처리하는 청소 업체의 전화번호까지 줬다니까! 엄마는 보험금을 타는 방법과 유산 상속 방법까지도 문서로 정성스럽게 정리해서 내 책상 서랍에 넣어 놓았어. 하지만 엄마가 자살하고 나면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떠날 거야.(너도 죽을 거야? 그 애가 그런 말을 지껄일 때 나는 물고기처럼 침묵하고 있었지만 이제와서 물어본다. 엄마가 자살하고 나면, 너도 새처럼 유리창에 반사된 거울 세계로 뛰어들 거야? 내일도 나는 물어볼 수 없을 것이다. 모레도. 우리가 나누었던 것이 대화일까? 어째서 그 애는 내게 그토록 절망적인 말들을 털어놓은 걸까? 내가 다른 아이들에게 소문낼 수 없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까?)
시를 쓰는 건 미친 짓이야. 그 애는 늙은 짐승처럼 투덜거렸다.
하지만 그 애의 엄마에게 시를 쓰는 건 선택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닐 거라고 변명하듯 말했다.
그래. 그 애는 이렇게 말했다. 엄마는 시를 쓰는 게 물을 마시는 일과 같다고 말했어.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답했다. 너희 엄마는 시를 썼기 때문에 미친 게 아니라 이미 미쳤기 때문에, 돌이킬 수 없이 미쳐버렸기 때문에 시를 쓰기 시작한 거야. 정상적인 여자라면 시를 쓰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지. 더욱이 실패가 예정되어 있음을 뻔히 아는 여자라면. 그런 건 미친 짓이야. 나도 마찬가지고. 나도 너희 엄마와 마찬가지로 3류 시인조차 될 수 없을 거야. 3류 작가가 되는 건 우리-그러니까 너희 엄마와 나-에겐 기적 같은 일이지. 아주 드물게 식탁에서 뉴욕의 갤러리로 진출한 여자들이 있지만 그게 너희 엄마와 나는 아니야. 그럼에도 우리는 시를 쓸 수밖에 없어. 왜냐하면 시를 쓰지 않고는 살 수 없기 때문이지! 태어났기 때문에 숨을 쉬는 게 아니야. 숨을 쉬기 위해서 사는 거지. 소노 시온의 영화를 봤어? 노리코의 식탁이라는 영화에 나온 대사야. 거기에는 이미 미쳐버린 여자들이 나와. 아주 늙은 여자를 연기하는 소녀도 있고 어린 소녀를 연기하는 소녀도 있지. 일종의 연기 클럽에서 소녀들은 가족을 잃은 사람들을 위해 그들의 가족을 연기해주는 일을 하기도 하고 자살자나 피해자의 연기를 하기도 해. 그러한 연기는 연기를 주문한 고객뿐 아니라 소녀들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
결국 무엇을 연기할지, 무슨 가면을 선택할지, 어디에서 살해당할지 그 각본을 선택하는 것은 소녀들 자신이야. 그녀들은 훌륭한 여배우고 각각 다른 역할을 맡아서 연기하는데 가장 위험한 건 자기 자신을 연기하는 일이야. 영화의 주인공인 노리코는 실종된 딸을 찾아 헤매는 그녀 자신의 아버지를 위해, 그녀와 같은 연기 집단에 흘러들어온 여동생과 함께 이전의 가족을 연기하게 되지. 노리코의 이름을 버리고 벌거벗은 소녀들의 연기클럽에 들어갔던 노리코 아닌 여자가 노리코를 연기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 거야. 노리코는 처음엔 울며 저항하지만 영화의 마지막 순간에는 노리코의 이름과 가면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반면에 그녀의 여동생은 자기의 옛 이름을 완전히 버리고 떠나가지. 탯줄처럼 붉은 실밥을 뜯으면서. 중요한 건 그녀들이 가면을 벗거나 다시 쓰기를 스스로 선택했다는 거야. 자기 이름이었던 것, 자기 얼굴이었던 것, 자기 표정이었던 것, 자기 언어였던 것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뒤집어쓰는 순간 세상은 피투성이의 거대한 난자처럼 위험한 것으로 변하게 되지.
그런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해 본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그 애가 나를 노리코라고 불러주길 바랐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는 다른 아이들이 서로를 이름이 아닌 다른 애칭으로 부르는 것처럼 그 애가 나를 특별한 언어로 불러주기를 바랐다. 새롭고 희귀한 곤충을 발견한 곤충학자처럼! 하지만 우리에게 별명은 과분한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우리의 이름조차도 낯설어 하니까.
그 애는 나를 내가 아는 이름으로 부르지만 나는 아직도 그 애의 이름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