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11년 3월 19일
그 애는 우리 연극이 연극에 대한 연극이 될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오렌지 껍질처럼 잘 벗겨지도록 개량된 과일이 아니야. 하지만 우리는 다른 피부를 갈망하지. 왜냐하면 우리 피부는 안에서부터 썩어가고 있고 악몽처럼 검게 번져가니까.
오렌지라고 해도 벗겨진 피부를 돌이킬 방법은 없다고 나는 말했다. 오렌지 역시 단 하나뿐인 피부를 가지고 있어. 껍질을 벗겨낸 오렌지, 축축한 과육, 껍데기가 부서진 난자와 유방암 태양. 사막의 피폭된 검은 오아시스를 표류하는 비너스의 둥글고 축축한 유방암. 비너스와 유방암의 관계. 나와 난자의 관계. 난자와 오렌지의 유사성. 껍질이 벗겨진 오렌지와 오렌지 껍질의 관계.
나는 껍질이 벗겨진 과육에 대한 빌어먹을 시를 써서 그 애에게 건넸다. 언제나와 같이 아무도 우리의 쪽지를 가로채지 않았다.
그 애는 내게 사막과 검은 오아시스에 대해 물었다.
사막은 끝없이 희고 불투명한 피부를 가지고 있어. 나는 쪽지로 답했다. 여행자는 검게 피폭된 사막의 오아시스와 죽음의 갈증 중 하나를 택해야 해.
너는 뭘 택했는데? 그 애는 물었다.
나는 아무것도 택하지 않았어. 나는 피폭된 수영장 내부에서 거품과 함께 태어났고 내가 그곳을 빠져나갈 수 없다는 걸 알아. 피폭된 물은 목과 폐, 심장이 타들어가는 것처럼 고통스럽지만, 온몸이 모래로 부서지는 것처럼 아프지만 나는 시를 쓰는 걸 그만둘 수 없어. 시를 쓸 때의 죽음들만이 생명의 번들거리는 피투성이 속을 내비치기 때문이야.
a-5년 3월 20일
간혹 욕조에서 눈을 감은 나를 멍하니 들여다보는 아이의 시선을 느낄 때가 있다. 내가 위태롭다는 것을 아이는 직감하고 있다. 불투명하게 젖은 물안개의 창자 밑에서 나는 내가 흩어지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수은처럼 무겁고 투명하게 침잠하는 것 역시. 아이와 나 사이의 관계. 아이와 아이의 관계, 나와 나의 관계.
나는 아이에게 부드럽고 지리멸렬한 대사 이외에는 내뱉을 수가 없다. 배고프니? 졸리니? 사랑해. 혹은 미안해.
나는 아이에게 내뱉는 내 대사를 믿지 않기 때문에 끔찍하게 경직되어버린 서툰 어조로 연기할 수밖에 없다. 아이는 내 깊고 지긋지긋한 균열을 알아차렸으며 그래서 그 애 역시 그토록 연기에 서툰 것이다.
간혹 그 애에게 솔직하게 말하기도 한다.(물론 그것 역시 일종의 대사이다. 다만 내가 더 수월하게 연기할 수 있는 대사. 빌어먹을 허구의 접착제 없이도 읊을 수 있는.)
난 네가 무서워. 혹은 난 사랑이 뭔지 모르겠어. 사랑은 결여와 허공에 대한 악몽에 불과한 것일까? 기다림, 기다림의 끝에는 언제나 파멸이 있어. 나는 너를 사랑하는 게 무서워. 그리고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 역시. 너는 나의 유령을 기다리고 있고 나 역시 나의 유령을 기다리고 있어. 너보다 내가 먼저 죽어버리기를 바라! 지금 내가 가까운 죽음의 징후이기를 바라! 사실 나는 지나치게 많이 죽었어. 너를 낳을 때도 나는 죽었고 네가 내게 사랑을 말할 때도 죽었고 내가 죽지 않을 때조차 나는 죽었지. 수천 번의 죽음 이후에도 끝은 없었어. 어째서 우리는 아름다움이 우리를 추락시키는 것을 막을 수 없을까? 나는 내가 내뱉은 언어가, 내 시가 나를 배신할 것을 알고 있어. 내가 느끼는 아름다움이 나를 얼마나 철저히 배반하고 나를 파괴하고 나를 무너뜨릴 것인지. 난 아름다움을 느끼는 만큼이나 절실하게 예상하고 있어. 비극의 절망적인 예언은 필수불가결하지. 예언은 첫 번째의 반복이며 어머니의 겁탈과 아버지의 죽음은 두 번째 반복, 예언의 상기는 세 번째 반복에 해당해.
절망에 대한 나의 예감과 징후들, 절망 그 자체와 절망적인 예감에 대한 상기는 몇 개의 원환들을 그려내고. 미지근한 물은 나를 풀어헤칠 것처럼 부드럽게 어루만지지만 결코 나를 다른 곳으로 데려가지 않는다. 나는 이미 수 차례 배반당하였으나 나의 운명을 알고 있다. 운명은 가장 강렬하고 두터운 반복이다.
나는 운명을 변주시켜야 하는가? 변주는 탈주인가? 혹은 탈주 역시도 변주에 불과한가? 수만 번의 하루와 수만 번의 해돋이와 수만 번의 노을, 수만 번의 실패와 수만 번의 좌절과 수만 번의 불행, 수만 번의 악몽과 수만 번의 출혈, 수만 번의 죽음.
나는 욕실 거울을 깨어내는 내 아이를 본다. 아이는 작은 거울 파편을 내 입술 밑에 가져다댄다. 거울 파편은 내 숨결에 불투명하게 젖어든다. 아이는 안심하며 나는 절망한다.
나는 태어남을 원하지 않았다. 무한한 숨들과 출혈, 젖어듦과 소모되어가는 난자들을 원한 바도 없다.
괜찮아? 나가서 기다려. 금방 나갈 테니까.
믿지 않는 대사를, 빌어먹을 유치한 대사들을 내뱉을 때 내 입술을 단단하게 굳고 얼굴은 끔찍하게 일그러져 경련한다. 어서 이 애가 자라서 나를 죽여주었으면! 아니. 나는 내 아이가 살인자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미쳐버릴 정도로 나의 유령을 갈망하고 있다. 물리적 좌표와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한. 물리적인 것에도 심지어는 정신적인 것에도 교류할 수 없는.
아니야. 나는 진실로, 유령을 그만두기를 원한다. 그러나 유령의 너머에는 다른 유령이, 똑같은 실종과 좌표 없음과 존재와 무력함이 있을 뿐이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잘 알고 있다.
질병처럼, 혹은 고통처럼. 나는 내 갈망을 느끼고 있다. 나는 무기력한 잔해처럼 떠밀려 어떤 쓰레기장, 혹은 사막에 도달한다. 그곳에서 나는 썩어가지만 사라지지는 않는다. 아이는 어린 개처럼 온순하고 순종적이다.
엄마는 시를 그만 써야 해 : 내 아이의 해법.
시는 나를 죽이고 말 거야. : 나의 지리멸렬한 예상.
어째서 나는 무한한 죽음들과 언어들과 페이지들과 더 이상 현행하지 않는 현재들을 낭비하고 있는가? 왜냐하면 낭비는 생명에 다름아니니까! 나는 삶을 포기하지 못했기 때문에 삶을 낭비하고 파멸시키고 있는 것이다. 낭비하지 않는 생, 바닥에 부딪혀 산산조각나지 않는 생은 어디에도 없다. 생은 죽음을 향해 움직이고 그것은 우리의 내장을 피폭된 공기 중에 노출시키고 만다.
작년 겨울, 어미의 품처럼 따뜻하게 달구어진 자동차 엔진 속에 기어들어간 어린 고양이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나는 시동을 걸고 주행했다. 차 밑으로 무언가가 떨어져내렸고 나는 처참하게 짓이겨진 어린 짐승의 시신을 마주해야 했다. 내 것이 아닌 몸을 공원 뒤의 숲에 파묻으면서 나는 끔찍하게 흐느꼈다. 아, 모든 시계태엽 안에는 어리고 연약한 새끼 고양이들이 들어가 있다. 시간이 흐르거나 돌아갈 때마다 고양이들이 바스라지고 으깨져 피를 흘리며 죽어간다. 시계장치의 내부는 짐승의 살과 내장, 피로 오염되었으며 기계장치는 이미 망가진지 오래다. 시간은 퇴색되었을 뿐 아니라 오염되었고 불구가 되었다. 내 벌거벗은 몸 위에 들러붙은 하얀 비누 모양의 흡반들이 붉고 촘촘한 모세혈관들로 부풀어간다. 내 피를 빠는 것은 나며 내게 살해당하는 것, 나를 살해하는 것 역시 나다.
아이가 사교적이지 못한 것은 순전히 나 때문이다. 아이를 데리고 놀이터에 나가면 아이는 내게 신경을 기울이느라 여느 아이처럼 천진하게 놀지도 못한다. 아이는 언제나 내가 그 애를 떠나갈까 걱정하며 언젠가 나를 잃을 것이라고 예상한다.(언젠가 그 애는 내게 사라지지 않을 거지? 하고 물었고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애는 내 품에서 울었고 나는 그 애에게 ‘괜찮을 것’이라는 대사를 내뱉지 못했다.)
젖은 몸을 닦고 욕조 밖으로 나왔을 때는 이미 밤이었다. 아이는 크리스마스 선물 포장지로 장식된 동화책을 꺼내어 내게 가져다주었다. 동화 속 아이의 크림처럼 부드러운 얼굴과 창백한 장밋빛의 입술은 내 아이의 창백한 얼굴과 닮지 않았다.
동화 속 아이는 어머니의 병을 고치기 위해 검은 물 속으로 기어들어간다. 물 속의 물고기들은 아가미를 갖지 못한 아이가 곧 죽고 말 것이라며 낄낄거린다. 아이는 검은 물에 젖어 더욱 검게 변한 몸으로, 더 깊이 잠수한다. 물 속의 검은 요정은 아이를 측은히 여기고 숨이 막혀 죽어가는 어린 아이에게 어머니의 병을 고칠 수 있는 주문을 알려준다. 하지만 요정은 아이에게 물고기의 아가미를 선물해주지는 않는다. 더 이상 크림처럼 부드럽고 장밋빛을 띠지 않는 아이는 물 속에서 익사하고 만다. 아이의 유령은 어머니를 찾아가 주문을 외우려 하지만 아이에게는 입술도 발성 기관도 없기 때문에 아이의 주문은 어머니의 병든 귀에 가 닿지 못한다.
내 아이는 죽은 아이와 곧 죽게 될 어머니가 유령이 되어서 만났느냐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어째서 검은 요정은 아이에게 아가미를 달아주지 않은 거예요? 아이는 순진하게도 울면서 내게 물었다.
나는 아이에게 아가미를 가지게 된 아이가 어떻게 되었을지 이야기해 주었다. 아이는 물고기의 아가미를 가진 채로 육지로 올라섰어. 해변에 쓰러져 있는 아이를 가장 먼저 발견한 어부는 아이의 아가미를 보고 아이가 인어라고 생각했지. 어부는 아이를 수조 속에 넣어 두었고 사라진 아이를 찾아 헤매던 병든 어머니는 어부의 집 앞 수조에 갇힌 아이를 발견했어. 어머니는 아이를 돌려달라고 했지만 어부는 그럴 수 없다고 했지. 아이는 그가 바다에서 직접 포획한 물고기이므로 그 누구도, 심지어는 물고기의 어미라고 해도 물고기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었어.
아이는 수조 속에서 어머니를 향해 간절히 주문을 뻐끔거렸지만 주문은 물거품이 되어 스러질 뿐이었어. 어머니가 값을 치르겠다고 약속한 뒤에야 어부는 알겠다고 대답했지. 어부는 아이의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아이의 피부를 벗기고 회를 떠서 커다란 접시에 담아 내왔어. 아이의 어머니는 비명을 지르면서 울부짖었지만 어부는 물고기를 회 떠서 파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말했어. 병들고 가난한 어머니는 아이의 횟값을 치를 수 없었고 아이의 회는 공기 중에 천천히 부패해갔어. 혹은 피냄새를 맡고 몰려든 사람들이 회 한 점당 값을 치르고 사 먹었어. 아이의 인육은 부드럽고 달콤하며 독특한 비린내가 났어. 이런 일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검은 요정은 아이에게 아가미를 달아주지 않은 거야.
나는 아이의 검고 둥근 눈을 보며 차근차근 설명했다. 아이는 그 또래의 소년들이 그러하듯 잔혹한 이야기를 유달리 좋아했다. 아이는 키득키득 웃고 환희에 겨워 구역질을 해대면서 어부가 아이의 살점을 바르는 장면을 들었고 결국 검은 요정의 선택에 동의했다. 그러면서도 아이는 고집스럽게 검은 요정이 나쁘다고 중얼거렸다.
검은 요정이 아이에게 아가미를 달아 주고 어부를 죽였다면 모두가 행복할 수 있었을 거예요.
나는 검은 요정은 신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리고 검은 요정은 행복을 원하지 않는다고.
i11년 3월 20일
오늘은 시를 쓰지 못했다. 나는 치료되고 있는 것일까? 수은처럼 투명하게 넘실거리는 감성과 유리병의 부재. 미래는 모든 우발적인 것들에 달려 있다. 태어나며 내가 소유할 수 있었던 것들은 처음부터 없었다. 엄마와 아빠, 오빠는 내게 이렇다 할 인사조차 없이 사라졌고 나는 그들을 찾으러 나서지 않는다. 대체 어디서? 언제부터 그들을 찾아야 한단 말인가? 나는 시간의 결절점을 더 이상 기억하지 못한다. 내게는 모든 시간이 균열로 느껴진다. 물거품으로 만들어진 위태로운 건축물 속에서 나는 건물의 겉면에 비추어지는 일그러진 상만을 애달프게 앓으며 살고 있다.
저녁까지 학과 복습으로 시간을 보냈다. 어지러운 도형들과 도형들의 구멍 틈으로 비어져나온 텍스트들. 나는 그것을 고행하듯 읽었다. 오빠가 커터칼로 교과서들을 조각내던 모습이 기억난다. 오빠는 불안정한 사람이었다. 그가 잘라낸 흰색의 도형들은 날카로운 단면을 가지고 있었지만 순식간에 구겨질 정도로 연약했다. 마치 꽃잎처럼. 오빠는 언어의 출구를 가지고 있지 않았고 그래서 나처럼 절망할 일은 없었으나 언제나 죽음과 파멸의 그림자로 침잠해 있었다.
오빠가 어렸을 때 귀엽고 순진한 아이였다는 엄마 아빠의 말을 나는 믿지 않았다.
내 것을 보여줄 테니 너도 보여줘. 하고 오빠가 말했을 때 나는 울며 도망쳤다.
이후로 오빠는 내게 그다지 말을 걸지 않았다. 나는 그를 연민하지 않았지만 그가 견디지 못하리라는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실패가 예정되어 있는 통로라도 찾아 기어드는 편이 더 나은 경우인가?
오빠가 잘라낸 교과서들의 조각들은 섬세하고 위태로운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다. 낙서처럼 어지러운 모자이크들은 오빠가 내게 보여준 가장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우리의 이를 모두 뽑아 모자이크를 만들면 좋겠다고 나는 말했다. 내 치근과 오빠의 검은 충치, 유달리 흰 송곳니와 노랗게 변색된 앞니들을 붙여서 반짝이는 젖은 모자이크를 만드는 거야.
오빠가 뭐라고 했었지? 기겁을 하며 구역질을 했던가? 아니면 좋다고 달려들었던가? 아니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던가?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내밀한 말들은 종종 전해지지 않기 마련이니까. 오빠는 내가 한 말을 듣지 못했을 것이다.
오빠의 생일에 우리 가족은 커다란 생크림 케이크를 식탁 위에 차리고 촛불들을 꽂았다. 거실과 방들의 불이 모두 꺼진 순간 오빠는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다시 불을 켰을 때 오빠는 아기처럼 울고 있었다.
무엇이 그를 위협했느냐고 내가 물었을 때 오빠는 아무것도 없었다고 엉엉거리면서 중얼거렸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없었어. 나조차도 이곳에 없었어.
오빠는 균열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라 균열과 균열 사이를 하얀 곰팡이처럼 뒤덮으며 자라나는 공백을 견디지 못한 것이다. 그가 나의 성기를 보고 싶었던 것인지 자기 자신의 여성기를 보고 싶었던 것인지 모르겠다.
내가 유치원에 다닐 때 오빠는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했다. 내 경우와는 달리-나는 언제나 여백처럼 조용한 아이였다. 어디에도 섞이지 않지만 무언가에 적극적으로 오염되지도 않는 하얀 기름방울처럼.-오빠는 적극적인 모욕과 조롱거리가 되고는 했다. 오빠에게는 친구들이 셀 수도 없이 많았으나-오빠는 자기 친구들이 몇 명인지 결코 확신할 수 없었으며 그들 모두의 이름을 외우는 일도 그에게는 불가능했다. 언제나 오빠가 기억하지 못하는 누군가가 오빠의 이름을 친근하게 부르며 다가와 오빠의 몸을, 혹은 그 내부의 심약한 영혼을 만졌다.-그들 중 오빠가 먼저 인사를 하고 말을 걸 수 있는 친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오빠는 그들에게 대항하거나 싸울 생각은 하지 않았다. 오빠가 그런 사람이었다면 곧 친구들과 친해졌거나 완전히 부서졌거나 나처럼 되었을 것이다. 오빠는 굴욕적이고 접착적인 관계를 이어갔다. 오빠는 말랐음에도 친구들에게 돼지라는 별명으로 불렸는데 별명과 형상 사이의 이질성은 그들 관계의 특성을 대변하고 있었다. 오빠가 나를 돼지라고 부를 때, 나는 그가 누군가에게 돼지라고 불리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오빠의 존재는 항상 내게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나는 내가 외동으로, 혹은 고아로 태어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다. 나는 가족 중 누구도 닮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종종 오빠의 얼굴을 잊는 바람에 그를 보고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비쩍 마른 몸 위의 연한 가죽은 헐렁하게 붙어 있었다.
오빠의 식성은 들쭉날쭉했다. 대개는 고기가 문제였다. 대개 오빠는 고기를 거부하고 익힌 채소만 먹었지만 어떤 날은 아직 냉장고에서 생고기를 꺼내 구역질을 하면서 게걸스럽게 먹어치울 때도 있었다. 어린 소년의 턱과 입술, 이를 붉게 적신 살코기에서는 끔찍한 붉은 악취가 진동했다. 오빠는 인육을 먹듯 다른 짐승들의 고기를 먹었다. 혹은 자기 자신의 고기를 먹어 치우듯. 아, 얼마나 많은 냉장고들이 그 속에 시체를 품고 있는지, 나는 오빠 덕분에 알게 되었다.
나는 가끔 오빠의 입 속에서 들끓고 있는 파리와 구더기의 꿈을 꾸었다. 오빠는 그 역겨운 벌레들을 모자이크를 위해 치아를 모두 빼낸 부드럽고 서글픈 잇몸으로 으깨어 부수고 있었다.
나는 오빠를 그다지 사랑하지 않았다. 그는 내게 언제나 어색하고 부연 연기처럼 느껴졌다. 결코 내장 깊숙이 스며들지 않는.
난 너 때문에 불행한 거야. 오빠가 그렇게 말했을 때는 많이 놀랐다.
우리는 의자와 의자 위에 얹어 둔 이불이 만들어낸 고요한 적막 속에 웅크리고 각자의 상상 속에 빠져 있었고 나는 그 기묘한 혈거인이 나를 철저히 무시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왜? 내가 내 성기를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에?
오빠는 얼굴을 찡그리면서 내가 자기 말을 듣지 않고 그를 무시하기 때문에 그가 다른 곳에서도 무시당하며 핍박당하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비밀을 알려줄까? 네게 친구가 없는 건 네가 끔찍하게 오만하기 때문이야. 오빠는 날카롭게 속삭였지만 나는 그의 말이 비밀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오로지 나의 텅 빔과 빌어먹을 분열, 절망과 실패 때문에 오만했고, 그것은 나로서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이었다.
오빠는 내가 밉다고 어린아이처럼 되뇌었다. 난 오빠에게 바라는 것이 없으므로 오빠가 밉지 않다고 말했다.(그건 진심이었다. 나는 누구에게도 바라는 것이 없었다. 내가 나의 비쩍 마른 혈거인에게 대체 무엇을 요구하고 기대한단 말인가? 어쩌면 그의 장례식에서조차 나는 울지 않을 것이었다.)
오빠는 부드러운 동굴의 밑단을 젖혀 올리고는 가상의 동굴을 빠져나갔다. 이불의 동굴 속에서 나는 그가 내 목을 조르러 돌아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하지만 대체 왜? 그는 대체 내게 무엇을 기대했던 것일까?)
나는 오빠와 나 사이의 관계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가 내 목을 조른다고 해도 나는 그를 원망하지 않을 것이었다. 나는 나와 나 사이의 관계에 몰두해 있었으나 그것은 필연적으로 파멸적인 관계였다.
나는 피를 머금어 붉은 벌레들처럼 무수히 우글거렸고 나는 그 많은, 징그러운 벌레들을 모두 짓이겨 죽일 자신이 없었다. 나는 나의 일부를 떼어내는 연습에 골몰했으나 언제나 일부의, 빌어먹게 단단한 나는 남아 있었고 나는 나들을 완전히 잊을 수 없었다.
i11년 3월 24일
거인들이 출산하는 바다 위에서 허덕이고 있는 나를 보았다. 그녀들의 거대한 자궁과 끔찍이 많은 출혈과 절망적인 비명. 그녀들은 나를 깔아뭉갤 듯이 뒹굴며 비명을 질렀고 얇은 얼음으로 뒤덮인 바다는 금방이라도 깨질 듯 위태로웠다. 출혈이 내 몸을 적셔 붉게 물들였다. 나는 마치 그녀들이 갓 낳은 아이처럼 작고 붉었다.
누군가가 나를 짓뭉개거나 안아 올릴 때까지, 나는 눈을 감고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 애와는 어색하게 인사했다. 그 애는 화내는 방법을 잊어버렸거나 화낼만한 자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 같았다.
붉은 벌레가 현 위에서 춤을 추고 있다. 벌레는 현 위에 여리고 가느다란 다리들을 옹송그리고 유달리 질량이 큰 침방울을 떨어뜨린다. 무한히 떨어져내리는 타액 방울들과 다리의 격렬한 움직임으로 벌레는 연주한다.
벌레는 나의 오랜 연인이었다. 거울 속에서, 나는 내 이마에 내려앉은 그녀의 붉은 반점과 마주쳤다. 그녀의 부드러운 흡반이 내 이마에 밀착되어 있었다. 그녀는 내 피를 머금어 붉고 퉁퉁하게 달아올랐다. 나는 그녀를 터뜨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핀셋으로 떼어내 내 손등 위에 얹어 놓았다. 그녀는 감미롭고 유순한 검은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내가 그녀에게 그러하듯 그녀 역시 내게 매혹되었음을 알아차렸다. 그녀의 검은 눈을 덮고 있는 부드러운 백색의 막 위에 내 흐릿한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을 나는 돋보기를 통해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녀의 불그스름하고 투명한 흡반으로부터 이어진 몸체 천체에 퍼진 섬세한 모세혈관을 흐르는 것은 내 출혈이었다. 그녀의 실 같은 다리들이 고목처럼 메마른 내 팔등 위에서 움직일 때 나는 고통스러운 환희를 느꼈다. 나는 그녀의 종족에 대해 아는 바가 많지 않았지만 그녀를 사랑하는 방법은 천재가 잉태하는 음악처럼 자연스럽게 내 손과 입술에서 그녀에게로 넘쳐흘렀다.
나는 실수로 그녀를 삼키거나 짓이기지 않으려 조심하면서 부드럽게 그녀를 만지고 애무했다. 그녀는 수줍게 내 입맞춤을 받아들였다. 그녀에게는 발성기관이 없었으므로 그녀와 대화를 나누는 일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나는 얼마든지 그녀의 목소리를 상상할 수 있었다.(혹은 그녀의 목소리가 나를 상상할 수 있었다.)그녀가 흉측하게 자라날수록 내 피와 살은 그녀에게 더 깊게 들러붙었다.
그녀는 내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것을 즐겼다. 그녀의 연주에는 활조차 필요없었다. 달콤하고 축축한 침이 활 대신 현을 두드렸고 부드럽고 기묘한 음색이 그녀와 나를 전율케 했다. 레몬 껍질 속을 가득 채운 병아리의 창자처럼, 석류알 대신 들어앉은 붉고 둥근 벌레들처럼, 그녀는 이질적이고 매혹적인 연주를 이어갔다.
그녀가 충분히 자라나고 난 뒤부터는 그녀의 축축하고 엷은 흡반 속에 손가락을 밀어넣을 수도 있었다. 그녀는 연주를 위해 온몸을 바즈락거리고 수은처럼 투명하고 유독한 침을 바이올린의 현 위에 뚝뚝 떨어뜨리면서 부드러운 흡반으로 내 검지손가락을 조였다. 아르페지오와 비브라토를 자유롭게 연주하며 그녀는 흐느끼듯 전율했다.
내 피를 빠는 것으로 포만하게 부풀어오르던 그녀가 처음으로 내 검지손가락 첫 번째 마디를 집어삼켰을 때, 나는 내 눈앞에서 사라지는 나의 일부와 그녀의 투명한 피부 속에서 헤엄치는 내 살점을 경이롭게 들여다보았다. 나는 내 온몸을 그녀에게 먹이기로 결심했고 격정적인 연주로 흘러내린 그녀의 입술-흡반에 나를 밀어넣었다.
그녀가 나를 소화시키는 데는 끔찍하게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녀는 살과 뼈를 먹는 것을 즐기지 않았다. 그녀는 액체 상태의 피를 빨아먹는 것을 선호했다. 오, 하지만 나는 참을성 있게 그녀가 나를 삼킬 때까지 기다렸다. 손가락의 첫 마디를 밀어넣고, 그녀가 나를 삼킨 뒤에는 두 번째 마디를, 그 뒤에는 세 번째 마디를 밀어넣는 식이었다.
그녀는 소화불량으로 거북스러워하며 심지어는 구역질을 하기도 했지만 내 앞에서 나를 토해내지는 않았다. 사라지는 것이 고통스럽지 않냐는 그녀의 물음에 나는 이미 오래 전부터 사라져 있었다고 대답했다. 사라짐은 육체의 시간을 초월하여 가속되었고 나는 처음부터 내 심장까지 번져 있던 사라짐의 속도를 뒤늦게 따라잡는 것뿐이었다.
나는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녀는 내 살과 뼈의 독성으로 인해 죽음을 맞이할지도 몰랐다. 그녀의 투명한 속을 오염시킨 시체의 조각들, 채 소화되지 못하고 그녀의 내부에서 부패되어가고 있는 고기들이 곧 그녀를 죽이고 말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녀에게 나를 먹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차가운 열대어들이 잠든 수조 속에 자신의 손가락을 배양해둔 사람처럼 나는 그녀의 투명한-그러나 나날이 녹아내린 지방과 피로 인해 누렇고 붉은 빛깔로 변해가는-몸 속에 담긴 결여의 잔여물을 바라보았다.
나로 병들어가는 그녀가 얼마나 끔찍스러웠던지. 토해내지 못한 나로 인해 죽어가는 그녀가 얼마나 사랑스러웠던지.
나는 그녀를 학대하고 있었다. 그녀는 나에게 괜찮다며 위로의 말을 건넸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나의 목소리였다. 너는 나를 죽이고 있어. 나는 너를 죽이고 있어. 그녀의 침으로 흠뻑 젖어든 바이올린에서는 달콤하고 역겨운 냄새가 진동했다. 그녀는 광인처럼 연주했다.
졸업 연주회에 나 대신 그녀를 내보내기로 결정한 것은 충동적이었으나 필연적인 것이었다. 연주회 무대 가운데까지 내가 걸어나갈 때, 무대에서 내가 관객들에게 형식적인 인사를 할 때, 그녀는 바이올린 속에 그림자 같은 몸을 감춘 채 그녀에게 양도될 시간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피아노 반주가 시작되면 나는 바이올린을 철제 의자 위에 올려놓는다.
그녀는 바이올린의 소리구멍으로 유연한 머리를 내민 뒤 곧 모든 몸을 빼내어 평소처럼 바이올린의 현들 위에 자리잡을 것이다. 그녀는 곧 풍성한 침방울로 맑은 첫 음을 장식하고 이후 절망적인 뒤틀림과 환희에 찬 움직임으로 화려한 장식음을 구사한다.
나는 몸을 잃은 영혼처럼 무력하게 그녀의 뒤에 서서 내 사랑스러운 벌레의 연주를 지켜볼 것이다. 나는 일상적인 무대를 가장 환상적인 악몽으로 바꾸어놓을 수 있었다. 나는 이미 네 개의 손가락-심지어 왼손을!-을 모두 그녀에게 양도하였으므로 더 이상 바이올린을 켤 수 없었다.
i11년 3월 25일
어떻게 날 수 있을까요? 남자의 물음에 의사는 떨어지라고 대답했다.
어떻게 하면 육체의 빌어먹을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죽으세요, 의사는 대답했다.
수증기 같은 음악으로 먹먹한 집 안에서 유령의 흐느낌을 들었다. 유령은 비밀스럽고도 체념적인 중얼거림을 이어가고 있었다. 피가 흐른다. 당신의 몸 속에서, 유리종의 음울한 흐느낌에서, 식물의 젖은 꽃 속에서, 유령들의 잊혀진 목소리에서. 유령들의 목소리 탓에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나는 아무도 원하지 않지만 누군가를 원하고 아무도 사랑하지 않지만 어찌할 수 없이 누군가를 사랑한다. 나의 누군가는 이름도 얼굴도 가지고 있지 않다. 어떤 사물은 다른 사물이 되기를 염원한다. 그렇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유령들의 목소리 틈바귀를 헤엄치는 날파리의 목소리를 발견했다. 날파리는 자기가 정말 날고 있는 것이냐고 물었다.
그래. 나는 대답했다. 넌 날고 있어.
날파리는 무엇이 나는 거냐고 물었다.
나는 건 죽어가는 거야. 나는 건 떨어지는 거야.
날파리는 은밀한 미소를 주름잡았다. 나는 날파리를 죽이고 싶었다. 그의 목소리가 듣기 싫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가녀리고 부드러운 소프라노 톤으로 노래하듯 말했다. 다만 살아 있는 벌레가 내 앞에서 휘청거리며 날아다니는 모습이 거북스럽고 끔찍하게 느껴졌다. 타자들은 나를 점령한다.
나는 날파리를 잡기 위해-그를 압사시키기 위해-박수를 쳤고 날파리는 내 잔혹한 박수를 피해 내 귓속으로 들어섰다.
내 몸은 투명한 노란 꽃가루에 젖어 있어. 날파리는 내 속에서 병든 새의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는 네 고막을 파먹고 내이도를 지나 뇌까지 침범할 거야. 그곳에서 네 부드럽고 축축한 젖은 고기를 파먹고 네 안에 천사처럼 희고 둥근 알을 낳을 거야. 나는 네 안에서 자라날 거야. 네 뇌는 비옥한 토양이 되어 내 순결한 씨앗을 발아시킬 거야.
나는 날파리에게 그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라고 일러 주었다. 나는 이미 썩어버렸어.
오, 아니야. 날파리는 말했다. 너는 아직 싱싱해. 조금도 부패하지 않았어.
나로서는 불가능했던 살을 그가 꽃피워준다면 나는 감사히 여겨야 하는 것일까. 나는 현관 앞에 쪼그려 앉은 채로 흐느꼈다. 나를 먹고 꽃피어날 타자들, 더 이상 내가 아닌. 미래에서 오는 가장 비참한 꿈들이 나를 파먹고 강간했다.
내 뇌가 돼지의 뇌와 놀랄 만큼 흡사하다고 날파리는 말했다.
나는 돼지의 뇌 속에서 태어났어. 내 어머니는 노랗고 음탕한 꽃가루로 온몸을 가득 적신 유혹적이고 감미로운 상태로 돼지의 부드러운 귓속에 침입했지. 돼지는 꿈처럼 향기로운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였어. 나는 돼지의 풍만하고 부드러운 뇌를 먹고 태어났어. 날파리는 퇴행된 뼈처럼 내 속에서 달그락거리며 속삭였다.
나는 녹아내린 초콜릿처럼 은박지에 늘러붙은 내 뇌를 떠올렸다. 그 속에서 태어나는 얼굴 없는 짐승들을. 공간에 존재를 배분하는 것이지 그 역은 아니다. 목요일의 공간은 희게 텅 빈 채 선재하고 나는 그 자리에 있거나 없다. 목요일 속의 나, 혹은 목요일은 있는데 나는 없다. 내가 없는 목요일은 있지만 목요일이 없는 나는 없다. 나는 필연적이지 않다는 의미이다. 혹은 나에 대한 망상은 필연적이지 않다는 의미이다. 나는 언제라도 꿈에서 깨어날 수 있고 내 안을 점령한 타자들의 자리가 나보다 굳건한 공간에 배분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학교에서 날파리는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사실 나와 대화할 목소리는 어디에도 없다. 나의 목소리는 어디에도 없다. 목소리, 빌어먹을 목소리는 어디에도 없다.) 내가 되어가기를 갈망하는 다른 형태와 존재의 사물들이 빼곡이 들어앉은 시간의 공간에, 나는 멀뚱히 앉아 있었다. 되어가는 과정은 언제나 불가능을 향한 것이다. 나는 알고 있다. 내 뇌를 먹고 태어난 하얀 알은 날파리 이외의 것이 되지 못할 것이다. 나는 날파리에게 잡아먹힌 뒤에도 날파리가 될 수 없고 날파리는 내가 될 수 없다. 우리는 언제나 서로 다른 것이며, 명명되지 않은 다른 것이 되어가고 있다.
영국의 미친 교사는 학생들에게 라틴어 격변화를 가르치며 그것을 외우지 않은 학생에게 본보기를 보이고자 했다. 학생들은 단두대에 목을 내민 채로 격변화를 암기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죽음의 위험 앞에서 기적 같은 완벽함으로 삶을 연장하였다. 하지만 esse 비동사의 격변화를 외우던 나이든 학생은 예기치 않은 실수를 했고 그 순간 단두대의 서늘한 칼날이 그의 목을 내리쳤다. 코코넛 열매처럼 굴러떨어진 그의 머리와 목을 연결하던 접합부위에서는 주홍빛 고기의 광택이 번들거렸다. 잠시간의 인육 같은 침묵 뒤에 그의 목과 머리에서 우유처럼 하얀 피가 흘러내렸다. 잘려나간 그의 머리는 계속해서 esse의 격변화를 외우고 있었으나 그것은 모조리 틀린 것이었다! 교사는 불그죽죽한 머리를 끌어안고서 파들파들 떨리는 망자의 보랏빛 입술을 더듬었다.
교사는 그에게 이제 그만해도 좋다고 말했다.
하지만 선생님, 저는 아직 끝까지 외우지 않은 걸요.
교사는 부드럽고 관대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왜냐하면 흰 우유 같은 피를 흘리는 붉은 머리는 더 이상 그의 학생이 아니었으니까. esse 격변화를 완벽하게 외우는 늙은 학생은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학생도, 낙제자도, 죽은 자도 없다. 넘쳐 흐르는 하얀 피에 어떠한 이름을 붙여야 할지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방과후에 수인들은 나를 불렀다. 연습을 하자는 것이었다. 비둘기는 말을 할 수 없으므로 내게 주어진 대사는 없었다. 나는 그저 도망쳐야할 때 도망치고 탈주에 실패해야 할 때 실패하면 그만이었다. 실패해야 할 때를 놓치지 않기. 수인들은 열정적으로 연극 연습에 임했다. 하얀 원피스를 입고 빙글빙글 도는 어린 소녀와 소년들에게서는 건조한 바람 냄새가 났다.
어째서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없지? 네 다정함도, 사랑스러움도, 영리함도, 우리는 가지지 못했는데, 어째서 보물까지도 네 것이지? 소년은 원피스 안에서 몸을 옹송그리며 대사했다. 나는 죽음조차 가지지 못했는데, 중성적인 삶 속에서 나는 가질 수 없는 허상 같은 죽음의 둘레로 가라앉을 뿐인데, 너는 모든 것을 가졌구나. 황홀한 추락과 실패, 비극적인 절망조차도 우리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는데, 네 보물을 빼앗기 위해 우리는 너를 살해할 거야. 너는 비극적인 죽음을 맞게 될 거야. 그게 우리가 네게 줄 수 있는 유일한 거야.
네가 가진 소수성마저도 우리는 갖지 못했어. 네가 가진 찬란한 균열들마저도 우리는 갖지 못했어. 우리는 인구 속에서 인구로 태어났고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처음부터 껍데기밖에 없었어. 그러니 제발 우리에게 깊이가 없다고, 우리가 껍데기뿐이라고 비난하지 마.
상냥함조차도 나는 가질 수 없었어. 상냥함을, 사랑을 원할 힘조차도 내게는 없었지. 네가 가진 것들은 붉은 열매보다도 더 우리를 유혹하고 있지만 네게 그런 것은 아무런 가치도 없어. 그렇지? 네 부드러운 피부와 다정함, 감미로운 미소 같은 것을 우리가 떼어낸다고 하더라도 너는 죽음보다 더 달콤한 목소리로 흐느낄 거야. 무엇보다도 너는 비극적인 죽음을 맞게 될 거야. 내가 얼마나 간절히 비극을 원했는지 네가 알게 된다면!
나는 비극을 위해 얼마든지 죽을 수 있어. 하지만 비극적인 운명조차도 내 것이 아니었어. 비극을 결정짓는 최초의 반복은 오로지 너를 위한 것이야. 우리는 희극적이지 않은 죽음을 죽을 수 없어. 우리는 죽을 수조차 없어. 죽음은 네 것이야. 내 아름다운 여동생. 우리는 너를 강간하지도 때리지도 않을 거야. 우리는 그만큼 너를 미워하고 있어.
우리는 한 번도 너를 사랑할 수 없었지만 너는 사랑의 재능까지도 타고났지. 네가 어떻게 우리를 사랑할 수 있는지, 네가 어떻게 엄마를 사랑할 수 있는지 우리는 끝까지 이해할 수 없었어. 사랑이 무엇인지 너는 가르쳐주지 못했어. 그렇지? 너는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사랑을 할 수 없다고 했어. 나는 사랑하고 싶어 할 힘조차도 없었어. 사랑을 욕망할 힘도, 사랑을 찾아 나설 힘도 내게는 없었어. 네가 가진 무한한 것들을 우리는 가지지 못했어.
네 역할을 가질 수 있다면 우리는 무엇이든 할 거야. 네 순진무구한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내 시계는 수십 년째 같은 시간에 멈춰 있어. 나를 삶에 붙들어두기를 원할 힘도, 죽음을 원할 힘도 내게는 없어. 시간은 납 같은 부동성으로 나를 짓누르고 있고 나는 사실 네 죽음조차 원하지 않아. 네 사라짐도. 왜냐하면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으니까.
엄마가 죽어가는 동안 너는 엄마를 살리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말했지. 너는 엄마를 위해 흐느꼈고 엄마를 위해 부르튼 발로 거리를 서성였어. 우리는 그러지 않았어. 우리는 엄마를 그리 사랑하지 않았으니까. 나는 네 사랑마저도 질투해. 질투받는 너를 질투해.
나는 비둘기의 무구한 환희로 뒤뚱거리며 소년의 긴 대사를 멀뚱히 듣고 있었다. 연습이 끝난 뒤에 수인들은 저마다 팔짱을 끼거나 손을 잡고 가까이서 걸었고 나는 그 애들의 뒤에서 혼자 집까지 걸어갔다.
공교롭게도 그들의 집 역시 나와 같은 방향에 있어 나는 그 애들의 음울한 추적자처럼 그 애들을 따라 걸어야 했다.
집에 돌아와서 그 애가 보낸 메일을 확인했다.
나를 붙잡으려 혹은 그런 체하는 네 손을 생각했어. 나는 나를 위해 연기하는 네 손을 좋아했어. 피부를 벗기고 난 노파에게는 아무런 피부도 없었어. 그렇지? 노파는 돼지의 가죽이라도 벗겨 놓아야 했어. 하지만 노파는 그런 대비를 하지 못했지. 늙고 짓무른 자기 피부를 벗겨낸 헐벗은 여인에게 새로 입을 피부는 어디에도 없었어. 그녀는 잘못한 거야. 하지만 잘못하지 않고, 실패하지 않고 그녀가 무엇을 할 수 있지? 헐벗지 않고, 으깨지지 않고, 끔찍한 고통 없이 그녀가 무엇을 할 수 있지?(죽음 같은 고통은 의미와 가치의 지표가 아니야. 고통받는다고 해서 대가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지. 대부분의 삶은 의미 없이 고통받고 대가 없이 죽어가지. 사랑과 미래를 위해 죽는 것은 빌어먹을 행운이야.)
같이 연습할 시간이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어. 그래도 네가 할 수 있다면 같이 연극을 하고 싶어.
m-3년 8월 1일
활은 납처럼 무거웠고 손가락은 단단하게 굳어진 채 구부러지지 않았다. 바이올린 교사는 활로 내 손가락을 내리치며 익사자처럼 부드러워지기를 강요했다.
침묵하는 악기의 현으로 손가락을 감아 잘라내었다면 이후의 레슨은 없었을 것이다.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동안 나는 언제나 내 손가락이 잘려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손가락이 잘려나가면 레슨도 습한 단칸방 안에서의 자폐적인 연습도 없을 것이다. 스케일 연습도 아르페지오도 트릴도 비브라토도 살타토도 없을 것이다. 나는 바이올린이나 레슨이 싫었던 것이 아니라, 어찌할 수 없이 단단하고 부동적인 하얀 공간이 싫었던 것이다. 그러나 손가락의 절단과 함께 유동적으로 뭉그러질 공간에 대해 생각하면 조금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었다.
나는 묵상하듯 연주하며 평온한 내밀함으로 절단되어 바닥에 떨어져내리는 내 손가락들을 상상했다. 손가락들은 더러운 바닥에 떨어져 짓무르고 검보랏빛으로 부풀어 부패하며 내가 아닌 것들의 먹이가 된다. 고깃덩이로 전락한 내 손가락들.
시체가 된 내 모습을 상상하면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바이올린 교사가 죽은 후 나는 밀실을 홀로 채워야 했다. 나는 언제나 누군가 나를 발견해주기를 바랐으나 밀실 바깥에서, 내 연주는 소음조차 아니었다. 방음재를 울면서 떼어내던 날의 피와 우유.
i11년 3월 26일
수업을 듣는 동안 나는 송곳 같은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나를 구해줘. 나를 살려줘. 혹은 나를 죽여줘. 더듬거리는 내 애원을 듣는 이는 나밖에 없다. 그리고 나는 결코 나를 구하지 않을 것이다.
수학 교사가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판서를 멈춘 상태로 내게 대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수식과 수식을 연결짓는 어떤 결정적인 수식을.
나는 대답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가 내 이름을 부르기를, 그리하여 이 창백한 공간에 내가 생겨나기를 가만히 기다렸다.
수학 교사는 내 이름을 불렀고 그제야 나는 네, 하고 대답했다.
내가 네, 하고 대답하자 아이들은 방청객처럼 요란하게 웃었다. 유리 사이에 끼워진 내장의 표본처럼 칠판 위에 들러붙은 하얀 수식과 텅 빈 음성.
선생님, 나는 숫자가 아닌 다른 것을 원해요.
하지만 너는 숫자야. 숫자를 잊고 있는 상태에도, 수식을 풀지 못하고 있어도, 너는 언제나 숫자란다.
나는 나의 숫자를 알지 못한다. 나의 신조차도 나의 숫자를 알지 못한다. 내 무구한, 인육 같은 신은 검은 무기질의 눈으로 나를 무감하게 들여다보고 있다. 신은 존재보다 깊은 갈증에 시달린다. 그녀는 언제나 목이 마르지만, 오, 우리는 결코 살기 위해 물을 마시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물을 마시기 위해 사는 것이다.
넌 정말 잘하는 게 하나도 없구나. 내 옆자리에 앉아 있던 여자아이가 내게 고개를 돌린 채 은근하고 다정하게 속삭였다.
그래. 완전한 불행은 충분히 가능해. 왜냐하면 불행과 행운은 등가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 단 하나의 좋은 점도 없이 불행할 수도 있는 법이야. 부모와 오빠의 실종은 내게 단 하나의 행운도 가져다주지 않았어. 시의 무명성이 내 시를 더 찬란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지. 나는 한없이 얕은 유리의 표면 아래에서 꿈틀거리는, 짓이겨진 내장에 불과해. 생명만으로, 신만으로 꿈틀대며 목마른 식물처럼.
우리 부모님은 모두 창녀였다. 그들은 행복을 위해 몸과 영혼을 팔았다. 그들은 행복을 위해 절망을 팔아넘겼다. 그들은 불행해야 할 천 가지 이유를 잊고 행복했다. 불행하지만 행복한 사람들, 혹은 불행하고 행복한 사람들, 혹은 불행 없이 행복한 사람들. 나는 내가 행복해야 할 천 가지 이유에도 불구하고 행복을 믿지 못했는데 그것은 내가 창녀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도 그리하지 못했던 이유와 같은 까닭 때문이다.
나는 내 개에게 내 몸을 팔아넘기고 싶어. 나는 내 개에게 내 빌어먹을 행복과 불운을 전부 팔아넘기고 싶어. 밤을 물어뜯듯 내 검은 내장을 물어뜯을 내 개에게.
하지만 내게는 개가 없다. 개의 유령조차도 없다. 수학 교사는 여전히 내 눈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헛구역질을 하듯 답을 말했고 그제야 그는 시선을 거두었다.
사실은 간단한 일이다. 나는 처음부터 간단한 답쯤은 알고 있고 내가 속해 있는 숫자 역시 알고 있다. 나는 내가 인구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간혹 거울 표면에서 흐느끼고 있는 아주 엷고 무참한 주름을 본다. 내 머리 위에 얹어진 주름, 내 머리 위에 붙어 있는 것은 얼굴이 아닌 붉고 얕은 균열 같은 주름이다. 주름은 흐느끼면서 나를 보며 웃는다. 네가 웃는 만큼 나는 더 행복해질 것이다. 네가 웃는 만큼 나는 더 불행해질 것이다. 네가 웃는 만큼 나는 더 웃을 것이다.
나는 눈을 감고 시의 표면을 두드린다. 푸른 벨벳의 드레스는 벗겨진 살 위에 테이프의 잔여물처럼 들러붙어 있다. 나는 손톱을 세워 더러워진 푸른 천과 살점을 긁어내고 웃고 있는, 내 더러운 내장을 본다.
점심 시간에 나는 짓이겨진 쌀알을 입 안에 밀어넣으며 그 애에게 그 애의 엄마가 아직 자살하지 않았는지 물었다. 그 애는 당황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그렇다고, 엄마는 아직 살아 있다고 말했다. 난 이 빌어먹을 고통에 대한, 갈증에 대한 보상을 요구한다. 나는 나의 익사에 대한, 나의 무수한 죽음들에 대한 보상을 요구한다. 하지만 나의 신은 무심하고 게걸스러운 검은 눈으로 나를 집요하게 응시할 뿐이다. 그녀는 목이 말라 갈라진 틈으로 내게 말한다. 보상은 없을 거라고. 고통은 고통에 속해 있는 것일 뿐 그 외에 무엇도 아니라고.
아프고 싶지 않다는 염원조차도 고통에 속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