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11년 3월 14-16일

i11년 3월 14일

목소리들은 저마다 자신의 유언을 기록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저마다의 독특성을 증언하는 날 선 언어들. 분리불가능한 모항으로부터 떨어져나오려 분투하는, 피투성이의 문장 토막들. 상승하는 바탕과 와해되는 형상. 검어지는 빛과 희어지는 어둠. 그들의 목소리는 순간순간의 차이를 통해 언명되며 동시에 공동의 운명으로 녹아내린다. 실종과 부재의 운명으로.

운명조차 분배받지 못한 내 사랑하는 노마드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나를 낳은, 나를 납치한 나의 방랑자들. 그들은 때로 내게 그들이 죽었다고 속삭이며 때로는 그들이 아직 살아 있다고 속삭인다. 때로는 그들이 나를 잊었다고 속삭이며 때로는 내가 버려졌다고 속삭이고 때로는 내가 그들을 잊었고 내가 그들을 버린 것이라고 속삭인다.

나는 놀이의 규칙을 아직도 파악하지 못했다. 아이들은 규칙조차 익히지 못한 나를 비웃고 떠나간다. 내일은 개가 되겠다고 말해야 할지도 몰라. 내게 다시 공을 던져 달라고, 그러면 공을 물어 가져다 주겠다고 빌어야 할지도 몰라.

그것이 내게 가능한 유일한 용기일까?

죽음의 징후들이 사육제 같은 눈으로 나를 집요하게 응시하고 있다. 그리고 내게서 피어나는 죽음의 증상들. 나는 점점 말을 잃고 망자만큼이나 고독하며 죽음처럼 불면한다. 나의 죽음이 완전히 증명되는 순간 나는 살아 있음을 입증하려던 모든 희미한 변론들을 폐기해야 할 것이다.

저녁 8시 28분에 그 애에게서 메일이 왔다.

잘 지내고 있니? 난 오늘 친구들이랑 영화관에 다녀왔어. 널 데리고 가지 않아서 미안해. 친구들에게 너를 소개할 시간이 없었어. 그보다 우리는 예전부터 약속을 했거든. 엄마도 같이 가고 싶어 했지만 데리고 갈 수 없었어. 영화는 재밌었어. SF 호러 장르의 영화였어. 스크린 안을 가득 채웠던 불멸 하는 죽음들을 네가 봤다면 좋았을 거야. 네가 괜찮다면 다음에 그 영화를 너와 함께 한 번 더 보고 싶어. 네가 같이 보겠다면 영화 내용에 대해 더 말하지는 않을게. 나는 지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행복해. 내가 너였다면 행복에 대한 시를 썼을 거야.

9시 10분에 나는 답장을 보냈다.

안녕. 난 어제 학교에 다녀왔어. 이해할 수 없지만 학교에서 너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학교엔 아무도 없었어. 같이 영화를 보자.

난 내 고유한 허상에게 글을 쓰듯 메일을 적어보냈다. 아마 그 애도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그 애 자신의 허상에 대고 글을 썼을 것이다. 그 애에게 친구가 없다는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었다. 분열된 타자들의 코기토, 바깥으로 주름을 펼치는 젖은 장미의 은밀한 폭발, 희극적인 고요의 패러디들, 그 애의 텅 빈 하루를 운반하고 있는 살갗이 벗겨진 발을 붙들고 나는 우스꽝스러운 놀이를 하고 있는 셈이다. 카오스적인 긍정, 창백한 흰색의 예스, 우리는 하나의 중심만을 갖는 허구적인 원의 주위를 맴돌고 있지만 중심은 점차 중심으로부터 탈구되어가고 있으며 무한한 중심들은 쳐다볼 수도 없이 괴이하고 끔찍한 불구의 도형들을 만들어가고 있다. 짊어지는 자와 짐이 된 자.

나는 네가 완전한 괴물이 되기를 원해. 네가 악몽을 짊어지는 악몽이 되어 무너져버리기를, 그래서 원의 환상조차 그릴 수 없게 되어버리기를 바라. 네 손가락이 짓물러 벗겨지고 착취당한 미소가 튿어지고 네가 돌이킬 수 없는 불구를 내 앞에서 고백하기를 바라.

하지만 괴물은 나뿐일지도 모른다. 그 애에 대한 연민이 갑작스러운 증오로 바뀌는 것을 느꼈다. 네가 아름다운 흰 원을 상상할 수 있기 때문에 나는 너를 미워하는 것이다. 더 많은 친구가 생긴다면 그 애는 지체없이 나를 버리고 갈 것이다. 그 애는 자신의 실패한 엄마를 두려워하고 미워하니까. 아마 그 애는 끝까지 내게 말을 걸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 애는 내게 말을 걸지 않는 미래를 간절히 꿈꾸었을 것이다.

좋아, 됐어. 너는 부드러운 흰색의 예스에게 메일을 보내. 나는 창백하고 생기없는 동그라미의 예스로 네게 답장을 해 줄게. 미미하고도 집요한 도형들의 환상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그리고 있는지 우리는 영원히 확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애에게 내일 학교에서 보자고, 이제는 자야 할 시간이라고 메일을 보냈다.

그래, 내일 학교에서 만나. 그 애는 12시 39분에 메일을 보냈다.

i11년 3월 15일

아침에 우리는 인사를 나누었다. 지난주를 생각하면 고무적인 일이었다. 우리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평범하고 자연스럽게 인사했다.

안녕, 주말 잘 보냈어?

그래. 너는?

난 잘 보냈어. 영화를 봤어.

그래? 무슨 영화를 봤는데?

우리는 마치 메일로 대화를 나눈 적이 없다는 듯이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그건 말할 수 없어. 그 애는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속삭였다. 그것이 전부였다. 점심시간이 될 때까지 우리는 죽은 듯 침묵했다. 그 애가 책상 귀퉁이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았다.

우리가 서로의 관련자가 될 수 있을까? 그 애는 내게 속삭이듯 말했다. 인육 같은 공기 속에서 그 애는 더 이상 내게 속해 있지 않은 흔적을 보며 이미 망각되어 버린 말을 속삭였다. 시간을 와해하는 순간들, 서로의 내부로 수축되고 펴지는 젖은 주름 같은 순간들. 내가 시를 포기하고 네가 엄마를 포기하고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무엇으로도 향하지 않고 헤매기만 할 수는 없는 것일까? 배반도 슬픔도 없이. 열정으로 시작한 것이 죽음으로 끝난다. 죽음으로 시작한 것이 빌어먹을 공황으로 끝난다. 내 고향은 처음부터 외국이었으며 나는 날 때부터 외국인이었다. 그건 그 애도 마찬가지다. 네 엄마의 자궁은 네 최초의 외국이었고 너는 존재하지 않는 고향을 찾아 허덕이고 있는 거야. 우리는 시간의 원뿔 속에 균열되고 고립되어 있다.

우리에게 예비된 사건들이 교실 속에서 우리를 맞이했다. 수학과 체육, 과학, 국어, 미술. 칠판 위에서 우글거리는 방정식들, 억지로 혀를 잘라낸 문장들. 문장들에 혀를 돌려주어도 문장은 우리에게 인사하지 않는다. 고맙다는 말조차 건네지 않는다. 왜냐하면 해는 처음부터 수식 안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해를 구하면서,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x는 처음부터 x였는데, 그것의 다른 이름을 구하는 것은 수식 내부에 어떠한 변화도 초래하지 못한다. 반복되는 선은 점차 부패해간다. 시간의 원뿔 층위를 둥글게 돌면서 나는 점점 더 심한 현기증에 시달린다. 나의 자아는 파열을 낳을 뿐이다. 나르시시즘적인 글쓰기, 나르시시즘적인 자살, 나르시시즘적인 와해.

반 아이들은 어린 새들처럼 무리지어 놀았다. 쉬는 시간에, 애들은 학급 컴퓨터로 인기 가수의 뮤직비디오를 틀고 웃는다. 무리 속 아이들의 목소리는 교실 어디에서든 들을 수 있다. 그 애들은 멀리 퍼져나가는 발성으로 말하고 웃기 때문이다.

나는 의도치 않게 그들의 대화를 훔친다. 그들의 음악과 그들의 삶과 그들의 웃음을 훔친다. 하지만 모든 것을 훔쳐도 나는 그들이 되지 않는다. 무릎을 꿇고 멍멍거리면서 그들의 틈으로 비집고 들어가야 할까?

실제로 나는 야릇하고 돌발적인 비명을 질렀다. 나를 때려 줘. 나를 개로 만들어 줘. 나를 벌거벗기고 나를 죽여 줘.

책상 위로 올라가서 소리지르고 난 뒤 나는 미친 듯이 웃었다. 인육 같은 침묵과 잠시간의 나지막한 수군거림.

그리고 나와 그들은 모두 제자리로 돌아갔다. 난 반 아이들이 나를 개로 만들 생각이 없음을 알았다.

나는 오디션에서 탈락한 것이다.

쟤는 미쳐버린 거야. 쟤는 창녀야. 쟤는 교실에서도 아랑곳않고 자위를 할 여자애야. 쟤는 언젠가 학교에서 자살하고 말 거야. 쟤는 부끄럽지도 않나 봐. 미쳐버렸으니까. 미쳐서 부끄러움도 없는 거야. 외로운 건지도 몰라. 불쌍해. 쟤는 정말 죽어버리고 말 거야.

오, 그래. 우리는 정말 죽을 것이다. 우리는 곧 죽을 것이다. 내 시체가 유리창에 이마를 부딪히고 떨어진 하얀 새처럼 아름다운지 말해주지 않겠어?

책상에 고개를 수그리고 엎드렸다. 내 일탈마저도 무리 속의 둔중한 공기로 금세 흡수되어버린다. 교실은 그토록 재생력이 높은 공간인 것이다.

긴 머리의 여자아이가 나를 따라하듯 책상 위로 올라가더니 양팔을 넓게 벌리고 미친 여자라고 소리쳤다. 다른 아이들은 나를 흘금거리며 키득거렸다. 탈의실에서 체육복으로 갈아입는 동안에도 은밀한 키득거림은 계속되었다.

짙은 보라색 귀걸이를 한 여자아이는 내게 그럴 수밖에 없었냐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난 병에 걸렸으니까.

그래. 여자아이는 부담스러운 기색으로 속삭였다. 빨리 낫기를 바랄게.

응. 하지만 아마 낫지 않을 거야.

여자아이는 자기 친구들을 따라 어린 새처럼 탈의실 밖으로 뛰어나갔다. 내게 필요한 건 나를 죽여버릴 수 있는 더 큰 병이다. 내게 필요한 건 자살의 나르시시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끔찍한 병이다. 모든 것이 병이다. 모든 언어와 모든 시와 모든 죽음과 모든 삶이, 모든 명과 모든 걸음과 모든 비틀림과 모든 원한이, 모든 둥긂과 모든 고통이, 모든 행복이 병이다. 내 얼굴 밑은 셀 수 없이 많은 검은 병으로 드글거린다.

내 얼굴 껍질을 벗겨 봐. 뒷목 아래의 부드러운 살을 열고 가죽을 뜯어내. 그러면 내 안에 있는 병의 실체를 보게 될 거야. 붉게 번들거리는 내 속을 보게 될 거야. 태양처럼, 생명처럼 붉은.

넌 아프니까 여기 앉아. 보라색 귀걸이를 한 여자아이가 내게 1인용 돗자리를 주었다.

체육시간 내내 나는 하얀 모래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아이들 사이에서 1인용 돗자리에 앉아 있었다. 체육 교사는 나를 불쾌한 듯 바라보았지만 사정을 묻지는 않았다. 속이 울렁거렸다. 배구 연습을 하는 동안 그 애는 나와 함께 짝을 지어 주지 않았다. 나와 그 애는 각자의 그림자와 함께 연습을 해야 했다.

수업 시간이 끝나자마자 보라색 귀걸이의 여자아이는 내게서 돗자리를 가져갔다. 난 고맙다고 말하지 않았고 여자아이 역시 내게 인사를 요구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돗자리는 조롱을 위한 표식임을 알고 있었다. 내가 병자라는 사실을 그들은 잊고 싶지 않은 것이다.

점심시간은 그 애와 함께했다. 식판에 음식을 받으면서 그 애는 내게 다음부턴 그런 식으로 소리치지 말라고 했다.

그래. 나는 소심하게 중얼거렸다.

나는 무수한 목격자들을 필요로 한다. 모든 언어는 목격자들과 응시들을 증인으로 요구한다. 단 하나의 응시도 갖지 못한 언어는 사실이 되지 못하며, 끔찍한 거짓으로 얽어 병들어간다.

나는 우리 안에서 응시하는 목격자들이 모두 눈 멀었다고 말했다.

그 애는 앵두 끝을 입술로 물어뜯으며 유령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영혼이 거주할 수 있는 물리적인 시간은 없어. 유령은 희극적으로 변장한 사람들일 뿐이야.

내가 원하는 건, 난 이렇게 말했다. 비극적인 변신이야.

그 애는 웃었다. 우리는 비극이 아니라 희극 안에 있어. 반복되는 것은 비극이 아니라 희극이야. 실로 식물적인 속삭임으로 그 애는 말했다.

난 비극의 주인공이 되겠다는 게 아니야. 난 퉁명스럽게 중얼거렸고 그 애는 비극의 주인공 이외의 배역은 모두 희극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그 애는 어른스럽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어른스럽다. 마치 우리가 하나의 삶을 통째로 반복하고 있는 것처럼. 하지만 두 번째의 반복은 첫 번째의 반복과 같지 않고 그 때문에 우리는 더욱 병들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의 언어와 서로의 영역 속으로 침범하며 서로를 닮아가고 있었다. 그 애는 그 애의 엄마를, 나는 그 애를, 그래서 나는 그 애의 엄마를 닮아가는 것이다. 응시는 무를 향해 되돌아가고 있으며 계시는 미래의 파멸에 대한 것뿐이다.

급식판 위의 음식 찌꺼기를 잔반통에 쏟아 부을 때, 구역질을 참을 수 없었다. 락스 세제 냄새와 섞인 짙은 기름기의 냄새. 살과 피와 부패와 버려짐의 냄새. 검고 반들반들한 기름 거품들 틈에 실종자들의 시신 조각들이 있었다. 박동하는 것을 잊어버린 심장의 비늘 조각들이 있었다. 공기 중에 머무는 기름꽃의 뿌리들. 고름이 차오른 심장은 절망적인 악취로 짓무르고 있다. 응시되고 수축된 물과 악취인 우리의 신체도 잔여물과 함께 부패하고 있다. 최초부터 이미 반복인 검은 빛 속에서 영원히 궤도를 벗어나는 성운들. 우리는 하나의 태양이 아닌 부서지고 짓이겨진 성운들을 갖고 있다. 우리의 신들은 처음부터 고약하게 썩어가는 괴물이었다. 신은 비밀스러운 그의 일관성을 지키기 위해 우리의 눈을 멀게 만들었다. 혹은 우리는 신의 비밀을 위해 눈 먼 자의 연기를 했다. 혹은 우리는 우리의 신들이 괴물들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신에 대한 기도를 믿기 위해 신의 배역을 창조한 것이다. 과거가 과거이기 위해 새로운 현재를 필요로 하듯, 우리는 괴물들을 대신할 새로운 환영을 발명해낸 것이다. 별들의 사체 조각 위에서 별들은 짓무른 출혈로 흐느끼고 있다. 슬픔도 절망도 없이. 텅 빈 시간은 우리의 신체를 관통하는 투명한 뼈다.

나를 멈춰 줘. 나를 잊어 줘. 나를 찢어 줘. 하지만 멈추고 잊히고 찢길 태양은 처음부터 없었다. 상처 투성이인 채 곪아가는 공기 속에서 나는 투명한 출혈을 응시하고 있었다. 상처는 고통에 대한 응시이다. 원뿔 안에서 우리는 투명하고 둥근 상처를, 실패뿐인 시간을 반복한다. 한없이 미끄러져내리면서. 점이 될 수 없는 미래로 수렴해나가면서-하지만 사실은 발산하면서-. 조각난 육체를 주워 담을 수는 없다. 주워담을 손의 입자들마저도 우리가 아닌 바람에 날려가버렸으니까.

과학 시간에 나는 출석번호 상 같은 조에 속하게 된 다른 세 명의 아이들과 함께 실험실 테이블에 앉았다. 오팔처럼 반짝이는 눈을 가진 아이들이 손을 움직이며 독을 붓고 독을 분해하며 독을 만들어나가는 모습을 나는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실험 보고서에 적을 답을 그 애들은 내게 공유해주지 않았다. 그것은 참여하지 않은 자에 대한 끔찍한 공정함이었다. 나는 분배되지 않은 숫자 대신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번져가는 액체의 붉은 빛을 집요하게 응시했다. 붉음을 삼키면 죽게 될까? 내가 그것을 손끝으로 건드리며 매만지자 내 앞에 앉아 있던 안경을 쓴 남자아이가 비명을 지르며 과학 교사를 불렀다.

오, 하지만 나는 너희를 다치게 할 생각이 없었다. 난 너희의 타들어가는 살을 보고 싶지 않았다. 사실 나는 나 자신조차도 죽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너희를 다치게 하고 싶을 리가 있겠어?

과학 교사는 무슨 일이냐고 물었고 난 황급히 손을 떼었다. 남자아이는 관대하게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시치미를 떼었다.

i11년 3월 16일

그 애는 시를 선물해달라고 부탁했고 나는 알겠다고, 확신 없이 대답했다. 커다란 백합처럼 떠다니는 오필리아, 희고 긴 커튼 자락 아래에서 펼쳐진 아이의 그림자는 잃어버린 것들의 백합 같은 역사를 바라보고 있다. 거울의 그림자는 표면 아래에서 익사하고 노출되는 것은 사라짐뿐이다. 제발 나를 동정하지 말기를. 위험스러운 자비의 매혹으로부터 나를 구해주기를.

나는 어떤 찢김의 자국이다. 나는 나를 응시하며 나를 훔쳐내려 애쓰지만 눈은 분산된 빛을 묶어놓는 무형의 손아귀일 뿐이다. 눈은 묶인 빛이며 장례식 같은 결혼으로 나는 나의 죽음을 잉태하고 있다. 빛 아래에서, 그리고 나무들 틈에서 나는 식물처럼 죽어가고 있어. 나는 죽고 싶은 만큼 살고 싶고 살고 싶은 만큼 죽고 싶어. 응시는 나르시시즘적이다. 눈 먼 자의 응시조차도 나르시시즘적이다. 모든 눈은 빛을 응시하는 가운데 자기 자신의 엮인 표면을 응시하므로. 심지어는 검은 빛조차도 자신의 그림자이므로.

정보 교육 시간에 우리는 컴퓨터실로 향했다. 모니터 앞에 앉은 채로 나는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그 애에게 메일을 보냈다. 인터넷 창은 나와는 무관한, 나의 것이 아닌 언어들로 가득 차 있었고 나는 그곳에서 무엇을 찾아야 할지, 무엇을 보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메일 창에서, 적어도 나는 잃어버린 상징 같은 편지를 쓸 수 있었다. 잠재적인 것은 자리를 가질 수 없다. 상징의 편지, 백합처럼 벌어진 하얀 글자들, 유령과 실종자는 언제나 제자리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현존하는 사물과 얼굴들은 언제나 자기 자리를 가지고 있다. 나의 언어는 나와 동일하지 않은 것이고 나는 이름 모를 나의 사지와 결혼한다. 환영과의 혼약으로 나는 나 자신의 결합, 봉합, 환영, 파편이 된다.

나는 언제나 나의 파편으로만 실존할 수 있는데 그 파편들은 내 눈을 찌르고 내 심장을 파고들어 나를 죽이고 있어. 이름 모를 네게. 오필리어의 시체는 붉은 보석으로 자기 가슴을 갈랐지. 희게 부풀어오른 가슴 속에서 물에 취한 검은 심장이 비어져나왔어. 하지만 시체가 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어! 오필리어도 시체가 되려고 태어난 것은 아니야. 나도 죽기 위해 태어난 건 아니야. 나는 숨을 쉬기 위해, 그리고 나의 언어를 위해, 그리고 깨지기 위해 태어났어. 하지만 시체가 되기 위해 태어난 건 아니야. 나는 거부당하고 거부당하고 거부당하고 거부당하지만 부정을 위해 태어난 건 아니야. 최초의 생명은 하나의 수줍고 붉은 긍정이었지. 나는 끔찍하고 아름다운 예스로 태어났어. 나는 눈을 뜨기로 마음먹었고 빛들의 고유한 결정은 나의 인상을 묶어냈으며 숨 속에서 나는 살아 있는 한 계속해서 숨을 쉬는 존재로 태어났어. 비만하게 벌어진 백합은 물 위에서 장미 나무의 파리들을 올려다보고 있어. 별에 찔린 하늘은 하얀 피를 흘리고 검은 오르간 같은 나무들은 우리의 은빛 잔해 속 흰 부동성을 내려다보고 있어.

그 애의 짧은 답장이 곧장 돌아왔다. 네 언어는 장례식 같아.

나는 간혹 난독증에 걸린 사람처럼 풍경의 비밀스럽게 우글거리는 기호들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다. 정보 시간 내내 나는 어디로도 향하지 않을, 장소를 갖지 못할 편지를 쓰고 있었다. 이곳이 아닌 다른 어디에도 없을. 향하는 곳에조차 없을. 증명되지 못한 언어의 입자들은 어디로 사라지는 것일까. 장미나무의 그림자처럼 긴 복도를 따라 걷는 동안 그 애는 내 손을 잡지 않았다.

교실로 돌아와 앉아서 나는 그 애에게 하지 못한, 하지만 하고픈 말들에 대해서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1) 나는 그 애와 나를 위한 동화를 하나 지었다. 얼굴을 잃어버린 짐승들을 위해 가면을 만들어주는 소녀에 대한 이야기다. 소녀는 날마다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가면의 직물을 짜내려간다. 그것은 인간의 이미지이다. 함몰된 검붉은 머리들에 맞는 얼굴들을 만드는 소녀 자신조차도 어떠한 찢김의 흔적에 불과하다.

2) 난 시체가 되려고 태어난 게 아니야. 하지만 내가 확실히 될 수 있는 것은 시체밖에는 없어.

3) 난 엄마도 아빠도 오빠도 연인도 친구들도 없어. 그들은 처음부터 없었거나 모두 실종되었지. 허공을 떠도는 젖은 뿌리들이 내 얼굴에 들러붙어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어.

4) 나는 다른 현재들이 도래하기를 기다리고 있어. 유빙 같은 미래가 현재를 거쳐 안전한 영토로 떠내려간 뒤에 난 행복 없는 긍정에 대한 시를 쓸 거야.

오늘 영어 수업 시간은 원어민 교사가 담당했다. 그의 머리는 엷은 금빛이었고 눈은 물의 희미한 자욱처럼 연푸른 색이었다. 아이들은 서커스의 광대를 반기듯 그를 반겼다. 장난기 많은 아이들 몇몇은 음탕한 외국 욕 몇 개를 외국인에게 시험해 보고 그의 표정이 바뀌는 것을 유심히 관찰했다.

너희는 그러면 안 돼. 외국인은 비가 흘러내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영어로 그렇게 말했다.

그는 ppt로 자기 자신의 내력에 대해 설명했다. 아이들은 금세 그와 친해졌다. 그의 피부는 갓 태어난 아이처럼 불그스름하고 축축했다. 그는 아이들에게 한 명씩 영어로 자기소개를 하도록 시켰다. 영어에 자신 있는 아이들, 혹은 자기 자신을 표현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아이들-사실 모두가 그렇다, 정말 모두가-이 손을 들고 이름과 가족들, 좋아하는 놀이나 색, 음식 따위에 대해 말했다.

그 애가 자기소개를 했다면 난 그 애의 이름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어제, 미술 시간에 나는 적갈색 얼룩으로 꽃잎처럼 작은 사과들을 그렸다. 새콤한 사과가 흰 여백 위를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그 애는 내 옆에 앉아서 그림을 그렸고 우리는 비밀을 나누듯 소곤거리며 대화했다.

나는 물 속에서의 죽음을 그리고 있는 거라고 말했다.

그 애는 자기 짐승들을 모두 죽이고 있는 어린 공주의 그림을 그렸다.

나는 그 애의 그림 위에 붉은 칼을 덧대어 공주의 가슴을 갈랐다.

천국이 요구하는 건 범죄야. 나는 그렇게 말했다.

표면 아래에서 익사하고 있는 거울의 그림자를 우리는 멀거니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애의 그림은 아름다웠다. 미술 교사가 그 애의 그림을 보고 그 애를 일으켜 세울 정도였다. 미술 교사는 그 애의 얼룩진 그림을 파도를 향해 고양되는 돛처럼 들어올리고는 울었다. (i11년 12월 31일의 메모 : 오, 노출되는 것은 사라짐뿐이라는 것을 그때는 몰랐던 것이다!)그 애의 그림은 화려한 색들이 조화롭게 뒤섞여 아름다웠다. 구상적인 내용 역시 누구에게나 쉽게 읽힐 정도로 명확하게 드러났다. 공주는 자기 짐승들을 죽이고 있었다. 여자는 자기 사지를 잘라내고 있었다. 여자의 팔은 여자를 떼어내고 있었다. 여자의 입술은 여자의 목을 떼어내고 여자의 가슴은 여자의 심장을 분리시키고 있었다.

나는 그 애의 그림이 고요하고 서글픈 시라는 것을, 범죄적인 천국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잃어버린 것들의 역사를 조망하는 투명한 스크린처럼 슬픔의 천국에 얌전히 몰두했다.

우리는 누구나 어떤 특별한 보물을 가지고 있어요. 미술 교사는 감격한 듯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그녀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그 애가 그림의 재능을 소유한 것이 아니라 그림의 재능이 우연하게도 그 애를 소유한 것이다. 색채들은 그 애를 극적인 방식으로 이용하고 있었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 애 자신이 색채들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 애는 그 애의 목소리를 닮았으나 그 애 자신과 동일하지 않은 것 역시 가지고 있었다. 그 애가 사용하는-정확히 말하면 그 애를 사용하는-색채들은 그 애의 축축한 여백과 그리 닮지 않았다. 그림을 그리는 그 애는 어지러워 보였다. 그 애는 동일성을 잃어버린, 중심 없는 도형처럼 계속해서 고개를 흔들거리며 몸을 떨고 있었다.

나는 그 애에게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냐고 물었다.

그 애는 그렇다고, 하지만 집에는 이렇게 다양한 색의 물감들이 없다고 중얼거렸다. 그 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깊이 몰입하고 있었다. 내가 그 애의 공주의 하얀 가슴 위에 그어 놓은 붉고 긴 칼은 그 애의 물감 아래에서 은은하게 상기된 붉음으로 빛나고 있었다.

오늘 나는 그 애를 위해 미술실에서 물감을 훔쳐다 주었다. 미술실에 몰래 들어가 물감을 훔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잘 정돈된 이목구비를 가진 하얀 석상들은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것들은 전기로 빛나는 눈(雪)의 흰색으로 반들거렸다. 석고상들을 모두 깨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들의 파편은 그것들의 허상보다 더 아름다울 것이다. 하나뿐인 가면, 얼굴이 부서진 그것들은 절박하게 아름다울 것이다.

미술실의 나무 의자에 조금 앉아 있다가 나는 곧 48색의 물감이 들어 있는 케이스를 챙긴 뒤 미술실 불을 끄고 나왔다. 물감통은 눈에 띌 정도로 컸지만 복도를 거니는 아이들은 아무도 내게 집중하지 않았다. 나를 유심하게 지켜보는 교사도 없었다. 수월하게, 난 물감 케이스를 그 애의 책가방 안에 집어넣을 수 있었다.

그 애가 검은 눈처럼 반질반질한 멍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동안 나는 태연하게 그 애의 책가방 지퍼를 열고 그 안에 미술실 물감을 집어넣었다.

난 그 애의 그림이-그림의 그 애가-마음에 든다고, 다음에는 나를 위해 그림을 그려달라고 말했다. 이건 네 생일 선물이야. 난 그 애의 생일이 언제인지도 모르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 애는 웃으면서 고맙다고, 다음에는 그 애도 나를 위해 도서실에서 시집을 훔쳐다 주겠다고 말했다.

범죄로 인하여 우리는 천국으로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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