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잘려 죽은 나무의 텅 빈 창자 속에서 웅크리고 숨어 있는 페이지들. 너는 현의 책을 꺼내 펼친다. 그 애가 네게 해주었던 말들은 모두 그 속에 있었다. 그 애가 네게 해주지 않았던 말들은 모두 그 속에 있었다.
삭아서 희미할 정도로 얇은 선의 흔적만 남은 E 현이 돌연 끊어지며 사내의 얼굴을 할퀴었다. 난자당한 얼굴, 벗겨진 껍질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사내는 피가 흘러내리는 얼굴을 감싸 안고 구석자리에 웅크려 앉았다.
삼촌.
레몬캔디가 그를 부르러 왔을 때에도 사내는 궁지에 몰린 짐승처럼 몸을 둥글게 만 채 숨어 있었다. 레몬캔디는 그를 다그치지 않았다. 너희는 서로에게 어떠한 조언도 하지 않기로 했다. 비뚤어진 지평에서 저마다의 기울기로 미끌어지면서 동거하기로 했다. 시간을 연구하던 할아버지가 갑작스레 늙어 죽었을 때에도, 마리 이모가 연인을 찾아 노란 머리칼을 풀어헤치고 붉은 숲으로 뛰어들어갔을 때에도, 그녀가 아름다운 붉은 꽃에 입을 맞추고 독에 감염되어 죽어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도, 노란색 수포가 야생화처럼 돋아난 그녀의 창백한 피부를 멀리서 내려다 보았을 때에도, 그녀가 실려간 병원이 무너져내려 모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도, 전염병을 앓고 죽어가던 사람들이 서로에게 입을 맞추고 몸을 섞을 때에도 그녀에게는,
아프지 않아? 무섭지 않아? 라고 물었을 때,
괜찮아. 너는 아프지 않아. 우리는 함께 죽어가고 있으니까, 하고 대답하며 침을 삼키어 줄 연인이 그곳에 없었다는 것을 짐작했을 때에도, 유서가 되어버린 그녀의 편지에 아무런 답장을 보낼 수 없었을 때에도, 널 미워하지 않는다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에도, 그녀의 용서를 이해조차 할 수 없었을 때에도, 그녀를 죽인 것이 삼촌의 음악이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에도, 그녀와 함께 죽어가던 모든 사람들 역시 삼촌의 음악을 들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에도, 치명적인 음악의 악보를, DNA를 교란시키는 화학의 구조식을 그의 서랍장에서 발견했을 때에도, 허황된 광증을 실재하는 것으로로 만든 것은 누구인지 침상에 누워 어둑한 허공을 쳐다보며 곰곰이 떠올려 보았을 때에도, 결국 삼촌을, 우리와는 아무런 연관도 없이 살아갈 수도 있었던 가엾고 치졸한 사내를 이 집에 받아들인 것이 네 할아버지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에도, 그에게 연금술을, 허공에 드리워진 아홉 종류의 실을 연주하는 방법을 알려준 것도 너의 할아버지라는 사실을, 그가 날카로운 허공에 손을 베어 피를 흘리고 있을 때 그의 손가락에 작은 붕대를 둘러 준 것은 마리 이모라는 사실을, 침대 아래에 널브러져 사라지지 않는 꿈에 취해가던 그를 일으켜 깨운 것이 너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에도, 레몬캔디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너는 삼촌과 같이 지내면서도 그가 만든 병에 감염되지 않았다. 그가 정성스럽게 꼬아 만든 허공을 함부로 지나다니면서도,
들리니?
지긋지긋한 질문에 시달리면서도. 너는 한 번도 그의 광증을 듣지 못하였다. 삼촌의 바이올린 연주는 언제나 부드럽고 매혹적이었다. 높은 음으로 흐느끼듯 우는 현의 소리는 순결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