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나무 유령-5회

“엄마, 맛있는 냄새 나.”
싱그럽게 터져 흐르는 밀감 내음에 401호 아줌마는 단 침을 꼴깍였다. 귀신 들린 계절은 드디어 겨울 과일까지 길러낸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좋을 일이었다. 유령의 신랄한 악취는 어찌된 일인지 자취를 감추었다. 콧구멍에 늘 끈적하게 달라붙어 있던 냄새 반죽이 말끔히 녹아 있었다. 말간 콧물을 훔쳐내자 맛깔스런 밀감 냄새가 살랑이며 새어들었다.
“300동 주민 분들께 안내방송 드립니다. 근래 발생한 불미스러운 일들과 관련하여 비상주민회의를 열고자 합니다. 시급한 사안이오니 한 분도 빠짐없이 참석해주시기를 바랍니다. 회의 장소는 아파트 제 2놀이터이며, 참석 시 식기류를 필히 지참해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주민 여러분의 건강과 생활에 직결된 매우 시급한 사안이오니만큼 가능한 빨리 집결해주시기 바랍니다. 많은 협조 부탁드립니다.”
401호 아줌마는 배가 고프다며 보채는 경우를 이끌고 유령의 성채로 향했다. 시큼하게 익은 겨울 과일의 햇살 내음이 콧길을 지나 혓바닥을 깔쭉하게 긁어내렸다. 모자는 말간 침을 다시금 꼴깍 삼켰다.

“아니, 아주머니, 몸도 성치 않은 분이 대체 어딜 다녀오신 거예요? 안 그래도 요전번에 동장님이랑 3층 사는 공무원 청년이랑, 그래 지난번에 탄원서 써 붙였던 대학생 알죠? 다 아주머니 찾으러 병문안까지 갔었는데. 대학생 청년은 전번 일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에요. 아주머니 만나서 꼭 좀 할 말이 있다고 하더라고. 그런데 아주머니 정말 어딜 갔다 오시는 겁니까? 퇴원하고 집에도 안 들어오셨죠? 아니, 그러니까 우리가 아주머니를 어디 딴 데로 보내려는 것도 아니고 수술까지 하고 오신 분께 해코지라도 하겠습니까. 이웃 간에 이대로 지내는 것도 껄끄러우니까 다들 사과도 하고 이야기 좀 나누고 싶다는 건데. 그렇게 말도 않고 쌩하니 없어지는 것도 도리는 아니죠.”
“유령은, 유령은 어떻게 됐나요?”
열에 취해 쏘아붙이던 관리소장은 그제야 비릿하게 달뜬 여자의 냄새를 맡아내었다. 여자는 시뻘건 얼룩과 흙탕물이 말라붙어 숫제 넝마가 된 원피스를 걸치고 있었다. 원피스의 한 쪽 밑단이 너덜하게 찢겨 허벅지 위까지 훤히 드러났다. 흙먼지에 새까매진 환부 사이로 흰 다리뼈 조각이 내비쳤다. 해진 천 조각 밑에 발간 핏물이 들쩍지근한 비린내로 고여 들고 있었다. 관리소장은 귓바퀴 근육을 팽팽하게 조이며 목을 떨었다.
“저희도 그 유, 유령 문제로 말씀 드릴 것이 있었는데. 주민 분들이 유령 때문에 생활이 불가능할 지경이 돼서 말입니다. 혹시 뭐 아시는 게 없나 여쭈어 보려고 했죠.”
여자가 싱긋 미소 지었지만 눈을 내리깐 관리소장은 그녀를 보지 못했다. 희게 새어버린 눈을 태연하게 깜박이며 장님 여자는 지친 남자를 일으켰다.
“유령을 살찌울 준비가 됐어요. 이제 그 애도 다른 열을 훔치지는 않을 거예요. 주민들을 불러 주시면 제가 만찬을 대접하고 싶은데. 그걸 먹으면 추위도 싹 가실 거예요. 허기도 채울 수 있을 테고요.”

아이들은 온종일 마녀의 만찬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유령 아파트에 사는 경우는 재재대는 친구들 한가운데에서 티셔츠를 끌어올렸다. 토실하게 살이 오른 배를 두드리며 젠체하는 소년을 아이들이 안달하며 재촉하였다.
“봤지? 여기에 마녀가 키운 유령이 들어가 있다니까. 내가 유령을 잡아먹었다고, 유령을.”
“유령은 투명한데 어떻게 잡아먹냐? 자세히 좀 얘기 해 봐. 근데 너 얼굴 되게 빨갛다. 3반에 승준이도 그렇던데. 혹시 마녀가 술도 줬냐?”
“아씨, 술은 무슨 술이야. 궁금하면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잘 들으라고. 니들 피살이꽃이라고 들어 봤냐? 그걸 먹이니까 유령이 갑자기 나무로 변한거야. 거기서 되게 달고 이상한 과일이 달렸는데 그게 다 유령 눈알이랑 살이랑 이빨이랑 섞인 거지. 내가 그걸 한입에 먹었단 말씀 아니겠어?”
“우웩. 드러워.”
“더 지저분한 거 알려줄까? 마녀가 피살이꽃을 어디서 꺼냈는지 아냐?”
경우가 소곤대자 아이들은 킬킬거리며 자지러졌다.

401호 아줌마는 플라스틱 도시락 통과 수저를 하릴없이 달각거리다 승준 엄마와 서먹한 눈인사를 주고받았다. 요즘 들어 예민하게 굴었던 것이 마음에 걸렸다. 며칠 전에는 머리 한 구석이 지독히도 시려 이웃의 열 없이 희멀건 얼굴을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승준이 유령 부르는 노래를 지어내 이 사달이 난 것 아니냐고 쏘아붙이자, 이웃은 그제야 조금 달아오른 얼굴로 자리를 떴다. 오늘 승준 엄마는 그때보다도 더 발간 낯빛을 하고 있었다. 몰캉한 밀감 내음에 꼬르륵 거리는 소리가 쉴 새 없이 웅웅댔다. 어색했던 이웃들은 뱃소리로 서로에게 화답하며 장님 여자의 의식을 지켜보았다. 여자는 유령의 찬 색점 바로 밑에 손을 집어넣고 녹신한 목울음을 흘리고 있었다. 밀감의 단내는 그녀의 신음에서 퍼져 나오는 것이었다. 여자가 둥글게 두른 손을 토닥이며 피리 소리 같은 노래를 부르자, 끌어안긴 유령이 화답하듯 붕붕거렸다. 훈기에 흐무러진 밀감 내음이 더욱 질펀해졌다. 그녀를 빙 둘러싼 주민들까지 발그레 녹아들자 여자는 별안간 한 팔을 내리더니 치마 속에 손을 집어넣고 시뻘건 꽃 한 송이를 뽑아내었다. 401호 아줌마는 서둘러 경우의 눈을 감쌌다.
“저거 오줌 누는 데서 꺼낸 거지?”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견고한 노래 사이로 섞여들었다. 여자는 막 출산한 꽃을 유령의 색점보다 한 뼘 정도 아래에 가져다 놓고 둥글게 문질렀다. 벌건 꽃잎이 뭉개지며 분홍빛 피거품으로 풀렸다. 갓난 거품은 뭉게뭉게 한껏 부풀다가 몽글거리는 핏물로 뭉쳐 가라앉았다. 피살이꽃이 가벼워질수록 핏물은 진하게 고여 차올랐다. 뿌리까지 녹아들 무렵이 되자, 유령은 나무 한 그루만큼의 체온으로 온통 시뻘겋게 달아 있었다. 시큰한 색점과 악취마저도 단 핏물에 끓어 스러졌다. 갓난 꽃의 숨을 모조리 삼켜낸 유령은 피나무가 되었다. 차진 단내는 토실한 겨울 열매로 자라 피나무 유령의 마른 손목에 주렁주렁 매달렸다. 주민들은 밀감 내음이 녹진하게 뭉친 과일들을 안달하며 바라보았다. 식기를 단단히 움켜쥔 손들은 여자의 허락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 오래 기다리셨죠. 마음껏 드세요. 양이 모자라지는 않을 거예요.”
왕성하게 솟아나는 타액에 숨이 달아 헐떡대던 사람들은 단즙을 게걸스레 들이켰다. 수척했던 혓바늘들이 통통하게 달아올랐다. 직녀성과 코코펠리의 밤 축제, 그 단 숨의 기억이 발간 입들 속에서 농염하게 무르익었다. 별과 신의 관능적인 분내에 사람들은 온통 분홍빛으로 영글었다. 이웃들은 서로 입을 맞추어 달뜬 숨을 주고받으며 여자의 향연을 만끽했다. 여자가 잉태하여 길러낸 열매로 주민들은 허겁지겁 배를 불렸다. 유령의 핏물로 녹아든 별의 숨은 두툼하게 부풀어 사람들을 살찌웠다. 수척하게 그늘졌던 뱃가죽들이 유령의 체온을 삼켜내고 둥근 윤기를 빛내었다. 살 오른 사람들은 한층 무거워졌고 경우는 조금 더 긴 다리뼈를 갖게 되었다.

“치사하게 혼자서만 다 먹었냐? 하나 정도는 남겨 왔어야지.”
“그날 뿌리까지 다 고아 먹었어. 얼마나 달았는데. 그리고 니들은 겁쟁이라 먹지도 못했을 거잖아. 마녀가 꽃을 어디서 꺼냈게?”
“으욱. 알았다고. 그만해, 그만.”
경우는 키득거리며 가방에서 물통을 꺼내들었다. 자그마한 팔에 멱을 잡힌 말간 물이 이리 저리 출렁였다. 철럭거리는 물은 순식간에 경우의 눈을 그득 채웠다. 경우는 허우적거리며 기도까지 부풀어 오른 물거품을 게워냈다. 다리뼈가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말간 물 대신 단물만 삼키는 주민들 틈에서 장님 여자는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광견의 씨앗으로 병든 이웃들은 서로에게 거리낌 없이 입을 맞추며 단내를 나누었다. 아이들은 멸균된 생수 대신 우유를 들이켰고, 흙에 스민 피나무 과즙에는 벌레들이 들끓었다. 파리와 나비, 모기와 벌들이 늘펀하게 살 오른 주민들의 피부에 달라붙었지만, 축제의 잔열이 남은 무덤을 갈아엎자고 주장하는 이웃은 아무도 없었다. 그 여름, 얼어 있던 오리온자리의 눈물은 끈적하게 녹아 흘렀고, 장마 내내 진해져가는 단내를 쫓아 벌레들이 가쁘게 웅웅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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