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나무 유령-2회

관리소장은 햇빛 한 방울도 튀어 묻지 않은 눈가를 껄껄한 손가락으로 비비며 401호 아줌마와 마주했다. 그녀는 새벽동안 아파트 카페에 올라온 글들을 들이밀며 간밤의 유령 노래에 대해 말했다.
“정말 들었어요. 이상한 짐승이라도 들어온 건 아닌지. 불안해서 살 수가 있어야죠. 확인 좀 해주세요.”
이후로 몇 주간 수척한 얼굴 몇 쌍이 더 찾아들었다. 소위 유령 노래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관리소장도 신랄하고 난삽한 음률을 몇 차례 들었다. 신고가 들어온 부근에 적외선 카메라까지 달았지만, 눈에 띄는 것은 잡히지 않았다. 401호 아줌마가 새로운 건의사항을 가지고 관리실을 찾았을 때, 관리소장은 안쓰러우리만치 해쓱한 목소리로 답했다.
“냄새요? 소음이 아니라 냄새라고요?”
“네, 아저씨 죄송한데 좀 봐주셔야겠어요. 음식 쓰레기 냄새 같은 게 진동을 해서 견딜 수가 있어야죠.”
“또 거기입니까?”
“도로 쪽으로 난 창만 열면 괜찮더라고요. 아파트 뒤쪽 정원에서 나는 것 같아요.”
사나운 악취는 노래보다도 성급하게 아파트를 뒤덮었다. 장님 여자가 뿌려 놓은 돼지피의 잔해일지도 모른다는 건의에, 포클레인으로 무고한 흙을 되갈았지만 소용없었다. 바삭한 햇살마저도 끈적하게 기름진 악취를 구워내지는 못했다. 유령 노래에 잠 못 들던 사람들은, 낮 시간마저 갈취 당했다. 애연가인 203호 아저씨도 예외는 아니었다. 담배에 눅진하게 절여진 코는 늙고 지쳐 장님 여자의 돼지 피 냄새도 맡지 못했다. 그런 남자조차 꿀렁이며 달라붙는 악취에 못 이겨 헛구역질을 해댔다. 불면증과 허기에 지친 사람들은 나날이 수척해졌다. 소음과 악취는 너무도 질펀하고 노골적이었기에, 어른들까지도 유령을 두려워했다. 햇빛에 바래지 않는 색점이 보일 즈음에는 모두가 그것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유령의 낙인은 401호 아들 경우의 턱 높이에 자리잡고 있었다. 유령 조각을 처음 본 주민들은 햇빛에 눈이 다쳐 남은 잔상일 뿐이라 여겼다. 그러나 상흔은 같은 자리에 붙박여 누구에게나 비추어지고 있었다. 아무도 그 색깔을 설명하지는 못했지만, 분명히 보았던 것이다. 수다를 떨며 지나가던 노인들은 같은 자리를 응시하다가 떨떠름한 눈길을 주고받았다. 아이들은 유령의 흔적을 움켜쥐려 손을 휘휘 저었다. 유리구슬을 삼켜내듯, 왕성한 식욕으로 색점에 혀를 갖다 대는 아이도 있었다. 오동통하고 뜨끈한 살덩이와 부딪히면서도 색점은 묽어지는 일 없이 떫은 색의 농도를 유지했다. 색점은 유령의 노래나 냄새만큼이나 신랄하고 깔깔한 생김을 지니고 있었다. 입자는 파랗지도 붉지도 않았다. 주민들은 그 색을 다만, 유령의 색이라 칭할 수밖에 없었다. 색점은 엷게 저며져 비스듬히 누운 형태였다. 어떠한 두께도 없이 공중에 스며 있었지만, 결코 멀그스레 풀어지지 않는 단단한 태를 갖추고 있었다. 떫은 단면은 투명하지도 않았다. 투박한 색채를 고집스레 머금은 채 유령의 자리를 지켰다. 유령의 얼얼한 소리와 냄새, 색은 날이 갈수록 날카롭게 벼려졌다. 유령에게 잠과 식욕을 빼앗긴 주민들은 나날이 수척하고 껄껄해졌지만, 유령은 노골적일 정도로 그악스러운 흔적들로 주민들의 두께를 갈취하고 튼튼해졌다. 그러나 풍만했던 사람들의 살점을 훔쳐내고도, 유령은 기름진 먹이를 소화시키지 못했다. 뼈만 남아 단단해진 주민들만큼이나 유령은 선명해졌지만 그뿐이었다. 색점은 여전히 평평했고 유령은 살집도 온기도 지니지 못한 채, 사나운 흔적들만 탄탄하게 굳힐 뿐이었다. 포동포동하고 투실했던 주민들의 체온은 간 데 없이 스러져버린 것이다. 갈취의 참상으로 그득 찬 아파트는 갈수록 추워졌다. 살집을 잃은 주민들은 외투를 몇 벌씩 걸치고서도 몸을 떨어댔다. 느닷없이 서러운 울음을 흘리는 아이들이 늘어갔다. 유령 퇴치 명목의 주민 회의는 이례적으로 바글거렸다.
“101호 살던 여자 말이에요. 왜 뒷마당에서 넘어져가지고 입원했다는.”
“그러고 보니 그 분이 유령 얘기를 하지 않았어요? 경우야, 말해 봐. 네가 그 아줌마한테 뭐 하냐고 물어봤더니, 유령한테 색을 입히는 중이라나? 뭐라고 했다며.”
“맞아, 그 아줌마 맨날 유령이랑 색 입히기 놀이 하는 거라 했어.”
“그러니까 그 여자는 뭔가 알고 있는 거 아녜요? 혹시 몰라. 유령도 101호 여자가 불러 왔을지.”
“세상에, 그 여자가 피까지 부었던 것 기억해요? 나는 그냥 불쌍한 처녀가 미쳐서 그러는 줄로만 알았지. 그게 설마 유령 부르는 제사 이런 건 아녔나 몰라. 어머, 혹시 저주 아니야, 저주?”
“팥이라도 뿌려 볼까요?”
“팥도 뿌리고 소금도 뿌려 봤어요. 203호 아저씨는 무당도 불러서 제까지 지냈잖아. 맞죠, 아저씨?”
“거, 무당이 양놈 귀신이면 다 소용 없다고 하더라고. 내가 요상한 소리랑 냄새 때문에 잠도 못 자고, 먹지도 못해서 십 키로가 빠졌다 이 말이오. 오죽하면 백만 원이나 복비로 주고 용한 무당 찾아 데려왔겠어. 자기 피로 부적까지 그려서 묻어놓고 갔는데. 자, 고 빌어먹을 냄새는 아직도 진동을 하잖아.”
“서양 귀신이었으면 진즉 없어졌겠죠. 여기 목사님도 계신데.”
“어쨌든 여기서 탁상공론 해봐야 더 나올 것도 없지 않습니까? 일단 101호 아줌마가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쪽에 연락을 해 봅시다. 관리소장님이 구급차를 불렀다고 했으니까, 내일 제가 관리실에 가서 병원 주소랑 연락처를 받아 오죠. 병원에 같이 가 보실 분 있습니까?”
동장과 502호 대학생, 301호 공무원이 이튿날 토요일에 병원에 다녀왔지만, 장님 여자는 이미 퇴원한 뒤였다. 101호 초인종 소리에 답하는 기척은 없었다. 102호 이웃은 옆집에서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고 했다. 불은 늘 꺼져 있었기에 어두운 현관만으로는 여자의 부재를 확인할 수 없지만, 적어도 현관문 여닫는 소리나 티브이 소리 따위는 여자가 입원한 이후로 한 번도 들려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다못해 욕실에서 변기 물 내리는 소리나 샤워기 돌아가는 소리라도 새들기 마련이거든요. 요 몇 주는 전혀 못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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