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의 물방울

병동의 사람들은 소독약 냄새가 짙게 배어든 침상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등 뒤에 짙은 빛깔로 내려앉은 시간의 상흔. 너희는 서로의 등을 숨긴 채 더 이상 감기지 않는 눈으로 빈 곳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빈 곳은 이제 남아있지가 않아. 허우적거리는 눈짓들. 그녀는 침대 위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언젠가 지상을 떠날 날을 위하여 하는 연습이라고. 네가 매일 글을 쓰는 동안 그녀는 춤을 추었다.

아니, 아직은 춤이 아니야. 춤 연습이라고 했잖아. 연습.

왜요? 지금 추는 건 춤이 아닌가요? 난 내 멋대로 배열하는 모든 어휘들이 내 글이라고 생각하는데. 아무리 서툴고 유치하고 모호해도 이게 연습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이건 연습이야. 난 발레를 추거든.

발레?

알잖아. 발레는 공중지향적인 춤이라는 걸. 무대 위에서 쿵쿵거리면서 돌아다니는 무용수들의 묵직한 소리를 부드럽게 감싸주는 오케스트라의 소음이 없었다면 무용수들은 감히 춤을 출 수 없었을거야.

바닥을 기는 무용수를 본 적이 있어요. 그에게는 다리가 없었죠. 굵은 근육이 불거져나오는 팔로 그는 더러운 바닥에 널브러진 여자 무용수 위를 물결처럼 헤엄치면서 그녀와 같은 곳으로 추락하고 있었어요. 그건 발레가 아닌가요?

응. 그 사람이 춘 건 발레가 아니야. 발레는 사람이 추는 춤이니까.

아직도 그 말인가요.

사람은 두 다리가 달린 동물이지. 다리 없이 팔만으로 춤을 추는 게 어떤 춤인지는 나도 모르겠어. 어쨌든 내가 추려는 건 그런 춤이 아니야. 난 발을 떼고 춤을 출 거야. 지상에서 발레를 흉내냈던 그 누구보다 오래 도약할 거야. 그래도 춤은 찰나일 테지. 관객도 함성도 필요 없어. 이건 일종의 의식인 셈이야. 진정한 발레리나가 되겠다는 의식. 영원히 공중에서만 춤을 추겠다는 다짐. 그걸 이겨내고 나면 나는 진짜 춤을 추는 셈이지.

나도 당신의 춤을 볼 수 있을까요.

그건 어려울 거야.

그렇겠죠.

얼마 뒤, 여자가 병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너는 그녀가 전염병에 걸려 병동에서 죽고 말았다는 걸, 그녀의 몸과 분리된 마음이 서로 다른 사내에게 가 있다는 걸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음에도, 그 소식에 서럽게 느껴졌다. 자살하지 않은 작가의 글은 모두 연습일 뿐인가? 너는 미완성인 채로 남은 몇 편의 글들을 알고 있었고, 미완성인 채로 완성된 몇 편의 글 역시 읽어본 적이 있었다. 적어도 그녀의 믿음에 따르면, 그녀는 단 한 번도 진짜 발레를 춰 본적 없이 죽고 만 것이다. 그녀의 모든 연습들은 관문을 넘어서지 못하고 의미 없는 몸짓들로 흩어지고 말았다. 의미 있는 몸짓은 언제나 너희의 너머에 응집되어 있었다. 너는 더 이상 몸짓의 이름을 기억할 수도 부를 수도 없다. 갈수록 많은 어휘들을 잃어간다. 그만큼 풍부하고 아름다운 어휘들로 글을 쓰는 사람들은 발레를 추지 못할 것이라고 그녀는 믿었을지도 모른다. 매혹적인 사람은 기구하고 부유한 사람들은 명이 짧다고 생각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범인들처럼. 기구하고 짧은 생을 질시하게 되어버린 날에는 그녀도 견딜 수 없었겠지. 누구라도 설득시킬 수 있는, 명료한 단문들로 이루어진 유서를 보고 난 이후부터 네가 더 이상 자살을 믿을 수 없었듯. 명예로운 삶과 찬란한 죽음은 모두 너에게 속해 있지 않았으므로. 네 단순하고 확고한 예감은 언제나 이곳에 머물러 있었으므로.

Series Navigation<< 네크로필리아 음악가의 물방울푸른 아이의 물방울 >>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