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터 할아버지와 소녀의 물방울

페터 할아버지는 천성적인 몽상가였다. 어렸을 적부터 거식을 앓았던 그는 아이처럼 작은 몸에 말라 비틀어져 주름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늙어빠진 소년처럼 보였다. 소녀의 부모는 매일 하릴없이 빨랫더미 옆에 앉아 붉은 하늘만을 바라보는 그를 경멸했지만 소녀는 그의 반짝거리는 눈이 응시하는 꿈의 세계를 남몰래 염탐하며 신기해하곤 했다. 그는 대기와 별에 대해 연구한다고 말하고 다녔는데 그에게 그 직업에 알맞은 학력이나 연구경력이 없음은 누군가 확인해 보지 않아도 너무나 명백히 드러나는 사실이었다. 페터 할아버지는 검은 숲에서 나고 자랐으며 한 번도 검은 숲의 부락을 떠나가 본적이 없었다. 검은 숲 인근에는 연구기관이나 학교가 없었으므로 그의 말은 거짓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소녀는 허공에 못박인 그의 눈이 소녀는 읽어내지 못하는 대기의 기류와 별들의 속삭임을 응시하고 있을 것이라고 상상하곤 했다.

그는 부락들이 모여 있는 곳 반대편 절벽에 살고 있었기에 작정하고 찾아가거나 숲의 외곽을 한바퀴 빙 돌아 보지 않는 이상 만나기 어려웠다. 더욱이 그는 노인들을 위한 급식을 받기 위해 부락의 작은 광장으로 나가지 않는 날이면 언제나 그의 젖은 빨랫더미 옆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소녀로서는 잘 된 일이었다. 누구의 눈에도 들지 않고 그에게 비밀스러운 말들을 터놓을 수 있었으니. 그는 그럴 성품이 아니라고 믿었지만 만약 페터 할아버지가 사람들에게 소녀의 비밀을 떠벌린다고 하더라도 언제나 몽상에 취해 있는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귀기울여 듣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소녀는 비밀을 누설하기 위한 정당화의 과정을 걸음 걸음마다 반복해서 이어나가며 숲의 반대편 끝까지 빙 돌아 걸어갔다. 소년을 만나기 전까지, 밤이 찾아들기 전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다행히 노인은 소녀가 상상했던 그대로의 형상과 자세로, 빨래더미 옆에서 하늘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노인은 수줍음과 권태에 질릴대로 질려버린 사람처럼 소녀 형상을 마주하면서도 인사하지 않았다. 소녀가 그의 옆자리에 걸터앉는 동안에도 그는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허공만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결국 소녀가 먼저 인사를 건네고 나서야 노인은 어쩐 일이니, 하고 물어보았다.

할 말이 있어요. 소녀는 짐짓 비장한 어투로 운을 떼었다. 얼마 전에 개의 시체를 먹었어요. 생살이 벗겨진 놈이었죠. 믿을 수 없을 만큼 짰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달콤했어요. 지금도 내 뱃속에서 그 붉고 짠 핏덩이가 살아서 꿈틀거리고 있는 걸 느낄 수 있죠.

그래. 하고 노인은 대답했다. 너무나 나른한 어투여서 노인이 그녀의 말을 제대로 듣고 있는 것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래도 소녀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쥐는 죽일 수 없었어요. 다들 죽이잖아요. 쥐들은 음식을 훔쳐먹고 병을 옮기니까 죽어야 마땅하다고요. 하지만 난 쥐도 나방도 다른 벌레들도 죽일 수 없었어요.

내가 어릴 적에 부락에서 가장 큰 저택에 살았다는 걸 알고 있니? 노인은 갑작스럽게 지껄이기 시작했다. 소녀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사람들은 우리집을 드라큘라의 저택이라고 불렀지. 그 정도로 으리으리한 집이었어. 검은 숲 한복판에 비죽이 올라온 성탑의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경외에 찬 표정을 짓곤 했는데 난 탑의 꼭대기방에서 남몰래 그들의 표정을 관찰하곤 했지. 난 날마다 소의 고기를 저녁식사로 먹었어.

고기를요? 소녀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말했다.

그래. 내가 어릴적만 해도 사람들은 육식을 했단다. 물론 고기값은 무시무시할 정도로 비쌌지. 목장 사람들과 도축업자들이 원하는 대로 값을 치러야 했으니까.

도축업자요?

살아 있는 짐승을 죽이고 살을 벗겨 먹기 좋은 고깃덩이로 분리하는 사람.

그럼 그들은 가죽을 벗길 줄 아나요?

물론이지. 그들의 손이 지나가는 부분마다 날개 같은 가죽이 늘어뜨려지는 모습은 발레리나들의 무용처럼 황홀했어.

소녀는 시간의 길을 잃고 헤매던 고대의 도축업자가 숲의 한가운데, 육식을 하는 가족이 사는 저택의 부지에서 풍겨오는 고기냄새에 홀려 죽은 개의 살갗을 벗겨놓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오래 전에 죽었지만 강을 건너지 못하고 아직 숲을 떠도는 사냥꾼 그라쿠스와 같은 존재일 것이다.

그 시절 한참 동물 해방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지. 하고 할아버지는 말을 이었다. 진정으로 동물들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자유를 주고 싶어 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어. 동물 해방을 부르짖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태어나서 한 번도 죽은 동물을, 동물의 고기를, 동물의 가죽을 본 적이 없는 투기꾼들이었지. 네 말이 맞아. 매일같이 하루살이와 쥐들을 죽이면서, 피리소리에 홀려든 쥐떼들을 재판조차 없이 호수 속에 빠뜨려 익사시키면서 대체 무슨 자유를 이야기한다는 거지? 쥐보다 커다란 온혈 짐승들만을 위한 자유? 그런게 다 무슨 소용인지 난 이해할 수 없었어. 그래서 그 소동이 일어나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소고기를 씹어삼켰지. 돈냄새를 기가 막히게 잘 맡던 아버지는 은밀하게 숲 인근에 있는 목장들을 전부 사들였어. 한편으로는 동물해방 운동과 관련된 기고문을 쓰고 연설을 하러 다니면서 말이야. 그리고 마침내 동물해방이 선포되었을 때, 그들에게 재판을 받을 권리와-물론 기소를 할 권리는 없었지. 그들은 재판의 언어를 사용할 수 없으니까. 오로지 누군가 그들을 고소할 경우 변호사를 선임하여 정당한 재판을 받을 수 있는 권리만이 주어진 거야.- 즉결심판을 피할 수 있는 권리, 고깃덩이로 전락하지 않을 권리가 주어졌을 때, 아버지는 농장에 있던 모든 고기들을 풀어주는 대가로 정부에서 어마어마한 보상금을 받았지. 아버지는 면식도 없는 짐승들을 사들여 돈을 번 거야. 그 모든 짓거리들은 전부 투기였던 셈이지. 인근 혹성에서 노예해방이라는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아버지는 예전에 관청에서 근무할 무렵 들었던 것 같아. 그래서 해방운동이 일어날 때, 그처럼 기민하게 대처할 수 있었던 거겠지.

소녀는 아직도 소년인 양 이야기하는 노인의 가녀린 목소리에 홀린 듯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노인은 으리으리한 저택이 아닌 다 허물어져가는 낡은 나무집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거부의 집답게 화려하기는커녕 소녀의 가족이 살고 있는 집보다도 자그맣고 낡아빠진 집이었다.

그럼 그 돈은 다 어디로 갔나요?

다 써버렸지. 동물해방이 가져온 수익보다 더 많은 돈을 동물해방 때문에 빼앗겼어. 그건 모두 나 때문이지. 난 개보다 큰 동물의 집단사육과 살해, 육식이 법적으로 금지된 이후에도 육식을 그만둘 수 없었거든. 난 식물들을 먹을 수 없었어. 배춧잎들이 밤마다 달을 쳐다보면서 조용한 묵상에 잠긴다는 상상을 하면, 그 푸르고 부드러운 잎사귀들에 손을 얹을 때면 도저히 그것들의 살을 벗기고 사지를 떼어내 씹어삼킬 수가 없었지. 내가 먹을 수 있는 건 오로지 식물들이 스스로 내놓은 열매들 뿐이었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었지. 고기를 먹지 않고서, 숲의 요정들처럼 산딸기와 포도, 앵두만을 먹고서는 제대로 살아갈 수가 없었어. 난 나날이 수척해졌고 면역이 약해져서 온갖 병마에 시달리며 죽어갈 수밖에 없었지. 어머니가 달여온 식물의 즙마저도 난 삼킬 수가 없었어. 한때 가축과 매춘부가 같은 어휘로 불렸다는 걸 알고 있니? 난 상사병에 앓아누운 소년처럼 가축-매춘부를 불렀고 부모님은 몇 명의 소녀들과 여인을 내 방에 들이밀어 놓았지만 난 계속해서 가축-매춘부의 추상적인 어휘만을 소곤거릴 뿐이었지.

부모님은 내가 무얼 원하는지 깨달았어. 결국 부모님은 남몰래 고기를 밀수해 내게 먹이기 시작했지. 하지만 일년도 되지 않아서 꼬리가 밟히고 말았어. 안그래도 동물해방으로 큰 이득을 챙긴 우리집을 질시와 경멸에 찬 눈으로 주시하고 있던 주민들이 많았던 거야. 그들은 지체 없이 우리집을 신고했고, 내가 하얀 리넨 시트 위에 드러누워 소의 부드러운 뱃살을 입안으로 밀어넣는 사이 경찰들이 불시검문을 위해 저택 안으로 들이닥쳤어. 그들은 냉장고 한켠에 쌓여 있는 고기의 시뻘건 살덩이를 발견했고, 내 방안에서 풍기는 고기의 피냄새를 맡고야 말았지. 부모님은 날 법정에 출두시키지 않기 위해 그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재산을 법원에 갖다 바쳐야 했어. 난 아직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상태여서 숲을 벗어나면 곧장 죽어버릴 게 뻔했거든. 하지만 일이 끝났을 때, 내 죄가 알음알음 사그러들고 주민들이 이제는 비참하게 낡아빠져버린 우리집, 차압 딱지가 붙고 숲 속에 내앉아 걸인들이 오가던 버려진 폐가만을 간신히 사들인 우리집을 더 이상 증오하지 않게 되었을 때, 저택 가득 들어차 있던 피의 냄새와 육식의 욕구가 사그라들었을 때, 부모님은 나보다 먼저 절벽 아래로 투신하여 죽어버리고 말았어. 그들은 가난과 비참을 견디지 못했던 거야. 그 숱한 노력의 결과가 지독한 모욕과 연민의 대상인 작은 오두막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던 거야. 난 여전히 육식에 대한 들끓는 갈망을 버리지 못한 상태로 홀로 살아남았어. 날마다 죽은 소들의 벌거벗은 몸을 꿈꾸었지만 혼자 힘으로는 동물을 밀렵하는 일조차 불가능했어. 그저 숲 속에 버려진 열매들을 주워먹으며 근근이 살아갈 뿐이었지. 모두가 난 오래 살지 못할 거라 생각했지만, 심지어 나조차도 이런 비참한 생활을 오래 견딜 필요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봐, 난 지금까지도 살아남았단다. 똑같은 허기, 똑같은 갈망, 똑같은 고통, 똑같은 결핍에 허덕이면서. 언젠가부터 유달리 검붉게 변한 하늘을 보면 갓 도축된 소의 생살이 떠올라. 얘야, 어쩌면 너도 끝까지 이렇게 살아가야 할지도 몰라. 이런 하늘이 영원히 계속될지도 몰라.

페터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소녀의 이야기였지만 동시에 소녀의 이야기일 수 없는 어떤 것이었다. 아니요, 달라요. 당신이 먹은 건 도축된 고기, 더 이상 짐승도 삶도 아닌 고기, 당신을 물어뜯지도 못할 고기, 식물처럼 석화되어버린 고기예요, 하고 소녀는 노인의 말라빠진 거죽을 부정해야 했을까? 하지만 소녀는 허공에서 떠도는 소의 피를 보지 못했고 노인이 바라보는 소의 생살을, 짐승의 망령의 비린내를 맡을 수 없었으므로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깨진 채 방치되어 있는 허공 속 대칭을, 보이지 않는 별자리의 파괴된 이음매를, 흉터를 그대로 드러낸 채 투명한 피를 뚝뚝 흘리고 있는 붉은 대기를, 그 속에서 춤추는 소년의 유령과 같은 구름을 홀린 듯 바라볼 뿐이었다. 그곳에 있는 것은 노인의 짐승이 아닌 소년의 유령이었다. 노인의 소가 아닌 소녀의 개였다. 그들은 물비린내를 풍기는 하얀 빨래더미 옆에 앉아 같은 허공을, 서로 다른 악몽들의 결속을 각자의 붉은 살 너머로 들여다보았다. 대기 속에 안온하게 서로를 끌어안고 있던 부드러운 결속, 허구적인 이야기들의 보드라운 결을 찢어발기고 오로지 상처의 결속, 파괴의 결속, 어긋남의 결속, 날카로운 날들이 서로를 베어내는 파편들의 결속으로 산산조각난 대기의 파편 속에 앉아서, 서로를 애써 엮고 같은 것을 보려는 노력조차 없이,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메우려는 노력조차 없이, 흐트러진 붉은 조각들의 난장을 그대로 놔둔 채 어긋남이 난도질하는 황홀한 아픔을 감내하였다.

아픔은 한데 뭉그러질 수 없는, 그러나 떼어낼 수 없이 서로 엉겨든 살의 실타래들이었다.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노인은 여전히 빨래더미 속에 앉아 소고기의 악취를 풍긴다는 대기를 들여다보고 있었고 소녀는 검고 매끄럽게 변해가는 개의 생살 속으로 걸어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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