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는 쉽게 그치지 않았다. 그건 사막의 저주일지도 모른다고, 속삭이는 여자의 목소리. 비 웅덩이에 코를 박고 끔찍스러운 얼굴을 들여다보다 물 속으로 머리부터 고꾸라져 들어가는 검은 쥐를 바라보며 너희는 침묵한다. 나르시스가 천사와도 같은 미소년을 보고 사랑에 빠져 입을 맞추었던 성스러운 액체 위에서 흐물거리며 얇고 더러운 콧수염들을 움찔거리는 작고 혐오스러운 괴물을 본 순간, 쥐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너희는 하수 배관 바깥으로 흘러나오는 빗물에 코를 박고 머리부터 고꾸라지는 쥐의 모습을, 먼지와 살이 가느다란 뼈대 위에 뒤룩뒤룩 엉겨붙은 그 작고 비참한 짐승의 최후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마치 자살하는 쥐의 모습을 처음 목도하는 것 마냥. 쥐처럼 자그맣고 우둔한 짐승이 감히 제 목숨을 끊을 정도로 극심한, 심장을 파먹고 자라나는 독과도 같은 고독을 가질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것 마냥. 하지만 자살은 쥐들의 유구한 전통이라는 것을, 특히 마치 부푼 몸속에 들어찬 시꺼멓고 뜨거운 우수를 꺼트리려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물가에 몸을 내던지는 모습이 종종 관찰된다는 것, 쥐들의 꺼트릴 수 없는 하얀 심지와도 같은 절망에 대한 이야기, 그 참상에 대한 전설은 하멜른에서부터 내려와 그림형제에 의해 널리 알려졌다는 것을, 입에서 입으로 내려오는 하나의 물결이 되었다는 것을, 그 물결 속에서 쥐들은 제 끔찍한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물의 가면으로 뒤덮은 채 한없이 떠내려가며 떠내려오고 있다는 것을 너희는 이미 알고 있지 않았던가.
혐오스러운 살의 역사를 끊어지 못하는 너희는 인간보다 훨씬 쉽게 목숨을 끊는 것처럼 보이는 작은 짐승들의 고독을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죽은 쥐는 몇 마리의 자손을 남겼을까. 어쩌면 그것은 단 한 마리의 자식도 낳지 않았을 수도 있다. 검고 반들거리는 눈과 분홍빛 코, 지나치게 여리고 그만큼 역동적으로 살아있는 생명의 추악한 냄새에 지레 질려 깊고 차가운 웅덩이 속으로 뛰어들었던 그 생물이라면 분명, 생의 짙은 악취에 진저리를 쳤던 그 생물이라면, 생의 무게를 온몸으로 만끽하며 가라앉았던 그 생물이라면, 분명. 아냐, 그 쥐는 수백 마리의 쥐들에게 겁간당해 수백 마리의 쥐들을 낳았을 수도 있어. 검은 물속에 빠져 뜬 채로 사그라든 동공 깊은 곳에선 수십 마리의 새끼 쥐들이, 덜 여문 두개골들이 헐떡거리고 있을 수도 있어. 넌 태어남이 강제되었듯 출산 역시 강제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잊고 살아왔겠지. 하지만 도처에 즐비한 생명들을 봐. 성기조차 없는 미생물들, 박테리아와 세균, 플랑크톤. 입 대신 성기만을 가지고 태어난 하루살이들을. 그것들에겐 주저함을 담아 둘 마음의 공간조차 없었어. 그것들에게는 두개골도, 미움과 고통을 담는 작은 살덩이도 없으니까. 그것들은 생의 참혹함을 인정하고 더 이상의 숨이 없는 곳으로 투신할 만한 우수를 담아둘 자리조차 없어. 그것들의 몸은 너무도 얕고 가벼워서 깊고 아득한 심연을 굴착할 공간도, 심연을 상상할 공간도 없어. 그것들이 생을 선택했다고 생각해? 그것들이 원해서 번식하고 알을 낳고 죽어갔다고 생각해? 막 태어난 작은 별이 온몸을 바들바들 떨면서 다가올 죽음의 시간만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작은 신경줄조차도 타고 나지 않은 별, 살아있지도 않은 별, 생명을 잉태하고 틔워낼 수조차 없는 별, 그 별이 죽고 나면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꺼져가는 먼지 속에서 피어날지 생각해볼 이성의 기관조차 별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는데, 그게 무엇을 주저하고 무엇을 포기할 수 있었겠어. 고독과 자살은 쥐와 인간의 몫이야, 하고 네게 충고하는 여자의 목소리.
너는 마리 이모를 겁간하지 않은 요제프 칼 삼촌을, 레몬캔디를 미워할 수 없었다. 다락에 누워 있는 창백한 시체. 죽음이 떠나간 순수한 삶의 찌꺼기. 더 이상 살아있지 않기에 더욱 생명과 가까운, 살아감의 부드러운 껍질이 벗겨진 생명의 덩어리. 흐느끼지도 호소하지도 노래하지도 않는, 다만 썩어갈 뿐인 순수하고 연약한 생명. 혹등고래의 붉은 자궁과 같이 오직 생명만을 품고 있는 살. 레몬캔디는 살아감을 멈춘, 죽어감조차도 멈춘, 생명의 낯을 떠올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더는 비참해지고 싶지 않아요. 그래도 난 내 얼굴보다 쥐가 빠져 죽은 저 오물이 더 더럽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검은 물 속에 얼굴을 담그고 죽고 싶지는 않아요. 이건 내가 품은 고독의 깊이가 저 자그맣고 징그러운 쥐보다도 얕기 때문인 건가요. 쥐처럼 자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쥐보다도 더 고독한 걸까요? 아, 난 심연의 깊이를 경쟁하는 걸인들처럼 비참해지고 싶지는 않아요. 그래도 알고 싶어요. 정말 쥐들이, 쥐들이 나보다 더 비참할까요? 쥐들이 나보다 더 추악할까요? 그렇다면 쥐들은 어째서 글을 쓰지 못하는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