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조난자의 물방울

생은 우주보다 깊은 환각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생은 입체가 아닌 평면이라는 걸, 모든 방향으로 끊임없이 증폭되고 복제되는 종이들이라는 걸 당신도 알고 있겠죠. 우주 비행사의 이야기를 더 해볼까요. 토성의 고리 끝자락을 보고 싶어 손가락을 깨물고 살끝에서 비어져나온 유치한 피를 삼키고 유치한 눈물을 흘리고 유치한 오줌을 질질거렸던 사내 이야기를 말이에요. 그가 바랐던 것이 초록색 사과였거나 붉은 흙이었다면 상황이 더 나았을까요? 아무도 그의 꿈을 몽상이라고 비웃지 않았을까요? 어쩌면 사람들은 그를 가여워했을지도 몰라요. 그의 이야기에 눈물을 흘리고 그를 위대한 시인으로 기억했을지도 몰라요. 그는 비극을 살았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우주에서 토성의 고리를 염원하는 우주비행사라니! 그 소원이 부끄러워 입 밖에 내지도 못했던 사람이라니! 그건 우스꽝스러운 이야기일 뿐이니 누구도 그를 위해 울어주지 않겠죠. 하지만 초록색 사과나 붉은 흙, 토성의 고리 모두 우주에서 정지해 있는, 정지한 상태로 이리저리 떠밀리며 표류하고 있는 사내에게는 모두 꿈만 같은 이야기인데, 영영 닿지 못할 신기루인데, 단지 토성의 고리를 원한다는 사실만으로 그렇게 유치한 인물이 되어버려야 한다니, 가엾지 않나요.

그래요. 그는 가엾지 않아요. 우리는 아무도 동정하지 않으니까. 그것만이 우리가 지닌 장점일 테니까.

빛조차 받지 못하고 어둠 속에 떠밀려가는 오물, 우주복 속에서 형체도 없이 으무러지며 빠져나가는 날숨을 떠올리면 사내는 단단한 땅 위에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언제든지 토성의 고리를, 그 무수한 이미지들을 검색하고 하염없이 바라볼 수 있는 지구에. 그가 지구에 있었더라면 토성의 고리도, 토성의 줄무늬도, 얼마든지 볼 수 있었겠죠. 그 대신 성공했던 우주선들이 보내온 토성의 울음소리도 얼마든지 들을 수 있었겠죠. 현미경에 눈을 대고 음지식물의 하얀 줄무늬를 바라보듯, 하얀 시체처럼 해 뜬 내내 그 자리에 멈추어 서 있는 샛별을 바라보듯 그렇게 토성의 고리를 바라볼 수 있었겠죠. 누구도 그를 방해할 수 없었을 거예요. 그는 언제나 그의 이미지로 돌아갈 수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실체를 보기 위해 향했던 검은 우주에서, 시꺼먼 암흑 속에서 그는 도리어 토성도 그 아름다운 고리도 잃어버리고 만 거예요. 세상에 그처럼 황홀한 먼지들이 또 있을까요. 무한처럼 광대한 유한 속에는 유리수를 닮은 무리수도 자연수를 닮은 허수도 분명 있을 텐데. 물론 무리수는 영원히 유리수가 될 수 없고 허수는 영원히 자연수가 될 수 없겠지만. 아마 우주에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이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것들이 하나쯤 더 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지요. 우리는 별 어려움 없이 세상에 존재하는 두 개의 토성에 대해 떠올릴 수 있으니까요. 어쩌면 단 두 개 뿐인 토성 중 나머지 한 개에는 고리가 없을지도 모르지만요. 그래도 그런 가능성마저 존재하는 공간이 우주이지 않겠어요. 우주는 우리가 발명한 최대의 공간이니까. 우주는 시간을 모두 공간으로 맞바꾼 공간이죠. 그곳에 우리의 시간은, 흘러가는 시간과 일상은 없지만, 우리의 내부에 존재하는 모든 유한수가 그곳에도 존재할 거라고, 그를 위한 자리는 충분할 거라고 우리는 믿고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어째서 그는 두 번째 토성 가까이 갈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지도 못했던 걸까요. 우주를 한없이 유영하다가 어느 틈에선가 그를 잡아끄는 토성의 인력에 이끌려 추락하면서, 토성의 고리에, 그 황홀한 먼지들에 눈이 먼 채로 생의 마지막 광경을, 죽음을 얼어버린 먼지들로, 살갗보다도 아린 실재로 장식한 채 제 속에서 남은 평생을 썩어갈 토성의 고리에 소스라쳐 울며 저를 어떤 연인보다도 간절하게 잡아끄는 강인한 중력에 떨어지며 토성의 모체에 얼굴을 박고 죽음으로 건너갈 수도 있었을 텐데요. 그의 몸에서 썩어가며 실재가 된 토성의 고리들과 함께, 낯선 중력과 함께 돌연히 나타난 시간에 갈기갈기 찢겨 먼지가 되었다면, 이제는 적나라해도 좋은 염원이 조금씩 조금씩 바람에 날려 상승했더라면, 그토록 뜨겁게 사랑했던 중력도 토성의 바닥도 잊고 다시 그의 염원으로 올라갔더라면, 차고 아름답게 얼어붙은 그의 얼굴과 머리칼과 목과 가슴팍, 긴 두 다리와 단단한 팔이 희게 얼어붙은 먼지가 되었다면, 그래서 그가 토성의 고리가 되었다면, 이처럼 눈부신 결말은 없었겠죠. 하지만 그는 이런 상상을 할 수 없었을 거예요. 그는 마음껏 원하지도 못했으니까. 지구를 생각할 때에면 물밀 듯이 밀려오는 중력에 대한 열망을, 추락에 대한 기원을, 고리들에 꿰뚫려 처참하고도 황홀한 죽음을 맞고 싶은 욕망을 차마 이미지로 떠올릴 수는 없었을 거예요.

그는 우주 속에서 언어를 잊어 갔어요. 그의 내부에는 어렴풋한 이미지만이 말 대신 떠오르곤 했죠. 그가 떠도는 우주를 닮아 흐릿하고 어두운 이미지들만이. 그가 배웠던 우주, 그가 열망했던 우주는 이렇게 어둡고 고즈넉하지 않았는데, 그가 꿈꿨던 우주에는 토성의 고리들이 제 살을 비비적대며 불렀던 절망적인 노래가 가득했는데, 그가 머무는 곳은 꼭 우주가 이닌 것 같았어요. 어째서 그의 우주는 그토록 비어 있었던 걸까요? 누군가는 우주의 텅 빈 공간을, 시간도 추억도 없이 다만 무한처럼 유한한 공간만을 떠올리며 몸을 떠는데, 그들을 위해 준비된 것만 같은 공간에 어째서 그가 있었던 걸까요. 그는 타인의 낯설고 메스꺼운 꿈 속에 버려진 것만 같았어요. 차라리 꿈이라도 꾸었더라면. 그가 그의 생을 부당하다고 여겼더라면, 그랬다면 그는 분노하며 꿈이라도 실컷 꿀 수 있었을까요. 제 죽음이 부당하다고 느끼는 영혼들이 호시탐탐 삶으로의 복귀를 노리는 것과 마찬가지로요. 삶과 너무나 밀접하게 지낸 영혼들이 투명한 살을 가지고 삶과 비비적거리며 사는 것처럼요. 삶이 짙게 배어든 영혼들을 종종 살아 있는 사람을 보듯 환각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걸 알고 있나요.

나도 귀신을 본 적이 있어요. 정확하게 말하면 듣고 있다고 해야겠지만. 투명한 살이나 꿈 같은 것, 머릿속에서 사내의 눈을 찌르고 귀를 멀게 하는 토성의 고리와 같은 것이 실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나요? 썩지 않으면 실재가 아닌가요? 그만큼 사람을 아프게 하고 간절하게 하는데, 목 안쪽을 갈기갈기 찢어놓는 것처럼 우리를 비참하게 앓도록 만드는데. 난 차라리 그가 토성의 고리를 꿈꾸었다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미쳐버린 그가 토성의 고리를 차지했더라면, 토성의 고리가 되는 환각을 살았더라면, 그럴 수 있었더라면 그의 삶은 더 절망적이었을 거예요. 그만큼 낭만적인 꿈을 살았겠죠. 난 그의 절망에 위안을 받았겠죠. 그의 절망을 본받고 싶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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