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이 매몰되어 뜨겁게 이글거리는 아지랑이 속에 현은 주저앉았다. 초록색 방수 페인트에서 한여름처럼 진진하고 역한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그 애는 네게 손짓하지 않았다. 너희는 늘 그랬다. 서로의 속에 깊이 파고들지 않았다. 서로를 해치는 법도 없었다. 침묵을 보듬어주는 그 애의 곁에서 너는 늘 편했지만 그뿐이었다. 그 애는 한 번도 너를 앓지 않았고 너를 미워한 적도 없으며, 네 곁에서 벅차한 적도 없었다. 조금 섭섭한 감정에 그 애의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현의 얼굴에 네 푸르스름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 애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반 고흐를 죽인 건 사회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어?
응. 우리가 같이 읽었던 극본에서 나온 말이잖아.
함께 봤던 영상도 기억하고 있어?
그래. 배우의 얼굴은 나오지 않았지만 그 사람 울고 있었지. 죽어가는 짐승처럼 울부짖으면서 소리쳤어. 그는 잘못하지 않았다고. 잘못한 건 사회였다고. 미친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고.
연아. 난 그걸 들으면서 울었어. 그게 극본을 쓴 작가의 육성이라고 생각했거든.
아니야. 그건 연극 실황 음성이었어. 그 남자, 꽤 유명한 배우인데.
응. 그건 연기였어. 있잖아. 난 네가 없을 때에도 계속 그 음성을 돌려 들었어. 찢어지는 소리가 너무 절절해서, 그게 나를 진심으로 만들어 주는 것 같았어. 난 그 사람이 그렇게 울다가 비명을 지르다가 그대로 죽어버렸다고 생각했어. 난 그의 유언을 듣고 있다고 믿었지. 그게 너무 무섭고 안타까워서 내가 울고 있을 때, 그때도 네가 말했던 걸 기억해? 그건 연기라고.
응.
그건 진심이 아니었을까? 계속 생각했어. 정말 반 고흐를 죽인 건 사회인지. 그의 광증이 모두 없던 건지. 연아.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반 고흐를 죽인 건 반 고흐야. 그의 광증은 진심이야. 난 그의 광증을, 죽음을 믿고 싶어.
응.
너도 믿어줄 수 있어?
현은 너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비에 젖은 수채화처럼 뭉그러진 얼굴에서 눈은 잘 보이지 않았다. 너는 다만 아래를, 그 애가 느껴지는 공간을 물끄러미 응시할 뿐이었다.
비슷한 죽음을 목격한 사람이 있대. 그 여자도 사람이 옥상에서 떨어지는 걸 봤대. 그녀는 말리지 않았대. 후회하지도 않는 것 같았어. 그녀는 그게 그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었던 몇 안되는 가능성이었다고 했어. 꼭 삶이 아니어도 되는 거야. 꼭 삶일 필요는 없는 거야. 난 반 고흐의 죽음을 믿어.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나는 네 죽음을 믿어줄 수 없을 거야.
응. 그래도 난 네 죽음을 믿기로 했어. 네 광증도. 넌 치료될 수 없었을 거야.
너도 낫지 않을 거야. 그러니 죽음을 경멸하지 못한다고 해서 자책할 필요는 없어. 삶과 죽음은 이어져 있지 않으니까. 삶이 갈망하는 죽음과 죽음이 경멸하는 삶은 전혀 다른 피부를 지니고 있어.
너는 햇빛을 찬란하게 반사시키는 격자들 사이로 몸을 내던지는 희뿌연 아지랑이를 보았다. 삶을 경멸하는 이들만큼 죽음을 사랑할 수 없었고, 죽음을 증오하는 이들만큼 삶을 예찬할 수 없었지만, 네게는 언제나 너의 몸만큼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 미워하지도 사랑하지도 않는 공간에서 너는 살아가고 그와 동시에 죽어간다. 햇빛이 할퀴어댄 뒷목이 뜨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