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장 속에서 여자가 중얼거렸다.
당신은 나를 경멸하고 있죠. 이제는 편지도 보내지 않잖아요.
아니야.
너는 여자를 달래듯 속삭였다. 네가 맡은 역할이 불만족스러웠지만 어찌할 수 없었다. 네게도 역할이 주어졌다는 사실만으로도 안도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난 너를 경멸하지 않아. 알잖아. 내게 남은 건 어설픈 문장들 뿐인걸. 소리도 없이 줄줄 흐르는 말들.
나를 경멸하는 게 아니라면 내 행동을 경멸하고 있겠죠.
그것도 틀렸어. 난 네가 대단하다고 생각해. 넌 나를 위해서 사람들을 죽이고 있는 거지?
당신을 위한 건 아니에요. 그저 모든 사람들이 조금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뿐이죠.
그래. 난 그런 일에 관심이 없어. 타인이 조금 더 빨리 혹은 느리게 사라지는 게 그리 싫지 않아. 좋지도 않고.
당신은 조금 게으르군요.
게으르다고?
그게 아니면 거짓말쟁이겠지. 내가 남겨둔 시신들을 쫓아 돌아다닌 건 무엇 때문이에요?
죽음을 동경했기 때문이 아닐까. 네가 삶을 동경하듯이.
거짓말. 당신은 한 번도 죽으려 한 적이 없어요. 단단한 매듭을 매는 법도 모르면서.
응. 나는 내가 영원히 죽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삶이 영원할 거라고 예감하고 있어. 새벽이 낮처럼 길던 날에도, 하루가 계절처럼 길던 날에도 나는 죽지 않았는걸. 어쩌면 죽음은 특권이 아닐까.
자살이 아닌 죽음도? 그건 평범한 일이 아닌가요.
평범하지만 필연적인 일은 아닐지도 몰라. 내가 갖지 못한 숱한 만남처럼, 내게 속하지 않은 언어와 사건과 모험처럼.
이상하군. 난 이미 죽었는걸. 잠들지도 않고 꿈도 꾸지 않는 걸.
미안해. 네가 없는 곳에서 나는 잠들고 있어. 다시, 잠들며 꿈꾸고 있어.
너는 여자의 얼굴 반면만을 드러내 보이는 옷장 문 사이로 손을 집어넣었다. 구석자리의 냄새가 났다. 문은 이상한 웃음소리를 내며 삐걱거렸다. 너는 무언가 뭉클한 것이 손에 닿는 느낌을 받았다. 순간 솜털처럼 가늘고 기다란 촉수들이 네 손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영상이 네 눈앞을 스쳐지나갔다. 관절을 뒤틀며 꿀럭거리는 살점과 그에 따라 융기하고 꺼져드는 신경다발들, 경계도 용도도 알 수 없이 뒤얽힌 털과 살, 당장이라도 출혈할 것만 같은. 그러나 여자는 너를 위협하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듯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나갔을 뿐이다.
난 잠들지 않을 거예요. 이미 죽었으니까. 죽음은 당신 생각처럼 그렇게 아름답진 않아요. 물론 다른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리 비참한 일도 아니지만. 영원한 심해도, 시간도, 공간도, 몸과 분리된 마음도, 마음과 분리된 몸도 죽음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면 어디에 있는데? 영원과 처음, 끝과 하루는?
꿈에 있죠. 당신이 다시 꾸기 시작한 꿈, 나는 꾸지 않는 꿈에요.
목마르지 않아? 물이라도 가져다 줄까?
여자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머리는 짙푸른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너는 그녀의 움직임을 알 수 있었다. 망자의 입술처럼 열린 문틈에서 새어나오는 것은 그늘뿐만이 아니었다. 이상한 냄새가 났다. 여자는 네 물음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난 오래전부터 혼자 숨바꼭질 놀이를 하고 있었어요. 누군가 나를 찾아내주길 바랐는데 아무도 오질 않았죠.
내가 너를 찾았잖아.
소용없어요. 이미 나는 죽었는걸.
사실은 나도 숨바꼭질을 좋아해.
아무도 당신을 찾아주지 않아도?
아니. 내가 숨바꼭질을 좋아하는 건 누군가 나를 찾아내주길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야. 언젠가 들키고 말 거라고 믿기 때문이야.
거짓말.
거짓말. 그래. 난 너와 대화하는 게 좋아. 얼마든지 거짓말을 할 수 있으니까. 알잖아. 내겐 늘 실패뿐이었고 아무도 내 말을 귀 기울여 들어주지 않았어. 내가 골몰했던 타인들은 나보다 먼저 죽은 자살자들 뿐이었지. 여직 살아 있는 자들은 내가 닿지 못할 먼 곳에서 내가 감각할 수 없는 삶을 만끽하고 있어. 모든 것을 내 놓을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아무도 나를 원하지 않았지. 하물며 나의 절망을 바라는 사람도 없었어.
누구도 우리를 기다리지 않았으니까.
누구도 우리를 찾지 않았으니까.
알겠지만, 당신을 위로할 생각은 없어요. 나와 당신은 그림자처럼 닮았고, 내 죽음에는 당신을 만족시킬만한 절망도 희망도 없을 테니.
울룩불룩한 신경들이 네 손목을 간지럽혔다. 여자의 손은 심해에 사는 식물처럼 가늘고 많았다. 너는 얇게 휘청거리는 손가락들이 자리를 갖지 못한 뿌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외로워. 외로워. 끔찍하게 외로워서 더 이상 고독이 두렵지 않을 만큼. 여러 면들이 복잡하게 얽힌 방 안에서 너는 생을 마칠 것이다. 끝도 영원도 없는 생이 계속해서 이어질 것이다. 이미 몇 개의 계절을 넘긴 그녀가 네 손목을 어루만지고 있었지만 가느다란 손가락들은 따뜻하지 않았다.
그녀는 너를 위로하지 않았고 너 또한 그녀를 끌어안지 않았다. 네가 그녀를 가엾어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녀도 너를 동정하지 않겠지. 네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녀도 너를 미워하지 않겠지.
죽음은 그렇게 특별하지 않아요. 편지에도 쓴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내가 죽은 병원에서 꼭 병사한 사람들만 있었던 건 아니에요. 그 치료소에는 다들 같은 전염병을 앓는 사람들만 모여오긴 했지만. 죽음의 이유가 불치병인 것만은 아니죠. 우리에겐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이 남지 않았어요. 물론 처음에는 그 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도 그곳에 있었을테죠. 그렇지만 같은 병을 앓고 같은 공기를 마시고 입을 맞추고 체액을 나누는 사이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전염시킬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리고 말았어요. 물론 내게 입맞추는 사람은 없었지만, 같은 빛깔과 위치의 면들 사이에서 빠져나갈 틈이 있었겠어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사소한 일들, 시간의 법칙에 위배되지 않을법한 일들 뿐이었어요. 누군가는 글을 썼고 누군가는 작곡을 했고 누군가는 노래를 불렀죠. 무엇도 남길 수 없다고 믿은 사람들, 우리처럼 패배가 익숙한 사람들은 그런 일이 자신에게는 무용하다고 생각했어요. 아무리 글을 써도, 힘이 빠진 팔을 키보드 위에 놓고 무거운 손가락을 꼼지락거려도, 아무도 우리 같은 사람의 글을 읽어주지는 않겠죠. 우리와 같은 어휘를 공유하고 우리의 병을 앓아 줄리는 없겠죠. 그건 아주 오래 전부터 직감하고 있던 사실이잖아요. 타인의 죽음을 선택한 사람들은 옆 자리 병상에서 숨을 몰아쉬며 죽어가던 노란 얼굴에 두툼한 배개를 짓눌렀고 자신의 죽음을 선택한 사람들은 고풍스럽고 커다란 종을 떠올리며 병상에서 추락했어요. 일 미터도 되지 않는 높이의 추락만으로 그들은 죽었어요. 작은 충격에도 산산조각나는 아름다운 유리구슬처럼. 난 끝까지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했고 결국 아무도 죽이지 못한 채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채 여기까지 왔어요.
편지를 썼잖아.
아무도 읽지 않았잖아요. 아무에게도 읽힐 수 없잖아요. 이젠 나조차 읽지 못하는데. 당신은 글을 쓰지 말아요.
그럴 순 없어. 나는 글을 모르는 시인이니까. 비뚤고 금이 간 문장만으로 대화를 나누며 살아야 한다고 말한 시인도 있잖아.
그런 말은 처음 들어보는데.
그럴 리가. 그건 네가 편지에서 흉내 낸 말이잖아.
그런가요. 아마 거짓말이겠지만 반박할 수는 없겠죠. 내 글을 읽어본 적이 없으니까.
읽었더라도 기억하지 못할 거야.
여자의 신경다발은 계속해서 너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너는 그녀와 입을 맞추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아마 그녀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죽은 자는 환상도 환각도 앓을 수 없으니까.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는 어디에서도 들려오지 않았다. 거미줄에 맺힌 이슬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지는 것일까. 어째서 너는 사라지는 것들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그건 네 앞에 실재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혹은, 너만이 실재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