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연성도 핍진성도 상관없다. 지금껏 썼던 글, 네 멋대로 짜내려갔던 어휘들은-너는 날실과 씨실을 배열하는 기본적인 상식도 모르지.- 없는 것이니까. 발자국이 곰보처럼 패인 골목 바닥을 밟으면서 했던 생각들처럼. 혹시 너는 비둘기가 아니었을까, 그렇지 않으면 네 머리칼을 스치고 날아가는 시원하고 더러운 바람이 이렇게 그리울 수는 없지 않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아도 네 어깨는 뭉툭한 뼈와 살 뿐이었던 것처럼. 덜컹거리면서 앞으로 돌진하는 버스에서 넘어졌을 때 너를 일별하지도 않는 사람들을 돌아보았을 때 혹시 오래전에 이미 끝난 것이 아닌지, 끝이 지난 지점을 억지로 살고 있는 것인지, 사실 너는 삶을 예찬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지. 현은 끝내 네게 입을 맞추지 않았다. 그 애는 그럴 수가 없었던 것이다. 네 환상 속에서도. 역겨운 녹색 애액은 모두 어디로 사라졌을까. 그건
사라져버린 생각일 뿐이야. 찌꺼기도 남기지 않고 날아가버린.
너는 밤마다 목을 매는 방법에 대하여 공부했다. 부드럽고 튼튼한 천으로 매듭을 짓고 경동맥을 막으면 끝이라는 것, 정교한 매듭이 반드시 튼튼하지는 않다는 것, 의식을 잃고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은 그리 고통스럽지 않다는 것, 자살을 마친 시신은 생각보다 깨끗하다는 것-마치 살아 있는 인형처럼-을 알게 되었다. 다만, 실패로 돌아간 모든 불완전한 자살들은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귀신이 되지 못한 마음들은 어떻게 죽어가는 것일까.
서로에게 안기는 두 명의 죄수들, 나 없이 당신만을 살아가는 순간을 너는 끝내 알지 못하고 살아가겠지. 끝도 없이 끝만을 기다리는 사람들. 엘리베이터 앞에서 서성거리는 사람들은 나날이 늘어나고 있다. 초인종 앞에 앉아 있던 아이가 창문을 가리켰다.
여기엔 창문이 없는데.
그렇지 않아요. 봐요.
복도의 끝, 엘리베이터의 앞쪽에는 첫 번째 집이 있었고, 그 옆면에는 작은 벽이 있었다. 어디로도 향하지 않는 막힌 벽뿐인 공간이었다. 문도 출구도 없는 곳이었기에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는 신경을 써 본 적이 없었다. 아이는 네 손목을 잡고 엘리베이터 옆쪽, 구석 자리로 끌고 갔다. 그곳에는 아이의 키만큼 커다란 창문이 있었다. 격자 모양의 안전장치도, 유리도 없이 뻥 뚫려 있는 창이었다. 창 바닥에 앉아 있던 두 마리의 비둘기가 너희를 피해 찢어진 하늘로 날아갔다. 그 너머에서는 소년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나체의 어깻죽지에는 비둘기의 것만한 날개가 달려 있었다. 소년은 오른쪽 어깨를 마구잡이로 휘젓더니 비명도 없이 창의 프레임 아래로 사라졌다.
봤어요?
아이는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말끔한 하늘을 가리키는 대신 말간 눈으로 너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응. 조금 놀랐을 뿐이야.
괜찮아요. 저건 비둘기니까.
비둘기?
비둘기들은 잘 날지 못하잖아요.
그건 사람도 마찬가지잖아.
그래요. 그냥, 내 말은, 놀랄 필요는 없다는 말이었어요. 도시에서 비둘기들만큼 많이 죽는 짐승들도 없을 테니까.
과연, 아이의 말처럼 사내의 추락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닌 듯 했다. 행인들은 사내가 떨어지는 소리에 잠시 눈을 찡그리고 자그마한 비명을 지르다가 곧 고개를 돌리고 시체를 지나쳐 갔다. 어린아이들 몇이 무리를 지어 사내의 시신 옆에 다가가 나뭇가지로 뭉그러진 신체를 뒤적거릴 뿐이었다.
자, 서둘러요.
아이는 축축해진 네 손을 붙들고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너는 층수를 셀 겨를도 없이 멍청하게 아이의 날랜 발을 따라 움직일 뿐이었다. 아이는 숨이 찬 기색도 없이 녹슨 철문 앞에서 지저분한 손잡이를 가리켰다.
빨리요.
너는 무엇을 생각해볼 여력도 없이 손잡이를 오른쪽 방향으로 돌렸다. 안쪽으로 문이 열렸다. 초록색 방수용 페인트가 칠해진 옥상에는 아파트 정원쪽을 내려다보고 있는 소년뿐이었다. 너를 데려다준 아이는 어느샌가 사라졌다. 현이 너를 돌아보며 웃었다.
너도 봤어?
응.
현은 옥상 정원의 한쪽에 있던 벤치에 앉았다. 너도 그의 옆에 앉았다. 무릎 높이의 단만 있을 뿐, 흔한 안전 장치도 없이 트여 있던 옥상의 전경이 장미넝쿨 사이로 사라졌다. 장미넝쿨은 싸구려 철 구조물에 매듭져 얽혀 있었다. 이상한 냄새가 났다. 여린 이파리가 눈가를 스쳤다. 뭉툭한 가시가 입술을 찔렀다. 짙은 초록 빛깔의 넝쿨을 들어올리자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짜인 철창이 보였다. 병원 옥상이었다. 현이 장미 이파리처럼 푸른 입술을 달싹거렸다.
내가 잘못한 걸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잘못이라고 해도 그게 잘못된 일일까? 잘못된 일이라고 해도, 그게 잘못일까?
그 애는 몰랐던 것 같아. 그러니까.
네가 죽었다는 걸?
응. 그것도 병을 앓다 죽었다는 걸.
물에 빠졌다는 건?
그건 아는 것 같았어. 그것만 아는 것 같았어. 그 애는 나를 살리려고 입을 맞추었는데, 그래서 숨을 불어넣으려고 했는데,
현은 횡설수설하면서 말을 더듬거렸다. 누군가 억지로 밀어넣은 삶을 게걸스럽게 토해내는 것처럼 부르르 떨리는 푸른 입술이 낯설었다.
다 거짓말이라고 말했어. 난 그 배에 탄 적도 없다고. 그날 나는 너무 아팠고 결국 아무데도 가지 못했다고. 네 얘기를 했어.
왜?
더는 숨길 수 없었어. 그 애는 갑자기 온몸을 떨면서 기침을 하기 시작했어. 내 침이 닿았던 입술에는 노란 반점이 일어나고 있었어. 그제서야 그 애도 병에 걸렸다는 걸 알았어. 그 애는 귀를 막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어. 이상한 음악이 들린다고. 같은 목소리가 계속해서 알 수 없는 언어로 울고 있다고. 그 애에게 말해 주었어. 그건 누구의 언어도 아니라고. 그건 그냥 하나의 음률일 뿐이라고. 어떤 의미도 지시체도 없는 음성일 뿐이라고. 그 애는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어. 감염되어버렸다는 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