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과 레몬캔디의 물방울

변명 같겠지만 다시 한번 말할게요. 내 증언이 뒤죽박죽인 건 당신도 이해해 주어야 해요. 혼란스러운 건 당신과 나의 존재도 마찬가지이니까. 우린 결국 아무것도 겪은 적이 없고 따라서 경험에 따라 기억을 반추해내는 일은 불가능하니까. 내 증언은 내 내면의 바깥에서 벌어진, 어떻게 보면 나와는 전혀 무관한 세계에 대한 이야기니까. 난 내 어린 시절을, 잃어버린 어린시절을, 어쩌면 존재한 적조차 없을지도 모르는 내 어린시절을 상상하는 것이지 그걸 정합한 역사의 틀에 끼워맞추어 객관적으로 기록하려는 게 아니니까. 내 기억작업은 어떻게 보면 모두 상상에 불과할지도 모르니까. 그건 당신의 목소리도 마찬가지잖아요.

넌 그의 모순을 지적하는 대신 침묵으로 그의 갈라진 목소리를 보듬어 주었다. 언제부터 너희는 너희의 기억조차 확신할 수 없게 된 걸까. 언제부터 너희는 상상조차 검열하게 된 걸까. 모든 일은 깊은 무덤 구덩이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아무도 심연에서 벌어진 사건들에 대해 확답할 수 없다. 유년을 경험한 사람은, 첫 순간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므로. 사실 막 뜬 눈은 반쯤 멀어 있어서 아무것도 제대로 볼 수 없었으므로. 언어에 먼 귀는 무수한 소음만을 들을 뿐 단 하나의 단어도 제대로 인지할 수 없었으므로. 흙 속에서 보냈던 유년에 대해 정확하게 진술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흙 속에서 무언가를 보고 듣고, 느끼는 경험을 했던 사람 역시 없을 것이므로. 마침내 흙을 뚫고 바깥으로 나왔을 때, 너희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귓속에서 끊임없이 울리는 나비의 노랫소리만이 너희의 탄생을 반겼을 것이다. 네 말을 들은 레몬캔디는 진정이 되었는지 조금 안심한 듯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래요. 우리는 살면서 아무것도 경험하지 않았어요. 당신도 그걸 알고 있다니 다행이에요. 난 내 말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많은 것을 보고 느끼며 사랑하는 사람들을 설득할 자신이 없거든요. 그들과 내 언어는 같은 대상을 지칭하지 않으니까요. 그들이 사랑하는 고독과 내가 앓는 고독은 전혀 다른 심연이니까요. 그들의 산과 물이 지칭하는 세부들을 나는 전혀 알지 못하니까. 난 그들을 울릴 수도 없어요. 그래도 당신은 내 혼잣말을 들어주는군요. 그래요.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오직 혼잣말뿐이죠. 그래도 당신은 내 말을 모두 기록해주겠다고 약속해요. 당신의 기억은 내 기억과 마찬가지로 너무나 부드럽고 유동적인 물질이라 도저히 믿을 수가 없으니까.

그래. 네게 들은 모든 말들을 다 쓸거야. 네가 상상해낸 모든 기억을 내가 써 줄게.

다행이에요. 난 요즘 많은 어휘들을 잊어버리고 있어요. 당신도 알다시피 자주 말을 더듬고. 심한 우울증에 걸리면 어휘력이 떨어진다고 하던데 나도 그런 경우인지 모르죠. 너무 잔혹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나요? 고독에 물들어 안쪽으로 파고들어간 사람들에게 남는 목소리는 혼잣말밖에 없을 텐데, 그 혼잣말마저 날이 갈수록 빈약하고 어렴풋해진다니 말이에요. 난 당신이 도와주지 않으면 제대로 말을 이어나갈 수조차 없었을 거예요. 물론 당신이 내 증언을 적을 때에는 내가 더듬거렸던 부분들을 다 삭제해주겠죠. 그것도 약속해 줘요.

그래. 그런 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이건 너만의 기억이 아니니까. 알겠어? 네 기억을 내가 받아쓰는 순간, 넌 내게 기억을 흘려보낸 거야. 내게 전승한 기억은 이제 하나의 이야기가 되는 거야. 물론 유령들끼리 소곤댄 이야기를 읽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적어도 우리 둘만의 결속은 이루어진 셈이지. 이제 우리에게 남은 일은 우리가 흘려적은 이 이야기를, 이 전설을 삶의 바깥에 살아있는 누군가가 발견해 다른 이에게 들려주는 일뿐이야. 그럼 우리의 이야기는 비로소 이승에 남게 되겠지.

하지만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그러니까 가슴 속에 무덤을 파놓지 않은 사람이라면, 세상에 자리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우리의 이야기에 매혹될 리 없어요.

그래도 넌 이야기할 수밖에 없어. 심연을 채우는 깊은 호수가 침묵뿐만이 아니라는 걸 너는 알고 있으니까. 네가 구축한 이야기들, 네 유년의 상상이 너와 나를 매개하는 유일한 연일 테니까. 우리들의 거미줄은 모두 그러한 상상의 결속으로 이루어졌으니까. 계속 이야기를 들려줘. 난 더 정교하고 아름다운 이야기의 베일을 자아내고 싶어. 살아 있는 자들의 죽음을 기록하고 싶어.

당신의 증언실에서 몇 명이 더 죽었나요?

괜찮아. 그들은 모두 제 자리로 돌아갔어.

그들에게도 자리가 있었다고요?

우리의 자리는 흙뿐이지. 너도 알고 있잖아.

먼지, 또는 허공에 버려진 숱한 소음들에 대해서 너는 굳이 부연하지 않는다. 체계를, 문법을, 화자를 잃고 멸종되어가는 언어들에 대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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