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촌은 그녀를 벌하고 싶지도, 구원하고 싶지도 않았다고 했다. 다만 유령처럼 비열하고 고독한 소년은 그녀의 고백이, 이 괴상한 신도의 고백이 흥미로웠기에 계속 들을 수밖에 없었다고 이야기했다. 그러고서는 무척이나 기이한 첨언을 덧붙였다. 고해성사실에 들어가는 죄인들이 바랄 수 있는 것은 다만 들어주는 일뿐이라고. 그들은 그들의 죄가 사해지는 것도, 더해지는 것도 바라서는 안 되며 오직 그들의 죄에 대한 충실한 이야기꾼이 되는 것밖에 고해성사실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그곳에서는 신 역시 충실한 청자가 되어줄지 모르므로, 우리 모두가 이야기꾼을 흠모하듯 신 또한 조용한 관객으로서의 예의를 잊고 이야기꾼의 현실적이고 생생한 이야기 속에 난입하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그러한 일은 물론 무척이나 드물지만, 연극문화에 익숙한 우리가 연극 한중간에 괴물에게 살해당하는 공주를 구하러 난입하는 상상은 할지언정 그렇게 하지 않는 것처럼, 피터팬에게 납치되는 웬디를 구하기 위해 그녀에게 네버랜드의 흉측한 비밀을 미리 고발하여 연극을 망쳐놓지 않는 것처럼, 신은 우리의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세계를 다만 조용히 관람할 뿐이고, 성숙한 관객의 태도로 모든 비밀들이 풀어지는 순간을 즐길 테지만 그럼에도 그가 개입할 수밖에 없는 사건이, 그의 본분을 잊고 아이처럼 무례한 태도로 이야기 속 무대에 뛰어드는 순간이 있을지도 모른다며, 우리가 바랄 수 있는 것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아도 좋은 그 실낱같은 가능성 밖에는 없다고, 신이 성숙한 관객이 되기 전에 종종 범했던 그 우스꽝스러운 난입을 우리는 기적이라고 부르는 것이라고 삼촌은 말했다. 하지만 개념에 따라 신이 전능한 존재라면 그의 참을성 역시 전능할 것이고, 신이 성장하는 존재라고 하더라도 연극 문화와 이야기 문화의 발전에 따라 그의 청자로서의 재능도 이미 무르익은 상태일 것이기 분명하기에 그런 헛된 기대는 접어두는 것이 현명하다고, 그럼에도 우리가 신의 기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은 이야기를 하는 것, 보다 흥미진진하고 매혹적인 이야기를 해서 신을 유혹하는 것뿐이라고, 그것은 불가능하지만 유일한 가능성임에 틀림없다고 삼촌은 덧붙였다.
당신은 그들을 위해 기도한 적이 있나요?
아니요. 신부님. 짐승은 사람을 위해 기도하지 않아요.
그들도 당신과 같은 짐승이었습니다.
아니요. 신부님. 그들은 짐승이 아닌 괴물이었어요. 자연으로부터 사랑받는 오염된 자연이었어요. 그들은 그들의 존재를 반자연이라는 기묘한 말로 부르더군요. 그들은 신들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적어도 지금 그들의 앞에 가녀린 무릎을 꿇고 방금 죽은 룸메이트의 얼굴 위에 오물을 지리고 있는 그들보다는 훨씬 아끼는 것이 틀림없다고 이야기했죠. 난 도저히 그들의 말을 의심할 수 없었어요. 그렇지 않나요, 신부님? 신은 우리를 돼지보다, 젖소보다 훨씬 사랑하셨기에 우리에게 이런 권능을, 우리를 위해 그들을 희생시키고 신을 위해 그들의 고기를 바칠 사제의 역할을 내어 주신 게 아닌가요? 신부님. 전 한번도 살려달라고 애걸하지 않았어요. 삶을 구걸하는 몸짓들로 제 스스로를 비천하게 만들면서도 단 한번도 당신께 삶을 호소하지는 않았어요.
잘하셨습니다.
신부님. 당신은 그다지 침묵하지 않는군요. 당신은 마치 당장이라도 당신의 죄를 털어놓을 것 같아요. 날 침묵시키고 당신의 목소리로 이 어둡고 비좁은 방을 가득 채우려는 속셈이 아닌가요?
아니요. 당신이 원한다면 언제라도 침묵하죠. 하지만 당신이 원하는 만큼 침묵할 수는 없을 겁니다. 난 당신만큼이나 가쁘게 숨을 쉬고 신께서 선물하신 숨으로 말미암아 당신의 죄를 더 이해하고 당신을 위해 기도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럴 필요는 없어요. 신부님.
어째서요? 당신이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신께 기도드리는 일 뿐입니다. 신께서 관여하지 않으신다면 당신은 영원히 당신의 지옥에서, 그 비참하고 역겨운 성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겁니다.
신부님. 제가 원하는 게 무엇이었는지, 제가 당신께 기도드리던 게 무엇이었는지 이젠 어렴풋이 알 것 같아요.
잘 됐군요.
전 짐승의 몸을 벗어던지듯 사람의 피부를 벗고 싶어요. 순간순간의 기억들을 고통을 미래를 기대를 하나의 줄기로 억지로 꿰어 묶어버리는 이 매듭을, 우리가 자의식이라고 부르는 자각의 인장을 녹여버리고 싶어요. 난 더이상 기억하고 싶지 않아요. 아직도 그곳에 있는 것 같아요. 그곳에서 소녀들의 목을 조르고 그들에게 오줌을 먹이고 살을 찢어놓으며 흐느끼고 이제는 덜 흐느끼게 되고 그러면서도 그들의 붉은 살점에서 안식을 찾으며 그들의 고통에 위로를 받고 있는 것 같아요. 그 애들이 밤마다 내게 호소하던 소리가 들려와요. 이제 죽여 달라고. 아무도 몰래 죽여 달라고. 그럼 너도 죽여줄게. 우리 함께 이곳에서 나가자. 하고 마리가 속삭이던 소리. 아, 난 그 애의 이름을 기억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리고 깨닫고 싶지 않았는데. 내가 그 애의 가녀린 목을 졸라 그 애의 숨을 끊어 놓으면, 허공을 조심스럽게 적시던 달콤한 숨을 억지로 멈추어버리면 그 애는 나를 죽여줄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그곳에서 서로의 이름을 잊고 서로의 추억을 잊고 서로의 얼굴을 잊고 서로의 고통을 잊고 서로의 언어를 잊기로 했어요. 난 많은 것들을 잊고 짐승처럼 살았지만 결국 아무것도 잊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게다가 난 그 악몽을 지금, 사람의 몸으로, 신께 바친 정결한 정신과 육체로 감당해야 하는 거예요. 난 매일 기도하면서 그 참혹한 진상을 명료하게 깨어 있는 이성과 감성으로 견뎌내고 있는 거예요. 신부님. 날 다시 짐승으로 만들어줄 수 있겠어요? 그럼 다시 그때처럼, 후회도 기대도 수치도 없던 그때처럼 진흙보다도 처참한 오물 속에서 기뻐하는 체하며 뒹굴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무도 당신을 괴롭히고 있지 않아요.
아무도 나를 저주하지 않죠. 신부님. 당신조차도요. 차라리 내게 죄가 있었더라면. 내가 그들의 추악한 본성을 자극하여 그들에게서 학대를 당하던 것이었다면, 내 고통에 어떠한 숭고한 목적과 이상이, 내 죽음으로 인하여 펼쳐질 낙원의 청사진이 있었더라면.
그런 것은 없습니다. 신은 희생도 참회도 요구하지 않아요. 그분이 요구하시는 것은 다만.
다만?
다만 이야기뿐이죠. 하고 삼촌은 대답했다. 여자의 참혹한 고백을 견디지 못하고 그녀의 죄를 감당할 수 없어 빠져나간 고해신부의 빈자리를 바라보며 삼촌은 잔뜩 낮춘 목소리로, 그래서 오히려 아이의 목소리라기보다는 노인의 것처럼 들리는 음색으로 대답했다. 신이 요구하는 것은 이야기뿐이에요. 그 속에 난입하지 않는 것이 그분의 규칙이고 그것을 망쳐놓지 않는 것이 그분의 존엄이죠.
신부님. 확실히 요즈음 저는 그 악몽 같던 시절에 비하면 훨씬 편안한 삶을, 까마득히 잊고 지냈던 사치를 누리고 있답니다. 하지만 그저 일상일 뿐이에요. 겨우 이것 때문에, 이 기도 때문에, 저는 이곳에 돌아온 걸까요? 날마다 팅팅 부은 다리를 주물러가며 생을 연장하던 소녀들을 그곳에 남겨둔 채, 누구도 제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아요. 제게는 친구조차 남지 않았으니까요. 지금 저는 거리에서 지내고 있답니다. 아무도 제 오물에 간섭하지 않고 저도 더 이상 그 누구의 오물에도 간섭하지 않죠. 제 육체는 길거리에 홀로 머물러 있어요. 가끔은 그곳에 소란이 지나가기도 하고 침묵이 지나가기도 하며 빛이 지나가기도, 어둠이 지나가기도 한답니다. 사사로운 행운과 불운 역시 제가 앉은 자리를 스쳐지나가지만 그곳에서의 악몽을 잊게 할만큼 참혹하거나 찬란한 무언가는 없어요. 전 참을 수 없는 감정에 이끌려 간혹 헛구역질을 하곤 했는데 그 때에도 제 등을 쓸어 주는 사람은 없었답니다.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죠. 저 역시 그 지옥에서 누구의 등도 어루만져주지 않았으니까. 내가 연약한 등을 쓰다듬었다면 그 애들의 향기로운 살갗을 보듬고 지분거렸다면 이곳으로, 이 투명하고 아늑한, 어디에나 숨 쉬는 자들의 숨들이 널려 있는, 누구도 내 숨을 강탈하지도 강제하지도 않는, 그래서 더 숨이 막히는 이 일상으로 돌아올 수는 없었을 테니까요. 한 번은 참지 못하고 거리에서 떠드는 미치광이처럼 고해를 한 적이 있어요. 제 말을 진심으로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죠. 물론 아무도 듣지 않았다는 건 아니에요. 생각보다 청중은 훨씬 많았거든요. 거의 서른 가까이 되는 사람들이 나를 한 가운데 두고 인파의 원을 만들어 둥글게 감싸고 내 비명소리를 들었죠. 내 발치에 돈을 내려놓고 사라진 사람들도 있었어요. 처음에는 광기에 어린 걸인의 몸에 들러붙은 온갖 구역질나는 얼룩들을 피하듯 내가 내지르는 비명을 피해갔던 사람들은 내 비명이 지시하는 어휘들의 익숙한 표현 방식, 배열 방식을 통해 사드 후작의 유명한 작품을 기억해냈죠. 그들은 제가 사드 후작의 작품을 모티프로 즉흥적인 퍼포먼스라도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아무도 내 즉흥극에 끼어들지 않았어요. 신부님. 당신 말씀대로라면 신도 그 자리에 있었을까요?
그건 확실히 대답해드릴 수 있어요. 신은 어디에나 있고 또 어디에도 있지 않으니까요.
여자는 흐느끼듯 웃었다. 삼촌은 여자의 짐승 같은 신음소리가 고해성사실에서 울려퍼지는 소년의 음성을 뒤덮는 틈을 타 제 궁금증을 해결하려 했다.
그런데 당신은 그 살인마들로부터 어떻게 빠져나왔습니까? 당신이 그들을 언제든지 고발할 수 있다는 걸 알았을 텐데.
아니요. 신부님. 당신은 또 착각하고 계시는군요. 그들은 내 안에서 반짝이고 있는 완성된 형태를 본 것이 아니에요. 그들에게는 누군가의 속에 잠재태로 남아 있는 무언가를 끄집어내려는 예술가적인 욕망 같은 것은 전혀 없어요. 그들은 살인으로 조각을 하려는 게 아니에요. 그들은 살인 그 자체를 위해 죽이는 것뿐이죠. 시체는 그들 활동의 부산물일 뿐 사실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거죠. 그러니 그들에게 있어 모든 과정들을 겪어낸 제가 살아 걸어간들 그래서 당신께 와서 기도를 드리고 죄를 고백한들 아무런 상관이 없는 거죠. 시체가 달빛을 받고 게슴츠레한 흰 눈동자를 달을 향해 고정시키며 걸어나간다고 해도 그들은 조금도 관심이 없을 거예요. 그러니까 그들의 살인은 퍼포먼스나 섹스 자체에 가까운 거죠. 아이를 낳기 위해 섹스에 몰입하는 강간범들이 얼마나 되겠어요? 그들에게 중요한 건 기벽에 몰입하고 닿을 수 없는 욕망을 향해 헛손질하며 나아가고 있다는, 그래서 무한의 극한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착각뿐이죠.
하지만 당신은 언제든지 그들의 죄를 고발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들도 그 사실을 안다면 쾌락의 중턱에서 끌려나올 수밖엔 없을 걸요.
여자는 기이할 정도로 숨을 몰아쉬며, 그러니까 낄낄거리며 대답했다. 신부님은 그들을 몰라요. 그들은 한 번도 연행된 적이 없거든요. 법은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성과 같은 수도원에 사는 당신도 모르신다니. 난 법에 대해 잘 알고 있어요. 그곳에서의 만찬은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들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내적인 질서 속에서 열리는데 그건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불규칙적으로 보일 정도여서 감히 그것의 세계에 끼어들 엄두조차 못 내게 하죠. 지금 내가 그 괴물들을 고발한다면 그들이, 그리고 그들과 함께 처녀의 피를 들이킨 자들이 언제쯤 구속되어 관청의 처벌을 받을지 당신은 장담할 수 있나요? 일이 하루만에 진척될 거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닐 거예요. 그리고 그들이 어떠한 통지조차 받지 않고 끌려가리라고 생각하시지도 않을 테고요.
관청의 일이 그렇게 허술할까요?
신부님, 이제보니 당신은 어린아이처럼 순진한 구석이 있는데 혹시 정말 어린아이는 아닌가요, 당신? 아니에요. 당신을 모욕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반드시 알게 되어 있어요. 우리만이 나누었던 괴물들의 비밀을 누설한 당사자는 괴물일 수밖에 없다는 걸요. 그들은 서로를 의심하기보다는 욕망에 수태당한 괴물들이었던 우리를 먼저 찾아가겠죠. 그리고 그들은 우리를 추궁하고 단 한마디의 질문을 하는 것만으로, 아니, 그 역겨운 얼굴을 들이미는 것만으로 우리를 다시 악몽속에 처넣을 거예요. 그렇지 않더라도 그들을 고발하기 위해서는 그곳에서 일어났던 일을 전부 이야기해야겠죠. 하지만 경찰들이 우리의 비밀을 신부님처럼 순순하게 들어줄 수 있을까요? 피해자들보다는 범인들을 추궁하는 데에 이력이 난 그들은 내 죄를 먼저 캐물을 것이고 그들은 곧 살인자를 경멸하는 눈빛으로 내 더러운 몸을, 살인이라는 기벽에 더럽혀진 내 어린 몸을 비난하겠죠. 그걸로 끝이 아니에요. 신고가 접수되어 그들을 연행하기까지 하루, 이틀, 한달, 일년이 넘는 시간이 걸릴 지도 모르고 그동안 나는 두 번째의 신고는 하지 못한 채 바들바들 떨며 그들이 심판받을 날보다는 아마 훨씬 가까운 시일에 찾아올 처형일, 그들이 나에게, 아니 우리 중 누군가에게 다가가 새로운 살인을 저지르는 날만을 기다려야 하겠죠. 그들이 신고자를 모르더라도 마찬가지예요. 그들은 우리 중 누구라도 죽일 것이고 그것만으로 우리 모두를 죽이는 셈이니. 우린 이제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으니 우리의 혀놀림에 우리가 죽었다면 우린 자살을 한 것이고, 아직 죽지 않았다면 반드시 목숨을 끊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죠. 결국 우리는 그들의 목이 잘리는 걸 보기 이전에 전부 죽어버리고 말 것이고 그러면 그들은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미친 여자의 망언으로부터 벗어나 다시 쾌락에 심취한 삶을 이어나갈 수 있겠죠. 게다가 신부님, 당신은 이제 제가 그들과 함께 처녀의 피를 마신 당사자라는 사실을 알아야 해요. 매주 거행되었던 처형식에서 마리의 손목을 자른 것도, 나르시스의 오물을 치우고 그 애의 이름으로 살았던 몸을 절벽 아래로 떨어뜨린 괴물이 저라는 사실을.
신부님. 그들은 제 스스로 칼을 들게 만들었어요. 그들의 수법이 얼마나 교활했는지 당시에는 알지 못했지만 이제는 뼈저리게 느끼고 있거든요. 난 처형식이 이루어진 밤 아무런 죄책감 없이, 심지어는 꿈도 꾸지 못하고 가축처럼 잠들었지만 이제는 달라요. 신부님. 난 내가 자른 손목과 내가 떨어뜨린 몸을 날마다 날마다 보고 있답니다. 그래요. 사실 내가 자수를 하고 벌을 받고 싶은 심정이라는 걸, 누군가가 내 죄의 끝을 선언해주기만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는 걸 당신에게 모두 고백하겠어요. 그렇지만 자수를 하는 일도 그들을 고발하는 일과 다를 바 없이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이젠 아시겠나요? 난 내 죄를 설명하기 위해 그들에게 우리를 사주한, 그리고 거미줄에 칭칭 얽힌 나비를 조종하듯 억지로 움직인 괴물들에 대해서도 낱낱이 털어놓아야 할 거예요. 그러면 앞서 말했던 모든 일들이 반복되겠죠. 아, 내게는 결국 벌이라는 종언이 주어지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내가 의탁할 곳은 정의의 저울이 아니라 단죄의 십자가라는 것을 당신도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신부님. 당신이 저를 벌주시고 당신이 제 죄를 나누어 주신다면 전 기꺼이 당신 앞에서 죽겠어요.
여자와 죄, 죽음과 망각, 관련지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무참한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개념들 사이에서 소년은 침묵마저 잊고 온몸으로 떨며 비명하였다. 여자는 소년의 가녀린 비명소리를, 그녀의 죽음과는 달리 가소로운 비명소리를, 그녀의 격렬한 상처와는 달리, 매달 비린내를 풍기며 몸 밖으로 새어나오는 붉은 물질과는 달리 속에서부터 물러가는 투명한 출혈을, 개념적인 고통을 들을 수 없었다.
아, 우리가 함께할 수 있는 건 망각뿐이죠. 내가 잊고 당신도 나를 잊는다면 우린 함께할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결코 그럴 일은 없겠죠. 당신이 나를 잊는다 해도 난 당신을, 그래고 나를 잊을 수 없을 테니까.
그건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고 소년이 여자처럼 꺽꺽거리는 소리로 대답했다. 나도 내 존재를 잊을 수 없어요. 우리는 지상에서 제 존재를 잊기 위해, 제 존재를 지워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뿐입니다. 존재를 지워가는 것, 실존을 잊어가는 것, 그것이 삶입니다.
당신은 이상한 말을 하는군요. 신마저도 잊어야 하나요?
그럼요. 신마저도. 우리에게 실존이란 가혹한 벌을 내리신 분이 그분이라면, 그분 안에도 우리의 실존이 있을 테니. 모두가 우리를 잊었어도 우리는 우리를 잊지 못했죠. 그 마지막 기억만으로 우리는 끊임없이 지상에 유예되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삶을, 죽음을, 존재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개념들을 잊어버리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자유로워질 겁니다.
그런 날은 영원히 오지 않을 거예요. 죽음 이후에도.
그렇죠. 죽음 이후에도. 그런 자들은 천국에서 다시 지상으로 떨어지겠죠. 천국에서도 지상의 업보를 살아야겠죠.
그런 곳은 지옥이라고 해야 하는 게 아닌가요.
부인, 산 자들이 돌아다니는 곳은 모두 같은 땅입니다. 천국도, 지옥도, 모두 같은 위도에 존재하는 거대한 대륙이지요.
유령들은?
유령이라뇨?
난 그 성에서 귀신들을 본 적이 있어요. 마리는 날마다 내게 매달려 자기 손목의 귀신을 보았다고 흐느꼈고 정말 난 그녀의 침대 밑에 굴러다니는 시퍼런 손목을 본 것 같은데, 그건 어떻게 설명하실 텐가요?
그건 당신들이 그녀의 손목을 잊지 못했기 때문이겠죠. 손목은 손목을 잊었더라도 누군가 손목을 잊지 않았다면 희미하고 비참한 형태만을 간신히 유지한 채 다시 삶으로 끌려올 수밖엔 없겠죠.
그렇다면 난 유령이 되겠군요. 그 괴물들은 결코 우리를 잊지 않을 테니. 아, 난 정말 끔찍한 괴물이 되고 말 거예요. 그들은 우리를 하나의 거대한 살덩어리로 생각할 테니까. 살아남은 이들은 그들 덕에 나와 함께 묶여 불그스레하고 물컹한 살덩이, 오로지 그들의 욕망을 돋우기 위한 살덩이로 바뀌어 다시 그들의 악몽 속으로 끌려가야겠죠. 신부님. 그럴 수는 없어요. 전 그들이 저를 잊기 전엔 저를 잊을 수 없을 것 같아요. 전 유령이 되고 싶지 않아요. 전 그들이 저를 잊기 전에 죽을 수 없어요.
그래요. 우린 기도할 수밖에 없겠군요. 그들이 당신을 잊기를. 그리고 당신이 나를 잊기를. 나를 잊지 않은 모든 이들이 나의 유령으로부터 벗어나 온전한 망각을 가능케 하기를. 마지막으로, 우리 자신이, 반드시 마지막으로 우리 스스로를 잊을 수 있기를. 그리하여 지상에서의 속박으로부터 영원히 자유로워지기를.
신부님. 그렇담 당신은 내 죽음에 제를 지내 주지 않을 건가요?
제를 지내고 잊을 자신이 없다면요. 어떤가요?
왜 저한테 묻는 거죠? 제를 지내는 건 살아남은 사람들인데. 난 남몰래 집에서 마리와 소녀, 소년들의 제사를 지냈어요. 하지만 그 애들의 유령은 내게 나타나지 않았죠. 그 애들은 유령이 되지 않고 그 애들을 모두 잊는 데 성공한 걸까요? 어떻게 그 악몽을 잊을 수 있었을까요? 괴물 같은 몸뚱이를, 늘어져 오물을 질질 흘리는 구멍이 따가워서 난 아직도 견딜 수가 없는데. 우리는 타고난 건강은 알아차리지 못하지만 비틀어진 관절의 아픔은 너무나 기민하게 알아차리는 법이니까요.
그건 아무도 알 수 없죠. 하지만 당신이 그들을 기억하는 걸 보니 적어도 그들이 삶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진 못했을 거란 생각이 드는군요. 장례는 산 자들이 죽은 자들을 잊을 수 있도록, 그래서 유령을 불러들이지 않도록 하기 위한 절차입니다. 고양이가 제 새끼의 시체를 먹고 원숭이들이 새끼 짐승을 흙 속에 묻듯 나름대로 그 존재에 대한 결말을 짓고 그들을 잊으려는 거지요.
난 장례가 산 자를 기억하기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렇다면 묘비는, 거기에 적힌 그들 생의 약력과 이름은 모두 무엇을 위한 건가요? 매년 열리는 추모식은?
그건, 잊지 않기 위해 망각을 잊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귀신을 두려워하는 사람만큼 귀신을 갈망하는 사람들도 있는 법이니까요.
신부님, 날 애도하지 마세요. 제발. 내게 장례를 치러주실 필요도 없어요. 내 이름을 당신에게 알려주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에요. 수도원은 영원히 내 이름을 알 수 없을 거예요. 난 묘비조차 필요 없으니까. 난 암컷 쥐들이 젖가슴을 드러낸 채 뒹굴고 있는 더러운 구덩이에 묻힐 거예요. 난 쥐들을 먹여 살리고 기르며 쥐들의 어미가 될 거예요. 이름을 가질 수도 없고 학대를 받을 수도 없는 더러운 쥐새끼가 될 거예요. 그러니 날 잊어요.
그래요. 전 당신이 살아 있는 동안 당신을 말끔히 잊어버리고 다시는 당신을 위해 기도하지 않을 겁니다. 당신이 가장 마지막으로 당신을 잊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신부님, 모든 것들이, 모든 기억들이, 심지어 모든 망각까지도 혼란스럽지만 이것 하나만은 약속받고 싶어요. 저를 잊어주세요. 제가 당신으로부터 떠나는 순간, 이 방에서 들었던 모든 이야기와 모든 어휘들, 모든 흐느낌을 잊어 주세요. 당신은 다만 목소리만 기억하면 돼요. 그저 이 자리에 어떤 목소리가, 언제나 당신의 앞을 떠돌았던 숱한 목소리와 같은 하잘 것 없는 목소리가 있었다는 것만 그것만 기억해 주세요. 그럼 저도 당신의 이야기를 모두 잊겠어요. 여느 신부 같지 않았던 당신의 어린 목소리도, 당신의 기이한 논리도 모두.
그래요. 난 당신을 잊기 위해 노력할 거예요.
그걸론 불충분해요. 신부님, 잊으려 노력할수록 당신은 날 선명하게 기억할 거예요. 그러면 곧 돌이킬 수 없게 되겠죠. 하나를 잊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잊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해요. 당신은 나에 대해 생각해서는 안돼요. 잊으려는 노력조차도. 그걸 부탁드리는 거예요. 신부님.
네. 알겠어요. 당신이 나를 잊어준다면.
그럼요. 전 당신을 잊으려 노력할 필요도 없을 거예요. 내가 기억해야 하는 건 너무나 많으니까, 내가 잊어야 할 것도 너무나 많으니까, 당신은 그 더러운 기억 속에 함몰되어 제대로 알아볼 수조차 없이 변해버릴 거예요. 그러니 걱정하지 마요.
어쨌든 삼촌은 여자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한 것이 틀림없어요. 여자의 고해성사에 대한 삼촌의 추억은 다른 이야기들에 비해 유독 섬세하고 선명했으니까. 그 아픈 이야기는 내게도 여자에 대한 강한 인상을 불어넣었으니까. 그녀는 죽음을 맞고 나서도 계속해서 선원들의 전설로 오르내리는 아름답고 비참한 세이렌의 노래처럼 호사가들의, 절망을 탐닉하는 자들의 입술 속에서 영원히 붙들려 살아가게 된 것이 틀림없어요. 그녀는 그녀의 바람대로, 그리고 그녀가 두려워하던 대로 괴물이 되고 말았죠. 일그러진 이야기, 일그러진 목소리, 일그러진 기억, 그리하여 망각 없이 표류하는 시간의 괴물이. 그녀에겐 더 이상 시간도 공간도 의미가 없을 거예요. 그녀는 어디에나 떠돌고 언제나 흐느낄테니까.
물론 고해성사실에서의 에피소드를 곧이곧대로 믿기는 어렵다는 걸 나도 잘 알고 있어요. 유령 같은 존재였지만 분명히 실존했던 삼촌의 몸뚱이를, 당시에는 그리 자그맣지도 않았던, 청년에 가까운 소년의 몸집을 비좁은 고해성사실 안에서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것도, 생이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숨소리와 작은 떨림마저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도 내게는 기묘한 신화나 전설처럼, 그러니까 실재하지 않는 사람에 대한 망상처럼 여겨졌거든요. 그 이야기를 들을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요. 사드 후작의 관능적인, 그리고 폭력적으로까지 느껴지는 텍스트를 몸으로 앓았다던 그 여자의 말도 어쩌면 거짓인지도 모르지요. 고해성사실에서 무언가 충격적인 죄를 고백해야겠다는 강박에 사로잡힌 여자가, 신부를 만족시키기 위해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부풀려 고백한 것일 수도 있고 어쩌면 그녀의 존재 자체가 거짓이었는지도 모르죠. 죄와 절망에 대한 갈망에 못이긴 소년이 선뜩하게 부풀어오른 악몽을 실재하는 여인으로 착각했을 수도 있고요. 어쩌면 고해성사실에서 있었던 모든 일들이 삼촌의 악몽일지도, 그가 텅 빈 유년을, 황폐한 어린시절을 상상하며 꾸며낸 이야기일지도 모르죠. 지금 우리가 하는 일처럼, 유년을 다시 쓴 일에 내가 일종의 증인으로서 허구를 실존하는 것으로 오인하도록 지상과 허공을 이어주는 희생양이 되었던 것일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이를테면 삼촌의 이야기는 삼중, 혹은 사중, 혹은 그 이상의 거짓과 허구, 망상, 착각들을 수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거예요. 결정적으로 우리가 하고 있는 일도 기억의 정밀한 복구 작업이라고 보기는 어려우니까요.
기억은 진실이 아니에요.
그래도 진실이라고 믿는 자들에게 보이는 흔적들은 있죠. 아무리 어렴풋하더라도 그들에게는 실마리가 있잖아요. 하지만 우리에겐 흔적조차 없어요.
괜찮아요. 이야기를 계속해요. 적어도 난 당신을 거짓말쟁이라고 고발할 생각은 없으니까.
말 하는 이들은 모두 거짓말쟁이에요.
거짓말쟁이들은 진실만을 말하죠.
진실이 아닌 사실이 없다면. 사실이 아닌 진실도 없다면. 기술하고 감각하는 모든 것들이 진실이라고 한다면.
어느 누구에게도 진실이 아닌 것조차 진실이 아니라는 진실을 가질 수 있다면.
당신을 껴안고 싶어요. 그래서 당신을 허구로 만들고 싶어.
감각되지 않는 투명한 허공이, 무서울 정도로 단단한 연약함이 허구라고 믿는다면. 난 당신과 이야기를 만들 거예요. 가늘고 투명한 허공의 실들로 이어진 건축물을, 실재하지 않는 것들의 구조물을, 허상들이 겹치고 겹쳐져 섬세한 내적인 논리를 갖추게 되는 상상의 성채를.
그리고 난 당신과 함께 그 성을 무너뜨리겠죠.
성은 소리조차 없이 무너질 거예요.
벽돌 하나조차 빠지지 않고.
비명조차 지르지 않고.
성의 벽에 늘러붙어 암흑과도 같은 틈새를 응시하던 유령들은 빠져나오지 못한 채 허상이 되어버리겠죠.
유령들이 지르는 비명을 아무도 듣지 못할 거예요.
그래도 난 당신과 함께 머물고 싶어요. 아무리 어설픈 공간이라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 해도. 나와 함께 비명을 질러줘요. 당신의 비명을 듣고 싶어요.
동시에 지르는 비명은 건축물을 무너뜨릴 뿐이에요. 아직은 더 촘촘한 실을 짜내려가야 할 때에요. 당신은 당신의 침묵을 들려줘요. 아직은 타들어갈 유령들을 온전히 상상해내지 못했어요. 유언처럼 가느다란 발목도, 죽은 이파리처럼 뾰족한 귀도, 밤의 손가락처럼 검은 혓바닥도.
계속하죠. 우리가 허구의 투명한 정교함을 완전히 신뢰할 수 있을 때까지, 이야기의 직조물에 취해 나선형의 어스름한 계단을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을 때까지, 마침내 실체 없는 안개 속에서 자유로이 절망하며 추락할 수 있을 때까지.
오로지 자유로운 추락만을 위하여.
절정을 기약하는 추락만을 위하여.
상승을 지표하는 추락만을 위하여.
비상을 전제하는 추락만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