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젤 스테이크 29

보호소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어린 교사들이 유달리 길고 하얀 얼굴들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여자는 다녀왔다고 말하지 않았고 교사들은 여자를 반기지 않았다. 그들은 한참 동안 마네킹을 들여다보듯 서로를 낯설게 바라보며 서 있었다.

여자는 보호소의 긴 복도를 따라 걸었다. 열린 문틈으로, 철제 침대에 누워 복도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소녀들이 보였다. 교사들은 복도 중간중간에 놓인 나무 의자들에 각자 앉아 피로에 지친 어린 닭처럼 졸고 있었다. 여자는 긴 복도 끝의 식당을 지나 주방으로 들어섰다. 주방은 텅 비어 있었다. 인기척조차 없었다.

그녀는 주방의 주인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식기들을 만지면서 웃었다. 그녀는 옷장 같은 냉장고 문을 열었다. 냉장고 문 안쪽에는 하얀 달걀들이 있었다. 여자는 흰 달걀들 사이에서 검은 달걀 하나를 발견했다. 그녀는 검은 달걀을 꺼냈다. 검은 달걀은 다른 달걀들과 똑같은 곡률과 석회질의 매끈함, 같은 크기와 차가움을 가지고 있었지만 여자는 오직 검은 달걀만을 꺼내들었다.

그녀는 오래도록 빨지 않아 쉰내가 나는 원피스의 주머니 안쪽에 검은 달걀을 집어넣었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주방을 나섰다. 그녀는 긴 복도와 마네킹 같은 어린 교사들을 지나 세 개의 색채의 이름을 붙인 여자들이 있는 방으로 들어섰다.

보라는 여자를 반가이 맞았다. 학교는 어땠어?

여자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방 안을 훑어 보았다. 초록은 텔레비전 앞에 눈을 가까이 대고 앉아 있었고 파랑은 1층 침대에 걸터 앉은 채 TV 화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화면에서는 연푸른 빛깔의 비행접시가 나왔다. 비행접시 안쪽에서 어린 소녀들이 흐느끼며 춤을 추고 있었다. 여자는 비행접시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그리고 보호소의 작은 방 안에.

보라는 여자의 손을 잡으며 학교는 어땠느냐고 다시 물었다.

여자는 학교가 아니라 꿈이나 감옥이었다고 말했고 초록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채로 깔깔거리며 웃었다. 여자는 그녀가 이해하지 못하거나 오해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여자는 오른쪽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검은 달걀의 차갑고 젖은 표면을 쓰다듬었다.

유령선처럼 떠도는 비행 접시의 내부에서 소녀들은 지친 표정으로 원의 내부만을 음울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원 바깥, 비행접시의 바깥으로 고개를 내밀어 시선을 던지는 소녀는 아무도 없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여자는 생각했다. 우주선의 바깥에는 별들이 떠다니는 검은 밤이 아니라 세트장 바깥의 투박한 잿빛 벽면과 촬영 스텝들이 있으므로. 소녀들은 우주선을 믿기 위해 우주선의 내부만을 집요하게 응시하는 것이다. 소녀들은 계속해서 춤을 추고 있었으나 마치 정지한 것처럼 보였다.

초록과 파랑은 비행접시를 집요하게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들이 바라보는 것은 빛의 문드러진 입자들뿐이다. 소녀들의 진짜 비행접시에 대해서는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다. 아무도 그녀의 염병할 무대에 신경쓰지 않는다. 그럼에도 영원히 유령선처럼 더도는 우주선. 사지가 마비된 짐승은 어떻게 자살하지? 그런 짐승은 무한 속에 잠겨든 시간이 0으로 수렴하는 찰나와도 같은-그러나 빌어먹게 긴, 영원처럼 긴-순간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시간이 소진되고 0으로 수렴해가는 그 찰나의 필연적인 순간을.

여자는 소녀들이 원의 내부만을 집요하게 응시하고 있었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하지만 아무도 소녀들을 촬영하지 않았음을 여자는 알고 있었다. TV 화면 속의 소녀들은 그녀가 알던 소녀들과 물방울처럼 닮았지만 결코 그녀들은 아닐 것이었다. 어쩌면 우주선은 처음부터 텅 비어 있으며 소녀들의 춤을 보는 것은 여자뿐일지도 몰랐다. 여자는 파랑과 초록에게 물어볼 생각을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보라는 어째서 학교가 감옥이냐고 끈질기게 물었다.

여자는 자세히 설명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점이 있는 모든 곳에는 원이 있다고만 대답했다.

보라는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아무도 너의 귀환을 환영하지 않는다. 아무도 너의 실패를 축하하지 않는다. 여자는 생각했다. 너희들이 출발한 곳으로 돌아갔을 때 너희들은 아무도 너희들을 기다리고 있지 않았음을 발견하게 될 거야. 우주비행접시는 연료가 소진된 것처럼 멀거니 검은 밤을 표류하고 있었다. 비행접시는 태양보다 가까운 별을 향해 다가간다. 별들은 영원처럼 많지만 유한하다. 무한한 밤 속에서 유한한 별들은 한없이 0으로 수렴해간다. 밤을 은닉하는 별들은 수치상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여자는 검은 달걀의 껍질 위를 천천히 더듬었다. 세이렌들의 침묵을 듣지 않는 오디세우스, 천국의 희거나 검은 감옥은 무한한 방들을 가지고 있다.

여자는 어지러움을 묵묵히 견디며 1층 침대에 걸터앉았다. 부드러운 도끼질로 비행접시를 쪼개면 잔여물들은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밤을 떠다닐 것이다. 그 모든 빛들이 밝히지 못하는 무한한 어둠을. 여자는 집요하게 타오르는 어둠에 대해 생각했다.

하얀 관을 찾아오는 조문객들 누구도 여자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여자가 가지고 있는 기억에서는 아무도 여자를 위로하지 않았다. 빌어먹을 행운과 미래를 빌어 주는 목소리조차 없었다. 하얀 관과 검은 조문객들. 모든 짐승들은 다른 짐승들의 관을 지키고 모든 매장꾼들은 다른 짐승들의 시체들을 매장한다. 어두운 무기고에서 우리는 다른 자들의 무기를 주워들어 휘두른다.

난 학교에 가고 싶어, 하고 보라는 속삭였다.

여자는 가고 싶으면 얼마든지 가라고 말했다.

보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여자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난 재판을 받지 않았잖아.

여자는 학교는 감옥이 아니라고 말했고 보라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방금 언니는 학교가 감옥이라고 했어.

아무도 너의 귀환을 환영하지 않으리라. 아무도 너의 실패를 축하하지 않으리라. 비행접시는 세면대처럼 은은한 푸른빛으로 검음을 떠돌고 있었다. 아무도 그녀의 염병할 무대-비행접시에는 신경쓰지 않으리라. 그럼에도 비행접시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집요함으로 우주를 표류하고 있었다. 별들은 자살할 수 없다. 별들은 그들을 불태우는 끔찍한 융합이 끝나기를 그들이 완전히 소진되어 백색으로 쪼그라들고 갈기갈기 찢겨 사라지기만을 무력하게 기다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낙엽처럼 말라 비틀어진 별은, 더 이상 타오르지도 않는 별은, 더 이상 별이 아닌 별은 어떻게 죽는가? 별의 잔해는 우주를 떠돌고 연료가 소진되어 버린 우주선처럼 영원히 표류하며 서서히 사라져간다.

혹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악몽과 교미하는 짐승들, 문드러진 입체와 피폭된 화병에 담긴 검은 장미. 여자는 깊은 피로에 눈꺼풀을 문지르며 신음을 흘렸다.

보라는 말했다. 학교에 가고 싶어. 언니가 학교에 간 동안 나는 새로 들어온 교사와 이야기를 나누었어. 그 애는 도자기 인형처럼 창백하고 예뻐. 언니도 언젠가 그 애를 보게 될 거야. 그 애는 눈이 멀었는데 그래서 내게 맹아용 점자책을 가져다 주었어.

나는 점자를 읽을 줄 모른다고 말했고 그 애는 많이 당황하는 것처럼 보였어. 그 애는 슬퍼 보이기까지 했어. 난 내가 그 애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걸 알았어. 그래서 학교에 가고 싶은 거야. 언니, 거기에는 우리 같은 어린 애들이 많을 테니까 내가 가한 폭력의 효과를 오랫동안 무력하게 관찰하지는 않아도 되겠지. 하지만 언니들은 학교와 병원에 가거나 잠들어 있었고 이 방에서 깨어 있는 건 눈 먼 교사와 나밖에 없었어. 그래서 나는 그 애가 당황으로 일그러진 얼굴로 웃으려 안간힘 쓰는 모습을 전부 지켜볼 수밖에 없었어. 나는 짐승처럼 울부짖고 비명을 지르고 싶었어. 하지만 그럴 수 없었어.

그 애는 상처받은 어린 짐승처럼 내게 책을 가져다 주었고 그 책은 점자책이 아니었어. 그 애는 내 옆에서 점자 책을 소리내어 읽었고 나는 그 애가 읊는 내용과는 무관한 책을 읽었어. 아니, 읽으려고 노력했어. 하지만 한 문장도 읽을 수 없었어.

초록은 갑작스럽게 소리쳤다. 저 애들이 뭘 하는지 알아?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으나 초록은 말을 이었다. 한참 전부터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저 빌어먹을 화면이 무얼 의미하는지 저 애들이 뭘 하고 있는 건지 아무것도 모르겠어.

파랑은 소녀들이 우주를 항해하는 것이라고 지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여자는 몸을 웅크린 채 생각했다. 그녀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영원도 미래도 아닌 죽음을? 아니면. 남자아이의 목소리, 네가 병에 걸리기를 기다리고 있어. 아냐, 네가 나와 같은 병에 걸리기를.

여자는 금속성의 현실이 날을 맞부딪히며 내는 끔찍한 소음을 들었다. 여자는 침대에서 일어나 달걀 위를 걷듯 조심스럽게 움직여 방의 중앙에 섰다. 보라는 여전히 퉁명스러운 얼굴로 여자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여자는 땅이 달걀의 표면임을 불현듯 깨닫고 난 뒤 평생 조심스럽게 걸어다니는 남자의 맨발에 대해 생각했다. 남자는 아이들의 거친 달리기를 보면 소스라치게 놀란다. 그는 지상이 언제 바닥에 떨어진 달걀처럼 깨어지더라도 이상할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무도 지상이 달걀임을 고려하지 않는다. 아무도 피투성이의, 끈적한 난자가 튀어나올 수 있음을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도 거대한 난자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여자는 검은 달걀의 부드러운 표면을 서글프게 더듬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들리지만 문은 보이지 않는다. 출구가 닫히는 소리는 들리지만 출구는 어디에도 없다. 이 수중 생물 같은 방 속에서 그녀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주를 떠도는 문드러진 입체들. 망가진 입체들에게 그 누구도 이름을 붙여주지 않았다.

하얀 관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관의 내부에도 여자에게도 무관심했다. 그들은 오직 자개로 만들어진 옷장처럼 은은하게 반들거리는 아름다운 하얀 관의 표면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표면이고 모든 것이 겉모습이라면, 관의 내부에 아무것도 없음을 그들이 이미 알고 있었다면?

아, 나도 이렇게 하얗고 예쁜 관에 드러눕고 싶었어요.

여자는 쥐 경찰의 새처럼 높은 목소리를 들었다. 목이 잘려나간 새처럼 가늘고 높다란 음성. 여자는 울지 않았다. 그녀는 죽고 싶었지만 죽기 위해서는 살아 있는 부분이 필요했다. 그녀는 지나치게 죽었고 죽음에 중독되었으며 죽음이 가능한 살아 있는 부분에는 믿을 수 없이 커다란 노력이 필요했다. 그녀는 더 이상 무엇을 잘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잘려나간 머리칼과 손톱은 처음부터 죽어 있었던 것처럼 적요하였고 그녀는 더 이상 살아 있는 부분을 찾을 수 없었다. 어떤 이는 자살하기 위해 살아 있는 살을 찾아 평생을 헤맨다. 그는 신을 찾아 영원히 떠도는 것이다.

보라는 여자를 따라 방의 중심까지 조심스럽게 걸어와 여자를 끌어안고는 침울하게 말했다. 눈 먼 교사의 옆에서 화려한 삽화들로 장식된 책을 읽는 것은 채식주의자의 옆에서 고기를 먹는 것만큼이나 만족스럽고 모멸적이었다고, 그녀는 교사의 눈 멂에 끔찍하게 모욕받았지만 어째서 그녀가 그녀의 봄과 눈 멀지 않음에 상처받은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고.

여자는 보라에게 아직도 학교에 가고 싶느냐고 물었다.

보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는 보라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지만 여동생을 기다리는 남자아이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아무도 너의 초대에 응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돌아온 너를 반기지 않을 것이다. 여자는 가진 것보다 더 많이 잃을 수 있음을 알았다.

비행접시의 소녀들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어! 정말 아무도 없어. 아무도 없어.

소녀들은 웃었다. 모든 것은 모든 다른 것에 대한 방해물이다. 소녀들은 자기 자신의 유령처럼 울부짖었다. 별을 찢어발기는 공포. 우글거리는, 석류알 같은 개미들. 하얀 관을 조문하는 짐승들은 여자에게 무관심했다.

여자는 검은 알의 표면을 쓸어내렸다. 알은 추락하는 비행기에서 바라본 바다처럼 차가웠다.

관을 들어올려, 목소리는 여자에게 속삭였다. 관을 들어올려. 관을 움켜쥐고 관을 내리쳐. 관을 깨뜨려.

관의 내부에는 미끈미끈하고 비린, 점액질의 내장이 있다. 달걀은 노랗고 절망적인 생명을 가지고 있다. 껍질의 내부에는 생명이 있다.

네가 병에 걸리기를 기다리고 있어.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아.

소녀들은 손을 맞잡고 우주로 뛰어내린다. 사라짐은 망상의 내부를 관통하고 너덜너덜하게 뜯겨나간 모서리들은 날카로운 파도처럼 유영한다. 행성들의 시체가 성채처럼 쌓이는 일은 없다. 불가능한 집적과 불가능한 형상, 불가능한 성의 구조.

보라는 교사가 읽던 점자책이 텅 빈, 농담이었을지 모른다고 말했다.

입구와 벽이 텅 빈 농담. 출구들은 닫히고 있지만 그녀는 볼 수 없다. 출구들은 무한한 방향으로 뻗어 있지만 그녀는 단 하나의 출구도 볼 수 없다. 모든 출구의 생명과 단 하나의 출구의 자유. 오직 하나뿐인 출구는 기만이며 망상에 불과하다. 출구는 모든 틈, 손가락 하나조차 집어넣을 수 없이 비좁고, 그러나 집요하게 벌어진 무수한 틈들이다. 우주를 부유하는 하얀 관들, 하얀 소녀들, 하얀 알들. 여자는 화면으로 유성처럼 쏟아져내리는 하얀 소녀들을 보았다. 우리는 무수했지만 혼자였다. 우리는 집요하게 증폭되고 있는 혼자였다.

초록은 밤을 부유하는 흰 불빛들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네가 없는 동안 29번 채널의 돼지들은 늑대를 기다리고 있었어.

그래. 여자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돼지들은 벌거벗은 분홍 등을 보인 채로 늑대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초록은 말했다.

여자는 초록의 등을 보며, 늑대를 만난 것 같다고 말했다.

초록은 갑작스럽게 여자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돼지들이? 그럴 리 없어.

여자는 돼지들이 아니라고, 늑대를 만난 건 그녀였다고 말했다.

초록은 그럴 리 없다고 중얼거렸다.

아니야, 나는 정말 늑대를 봤어. 늑대는 깨진 달걀처럼 황금빛인 눈을 가지고 있었어. 늑대는 내가 연기한 여자아이의 엄마를 연기하던 죄수를 기소한 검사였고 혹은 검사를 연기하고 있었고 돼지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어. 늑대는 잿빛 동굴처럼 아름다웠어. 나는 늑대의 날카로운 검은 손톱을 보면서 어린 페터와 늑대의 동화를 떠올렸어.

페터는, 초록은 속삭였다. 검은 숲에서 늑대를 만났지.

파랑은 공중을 떠다니는 소녀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보라는 교사의 옆에서 자신이 읽던 동화가 바로 늑대와 어린 페터에 관한 이야기였을 거라고 소리쳤다. 맞아, 틀림없어. 나는 한 문장도 읽을 수 없었지만 검은 새의 깃털처럼 화려한 나뭇잎들로 둘러싸인 숲의 그림과 그 속에서 금빛 장미처럼 빛나는 늑대의 두 눈을 보았어. 소년은 가련한 붉은 얼굴로 늑대를 올려다보고 있었어.

초록은 보라에게 그 이야기, 카프카로부터 시작하여 더 이상 원형을 추론할 수 없을 정도로 변형된 동화를 알고 있느냐고 물었다.

보라는 모른다고 대답했다.

헤이, 초록은 말했다. 너는 지금 그 이야기를 듣게 될 거야. 어린 페터는 늑대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했어.

늑대는 페터의 언어를 이해하는 것처럼 고개를 저으면서 중저음의 끔찍한 목소리로 속삭였어. 나는 배가 고파. 미칠 듯이 배가 고파. 나는 하얗고 둥근 원의 꿈을 꿔. 나는 원이 영원히 깨어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어느 순간 깨달아. 아름다운 파란 바다가 영원히 갈라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우리는 좌초도 추락도 없이 영원히 둥둥 떠서 표류하리라는 것을. 나는 그렇게 메슥거리고 배가 고파.

어린 페터는 눈물을 흘리면서 속삭였어. 당신이 당장 나를 잡아먹는다고 해도 겨울까지 배불리 보낼 수는 없을 거예요. 내 고기는 질기고 맛이 없을 거예요. 봐요. 어린 페터는 가느다란 오른 손목을 내밀며 속삭였어. 난 이렇게 말랐잖아요.

늑대는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어. 네가 말랐다고 해도 나는 너를 먹을 거야. 왜냐하면 난 너를 먹을 수 있으니까. 너는 내 앞에서 무력하게 먹힐 수밖에 없으니까. 나는 너를 원하고 있으니까.

어린 페터는 늑대에게 겨울을 나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어. 어린 페터에게는 종달새처럼 사랑스럽고 돼지처럼 통통한 약혼자가 있고 그 약혼자와 결혼하면 돼지처럼 부드러운 살을 가진 소녀는 페터의 소유가 되므로 늑대에게 그 소녀를 바치겠다고 약속한 거야.

늑대가 아무말 없이 페터를 내려다보고 있자 페터는 초조하게 덧붙였어. 우리 아빠는 돼지 농장을 소유하고 있어요. 아빠가 돌아가시면 내가 그 돼지 농장을 물려받을 거예요. 돼지 농장에 있는 모든 돼지들도 당신에게 주겠다고 약속해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를 줄게요. 조금만 더 참으면 당신은 다섯 번, 아니, 열 번의 겨울을 살아남을 수 있을 거예요.

늑대는 고개를 끄덕였고 강물에서 허우적거리듯 비틀거리며 걷는 페터를 따라 페터의 집으로 들어섰어. 페터는 늑대에게 곧 약혼자가 들어올 테니 잠시만 숨어 있으라고 말하며 늑대를 장롱 속에 넣고 장롱을 잠갔어. 페터는 늑대를 완벽하게 속여넘겼다고 생각했어.

정말 어리고 통통한 아냐는 나무문을 두드렸고 페터는 아냐를 나무 침대 위에 개처럼 엎드리게 한 뒤 그녀의 둔부에 몸을 기대어 삽입했어. 페터는 소녀의 부드럽고 달콤한 어깨를 깨물었고 소녀는 망가진 침대처럼 삐걱거리는 신음을 흘렸어.

며칠이 지났고 페터는 장롱 속 늑대의 존재를 완전히 잊어버렸어. 페터가 늑대를 가둔 장롱은 죽은 할머니의, 잊혀진 장롱이었기 때문에 아무도 장롱을 열어보지 않았어. 페터는 늑대의 침묵도 늑대의 부재도 늑대의 그림자도 듣지 않았어. 악몽 속에서 교미하는 짐승들의 울음소리도 페터에게는 들리지 않았어.

몇 년 뒤 페터는 아름다운 뚱보 아냐와 결혼했고 오이디푸스처럼 아버지를 살해하였으며-아버지는 중풍에 걸려 마비된 몸으로 나무 침대에 변을 누고 있었고 페터는 아버지의 뺨을 때렸으며 아버지는 짐승처럼 울부짖었어. 아버지는 나날이 돼지처럼 희고 처량하게 부풀어올랐어. 페터가 사랑스러운 돼지 아냐의 가슴을 더듬는 동안 아버지는 반쯤 마비된 혀와 아래턱을 간신히 움직여 미친놈이라고 중얼거렸고 페터는 아냐는 아버지는 비명을 질렀어. 아니, 벌어진 입들에서는 소리가 나지 않았어. 아무도 소리를 내지 않았어. 페터는 돼지를 도살하듯 아버지의 목을 잘랐고 굵은 혈관을 잘라낸 뒤 아버지의 심장 위에 맨발을 올려 피를 짜내었어. 닭벼슬처럼 붉은 피가 울컥울컥 쏟아져내렸고 페터는 순식간에 쪼그라든 아버지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울었어. 페터는 눈물이, 육체가 시의 껍질 같다고 생각했어-서른다섯 마리의 돼지들을 소유하게 되었지. 페터는 배꼽과 부모의 존재가 모두 희미하고 부조리한 꿈과 같다고 생각했어.

아버지의 유령은 아들과 며느리의 신혼집으로 뒤바뀐 그의 옛집에서 말없이 머물렀어. 페터는 아버지가 둔탁하고 음산한 목소리로 흐느끼는 것을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음소거된 TV 속 인물들처럼 뻐끔거리면서 물고기처럼 침묵하는 것을 기쁘게 여겼어.

아버지는 페터에게 무언가를 경고하듯 집요하고 애절하게 뻐끔거렸지만 페터는 알아듣지 못했어.

페터는 아버지의 유령을 학대하지 않았어. 아버지의 유령 역시 페터를 괴롭히지 않았어. 어쩌면 그렇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인지도 몰라. 아버지의 유령이 페터에게 미안하다고 혹은 춥다고 혹은 잠을 더 자고 싶다고 혹은 더 이상 살아 있고 싶지 않다고 혹은 악몽을 꾸는 것 같다고 혹은 네가 병에 걸리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혹은 네가 바퀴벌레처럼 건강했으면 좋겠다고 혹은 우리는 너무나 추웠고 또한 홀로였으며 모두 가라앉고 있었기 때문에 너를 구할 수 없었던 거라고 모두가 굶어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너를 검은 숲에 두고 올 수밖에 없었던 거라고 말하는 것을 페터는 듣지 못했거나

혹은 아버지의 유령은 그런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어. 그러나 아버지의 유령이 집요하게 입을 뻐끔거리며 무언가를 경고한 것만은 사실이었지.

어느 날 늑대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장롱문을 부수고 나왔고 페터에게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했어. 늑대는 페터의 아내 아냐의 목을 물어뜯고 그녀의 희고 부드러운 살과 피를, 그리고 심장을 눈 깜짝할 새에 먹어치웠어.

늑대는 오래도록 굶주려 검은 해골처럼 보였어. 뚱보 아냐의 뼈는 희고 가늘었어. 희고 붉은 뼈 위의 검고 붉은 뼈. 늑대는 창문을 깨고 뒷마당으로 뛰어갔고 축사로 달려가 스물한 마리의 돼지들을 물어뜯었으며 등이 굽은 풀들이 있는 농장 울타리 안쪽으로 뛰어들어가 열네 마리의 돼지들을 잡아먹었어. 페터가 늑대와 약속한 시점 이후에 태어난 아기 돼지 세 마리는 살아남았어. 아기 돼지는 끔찍한 꿈을 무덤덤하게 헤매는 아이처럼 붉게 칠해진 풀 위를 폴짝폴짝 뛰어다녔어.

늑대가 집 안으로 돌아올 때까지 페터는 도망치지 않고 아버지의 유령과 함께 멀거니 서 있었어. 아버지의 유령은 울면서 페터에게 고함을 지르고 페터의 어깨와 등을 밀어 집 밖으로, 검은 숲으로 내몰려 애썼지만 페터는 꼼짝도 하지 않고 늑대가 돌아오기를 기다렸어.

늑대는 장미처럼 붉게 물든 크고 아름다운 입을 벌렸고 페터는 묵묵히 고개를 내밀었지.

늑대는 페터의 정수리를 보고는 어린아이처럼 웃으며 늑대가 사람의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느냐고 외쳤어.

페터는 의아해 하며 늑대를 올려다 보았어. 늑대는 눈 먼 여자처럼 부드럽게 웃었고 페터는 텅 빈, 검은 숲을 보았어.

페터는 늑대가 자기를 잡아먹으러 오기를 기다렸지만 늑대는 결코 오지 않았어. 두 발로 걷는, 말을 하는 늑대는 결코 페터에게 오지 않았어. 페터는 뚱보 아냐도, 중풍에 걸려 바르작거리는 아버지도, 피투성이 돼지들도, 살해도 죽음도 없이 울었어. 페터는 춥고 배고팠지만 추위와 허기가 자신을 죽이지는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

페터는 오랫동안 아이처럼 울다 잠들었어. 검은 숲은 영원처럼, 우주처럼, 사라짐에 대한 암시처럼 버려진 아이를 둘러싸고 있었어.

여자는 검은 달걀의 축축한 물기를 느끼며 초록의 이야기를 들었다.

보라는 눈을 감고 있었다. 아이의 불룩 튀어나온 눈꺼풀 아래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초록은 어린 페터가 그를 둘러싸고 있는 검고 아득한 나무들 때문에 숨이 막혀왔지만 나무들은 죽음의 진공이 아닌 무한한 산소를 내뱉고 있었고 그래서 페터는 여전히 숨을 쉬며 살아 있었다고 말했다.

그녀들은 인육 같은 공기를 들이쉬고 있었다. 손과 손을 맞잡고 희고 긴 밧줄 모양으로 몸을 얽어서 우주 바깥으로 뛰어내린 소녀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처음에 그녀들은 손을 잡고 있겠지만 곧 누군가는 손을 놓치고 그들의 원형은 너덜너덜하게 벌어져 이름 없는 기이한 도형을 만들고 말 것이다.

TV 화면은 텅 빈 우주선의 내부를 비추고 있었다. 파랑은 TV 화면 쪽으로 걸어가 옆면에 손을 대고 채널을 돌렸다. 29번 채널이었다.

돼지들의 불그죽죽한 등, 하염없는 기다림, 여자는 화면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돼지들은 그들 자신에게만 보이는 유령을 바라보듯 모호한 눈길로 여자를 돌아보았다.

여자는 말했다. 내가 늑대의 연기를 할 수 있어.

돼지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들은 지치고 침잠한 잿빛 눈으로 여자를 바라볼 뿐이었다.

여자는 흐느끼며 속삭였다. 내가 너희를 살해할 수 있어.

유리로 만들어진 재단과 첨예하게 반짝이는 끝. 여자는 손을 턱까지 들어올려 무언가를 우적우적 먹는 시늉을 해 보였다.

사내 돼지는 늑대를 기다리는 것이 그렇게 괴롭지만은 않다고 말했다.

여자는 놀라 되물었다. 괴롭지 않다고?

그래요, 사내 돼지는 음침한 존대어를 이어갔다. 물론 괴롭고 슬프지만 버티지 못할 정도는 아니에요.

너희는, 여자는 어린 돼지들의 축축한 어깨를 움켜쥐며 속삭였다. 여자의 손바닥에 분홍 클레이가 묻어났다.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 늑대는 결코 오지 않아. 너희에게 필요한 건 늑대를 대신해줄 수 있는 여배우야.

우리에게 필요한 건, 소녀 돼지가 속삭였다. 행운이에요. 우리는 기다림을 필요로 하지 않아요.

여자는 흐느끼며 속삭였다. 그래. 너희는 기다림을 필요로 하지 않아. 하지만 무슨 빌어먹을 행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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