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는 창문에 사과를 내밀고 웃듯이 어울리지 않는 밝음으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래, 너도 어떻게 된 건지 알고 있잖아.
여자는 흐느끼며 속삭였다. 꿈은 항상 나를 저주해. 꿈 속에서 우리는 언제나 갈기갈기 찢기고 저주받고 냉장고처럼 추운 우주에서 영원히 부유하며 병든 채 죽어갈 것을 선고받지. 그건 우리가 남의 꿈 속에 잠입한 불청객이기 때문일까?
꿈 얘기를 더 해 봐. 소녀는 여자에게 말했고 여자는 꿈에 대해 속삭이기 시작했다.
꿈은 3류 영화 같아. 우리는 배아처럼 수정들이 자라나고 있는 망가진 굴로 여행을 떠났고 여자아이들은 지상에 박힌 별처럼 보이는 보석들을 보며 울었어. 친구는 내 옆에 있었어. 친구는 창백한 얼굴로 가슴이 아프다고 속삭이고 있었어. 나는 괜찮냐고 물었고 친구는 죽어가는 창백함으로 고개를 끄덕였어.
우리의 인솔교사는 꿈의 구조와 미래에 대해 알고 있는 무당이었어. 그녀는 리나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어. 리나는 내 친구가 악령이며 나를 죽일 것이라고 예언했어.
난 어떻게 하면 좋느냐고 울면서 물었어.
리나는 아무런 소용도 없다고 말했어.
하지만 그건 내 잘못이 아니에요. 나는 말했어. 우리는 친구가 없었고 서로 붙어 다닐 수밖에 없었어요. 아무도 내 친구와 함께 손을 잡고 동굴 속을 걷고 싶어 하지 않았어요. 그 애는 너무 창백했고 그 애에게서는 이상한 냄새가 났으니까. 나는 오래 전에 같은 방식으로 친구를 잃었고 그래서 이번에는 그 애의 손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 애의 손을 잡는 순간 그 애는 슬프고 야릇하게 웃었어요. 패배자의 미소 같았어요. 왜 나와 함께 걷는 거야? 그 애는 그렇게 물었어요. 난 대답하지 못했어요. 우리는 주둥이가 썰려나간 짐승의 아가리 밑면처럼 보이는 동굴을 걸었어요. 동굴의 경계에서는 음험하게 반짝이는 치아 같은 자수정들이 반짝이고 있었어요.
그 애는 어느 순간 입 없이 웃고 있었고 나는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울었어요.
목소리는 내게 웃고 싶으냐고 물었어요.
나는 그렇다고, 하지만 이제 너무 늦은 게 아니냐고 물었어요.
목소리는 대답하지 않았어요.
나는 그 애가 죽었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내가 손을 잡기 전에 그 애는 죽었던 거예요. 하지만 어째서 나여야 했는지 어째서 다른 장소도 다른 시간도 아닌 지금 여기여야 했는지 알 수 없었어요. 무한한 공간과 영원한 시간의 틈에서 작은 얼룩 같은 지금 여기는 한없이 떠다니고 있는데, 잠식되고 멀어져가고 사라져가는 그 작은 얼룩이 어째서 내게 닿아 있는 것인지. 그 애의 입 없는 미소는 점점 길어지고 있었고 나는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었어요. 짐승의 아가리처럼 훼손된 동굴의 천구는 한없이 먼 곳까지 검게 펼쳐졌어요.
나는 별들 아래에서 어린 노인이나 늙은 아이처럼 보이는 그 애를 끌어안았어요. 그 애는 무섭다고 하지 않았지만 그 애의 목 뒤에서는 축축한 식은땀이 흘러내렸어요.
어째서 우리는 죽어야 하나요? 어째서 우리는 함께이고 또 우리가 나눌 수 있는 건 어째서 불길한 미래 혹은 과거밖에는 없는 건가요?
무당은 절망적인 얼굴로 고개를 저으면서 이제 너무 늦었다고 말했어. 다른 여자애들은 걱정 없이 행복한 얼굴로 동굴 곳곳을 산책하고 있었어. 나는 내 옆에서 말 없이 웃고 있는 그 애의 창백한 얼굴을 어루만졌어.
무당은 내가 저주받을 것이라고, 냉장고처럼 차가운 우주 속을 떠돌고 있는 먼지처럼 될 것이라고 말했어.
나는 대답했어. 하지만 푸른 먼지의 안에서는 붉은 사과 혹은 사과를 닮은 붉고 둥근 꽃이 피어나고 있어요.
난 무서웠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어. 우리는 한없이 좁고 외로워. 지나치게 긴 동굴과 넓은 밤을 우리는 평생 알 수 없을 거야. 우리는 모든 먼지와 모든 사과와 모든 죄와 모든 새들이 될 수는 없을 거야.
그 애의 흰 얼굴 위로 검은 거미가 기어다니고 있었어. 가늘고 아름다운 다리들을 가진 거미는 그 애의 틈새로 들어가고 있었어.
나는 살려달라고, 혹은 나를 치료해달라고 외치지 않았어. 나는 처음부터 병들어 있었고 훼손되어 있는 동굴과 유적은 어쩌면 처음부터 망가진 채였는지 몰라. 천재성도 연주도 아름다운 몸도 붉은 입술도 순결함도 없는 삶이 계속될 거야. 우리는 음험한 천재성도 아름다운 멜로디도 없이 피아노 앞에 남겨진 무력한 어린아이처럼 계속 살아가게 될 거야. 하지만 피아노는 존재하고 미숙하고 끔찍한 멜로디를 가지고 있어. 사지가 잘려나간 여자는 울면서 이마로 혹은 혀로 건반을 눌러. 그녀는 연주하는 것보다 더 많이 흐느끼고 피아노를 어루만지는 것보다 더 많이 피아노를 적셔. 피아노는 망가지고 그녀는 천재적인 연주자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아. 의탁할만한 비밀도 비극적인 미래조차도 없어.
그 애의 미소는 긴 흉터처럼 희었고 그 애의 품 안에서 나는 끔찍한 추위를 느꼈지만 담담하게, 돌이킬 수 없음을 받아들였어.
여자아이들은 피아노 건반처럼 희거나 검은 돌들을 밟고 하얀 빗속으로 올라가고 있었고 무당은 굿을 해주겠다거나 저주를 풀어주겠다는 말조차 하지 않고 우리를 슬프게 바라보기만 했어. 버스도 기차도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어딘가로 벗어날 수 있다는 착각조차 할 수 없었어. 우리는 가만히 서서 손을 붙잡고 있었고 흉터처럼 하얗고 여린 미소를 내려뜨리고 있었고 서로의 병이 번져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어.
우리는 고통스럽게 죽겠지, 그리고 고통스럽게 살겠지. 피아노 건반 위에 올려진 유령의 손가락은 아무것도 움직일 수 없이 가련하게 떨고 있겠지. 유령은 무수한 멜로디를 상상하지만 단 하나의 천박한 음조차도 내뱉을 수 없을 거야. 물질은 유령을 거부하며 심지어 유령은 다른 사물의 유령조차도 움직일 수 없어. 좌표계에 자신의 위치를 가질 수 없는 유령은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그렇지만 누군가는 유령의 희미한 울음을 보고 유령의 서글픈 흐느낌을 들어. 유령들은 망가진 악기들 위에서 어린아이처럼 바들바들 떨며 울부짖고 있어. 독에 잠식되어버린 벌집에서, 젊고 질긴 날개를 가진 일벌들이 모두 떠나간 뒤 남겨진 알들을 살리기 위해 찢어진 날개를 절망적으로 펄럭이며 알들로 채워진 방 가득 들어찬 독의 연기를 내보내려 애쓰는 암벌처럼.
그 애는 괜찮다고도 미안하다고도 하지 않았어. 그 애는 증오도 분노도, 용서도 없이 길게 늘어진 흰 미소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어. 우리의 꿈을 인솔하던 무당은 안타까운 듯이 너무 늦었다는 말만을 몇 번이고 반복했어.
나는 곧 하나의 꿈이 끝나리라는 것을, 혹은 끝나는 것처럼 느껴지리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어. 그때 그 애는 내 어깨를 건드리더니 나를 보고 웃으며 그 애의 목 아래까지 들러붙어 있던 흰 가죽 가면을 벗었어. 그 애의 얼굴이 뜯겨나갔고 그 속에서 새빨간 속살이 웃고 있었어. 내장의 웃음, 혹은 근육의 웃음, 피투성이의 웃음. 벌어진 틈은 부드럽게 휘어져 웃고 있었어.
나는 붉은 사과 같은 미소를 기억하려 애썼어.
소녀는 지친 입술로 웃으면서 말했다. 이렇게?
여자는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무당은 간수였을까?
여자의 물음에 소녀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간수와 죄수를 구분하는 건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야. 어떤 간수는 스스로를 죄수라고 믿고 어떤 죄수는 자신을 간수라고 철석같이 믿으며 그들을 제지할 수 있을 정도로 죄수들과 간수들에 대해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는 이는 어디에도 없으니까. 그들의 운명을 파악하는 것은 오직 아직 해석되지 않은 그들의 판결문뿐이야. 여기도 마찬가지야.
교사들은 물론 스스로가 간수라고 믿지만 모든 교사들이 간수인 것은 아니야. 학생들의 경우는 반대로 스스로를 죄수라고 믿지만 학생들 중에는 스스로를 죄수라고 믿는 간수들도 있지. 사실 간수가 교사의 역할을 하고 죄수가 학생 역할을 해야 한다는 법률은 어디에도 없어. 그것은 모두 추측에 근거한 관행일 뿐이지. 그러므로 교사 역할을 하는 죄수나 학생 자리에 있는 간수를 제지할 필요가 있는 건 아니야.
엄마는 사형장에 끌려가지도 못한 사형수였어. 엄마는 오랫동안 사형장을 꿈꾸었고 사형집행인을 상상했지만 결국 그 무엇도 엄마를 찾아오지 않았어. 감옥에서 태어난 벌거벗은 아이에 대한 관심이 시들해지고 나자 우리를 찾아오는 짐승들은 점점 줄어들었어. 우리를 인터뷰하고 싶다고 말했던 기자들도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지.
엄마의 벌거벗은 하얀 발, 부풀어오른 다리와 목 졸린 여자의 푸른 얼굴. 나는 감옥 천장 위 파이프에 죄수복으로 만든 로프로 목 매달고 죽은 여자를 보았고 그곳에서 남은 수형기간을 마쳐야 한다는 것도 알았어. 간수들은 엄마의 시체를 치우러 오지도 않았어. 나는 엄마가 내게 들려주었던 시를 읊으며 긴 악몽을 견디려 했지만 단 하나의 시행도 생각나지 않았어.
그때부터 나는 엄마처럼, 미친 여자처럼 시를 쓰기 시작했어. 물론 흰 종이나 펜 같은 건 없었으니까 엄마가 그랬듯이 공기 중에, 공중에 매달린 자살자의 피부 위에. 엄마의 시체 앞에서 나는 엄마의 언어를 다시쓰기 시작했어.
어쩌면 엄마는 악몽 속에서 수천 번 수만 번 자살했고 어느날 악몽과 감옥을 혼동하여 평소와 같이 자살했는지도 몰라. 엄마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고 붉게 부풀어오른 목 아래의 몸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희었어.
난 이렇게 속삭였어. 여주인은 현관문과 가스 밸브를 열었고 고양이는 모기처럼 춤을 추며 쓰러지는 여자의 붉은 고기를 보았다. 고양이는 마침내 나갈 수 있었다.
고양이는 오래도록 자유를 꿈꾸었다. 피투성이의 새와 같은 자유를, 벌거벗은 자유, 내장으로 웃는 자유를. 고양이는 두려움에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여주인은 더 이상 고양이를 부르지 않았다. 고양이는 생명의 부르짖음에 떠밀려 황급히 현관문 밖으로 나갔고 그곳에서 고양이는 끔찍한 혼자였다. 계단은 창백한 흰빛으로 흐느끼고 있었다.
고양이는 바깥이 끔찍한 겨울이라는 것을, 얼어붙은 도로에서 그녀가 살아날 가능성은 극히 드물다는 것을, 자유는 죽음과 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양이는 주춤거렸다. 그러나 고양이는 계단을 내려갔다. 독에 절은 고기가 고양이의 새장 속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고양이는 계단을 내려갔다.
고양이는 슬픔으로 눈물을 흘리지는 않는다. 무엇보다도 눈물은 생존에 부적합한 것이었다. 고양이는 본래 희었던 벽이 누렇게 바래버린 아파트의 외벽을 바라보았고 위층에서 흘러내려오는 죽음의 냄새를 맡았다. 고양이는 혼자였다. 엄마, 당신처럼 고양이는 혼자였으며 나처럼 고양이는 혼자였다. 부패한 고기로 채워진 통조림과 썩은 과일 껍질, 고양이는 그녀 역시 썩은 고기가 되어가고 있음을 알았다. 하지만 고양이는 육중한 암호랑이처럼 걸었다. 포도의 반투명하고 흐릿한 녹빛 과육 속에서 번뜩이는 단단한 씨앗이 고양이의 세계를 비추었어. 영원성의 환상으로 얼어붙은 물방울들 아래에서 고양이는 그림자처럼 늘어진 채 잠들었다. 고양이들의 목장을 지키고 있던 누런 개들은 얼어붙은 채, 믿을 수 없이 천천히 부패해가고 있었다.
소녀는 공중에 걸려 있는 여자의 모습을 천장이나 별을 보듯 오래도록 바라보았다고 말했다. 나는 엄마를 다시썼고 그 순간 엄마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버렸어. 나는 더 이상 엄마를 기억할 수 없었고 내 앞에 매달린 여자를 알 수 없었어. 간수가 이곳으로, 좀 더 넓고 사회적인 감옥으로 나를 보내기 전까지 나는 부패로 부풀어가는 그녀 앞에서 죽어가고 있었어. 여자는 소녀의 말을 들으며 절망적인 울렁거림을 느꼈다. 그녀는 치밀어오르는 헛구역질을 참으며 고개를 수그렸다. 소녀는 수업이 시작하기 전에 눈을 붙이라고 힘없이 말했다.
여자는 소녀의 책상 위에 기도하며 울부짖는 신도처럼 엎드린 채로 잠들었다. 교사가 들어와 그녀를 깨울 때까지 여자는 오로지 두려움만으로 굶어 죽어가는 짐승들의 꿈을 꾸었다.
교사의 부름에 여자는 눈물을 흘리며 깨어났다. 어째서 우리는 가장 절망적이고 슬픈 꿈을 가장 편안하게 여기게 되는 것일까? 여자가 고개를 일으키자 그녀의 이마 밑에 깔려 있던 판결문이 드러났다. 여자의 이마에는 푸른 잉크 자국이 묻어 있었다. 여자는 소녀의 가슴 속으로 숨겨졌던 판결문이 어째서 그녀의 머리 아래에 있었던 것인지 이해하지 못한 채 멀뚱하게 눈을 깜빡였다.
교사는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었고 여자에게 다가가 판결문을 들어올리며 매끄럽게 읽어냈다. 그녀는 병처럼 증식하는 언어를 압정으로 붙여 놓았다. 아포리즘, 아포리즘, 아포리즘, 모두 아포리즘들이었다! 영원하고 숭고한 출판물에 포함되어 있지 않으면 아무런 가치도 가지지 못할 단편적인 언어의 조각들.
그녀는 아포리즘의 메모들이 벽면을 가득 채울 때마다 압정핀과 메모지들을 마구잡이로 뜯어내었고 그녀의 하얗고 부드러운 손은 피투성이가 되었으며 그녀는 울부짖으면서 영원히 알려지지 않을 시구들을 읊었다. 그리고 다시 아포리즘, 아포리즘, 아포리즘들이 반복되었다. 벽면을 빼곡이 수놓은 무한하고 증오스러운 언어들. 어디에도 알려지지 않을 시구들. 불필요한 언어들이 거울 속의 장미처럼 불어났다.
여자는 언어가 증오스러웠지만 언어에서만 살 수 있었다. 여자는 아포리즘을 경멸하면서도 계속해서 아포리즘들을 적어내렸다. 그것은 어떠한 뒷받침 문장도 근거도 논리 전개도 정당화 작업도 없는 아포리즘들이었다. 영원에 흡수된 유한과 순간에 흡수된 영원, 그녀는 파스칼도 비트겐슈타인도 아니었으나 계속해서 아포리즘들을 적어내렸다. 벽을 한 차례 헤집어놓고 다시 아포리즘들을 집요하게 채워넣으면서 그녀는 어쩌면 그녀가 똑같은 벽면과 똑같은 아포리즘들을 무한히 반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 그녀가 그토록 많은 아포리즘들을 계속해서 생산해낼 수는 없을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하지만 정확히 비교할 수는 없었다. 메모지들로 한쪽 벽이 완전히 채워질 때면 그녀는 두려움과 공포를 참지 못하고 벽을 헤집어 놓았으며 갈기갈기 찢겨진 피투성이의 아포리즘들은 더 이상 알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날 그녀는 벽을 떼어내기 전에 아포리즘들로 빼곡이 찬 벽면의 사진을 찍었고 이후에 그것을 다시 확인해 보았다. 사진 속 벽은 텅 비어 있었다. 사진 속 벽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옷장에 늘어진 옷들 중 하나가 되었다. 그녀는 옷들 옆에 하늘색 스카프로 목을 매었고 옷들과 함께 늘어진 미소를 지었다. 아포리즘들은 망가진 농담이다. 시는 끔찍한 농담이며 절망의 놀이터인 고독 역시도 숭고하고 불필요한 농담에 불과하다. 여자는 벽이, 아포리즘이, 시가, 생이 하나의 농담에 불과함을 깨달았고 농담 같은 이미지로 삶을 마무리했다.
한 화면에 우연히 비추어진 두 영사기의 인물들처럼 여자의 죽음 위로 한 남자의 이미지가 겹쳐졌다. 남자는 여자가 목 매단 아파트로 침입해왔다. 남자는 여주인처럼 당당하게 현관문으로 침입해왔고 그녀의 시체를 발견했다. 남자는 정성스럽게 죽음의 현장을 꾸몄다. 그는 옷장에 늘어진 최후의 이미지를 들어올려 옷장 밖으로 빼내었고 여자의 목에 감겨 있던 스카프를 빼내고 여자의 목을 칼로 난도질했다. 여자의 입 위에 그려넣은 피투성이 미소는 잔학하고 천박한 농담이었다.
남자는 여자의 가슴에 칼을 꽂았고 그녀의 살을 벌려 심장을 꺼냈다. 남자는 구역질을 참아가며 그녀의 심장을 전부 씹어 먹었다. 남자의 입술은 음탕하고 서글픈 붉은 빛이었다.
남자는 여자의 앞에 앉아 죽은 여자의 목소리를 상상하며 경찰에 전화를 걸었고 경찰이 들어왔을 때 그는 벌거벗은 여주인처럼 당당하게 현관문으로 나가 경찰에게 자수했다. 그는 여자의 죽음을 차지하였고 살해와 죽음과 피에 대한 시를 썼다. 그는 감옥에서 시집을 출판하였고 그의 시는 시집으로서는 드물게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시에 관한 인터뷰를 할 때 남자는 그의 착상이 꿈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했다. 꿈 속에서 그는 살해에 관한 시를 구상하고 있었고 그 시를 쓰기 위해 그는 아직 수행되지 않은 자신의 범죄를 자백해야만 했다. 그는 자백하기 위해 사체를 공개해야 했으며 아직 가지고 있지 않은 사체를 가죽 인형에서 오래낸 가죽 조각을 이어 붙여 만들었다. 짐승의 피부조각을 꿰매어 만들어놓은 가죽 인형은 얼룩덜룩하고 끔찍한 몰골이었다.
그는 승리자처럼 웃으며 경찰들과 악수했고 사건 현장에서 시집에 실을 기념 사진을 찍었으며 피투성이의 가죽 인형을 들고 강연을 다니기도 했다. 누군가 그의 살해가 조작된 것이라고 고발하기 전까지 그는 점점 더 높은 곳으로 비상하고 있었다. 그의 시들은 교과서에 실렸으며 그는 국제 작가 포럼에 대표자로 초청받기까지 했다.
그러나 누군가 그의 살해가 거짓이라고 고발하였고 경찰들은 가죽 인형에 대한 재조사를 진행하였으며 가죽 사체가 범죄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짐승들의 살점을 이어붙인 인간-사체의 모조품임을 밝혀내었다. 그의 시집은 여전히 베스트셀러 축에 들었지만 출판사는 스물다섯 번째 판의 인쇄를 거부하였고 빗발치던 인터뷰 요청과 방송 출연, 강연 요청도 순식간에 끊겼다.
꿈의 마지막 거리를 걸어가는 동안 그는 아직 가시지 않은 성공의 환희와 열기 속에서 희미하게 기침했고 무언가 그의 머리를 내려치는 소리에 깨어났다. 창가로 가보니 희미한 피 얼룩이 있었다. 유리창에 비추어진 채도가 옅은 하늘을 창밖의 하늘과 혼동한 어린 새가 자유롭게 활주하다 그의 유리창에 머리를 들이박고 낙하한 것이었다.
인터뷰에서 남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새의 암시를 보고 놀라 아파트 밖으로 내려갔고 그곳에서 머리가 깨진 채 피를 흘리는 천사를 보았다고. 천사는 그에게 심장을 꺼내어 주었고 그는 천사의 앞에서 모든 것이 조각조각 깨어지는 현기증을 간신히 참으며 심장을 집어삼켰다고.
인터뷰를 하던 기자 한 명이 남자에게 농담조로 그 새는 천사가 아니라 악마가 아니었느냐고 물었다.
남자는 목이 쉰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새가 신의 품에서 날아왔는지 지옥에서 올라왔는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 내게 그 둘은 같은 것입니다. 천사는 내게 인간의 시체이며 인간의 심장이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천사는 죽어서 피를 흘리는 부리로 내게 주소까지 불러주었습니다. 나는 놀랍게도 단 한 번에 천사가 내게 불러준 주소를 완벽하게 암기하였고 곧바로 그녀에게 갔습니다.
나는 천사의 심장을 먹었고 생의 기적을 턱 밑으로 뚝뚝 흘리며 그녀의 목소리를 상상했습니다. 내 몸 속에서 그녀의 심장이 미세하게 전율하며 흐느끼고 있었고 그날 밤 유치장에서 나는 그녀의 흐느낌을 선명하게 들을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초점이 맞지 않고 웅얼거리는 소리였지만 날이 갈수록 그녀의 언어를 분명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내 안에서 긴 시를 읊고 있었고 나는 그녀의 부름을 받아 시를 썼습니다. 그러므로 내 시는 곧 천사의 시입니다. 내 시는 천사의 목소리로 쓴 시입니다.
남자는 젖은 솜처럼 늘어진 창백한 머리를 붙잡으며 애걸하듯 소리쳤다. 나는 버려진 우산처럼 쓰러져 있었어, 그녀가 말했습니다. 목화솜처럼 터지는 포탄들 아래 그 아이는 누워 있었어. 그 애는 마치 별을 보는 것처럼 하늘을 향해 조용히 누워 있었고 나는 곧 그 애가 죽어 있다는 걸 알았어. 나는 그녀를, 그녀의 시를, 그녀의 심장을 숭배하였지만 단 한 순간도 잠을 이룰 수 없는 것은, 긴 악몽 속에서 끔찍한 흐느낌을 헤매어야 하는 것은 분명 가혹한 일이었습니다. 언젠가 나는 괴로움을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더 이상 그녀를 듣고 싶지 않다고 말했고 그녀는 목 졸린 병든 소리로 거칠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습니다. 나는 밤새도록 그녀가 살아서 숨 쉬는 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내 턱은 언제나 피로 젖어 있고 입에서는 인간의 심장의 절망적인 비린내가 진동합니다. 삶은 저주이고 우리는 그 저주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교사는 발작적으로까지 느껴지는 긴 암송을 끝내고 웃었다. 아이들은 화면 속의 텅 빈 웃음소리처럼 건조한 웃음을 터뜨렸다.
교사는 여자에게 이게 누구의 판결문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여자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백치처럼 멍하게, 또한 굴욕적으로 아이들의 침묵 같은 웃음소리를 듣고 있었다. 소녀는 여자를 위로하듯 싱긋이 미소 지었다.
교사는 그 판결문이 그녀의 것이라고 말했다. 교사는 미친 듯이 웃으며 여자를 향해 소리쳤다. 오직 하나의 언어만, 하나의 언어만을 선택해야 해, 유리! 약속했잖아. 오직 하나의 꿈과 하나의 죽음과 하나의 삶과 하나의 언어만을! 이 애는 네게 감옥에 관해 이야기했겠지. 감옥, 죄수들, 죽은 시인과 피투성이 시에 대해. 이 애는 새로 온 아이들 누구에게나 그런 말을 해. 재판이 끝나기도 전에 판결은 이미 내려졌고 우리는 불가해하고 어두컴컴한 판결의 언어를 해석하며 달려나가고 있는 거라고.
아이들은 TV의 음향효과처럼 공허하게 웃었다.
여자는 그 말이 거짓이냐고 물었다.
이번에는 소녀도 교사와 아이들과 함께 웃었다.
아, 유리. 네 오빠는 어디에 있니? 교사의 물음에 여자는 모르겠다고 답했다.
넌 그 애를 잃어버렸구나! 교사는 음울한 얼굴로 소리쳤다. 너는 그 애를 잃어버렸어. 너는 그 애가 너를 잃어버리게 만들었어. 그건 의도적이었어. 그렇지? 너는 그 애가 귀찮았고 그 애와 같이 돌아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 애의 손을 놓쳐버린 거야. 그 애는 너를 잃어버렸다는 죄책감 속에서 검은 숲의 끝없는 복도를 헤매다가 굶어 죽고 말겠지. 오직 슬픔만으로 굶어 죽는 짐승들처럼. 하지만 사실 그 애가 너를 잃어버린 게 아니라 네가 그 애를 잃어버린 거야. 네가 그 애를 버린 거야. 네가 그 애를 다른 새끼 고양이들과 함께 보자기에 싸서 얼어 붙어가는 겨울의 끔찍한 강에 던져버린 거야. 그 애는 네 꿈을 꾸고 있겠지. 악몽의 흉측한 구덩이들 속에서 네가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있을 거야. 그 애에게는 아무런 죄도 없는데!
여자는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그녀는 교사의 미친 언어를 더 듣고 싶지 않았다. 아이들은 기계적으로 웃고 있었으며 그녀는 더 이상의 조롱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그녀의 옆자리에 그림자처럼 앉아서 웃고 있는 남자아이를 발견했고 교사에게 남자아이가 돌아왔다고 말했다.
교사는 그렇다고, 그 애는 정말 돌아왔다고, 심지어 네가 이 교실로 들어오기 전부터 그 애는 돌아와 앉아 있었다고 말했다.
교사는 교단으로 돌아가 원을 통과하는 직선의 그림을 그리며 원으로부터 탈주하는 직선의 오디세이에 관한 시를 해설하기 시작하였고 소녀는 교사가 구겨버리고 간 판결문을 다시 가슴 속에 밀어넣고는 여자의 손에 쪽지를 쥐어주었다.
그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감옥에 있는 게 아니야. 죄는 이후에라도 지을 수 있어. 중요한 건 그들이 판결을 받았다는 거지. 판사는 그가 판결한 죄수들의 머그샷을 판결문의 원본 옆에 정성스럽게 철해놓은 앨범을 가지고 있을 거야. 그는 판결문을 연구하고 판결문의 언어를 곱씹으면서 죄수들의 초췌한 얼굴을 집요하게 들여다보고 마침내는 죄수들을 자기 자식들처럼 사랑하기에 이를 거야. 나는 상상할 수 있어. 판사들이 성자의 발에 입을 맞추는 구원받은 여인처럼 죄수들의 메마른 머그샷 위에 입을 맞추면서 흐느끼는 모습을 언제든 그릴 수 있어.
교사가 수업을 하는 동안 남자아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여자에게 다가갔다.
남자아이는 여자에게 돌아가자고 말했다. 돌아가자, 아냐.
어디로? 여자는 물었다.
남자아이는 어린 짐승처럼 몸을 떨며 속삭였다. 난 기다리고 있어.
여자는 물었다. 무엇을? 내가 집으로 돌아가기를?
남자아이는 눈물을 흘렸다. 네가 병에 걸리기를. 오직 그것만을 기다리고 있어.
아이들과 교사 누구도 그들의 대화에 신경을 기울이지 않았다. 잠들어 있는 장롱 속에서 천천히 움직이는 그림자에 대해 생각하지 않듯.
남자아이는 불현듯 입술을 비틀며 말했다. 당신이 아무런 대가도 없이 내 여동생을 연기해주고 있다는 걸, 나도 알고 있어요. 당신은 훌륭한 여배우예요. 내 여동생은 당신처럼 될 수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천사는 아무것도 연기할 필요가 없죠. 한 발을 심연 속으로 집어넣은 남자, 사라진 몸을 무관심하게 바라보는 남자. 남자는 발을 잃었지만 다른 사람이 되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온몸에 화상을 입은 여자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버리는 거죠. 남자아이는 흐느꼈다. 당신이 더 이상 내 여동생을 연기하지 않아도 아냐는 돌아올 거예요. 그 애는 약속했으니까. 그 애는 천사가 되었고 내게 천사의 확고한 음성으로, 맹목적인 순백으로 속삭였으니까. 엄마가 사형되던 때 나한테 묻더군요. 모든 것을 믿고 있냐고.
모든 것이라뇨? 나는 물었어요.
엄마는 말 없이 웃었고 나는 믿는다고 대답했어요. 엄마는 편안해 보였어요. 이미 오래전에 사형당한 짐승처럼. 엄마의 목을 내려치는 사형 집행인이 그녀의 또 다른 꿈인 것처럼.
엄마는 온순하고 담담한 시선으로 사형 집행인의 파란 눈을 올려다봤어요. 무대는 너무 좁지만 배우들은 넘쳐나요. 무대 위에 올라서지 못한 배우들도 여전히 연기를 하고 있어요. 하지만 그들을 배우라고 부르는 이들은 거의 없죠. 미친 이들이 아니면 무대 위에 서지 않은 짐승들을 배우라고 부르지는 않아요. 하지만 무대 아래에서도 배우들은 여전히 살아 있고 무언가를 연기하고 있어요. 무대 위와 무대 아래의 연기는 질적인 차이를 가지고 있지 않아요. 다만 무대 위의 연기는 선별적이며 특정할 수 있는 것들뿐이고 무대 아래의 연기는 무한하다는 차이가 있죠.
나는 시인을 연기하고 있지만 곧 무대에 올라설 거예요. 엄마나 아냐가 갖지 못한 무대를 가지게 되겠죠. 난 3류 시인의 영광스럽고 굴욕적인 역할이라도 손에 쥘 수 있을 거예요. 내 시는 엄마의 것보다 낫지도 못하지도 않겠지만 엄마가 갖지 못했던 것을 나는 가질 수 있을 거예요.
아냐는 내게 돌아올 거고 나를 사랑할 거예요. 그 애는 착하니까 나를 버리고 떠나지는 않을 거예요. 아, 당신이 병에 걸리기를. 당신이 나와 같은 병에 걸리기를, 나는 진심으로 바라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