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젤 스테이크 18

재판정 내부는 시체 안치소처럼 추웠다. 여자는 어깨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남자아이는 여자에게 긴장하지 말라고 거듭 중얼거렸지만 그런 위로는 변호사에게 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변호사의 창백한 얼굴은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변호사는 습관적으로 웃옷을 더듬다가 셔츠에 주머니가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깨달은 듯 당황하며 셔츠 소매로 얼굴을 닦았다. 그들이 재판정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동안 회랑을 채우고 있던 대기자들이 그들을 멀거니 응시하였다. 그들의 눈은 수천 개의 별들처럼 은밀하고 덧없는 흰빛으로 반짝였다.

재판정의 입구 쪽에서 여자는 몇 개의 촬영용 카메라를 발견할 수 있었다. 카메라에 담긴 영상은 붉은 벨벳 법복을 걸치고 있는 재판관의 머리 위에 매달려 있는 얇은 스크린에 곧바로 상영되었다. 라이브 카메라들이 변호사와 암쥐, 남자아이와 여자의 뒷모습을 비추는 모습을 여자는 기묘하게 왜곡된 거울 같은 스크린을 통해 볼 수 있었다.

재판장은 어린 소년이었으며 사람이었다. 그러나 검사 측에 앉아 있는 이는 중후해 보이는 수컷 늑대였다. 여자는 늑대를 보자마자 죽을 듯 놀랐다. 늑대는 은색과 흰색, 잿빛의 혼합된 털로 뒤덮여 있었다. 늑대의 눈은 바다 깊은 곳에 매장된 황금 같은 빛깔이었다.

그들은 늑대의 맞은편에 섰다. 재판정 내부에도 그들을 위한 의자는 없었다. 카메라 옆쪽에 마련된 방청석 자리를 빼곡이 메우고 있는 짐승들도 의자 없이 서 있었다. 그들은 너무나 밀집해 모여 있는 탓에 누군가 실수로 넘어지기라도 하면 모두가 압사당할 위험에 처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의자에 앉아 있는 이는 십대의 소년으로 보이는 재판장뿐이었다. 재판장의 앞에 위치한 서기 역시 서 있었다. 서기는 등이 구부정한 백발의 노인이었는데 재판 기록을 위한 타자기는 그의 목에 매달려 있었다. 그의 목은 너무나 가늘고 주름투성이었으며 타자기는 끔찍하게 거대하고 무거워 보여서 마치 그가 지금 막 절망적인 처형을 당하고 있는 도중인 것처럼 보였다. 그의 목은 보이지 않는 시간의 은밀한 저항력에 휩쓸려 부러지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노인은 신음조차 흘리지 않고 타자기에 가느다란 손을 올리고 있었다.

단 위에 앉아 있는 소년과 서 있는 노인의 얼굴은 거의 같은 높이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래서 소년은 재판정에 들어오는 피고인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빼꼼이 내밀어야 했다.

앉으시오.

소년은 엄숙한,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높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판사석에 따로 마이크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소년의 목소리는 엷고 희미하게 퍼질 뿐이었다. 변호사와 암쥐는 피고석에, 여자와 남자아이는 증인석에 서 있었다. 증인석은 피고석과 검사석 사이, 서기의 뒤편에 위치해 있었다.

소년은 가느다란 목소리로 재판이 시작했음을 알렸다. 검사측 발언 기회가 주어졌고 늑대는 끔찍하고 잔학한 살인자가 이 자리에 있는 이유를 알지 못하겠다고 소리쳤다.

늑대의 황금빛 눈은 사시로,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어서 여자는 그가 암쥐를 바라보는지 여자를 바라보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물론, 그의 말은 암쥐를 향한 것이었다.

여자는 늑대만을 홀린 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오직 그녀를 대상으로, 그녀의 바로 앞에서 친근하게 속삭이고 있는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남자아이는 불안한 듯 입술을 물어뜯었다. 남자아이의 어깨는 가느랗게 떨리고 있었다. 남자아이는 여자에게 괜찮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끊임없이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마치 자신을 위로하는 것처럼 보였다.

늑대는 단 위에 앉아 있는, 그의 시선보다 아래쪽에 위치한 판사를 내려다보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피고는 친족을, 그것도 그녀가 직접 낳아 기른 딸을 잔학하게 살해하였을 뿐 아니라 얼토당토 않은 위장극으로 사건을 은폐하려고 했습니다.

늑대는 비닐 팩에 밀봉되어있는 편지를 길고 검은 손톱으로 들어올려 판사석과 방청석을 향해 천천히 흔들어 보였다. 구겨진 종이는 곤충 떼 같은 검은 글자들로 가득차 있었지만 도저히 내용을 읽을 수는 없었다.

검사는 편지의 필체가 편지에서 직접 밝힌 불법 체류자 테러 집단의 것으로 보이지는 않으며, 편지를 쓴 이는 수많은 형용사들과 부사어들을 과시하듯 늘어놓고 있고 끔찍하게도 과도하게 시적인 은유들을 무분별하게 사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만약 편지를 보낸 이가 정말 소녀를 납치한 불법 체류자 테러 집단이라면 결코 이런 식으로 글을 쓰지는 않았을 겁니다.

여자는 늑대의 주둥이 밑 털이 조금 엉켜 있음을 발견했다. 여자는 그의 털을 쓰다듬는 작은 분홍빛 손들을 떠올렸다.

저는 오랜 시간 많은 잔혹한 범죄자들을 상대했습니다. 늑대가 말했다. 물론 그들 중에는 진짜 불법 체류자 테러 집단 가담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들 역시 협박문을 썼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협박문은 이 글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들은 기껏해야 작은 메모지에 접촉 시간과 장소 정도만 갈겨쓸 뿐입니다.

그러나 이 편지에서, 늑대는 힘 있는 소리로 말했다. 접촉 시간과 장소는 스쳐가듯 부차적으로 언급될 뿐입니다. 피고는 사법 당국을 끔찍하게 기만했습니다. 폐허가 된 행성에서 홀로 글을 쓰고 있는 소녀에 대한 비유는 대체 무엇 때문에 필요한 건가요? 구부러진 시간의 기하학에 대한 비유는? 촉각적 기하학의 기이한 장치에 대한 비유는? 잃어버린 물건이나 시간, 공간을 찾기 위해 잃어버렸다는 암시만을 간직한 채로 텅 빈 땅을 찾아 헤매는 아스테카 주민들에 대한 비유는 또 어떻습니까? 우리 우수한 수사관들은 최근 이 편지에서 새로운, 끔찍하게 암시적인 상징을 발견하기도 했습니다. 바로 텅 빈 굴 속에 스스로 들어가 죽음이 그들을 찾아오기만을 기다리던 성직자들에 대한 상징입니다. 이 상징은 교활하게도 접촉 시간을 알리는 글과 피고의 어린 시절에 대한 회상으로 추측되는 지하실의 작은 암캐에 대한 서술 사이에 은밀하게 삽입되어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두 가지의 상이한 서술 내용의 일부가 이 비밀스럽고 교활한 상징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피고인이 작성한 것으로 확인된 이 잔학한 새로운 상징은 카타콤의 성직자들에 관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중의 은유입니다. 굴 속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이는 사실 피고인 자신입니다. 피고인은 땅 위의 사법체계가 구더기들이 들끓는 음습한 땅굴과 다름없다고 비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년은 새처럼 가느다란 목소리로 물었다. 굴 속의 성직자들은 어떻게 되오?

늑대는 야릇하게 웃으며 산 채로 말라 죽는다고 말했다. 죽기 직전의 순간에 그들은 마체테에 허벅지를 베인 암사슴을 떠올립니다. 암사슴의 부드럽고 유연한 허벅다리에서는 따끈한 붉은 피가 흘러나오고 그들은 꿈 속에서 서성이는 불안한 방랑자들처럼 서로의 입술에 입을 맞춥니다. 피는 따끈하고 애처롭습니다. 그들은 암사슴의 피와 또 다른, 비밀스러운 체액이 그로테스크한 충돌로 부딪히는 것을 느낍니다. 혼합은 세로로 잘게 찢어진 두 마리의 짐승이 엉키는 일과 같이 불온한 재앙입니다.

여자는 숨겨진 상징을 늑대가 모두 지어낸 것이라고 의심했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 숨겨진 상징이 그토록 상세하고 구체적이리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소년 판사는 의심없이 검사의 발언을 모두 인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등이 굽은 서기는 탁자기 위를 리드미컬하게 짚어나갔다. 그는 중간중간 무언가를 고심하듯, 혹은 즉석에서 새로운 표현을 고안해내듯 주저하다가 놀랍도록 빠른 속도로 타자를 치는 일을 반복했다. 타자기 내부에는 종이가 들어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서기의 손놀림은 일종의 독특한 기억술의 일종일지도 몰랐다. 그가 손가락의 미묘하고 경쾌한 궤적을 집에서, 혹은 사무실에서 진짜 종이를 집어 넣은 타자기 위에서 반복하며 날인할 것이라고 여자는 생각했다.

검사측의 확고하고 자신감 있는 말투에 비해 변호사는 끔찍하게 소심하고 초조한, 차라리 체념한 듯한 어투로 중얼거렸다. 판사는 변호사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 몇 번이고 그에게 재발언을 요청해야 했다. 그러나 추상적이며 기실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도 명확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검사측의 발언에 비하면 변호사의 변론은 명쾌했으며 흠 잡을 구석이 없었다. 변호사는 법률과 지난 판례들을 능숙하게 인용하며 변론을 전개해나갔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사그라들었고 그래서 그 자신이 변론을 확신할 수 없어 한다는, 이미 패배를 예상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판사는 마침내 변호사의 말을 빠짐없이 들으려는 모든 노력을 포기한 듯 자기 손가락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손장난을 하고 있었다. 변호사는 체념한 듯 판사와 끊임없이 움직이는 소년의 손을 흘깃 바라보면서도 계속해서 변론을, 놀랍도록 능숙하고 매혹적이지만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는 논리를 전개해나갔다. 암쥐는 중간중간 변호사의 힘을 돋우듯 그의 등을 쓰다듬었으나 그럴 때마다 변호사는 깜짝 놀란 듯 소스라치며 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웅얼거릴 뿐이었다.

여자는 판결이 재판의 진행과정과는 상관없이 이미 정해졌다고 생각했다. 암쥐는 언제나 관처럼 흐릿한 유리 너머에서 찍찍거릴 것이고 죽은 여자아이는 영원히 그들에게 돌아가지 않을 것이었다. 여자는 여자아이가 이미 실종되었음을 알고 있었다. 실종된 아이를 찾는 일은 죽은 이를 찾는 일보다 훨씬 어려우며 불가능에 가까운 작업이었다. 심지어 실종되었는지 여부조차 알려지지 않은 경우 더욱 그랬다. 그러나 실종된 여자아이는 어디엔가, 알려지지 않은 형식으로 분명히 존재할 터였다.

피고인은, 변호사는 이제 거의 속삭이듯 말하고 있었다. 단지 글을 썼을 뿐입니다. 편지가 피고인에 의해 작성되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지만 그 편지 자체가 살인의 물증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살인은 다른 이에 의해 이루어졌고 피고인은 오직 편지만 썼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습니다. 피고인은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시인,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비밀스러운 시를 쓰는 여자였으므로 화제가 될 것이 분명한 사건의 최종적인 단계에 개입해 자신의 시를 협박문으로 위장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끔찍하고 추잡한 일이고 범죄이기도 하지만 살인죄는 아니지요. 살인죄나 법정 최고형을 주장하기 위해서 검사는 피고인이 살인에 직접적으로 개입되었다는 보다 확실한 증거를 제시해야 할 것입니다.

암쥐는 변호사의 앙상한 등을 은근하게 문지르고 있었다. 암쥐는 사건에 변호사나 남자아이만큼 큰 관심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어쩌면 암쥐는 이 사건과 정말 아무런 관련이 없을지도 몰랐다. 면회인이 면회하고자 하는 죄수를 만날 수 없다면 법정에 출두한 피고인은 검사가 기소한 그 피고인이 맞다고 단정할 수 있는가? 어쩌면 암쥐는 방청석에 서서 변호사의 변론 내용을 추정하며 수군거리는 방청객들, 혹은 다른 모든 이들만큼이나 이 사건과 무관한지도 몰랐다. 무한한 원주의 직선과도 같은 꿈의 선들.

변호사는 당초의 계획대로 재판을 길게 끌기 위해 무언가를 더 말하려 애썼지만 달싹이는 입술에서는 이제 한 마디의 말조차 들리지 않았다.

방청객들은 초조함과 지루함을 이기지 못하고 불만 섞인 야유를 보냈지만 판사는 묵묵히 그의 입술이 다물리기를 기다렸다. 변호사는 알 수 없는 신음소리를 몇 번 내뱉더니 곧 완전히 입을 다물었다.

소년 판사는 재판석 앞을 향해 상체를 구부리며 증인신문 순서를 선언했다. 소년의 가느다란 상체가 판사석 앞을 향해 완전히 구부러진 탓에 그는 곧 앞으로 고꾸라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변호사는 체념한 듯 여자에게 눈짓했고 법정 뒤편에서 나이든 남자가 불쑥 다가와 여자에게 짙은 갈색의 규석 칼을 가져다 주었다.

판사는 여자에게 선서를 하라고 새된 소리로 말했다. 여자는 칼을 가슴에 가져다 대었다. 그녀는 주저없이 가슴을 갈랐고 벌어진 가슴 내부의 심장을 꺼내어 들어올렸다. 심장은 뛰고 있었다. 라이브카메라에 비추어진 그녀의 심장은 작고 붉은 벌레처럼 보였다. 장미의 무른 그림자, 거의 무한한 장미들, 그리고 아직 존재하지 않는 장미들.

여자는 심장을 다시 벌어진 가슴 속에 집어넣고 진실만을 말하겠다고 속삭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판사나 변호사의 목소리와는 달리 법정 내부 전체로 퍼져나갔다. 방청객들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여자는 아직 벌어진 가슴의 상처로 흘러내리는 심장을 왼손으로 움켜쥐며 말했다. 테두리를 지닌 소리, 피부가 벗겨진 소리, 내장을 흘리고 있는 소리.

짐승들은 운명 혹은 과거와 닮아가요. 여자는 야릇하게 웃으면서 속삭였다.

판사가 그녀를 제지했다면, 그녀가 재판과 무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질책했다면 그녀는 기꺼이 입을 다물고 법정 문을 열고 나갔을 것이었다. 그녀는 실로, 재판과는 무관한 사람이었으므로. 그러나 그녀가 재판과 무관하지 않다면 그녀에게는 할 말이 있었다.

몸을 잃은 심장은 어쩌면 남겨진 몸보다 오래 살아 있어요. 여자는 말했다. 잘라낸 머리카락, 물 속에서 기이한 꽃 모양으로 풀어지던 피나 피부조각 같은 것들도. 제물의 얼굴을 물어뜯는 검은 개들. 개들의 혀는 장미의 무르고 젖은 그림자처럼 보여요.

여자는 가슴에서 쏟겨나가는 심장을 갈무리하며 헐떡였다. 난 벌써 몇 번이나 비슷한 재판을 경험했어요. 비슷한 쥐들과 비슷한 여자들 비슷한 죽음들과 무엇보다 비슷한 자살들 비슷한 교실들과 비슷한 병원들. 하지만 죽음은 단 한 번뿐이에요. 실제로는 재판 역시 한 번뿐이었지만 하나의 재판은 동시에 무수히 증폭된 다른 재판들과 함께 있죠. 교실들도 자살들도 마찬가지예요. 하나의 죽음은 수십 수백 억, 혹은 아직 알려지지 않은 숫자에 상응하는 죽음들과 연결되어 있으므로 하나의 죽음을 지칭하거나 묘사하는 것은 다른 모든 죽음들에 대해 말하는 일과 같아요. 하나의 죽음을 말한다면 다른 모든 죽음들에 대해 말하는 일을 피할 수 없어요. 하지만 하나의 죽음조차 감당할 수 없는 하나의 짐승이 그 모든 죽음들을 이야기할 수는 없죠. 그러므로 우리는 닮지 않은 것들, 치명적인 유사성을 미스테리로 숨기고 있는 반복들을 행하죠.

방청석의 관객들이 불가해한 폭소를 터뜨렸다. 그들은 스크린에 비추어진 여자의 영상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는 거대하고 끔찍한 거울을 바라보듯 판사의 머리 위에 투영된 그녀 자신의 확대된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상반신은 앞을 향해 구부러져 있었다.

여자는 조심스럽게 어깨를 폈다. 알려지지 않은 짐승들이 알려지지 않은 짐승들을 살해하고 있어요. 알려지지 않은 밤들이 알려지지 않은 밤들을 살해하고 있어요. 알려지지 않은 죽음들이 매장된 우주를 알려지지 않은 호흡기관을 가진 심해어들이 떠돌고 있어요. 죽음으로 시작한 것은 죽음으로 끝나요. 꿈으로 시작한 것은 꿈으로 끝나요. 악몽으로 시작한 것은 악몽으로 끝나요.

판사와 늑대, 변호사와 암쥐는 참을성 있게 여자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들의 얼국가죽은 하나같이 무척 얇고 연약하게 보였다. 얇은 종이가면을 쓴 것처럼. 그러나 그것은 살로 만들어진 가면이었다. 내부는 텅 비어 있는, 아니, 다른 살의 가면들로 겹겹이 차 있는.

여자는 몽롱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꿈에 있는 동안 우리는 꿈이 유일한 현실이며 그곳에 죽을 때까지 상주할 수 있다고 믿어요. 그러나 꿈은 어느 순간 우리를 배신하고 우리는 다른 꿈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게 되죠. 꿈의 한중간에, 하나의 꿈이 끝나기도 전에요. 하나의 꿈 속에서 피어났던 장미는 다른 꿈에서 두 개로 불어나고 또 다른 꿈에서는 완전히 사라지고 말죠. 어떤 꿈에서는 장미가 천 송이로 불어나고 또 어떤 꿈에서는 오백 송이 또 어떤 꿈에서는 무한한 장미가 펼쳐져요. 그래요. 무한이에요. 꿈은 무한을 상상할 역량이 있어요. 심지어는 무한한 사물까지도. 장미는 무한만큼이나 추상적인 개념이라는 사실을 꿈은 직관하고 있어요. 무한은 장미만큼이나 구체적인 대상이라는 사실 역시. 그러므로 꿈은 0과 무한을 동시에 소유하고 있어요. 하지만 무한한 장미 위에서 잠드는 동안에 우리는 결코 단 세 개뿐인 장미를 상상하지 못한다고 믿죠. 539개의 장미를 짓뭉개는 동안 우리는 무한한 장미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죠. 하지만 무한한 장미와 539개의 장미와 세 개의 장미와 존재하지 않는 장미는 모두 동시에 존재하고 있어요. 적어도 내가 아는 바에 의하면 꿈은 그런 식으로 작동하는 육중한 기계에요. 물론 피와 살로 이루어진, 언제고 파리의 습격을 받을 숙명을 가지고 있는 기계이죠. 장미, 장미, 장미들. 내가 말하는 장미는 언제나 바뀔 수 있는 상징이에요. 심장이나 새, 천사나 하얀 모래, 신의 음부 같은 것은 언제나 동시에 장미이기도 하죠.

하나의 꿈에서 나는 목을 매 죽었어요. 다른 꿈에서 나는 얼굴이 뭉개진 남자에게 살해당했고 또 다른 꿈에서 나는 나보다 작은 어린아이를 살해해 죽였어요. 하지만 어떤 꿈에서 나는 고양이의 목을 조르고 있던 어린아이였고 나보다 나이든 여자에게 살해당해 죽은 여자아이였죠. 인형의 얼굴에 가위를 박아넣은 어린아이였고 망가진 얼굴로 웃던 인형이었죠. 그 모든 일은 동시에 벌어졌어요. 그곳엔 무한한 장미들이 있었고 하나의 장미도 존재하지 않았어요. 무한과 0은 언제나 동시에 있는 거예요. 그보다 추상적인 숫자나 너무나 물질적이어서 조악하게까지 느껴지는 숫자들 역시 동시에 있는 거예요.

증오를 부르는 것은 이전의 증오들이 파고들었던 결절점의 흔적들이고 고통을 부르는 것 역시 마찬가지예요. 증오의 이전에는 증오가 있으며 고통의 이전에는 고통이 있어요. 오직 경이만이 달라요. 경이의 이전에는 경이가 아닌 무언가가 있죠. 그러므로, 꿈은 거의 무한한 경이로운 장미의 그림자예요. 경이로운 꿈의 이전에는 경이롭지 않은 꿈이 있으며 경이로운 꿈의 이후에는 다시, 경이롭지 않은 꿈이 있어요. 꿈들은 영원히 순환하고 있지만 순환의 고리는 지나치게 크고 불규칙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무한한 원주의 일부인 직선을 보고 꿈의 모든 궤적을 예측할 수는 없어요.

방청객들이 또다시 폭소를 터뜨렸다. 여자는 슬며시 웃으며 말했다. 물론 모든 것은 가정일 뿐이에요. 나는 간혹 무한한 장미들을 상상하고 오직 장미들로 이루어진 시간과 장미들로 이루어진 시계를 고안하기도 해요. 장미의 살점을 파고드는 붉은 분침 역시 장미이죠.

모든 죽음들이 동시에 있었지만 그 죽음들이 같다고 이야기하는 건 아니에요. 내가 죽인 아이는 언젠가 나였겠지만 그건 아주 추상적이고 모호한 범위의 지칭에 불과해요. 내가 죽인 아이는 그 애의 얼굴에 사과 깎던 칼을 박아넣던 나와 같지는 않죠. 그 애의 목을 조르던 나와도 같지 않아요. 그 애가 죽인 고양이는 그 애에게 목 졸려 죽던 고양이와 같지 않아요.

그러나 그곳에는 역겹고도 범죄적인 유사성이 있어요. 그건 치명적인 비대칭성이에요. 그래요. 대칭성이 아니라 비대칭성이에요. 삼면화의 판들 위에서 춤추며 경련하는 미세한 차이들처럼, 오직 차이의 평면 위에서 진동하는 감응의 운동이에요. 무한한 장미와 동시에 존재하는 0의 장미는 경련하고 있으며 그 경련의 비밀스러운 진폭이 바로 미스테리의 열쇠이죠.

예컨대 존경하는 판사님, 나는 재판을 지켜보던 도중 깨닫고 말았답니다. 나를 내려다보는 당신과 내가 닮았다는 사실을요. 우리는 다르기 때문에 닮을 수 있는 거죠. 조금도 닮지 않았기 때문에 닮을 수 있는 거예요. 판사님, 무한한 장미들은 무한한 꿈을 꿀까요? 아니에요 판사님. 무한한 장미들은 0의 꿈을 꿔요. 무한하지 않은 장미들만이 무한한 꿈을 꾸죠.

나는 여러 번 죽었고 여러 개의 꿈들은 순식간에 사그라들거나 절망적으로 서서히 부패하거나 검은 대기 중에 생매장되었지만 아직 사라지지 않은 꿈들은 무한한 장미의 표상으로 남아 있어요. 나는 남아 있는 꿈들을 떠돌아요. 내가 부재하는 꿈은, 판사님, 사실 하나도 없어요. 모든 꿈에는 꿈의 등장인물이 존재하죠. 사라지지 않은 모든 꿈에는요. 모든 세계에는 모든 세계가 살아 있어요. 죽음을 잊은 짐승들은 영원히 죽지 않고 꿈을 꾸죠. 죽은 짐승들 역시 죽지 않은 꿈을 꾸며 죽지 않은 꿈 속에서 짐승들은 영원히 살아 있습니다. 하나의 영원한 꿈만으로도 삶은 영원해지는 것이죠. 무한한 꿈들 중 단 하나의 영원한 꿈만으로도. 물론 영원한 꿈은 하나가 아닙니다. 무한의 종류는 셀 수 없이 많으므로 또한 양의 무한에 음의 무한이 아닌 무엇을 더하더라도 무한은 언제나 무한이므로 무한한 꿈들은 무한하게 많죠. 하나의 절망은 무한한 절망이며 절망이 존재하지 않는 꿈조차도 절망적인 꿈을 가져요.

그러므로 사실, 0의 절망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죠. 존재하지 않는 것은 모든 존재를 소유하고 있으므로 존재의 완벽한 부정은 영원히 불가능한 것이죠. 하나의 살인은 다른 모든 살인이고 하나의 살해는 다른 모든 살해이며 동시에 살인과 살해의 부정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살해의 부정은 필연적으로 모든 살해를 함축하고 있어요.

난 자살하면서 그리고 살해당하면서 동시에 내 아래에서 웃으며 죽은 수백 억의 짐승 소녀들을 보았어요. 어떤 짐승들은 신음소리를 냈고 어떤 짐승들은 미친 듯이 울었으며 어떤 짐승들은 서글픈 비명을 질렀고 어떤 짐승들은 물고기처럼 침묵했죠. 물고기처럼 말이에요. 판사님. 물고기가 입을 뻐끔거리는 동안 아직 존재하지 않는 음률을 찾아 헤매고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나요? 물고기는 그들 자신조차도 감지할 수 없는 소리로 울고 있고 그들의 울음소리는 그들이 모두 멸종된 뒤에야 발견되리라는 생각을요. 울음소리는 보석처럼 반짝이는 화석으로 변하고 후대의 짐승들은 그 보석들을 잘게 빻아 모래처럼 만들어 귓속에 부어넣어요. 그건 황홀하고 절망적인 마약이에요. 물고기들은 후대의 짐승들의 귓속으로, 내장으로 파고들어가 몽롱하고 관능적인 울음을 속살거리고 짐승들은 온몸을 경련하면서 그 노래를, 창자를 찢어발기는 음악을 들어요.

하지만 지금 우리는 물고기처럼 침묵하거나 침묵하는 물고기들만을 보죠. 물고기들은 죽으면서도 신음조차 흘리지 않아요. 물고기들은 물고기들처럼 조용히 죽어요. 수만 마리의 멸치떼들은 수만 개의 입을 가지고도 파도보다도 조용히 죽어요. 산채로 배가 갈리면서도, 머리가 뜯기고 내장이 뜯겨나가면서도 물고기들은 죽음처럼 고요하죠.

내가 지금 횡설수설하고 있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횡설수설할수록 나는 더 잘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판사님. 우리에게는 지나치게 많은 거울들이 있고 그 거울들은 기괴하게 늘어진 불구의 형태로 불구의 상을 비추고 있죠. 그 모든 거울들은 무한한 꿈들에 퍼져 있으며 또한 하나의 꿈에 전부 포진해 있어요. 그건 특별한 비밀도 아니에요. 원과 같은 면적의 정사각형을 떠올리는 것만큼 직관적인 일이죠. 꿈들은 무한하므로 상수 개의 꿈들이 죽는다고 해도 꿈들은 영원히 무한함을 지니고 있어요. 단 하나의 꿈 역시 무한함을 내포하고 있으므로 불가능하지만 설령 단 하나의 꿈만이 남는다고 해도 꿈은 무한하죠. 난 기하학을 더듬으면서 무한히 확장되는 꿈의 창문을 느껴요. 꿈의 창문, 혹은 촉지적 기하학. 죽음 이후에는 죽음이 있고 죽음 이후에는 삶이, 그리고 동시에 죽음이 있어요. 죽음이 없는 삶은 없으며 삶이 없는 죽음은 없고 장미가 없는 장미는 없으며 무한하지 않은 장미는 없어요. 어디로도 이르지 않는 계단들과 동일하고 무한한 숫자들, 불안과 불안에 대한 공포, 공포에 대한 공포. 숫자에 무관심한 신들조차도 무한을 소유하고 있어요. 미쳐버린 신들조차도, 서로의 얼굴가죽을 뜯어먹으며 울부짖는 빌어먹을 신들조차도 영원한 숫자들을 소유하고 있어요.

대부분의 신들은 미쳐버렸어요. 판사님. 신들은 나나 당신보다도 더 미쳤어요. 우리가 소유하고 겁탈하고 증폭시키는 그 많은 신들보다도 더 미쳤어요. 신들은 신들보다 미쳤어요. 그들은 무한한 장미의 거울들을 동시에 지각하며 바라볼 수 있죠. 미치지 않고서는 무한한 영상들을 동시에 이해할 수 없어요. 심지어 장미들은 계속 늘어나고 있죠. 무한이 계속 증폭되고 있다는 거예요. 하나의 무한함과 두 개의 무한함 39개의 무한함과 2949개의 무한함, 30480532개의 무한함과 영원한 무한함, 무한한 무한함.

신들은 우리에게 정상적인 관심을 기울일 수 있을 만큼 침착하지 못해요. 우리 머리칼 한 올의 움직임마저도 망상적인 관념의 세계에서는 끔찍하게 확장되어 보이죠. 신들은 절망적으로 증폭된 더듬이들, 촉수들, 겹눈들을 봐요. 신들은 아름다움의 다른 면인-혹은 같은 면에 있다고도 볼 수 있죠 얼마든지요-흉측함을 무한한 흉측함들을 보아요. 신들은 여자의 벌어진 가슴에서 쏟겨나오는 심장을 봐요. 신들은 구역질조차 하지 않아요. 신들은 그다지 안타까워하지도 않아요. 신들은 완전히 미쳐버렸고 누군가 그들의 가슴을 절개해 심장을 끄집어내주기를 바라요. 그들은 더 많은 심장 더 많은 출혈과 더 많은 생으로도 만족하지 못해요. 아스테카의 사제들은 숙련된 도살자의 칼질로 희생자들의 가슴을 절개하고 태양만큼이나 많은, 그러나 무한에는 결코 도달하지 못할 심장들을 꺼내들어요. 그만큼 많은 죽음들로도 우리는 삶을 영원히 망각할 수 없어요. 죽음 이후에도 무언가는 살아남고 심지어 그것은 무한하기까지 해요.

신들은 무한한 장미들, 뱀들, 쥐들과 털들과 눈들과 검음과 밤들을 동시에 보아요. 신들의 눈은 멀었고 망가진 눈으로 그들은 더 깊고 끔찍스러운 곳까지 봐요. 신들은 스스로 눈을 뽑아내었고 텅 빈 눈구멍에서는 붉은 피가 줄줄 흘러내리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무한한 무한함을 응시하고 있어요. 이제는 붉은 피가, 영원한 핏방울들이 그들을 응시하고 있어요.

판사님, 여자는 벌어진 가슴에서 눈물을 흘리듯 피를 흘리며 헐떡였다. 여자는 떨리는 손으로 늑대를 가리켰다. 저는 늑대를 기다리는 돼지들을 알고 있어요. 늑대는 분명 약속을 했고 그걸 완전히 잊어버렸어요. 혹은 잊어버려도 괜찮다고 여긴 거죠. 돼지들은 늑대들이 찾아오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지만, 그들의 뒷모습은 거의 무한하지만 늑대는 아직도 그들에게 가지 않았죠.

늑대는 피처럼 불그스름한 황금빛 눈으로 여자를 응시했다. 늑대는 침착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돼지들의 이름을 물었다.

여자는 모른다고 대답했다.

늑대는 슬며시 웃었고 방청객들은 폭소를 터뜨렸다.

동일하고 무한한 숫자들과 돼지들이 대체 어떤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군요. 늑대는 중얼거렸다. 저 여자는 미쳤습니다.

방청객들은 동의하듯 수군거리며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는 그녀의 뒷모습 앞에 포진한 방청객들의 그림자들을 볼 수 있었다. 역겨운 현기증이 여자를 뒤흔들었다.

돼지들이 곧, 여자는 말했다. 동일하고 무한한 숫자이기 때문이에요. 돼지들이 곧 동일하고 무한한 신들이기 때문이에요. 신들은 신들로부터 버림받았고 신들의 삶들과 신들의 죽음들만을 원해요. 신들은 장미에 눈먼 미치광이들이고 무한의 내부에 유한한 것들이 있음을 볼 수 없을 만큼 심각한 불구예요.

당신은, 늑대는 웃으며 말했다. TV를 너무 많이 본 것 같군요.

판사는 말 없이 고개를 숙인 채로 그들을 듣고 있었다. 마치 이 재판과 무관하다는 듯, 판결을 내리고 판결문을 작성할 이는 그가 아닌 서기라고 믿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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