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젤 스테이크 17

1번 채널은 뉴스 채널이었다. 검은 정장을 차려입은 여자가 창문닦이 남자의 살해 사건을 보도했다. 소녀들과 남자아이는 여자 주변에 그림자처럼 모여들어 함께 TV 화면을 응시했다. 그곳에 비밀스러운 암호들이 감추어져 있는 것처럼, 혹은 투명한 투계를 바라보고 있는 군중들처럼.

아나운서는 청소 노동자가 49세의 남자이며 죽음 당시에 5명의 아이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고 보도했다. 그는 고층 빌딩의 창문을 닦고 있었으며 로프를 허리에 매고 있었고 작업 도중 큰 소리로 오페라 아리아를 부르고 있었다고 했다. 그의 노랫소리를 참아내지 못한 아파트 주민인 신경증자가 옥상으로 올라가 로프줄을 문구용 가위로 잘랐으며 남자는 30층 높이에서 추락하여 숨졌다고 전했다.

뉴스는 곧장 사건의 재현 영상으로 전환되었다. 르포보다는 영화적 기법으로 촬영된 영상에서 흰색 안전모를 쓰고 있는 중년의 남자는 공중에 매달린 채 오페라 아리아를 부르고 있었다. 네슨 도르마 혹은 그와 비슷한 다른 곡이었다. 노래가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확신할 수는 없었다.

공중에 매달린 남자의 앞에서 유리를 사이에 둔 검은 얼굴의 여자아이는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여자아이의 얼굴은 절망적으로 일그러져 있어서 남자를 지나치게 증오하거나 혹은 열망하는 것처럼 보였다. 환희에 젖은 듯, 혹은 경멸에 문드러진 듯 보이는 얼굴.

여자아이는 남자를 향해 무어라고 말하지만 그 소리는 너무 작아서 들리지 않았다. 적어도 남자는 듣지 못했거나 들리지 않는 척하고 있었다. 남자는 큰 소리로 아리아를 부르고 있었다. 공중에 매달린 채로, 우주에서 질식해가며 노래를 부르는 최후의 우주 비행사처럼. 그는 거대한 가슴을 부풀리며 숨을 들이쉬었고 내쉬는 숨을 모두 소진하며 소리를 내었다.

여자아이는 언뜻 매우 늙은 여자처럼 보이기도 했다. 끔찍하게 앙상한, 늙은 여자 혹은 십대 안팎의 어린 여자아이는 쉴새없이 입술을 움직였다. 붉은 입술 주름이 늘어났다 오므라들기를 반복했다. 여자아이는 울고 있었다.

여자는 여자아이의 눈으로 공중에 매달린 거대한 바퀴벌레를 보았다. 바퀴벌레는 허공에 흰 반점들로 가득 찬 배를 드러낸 채로 쉭쉭거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여자아이는 바퀴벌레가 곧 날개를 펼치리라는 것을 알았따. 거대하고 투명한, 끔찍하게 연약한 날개를 펴고 새처럼 투명한 하늘을 활보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고대의 사라진 공룡들처럼 엷은 피막을 한껏 벌린 채 공중을 날리라는 것을. 여자아이는 믿을 수 없이 가느다란 다리들이 열띤 갈망을 향해 비밀스럽게 움직이는 모양을, 치밀어오르는 구역질을 참으며 응시했다.

여자아이는 그만두라고 소리쳤다. 제발 날지 말라고. 새나 천사가 그러는 것처럼 날지 말라고. 여자아이는 바퀴벌레의 비상을 견딜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여자아이는 치아의 신경 다발을 찢어발기는 격렬한 통증에 눈물을 흘렸다.

견디지 못할 거야, 여자아이는 생각했다. 여자아이는 인형의 얼굴에 박혀 있던 문구용 가위를 빼내어 바퀴벌레의 검고 완벽한 구형의 눈 앞에 들이밀었다. 바퀴벌레는 여전히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칠판에 박아넣은 손톱, 움직이며 갈라지며 튿어지며 문드러지는 손톱들, 끼익거리는 치명적인 독성의 소음, 여자아이는 바퀴벌레의 흰 반점들 앞에서 위협하듯 문구용 가위를 흔들어 보였다. 바퀴벌레는 아랑곳하지 않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여자아이는 곧장 아파트의 옥상으로 올라가 로프를 잘랐다. 로프는 무척 두꺼웠기 때문에 뭉툭한 문구용 가위로 로프를 잘라내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지났다. 로프가 완전히 잘려나가기 전에 바퀴벌레는 날개를 폈고 새처럼 날아올라 여자아이의 머리 위로 올라섰다.

여자아이는 두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옥상으로 뛰어내렸고 바퀴벌레는 여전히 옥상 위 높은 곳에서 새처럼 비행하고 있었다. 여자아이는 즉사하였고 로프는 여자아이의 이마가 짓이겨지는 순간 끊어졌다.

여자는 그녀가 울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뉴스 영상에서는 더 이상 여자아이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검은 모자를 푹 눌러쓴, 피해자-의 재현 배우-와 같은 배우처럼 보이는 중년의 남자가 문구용 가위로 로프를 잘라내는 모습이 보였다. 로프는 끝까지 잘려나가지 않았고 재현 영상은 곧 아나운서의 상반신만 드러난 뉴스 프런트 화면으로 바뀌었으며 아나운서는 미치광이 신경증자가 한 가족의 생명줄을 끊어버렸다고, 다소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

여자는 이 뿌리를 잡아당기는 은근하고 집요한 통증을 느꼈다. 창녀의 목소리로 애원하던 쥐 경찰이 떠올랐으나 그를 당장 만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꿈은 갈수록 길어지고 있었다. 여자는 영안실로 변해버린 입원실들과 시체로 변해버린 환자들에 대해 생각했다. 검은 머리의 소녀는 환호성을 지르며 여자에게 이리 와 보라고 손짓했다. 소녀는 벽면을 빼곡이 채운 희미한 낙서들을 가리켰다. 낙서들은 연필로 희미하게 새겨져 있어서 그들은 검은 머리의 소녀가 낙서들을 가리키기 전에는 그것을 발견하지조차 못했다.

TV에서는 면역 체계가 완전히 손상되고 털이 빠지며 뼈와 가죽만 남을 때까지 성교를 하다가 죽어가는 설치류 동물에 대한 보도가 나오고 있었다.

보고 싶어, 죽고 싶어, 살고 싶어, 혹은 날짜로 추정되는 숫자들 따위의 상투적인 낙서들을 제외하고서도 기이한 문양처럼 보이는 낙서들이 벽면 가득 채워져 있었다. 소녀들은 푸른 얼굴의 가면 낙서에 유독 열광했다. 푸른 눈의 소녀는 그 그림이 귀신의 흔적일지도 모른다고 속삭였다. 검은 머리의 소녀는 죽어가는 자신의 반영을 그린 것일지도 모른다고 했으며 창백한 소녀는 죽은 애인을 그린 것이라고 단언했다. 물고기처럼 침묵하던 남자아이는 낙서들에 흥미가 동한 듯 손가락으로 낙서들을 일일이 더듬으며 반짝이는, 집요한 눈으로 그것들을 훑어보았다.

남자아이는 직사각형 내부에 십자가가 그려진 낙서를 가리키며 이것이 무엇처럼 보이느냐고 물었다.

검은 머리의 소녀는 창문이라고 대답했다.

아니야. 이건 신의 관 위에 놓인 십자가야.

그럼 이건? 푸른 눈의 소녀는 선의 일부가 지워진 타원을 가리키며 물었다.

남자아이는 껍질이 깨진 달걀이라고 대답했다.

목이 긴 소녀는 키득거리면서 달걀은 그런 식으로 깨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럼 너는 뭐라고 생각하는데? 남자아이는 소녀들에게 갑작스러운 친밀감을 느끼는 것처럼 다정하게 물었다.

목이 긴 소녀는 그것이 완성되지 않은, 알려지지 않은 물질이 새어나가는 우주라고 말했다.

소녀들과 남자아이는 오랜 친구처럼 친근하게 속닥거리며 여러 개의 창문들과 달걀들과 하늘들과 부서진 유리들과 금 간 달걀에서 태어나고 있는 병아리와 영원히 보이지 않는 문가를 들어오는 혹은 빠져나가는 중인 남자의 슬픈 얼굴을 찾아나섰다. 그들은 어리고 용기 있는 고고학자 무리처럼 보였다.

여자는 벽을 채운 희미한 기호들과 낙서들과 언어들과 언어의 모사물들이 전부 일종의 불투명하며 불완전한 창문들이라고 생각했다. 꿈과 꿈을 연결하는 창문들. 하지만 창문의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고 심지어는 창문을 구성하는 유리조차도 존재하지 않는다. 거울의 내부가 실재하지 않는 것처럼. 거울이 오직 표면만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창문 역시, 낙서 역시, 존재하지 않는 심부를 모사하는 언어들 역시.

여자는 사는 것은 자살이라고, 심지어는 예술보다도 더 자살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이후로도 몇 번이나 같은 문장을 떠올리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밤의 곤충 떼처럼 벽에 들러붙은 촘촘하고 음산한 낙서들과 그녀의 내부에서 들끓고 있는 축축하고 절망적인 언어의 날개들. 소녀들과 남자아이는 난제를 푸는 야망 넘치는 젊은 수학자처럼 벽면들에 맑고 부드러운 곡률을 간직한 눈들을 가져다 대고 있었다. 부패해가는 시체들의 냄새는 나지 않았다. 벽면을 채운 언어들의 냄새도, 소녀들과 남자아이의 부드러운 얼굴과 단단한 웃음의 냄새도, 이미지와 함께 집요하게 흘러나오는 실종자들에 관한 보도의 냄새도.

아나운서는 나지막하고 진중한 목소리로 실종자들이 하루 추산 오백삼십 명 가까이 되는 것으로 추산된다고 밝혔다. 하지만 실종 신고는 단 한 건도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실종자들의 신원도 파악되지 않았으므로 실종에 대한 추산은 어떠한 효력도 갖지 못하는 추측일 뿐이며 실종 자체가 일종의 음모론에 불과하리라는 의견들 역시 개진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여자는 한때 이 방에서 지냈을 간호사들 혹은 환자들이 지금 어디에 있을지 생각했다. 실종되지 않은 짐승들과 남지 않은 흔적, 사실이 될 수 없었던 연극들과 사실일 수 없었던 죽음들, 사실일 수 없는 실종들, 가장 흐릿한 그림자조차도 남기지 않은 부재와 달콤한 꿈의 가장자리에서 영원히 추락하고 있는 서글픈 악령들. 유리를 갖지 못한 창문들과 관 위에 놓인 죽음의 상징물과 아스테카의 제단 위에서 꺼내어진 피투성이 심장과 아직도 뛰고 있는 아직도 출혈하는 생명의 기호와 언어. 여자는 오한을 느끼며 학대당한 아이처럼 몸을 움츠렸다.

그녀는 순간, 그녀가 정말 남자아이의 죽은 여동생일지도 모른다고 그녀의 이름은 아냐이며 지하실에서 그녀는 천사가 되는 미래를 꿈꾸며 달콤하게 잠들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이곳에서, 그녀는 정말 천사일지도 모른다고. 왜냐하면 그녀는 그 애와 함께 천사의 심장을 썰어 먹었으니까. 그녀들의 입가는 피투성이였고 천사는 벌어진 희생자의 가슴으로 환하게 웃고 있었으니까. 천사는 성모처럼 자애로운 웃음으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천사의 내장은, 천사의 검은, 피투성이 구멍은 천사의 입술보다도 더 부드럽고 다정하게 웃고 있었다.

사는 건 자살이야. 여자는 생각했다. 여자는 남자아이의 경직된 팔 아래에서 졸도해가는 여자아이의 눈으로 허공을 떠도는 부드러운 날개들을 보았다. 날개들은 희고 투명했으며 흩날리고 있었다. 여자는 천사들이 그들의 얼굴 가죽을 뱃속에 넣고 운반하고 있음을 알았다. 천사들은 지나치게 멀리 가고 있었다. 천사들은 그들을 지나쳐 먼 곳으로 질주하고 있었다. 천사들의 가슴은 풀어헤쳐졌으며 벌어진 갈비뼈 사이로 심장이 부드러운 피를 출혈하고 있었다.

여자는 그녀가 감당해야 할 몇 개의 잃어버린 얼굴들에 대해 생각했다. 실종된 소녀들과 짐승들의 죽음에 대해, 그녀가 진실로 만들 수 있는, 그녀가 확정할 수 있는 죽음들에 대해. 죽음을 증언하는 일은 삶을 증언하는 일과 같았다. 처음으로 하나의 삶을 만들어내던 날, 그녀는 어머니가 되었고 동시에 살인자가 되었다. 그녀는 잔혹한 살인자와 관대한 희생자가 되었다. 희생자를 만든 것은 그녀의 죽음이었고 살인자를 만든 것은 그녀의 삶이었다. 희생자를 만든 것은 그녀의 증언이었고 살인자를 만든 것은 그녀의 실종이었다. 물방울, 혹은 핏방울처럼 닮은 소녀들은 창문에 이마를 가져다대고 웃고 있었다. 숨죽여 웃고 있는 남자아이는 소녀들의 쌍둥이처럼 닮아 보았다. 여자는 그들 중 누구의 이름도 모른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그러나 이름이 없는 모두가 실종자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모든 실종들이 사실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모든 죽음이 적시될 수는 없을 것이다. 모든 짐승들이 멸종될 수는 없을 것이다. 모든 짐승들의 삶이 기억될 수는 없을 것이다. 바다의 표면을 일그러뜨리는 미세한 주름들과 모래사장에서 순식간에 지워지는 희미한 얼룩과도 같은 얼굴들. 의식들, 죽음들, 실종들, 비행들, 추락들, 기괴한 정상과 뼈로 숨쉬는 죽은 심장의 잔해들. 천사들은 꺾인 목으로 뒤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 천사들은 오래 전에 눈 멀었으며 그녀들의 검은 피막은 보이지 않는 어둠만을 은밀하게 반사하고 있을 뿐이었다.

여자는 잠들지 못했다. 소녀들과 남자아이가 잠든 사이 여자는 방에서 빠져나와 병원 복도를 걸었다. 어디로도 이어지지 않은 복도들. 어디에도 닿지 않는 계단들과 어떠한 비밀도 숨기고 있지 않은 문들. 여자는 그곳이 꿈의 바로크적 미로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관습적인 망각으로 여자는 계속 걸었다. 길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물방울 같은 얼굴들을 분유하는 쌍둥이 영혼들. 물방울들은 서로 다른 곡률과 불구를 가지며 결코 완벽한 원형은 아니다. 여자는 불안과 불안에 대한 공포와 공포에 대한 공포를 잊었다.

복도 곳곳에 뚫린 앙상한 구멍들과 그 구멍들 속에 들어찬 시체들. 시체 안치소로 변해버린 환자실들을 여자는 묵묵히 지나쳤다. 관습적인 희망과 습관적인 망각. 여자는 복도가 어떠한 도형을 이루고 있는지 영원히 알 수 없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설령 복도가 원형, 혹은 나선형을 이루고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의 복도는 오직 하나의 복도로 이어질 뿐 결코 다른 곳으로 그녀를 데려다줄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비상계단을 통해 위층으로 올라갔다. 위층, 그리고 위층. 여자는 난간도 잡지 않고 계속해서 올라갔다. 불가해한 멀미가 그녀의 발목을 붙들었고 그녀는 비틀거리면서 언제든 계단 밑, 보이지 않는 심연으로 떨어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계단을 오르면서도 계단을 오르는 원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녀는 위태롭게 걸었다. 수평의 추는 나직하게 기울었다.

비상계단과 복도를 잇는 철문을 열고 나가면서, 그녀는 그곳에 무엇이 있을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꿈은 이미 발견하고 통과한 이미지들의 비정상적이며 뒤틀린 재현에 불과하므로, 꿈 속의 미래는 현실의 과거에 상응한다. 꿈 속의 꿈은 꿈 밖의 꿈의 과거, 이미 정해진, 확정된 우발적인 접촉들에 대응한다. 긴 꿈은 시간의 끝에 다다른 이들의 눈 먼 반영으로서의 세계이며 따라서 꿈의 미래에 대한 절망적인 예감은 언제나 옳은 것이다.

그녀는 표백된 개미굴 같은 환자실로 들어섰다. 몇 명의 사람들과 쥐들이 희고 긴 회랑 형태의 대기실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여자는 어렵지 않게 장밋빛 죄수복을 입고 있는 암쥐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여자의 뒤를 따라 그림자처럼 남자아이가 들어섰다.

암쥐는 그들에게 다가서며 재판이 곧 시작될 것이라고 속삭였다.

아빠는요? 남자아이는 초조하게 물었다.

암쥐는 그들 부부의 재판이 함께 열리지는 않는다고 대답했다.

여자는 암쥐가 남자아이의 어머니일 가능성은 극히 드물다는 소녀들의 이야기를 떠올렸지만 구태여 언급하지는 않았다.

잿빛 넥타이를 맨 셔츠 차림의 남자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그는 검붉은 턱수염을 기르고 있었는데, 수염은 힘 없이 늘어져 있었으며 둥글고 두꺼운 무테안경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남자아이를 향해 자신이 변호사라고 소개했다.

이 애는, 남자아이는 여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내 동생 아냐예요.

그래? 누나가 아니라 여동생이란 말이지? 변호사는 웃으며 여자를 유심히 내려다보더니 곧 놀란 듯 여자가 누군지 알 것 같다고 감탄하듯 중얼거렸다. 변호사는 여자에게 재연배우 자격으로 재판에 참석하는 것이냐고 은근하게 물었고 남자아이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변호사를 올려다보면서 아니라고, 이 애는 자신의 여동생이며 오늘 증인으로 출석할 예정이라고 어린아이 혹은 백치에게 말하듯 또박또박 이야기했다.

그러나 변호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젓고 여자를 바라보았다. 당신 사건이, 변호사가 중얼거렸다. 어디까지 갔는지는 잘 모르겠군요. 물론 당신이 가장 잘 아시겠지만.

여자는 그녀도 잘 알지는 못한다고 말했다.

변호사는 농담을 들은 것처럼 웃으면서 거의 소리칠 듯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우리 여배우께서는 자기 사건을 잘 알지 못한다는군!

대기실의 긴 회랑을 서성거리던 대기자들은 변호사의 농담에 잠시 건성으로 웃고는 이내 자신들의 비밀스러운 사건에 다시 몰두하였다.

남자아이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다고 변호사를 향해 말했고 변호사는 느닷없이 증인신청은 사전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암쥐는 변호사를 흘겨보며 말했다. 우린 몇 번이나 이야기했어요. 증인이 참석할 거라고. 당신은 알겠다고 했고 내가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는 분명히 증인 신청을 했으며 매우 정상적으로 처리되었다고 말하기까지 했죠.

변호사는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며 들리지 않는 낮은 소리로 무어라 중얼거리더니 곧 고개를 끄덕이고 당신 말이 맞다고 말했다.

암쥐는 변호사의 셔츠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면서 당신을 믿는다고 다정하게 말했다.

변호사는 알겠다고 거듭 중얼거렸지만 특별한 확신이 있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회랑의 기둥들 너머에는 아홉 개의 검은 문들이, 각각의 문들 위에는 대기번호를 알리는 붉은 디지털 숫자판이 있었다.

변호사는 대기번호를 뽑아왔는데 그 숫자는 100111110011이었다. 이진법인지 십진법인지 알 수 없는 수였다.

여자는 얼마나 기다려야 되느냐고 물었고 변호사는 멍청한 질문을 들었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알 수 없다고 말했다.

당신도, 변호사는 여자를 의아하게 보며 말했다. 알고 있을 거예요. 당신도 재판을 경험했으니까요.

여자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변호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여자를 주시하다가 곧 여자가 자신을 조롱했다고 생각하고는 불쾌하게 얼굴을 찡그렸다.

여자는 별 의미 없이, 어차피 이곳에서의 재판은 그리 중요하지 않잖아요, 하고 말했고 변호사는 최악의 농담을 들었다는 듯 화를 내며 그런 불길한 이야기는 설령 시시껄렁한 농담이라고 하더라도 하지 말라고 소리쳤다.

남자아이는 여자의 손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며 많이 긴장되느냐고 물었다.

여자는 변호사를 올려다보며 집요하게 물었다. 이곳의 재판은 그리 중요하지 않아요.

아가씨, 변호사는 보이지 않는 것을 격렬하게 인내하듯 과장될 정도로 말을 늘였다. 뭐가 중요하지 않다고요?

여자는 웃으며 말했다. 이곳의 재판이요.

암쥐는 화가 난 듯 여자를 내려다보며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냐고 소리쳤다.

이 아가씨는, 변호사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재판을 모르는 게 아닙니다. 다만 이 재판이 자신과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에 이렇게 무책임한 농담을 하는 것이죠. 제가 생각하기에는 이 여자를 증인으로 부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암쥐는 검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이미 증인 신청을 마쳤다고 했잖아요.

변호사는 정말 그렇다고, 그렇다면 여자가 증인석에서 어떤 악마 같은 거짓말을 하든 우리는 손쓸 방법이 없다고 체념한 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변호사는 잠시 침묵했다가 말을 이었다.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가령 재판이 예정된 시간보다 길어져서 자질구레한 순서들을 생략해야 하는 경우가 있죠. 물론 증인신문은 사소하지 않지만 증인신문보다 더 중요한 일들, 가령 변호사의 변호, 최후변론, 검사측의 기소 내용 발표, 재판장의 판결 같은 것은 결코 미루어질 수 없는 필수적인 순서들입니다. 재판장의 판결을 선언할 시간이 없다면 그 재판은 이루어지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죠. 하지만 증인신문의 경우 피치 못한 경우 생략될 수도 있는 과정입니다. 그러니까 재판의 순서가 치명적으로 밀려서 절차상 필수적이지 않은 것들을 진행하지 못하게 될 경우, 증인신문은 이루어지지 않거나 설령 진행되더라도 저 여자가 당신을, 그리고 우리 모두를 파멸시킬 만큼 많은 시간이 주어지지는 않을 것이란 말입니다.

암쥐는 변호사의 파리한 얼굴을 지긋이 바라보며 당신을 믿고 있다고 말했다.

남자아이는 애타게 소리쳤다. 아냐는 우리를 구하기 위해 온 거지 우리를 파멸시키기 위해 돌아온 건 아니에요. 아냐는 천사가 되었어요. 천사는 절대 나쁜짓을 하지 않아요.

변호사는 사악한 천사들도 존재한다고 야릇하게 웃으며 중얼거렸고 동의를 구하는 듯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 자들은 여기가 꿈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어. 여자는 생각했다. 꿈 속의 재판이 중요하지 않다는 걸, 사실 어떠한 영향도 미칠 수 없다는 걸 이 자들은 모르고 있어.

여자는 곧 잘못 생각하고 있던 것은 그녀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재판이 중요하지 않다고 뱀이 말했을 때 그가 언급한 재판은 꿈 바깥의 재판이었다면? 꿈 속의 재판은 꿈 속에서 나름대로의 중요한 효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토록 많은 관계자들이 의자도 없는 곳에 초조하게 서서 언제 시작될지도 모를 재판을 하염없이 기다릴 이유는 없을 것이다. 이곳에 서 있는 모든 이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이라고 가정하기보다는 오직 여자만이 착각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 더 개연적이었다.

꿈 속의 재판은 꿈 밖의 재판과는 무관하지만 적어도 한정된 영토 내에서는 불가침의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꿈 밖은 또 다른 꿈의 내부이므로 모든 재판은 모든 제한된, 그리고 사실은 떼어낼 수 없이 얽혀 있는 공간에 영향을 끼친다고 볼 수도 있었다. 이렇게 생각할 경우 하나의 재판은 다른 모든 재판만큼 치명적인 것이며 하나의 파멸은 모든 재판에서의 파멸과 관련될 것이다. 하나의 재판에서 무죄를 받는다고 다른 재판들에서 무죄를 받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의 재판에서 완전한 파멸을 선고받는다면 다른 재판을 받을 기회조차 사라지므로 다른 재판들에도 끔찍한 영향을 미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녀가 요제프 K처럼 굴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최악의 판결은 기껏해야 또 다른 죽음을 불러올 뿐이었다.

그녀는 끔찍하게 차가운, 하얀 타일 위에 주저앉았다. 회랑을 서성이던 재판 관계자들은 절망적으로 음울한 시선으로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마치 여자가 이곳에서 옷을 벗고 수음을 하고 있다는 듯 경악스러운 시선이었다.

변호사는 거의 울음을 터뜨릴 듯 떨리는 목소리로 여자에게 지금 뭘 하고 있는 거냐고 물었다.

여자는 검은 눈으로 변호사를 올려다보며 앉아 있다고 말했다.

변호사는 대체 왜 앉은 거냐고 물었다.

남자아이가 여자의 옆에 함께 주저앉고 나서야 변호사의 흥분은 가라앉았다. 암쥐는 아홉 개의 문들 위에 떠오른 아홉 개의 수열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숫자들은 너무 멀리 있어서 여자의 눈에는 숫자들이 정확하게 보이지 않았다. 쥐들은 대체로 심각한 근시이므로 아마 암쥐의 눈에도 그 숫자들은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암쥐는 마치 그 숫자들이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 것처럼, 불길하고 서글픈, 이미 오래 전에 잃어버린 미래에 대한 암시를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집요하게 숫자판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증인신문은, 변호사는 체념한 듯 중얼거렸다. 당신을, 그리고 우리를 파멸시킬 겁니다. 어찌 되었든 결코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는 못할 것입니다.

암쥐는 대답하지 않았다. 여자는 심한 현기증에 잠시 눈을 감았다. 눈을 감고 잠들지 않은 채 하나의 밤을 견디면 신들의 세계로 갈 수 있다는 이야기를 떠올리며. 하지만 신들은 이미 오래 전에 죽었으며 그들이 남긴 불멸의 흔적인 오직 광증일 뿐이었다. 신들은 미쳐버렸고 어디로도 향하지 않는 절망적인 길들을 만들다 목을 매고 자살해버렸다. 그들은 죽었지만 아직 살아 있는 그들의 정신, 혹은 몸, 혹은 그 무엇도 아닌 것들은 공중에 매달린 채 흔들리고 있었다.

신도들은 거미줄에 사로잡힌 날벌레처럼 허공에 매달려 정지한 신들의 주머니와 내장을 뒤졌고 그곳에서 황금 열쇠를 발견하였다. 신도들은 열쇠가 그들에게 가져다줄 보물을 찾기 위해 신들의 궁전을 노략하였지만 열쇠에 들어맞는 구멍은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열쇠는 짝이 맞지 않는, 영원한 비대칭의 물건이었다. 신도들은 신들에게 기만당하였으며 신들을 저주하고 겁간하였지만 신들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열쇠에 맞는 보물을 찾기 위해 신들의 궁전을 뒤지면서 그들은 더 많은 보물, 더 반짝이는 황금과 더 단단한 다이아몬드와 더 검은 피와 더 날카로운 칼날들을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신들의 자궁에서는 밤처럼 검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신들의 절개된 배는 정육점에 매달린 돼지의 몸체처럼 늘어져 있었다. 뼛조각들은 보석처럼 반짝였다. 신도들은 신들의 고기를 제단에 바쳤다. 신들은 오직 신들의 고기만을 원하기 때문이었다. 신들은 신들의 죽음만을 원하기 때문이었다. 신들은 오직 신들만을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거인들의 침략과 그들 자식들의 죽음을 예언할 뿐 그 참상을 막을 수는 없었던 신들, 막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신들, 다만 쓸쓸하고 비극적인 예언만을 남겼던 신들, 그들은 목을 매달고 허공에 정지해 있었다.

변호사의 턱수염은 눈물에 젖어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암시와 희망들. 여자는 암쥐에게 모든 것이 잘 되리라고 말했다.

그녀는 오직 그녀 자신만 웃고 있음을, 이 길고 아득한 기만적인 회랑을 가득 채우고 있는 무수한 쥐들과 사람들 중 웃고 있는 건 오직 그녀뿐임을 깨달았다. 여자는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거듭 중얼거렸다.

암쥐는 갑작스럽게 비명을 질렀다. 우리 차례예요!

변호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안경을 고쳐 쓰고는 암쥐가 바라보는 곳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저으며 당신이 착각했어요, 하고 중얼거렸다. 그는 다시 확인하듯 다른 문들의 숫자판들을 일일이 바라보더니 곧 탄성을 내뱉었다. 암쥐가 바라보던 문의 숫자판과는 다른 문 위에서 그는 그가 찾던 숫자를 발견한 것이었다.

변호사는 남자아이의 팔을 거칠게 붙잡아 일으키며 서둘러야 한다고 소리쳤다. 뛰어 들어가지 않으면 그들 재판이 순식간에 끝나버릴 것을 걱정하는 것처럼, 그래서 문 앞에 도달했을 때 그들은 남의 재판에 참석하게 될 것이라고 우려하는 것처럼 변호사는 암쥐와 남자아이의 팔을 붙들고 헐떡이며 뛰었다. 그러나 변호사의 보폭은 크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서두르는 것에 비해 그의 뜀박질은 빨리 걷는 것만큼의 속력도 나지 않았다.

여자는 성큼성큼 걸어 그들의 뒤를 따랐다. 하지만 늦게 도착한다고 하더라도 재판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재판을 잊는다 해도 재판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꿈을 잊어버린다고 해도 꿈은 여전히 미래를 예언하는 끔찍한 암시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들은 잊은 것일까?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집요한 암시들, 불안과 불안에 대한 공포와 공포에 대한 절박한 공포를 모두? 그들이 도착할 때까지 숫자는 바뀌지 않았다. 100111110011. 여자는 기억하려 애쓰듯 되뇌었다. 100111110011. 그러나 여자는 기억할 수 없었다. 그것이 변호사가 받아 왔던 대기번호와 동일한 숫자인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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