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오소리는 전문 화가가 되어 전시회를 여는 일은 완전히 포기했지만 아직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자신이 작업하고 있는 그림의 구상을 이상스러울 정도로 구체적으로 이야기했다.
눈부시게 하얀 해변에 창백한 여자가 누워 있어요. 그녀는 시체예요. 심장이 멎었고 호흡하지 않으며 피조차 응고되어 버린 시체요. 그녀는 벌거벗은 채이고 그녀의 몸 위로 물결이 오가요. 파도가 그녀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지고 다시 물러나기를 반복하죠.
해변을 홀로 산책하던 금발의 왕자는 여자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다가가요. 왕자는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그녀의 젖은 검은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어요. 왕자의 맨발을 투명하고 짭조름한, 눈물과도 같은 파도가 쓰다듬고 왕자는 여자의 창백한 얼굴을 눈 먼 손으로 다정하게 어루만져요. 단단하게 굳어버린, 그러나 계속해서 그녀 위로 넘나드는 파도에 젖어 있는 여자의 몸을 왕자는 성체를 어루만지는 빛처럼 정성스럽게 더듬어요.
왕자는 여자의 몸 위에 수그린 채로 흐느껴요. 왕자의 얼굴은 서글픈 붉은 빛으로 달아오르고 그는 여자의 몸 속에 성기를 밀어넣은 채로 헐떡이며 움직여요. 여자의 시체는 오직 남자의 움직임에 따라 모래 위에 팬 흔적을 남기며 흔들릴 뿐이에요. 왕자는 오래도록 사정을 참지만 결국 그들의 얼굴 위로 틈입하는 바닷물과 함께 사정해요.
사정하는 순간 왕자는 섹스 내내 감고 있던 눈을 뜨고 그를 뚫어지게 응시하는 검고 다정한 눈과 마주쳐요. 왕자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여자의 안에서 고통스럽게 성기를 빼내요. 왕자는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이고 그의 성기는 해안의 굴 속에 사는 작은 벌레들의 알처럼 보이는 작고 덧없는 포말들로 뒤덮여 있어요. 여자의 열린 검은 눈은 여전히 그를 다정하게 바라보고 있어요.
여자는 미소지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워요. 왕자님, 나는 당신을 오랫동안 바라봐 왔어요, 하고 여자는 말해요.
왕자는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흘리고 있어요. 넋을 잃은 듯 무릎을 꿇은 채로, 바지를 풀어헤친 채로 가만히 앉아 있는 왕자에게 여자는 마녀의 저주와 거래, 그리고 구원에 대해 이야기해요. 그녀는 배 위에서 허공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는 왕자에게 매혹되었고 심해를 떠도는 수백 개의 주름들을 보았다고 말해요. 그 주름들, 처음에는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어요. 여자의 음부를 닮은 주름들, 처음에 나는 물결이 나를 조롱하기 위해 음탕한 장난을 친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그게 아니었어요, 왕자님. 그 주름들은 당신의 미소였어요. 난 당신의 주름 속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했어요. 당신의 입 속에 들어 있는 언어를 맛보고 싶었어요.
난 오래도록 당신의 주름들을 보았고 끔찍한 환각에 시달리며 죽어갔어요. 자매들은 내가 곧 죽을 것이라고 믿었어요. 내가 악독한 마녀의 저주에 걸렸으며 절망적인 정신착란으로 죽어간다고요. 하지만 그건 저주가 아니었어요, 나의 왕자님. 그건 당신이었어요. 그건 사랑이었어요. 난 우주를 뒤덮은 당신의 작고 매혹적인 틈들을 보았어요. 난 그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주름들은 만져지지 않았어요. 당신들을 바라보면서-그래요 지나치게 많은 당신들-나는 내가 미쳐가는 걸 느낄 수 있었어요. 당신은 심해의 거울 속에도 있었어요. 내 얼굴을 뒤덮은 끔찍하고 아름다운 그 주름들, 나는 거울을 보면서 두려움과 절망과 사랑으로 흐느꼈어요. 눈물로 시야가 흐릿해져도 당신의 주름들은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 있었어요.
어째서 당신은 그토록 다정하게 웃고 있었던 건가요? 당신은 무얼 보고 그렇게 매혹적인 틈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던 건가요? 당신이 나를 보고 웃었을지도 모른다는 절망적인 망상이 계속해서 나를 잠식해왔어요. 그게 불가능함을 알면서도. 당신은 분명 내가 아닌 먼 곳을, 존재하지 않는 섬과 같은 하나의 점을 바라보고 있었어요. 파도 밑에 감추어진, 실재하지도 않는, 환각에 불과한 점을. 당신은 내가 당신의 주름들을 바라보고 있듯이 바다를, 바다 너머의 빗나간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던 거예요.
난 심해에 드러누워 끔찍하게 잠잠한 물살이 나를 당신에게 데려다주기를 바라면서 허공을 떠다니는 주름들을 세었어요. 주름들 하나하나에 번호를 붙이고 날마다 그것들이 그 자리에 제대로 있는지 확인했어요. 물론 셀 때마다 주름들은 나를 비웃듯이 전혀 다른 위치에 전혀 다른 기울기로 흩어져 있었어요.
당신은 나를 경멸하고 있었어요. 그렇죠? 내가 당신의 은밀한 틈을 집요하게 훔쳐보고 있었기 때문에 당신의 틈들은 나를 미쳐버리게 만들었던 거예요. 하지만 나는 당신을 세고 당신을 확인하는 일을 멈출 수 없었어요. 밤하늘에 수놓인 별들에 이름을 붙이고 절망적으로 자의적인 이름들을 일일이 확인하며 세어나가는 바다의 미쳐버린 방랑자들처럼 말이에요.
아버지는 내가 그대로는 오래 살지 못하리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 아버지는 나를 직접 마녀에게 데려다 주어요. 마녀는 바다의 왕을 향해 허리를 굽혀 공손하게 인사하고 당신의 부탁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줄 수 있다고 충성스럽게 말해요.
나는 당신에 대해서, 당신의 아름다운 미소와 감은 눈과 뜬 눈을 모두 집요하게 포위하고 있는 갈라진 틈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마녀는 나를 위한 저주를 걸어주겠다고 약속해요. 나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확인하면 난 사람이 되어 당신과 함께 지상의 왕국으로 향할 수 있을 거라고 마녀는 설명해 줬어요.
마녀는 내게 입을 맞추며 그것으로 저주의 계약이 성립된 것이라고 말했어요. 그리고 난 내 안에서 흐느끼는 당신의 소리를 들었고 당신의 벌어진 틈을 보면서 깨어난 거예요!
인어는 사랑하는 남자를 껴안기 위해 남자를 향해 다가가 팔을 벌리고 남자는 눈물을 흘리면서, 살아 있는 그녀를 도저히 사랑할 수 없다고 속삭여요. 여자에게서는 바다의, 짠물의, 눈물의, 삶의 비린내가 나고 그는 그 역겨운 체취를 맡으면서 도저히 여자를 끌어안을 수는 없다고 말해요. 그리고 왕자는 변명하듯 황급히 덧붙여요. 여자에게서 특별히 냄새가 나는 것이 아니고 그에게는 살아 있는 모든 것에서 끔찍한 악취가 나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그건, 여자는 말했다. 그림에 담기에는 너무 길고 복잡한 이야기네요.
그래요. 이야기의 축약 버전도 생각해 봤어요. 암오소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왕자는 해변에 쓰러진 시체를 강간하고 남자가 사정하자마자 시체는 깨어나며 왕자를 보고 미소짓지만 왕자는 몸서리를 치며 떠나간다고. 인어의 뜨인 눈은 왕자에게 영원한 형벌처럼, 악몽처럼 따라붙는다고.
여자는 그림이 완성되었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암오소리의 구상에 상응하는 그림이 대체 어떠한 모습일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암오소리는 낙담한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솔직히 말하면 아직이에요. 그림은 아직 구상 단계이고 난 아직 해변밖에 그리지 못했어요.
트럭 뒷부분에서 소녀들의 웃음소리, 혹은 흐느낌소리가 들려왔다. 여자는 어디까지 왔느냐고 물었고 암오소리는 이미 도착했다고 말했다.
그럼, 여자는 당혹하여 물었다. 어째서 멈추지 않는 거죠? 암오소리는 도착했지만 벌써 한참을 지나왔기 때문에 지금 멈추어서는 어디에도 도달할 수 없다고 말했다.
여자는 암오소리를 비난하듯 흘겨보며 물었다. 어째서 진작 멈추지 않은 거예요?
암오소리는 열병 걸린, 환각을 염탐하는 듯한 검은 눈동자로 텅 빈 도로를 쏘아보며 중얼거렸다. 난 시작한 이야기를 언제든 끝낼 수 있어요. 정확히 말하면 끝맺기 전에 언제든 중단할 수 있어요. 나는 조상들과는 달리 오래도록 홀로였고 유언조차 혼잣말이 될 뿐이라는 걸 예전부터 알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당신은 나를 듣는 것처럼 보였어요. 그림에 대한 말을, 암오소리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여자는 오소리의 얼굴을 가로지르는 줄무늬들이 젖어드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림에 대한 말을 하는 건 그림을 그리는 것 같았어요. 당신은 나를 듣고 있었고 난 그림을 완성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말을 멈추면, 그림을 멈추고 당신들을 데려다주고 나면 나는 숲 속 어딘가로 들어가 목을 매야 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트럭 운전 면허 시험을 볼 때, 암오소리는 중얼거렸다. 트럭은 여전히 검은 도로를 질주하고 있었다. 나는 영원히 트럭 운전 면허 시험을 볼 일이 없는 눈 먼 쥐의 이름을 빌려 시험에 응시했어요. 시험의 종족 체크란에 오소리들을 위한 자리는 어디에도 없었어요. 하지만 나는 어떻게든 면허 시험을 보았고 지금 트럭을 운전하고 있어요. 하지만 그림을 그리는 건 달라요. 내 것이 아닌 이름으로 그림을 그릴 수는 없어요. 나는 내 눈과 내 손과 내 피부로, 내 언어로, 내 몸으로 그림을 그려야 해요.
그림을 그리는 걸, 암오소리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무미건조한 어투로 중얼거렸다. 나는 포기할 수 없었어요. 내 이름으로 전시회를 열고 작품을 팔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림을 그만둘 수는 없었어요.
여자는 혼란스럽게 중얼거렸다. 예술은 자살이에요. 하지만 학문은 그렇지 않죠. 예술가가 되려 했던 학자들은 파멸했고 학자가 되려 했던 예술가들은 살아남았어요. 하지만 자살과 파멸로 끝맺을 수 있게 된 이들은 가장 운이 좋은 경우죠. 대부분은 죽은 채 태어난 작품들을, 이미 숨이 멎은 채 부패해가는 자궁이 자궁에서 밀려나오는 꼴을 보게 될 테니까요.
여자는 암오소리가 자살하리라고, 그녀의 염원을 위해 한 대의 가련하고 무고한 트럭이 그들을 향해 달겨들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밤의 도로는 텅 비어 있었다. 그들과 추돌, 혹은 충돌할 수 있는 차량은 보이지 않았다.
암오소리는 행운을 빈다는 말과 함께 그들을 내려주었다. 여자는 그녀에게 무언가 물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해야만 하는 말이 무엇인지는 여자도 알 수 없었다. 예술은 빌어먹을 미스터리라는 말? 곰곰이 생각해 보면 죽은 채로 태어나는 일만큼 발빠른 행운은 없다는 말? 그녀들이 언젠가 좆같은 우연으로 합류하게 되리라는 말? 달그림자를 감춘 구름이 그들의 머리 위를 잘려나간 불구의 육신으로 기어가고 있었다. 구름들이 불구라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구름이 아니었다. 소녀들은 오랜 주행에도 멀쩡해 보였다. 남자아이는 트럭의 구석자리에 웅크린 채로, 조수석에서 나오는 여자를 애타게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는 남자아이를 안심시켜 주어야 함을 알았다. 그가 그녀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 알았다. 아니, 그녀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녀는 남자아이의 여동생이 아니었으며 그녀가 약속할 수 있는 것들은 거짓일 뿐이었다. 여자가 돌아가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으므로, 남자아이는 여자를 따라 트럭에서 내릴 수밖에 없었다.
암오소리는 밤을 향해 미끄러져 사라졌다. 심해를 떠도는 눈 먼 물고기들처럼 그들은 헤어졌다. 사라졌다. 하지만 물고기들이 아직 살아서 병든 입을 뻐끔거리고 있음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방송국 건물 가까이 다가가면서 소녀들은 눈에 띄게 창백해졌다.
여기는, 목이 긴 소녀는 불안한 듯 주저하며 속삭였다. 교도소와 비슷하네요.
그녀의 말대로 방송국은 법원과 이어져 있는 교도소 건물과 유사한 구조였다. 푸른 눈의 소녀는 오래된 건물들은 대개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확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소금밭처럼 희미하게 빛나는 음산한 운동장을 건너는 동안 여자는 암오소리가 그들을 속인 것은 아닌지, 그래서 그들이 처음 출발한 바로 그 장소로 돌아온 것이 아닌지 의심하였으나 다행스럽게도 교도소의 입구에 대응하는 건물 출입구를 지키고 있는 이들은 간수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무채색의 제복 대신 양복, 혹은 평상복을 입고 있는 남자 인간들이었다. 소녀들은 저들끼리 무어라고 행복하게 속닥거리며 걸었다. 남자아이는 여자의 왼손을 붙잡고 있었다.
남자들은 소녀들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곧 여자를 발견하고 아는체를 했다. 유독 키가 큰 남자가 여자에게 촬영을 왔느냐고 다정하게 말을 붙였다. 여자는 그들을 알아볼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 애들은, 키 큰 남자가 물었다. 네 동생들이니?
여자는 그렇다고 말했다. 남자들은 그녀들을 특별히 제지하지 않았다. 유리문은 열린 채 고정되어 있었고 그들은 그저 방송국 내부로 들어가기만 하면 되었다. 소녀들은 행복과 불안을 급격히 오가며 파리해진 얼굴로 여자에게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고 중얼거렸다. 그녀들의 말이 저주가 되어 돌아오리라고 믿는 듯 조심스러운 어투였다. 여자는 방송국 사람들은 대부분 각각의 채널 룸에서 작업을 하므로 복도와 위층의 복도들을 향해 열린 광장에서는 사람들과 마주치는 일이 드물다고 대답했다. 방송국 바깥에서는 간혹 바람을 쐬러 나온 이들을 볼 수 있지만 바깥과 방들의 사이에서 누군가를 보기는 힘들다고.
소녀들은 불안스럽게 중얼거렸다. 그럼 그들은 대체 어디에서 무얼 기다리고 있었다는 거예요?
남자아이는 벙어리처럼 침묵하고 있었다.
검은 머리의 소녀는 초조하게 물었다. 오디션장은 어디에 있죠?
여자는 모른다고 대답했다. 나는 빌어먹을 안내인이 아니야, 여자는 짜증스럽게 덧붙였다.
소녀들은 낙담한 듯 여자에게 이제 어디로 갈 거냐고 물었다. 여자에게는 어떠한 계획도 없었다. 여자는 소녀들이 성공할 수도 있음을 알고 있었다. 성공은 불현듯, 갑작스럽게, 너무도 손쉬운 우연으로 주어지고는 하는 법이었으니까. 하지만 소녀들이 자살하지 않는다면, 예술을 자살로 만들지 않는다면 우연은 사그라들고 역겨운 숫자들은 0과 1과 간혹은 3 혹은 19로 출몰하는 암호들은 그녀들을 떠나갈 것이다.
그들은 정신병원처럼 하얗고 깨끗한 광장에 서 있었다. 감옥과 같은 구조로 되어 있는 건물의 1층 광장에서는 높은 층들의 방문들을 모두 올려다볼 수 있었다. 여자는 소녀를 한 명씩 위층 방으로 데려가 소녀의 목에 문구용 가위를 꽂아넣는 상상을 했다. 소녀의 피는 카메라 렌즈에 스며들고 소녀는 아스테카의 유리제단에 희생된 희생자처럼 황홀한 절망으로 눈을 감는다. 소녀들은 깊고 끔찍한 문을 본다. 여자는 0과 1로 뒤덮인 얼굴을 본다. 숫자들은 부식되어 떨어진다. 훼손된 숫자들의 내부에서 비추어지는 흰 내장이 어떠한 숫자를 감추고 있는지 여자는 읽지 못한다. 여자는 눈물을 흘리고 추방당한 숫자들은 일그러진다. 목이 늘어나고 손뼈가 잘려나간다. 숫자들의 내부는 질척거리는 점액으로 가득 차 있다. 성공을 약속하는 숫자들, 미스테리를 감추고 있는 화폐를 감추고 있는 숫자들, 실패와 파멸을 보장하는 숫자들, 숫자들, 숫자들.
소녀들은 깨진 유리창 같은 눈들로 여자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여자는 끔찍하게 지쳤다. 그녀는 소녀의 목에 가위를 박아넣을 힘은커녕 소녀를 붙들고 꾀어낼, 무언가를 속이는 체할 수 있는 힘조차 없었다. 소녀들은 여전히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아이는 망가진 인형처럼 조용했다. 하나의 채널에 갇혀서 이미지들을 생산해내는 일은 감옥에 갇혀 망상을 하는 일과 다를 바 없다고 여자는 생각했다. 혹은 정신병원에 갇혀 침대 위에서 움직이는 희미한 자줏빛 점들을 지켜보는 일과. 혹은 밤하늘을 기어가는 흰 벌레들과 같은 별들을 관찰하는 일과. 다른 것이라면 같은 망상을 공유하는 이들의 숫자일 테지. 여자는 하나의 망상을 홀로 곱씹어가며 미쳐버리는 일과 하나의 광증을 수천 명의 짐승들과 공유하는 일을 비교해 보았다.
소녀들은 여전히 여자를 보고 있었다. 여자는 가장 사적인 비밀과 광증을 수만, 수십 만의 대중과 공유하는 일은 얼마나 황홀한지 생각했다. 미친 자들의 원상이 될 수 있다면. 하나의 망가진 이미지는 얼마나 오래 생존할 수 있을까. 소녀들의 이미지는 소녀들의 생을 초월하지 못할 것이다.
여자는 생각했다. 남자아이의 머릿속에서 미친 듯이 날개를 휘젓는 더러운 천사의 이미지는 남자아이의 생존을 초월하지 못하리라고. 그들은 그들의 유일한 독자, 유일한 신도, 유일한 신으로 남을 것이다. 동성애자들의 이성애, 저주처럼 돌아오는 농담, 밤하늘에 가득 펼쳐진 주름, 외설적인, 난폭한, 기겁할 만한 구토들.
여자는 소녀들을 이끌고 계단을 올랐다. 남자아이는 여전히 여자의 왼손을 붙잡고 있었다. 숫자들의 유통기한, 부패한 숫자들을 집어삼킨 어린아이들은 어떻게 되는가? 내장 속에서 녹아내리는 숫자들의 독성. 여자는 이 층의 복도에서 첫 번째로 보이는 문을 열고 들어섰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여자는 두꺼운 종이로 만들어진 세트장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고 그녀의 뒤에 창자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이들도 마찬가지로 그녀를 따라갔다. 세트장은 우주선의 내부처럼 꾸며져 있었다. 볼드펜으로 굵직하게 그어진 계기판과 기계장치들의 선들. 우주선의 창문에는 검은 밤하늘의 그림이 칠해져 있었다. 우주복을 입고 뒤뚱거리며 세트장을 누비던 배우들을 뚫고 여자와 소녀들과 남자아이는 무대 한가운데로 향했다. 여자는 카메라의 검은 동공을 바라보았다.
검은 머리의 소녀는 창문의 검은 면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던 목이 긴 소녀의 어깨를 붙들며 물었다. 그건 네가 그린 거야?
그래. 목이 긴 소녀는 읊조리듯 중얼거렸다. 나는 우주를 만들었고 별들과 은하와 우주선을 만들었어. 그리고 마지막으로 검은 창문을 만들었어.
소녀들은 끔찍하게 느릿느릿 움직이면서 세트장 내부를 정처없이 활보하며 대사를 읊었다. 몇몇 소녀들은 세트장 너머 카메라와 장비들이 있는 곳, 혹은 세트장의 뒤편으로 넘어가기도 했다. 소녀들은 우주를 떠도는 운석처럼, 일정한 궤도를 갖지 못한 땅처럼 움직였다.
우주선 내부의 배우들과 촬영을 담당하는 스텝 짐승들은 조금 당황한 듯 보였지만 침입자들을 내쫓지는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들 각각이 방송에 관한 전체적인 지식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소녀들의 등장이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라고, 다만 그들 각각이 알지 못하는 것뿐이라고 믿는 듯했다.
여자는 카메라를 향해 소녀들이 길을 잃고 방랑하는 천사들이라고 말했다. 남자아이 역시 희고 긴 원피스 차림이었기에 소녀처럼 보였다. 소녀들은 흐느끼듯 불규칙한 경로로 움직이고 있었다. 소녀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고 있었다.
푸른 눈의 소녀는 긴장과 불안을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고 여자는 카메라를 응시하며 소녀들을 죽인 건 그녀 자신이라고 고백했다.
소녀들은 놀란 듯 침묵하였으나 여자의 말을 반박하지는 않았다.
나는 해변에 앉아 있었어요. 여자는 말했다. 바다에 간 건 처음이었어요. 오랫동안 나는 바다가 불가능한 이미지라고 믿었고 바다는 우주와 마찬가지라고, 그러니까 꿈꾸거나 관찰한다고 믿을 수는 있어도 도달할 수는 없는 곳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나는 바다에 갔어요.
세트장 내부는 물고기의 속살처럼 고요했다.
여자는 말을 이었다. 나는 바다에 있었어요. 그곳은 해변이었지만 끔찍하게 깊은 심해와 인접한 불안한 자리이기도 했어요. 돌들이 있었고 그 밑은 깊은 바다였어요. 난 아이의 하얀 손을 보았어요.
여자는 침묵했다.
그건, 여자는 키가 큰 소녀가 그녀 옆을 지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소녀의 희고 가느다란 손을 들어보였다. 이 애의 손이었어요. 이 애는 허우적거리고 있었어요. 희고 가느다란 손이 수면 위로 언뜻언뜻 드러났어요. 내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들었어요. 그들은 돛단배처럼 보이는 하얀 그림자를 향해 날파리처럼 달려들었어요. 아이를 구해야 한다고 누군가 말했어요. 하지만 아무도 바다로 뛰어들지는 않았어요. 그곳이 얼마나 깊은지 우리는 아무도 짐작할 수 없었어요. 그때 누군가가 속삭였어요. 바다는 지옥처럼 깊다고, 심해어들은 악마를 보고 스스로 눈 멀었다고. 누가 그런 말을 했는지 찾을 수 없었어요. 우리는 바다를, 바다에서 언뜻언뜻 솟아나오는 하얀 돛과 같은 손을 들여다보고 있었어요. 누군가는 뛰어들어야 했어요. 누군가는 뛰어들어서 악마를 보아야 했어요. 누군가는 자청하여 눈 멀어야 했어요. 누군가는 악마와 지옥이나 눈 먼 심해어 따위가 질 낮은 농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려야 했어요. 우리는 기다렸어요. 누군가 바다에 뛰어드는 소리를, 벌거벗은 젖은 몸이 하얀 손을 쳐들고 솟아오르는 모습을. 햇볕이 우리의 벌거벗은 살을 벗겨내고 있었고 그때 나는 다른 손을 보았어요.
여자는 침묵하고 기다리다가 그녀의 옆을 스쳐지나가는 푸른 눈의 소녀를 붙잡았다. 손이었어요. 다른 손이었어요.
여자는 푸른 눈의 소녀의 손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이 애의 손이었어요. 우리는 곧 바다에 빠진 아이가 한 명이 아님을 알게 되었어요. 끔찍한 침묵이 우리를 뒤덮었고 나는 도망치고 싶었어요. 아마 다른 짐승들도 도망치고 싶었을 거예요. 하지만 우리는 도망치는 이의 목을 부러뜨리고 그 자를 산 제물로 바다에 처넣을 작정이었어요. 아무도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고 나는 내가 죽인 여자아이의 얼굴을 떠올렸어요. 기억나지 않았어요. 어쩌면 그 애를 죽인 건 이 애들의 죽음 이후인지도 몰라요. 어쩌면 그때 떠올렸던 건 내가 실제로 죽인 여자아이의 얼굴에 대한 기억이 아니라 미래의 살인에 대한 희미한 예감에 불과했을지도 몰라요. 나는 바다에 뛰어들어서 익사한, 익사해가는 세 번째 여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세 번째가 아니었어요. 우리는 몇 개의 다른 형태와 빛깔을 가진 손들이 돛처럼 떠오르는 모습을 보았어요. 손들은 흔들리고 있었어요. 악마에 홀린 것 같은 기분이었죠. 아무도 소녀들을 위해 바다로 뛰어들지 않았어요. 바다에 무엇이 있는지, 어떻게 그토록 많은 소녀들이 오직 손만을 들어올린 채 흔들리고 있을 수 있는 건지 우리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어요. 바다 속에는 지옥이 있다는 목소리가 들렸어요. 그게 환청이었는지, 실제로 누군가가 그 말을 중얼거린 건지, 최초로 그 말을 했던 미치광이가 같은 말을 반복한 건지 아니면 나처럼 그 말을 잊을 수 없었던 누군가가 그 말을 되뇐 건지 알 수 없었어요. 우리는 우리가 악마가 되어가는 것을, 우리가 발을 딛고 서 있는 기이한 해변이 바로 지옥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어요. 우리가 뛰어들지 않았던 건 우리 역시 혼자였고 우리 역시 바다에서, 지옥에서 죽어가고 있기 때문이었어요. 우리는 이 애들이 빠져 죽는 걸 오래도록 지켜보았어요. 늙은 방랑자가 석양이 지는 모습을 집요하게 관찰하듯이 우리는 계속해서 바다 위로 떠올랐다가 사그라지는 하얀 그림자들을 바라봤어요.
배우들은 그녀의 주위에서 정지한 것처럼 같은 방식, 같은 표정, 같은 흐느낌으로 돌고 있었다.
예술은 정신병이야. 예술은 최악의 자살이야. 여자는 생각했다. 진실의 내장인 거짓, 거짓의 내부에서 번져가는 염증. 진실의 내부에는 거짓이 있고 거짓의 내부는 텅 비어 있어. 빌어먹을 예술, 빌어먹을 자살. 여자는 소녀들이 아직 살아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녀의 이야기는 불쾌한 농담, 거짓에 불과했다. 그러나 모두가 여자를 듣고 있었다. 여자를 제지해야 할 이유를, 여자의 거짓말을 만류해야 할 이유를 몰랐기 때문에. 여자는 이미 성공한 거짓말쟁이, 성공한 미치광이, 유명해진 배우였기 때문에. 여자는 실제로 살인을 상상하였으며 저질렀기 때문에. 여자는 여자의 손 아래에서 죽은 소녀를 실제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여자는 생각했다. 삶은 저주처럼 집요하게 되돌아온다.
사실 그건 손이 아니었을 수도 있어요. 여자는 말했다. 부표나 손수건, 돛이었을 수도 있죠. 혹은 인형들이었을 수도 있어요. 우리는 모두 혼자였고 우리가 보는 것이 사실인지 확신할 수 없었어요. 우리는 소녀를 보았고 동시에 부표와 손수건, 돛과 인형을 보고 있었으므로. 부표나 손수건, 돛과 인형을 구하기 위해 심해로 뛰어드는 건 미치광이의 자살이었으니까. 바다는 검푸른 빛으로 접혔다 펴지기를 반복했어요. 태양을 향해 비상하는 이카루스, 빛에 절멸하는 이카루스, 황홀하게 빛나고 녹아내리는 이카루스, 바다를 향해 떨어지는 이카루스를 바라보던 다이달로스는 공중에 목을 매고 자살하고 싶은 심정이었어요. 하지만 다이달로스는 끝까지 날았고 다른 땅에 도착했어요. 이카루스의 잔해를 그 누구도 찾지 못했어요. 이카루스는 바다에 비해 너무 작았고 가장 깊은 심해에 닿기에는 너무 가벼웠어요. 이카루스는 바다의 허공을 평생 떠돌아야 했어요. 물고기들이 그의 부드럽고 하얀 살을 뜯어먹어 누런 빛깔의 뼈만 남을 때까지. 그리고 그의 뼈는 영원을 모사한 우주를 떠돌았어요.
우리는 모두 혼자였어요. 우리는 모두 가라앉고 있었어요. 우리는 모두 익사해가고 있었어요. 숨이 막혔고 끔찍한 역겨움이 치밀어 올랐어요. 마지막 순간에, 나는 우리가 혼자가 아니며 아무도 익사해가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익사해가는 건 소녀들이었지 우리가 아니었어요. 익사해가는 건 부표와 돛과 바다 위를 떠도는 허상 같은 햇빛과 손수건과 인형이었지 우리가 아니었어요. 우리 중 누구도 익사하고 있지 않았어요. 우리는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지만 그건 익사와는 다른 종류의 죽음이었어요. 익사는 끔찍한 거짓이었어요.
이 애들은, 여자는 소녀들의 모든 방향을 감싸 안을 것처럼 팔을 넓게 벌리며 말했다. 바닥에 닿기 전에 뼈만 남았어요. 뼈들은 흰 부표처럼 흔들리며 간혹 수면 위로 드러났어요. 뼈는 천사의 날개처럼 가볍고 희었어요. 우리는 영원히 그 악몽 위에 서 있게 되리라는 것을 짐작했어요. 난 곧 내가 죽이게 될 여자아이의 얼굴을 떠올리려 애썼어요. 그 애의 얼굴은 수면 위로 떠오른 손처럼 가물거리는 흰빛이었어요. 하지만 그 애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끝내 떠올리지 못했어요. 오직 흰빛, 뼈의 흰빛, 포말의 흰빛, 낮의 흰빛, 죽음의 흰빛뿐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