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스가 처음 살해당하던 날은 그녀의 생일이 아니었다. 그녀의 마지막 날도 아니었다. 그녀는 정오 즈음 일어나 창밖을 일정한 보폭으로 지나가는 행인들을 바라보며 글을 쓰고 있었다. 습관적으로 인터넷 검색창에 그녀의 이름과 닉네임과 그녀가 기억하는 그녀에 대한 온갖 세부사항들을 검색하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하늘은 파랬고 그녀는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 현기증으로 기어드는 개미 떼들의 매스꺼운 행렬처럼. 걸인의 호주머니에 잠들어 있는 빠는 돌처럼. 그녀는 읽히지 않을 그러므로 거의 존재하지 않을 글을 쓰며 죽고 있었다. 왜냐하면 글을 쓰는 것은 살아서 죽는 일이니까. 그녀에게 그녀의 글 외에 어떤 사건이 있을까. 그녀에게 그녀의 결핍 이외에 어떠한 충동과 공포와 히스테리 발작이 있을까. 그녀는 넓은 수조 같은 집안에서 글을 쓰고 있었다. 죽음들에 대한 히스테리적 반복. 그것 외에 그녀가 쓸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동물원의 양에게서 자기혐오와 죽음의 만족을 벗겨내면 무엇이 남을까.
아무것도 남지 않아
아무것도 남지 않아
아무것도 남지 않아 사라지지 않는 것 외에는
비극적 자기살해의 가능성 이외에 그녀가 무엇을 바랄 수 있을까. 그러나 앨리스는 진심으로 죽음을 바라기에는 불순하였다. 다른 모든 일들이 그렇듯 완전한, 황홀한, 포만한 죽음 역시 실패할 것이다. 그런 것이 존재한다하더라도 그것과 섹스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과의 깊은 상호마찰, 그것이 그녀의 내장을 빌어먹게 깊은 곳을 긁어내릴 일은 없을 것이다. MZ 세대에게 인터넷에서 자기 정보를 찾을 수 없다는 건 얼마나 끔찍하고 공포스러운 일인지-그녀가 M세대인지 Z세대인지는 몰라도. 그녀는 그녀가 아닌 앨리스앨리스앨리스루이스캐럴의앨리스죽음으로인해영원한이별을하게된남녀가다시만나게되는드라마앨리스탤런트가수앨리스인스타그램트위터페이스북유튜브인물정보더보기앨리스 속에서 그녀가 아닌 것들과 어색한 눈맞춤을 했다. 아니, 그녀는 그것들을 보았는데 그것들은 그녀를 보지 않았다. 내장속에 달려 있는 카메라가 목구멍까지 딸려 올라가 그녀를 불법적으로 도촬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어디 이야기? 장내내시경의 카메라와 현관앞 CCTV를 그녀가 한 번이라도 확인할 수 있었던가? 곳곳의 눈들은 무엇을 위해 있는지, 적어도 그녀를 위해 있는 것은 아닐 텐데 왜냐하면 아무도 그녀와 눈 눈 눈들 그 빌어먹을 눈들을 마주치지 않았으니까. 주님 그녀가 이러려고 태어난 건 아닐 텐데 이렇게 매 문장 수천 바늘 죽으려고 태어난 건 그녀는 신도들도 없이 자꾸만 태어났고 아무도 그녀의 부활을 증언해주지 않는데도. 그런데
어떻게 하면 멈출 수 있어?
수만 페이지에 달하는 유서들은 아무도 보지 않는 하수구에 낯 모를 짐승의 장액과 함께 흘러들어가고 있는데
언제 멈출 수 있어
세이렌의 노래가 언제 끝나는지 누군가 말해줬으면 좋겠는데. 세이렌들이 그 유명한 침묵을 노래할 때 오디세우스는 듣지 않았다. 밀랍으로 만든 귀마개도 강제적인 수면작용도 필요 없었다. 그는 듣지 않았고 그뿐이었다. 세이렌도 듣지 않는 이에게 어떤 구멍도 벌려주지 않는 이의 구멍을 비집고 들어가 침묵을 쏟아부어 줄 만한 의욕과 체력과 희망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세이렌들은 체념하였고 줄줄 새어나오는 침묵을 바다에 다 흘려버렸다. 앨리스앨리스오빌어먹을앨리스 그녀가 도지슨이었다면 유서 한 장 한 장에 금박을 발라 예쁘게 채색하여 젖이나 꿀이나 피나 정액이나 침이나 과즙이나 장액이 흐르는 모든 곳에 뿌렸을 것이다. 그는 아마 그렇게 했고 그래서 그녀는 더 할 일이 없었다. 그는 아마 그렇게 했고 그가 했든 하지 않았든 그녀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침샘에서 끝없이 솟아나오는 침을 16인치 노트북 화면에 고스란히 쏟아부을 수밖에. 출력되거나 출력되지 않거나 어찌되었든 거의 존재하지 않을 문장들. 라스콜리니코프가 유형지에서 백골이 된 뒤에도 침묵은 질질 새어나온다. 멎지 않는다. 멎지 않는 동안에 그녀는 계속 쓰고 있었다. 순수한 것이 되고 싶어 한 번도 잊히지 않은 것처럼 순수한 것이. 기도하자. 순수는 가장 정결한 죄이고 신은 오직 죄를, 순수를 용서하기 위해 존재하니까.
죄와 함께 살아가는 것은 그녀를 덜 혼자이게 만들 것이다.
Act. 1.
신이 그녀의 입에 침을 뱉는다. 그녀가 삼킨다. 그녀가 말한다. 그녀가 들리게 된다. 그러나 신은 떠난다. 그녀는 그녀의 말을 실험해보지 못한다. 그녀의 말이 들리는 것 같은 말이 정말로 들리게 되었는지 그녀는 입증할 수 없다.
Act. 2.
살인자가 초인종을 누른다. 그녀가 인터폰으로 말한다.
앨리스 : 누구세요
살인자 : (초인종을 다시 누른다)
앨리스 : 누구세요
살인자 : (초인종을 다시 누른다)
앨리스 : (인터폰 가까이에 입술을 붙였다가 뗀다.) 이제 들려요?
살인자 : (초인종을 다시 누른다)
앨리스 : 누구세요
살인자 : (초인종을 다시 누른다)
여자가 무엇인가 깨달은 듯 황급히 뒷걸음질 친다. 그러나 그녀가 어딘가로-대체 어디로? 화장실로?- 도망치기 전에 살인자가 들어온다. 그는 커다란 택배 상자를 들고 있다. 살인자가 천천히, 끔찍하게 천천히 여자에게 다가간다. 남자가 택배 상자를 내려놓는다.
살인자 : (어린아이의 목소리로 애교를 부리듯) 나를 용서해 줘.
앨리스 : 누구세요
살인자 : (주방으로 성큼성큼 들어가 과도를 꺼낸다. 앨리스가 흠칫 뒤로 물러난다. 그는 여자를 지나쳐 택배 상자가 있는 현관 쪽으로 간다. 그가 능숙한 손길로 택배 상자를 감싸고 있는 테이프를 가른다. 그가 상자를 열기 전에 앨리스는 비명을 지른다.
앨리스 : 가. 저리 가.
살인자 : (그가 뒤돌아 현관 밖으로 나간다)
앨리스 : (히스테리컬하게 비명을 지르며) 가지 마.
살인자 : (다시 돌아온다. 무표정.)
앨리스 : 가지 마. 대신 그걸 꺼내지 마.
살인자 : (택배 상자를 들어 올린다. 앨리스는 택배 상자에서 내용물이 쏟아져나올까 두려워 긴장한다.) 꺼내야 해.
앨리스 : 제발 꺼내지 마.
살인자 : (어리둥절하게) 네가 주문했잖아
앨리스 : 꺼내지 말아요. 내가 주문한 게 아니니까.
살인자 : (테이프와 함께 반토막난 수취인 정보를 또박또박 읽는다. 서울특별시 성동구 천호대로 400이 어디야?
앨리스 : 여기.
살인자 : 여기가 너야.
앨리스 : 아니야.
살인자 : (당황하며) 넌 착각하고 있어.
앨리스 : 아니야. 제발 그걸 꺼내지 마.
살인자 : 꺼내지 않을 수는 없어. 꺼내지 않으면 난 돌아갈 수 없어.
앨리스 : 가지 마.
살인자 : 너와 함께 있을 만큼 너를 사랑하지 않아.
앨리스 : 가지 마.
살인자 : 사랑하지 않는다니까
앨리스 : 가지 마
살인자 : 내가 여기 있길 바라면 용서해 줘.
앨리스 : 네가 여기 있길 바라. 너를 용서할게.
살인자 : 이걸 꺼내기 전엔 용서할 수 없어.
앨리스 : 네가?
살인자 : 네가 나를
앨리스 : 그럼 꺼내지 마 가지 마.
살인자 : 꺼내지 않으면 용서받을 수 없어. 꺼내지 않으면 사랑할 수 없어.
앨리스 : 왜
살인자 :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상자 윗부분을 잡아 뜯는다. 앨리스가 비명을 지른다. 그녀의 턱에서 말간 침이 흐른다. 그녀가 울부짖는다. 그녀의 가슴이 붉게 젖어든다. 붉은 과즙을 흘린 것처럼. 여자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나뒹구는 동안에도 살인자는 상자를 잡아벌리는 걸 멈추지 않는다.)
앨리스 : (비명을 지르며) 용서할게 용서할게 그러니까 제발 그만해
살인자 : (어리둥절하게)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앨리스 : 제발 그만해 (바닥이 그녀의 오줌과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든다)
죄의 아름다움과 죄의 은총과 죄의 부드러움
죄가 그녀를 절망적으로 부드럽게 살해하는 동안 살인자가 택배 안에서 영원히 결백한 것을 꺼낸다. 피가 척척한 고기. 신의 음부. 신의 고기. 앨리스는 남자가 꺼낸 작고 부드러운 시체를 고통스럽게 받아든다. 껍질이 벗겨진 사과처럼 젖은 태아는 그녀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건 그녀의 시체니까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앨리스 : (헐떡이며 힘없이 속삭인다) 가지 마.
불감과 찢어짐 사이에서 그녀가 느릿하게 진동한다. 사람을 미쳐버리게 만드는 햇빛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어 무엇을 설명하고 무엇을 죽을 수 있겠어. 앨리스가 몸을 움츠린다. 햇빛이 쏟겨 들어 흥건한 바닥 위에서 그녀가 바즈락거린다. 태어나는 것처럼.
살인자 : 사인해주면 이제 갈게요
앨리스가 하얗게 바들바들 떨리는 팔을 들어 펜을 움켜쥔다. 그녀는 남자의 피부 위에 아무렇게나 갈겨쓴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
Act. 3.
앵무새처럼 부르짖던 내면의 음악이 멎어버리고 이제는 아무것도 흥얼거릴 수 없어. 적막은 끔찍하게 긴 클라이막스, 찢어지지 않는, 둔중한, 적막 끝에 다다를 사건이라고는 이제 하나밖에 없지. 그녀는 용서할 것이 없고 용서받을만한 죄도 저지르지 않았으니 천 개의 돌멩이들은 말 속에 삼켜지고 그녀는 신의 침을 받아삼키고도 침묵만 헉헉거리며. 뒤척이며 그녀를 깔아뭉개는 영원한 침묵. 살고 싶었어. 죽어서라도 살고 싶었어. 그런데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을 때 뭐가 가능하겠어? 더 이상 쓰고 싶지 않을 때 더 이상 아무것도 부르고 싶지 않을 때 뭘 할 수 있겠어?
뭘 할 수 있겠어?
앨리스가 살해당한 날은 그녀의 생일도 마지막 날도 아니었다. 그녀는 흥건한 차가움 위에서 눈을 떴고 권태와 현기증으로 머리가 깨지기 전에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살인자는 아마 아무짓도 하지 않았으므로 경찰에 신고할 수는 없었다. 하다못해 인터넷 게시판에라도 방금 일어난 일에 대해 적고 싶었으나-미친년이라는 말이라도 듣기 위해- 어디에 글을 올려야하는지도 몰랐다. 앨리스는 체액으로 더러워진 손가락으로 무엇인가 썼고 그것이 끝이었다. 출판도 댓글도 좋아요도 인터뷰도 없었다. 복수도 자살도 없었다. 자기혐오도 자기연민도 없었다. 그런 것들 속에 침잠하기에 그녀는 그다지 희망적이지 않았다. 그녀는 그가 계속 남아 있기를 바랐으나 그는 가버렸다. 그 지긋지긋한 늑대처럼 그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는 가버렸고 자기혐오는 천박하다. 아무것도 원망할 수 없으므로 그녀는 아무것도 원망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미워할 수 없으므로 그녀는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는다. 얼마나 순수한 로직인가. 그녀는 신이 먹다 남긴 고기처럼 축축하고 더러웠지만 예전 그대로 살아 있었다. 신만큼이나 살아 있었다. 신의 침으로 가득찬 사과만큼이나 살아 있었다. 그녀가 더는 살아있음을 원하지 않는데도 그랬다. 아마 죽음에 대한 환상이 완전히 사라질 때쯤 그녀는 죽을 것이다. 자살을 원하지 않게 될 때 자살할 것이고 순수함에 대한 찌꺼기 같은 갈망마저 사라질 즈음에 순수하게 될 것이다. 순수한 죄 속에서 뒤척이며 즙이 질질 흐르는 태양을 처참하게 살해하는 환상. 살해의 성스러움에 흥분하게 되지 않을 때쯤 무엇인가를 도살할 것이고-늑대를 기다리는 돼지들의 등을?- 신을 믿지 않게 될 때쯤 신과 섹스할 것이다. 중풍에 걸린 할아버지는 두 다리로 걸으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걷지 못했다. 조카 여자아이는 천국에 가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지옥에 갔다. 제때 짜내지 못한 유방 안쪽에서 젖이 썩고 있다. 철지난 코코넛 열매처럼. 그걸 쥐어짜서 글을 써야 한다. 악취가 풍기는 젖으로 글을 써야 한다. 죽어가고 있는 동안에는 계속해서 써야 한다. 어디에도 없을, 누구에게도 도달하지 못할 글들.
실패하는. 실패하는 실패하는 실패하는.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토끼와 사람은 너무 외로우면 얼마 살지 못하고 죽어버린다고 하는데 그 얼마간에 사람은 토끼를 잡아먹는다. 어린 토끼의 가슴살은 부드럽고 맛있지. 와인과 함께 익힌 다음 허브를 올리면 비린내도 나지 않고. 릴리를 질컥질컥 꽂아넣은 어린 토끼의 눈알 요리도. 앨리스는 질척한 바닥에 드러누운 채로 생각했다. 누군가 이곳에 와서 나를 죽였을까. 아, 그럴 리 없지. 나는 여기 혼자 누워 있었고 죽었지만 완전히 죽지는 않았어. 죽지 않은 건 여전히 살아 있다. 잘라낸 팔이 괴사하고 난 뒤에도 다른 육체는 여전히 먹고 마시고 슬퍼하고 미쳐가듯이. 살려줘! 그녀가 소리쳤다.
살려줘! 살려줘 살려줘 살려줘! 웃음기 섞인 비명.
아무도 오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가 정말 비명을 질렀나? 어떤 목소리는 발화될 때와 발화되지 않을 때 사이의 차이가 없고 혀 밖으로 질질 새어나가기 전에도 의식 속에 실물처럼 진득진득하게 붙어 있으니-하긴 그게 실물이 아니면 뭐겠는가- 어쨌든 그녀는 무언가를 게워냈거나 게워내려 했다. 살려줘 씨발 살려줘.
– 그건 불가능해. 넌 이미 살아 있으니까.
– 살려줘 살려줘 더 살려줘 빌어먹게 살아 있고 싶어 좆같이 살아 있고 싶어. 지나치게 살고 싶어.
– 그건 불가능해. 모두가 지나치게 살아 있지는 못하다는 걸 기억해.
– 모르겠어. 좆같이 지나치게 존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네가 할 수 있는 건 없어. 네가 할 수 있는 모든 일 중에 네가 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어. 그러니 모든 일을 하거나 아무짓도 하지 않거나 아무것도 변하지 않아
옥상에서 아스팔트로 떨어지는 동안 사람은 몇 개의 일을 할 수 있을까.
옥상에서 아스팔트로 떨어지는 동안 사람은 몇 개의 꿈을 꿀까.
옥상에서 아스팔트로 떨어지는 동안 몇 개의 기적이 가능할까.
Act. 4.
앨리스가 일어난다. 비척거리면서, 천천히.
그녀가 완전히 일어날 때까지 세계는 아직 마지막 문장에 가 닿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는 식탁으로 걸어가 곰팡이 핀 빵을 꺼낸다. 푸르스름한 곰팡이가 얼룩덜룩하게 피어난 하얀 빵을 앨리스는 심장으로부터 꺼낸 면도칼로 정성스럽게 자른다. 해부대 위에 누운 아이의 뺨을 도려내듯이. 그러나 증오도 애착도 없이. 그것은 그녀의 뺨이 아니니까.
그녀의 뺨이라면 뭔가 달랐을까?
비명을 질렀겠지. 아팠겠지. 뺨이 도려진 것을 잊지 못했겠지.
그러나 결국엔 잊었을지도 모른다.
헐떡이는, 파열된 텍스트 속에서 그녀가 흰 빵을 들어올린다. 질척거리는 하얀 빛이 빵을 투명하게 투과한다. 바닥에서 넘실거리는 잔잔한 비명. 체내에 종기처럼 돋아난 작은 무한들. 그것을 전부 살기 전에는 아무것도 죽지 못할 것이다. 갈기갈기 찢겨 목구멍 속으로 넘어간 빵도 날카롭게 질주하는 흰 빛도 울적하게 시퍼런 하늘도 붉은 곰팡이가 슨 욕조도 유선 전화기 속에 옹송그리고 온기를 찾아 투쟁하는 바퀴벌레들도 어미 바퀴벌레의 체내에서 자라나는 어린 바퀴벌레들도 심장이 터질 때까지 달리고 있는 말도 말의 잇새에서 찢기는 혈관도 어린 소녀의 손아귀에서 신비롭게 질식해가는 병아리도. 천성이 선한 사람들. 천성이 순수한 곤충들. 순수한 악의와 순수한 허기와 순수한 욕망과 순수한 범죄들. 세계에는 겹쳐진 순수밖에 없는 것 같아. 앨리스는 면도날로 껍질을 벗기며 생각한다. 자살처럼, 용서받을 수 없이 아름다운 순수들.
– 나 죽고 싶어
– 누구나 그래
– 난 별로
– 별로?
– 별로 죽고 싶지 않아
– 누구나 그래
– 성숙해져, 아가. 넌 너무 애 같아
– 누구나 그래
– 성숙한 건 닳고 닳은 거야
– 날 사랑해 줘
– 신은 널 사랑해
– 난 안 사랑해
– 나도
– 날 미워해?
– 아니
– 아니
– 난 헤테로 섹스의 딸인데 어떻게 게이일 수 있는 거지
– 나를 낳은 사람들은 어떻게 나를 낳을 때까지 살아 있을 수 있었던 거지
언어에 복종하는 감정들. 마을의 우물에 그녀는 날마다 침을 뱉었다. 간혹은 오줌을 누었고 생리혈을 흘려넣기도 했다. 그녀가 걸린 병을 마을 사람들이 함께 앓기를 바라서. 하지만 아무도 그녀의 병에 걸리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그녀는 그녀가 아무런 병도 앓고 있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적어도 전염성의 병은. 그런데
하나의 짐승이 다른 짐승에게 병을 옮길 수 있다는 건 얼마나 슬프고 아름다운 일인가. 용서받을 수 없을 정도로. 그런데
그녀는 옮길만한 병이 없었다. 어렸을 적 그녀는 가능한 거의 모든 병들에 대한 예방주사를 맞았고 그것들은 그녀를 죽음에 대한 불모지로 만들었다. 그런데
– 나를 안아 줘
– 네가 날 안아 주면
– 내가 널 안아줬을 때 넌 도망가버렸어
– 내가 널 사랑해야 할 의무는 없어 의무가 있었더라도 사랑하지 못했을 거야
앨리스는 미적거리면서 물을 한 모금 마신다. 투명한 액체 속에 잠겨 있는 셀 수 없이 많은 이름들, 알려진, 그러나 무의미한. 그것들을 삼킨다고 해서 그것들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물기를 필요로 한다. 그녀는 마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