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과 장미 5

ACT. 10.

정민 : 나 아파 너무 아픈데 그래도 여기 있을래. 여기 있게 해줘.

은수 : 왜?

정민 : 사랑하니까

은수 : 넌 고통을 사랑하게 된 것뿐이야.

정민 : 여기 있을래.

은수 : 여기가 어딘데?

정민 : 우리집

은수 : 나한테 말할 필요 없어.

정민 : 여기 있게 해줘.

은수 : 나한테 말할 필요 없다고.

정민 : 여기 있게 해줘.

은수 : 널 내쫓을 힘이 없어.

정민 : 그래도 여기 있게 해줘. 여기 있을래.

은수 : 넌 내 애가 아니야

정민 : 여기 있을래.

은수 : 여기서 뭘 할 건데.

정민 : 네 옆에 있을 거야

은수 : 그게 다야?

정민 : 그게 다야

은수 : 날 죽이진 않을 거야?

정민 : (고개를 젓는다)

은수 : 아무것도 훔치지 않고?

정민 : 아마도

은수 : 그럼 넌 내 살해자가 아니네

정민 : 아마도

은수 : 그런데 왜 널 사랑해야 하는데

정민 : 나는 그래. 자기야. 넌 내 살해자도 아닌데 널 사랑해. 왜 그런지 모르겠어. 네가 내 살해자가 아니라서 아파. 너도 나처럼 아팠으면 좋겠어.

은수 : 우린 만난 적도 없어.

ACT. 1.

가장 가녀린 것들에 대해 떠올려 본다. 백합의 말려드는 잎사귀. 젖어서 짓물러가는 양의 음부. 엷고 부드러운 설대.

앨리스. 그녀가 찾아낸 이름을 그녀가 부른다. 체내에서 흐르고 있는 피는 대기처럼 투명하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은 누구인가. 내부의 빛깔이 슬프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은. 살인자가 떠나간 현관에 누운 채로 그녀는 생각했다. 바닥을 흥건히 적신 피. 화려한 붉은 색의. 더는 내부의 색이 아닌. 그러나 아직 내부의 온기를 약간 간직하고 있는. 그녀가 발견한 것을 아무도 원하지 않았다. 그녀가 발견한 것을 아무도 원하지 않는다. 그녀가 발견한 것을 아무도 원하지 않을 것이다. 기대와 체념 사이에서 자라나는 흐느낌을 그녀는 조금 울었다. 그렇게 어지럽지 않은 동안. 그렇게 절망하지 않은 동안. 심장은 크림색의 덩어리라고 어떤 여행가가 말했던가. 유리관에 배양된 인간의 속을 찾아 헤매는 어떤 유명한 여행가가.

앨리스, 그녀가 원하는 것. 그녀가 끔찍하게 원하는 것. 너무도 원해서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

대체 이 말을 얼마나 자주 반복하고 있지

관객은 한 사람도 남지 않았다

관객은 한 사람도 오지 않는다

공중에 매달린 채로 소녀는 비둘기처럼 벌거벗은 눈동자를 천천히 깜빡인다 그것이 젖는다 그것이 흘러내린다 그것이 바라본다

그것이 바란다

그녀는 기다렸다 누군가 그녀를 올려다보기를

관객들이 그녀를 발견하기를

누군가가 그녀를 발견하기를

그녀를 발견하기를

발견하기를

바이올린을 들고 올라간 무대에서 소녀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미온의 눈동자들을 하나씩 바라보았고 그것을 견딜 수가 없었고 그것을 바랐고 그것을 견딜 수 없이 바랐고

별안간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비명을. 눈동자들이 일그러졌고 그녀는 기뻤다 일그러진 아름다운 주름이 계속해서 그녀에게 향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주름들은 별안간 펴졌고 맨들맨들해졌고 하나씩 사라졌다 그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어떠한 행동을 해야 하는지. 얼마나 소리를 지르고 얼마나 오래 웃고 얼마나 오래 웃지 않아야 하는지 앨리스는 배우지 못했다. 대화를 나누는 중에 그녀는 너무나 오래 웃고 있었고 너무나 오래 침묵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녀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웃지 않았고 너무나 많은 말을 했다. 그녀가 종달새처럼 종알거리는 동안 그들은 그녀와 너무나 많은 언어를 내버려두고 사라졌다. 탈장되어 쏟긴 언어를 다시 주워담기까지 그녀는 너무나 많은 시간을 감내해야 했다. 말의 방향으로 일그러진 언어를 창자에 쑤셔넣으며 그녀는 울었다. 그녀가 우는 동안 아무도 그녀의 곁에 오지 않았다. 그녀는 언제 웃어야 하고 언제 웃지 않아야 하는지 언제 어떤 타이밍에 어떤 리듬으로 말을 해야 하는지 침묵해야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녀는 돌이킬 수 없는 불구였다.

어린 시절의 사회생활 패턴은 평생 이어진다고 한다. 그녀가 연기를 하는 동안에도 그녀는 무엇인가를 잘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녀 앞에 있던 카메라들이 아무런 지시도 말도 없이 하나씩 사라진 것이다. 그래서 연기를 하고 있는, 지나치게 드러나버린 그녀의 고통스러운 암쥐만이 그녀의 비어져나온 자궁만이 그녀와 함께 남았던 것이다. 허벅지 밑으로 흘러내리는 탯줄을 그녀는 허겁지겁 우겨넣었다. 그녀는 그녀의 것이 아닌 것을 사랑한다. 그녀는 불가능한 것을 원한다. 그것이 그녀의 죄다. 비둘기의 날개로 날고 싶어하는 암쥐처럼. 신이 되고 싶어 하는 소년처럼. 살인자가 되고 싶어하는 죽음처럼. 엄마를 낳고 싶어 하는 아이처럼.

살인자는 그녀를 내버려두고 나갔다. 그는 그녀의 살인자가 아니었으나 그녀는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원했다. 그는 그녀의 살인자가 아니었는데도 그녀는 그를 원했다. 바닥을 화려한 색으로 물들이는 피가 그녀의 얼굴을 조금 데웠다.

비명은 없었다. 그녀의 입에는 이름이 없으니까. 그녀의 입은 부를 수 없으니까.

아니, 거짓말이다. 그녀의 입은 부를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불릴 수 없는 것이다. 그녀의 입은 비명을 지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비명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위에서 아래로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고 있어. 인간이 죽는다. 인간은 언제나 죽는 존재다. 인간은 죽고 죽고 죽고 죽는다. 그녀가 죽는다. 그녀가 살려고 하는 만큼 그녀는 죽는다. 그러나 그녀가 죽고자 하는 만큼 죽지는 못한다. 그녀가 얼마나 많이 죽었는지 오직 그녀만 알고 있다. (간혹은 그녀도 모른다.) 그래도 그녀는 죽는다. 죽어가는 것을 잊으면서도 죽는다. 죽었다는 것을 잊었어도 죽는다. 죽는다. 죽는다. 죽는다. 죽고 싶은 만큼 죽지 못해도 죽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죽는 것을 죽는 것을 살아 있는 것을.

천국처럼 하얀 강아지가 죽었을 때 아이는 울었다. 강아지가 천국처럼 고요했으니까. 아이가 우는 동안에도 아이의 발을 부드럽게 핥아주지 않았으니까. 아이가 니니 하고 불러도 천국처럼 동그란 눈동자로 아이를 올려다보지 않았으니까. 아이가 작고 부드러운 머리를 쓰다듬어도 아이의 품으로 안겨들지 않았으니까.

니니는 천국에 갔단다.

엄마가 말했다. 니니는 천국에 가서 행복하다고. 천국은 행복한 곳이니까 천국에서는 행복하지 않을 수 없다고. 니니는 천국에서 달콤한 혀를 길게 빼며 아이의 발을 핥고 니니의 부름에 답하며 천국처럼 동그란 눈동자로 올려다보고 아이의 품으로 안겨들고 있다고. 아이가 원하는 니니의 모든 몸짓은 천국에 있다고 엄마가 말했다.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는 엄마의 말을 믿었다.

니니의 차가운 몸은 흙에 묻어 주었다. 입 속처럼 게걸스럽게 벌어진 흙 밑에 니니의 몸을 쑤셔박고 나서도 아이는 울지 않았다. 니니의 진짜 몸은 천국에 있다고 엄마가 말했으니까. 아이는 엄마를 믿었다. 아이는 천국을 믿었다. 아이는 매일 니니를 부르고 니니를 쓰다듬고 니니를 사랑하고 니니를 끌어안았다. 쓰다듬을 배도 끌어안을 등도 없으면서도 그랬다. 니니는 천국에 있으니까. 니니는 천국에 있고 아이는 천국이 아닌 곳에 있으니까. 아이는 천국을 믿었다

아이는 천국에 가고 싶었다.

아이는 니니를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엄마는 언젠가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천국에 가게 되면 만날 거라고. 그러니까 니니처럼 착한 아이가 되어야 한다고. 잠들기 전 매일 기도하고 훔치지 않고 때리지 않고 죽이지 않아야 한다고. 니니처럼 순수하다면 니니를 만나게 될 거라고. 니니가 많이 보고 싶니? 엄마가 부드러운 가슴으로 아이의 머리를 데우며 말했다. 보고 싶어. 아이가 말했다.

나는 순수해?

엄마가 약간 울었다. 그래. 우리 아기는 착하지. 착하고 순수하지. 천국처럼 순수하지. 아이는 니니가 보고 싶었다. 니니는 천국에 있었고 아이는 천국이 아닌 곳에 있었다. 만나기 위해서는 같은 곳에 있어야 한다. 니니가 아이와 함께, 천국이 아닌 곳에 있었던 것처럼. 추상적인 두 존재의 밀접한 접촉, 위치가 한없이 가까워지는 두 존재는 한없이 유사한 상태가 되어간다. 아이는 천국에 가고 싶었다.

그래서 아이는 죽었다. 아이는 천국을 샅샅이 뒤졌다. 하얀 안개와 먼지와 깃털이 시야를 가로막았다. 아이는 니니를 찾을 수 없었다.

아이가 눈을 떴을 때 엄마는 울고 있었다. 엄마는 아이에게 천국에 가면 안 된다고 했다. 아이는 엄마가 우는 것이 슬펐다. 슬퍼서 아팠다. 견딜 수 없이 아파서 아이는 다시는 천국에 가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렇지만 아이는 몇 번 더 죽었다. 천국에 가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가면 니니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천국에 갈 때마다 아이는 매번 니니를 부르는 것을 잊어버렸다. 니니를 부르면 니니는 아이에게 달려올 텐데. 천국에 갈 때마다 아이는 입을 부름을 소리를 망각했다. 살아 있는 것은 오직 한 번만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울 때까지 아이는 강박적으로 죽었다.

천국에서는 매일 연극을 한다.

한 명의 배우도 낙오되지 않는 연극이다. 모든 배우들이 모든 배우들을 소외시킬 수 있는 연극이다. 모든 배우들이 하나뿐인 배우인 연극이다. 모든 배우들이 연인을 갖는 연극이다. 모든 배우들이 천국을 갖는 연극이다. 아이는 천국을 사랑하는 만큼 그 연극을 사랑하고 싶었다. 니니가 은색 왕관을 쓰고 웃는다. 아이가 지상에서 쏟아부은 모든 쓰다듬과 모든 부름과 모든 다정함이 그곳에 있다. 천국은 아이를 내쫓지 않는다. 천국은 아무도 내쫓지 않는다. 천국에는 부족함이 없다. 천국은 아무도 죽이지 않는다. 천국에서는 아무도 혼자가 아니다. 천국에서는 누구나 삽입섹스를 할 수 있다. 천국에서는 강간당하고 싶은 누구나 강간하고 강간하고 싶은 누구나 강간할 수 있다. 천국에서는 죽이고 싶은 모두가 죽이고 죽고 싶지 않은 누구도 죽지 않는다. 천국에서는 늑대와 양의 역할을 정해야 할 필요가 없다. 늑대가 되고 싶은 양들은 늑대처럼 양을 잡아먹고 양이 되고 싶은 늑대는 양처럼 잡아먹힐 수 있다. 천국의 배우들은 원하는 만큼 상대역을 가질 수 있다. 니니가 웃는다. 니니가 아이에게 속삭인다. 기다리고 있었어. 아이가 웃는다.

천국에는 피해자가 없다.

자살자는 가해자인가 피해자인가 그런 질문을 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천국에는 자살자가 없으니까. 니니는 그곳의 왕이다. 모두가 그곳의 왕이다. 천국에는 신만큼이나 많은 왕들이 있다. 크게 열린 유리동공에 기만당하는 일도 없다. 촬영되고 싶은 모두가 촬영된다. 모든 이미지들 섬광들 찰나의 부서짐들이 기록된다. 아무도 보지 않는 글도 없다. 헐렁하게 늘어나 질질 끌리는 고통스러운 언어도 없다. 한 조각의 언어도 남지 않는다. 한 조각의 언어도 잊히지 않는다. 한 조각의 언어도 혼자가 아니다.

읽히지 않는 페이지들도 감실을 가득 채운 은밀한 꽃-비밀들도 없다. 죽을 때까지 알려지지 않을 밤들도 밤의 비밀들도 비밀을 갖지 못한 텅 빈 인형들도 없다. 진짜 배우들만 가질 수 있는 비밀을 애걸하며 지극히 표피적인 동작만을 서글프게 연기하는 대역 배우들도 없다.

천국에서는 매일 연극을 한다. 모두가 처형당할 수 있다 모두가 처형할 수 있다. 모두가 살인자 배교자 부활자 신성한 자가 될 수 있다. 모두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을 수 있다. 천국에는 무한한 죽음이 준비되어 있으니까. 절망적으로 화려하게 흩뿌려지는 붉은 장식과 함께 온갖 시선들과 함께 죽을 수 있다. 누구나 연인을 위해 죽을 수 있고 연인과 함께 죽을 수 있고 연인을 대신하여 죽을 수 있다. 특별한 운명 없이도 죽을 수 있다. 자살에 실패하는 일도 없다. 모든 죽음이 성공한다. 실패조차 성공한다. 비밀이 되어버린 유언도 없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피었다가 돌이킬 수 없이 훼손되어 버리는 끔찍한 언어도 없다. 한 명의 독자도 갖지 못하는 언어는 없다. 그러나 어디에도 없는 것들은 천국에 있다. 어디에도 있을 수 없는 모든 것들이 천국에 있다. 가령 길을 잃은 아이의 속마음 같은 것. 전단지에 붙은 편평한, 바래어가는 얼굴의 뒷면 같은 것. 로드킬당한 고양이의 유언 같은 것. 글쓰는 사람의 절망적으로 긴 소설들, 랜섬웨어로 휘발되어버린 어떠한 문자열들-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을 그러나 알려지고자 애걸했던, 이제는 알 수 없게 되어버린 언어 같은 것. 무명 작곡가가 직접 쳐부숴버린 기타 같은 것, 페이지 순서를 알 수 없게 되어버린 악보 같은 것, 좋아요를 0개 받은, 아틀리에에서 서툴게 촬영한 유화 같은 것, 더 이상 보관할 공간이 없어 어딘가에 버려야 했던 채색된 캔버스들 같은 것, 잠든 동거인의 머리맡에서 강아지가 밤새도록 웅얼거렸던 소망 같은 것.

천국에는 존재하지 않는 모든 것들이 존재한다. 천국에는 불가능한 모든 것들이 있다. 천국에는 양립불가능한 모든 것들이 공존한다. 순결과 죽음, 0와 무한, 탈존과 존재, 갈망과 포만, 불행과 행복, 불가능과 가능, 무질서의 질서, 불멸자의 부활. 천국에서는 모든 불가능이 가능하다. 천국에서는 모든 필멸이 불멸한다. 천국에서는 모든 것이 죽을 수 있고 죽음은 사라지지 않는다. 천국에서는 모든 것이 변하고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천국은 불행하다. 천국에는 행복한 불행이 있다. 행복한 불행은 격심하고 달콤한 슬픔이다.

천국에는 견딜 수 없는 슬픔이 있다. 아이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천국은 슬펐다. 죽음이 슬픈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그녀는 한 번도 섹스하지 않았다. 그녀는 한 번도 키스하지 않았다. 그녀는 한 번도 이별하지 않았다. 그녀는 한 번도 성적인 대상이 되어본 적이 없다. 그녀는 한 번도 침대에 누운 남자아이의 건강한 육체를 더듬으며 질투를 느낀 적이 없다. 단 한 번도 읽힌 적 없는 소설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녀는 그다지 존재하지 않았다. 존재를 연습할 기회도 없이 그녀는 늙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늙음도 추함도 슬프지 않았다. 비교할만한 존재들 그녀를 더 초라하고 더 늙게 만드는 존재들이 없으니까. 그녀는 특별히 어리거나 아름다워본 적도 없으니까. 그녀는 참을 수 없는 결핍을 느끼지만 결국 참을 수밖에. 다른 길은 없는 것이다. 앨리스는 생각한다. 그러나 그녀는 원하고 있었다고. 원하고 있었어. 그러니까 매일 촬영장에 갔던 거야.

가는 것, 있는 것 외에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구걸하는 일조차 할 수 없었다. 한 번도 문단을 나누지 않고 끔찍하게 긴 소설을 완성시킨 적도 있는데 그 소설이 정말 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출판되지 않았으니까. 인터넷에 게시해놓은 글에는 단 하나의 댓글도 달리지 않았다. 그래서 올리는 것을 그만두었다. 쓰는 것은 그만두지 못했다. 그녀가 아직도 약간 존재했기 때문에. 구멍들이 중력의 방향으로 흘러내리고 있는데 너무나 열려서 고통스럽게 무언가 웅얼거리고 있는데 체액이 침이 흥건히 새어나오고 있는데 그것들 내부로 들어오는 것은 없다. 그녀는 헤벌어진 구멍들로 매일 흐느꼈다. 클라이막스도 스펙터클도 없는, 지루한 허물어짐. 커리어가 되지 않는 죽음들. 타인의 죽음과 타인의 연애와 타인의 범죄와 타인의 희생과 타인의 고통과 타인의 비극과 타인의 행복과 타인의 아름다움과 타인의 상실과-오 늙는다는 것 늙어서 더러워진다는 것 늙어서 무엇인가를 잃게 된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타인의 병과 타인의 증상들과 타인의 이미지와 타인의 애도와 타인의 슬픔과 타인의 헌신과 타인의 배신과 타인의 섹스와 타인의 변태성과 타인의 의상과 타인의 가면과 타인의 키스와 타인의 연기와 타인의 포옹과 타인의 배역과 타인의 도착증과 타인의 미래와 타인의 시간을 훔쳐보고 질투하고 빌어먹고 갈망하는 것 이외에 그녀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오 그러나 그녀는 적어도 질투에 있어서는 전문가이다. 적어도 전문가가 되는 데 충분한 시간만큼은 질투하였고 훔쳐보았고 애원했다. 들리지 않는 애원은 아무런 보상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기다림을 침묵으로 보내는 것이 절망적으로 지루했기 때문에 울음을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애원한 것이다. 재채기를 하고 콧물을 흘리는 것처럼.

어쩌면 그녀는 80세가 될 때까지 살아남을 것이다. 숱한 자살 실패와 자살 시도의 실패와 자살 실패의 실패들 끝에 죽음의 문턱까지 살아남을 것이다. 처녀인 채로. 보랏빛 회색으로 늘어진, 시체 같은 음부를 갖고서. 부패해가는 탯줄 혹은 물고기의 내장 같은 음부를. 너무 많은 모공들이 너무 많은 눈구멍 입구멍 장기의 촘촘한 구멍들 상처들이 절망적으로 늘어진 채로. 구멍들은 점점 번져가고 점점 커져가는데 그 속에는 처음부터 갖고 있던 것 외에는 아무것도 갖지 못한 채로. 우울증자의 진단은 대체로 정확하다. 비관은 낙관보다 객관적인 사실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사십 년 동안 처녀였다면 다음 사십 년 동안에도 처녀일 것이다. 사십 년 동안 실패했다면 다음 사십 년 동안에도 실패할 것이다. 사십 년 동안 살아남았다면 다음 사십 년 동안에도 살아남을 것이다. 태양이 동쪽에서 떠오르듯이. 그 끔찍한 사실을 견디지 못한 발견자들이 얼마나 절망했을지 상상할 수 있어? 내일도 모레도 그 다음 날도 태양이 동쪽에서 떠오르리라고 직감해버린 사람들이. 삼십 년 동안 걸을 수 없었던 중풍 환자는 나머지 삼십 년 동안도 걸을 수 없었다. 그가 걷기를 바랐든 바라지 않았든. 그가 다른 미래를 꿈꾸었던 꿈꾸지 않았든. 갈망하는 변화는 일어나지 않고 갈망하지 않는 변화만이 일어난다. 가장 끔찍한 실수로 빌어버린 소원만이 순식간에 이루어진다. 옥상에서 뛰어내린 직후에 소녀는 살려달라고 빌었고 바닥에 떨어지기까지 팔십 년 가까이 그녀는 정말로 살아남았다. 동쪽의 반복되는 태양들을 견뎌내야 한다. 경험의 사랑의 내밀함의 결핍을 처녀를 갈망을 구멍들을 부재를 상실의 불가능성을 그 모든 불가능성들을 견뎌내야 한다. 견디지 못하더라도 견딜 수밖에 없을 것이다. 수십 년 동안 컴퓨터 앞에서 글을 쓴 중풍병자의 희망을 질투하는 일은 그것을 멸시하는 일만큼이나 절망적이다. 희망이 불가능한 것으로 밝혀질 때까지 희망하고 싶지는 않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없는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녀는 죽었지만 죽음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뜨뜻미지근한 바닥으로부터 등을 떼고 일어났고 바닥을 적신 더러운 체액을, 그녀의 벌어진 구멍으로부터 새어나온 어떤 육체를 걸레로 닦았고 축축해진 옷을 갈아입었다. 그녀는 여자애의 어설프고 절망적인 장광설을 좋아하므로 종종 그러한 말투로 쓴다. 혼잣말하듯이. 혼잣말하면서. 소리는 없이.

DELUSION LEVEL ZERO. 여자는 아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었지만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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