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과 장미 4

Act. 1.

살인자가 떠나간 현관.

– 절실한 이해자를 찾는 일만큼이나 절실한 타자를 찾는 일은 불가능하다.

– 앨리스

– 우리는 너무 죽어 있어

– 우리는 너무도 이상한 뒤틀림 읽어낼 수 없는 균열 아주 평범한 너무 이상해서 평범한

– 여자가 떨어지고 있다 프레임에서 조각난 살들이 떨어지고 있다 떨어지고 있다

– 한 쌍의 검은 눈.

앨리스가 식탁에 앉는다. 그녀의 앞에는 한 장의 학습지가 놓여 있다.

다음 문장들을 다음 문장들로 번역하시오.

1. 당신의 아이는 위험한 상황입니다. 아이가 이마를 짓찧는 것은 부모가 알아차려야 하는 신호입니다.

2. 너는 한 번도 나를 이해한 적이 없어.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속해 있는 것입니다. 너는 아버지를 가질 수 없습니다. 어머니의 유방은 어머니에게 속해 있습니다. 어머니의 자궁은 어머니에게 속해 있습니다.

3. 임대 기간이 끝나면 임차인은 퇴거해야 합니다. 어머니의 자궁에서 쪽방에서 유일한 공간에서 언제라도 계약이 끝나면 퇴거해야 합니다.

4. 나는 너를 미워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거야. 나는 나를 미워하지 않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는 거야.

5. 좋아 글쎄 빈말로도 좋다고 할 수 없지 하지만 좋다고 믿으면 좋은 거야 겨우 그거야 겨우 그게 다야

6. 좋은 법은 좋은 범죄들을 가능하게 한다. 오직 죄만이 죄를 사한다.

7. 그가 곤죽이 되어 흐물거리는 여자를 토해낸다. 여자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것은 태어남과 다르다

8. 그것은 태어남과 다르다. 하얀 천을 뒤집어쓰고 오르톨랑을 먹는 선량한 시민들. 매운탕 속에서 끓고 있는 낙지가 경련한다 더 크게 움직인다 아이가 즐거워하며 웃는다. 귀여워. 귀여워. 낙지야. 좋아? 재밌어? 행복해? 아이가 묻는다. 낙지가 춤을 춘다. 아이가 웃는다.

9.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해 내가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내가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불가해의 찌꺼기가 소화되어 버릴 때 소화되어 사라진 것처럼 느껴질 때 그것은 비로소 완전히 훼손된 것이다.

여자는 문장들을 문장들로 옮겨 적는다. 앨리스는 착한 아이다. 앨리스는 살인하거나 자살하지 않는 착한 아이다. 그녀의 언어가 망가졌다고 해도 심지어 불완전하게 망가졌다고 해도 그녀는 착한 아이다. 그녀가 지나치게 많은 혼잣말을 한다고 해도 그녀는 착한 아이다. 그녀는 그다지 죽이지 않고 그다지 죽지도 않는다. 그녀는 오직 은밀한 곳에서만 은밀한 방식으로 죽는다. 살인자가 떠나간 뒤에 그녀는 바닥에 남은 진득한 체액을 마른 티셔츠로 깨끗이 닦아내었다.

언젠가 여기에서 그녀는 여자아이와 함께 케이크를 먹었다. 집에서 도망 나온 여자아이였다. 그 애는 앨리스를 엄마라고 불렀고 앨리스는 그 애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아이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지 못했다. 그녀가 자신을 버릴까 두려워하기라도 하듯. 그러나 그녀가 누구를 버릴 수 있겠는가. 그녀는 가진 것이 없는데.

달콤한 크림으로 젖어 있는 아이의 작고 불행한 입술. 벌어졌다 닫히는 간격. 우리는 천사의 고기를 함께 먹었지. 지옥에서 훔쳐낸 이미지들. 천국의 조각들. 비너스의 자궁을 열어젖히고 그 속에서 출혈하는 푸른 수염들을 본다. 아가, 무서워하지 마. 여기엔 우리 둘 밖에 없어.

– 그리고 나는 너를 죽일 거야

– 그리고 너는 나를 죽이지 않을 거야

아이는 여자의 귓가에 입술을 붙이고 속삭였다. 젖은 입술이 붙었다 떨어지는 소리 그리고 다시 붙는. 엄마 나는 죽고 싶어

엄마 나는 살고 싶어

사랑받고 싶어 사랑하고 싶지 않은 순간에도 사랑받고 싶어

부드럽고 지리멸렬한 대사. 아이가 여자의 몸 깊숙이 손을 집어넣었다. 아이가 여자의 입천장 위에서 까끌거리는 흔적을 발견했다.

– 알려질 필요가 없는 말입니다 구태어 알려지지 않아도 되는 말입니다 늙은 개들의 창자에서 서서히 자라나는 암처럼 구태여 알려지지 않아도 되는 죽음입니다 자신의 아파트 창문을 깨고 뛰어내린 남자의 시체가 아파트 7층 높이에서 영원히 멎어 있습니다 그것이 뛰어내리고 있는 동안 그것이 얼마나 많은 꿈들을 꾸었는지 그것이 얼마나 많은 삶을 원했는지 알려지지 않아도 됩니다 시계태엽 안에서 퇴행된 뼈처럼 울고 있는 고양이. 거짓말입니다. 거짓말입니다. 내뱉은 적 없이 사로잡는 거짓말입니다. 아이들은 날개가 짓이겨진 벌레들에게 이해받습니다. 벌레들이 아이들의 앞에서 설설 기는 동안 아이들은 행복합니다. 엄마 미안해 잘못했어 가지마 자기야 주님 잘못해서 미안해 잘못하지 않아서 죄송합니다 그런데 이곳은 언제 끝나는 걸까요. 이곳은 언제 완전히 추락하는 걸까요. 비가 떨어지고 떨어지고 떨어지고 떨어지고 떨어지는 동안 어째서 아무도 그것들의 모든 추락을 목격하지 않는 걸까요. 알려질 필요가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까 알려질 필요가 없는 일이기 때문이야? 모든 죽음이 필요로 하는 눈들의 수만큼 우리는 많은 눈들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엄마의 몸은 두 개가 아닙니다. 엄마의 눈은 세 개가 아닙니다. 네 음부가 두 개가 아니듯이. 허물어진 거미집이 혐오스럽게 출렁거립니다. 많은 말을 주세요 더 더 많은 말을 더 많은 눈들을 주세요 더 주세요 더 더 더 더 더. 아무것도 갖지 않은 아이가 터무니없이 많은 것을 원한다는 사실은 혐오스럽습니까. 내가 내 것이 아닌 목소리들로 변성한다는 사실이 혐오스럽습니까. 엄마 죽어 엄마 배고파 엄마 죽지 마 엄마. 무엇이 시이고 무엇이 시가 아닌지 무엇이 구멍이고 무엇이 살인지 구분하시오. 구분하지 않아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아. 하지 않아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아. 죽어버린 뒤에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아. 천국처럼 하얀 배를 갈라서 내장을 끄집어낸 뒤에도 그 속에 부드러운 케이크 반죽을 가득 채워넣은 뒤에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아. 발을 헛디딘 뒤에도 옥상에서 뛰어내린 뒤에도 아무런 일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아. 날개는 다시 돋지 않고 천국은 우리를 돕지 않고 강아지들의 나라로 간 개들은 추억을 향해 짖지 않아. 서커스의 여자아이는 공중에 걸린 채 그토록 긴 시간을 기다렸는데 관객들이 오지 않아. 아이가 견뎌낸 날들을 아무도 세어주지 않아. 마침내 검은 장막을 열어젖혔을 때 우연스럽게 그녀를 목도하게 된 관객들의 그 끔찍한 머뭇거림을 기억해. 그건 죽을 정도로 아름답지도 않았고 죽을 정도로 대단한 일도 아니었어. 모멸적인 머뭇거림 그것은 좆같이 읽히지 않았고 네게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해줄 말이 없어. 너는 사람과 이야기하는 방법을 몰라 너는 사람을 몰라 너는 아무것도 몰라 네게는 아무런 말도 하고 싶지 않아. 떨어지고 있는 남자가 웃는다. 그의 입술을 은빛의 바람이 길게 베어낸다.

여자는 아이의 눈꺼풀에 입을 맞추며 오래도록 속삭였다. 아이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진부하지만 애틋한 웃음이었다.

ACT. 10.

은수와 정민이 소파 위에 앉아 있다. 그들이 입을 맞춘다. 정민이 은수의 입 속에 소리친다.

정민 : 더는 못 하겠어

은수가 고통스럽게 구역질한다. 천천히 고개를 젓는다.

은수 : 나도, 나도 못 하겠어

정민 : 네가 한 말을 계속해서 생각했어.

정민이 상기된 얼굴로 속삭인다.

정민 : 우리는 만난 적 없어 그래서 서로를 해칠 수도 없어 만약 내가 아프다면 그건 다른 사람 때문이야 나는 다른 사람 때문에 나를 아프게 하고 있는 거야 나는 네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있는 거야

은수 : 난 그런 말 한 적 없어

정민 : 전부 네가 한 말이야 나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어

은수 : 난 그런 말 한 적 없어

정민 : (갑작스럽게 비명을 지르며) 나도 그런 말 한 적 없어

은수 : 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어

정민 : 넌 (긴 사이) 임신했다고 말했어

은수 : 난 그런 말 한 적 없어

정민 : 그때부터 생각했어 우리가 만난 적 없다면 넌 뭘 임신했을까 우리가 만난 적 없다면 너는 왜 그런 말을 했을까. 그런데 그거 (은수의 배 위에 손을 올린다. 은수가 질색하며 손을 쳐낸다) 잘 자라고 있어? 눈알은 두 개 심장은 하나 폐는 두 개 창자는.. (사이) 손은 두 개 팔 다리 두 개씩 발도 두 개 발가락은 다섯 개 아니 열 개 (사이) 더워 (흐느끼며) 그런데 너무 더워 (사이) 그거 상하지 않았을까 (사이) 지금 확인해 볼 수는 없을까 (사이) 사랑해 (사이) 사랑해 (사이) 자기야 사랑해 (사이) 사랑해 근데 (긴 사이) 그거 확인해 보면 안 돼? (울먹인다) 제발

은수 :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사이) 네가 누군지도 모르겠어. (사이) 내 집에서 뭐 하는 거야?

정민 : 여긴 내 집이야

은수 : 여긴 내 집이야. (사이) 날 죽이려고 왔어?

정민 : 난 아무 데도 가지 않았어

은수 : 여기 (사이. 키득거리며) 넌 미쳤어

정민 : 자기야 그것 좀 확인해 줘. 이상한 냄새가 나

은수 : 이상한 냄새는 언제나 나는 거야

정민 : 이상한 냄새

은수 : (머뭇거리며) 계속 여기 있을 거야?

정민 : (은수의 뺨과 이마에 입을 맞추며 애원한다) 제발 확인해 줘

은수가 리모컨을 향해 팔을 뻗는다. TV를 켠다.

달콤한 게 먹고 싶어요. 달콤한 게 더 달콤한 게. 생크림 케이크 위에서 딸기들이 손을 맞잡고 맴돌며 춤을 춘다. 소녀가 웃으며 손뼉을 친다. 달콤한 거 더 달콤한 거. 허공에서 샛노란 버터가 부드럽게 녹아내린다. 달콤한 거 더 달콤한 거.

우리를 배신할 생각이었구나

달콤한 거 더 달콤한 거. 소녀의 입 속에서 달콤한 거 더 달콤한 것들이 그녀의 목구멍으로 흘러내린다. 소녀가 방긋 웃으며 달콤해요 하고 소리친다. 딸기의 매끈매끈하면서도 헐거운 껍질이 짓이겨진다. 천국처럼 하얀 크림과 함께 뒤섞이는 고기반죽. 달콤하게 끈적이는 색이 TV 화면을 가득 메운다. 은수와 정민이 잠시 멍하니 TV를 보며 백치처럼 히죽거리고 웃는다.

은수 : (휴대폰을 들어올리며) 점심에 엄마가 온다고 했어

정민 : 엄마가? (잠시 생각하며) 천국에서?

은수 : 엄마 집에서.

정민 : 본가?

은수 : 천국이라니?

정민 : (긴 사이) 아니야.

은수 : 우리 엄마는 네 엄마가 아니야. 우리 엄만 안 죽었어

정민 : 우리 엄마?

은수 : 내 엄마

정민 : 넌 잔인해

은수 : 내 엄마야. 자기야 (정민을 끌어안는다) 넌 가끔 너무 징그럽게 굴어

정민 : 우리가 만난 적 없는데 어떻게 나를 안아? 우리가 만난 적 없는데 왜 나를 싫어해?

은수 : 널 싫어하지 않아. 가엾어라. 개처럼 꿈을 꾸고 있구나. 난 네 엄마가 아니야.

정민 : 사람들은 내게 단단하고 공적인 얼굴밖엔 보여주지 않았어. 나는 무른 얼굴들을 안고 더러워지고 울고 싶었는데.

은수 : 넌 나를 죽이고 이 집을 나갈 거야. 이 집에 남은 흔적은 네게 남지 않을 거야.

정민 : 여긴 내 집이야

은수 : 아니야. 여긴 내 집이야 너는 이 집을 몰라.

정민 : 내가 들어왔다고?

은수 : 네가 들어온 거야.

정민 : 아파. 자기야. 왜 나한테 그래?

은수 : 넌 아프지 않아. 꿈이 아프지 않은 것처럼 죽음이 아프지 않고 그림자가 아프지 않은 것처럼 지구가 아프지 않은 것처럼 너는 아프지 않아.

정민 : 아파. 하늘이 파랄 때 아파 꿈이 길어질 때 아파 아무도 나를 죽이지 않을 때 아파 아무도 나를 낳지 않을 때 아파 나뭇잎이 반짝일 때 아파 개들이 웃을 때 아파

은수 : 난 네가 아프지 않아.

정민 : 난 아파

은수 : 난 자폐야 내게 가능한 건 침입뿐이야

ACT. 7.

카메라의 둥근 눈동자를 보는 순간 그녀는 확신했다. 난 배우가 되기 위해 태어났어. 난 이 순간, 아직 오지 않은 이 순간을 위해 태어났어.

날개를 갖고 태어난 새들이 모두 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끔찍하게 많은 곳에서 태어난, 사람들을 끔찍하게 좋아하는 그녀가 기다리고 있다. 기다림은 아무것도 선물하지 않는다. 앨리스는 촬영장에서 그녀를 스쳐가는 무수한 사람들의 얼굴들을 빤히 들여다보았지만 그들은 그녀에게 눈맞춤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들은 그녀에게 내밀한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들은 그녀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그녀에게 침입하지 않았고 그녀는 그들에게 침입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누군가에게 무르고 부드러운 얼굴들을 문지르며 조금씩 벗겨지고 있었을 것이다. 조금씩 짓무르고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가 간절히 원하는 무엇인가를 그들은 비밀스럽게 공유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카메라를 애처롭게 바라보며 그것의 내장을 요구했지만 적어도 차가운 기계의 표면만은 그녀를 뜨겁게 응시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그런데 정말 생각했던가?- 결국 아무것도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스크린을 수놓은 얼굴들 얼굴들 얼굴들 클로즈업되고 플래시백되고 멀어지고 가까워지고 조각나고 접붙고 분열되고 빛 같은 어둠이 어른거리는 얼굴들 중에 그녀는 없었다. 그녀는 그녀의 얼굴을 찾을 수 없었다. 없었다. 어디에도 그녀는 없었다. 종이에서 오려낸 구멍 같은 그녀의 하얀 눈에서 신음이 흘러내렸다. 짐승의 솜털에서 묻어나는 붉은 포자들을 그녀는 원하는데 그녀는 그것을 위해 기꺼이 감염되고 피어버릴 수도 있는데 어째서 그것들은 그녀를 원하지 않는 걸까. 어째서 그녀가 원하는 것들은 그녀를 원하지 않는가.

엘리베이터가 멈추었다. 그녀는 벌어지는 직선의 틈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두 개의 굳게 닫힌 문이 그녀 앞에 있었다.

초인종을 눌렀다. 긴 사이. 남자의 목소리. 누구세요. 앨리스요. 누구요. 앨리스요. 아, 그래. 긴 사이. 무슨 일인데.

– 영화요.

– 영화.

초인종의 스피커에서 들어오던 푸른 불이 꺼졌고 여자는 다시 초인종을 눌렀다.

– 영화요.

– 그래. 영화.

– 영화를 봤어요.

– 그래.

남자는 끔찍할 정도로 말을 아꼈다.

– 영화를 봤어요. 여러 번 봤어요. 음악이 아름답고 리듬이 좋았어요.

– 그래.

– 들어가면 안 돼요?

침묵. 긴 침묵.

– 안돼.

– 왜요?

– 너랑 잘 생각이 없으니까.

– 괜찮아요.

– 안 괜찮아.

– 영화를 보고 감독님을 찾아왔어요. 영화를 보는 것처럼 여기를 봤어요.

푸른 불이 꺼졌고 여자는 다시 초인종을 눌렀다.

– 계속 기다렸어요.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걸 알면서도 기다렸어요. 기다릴 수밖에 없었어요. 기다리는 게 있었으니까. 대사들을 외웠고 얼굴들을 외웠고 비명들을 목소리들을 웃음들을 외웠어요. 그래서 알고 있었는데 나오지 않을 걸 알았는데 그래도 계속 봤어요.

침묵.

– 감독님. 난 열심히 했는데요. 그래요. 영화에 나오지 않은 모든 얼굴들이 그런 것처럼 열심히 했는데. 그래도 난 나올 줄 알았어요. 일 분이라도 한 순간이라도. 그만큼 많이 찍었으니까. 이런 경우가 흔한가요? 내가 찍은 적이 있긴 하나요? 감독님은 기억하고 있어요? 다른 어딘가엔 내가 있어요? 아무리 많이 봐도 내 얼굴이 안 보여. 난 열심히 살고 열심히 죽었는데 죽고 또 살았는데 다 어디 갔는지 모르겠어.

여자의 눈을 부드럽게 압박해오는 빛의 원뿔들. 넌 이상해. 네 언어는 이상해. 네 존재가 네 욕망이 이상해. 바구니 속에서 홀로 식어가고 있는 달걀의 시신. 아직 태어나지 않은.

– 저 열심히 했어요. 감독님. 열심히 찍혔어요. 찍고 있지 않은 동안에도 매일 촬영장에 갔어요. 찍히지 않을 걸 알았다고 해도 매일 갔을 거예요.

쥐약을 먹고 죽은 새끼 비둘기들.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는 천사의 시체들. 그녀는 원했다. 그녀는 원했다. 원하는 것 이외에 그녀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원하는 것 이외에 그녀가 무엇일 수 있을까. 호수 속에서 부풀어오르고 있는 백조들의 시체. 그녀는 감독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의 얼굴에 그녀의 얼굴을 문지르고 그의 기억에 그녀의 기억을 맞대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문을 열지 않았다. 어쩌면 그는 그녀를 듣고 있지도 않았다. 그녀의 혀에서 이질적인 시간들이 절합되고 있는 동안에도. 다시, 초인종을 누르고

– 영화는 좋아요. 감독님. 영화는 정말 좋아요. 상도 타셨죠? 아주 유명한 상이었어요. 시상식 중계 방송도 봤어요. 다들 매끈한 천을 걸치고 천사처럼 걷고 있었는데. 저는 아무것도 안 입고 있었어요. 아무것도 안 입은 채로 노트북 화면을 들여다봤어요. 아무리 봐도 제 얼굴은 없었어요. 아, 사실 내 얼굴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아. 그래요. 내 서랍 속에는 물방울처럼 많은 얼굴들이 있고 그것들은 전부 핏방울처럼 닮았으니까. 그런데 왜 그걸로는 안될까요. 어째서 난 다른 얼굴들 속에 있는 내 얼굴을 보고 싶은 걸까. 어째서 그걸 원하는 걸까. 어째서 물방울처럼 닮지 않은 다른 얼굴이 내 얼굴을 들여다보기를 원하는 걸까. 어째서 열려 있는 얼굴이 다른 그림자들에 젖기를 원하는 걸까. 눈이 빠질 것 같아. 아파요. 계속 봤다니까. 난 정말 많은 여자들을 연기했는데. 내가 연기한 암쥐가 정말 많은 여자들을 연기했다고요. 돼지 목장의 딸 서커스에 매달린 소녀 폐허가 된 마을에 혼자 버려진 여자아이 정말 많았는데. 그런데 아무도 그 애들을 몰라요. 아무도 그 얼굴들을 몰라요. 나는 사람의 얼굴을 향해 말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내가 뭘 보고 있었는지 모르겠어. 내가 뭘 보고 있는지 모르겠어. 내가 누구에게 얘기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어디를 봐도 얼굴들 얼굴들 얼굴들 내 것이 아닌 얼굴들 혹은 내 것일 뿐인 얼굴들. 그것들이 피부와 피부를 맞대고 뼈와 뼈를 맞대고 깊고 예민한 점막들을 맞대면서 짓뭉개지는 걸 보고 싶어. 냉장고에 버려진 두 개의 과일들처럼 살과 살이 번져가며 함께 썩어가는 걸 보고 싶어. 기억해요. 내가 기억하는 걸 나는 기억해요. 내가 여배우가 될 수 없다면 내가 보일 수도 들릴 수도 만져질 수도 없다면 어째서 나는 존재하는 건가요.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아. 아무도. 아무도.

다시, 초인종.

– 수만 번의 새벽을 보내도 아침이 오지 않아. 다시 오는 것들 말고는 아무것도 오지 않아. 나도 대화를 하고 싶어. 나도 만나고 싶어 나도 전염되고 싶어 나도 상대 배우를 원했어요. 그런데 내가 연기할 때는 아무도 없었죠. 누군가 있었을 때는 꿈이었어요. 그 정도는 나도 알아요. 난 간신히 존재하고 있을 뿐인데 왜 이렇게 깊이 느껴지는지 모르겠어. 내가 되지 못한 것들이 너무 깊이 더듬어와서 빌어먹게 추워요. 항상 그랬어요. 학교에 다닐 때도 그랬어. 쉬는 시간을 가득 채우는 목소리들이 나를 만지길 바랐는데 아무도 오지 않았어요. 끝까지 오지 않았어요. 내가 목소리들에 내 목소리를 겹쳤을 때 그 애들은 나를 피해 다른 책상에 둘러앉아 웃었어. 울타리처럼 멀어 보이던 등들을 기억해요. 졸업식 때도 눈물은 나지 않았고 더 이상 학교에 가지 않게 되었을 때도 아무도 나를 부르러 오지 않았어요. 나는 부르고 싶었는데 뭘 불러야 할지 알 수 없었어요. 촬영장에 가고 있었는데 난 매일 가고 있었는데 왜 더 올 필요가 없다고 말해 주지 않았어요? 감독님 그런데 감독님이 다른 곳으로 갔더라도 나는 매일 촬영장에 갔을 거예요. 왜냐하면 나는 여배우 말고는 아무것도 될 수 없으니까. 다른 무엇도 되려고 할 수 없으니까. 그게 될 수 없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아무것도 아닌 채로 끔찍하게 존재해야 하니까. 아무것도 아니라고 해도 존재하지 않을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모래 위의 물고기. 은색 비늘이 빛을 받아 번들거린다. 그것이 눈을 찌른다. 그것은 살아 있다. 그것은 죽음만큼이나 삶을 원한다. 벌거벗은 채 웃고 있는 알몸. 그녀는 그것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 원하는 것은 어떻게 해도 멈출 수가 없으니까. 그녀는 끝까지 카메라를 시선들을 쫓아 헤맬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으니까. 파리가 파리의 몸으로 살 수밖에 없듯이. 토끼가 토끼의 몸 속에서 살 수밖에 없듯이. 인간이 인간의 몸에서 태어날 수밖에 없듯이. 그녀는 여배우를 연기하는 것을 여배우가 되려 하는 것을 멈출 수가 없다. 영원히 그것이 되지 못할지라도 되어가는 것을 멈출 수가 없다. 감독의 두 눈을 은색 숟가락으로 파내어 씹어삼킬수도 없으면서. 단 하나의 눈동자도 시선도 빼앗을 수 없으면서. 그녀는 초인종을 누른다. 감독은 나오지 않는다. 유령처럼, 그녀는 그에게 해를 입힐 수 없다. 유령처럼, 그녀는 그를 아프게 할 수 없다. 유령처럼, 그녀는 그의 것을 요구할 수 없다. 입술을 가져다대고 아무리 빨아대도 젖은 나오지 않아. 그녀의 입에서는 어떤 냄새도 나지 않고 혀를 깨물어도 아무런 맛도 나지 않는다. 그녀의 몸에서는 아무런 맛도 나지 않는다. 그녀의 몸에서는 어떤 온기도 느껴지지 않는다. 유령처럼. 유령처럼. 유령처럼. 유령처럼. 짐승은 자신에게 언제나 유령 같은 존재일 수밖에 없는 것일까. 그녀가 격렬하게 원하는 낯설고 날카로운 시선들, 그녀의 피부를 벗겨내고 그 속에 부드러운 독을 발라줄 눈들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것들이 있는 곳에 눈을 붙여도 그녀는 그들의 유리 같은 피부 너머로 들어갈 수 없다. 유령은 죽고 싶어. 살고 싶은 만큼 죽고 싶어. 더 살고 더 죽고 더 죽고 죽고 죽고 죽고 다시 죽고 싶어. 한 번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어. 한 번 두 번 천 번 이천오백구십구 번 구천팔백칠십이 번 죽고 싶어. 그런데 한 번도 죽지 못해서 죽고 싶어. 그만큼 살고 싶어. 다시, 초인종.

– 감독님. 그냥 보게만 해 줘요. 뭐가 찍혔는지 한 번만요. 정말 날 안 찍었어요? 왜요? 그렇게 오래 찍혔는데 그게 아니라고요? 찍히지 않았다고? 그럼 난 뭘 한 거예요? 난 거기 왜 갔고 여기 왜 온 거예요. 감독님. 아무짓도 안 할게요. 보기만 할게요.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알잖아요. 난 유령이에요. 유령이 아니라면 내가 뭐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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