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과 장미 29

Act. 1.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사유의 둔감화, 인지 능력의 저하. 의사는 그녀에게 치료될 것이라고 했다. 삼촌은 모두 쏴버리겠다고 했다. 삼촌은 모두 죽여버리겠다고 했다. 삼촌이 사라졌고

앨리스는 그를 위해 울지 않는다.

왜냐하면 키티, 나는 울지 않게 되어버렸기 때문이야. 왜냐하면 키티, 나는 무엇을 위해 울어야 하는지 잊어버렸기 때문이야.

죽음이 간절하다가도 그 간절함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린다. 연기만이 그녀의 구원이지만 그녀는.

그런데 키티, 네가 뭔데?

침묵. 침묵. 침묵. 침묵. 침묵.

키티. 나는 나를 부숴버리고 싶어. 내가 아닌 다른 걸 부술 때 나는 그게 아까워. 부숴지는 게 내가 아니어서 굴욕적이야.

넌 너무 이기적이야.

그래. 난 이기적이야. 나는 나밖에 몰라. 나는 내가 부숴지기를 원해. 나는 내가 깨져서 산산조각나서 유리조각으로 흩어지기를 원해. 그게 날카로운 면들로 빛나기를 원해. 화려한 핏빛으로.

넌 이기적이야. 네게는 괄목할 만한 불행도 성공도 찾아오지 않을 거야. 너는 직접 그곳까지 걸어가는 수밖에 없어.

난 다리가 없어. 방금 내 다리를 직접 잘랐는걸.

오, 그러므로 그녀는 그녀의 피로 바닥을 적시며 그곳까지 기어간다. 앨리스는 곧 깨닫는다. 아직 아무도 그녀를 살해하지 않았음을.

오, 그러므로 그녀는 다시 일어난다. 아직 잘리지 않은 두 개의 다리로.

어디로 걸어가야 할지 그녀는 알지 못한다. 걸어가야할 곳이 없음을 그녀는 알고 있다. 그녀를 기다리는 곳은 없다. 그녀가 도달해야만 하는 곳은 없다. 죽음은 아빌리파이정 2mg으로 치료될 수 있는 망상이라고 의사가 말한다. 아, 하지만 선생님, 죽음은 비현실이고 비현실은 현실이에요. 유일한 현실이라고요.

정신과 의사는 고개를 젓는다. 앨리스씨는 죽음에 대해 완전히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건 망상이에요.

그는 앨리스의 모든 것이 망상임을 확고하게 선언한다. 그녀의 꿈, 그녀의 황홀, 그녀의 절망, 그녀의 죽음들, 그녀의 연기, 그녀의 영화, 모든 것이 망상이라고. 그녀가 유일하게 살아갈 수 있었던 그 찰나의 장소들이 모두.

그녀는 이제 어디에도 없다. 그녀는 처음부터 어디에도 없었다.

<앤젤 스테이크>가 재생되고 있는 모니터 화면을 앨리스는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혹은 끔찍하게 건조한 눈으로 바라본다. 그곳에는 그녀가 없다. 알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그곳에밖에 있을 수 없다.

아주 보편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앓고 있는 이들 사이에서는 보편적인 질병입니다 당신이 온점을 찍지 않는 버릇을 가지고 있다는 것 당신이 문법을 부수고 당신 몸을 부수고 당신 영혼을-그런 게 있다면- 부수고 당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부수려고 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사실 별로 놀랍지도 않아요 약물 치료를 꾸준히 받고 상담 치료를 받으면 모든 것이 나아질 겁니다 모든 것이 나아질 것이고

나는 약해요. 선생님. 앨리스가 소리친다. 노인의 등은 여전히.

당신은 그렇게 약하지 않아요. 주연 배우의 입술이 뻐끔거린다.

그래요. 나도 알고 있어요. 앨리스가 악을 쓴다. 그래도 난 약한 척을 해요. 내가 약한 것보다 더 약한 척을 해요. 소름끼치게 귀여운 척을 하고 그래서 귀엽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끔찍하게 상처받아서 표정을 굳혀요. 난 같은 역할을 끝까지 연기해낼 자신이 없어요.

앨리스는 흐느끼려 한다. 그러나 눈물이 나오지 않자 무표정하게 말을 이어간다. 난 오랫동안 착하고 예의바른 여자애를 연기하는 법밖에는 몰랐죠. 하지만 그걸 연기하다가도 간혹 미친 여자의 비명을 지르곤 했어요. 다들 날 못 들은 척했죠. 다들 그런 순간은 없었던 척했어요. 그래도 나는 분명히 비명을 질렀고 그 순간들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요.

이건 아주 웃긴 일이다. 앨리스는 생각한다. (그러나 그녀는 웃지 않는다. 그녀의 극본의 말미를 장식하는 무수한 그러나들.) 이건 아주 끔찍하게 웃긴 일이다. 죽으려고 하면서 삶을 챙기는 일. 죽음을 숭배하면서 생명을 숭배하는 일. 그런데 뭐가? 뭐가 웃기단 말인가? 죽음을 숭배하는 일은 언제나 생명을 숭배하는 일이었고 생명을 숭배하는 일은 언제나 죽음을 숭배하는 일이었는데. 적어도 앨리스에겐 그랬다. 그녀는 함께 있는 사람들을 혼자 떨어져 나온 채로 지켜보며 질투했다. 머리가 길고 얼굴이 하얬던 여자아이와 눈이 마주쳤을 때 앨리스는 시계를 보는 척하며 시선을 옮겼다. 깜짝이야. 여자애가 작게 웃었고 앨리스는 그녀의 목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시곗바늘이 움직이는 모양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박제된 새가 입을 벌리고 웃는다. 초대받은 박제사는 피에로 복장을 하고 있다. 그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그가 새를 박제하기 전에 새는 이미 박제되어 있다. 그는 박제된 새를 확인하고 피에로의 웃음을 박제된 새의 웃음 안에 우겨넣는다. 박제된 새가 찢어진다. 그것이 웃고 있는지 웃고 있지 않은지 이제 아무도 확인할 수 없다. 앨리스는 피에로의 목덜미를 끌어안은 채 노인의 등을 아주 오래 전에 본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그녀가 연기한 배역일까?

Act. 35.

민아와 희진이 버스 안에 있다. 그녀들은 2인용 버스 좌석에 앉은 채 잡담을 한다. 희진이 유튜브 화면을 민아에게 보여주며 묻는다. 이 강아지 귀엽지.

응. 아, 진짜 귀엽다.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난 전쟁이 우리를 죽일까?

그땐 죽을 수밖에 없을 거야. 가능한 한 빨리 죽어버려야 해.

배고픈데 이따 뭐 먹을까

떡볶이?

난 떡볶이는 별론데.

중세 시대 여성복은 정말 아름다워.

맞아. 정말 예쁘지.

조용히 해.

민아는 남자의 낮고 단호한 목소리를 알아차린다. 그녀가 먼저, 가장 먼저 알아차린다. 머리가 조금 새었고 이마에 주름이 잡혀 있지만 눈알은 새하얀 남자가 눈을 부릅 뜬 채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다. 민아를, 오직 민아만을 노려보고 있다.

조용히 해. 조용히 하라고.

그가 그녀를 죽일 듯이 노려보면서 말한다.

이 드라마 봤어? 여기 나오는 여배우들이 입은 복식이 얼마나 예쁜

민아는 희진의 어깨를 두드린다. 조용히 하래.

희진은 입을 다문다.

침묵.

민아는 끔찍한 굴욕감을 느낀다. 남자는 여전히 그녀를 노려보고 있다. 조용히 해. 조용히 하라고.

하지만 어떻게?

어떻게 더 조용히 할 수 있는가?

민아는 절망적인 비명이 그녀를 난도질하는 것을 느낀다. 그녀는 남자를 죽여버리고 싶다고 생각한다. 남자를 죽여버리고 그 자리에서 죽어버리고 싶다고 생각한다. 남자가 말한다. 조용히 해.

하지만 어떻게? 여기서 어떻게 더 조용히 할 수 있는가? 그녀들이 열렬하게 교환하던 떨리는 목소리를 그는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것일까? 그녀들이 절박하고 아슬아슬하게 연주하던 대화의 음절들을. 버스의 엔진음에 거의 흡수되어 사라져버리던 잔음들을. 끊어지면서 다시 이어지기를 반복하던 말들을.

그녀는 조용히 할 수 없었다. 그녀들은 더 조용히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소녀들은 폐 속에서 팽창하며 장기를 난도질하는 말과 비명을 치욕적으로 감내해야 했다. 남자가 놀랍도록 확고한 목소리로 조용히 하라고 말했기 때문에. 놀랍도록 똑바로 뜬 눈과 놀랍도록 확신에 찬 얼굴을 그녀에게 들이대면서.

그녀들은 입을 다물었다. 민아는 가슴을 헤집고 할퀴어내리는 끔찍한 고통을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느꼈다. 조용히 해. 조용히 하라고. 남자는 더 이상 그녀를 노려보고 있지 않았다. 그의 눈은 너무나 커다랗고 반짝였으며 그의 목소리는 너무나 단단해서 그녀는 찢어발겨지고 말았다. 그녀는 찢어졌고 다시는 회복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희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민아는 자신이 그녀를 배신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희진이 하려던 말을, 희진이 끝맺어야만 했던 말을, 그녀가 영원히 매장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녀는 남자와 싸워야 할지도 몰랐다. 이 자리에서 그를 죽여버리고 희진의 남은 말을 들어야만 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희진은 고개를 저었다.

남자는 너무나 당당하고 확고하게 말했다. 조용히 해.

소녀들의 말은 그의 말 때문에 죽어버려야만 했다. 그가 소녀들의 말을 죽였기 때문에. 그가 소녀들의 말이 죽어야만 한다고 선언했기 때문에. 너무나 당당하고 자신감에 찬 어조로. 자기 자신을 믿는 남자의 질기고 견고한 육성으로.

그래서 소녀들의 말은 죽어버렸다. 떨리고, 부정확하며, 지지대를 갖지 못한 그녀들의 말은 그 앞에서 사그라져 질식해 버렸다. 그러나 사라지지 않은 말들이 그녀들의 몸 속에서 날카로운 모서리로 소녀들의 관절 마디마디를 도려내고 있었다. 민아는 턱 밑으로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생각했다. 어째서 그녀들은 그가 그녀들을 죽인 것처럼 그를 죽일 수 없는 걸까. 어째서 그녀들은 그가 내민 단단한 성기를 물어뜯는 대신 거기에 찔려 죽어버려야만 하는 걸까. 그녀들의 천성적이고 고질적인 상냥함 때문에? 미친년이 되고 싶지 않기 때문에? 미움받고 싶지 않기 때문에?

(희진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승객들이 냉혹한 눈으로 그녀들을 노려본다. 남자는 더더욱 의기양양해진다. 희진이 노래를 부름으로써, 그녀가 미친년임을 증명함으로써 그의 정당성이 입증되었으므로. 희진은 아직도 노래를 부르고 있다. 버스 기사는 곧 그녀를 쫓아낼 것이다. 민아는 노래를 부르고 있는 희진이 쫓겨날 때 그녀와 함께 가기 위해 짐을 챙긴다. 혹은)

침묵

그녀들은 목적지에서 안전하게 내린다. 그녀들은 여전히 침묵하고 있다. 그녀들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기억해내지 못한다. 말들이 소녀들의 안에서 엉망진창으로 엉글어져 있어서 그녀들은 도저히 그것들을 알아보지 못한다. 소녀들은 한참을 무언가 말해 보려고 뻐끔거리고 더듬거리고 횡설수설하다가 짧은 만남을 마치고 헤어지고 만다.

Act. 29.

연극 <소녀 코제트 이야기> 배우 지원서

이름 : 앨리스

생년월일 : 몰라요.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는 것처럼 내가 언제 왔는지도 몰라요.

몸무게 : 34kg ~ 90kg

키 : 110cm ~ 160cm

주소 : 천국

전화번호 :

이메일 :

특기 :

장점 :

경력 :

자기소개 :

지원동기 :

전신사진 :

측면사진 :

소녀는 집을 불태웠습니다. 그녀를 입양하던 사람들이 걱정하던 그대로요. (그런 애를 집에 들이면 안 돼요. 어떤 앤 줄 알고. 옆 마을 페터가 집에 불을 질렀다는 얘기 못 들었어요?)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재가 되었고 재는 하늘로 올라가 천사가 되었습니다.

소녀는 새들이 하늘로 돌아가는 것을 배웅했습니다. 아무도 소녀에게 새들의 둥지가 하늘에 있지 않다는 걸 말해주지 않았으니까요.

앨리스는 지원서를 믹서기에 집어넣고 갈아버린다. 불행은 한 번도 그녀의 신인 적이 없다. 그녀의 신은 어디에도 없다. 그것은 분쇄되어 쓰레기가 되어버린 말들, 그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Act. 36.

앨리스, 오디션장의 접수처에 서 있다. 그녀는 우연히 그곳을 발견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올 수 없었을 것이다. 오디션장의 위치는 1차 서류 시험을 통과한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특례였으니까. 그녀는 잠옷을 입은 채 밤 거리를 헤매며 고층빌딩들 사이를 쥐새끼처럼 쏘다니고 있었다. 비슷한 키와 체격의 소녀들이 길게 줄을 선 것을 본 뒤, 그녀는 홀린 듯 그 자리에 멈추어섰다. 그녀는 순식간에 알아차렸다. 소녀들이 무엇을 위해 기다리고 있는지. 그녀들은 오디션을 보려 하는 것이다!

여자는 소녀들의 줄 사이에 끼어들었다. 새치기를 당한 소녀들은 여자에게 무관심했고 여자는 아무런 해프닝도 없이 점점 줄어드는 줄을 타고 건물 내부로 들어설 수 있었다. 여자는 소녀들보다 키도 몸집도 컸지만 건물을 관리하는 어느 누구도 여자를 쫓아내려 하지 않았다. 그녀가 소녀들을 닮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여자는 생각했다. 물론 그곳에 소녀들을 관리할 의무를 가진 이가 아무도 없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여자가 쌍둥이처럼 닮은 소녀들 네 명과 함께 오디션장 안으로 들어섰을 때, 그녀들 앞에 앉은 심사위원들은 아직 자리에 앉지도 않은 가장 오른쪽 소녀에게 심사평을 들려주기 시작했다.

수아씨 연기는 너무 아름다워요. 발랄하고 재밌어. 감동 받았어요. 난 수아씨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데도 수아씨를 사랑하게 됐잖아.

나머지 세 명의 소녀들도 비슷한 종류의 찬사를 받는다.

여전히 무표정한 소녀들이 자리에 앉는다. 여자도 소녀들을 따라 자리에 앉으려 할 때 심사위원들이 여자를 노려보며 말하기 시작한다.

쉼표가 있어야 합니다 대체 뭘 얘기하고 싶은 거예요 요령부득의 연기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계속 그렇게 비명만 지르고 있으면 알아들을 수가 없어요 재미도 없고 꾸역꾸역 들어도 다 잊어버리고 맙니다 뭘 들었는지 뭘 들을 수 있긴 한 건지.

여자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채로 그들의 눈을 마주치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들이 그녀가 울기를 기다리고 있음을 그녀는 알아차린다. 그러나 그녀는 울지 못한다. 여자가 앉아서 울기 위해 울음에 대해 생각하며 점점 더 울음으로부터 멀어져가고 있는 동안, 소녀들은 한 명씩 일어나 정면과 측면, 후면 사진을 찍고 카메라 테스트를 한다. 라이브카메라를 통해 화면에 비추어진 소녀들의 얼굴은 놀라울 정도로 흡사했으나 눈동자의 크기나 코의 위치, 피부의 질감 같은 것이 조금씩 달랐다.

대체 저런 여자를 어떻게 출연시켰는지 모르겠군. 심사위원 한 명이 중얼거린다. 앨리스는 몸서리를 치며 이것이 꿈임을 깨닫는다. 이것은 또다른 꿈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그녀는 거기 출연하지 못했으니까. 그녀가 연기한 건 망상에 불과했으니까! 그러니까 그들은 그녀의 연기를 보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망상이 아니다. 그것이 망상이다. 분명히 그것이, 그것이 망상이다. 앨리스는 알고 있다. 건강하고 이성적인 정신으로, 그녀는 알고 있다. 이것이 아니라 그것이 망상이라는 걸. 아니, 그것이 아니라 이것인가? 어쨌든 그녀는 속지 않을 것이다. 배신당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녀는 미쳤지만 그녀가 미쳤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정도로 건강하다.

모든 예술은 증상에 불과해. 화면 속 소녀가 속삭인다. 소녀의 얼굴이 위로처럼 다정하고 부드러워서 여자는 끔찍하게 상처 입는다.

왜 그런 표정을 지어? 소녀가 묻는다. 너도 알고 있잖아. 망상을 빼면 네게 뭐가 남겠어. 네 연기는 망상이야. 네 글쓰기는 망상이야. 네 존재는 망상이야. 네 현실은 망상이야.

동양인의 동그란 얼굴을 하고 있는 소녀의 머리는 억센 금발이다. 누가 보아도 그것이 가발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부자연스러운. 소녀가 노래를 부른다. 난 내 동화책들을 전부 불태웠어. 예쁜 웃음을 가진 왕자님들이 살려달라고 소리쳤는데 구해주지 않았어. 지겨웠거든. 너무 지겨웠거든.

앨리스가 소녀의 입술 모양을 따라하며 흥얼거린다. 의사는 상처주지 않기 위해 침묵했고 나는 그 침묵 때문에 상처받았어.

소녀 : 내가 코제트가 되는 동안 넌 뭘 했는데.

앨리스 : 나도 오디션장에 갔어. 코제트와 코제트의 실패자들이 모여 있는 거기 나도 있었어.

소녀 : (부드럽게 웃으며) 네가 있었다고? 난 못 봤는데.

앨리스 : 나도 거기 있었어.

소녀 : 거짓말.

앨리스 : 아니야. 나도 거기 있었어.

소녀 : 거기서 뭘 했는데? 불에 탄 왕자들과 뭘 했는데?

앨리스 : 아무것도 안 했어.

소녀 : 거봐. (폭소를 터뜨리며) 넌 거짓말쟁이야.

앨리스 : 아니야. 나도 거기서 뭔가 말하려고 했어. 그런데 갑자기 참을 수가 없었고 말을 깨물어 물어뜯어버렸어. 훼손된 말에서 역겨운 즙이 줄줄 새는 바람에 아무말도 할 수 없었던 거야.

소녀 : 그럴 땐 입에 붕대를 감아버려야지.

앨리스 : 붕대가 없었어.

소녀 : 알겠다. 너는 오디션장 입구에서 파렴치하고 역겨운 말을 해버렸어. 그래서 오디션장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쫓겨난 거야.

앨리스 : 아니야. 난 분명히 오디션장 안에 있었어.

소녀 : 거긴 오디션장이 아니야.

앨리스 : 심사위원들이 나에 대해서 말했어.

소녀 : 무슨 말?

앨리스 : 기억 안 나.

소녀 : 네가 있었던 곳은 기껏해야 파티장에 불과해. 거기 있던 광대들이 너를 조롱하려고 놀려준 거야. 알겠어? 바보야. 너는 속은 거라고. 넌 파티의 진짜 주인공을 위한 유흥거리에 불과했어.

앨리스 : 그들은 내 영화를 봤다고 했어.

소녀 : 네 영화 같은 건 어디에도 없어.

앨리스 : 그들은 내 연기가 끔찍하다고 했어.

소녀 : 네 연기 같은 건 어디에도 없어.

앨리스 : 넌 어떻게 코제트가 됐는데?

소녀 : 네가 절대로 될 수 없는 방식으로.

TV의 매끈한 화면을 바라보면서, 앨리스는 갑자기 메스꺼움을 느낀다.

말살당하는 기분.

논리의 체인들. 부식된다 사라진다 그래서 어쩌라고 구멍이 송송 뚫린 몸 구멍 투성이 얼굴 구멍 투성이 언어 씨발 구멍들 구멍들 나는 구멍에서 태어났고 구멍으로 자라났네. 공주가 케이크 칼로 왕자의 하얗고 단단한 이마를 연다. 머릿가죽을 자르고 두개골까지 절단한다. 깨끗하게 드러난 두개골 안쪽 공간에 공주는 얼굴을 파묻고 혀를 집어넣는다. 아, 아, 아, 아, 왕자가 신음하고 공주는 그의 비린 뇌수를 핥는다. 더 세게, 더, 더, 더 세게. 말살당하는 기분.

말살당하는 기분.

산타는 아이들의 특권이죠, 하고 소녀가 말한다.

앨리스는 소녀를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소녀가 웃는다. 마치 앨리스의 느낌을 소리로 들은 것처럼.

다들 그렇게 말해요. 소녀가 키득거리면서 속삭인다.

오랫동안 죽고 싶어했고 마침내 죽음에 성공한 사람을 위해서 아무도 그의 죽음 파티를 열어주지 않았어요. 람세스 호텔에서, 하고 소녀가 말한다. 그가 사탕 지팡이에 목을 매달고 죽어버렸을 때 아무도 그를 위해서 노래를 불러주지 않았죠. 축하한다는 말 한 마디 없었어요. 모두 그를 위해 울 뿐이었어요. 그가 원한 건 그런 게 아니었을 텐데. 그는 분명 성공했는데, 아주 오랫동안 염원하던 걸 성공했는데, 아무도 그를 축하해주지 않았어요. 마치 그가 돌이킬 수 없는 실패자인 것처럼 그를 연민하며 울 뿐이었죠.

앨리스가 깔깔거리며 웃는다.

소녀 : 아, 당신은 정말 잔인한 사람이에요. 다른 사람이 축하받는 게 죽지 못하는 것보다 더 싫은가 봐.

앨리스 : 너도 마찬가지잖아.

소녀 : 내가?

앨리스 : 그래. 너도 마찬가지로 잔인해. 너는 아무도 죽이지 않지. 네가 죽고 싶은 것처럼 누군가 죽어버리는 게 싫어서. 날카롭고 폭발적인 피와 함께, 파티처럼 죽어버리는 게 싫어서 그러는 걸 다 알아.

말살당하는 기분.

말살당하는 기분.

노인은 TV를 보고 있다. 화면이 무한히 변화하는 동안 그들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이 공간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앨리스는 노인이 그녀의 품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기를 기다린다.

기다린다.

그러나 노인은 여전히 가만히 앉은 채로 TV만을 보고 있다.

외삼촌이 피가 뚝뚝 흐르는 머리통을 들고 왔을 때, 우리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그건 외삼촌 자신의 머리통이었다. 그는 그것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앨리스가 뻐끔거리고 그녀의 목구멍 내부 사적 공간을 마찰시키며 언어가 흘러나온다. 파렴치한 말, 용서받을 수 없는 말, 말해선 안 될 말. 음소거된 TV의 성스러운 침묵을 파괴하며 그녀가 말한다. 남자의 성기도 타인의 혀도 아닌, 독특한 질감의 언어가 그녀의 점막을 문지르고 애무하며 그녀의 턱 밑으로 줄줄 흘러내린다. 그녀는 목구멍 뒤쪽의 찢어진 상처를 느낀다. 그래도 말하는 것을 그만둘 수 없다. 아무도 그녀의 연기를 응시하지 않아도, 아무도 그녀의 연기를 촬영하고 있지 않아도, <앤젤 스테이크>의 여배우는 그녀가 아니라고 해도, 그녀가 연기하는 여배우는 여배우가 아니라고 해도, 그녀가 출연한 영화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녀가 출현한 영화에서 연기한 여배우의 역할이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Series Navigation<< 양과 장미 28양과 장미 30 >>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