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과 장미 23

Act. 25.

김현경은 TV를 보고 있다. 클로즈업된 인간의 얼굴들. 그녀는 그 속에서 돼지들을 찾는다. 그녀가 보기에 모든 배우들은 돼지들이고 늑대를 기다리고 있다. 혹은, 모든 배우들은 돼지들을 연기함으로써만 늑대를 기다릴 수 있다. 인간의 실존의 양식을 결정짓는 제스처와 표정과 언어들. 김현경은 그곳에 머리를 삽입하고 싶다. TV의 표면에 얼굴을 밀어넣고 다른 얼굴들과 충돌하기를 그녀는 원한다. 그녀는 미치지 않았다. 그녀는 미치지 않았다. 그녀는 미치지 않았다. 그녀는 미치지 않았다. 그녀는 미치지 않았다. 그녀는 미치지 않았다. 그녀는 미치지 않았다. 그녀는 미치지 않았다. 그녀는 미치지 않았다. 그녀는 미치지 않았다. 그녀는 미치지 않았다. 그녀는 미치지 않았다. 그녀는 미치지 않았다. 그녀는 미치지 않았다. 그녀는 미치지 않았다. 그녀는 미치지 않았다.

미치지 않았으므로 그녀는 얌전히 앉아 TV를 본다. 그녀는 결코 TV를 부수지 않는다. 줄기가 썩어가는 꽃을 화분 속에 넣어놓은 채 결코 그것을 부수지 않는 시인들처럼. 깨지기 전까지는 도망치지 않는 여자들처럼. 죽어가기 직전까지 병원에 가지 않는 말기 암환자처럼. 그녀는 아직 미치지 않았다. 그녀는 미치지 않은 그녀의 얼굴이 배우의 얼굴 위로 아른거리며 반사되는 것을 본다. 그녀의 눈은 눈꺼풀에 반쯤 뒤덮여 있다. 길게 자란 늑대의 손톱으로 눈을 긁어대어도 그녀는 눈 멀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깊게 긁지 않으니까. 그녀의 손톱은 진짜 늑대 손톱이 아니니까. 그녀는 긁고 긁고 긁다가 그만둔다. 그녀는 여전히 무력하게 열린 채로 그녀의 표면에 쏟아지는 이미지들을 본다. 그녀는 미치지 않았다 그녀는 미치지 않는다

그녀는 미치지 않을 것이다.

어젯밤 김현경은 돼지들에게 입맞추며 그들의 입속에 구토했다. 돼지들은 그녀를 삼키고 깔깔거리며 웃었다. 김현경은 조금 놀랐다. 역겨웠을 텐데. 좆같이 역겨웠을 텐데. 그들은 삼켰다. 어쩌면, 그들은 김현경을 원하기 때문에 삼켰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들은 삼켜야만 했기 때문에 삼켰을지도 모른다. 삼켰기 때문에, 김현경을 원하지 않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김현경은 그들에게 사과하고 싶은 것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그녀가 그들을 원하는 만큼 그들은 그녀를 원해야 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녀의 망상이고 그녀의 어린시절이고 그녀의 TV 프로였으니까. 그러니까 그들은 그녀를 초대해야만 했다. 그녀가 원하는 곳으로. 그들이 있는 곳이 그녀에게는 늑대이고 천국이고 다른 곳임을 그들은 알고 있을까? 그들이 요구한다면 그녀는 기꺼이 그들을 먹을 것이었다. 목구멍 깊이, 가장 깊은 곳까지 밀어넣고 그들을 주물러 뭉그러뜨릴 것이다. 그녀가 그들에게 먹히기를 원하는 만큼, 그녀는 그들을 위해서 그렇게 할 수 있었다.

수줍은 돼지 소녀가 카메라 렌즈를 응시하며 노래 부른다.

나는 창녀야. 나는 창녀를 연기해. 아주 즐겁게. 너희가 나를 창녀라고 욕할 때 나는 이미 창녀야. 내가 창녀가 아닐 때도 나는 창녀야. 나는 창녀의 아류고 창녀의 딸이고 창녀의 엄마야.

나는 나를 찢어버리고 싶어.

그녀는 미치지 않았다.

그래서 어쩌라고?

어쨌든, 김현경은 그럭저럭 행복했다. 그녀는 TV에서 노래 부르는 어린 돼지를 향해 말했다. 난 행복해. 어린 돼지는 웃고 있었다. 그래. 우린 행복해. 우리는 행복 속에서 죽어서 천국에 갈 거야.

그녀는 미치지 않았다. 똑같은 책들로 빼곡이 메워진 책장처럼, 그녀는 미치지 않았다. 미칠 만큼 그녀는 용감하지 못하다. 미칠 만큼 그녀는 가난하지 않고 미칠 만큼 그녀는 아름답지도 않다. 김현경은 TV 앞에 얌전히 앉아 있다. 그녀는 무해하다. 그녀는 아무도 물지 않는 개다. 소년들이 그녀의 입 속에 팔을 깊숙이 밀어 넣어도 그녀는 물지 않을 것이다. 왕의 좆을 물지 않는 후궁처럼, 그녀는 물지 않는다.

리얼리티가 없는 현실. 얼굴에 분홍 페인트가 덕지덕지 묻은 단발머리 여배우가 웃으며 말한다. 현실은 초현실이야!

하얀 욕조에서 우리는 인어를 길렀어. 창백하고 부드러운 피부를 가진 여자였어. 우리는 바다에서 그녀를 처음 발견했지. 산산조각난 햇볕을 뒤집어쓰고 깊은 곳을 들여다보는 그녀가 너무 아름다워서 우리는 죽고 싶었어. 푸르고 음산한 몸. 몸은 계속 불어가고 있었어. 몸은 돌이킬 수 없이 불었어. 우리는 이해할 수 없었어. 어째서 그녀가 점점 이상해지는 건지. 그녀는 물 속에서 가장 아름다워야 하는데, 그녀는 끔찍하게 변해갔어. 그녀는 더 많은 물을 요구하고 있었던 거야. 그렇지? 욕조에 담긴 물로는 견딜 수가 없었던 거야. 우리는 그녀를 위해 더 많은 물을 부었어. 그녀는 부풀었어. 하얗게 풀어져서 조금만 만져도 찢어져버렸어.

Act. 30.

한민아에게는 그밖에 없었다. 그녀는 빈 집에서 그를 기다렸다. 그녀는 그를 사랑했다. 그가 유능하고 그녀보다 키가 커서 사랑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 세상에서 그가 그녀의 이름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으므로, 그녀는 그를 사랑하는 것이다. 한민아라는 이름을 부르면 그녀가 알아듣는다는 사실을 아는 유일한 존재였으므로, 그녀는 그를 사랑하는 것이다.

경민은 그럭저럭 괜찮은 사람이었다. 한민아는 그림자마저 따끈하게 데워진 한낮의 거리에서 그가 그녀의 손을 잡아오던 순간을 기억하고 있었다. 골목을 파고들던 길고 단단한 손가락과 아무도 서로를 끌어안지 않는 어둠 속에서 그녀가 전유하던 만족감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그녀를 만지고 있으므로, 그녀가 그를 원하므로,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언제든 그에게 연락을 하고 그가 답장하기를 기다릴 수 있었다. 확고한 기다림을 그녀는 죽고 싶을 만큼 사랑했다. 대학에서 같은 교양 수업을 듣는 동안 그녀는 생각했다. 그 자리에 앉아 공부하거나 몽상하는 사람들 중 오직 그녀만이 그를 사랑했다. 오직 그녀만이 그의 벗은 몸을 알고 있었다. 오직 그녀만이 그를 끌어안을 수 있었다. 그녀는 경민아, 하고 부를 때 그녀의 입속에서 흘러나오는 다정한 울림을 그의 존재보다 더 사랑했다.

그는 그럭저럭 괜찮은 사람이었다. 그는 그녀를 때리지 않았고 그녀를 웃음거리로 만들지도 않았으며 그녀가 묻는 말에는 꼬박꼬박 대답했다. 그녀에게 말을 너무 많이 하는 건 좋지 않은 습관이라고 주의를 주긴 했지만, 어쨌든 그는 그녀에게 대답했다. 그런데 사실 그녀는 별로 말이 많은 편이 아니었다. 그녀는 오직 그에게만 많이 말하는 것이었다. 그녀가 잘 아는 사람은 오직 그뿐이었으니까. 그녀가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뿐이었으니까. 그가 그녀의 유일한 친구이고 유일한 연인이고 유일한 세계였으니까.

그는 그럭저럭 괜찮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그녀에게 먼저 전화번호를 묻지 않았다면 그녀는 그를 사랑하게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그를 사랑했다. 그녀는 그녀의 연인이고 친구인 그를 사랑했다. 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그는 그녀를 배신하지 않았고 그녀는 계속 그를 사랑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결혼했다. 결혼식은 상상처럼 낭만적이지는 않았다. 연회장에서는 어딘가 답답한 기름 냄새가 풍겼고 그녀는 울음을 터뜨리는 그녀의 엄마를 곤충을 관찰하듯 생경하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울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빨리 갑갑한 화장을 씻어내고 옷을 갈아입은 뒤 잠들고 싶을 뿐이었다.

나한텐 그 사람밖에 없어, 라고 말하면 누구든 웃음을 터뜨릴 것이라고 한민아는 생각했다. 실제로 그 말을 들을 만한 사람은 그녀 주위에 없었다. 나한텐 너밖에 없어, 하고 말하면 경민은 좋아했지만 자기도 그렇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에게는 더 많은 이름들과 더 많은 사물들과 더 많은 세계가 있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언젠가 그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게 될 것이고 그러면 그녀는 곧장 그를 사랑할 수 없게 되어버릴 것이다. 그녀는 그녀를 듣지 않고 그녀를 되비추지 않고 그녀를 끌어안지 않는 그에게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가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 그의 연애편력은 어떤지, 그가 어렸을 때 뭐가 되고 싶어했는지, 즐겨 듣는 음악은 뭔지, 영화와 연극 중 어떤 걸 더 좋아하는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알 수 있는 기회는 무수히 많았지만 결국, 그녀는 알지 못했다. 아마 그도 그녀를 잘 알지 못할 것이다. 그녀가 그에게 전하려고 헐떡이는 그 과도한 말들을 그는 그다지 듣지 않았으니까. 그녀는 간혹, 그가 결혼한 뒤 그녀에 대한 모든 것을 잊어버린 건 아닐까 의심스러울 때가 있었다. 그녀가 좋아하던 그의 사소한 배려들-좋아한다고 말했던 작가의 신작을 선물한다거나 공포영화에서 끔찍한 장면이 나오면 눈을 가려주는-은 결혼 뒤 자취를 감추었다. 그들은 함께 살았고 같은 자리에서 잠들었지만 같이 영화를 보거나 산책을 나가지는 않았다. 그에게는 그만의 삶이 있었다. 그가 출근하고 퇴근하기까지의 시간에 그녀는 애완동물처럼 얌전히 집에 있었다. 집 밖으로 혼자 나가는 일은 거의 없었다. 나가보았자 갈 곳은 없었으니까. 나가보았자 그녀를 기다리는 사람도 그녀를 환대하는 존재도 없었으니까. 사물들은 각자의 자리에 있었다. 그녀를 매혹하지도 그녀에게 매혹당하지도 않으면서.

그래도 그녀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적어도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에게는 경민이 있으니까. 그는 매일 집에 들어오니까. 유일하게 확고한 것, 변하지 않는 것은 그의 존재였다. 그는 언제 어디서나 자기 자리에 존재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있는 곳이 그의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어디에도 없었다. 집에 있을 때, 침대 위에 누워 있을 때만 존재한다고 생각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집에 있을 때도, 밖에 나가 유령 혹은 신기루처럼 거리를 떠돌 때도 그녀는 없었다.

그들은 전혀 다른 유형의 현실에 속해 있었다.

그는 언제나 존재하므로, 존재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는 결코 그의 인사를 무시하는 사람들 때문에 울지 않는다. 그녀가 간혹 그를 듣지 못할 때도 그는 울부짖거나 절망하지 않는다. 그는 그녀가 그를 알아볼 때까지, 그녀가 해야만 하는 반응을 할 때까지 차분하게 기다릴만한 여력이 있다. 그는 그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할 필요가 없다.

그녀는 어땠지? 그가 그녀를 알아듣지 못할 때, 그가 그녀를 짜증스러운, 경멸하는 눈으로 바라볼 때 그녀는 어땠지? 그녀는 관대하게 웃어넘길 수 없었다. 그녀는 그의 어깨를 붙잡고 비명을 질러야 했다. 내가 말하고 있다고, 왜 나를 무시하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야만 했다. 그녀는 절망해서 울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절망해서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럴수록 그가 그녀를 질려하게 될 것임을 알면서도. 제발 진정해. 진정하라고. 미친 여자처럼 굴어봐야 돌아오는 건 없어. 잠시 참았다가 그가 나가고 나면 그때 우는 거야. 오래 기다릴 필요도 없잖아.

그렇지만 그녀는 도저히 참아 넘길 수 없었다. 그녀는 그를 귀찮게 했고 그를 고통스럽게 했다. 그는 피곤하다고 말했다. 그는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히스테리를 감당할 수 없었다. 그는 그녀가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고 했다. 당연하지, 나도 나를 못 알아듣겠거든,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는 그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할 필요가 없다. 그녀가 그를 귀찮게 하면, 그녀가 그를 아프게 하면 그는 그녀를 사랑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녀는 그를 사랑해야만 한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만이 그녀에게 유일했으니까. 그를 포기하는 것은 삶을 포기하는 것과 같았으니까. 자살하지 않으려면 그를 사랑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게 되면? 그녀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그녀는 안다. 그럴 수 없다. 그러니까 그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게 되면 그녀는 그녀를 죽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녀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사랑을 사랑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으므로, 그녀는 그녀를 죽여야 할 것이다.

Act. 17.

초등학교의 바둑 동아리에 처음 들어가던 날, 선생님은 앨리스에게 돌들을 포위하고 집어삼키는 법을 알려 주었다. 이렇게 해서 돌들을 잡아먹고 죽이는 거야.

앨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바둑부의 어느 남자아이와 짝을 지어 바둑을 두게 되었다.(바둑부에는 남자아이들밖에 없었다. 오직 그녀만이 여자아이였다) 그녀의 돌은 흰색이었다. 그녀는 하얀 돌을 격자판 위에 올렸고 그가 검은 돌을 올렸다. 바둑판에 돌이 떨어질 때 나는 명랑한 소리가 좋았다. 그녀의 돌이 떨어지고 그의 돌이 떨어지는 리듬이 좋았다. 검고 흰 돌들은 그녀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퍼져나갔다. 그녀는 멍하게 그것들이 늘어나고 꺼져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가 그녀의 돌을 한 움큼 집어 가져갔다. 그녀는 위태롭게 한 개 한 개의 돌을 놓았다. 그는 그녀를 비웃고 있었다. 너 바둑 정말 못 두는구나. 그녀는 경멸당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느 위치에 돌을 놓아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그녀는 간신히 하나의 돌을 하나의 위치에 놓았다. 그는 그녀의 돌들을 움켜쥐고 빼앗아갔다. 그녀가 잘못 놓은 하얀 돌들은 이제 그의 것이었다. 그녀는 하얗고 검은 돌들이 격자판 위에서 퍼져나가는 형이상학적인 모양을 추상화를 감상하듯 들여다보았다. 그는 웃다가 곧 완전히 질려버린 얼굴로 선생님에게 말했다. 선생님 얘 너무 못해요. 재미없어요. 짝 바꿔주세요.

시간이 지난 뒤, 바둑부에서 그녀와 함께 바둑을 두고 싶어 하는 아이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그녀를 비웃기 위해 그녀를 거쳐간 모든 남자아이들은 그녀를 원하지 않았다. 그녀는 직관에 따라 빠르게 바둑돌을 내려놓는 방법을 익혔으나 그녀의 감각은 그녀에게 승리를 가져다주지 않았다. 그녀는 도저히 이길 수 없었다. 그녀는 교묘한 책략과 계획으로 미래를 예측할 수 없었다. 그녀는 죽기 위해 몸을 던졌고 기꺼이 빼앗겼다. 그녀는 왜 이겨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승리가 아니라 바둑판 위에 펼쳐지는 불가해한 모양이었다. 그것을 이해할 수 없는 만큼 그것은 매혹적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바둑을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그녀와 함께 바둑을 두고 싶어하는 아이가 한 명도 남지 않게 되자, 그녀와의 바둑은 일종의 벌칙게임이 되었다. 가위바위보나 바둑 게임에서 패배한 남자아이가 그녀와 바둑을 두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녀를 경멸하였다. 넌 생각도 안 하고 두는구나.

그녀의 앞에서 굴욕적으로 그녀의 무능함을 견디던 남자아이가 신경질을 내며 일어나 다른 아이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갔다. 그들이 그녀를 힐금거리며 수군거렸다. 남자아이들의 키득거리는 소리.

그녀는 모든 것을 감내해야 했다. 그녀는 이길 수 없었으니까. 그녀에게는 이길 생각이 없으니까. 그녀는 이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그녀는 바둑이 좋았으나 도저히 이길 수가 없었다. 그녀는 바로 그 순간에 그녀가 어디에 돌을 놓아야 할지, 어느 공간이 더 돌에게 어울릴지 생각하는 것만으로 벅찼다.

그녀는 끔찍한 무력감을 느낀다. 혹은, 하얗고 검은 무력감이 그녀를 느낀다. 그것은 그녀의 피를 느리게 도는 링거액처럼 그녀의 혈관 속에서 속삭인다. 그들은 너를 원하지 않아.

그들은 너를 원하지 않아. 그들은 너를 미워하지도 않아. 너는 그저 웃기고 하찮은 여자아이에 불과해. 멍청하고 무력한 여자아이. 너는 돌들을 이해할 수 없을 거야. 돌들은 네 말을 듣지 않을 거야. 너는 쟤들이 네 돌들을, 네 자리를 뺏어가는 걸 막을 수 없을 거야. 바둑판 어디에도 네 자리는 없을 거야. 아무도 너를 들어주지 않을 거야. 쟤들은 네게 관심이 없으니까.

Act. 30.

신은 그의 생일잔치에 그녀를 초대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은 어땠어?

뭐?

많이 힘들었어?

그냥 그랬어.

나는 힘들었어. 나는 정말 힘들었어.

뭐라고?

죽고 싶을 만큼 행복했어. 오늘도. 오늘도 말이야. 어제도 그랬던 것처럼 오늘도. 그런데 여보, 어제라는 게 있을까? 어제나 내일이 아니라 오늘들만 있는 게 아닐까?

그건 너무 진부한 이야기야.

남편이 외투를 벗으면서 말한다. 그건 진부한 이야기라고. 그녀는 수치심으로 달아오른 채 금붕어처럼 뻐끔거린다.

어쨌든 오늘이 있어. 여보. 오늘이 있다고. 오늘들이 있어. 내가 여기에 있는 동안에도 오늘들이 있었어. 오늘들이 왔고 나는 그들을 들이지 않을 수 없었어. 당신한테 말하지 않았는데 그래도 괜찮지?

뭐가?

그들을 초대했다고. 그들이 왔다고. 그들을 집에 들였다고.

뭘?

오늘 말이야. 여보. 오늘.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제발 이따 얘기해.

남편은 안방 문을 닫고 거실로 나간다. 그녀는 마치 그곳에 문이 없는 것처럼, 그곳에 있는 문을 그녀는 열 수 없는 것처럼 가만히 선 채 침대를 보며 말한다.

나도 집에 있는 동안 뭘 해야 할 것 같아. 그렇지? 오늘과 오늘 사이의 간격을 벌려놓는 거야. 오늘에 타투를 하는 거야. 그러면 오늘들이 아니라 어떤 날과 다른 날이 되겠지. 오늘들이 매일 찾아오는 게 지겨워. 그들을 내쫓을 수도 없잖아. 그들이 오면 나는 문을 열어야 해. 그런데 나는 그들이 싫어. 끔찍하게 싫어. 그들이 집에서 떠다니면 머리가 아파서 죽을 것 같아. 메스꺼워서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어. 그런데 내일도 그들이 오면 어떡하지 그러면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텐데. 그러면 오늘도 또 오늘들이 올 텐데. 오늘도 오늘도 오늘도 오늘이 오고 오늘이 오고 오늘이 올 텐데.

변기물 내려가는 소리. 열린 창문 밖에서 오토바이가 지나가는 소리.

그가 안방 문을 열고 들어온다. 그는 민아를 내려다보며 무슨 일이 있냐고 묻는다. 민아는 고개를 젓는다. 그의 호의 때문에 그녀는 죽을 것 같다. 그녀는 울음을 참으며 속삭인다. 고마워. 자기는 너무 다정해. (네 다정함 때문에 네 가르침과 네 보호와 네 관대함 때문에 네 연민 때문에 죽고 싶어 언젠가 난 그것들 때문에 죽어버리고 말 거야)

그녀는 그를 끌어안는다. 그도 그녀를 끌어안는다. 아, 그가 없다면 그녀는 어떻게 살 수 있겠는가. 그녀는 그를 사랑한다. 그녀를 마주 끌어안아주는 그를 사랑한다. 그녀는 창문을 열었음에도 매캐한 실내의 공기를 온몸으로 들이마신다. 그녀가 공기를 악착같이 빨아들이는 동안 그는 서류철들을 정리한다. 그녀는 날카로운 종이 날에 눈동자를 가져다대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뭐라고?

아니야. 혼잣말이야.

제발 혼잣말 좀 그만해. 널 위해서 하는 말이야. 그럴 때마다 미친 여자 같다고.

다정하기도 하지. 그는 그녀를 위해서 그녀에게 충고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충고를 이해하지 못한다. 네가 뭘 알아? 그녀가 혼잣말한다. 그는 듣지 못한다. 듣더라도 그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그녀가 알지 못하는 모든 것을 알고 있으니까. 그녀는 그의 영원한 학생이다. 결혼과 함께 그는 그녀를 가르칠 수 있는 무한한 권리를 그녀의 부모로부터 합법적으로 인도받았다.

그가 없으면 그녀는 아무것도 아니게 될 것이다. 그녀는 그 끔찍한 자유를 원하지 않았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아무것도 아니기를 바란 적이 없었다. 어렴풋하게라도, 희미하게라도 그녀는 무엇을 닮기를 원했다. 절망을, 남자를, 슬픔을, 죽음을, 꽃을, 과거를 닮기를. 그것들을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그랬다. 왜냐하면 그녀는 너무 오랫동안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 어쩌면 지금도, 그녀는 사실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녀는 결코 그녀 자신의 진실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진실을 원하지 않았다. 누군가 그녀에게 진실을 들려주려 하면 그녀는 차라리 송곳으로 귀를 후벼팠을 것이다. 고막이 찢기고 피와 고름이 흘러나오면 그들은 그녀에게 진실을 들려줄 수 없겠지. 그들이 그녀에게 진실을 보여주려 하면 그녀는 남편의 서류 종이 모서리로 눈을 베어버릴 것이다. 안구 깊이 파고드는 모서리의 섬약하고 냉정한 선. 그 선이 그녀의 마지막 추억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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