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에 해답은 없을 것이다. 이건 정답이 없는 수수께끼이다. 중요한 것은 신호가 도착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너는 메일을 구태여 읽어 보며 그 속에 담긴 상징들을 유추해내려 애썼다. 오래전에 죽어버린 별이 쏘아보냈던 빛을 읽어내듯 너는 자의적으로 메일의 내용을 해석했다. 눈맞춤에 이어지는 성좌구조에는 별과 눈과 시선이 모두 담겨 있을까, 별의 마음과 눈의 마음이 제대로 연결되어 있는 것일까, 그런 걱정을 하며. 왕비와 공주, 왕자는 누구일까. 죽은 줄 알았던 공주가 살아났고 그리하여 모두가 같은 생을 견뎌내고 있다면 그녀의 푸르고 아름다운 시신은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일까. 너는 견딜 수 없는, 그럼에도 견뎌야만 하는 불안감을 달래기 위해 현의 집으로 달려갔다. 떨리는 손으로 누른 초인종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면 어떠한 부조리라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네가 바깥으로 나가는 것을 확인하고 그녀는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를 반기는 사람은 없었다. 화장실의 문은 반쯤 열린 채였다. 그녀는 기어가듯 발을 끌며 욕실로 향했다. 욕조 위 습한 천장 타일에 무언가를 매달기는 어려워 보였다. 미지근한 목욕물에 몸을 담그고 한 철을 마치는 눈사람처럼 쉽고 아늑한 최후를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 그녀는 서럽지도 아프지도 않았다. 각자의 심연에 팔다리를 담가보며 깊이를 가늠해보는 사람들, 심연의 깊이를 경쟁하는 이들은 짐작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녀는 물도 없이 비어 있는 욕조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푸르스름하게 젖은 얼룩이 아른거렸다. 초인종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현관문은 열려 있었지만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는 아홉 번의 초인종 멜로디를 견뎌내었다. 나가 보아도 소용없을 것이다. 그녀는 온통 습한 이 집의 주인도 객도 아니었으므로. 여자는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작가가 잊어버린 소설이었다. 주인이 잊어버린 기억이었고, 조각가로부터 버려진 조각이었다. 그녀는 주체로부터 소외된, 의미를 잊어버린 암호, 사라진 채 사라질 수 없는 꿈이었다.
천장에 매달려 춤을 추던 여자의 발은 피에 불어 검고 큼직했다. 흉측하고 아름다운 신발처럼. 과거가 미래를 바꿀 수 있는 만큼 미래도 과거를 바꿀 수 있다고 믿었던 여자는 빨간 구두의 저주에 걸린 소녀처럼 긴 시간동안 발만으로 춤을 추었다.
여자는 자살을 한 것일까?
아니,
자살? 죽을 수 있는 건 산 사람뿐이야. 이미 죽어 있는 사람이 어떻게 자살을 해?
하루를 더 사는 것이 벌이 아닌 선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결코 그녀의 춤을 보지 못할 것이다. 죽음의 아름답고 아늑한 침묵 속에서 갑작스레 바깥으로, 생으로 내동댕이쳐진 아이는 언제쯤 돌아갈 수 있을까.
일을 마친 후 그녀는 벽장 속으로 들어갔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네가 돌아온 것이다. 그녀는 벽장의 문도 닫지 않고 옷가지 사이에 쪼그리고 앉아 바깥을 바라보았다. 너는 그녀를 바라보지 않았다.
현은 무엇에도 닿지 않고 다쳤다. 맹수도 굶주림도 없는 온실에서 저 홀로 쓰러지는 화초들처럼, 삶만큼이나 죽음에 강한 애착을 가지고 있는 낙엽들처럼. 교실에서 빈자리를 우두커니 지켜보고만 있어도 현은 도착하지 않았다.
오늘도 병결이래?
그애의 빈자리에서 들려오는 물음에 너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몇 차례 전화를 걸어도 그의 목소리 대신 연결음 소리만 반복적으로 울렸다. 초조하지는 않았다. 매번 마음을 졸이기에 그는 너무 자주 다쳤고 언젠가부터는 학교보다도 병원에 더 오래 머무는 것이 일상이 되어 있었다. 암이었는지 폐병이었는지 이름조차 모르는 어느 희귀하고 유독한 병이었는지는 잘 몰랐다. 궁금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그에게 병명을 물어볼 엄두는 나지 않았다. 그애가 너의 병명을 묻지 않았으니까. 어쩌면 현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게 아닐까. 그애의 자리는 처음부터 비어 있었고 너는 의미없는 혼잣말만 중얼거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담임 교사는 현의 이름조차 부르지 않았다. 별다른 수런거림도 없었다. 그의 존재보다 부재를 절감하고 있는 이는 너뿐인 듯 했다.
초조하지 않다고 하지 않았어?
현의 목소리가 그의 몸도 흔적도 없는 빈자리에서 흘러들어왔다.
응. 그냥 무서울 뿐이야.
알고 있으니까?
그래. 아무리 불안해하고 싶어도 알고 있으니까, 불안하진 않아. 그냥 무서울 뿐이야.
입을 꾹 다문 아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너를 바라보았다. 그애들에게는 목소리가 없었다. 수십 개의 머리가 물거품처럼 터지며 뻥 뚫려 있는 교실 천장 위 검고 아득한 하늘로 올라갔다. 너는 모두가 높은 곳으로 사라질 때까지 현의 빈자리와 함께 일상 위에 남아 있었다. 현은 더 이상 대답해 주지 않았다.
뉴스에서 나오는 소식에 불안보다는 질투를 느꼈던 것이 사실이었다. 끝없이 가라앉다 보면 언젠가 다른 세상으로 갈 수 있을까. 물 속에 재를 털어넣고 그 속으로 빠지지 않을 수도 있을까. 지상에는 다른 방향이 없다. 너희는 가라앉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멈출 수 없는 곳까지 빠져도 좋을 것이다. 은밀하고 비참하게. 아무도 상상해 보지 못한 방식으로. 도착적인 상상은 어느새 공공연한 비극이 되었고 이후로 너는 한 번도 중력을 만끽하며 물 속 가장 깊은 곳으로 침잠하는 상상을 하지 않았다. 왜 웃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너는 아픔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을텐데. 너는 다른 곳 어디도 아닌 여기가 어울리던 사람이었는데. 눈을 감고 살짝 벌린 손가락을 귓바퀴에 붙이면 바닷바람 소리가 들린다. 누구도 해치지 않고 누구도 어루만지지 않는 소리가.
그의 집 초인종을 눌렀을 때 불안한 예감을 느꼈다. 너는 그 자리에서 도망쳐 나왔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네가 망설이다가 누른 초인종소리는 너조차도 듣지 못하는 곳으로, 개념과 기억의 어렴풋한 베일 너머로 사라져버렸을지도 모른다. 현이 입원했다는 소식을 어디에서 들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기뻐할 필요도 이유도 없는 예언에 그럴듯한 어휘를 입혀주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시를 쓰기에 걸맞는 리듬도 고통도 네게 부족했을 뿐이었다. 비는 그치지 않았다. 하늘은 우중충한 녹빛이었다. 천장은 하얗고 깨끗했다.
녹색으로 번져가는 비의 종기 아래에서 너희는 옹송그린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행여 입 안에 지저분한 빗물이 떨어질까봐 입을 꾹 다문 채로 바닥을 향해 고개를 숙인 채로. 현이 네게 무언가를 건넸을 때에도 너희는 입술을 떼어내지 않았다. 문구점에서 사온 싸구려 플라스틱 구슬이었다. 한 면이 움푹 들어가 더 이상 온전한 구의 형태가 아닌, 함몰된 피부에 이지러진 무지개가 반들거리는 구슬. 너는 움푹 파인 귀퉁이를 만지작거렸다. 구슬의 망가진 살 속은 투명하게 들여다보였음에도 그 너머에는 어떤 신비도 비추어지지 않았음에도 너는 일상적이지 않은 색상의 상처 속에 다른 세상으로 연결되는 장치가 있다고 믿었다. 믿고 싶었다. 손등에 더러운 녹물이 떨어졌을 때는 구슬을 깨뜨리고 그 속으로 뛰어들어가고 싶었다. 현은 여전히 아무말도 없었다. 잠이든 듯 머리를 팔 아래 괴이고 있었지만 불규칙한 숨소리는 너희가 꿈꾸는 잠보다 훨씬 일상적인 소리였다.
매일 이러는 건 아니야.
응.
내일도 올 거야?
응.
부드러운 모래를 귓속에 흘려넣는 손길처럼 다정한 목소리.
봐. 보여?
현은 네 오른쪽 눈에 플라스틱 구슬을 붙이며 물었다. 자그마한 구슬의 반대편에서 그애의 왼쪽 눈이 마주쳐왔다. 너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그애의 눈동자도. 구슬의 속살도. 비어 있는 일상도.
난쟁이가 기어나오고 있어. 비를 피해서 여기 숨어든 모양이야. 어, 뭐라고 하는 것 같은데.
들려?
아니.
너는 필사적으로 구슬 속을 들여다보려 애썼다. 왼쪽 눈을 감고 오른쪽의 시꺼먼 암흑만을, 이지러진 눈빛만을 이해하려 안간힘을 썼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현의 눈빛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넌 눈꺼풀 아래에서 뒷통수를 향해 뒤집어진 왼쪽 눈의 어둠 속으로 돌아갔다. 아늑한 어둠 속에서 너는 현의 목소리를 그려냈다. 시꺼먼 개미가 아흔 아홉 개의 다리를 버둥거리면서 구슬의 다친 속살을 파먹고 네 오른쪽 눈으로 빨려들어가는 모습을 간신히 그려낼 수 있었다. 개미는 뾰족하고 강인한 턱을 움찔거리면서 길을 만들고 있었다.
말하고 있는 게 맞아? 뭘 먹고 있는 것 같은데.
서글픈 목소리가 퍼렇게 번져나갔다.
뭐, 어느 쪽이든 마찬가지지. 우리가 그걸 알아들을 순 없을 테니까.
정말? 들리지 않는 언어는 영영 배울 수 없는 걸까? 하고 물었을 때 현이 그렇다고 대답했으면 너도 매듭을 지을 수 있었을까. 너는 또 초인종 앞에 서 있었다. 현관문의 눈구멍에 오른쪽 눈을 들이밀어도 볼록한 왜상엔 어떤 유령의 그림자도 비추어지지 않았다. 정말 빈 집인걸까. 빗물이 새는 천장에서 네 오른손등으로 떨어진 물방울이 아직도 축축한 것 같은데. 아직도 비릿한 비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 초인종 앞을 서성이는 너를 이상스레 쳐다보며 지나가는 행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역겹고 달큰한 비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노란색 유치원 가방을 맨 아이가 네게 다가왔다. 추위에 퍼렇게 질린 입술이 네게 물었다.
누나는 유령이에요?
아니.
너는 당황하여 되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해?
여긴 귀신들만 사는 집이에요. 여기 살던 사람들 다 죽었다고 엄마가 그러던데. 누나도 죽었어요?
너는 고개를 저었지만 네 대답에 확신을 가질 수는 없었다. 오래전부터 생각해오지 않았던가. 너는 죽은 적 없이 죽어 사는 유령이라고.
누나는 유령 안무서워요?
죽음이 두렵기보단 간절한 사람, 가엾기보단 부러운 사람은 어디에나 있을 것이다. 너는 미지와 미련이 무섭다고 느끼는 아이가 어딘지 가증스럽게 느껴졌다. 누군가의 배와 머리를 걷어차면 당신도 네 얼굴과 배를 힘껏 걷어차 줄까. 너는 아이를 망가뜨리는 대신 한 손을 조심스레 저어 보였다.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 집 다오. 새 집 줄게 헌 집 다오.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들렸다. 철이 지난 돌림노래라는 것을 알면서도 위화감을 느끼지 못한 것은 네 잘못이었다. 잘못. 잘못을 방치하고 있는 아이들은 그림자도 남기지 않고 돌연 사라졌다. 석양도 없이 날이 저물고 있었다.
어딘지 낯선 대문이었다. 군데군데 녹이 슬었지만 오래된 것 특유의 친숙함은 느껴지지 않는, 오히려 너와는 무관한 세월을 과시하는 듯 어색한 흔적들.
초인종을 누르고 나서야 너는 그곳이 그의 집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모든 일들이 혼란스러웠다. 분명 문 안에서 걸어나온 아이와 대화를 나누었던 것 같은데.
누나, 또 왔네요.
응.
근데 잘못 온 것 같아요. 여긴 우리 집인데요.
그래. 너 혹시,
혹시, 이 아이가 유령이라면 현을 알고 있을까. 상식과 물리의 저변에 있는 신비는 모두 가늘고 촘촘한 모세혈관으로 연결되어 서로를 느낄 수 있을 것이라는 통념에 못이겨 너는 상식 바깥의 질문을 던졌다.
너, 알고 있니?
아이는 고개를 의아한 어투로 물었다.
뭐를요?
초록 혹성이 떨어지던 날이 꿈이었는지 꿈이 아니었는지, 그날 가라앉았던 게 이곳에 하나뿐인 별이었는지, 너무 빨리 떨어져서 별보다 더 밝게 빛나던 유성이었는지. 현은 그곳에 있었는지. 현이 여기에 있었는지.
현을 알고 있어?
아니요. 그게 누군데요?
저기, 너랑 처음 만났던 집에 살았던 앤데.
아, 귀신 나오는 집. 그럼 그 사람도 귀신이에요?
아마도.
누나 귀신이랑 알고 지내요? 귀신 말도 할 수 있어요?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넌?
나요? 그럴리가요. 나는 귀신이 아닌걸. 누나도 귀신말 못한다면서요.
그래. 그럼 뻔한 일이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너와 나는 누구도 유령이 아니고, 발 밑에서 혹은 머리 위에서 네가 느낄 수 없는 신경으로 길게 이어져 너를 배제하고 서로의 비밀을 앓는 감각으로 너와 눈을 마주치는 미지에게 이름을 붙여 줄 재간은 누구에게도 없을 것이다.
현이 사라지기 전에는 너도 겁이 많았다. 감은 눈 속으로 스며드는 현의 목소리가 너를 돌이킬 수 없는 곳으로 데려갈까 두려움에 떨기도 했다. 현은 오히려 미지를 즐겼다. 너는 그저 눈을 감고 그애의 목소리에서 번져나오는 얼룩들을, 그애가 설명하는 얼룩의 의미와 좌표를 성실하게 따라갈 뿐이었다. 우주선에서 떨어져도 별과 맨몸으로 부딪혀도 혹등고래의 뱃속에 들어가도 다리가 잘려도 없던 팔이 돋아나도 너희는 끝까지 살아남았다. 너는 겁이 많았지만 돌이켜보면 우스울 정도로 많은 위기들을 겁내했지만 현, 네 옆에서 한 번도 삶을 두려워해 본 적은 없었다.
땀 냄새. 여름 창으로 반사되어 들어온 투명한 녹색 이파리들의 그림자. 서정적인 풍경은 깨어 꾸는 꿈처럼 아른거렸다. 소년은 고개를 돌리고 하얀 벽 너머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소년에게서 새어나오는 시큼한 땀 냄새가 어딘지 서러워서 현은 일부러 소년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럼에도 너는 보이지 않는 사각으로 그애의 그림자에 더욱 몰두하여 녹빛 나뭇잎들의 환영과 섞여든 그애의 검푸른 그늘을 관찰하고 있었다. 소독약의 섬세하고 우악스러운 냄새에 익숙해진 다음부터 현은 곳곳의 침대에서, 창문 앞에서, 엘리베이터 속에서 여과되지 못한 햇빛을 받고 관능적으로 피어오르는 살의 냄새를 발견하였다. 말간 빛에 하얗게 빛나며 동시에 검은 빛으로 그을러가는 살결에서는 현을 볕 밖으로 밀어내는 환한 음지의 냄새가 진동했다. 그애를 가 닿을 수 없는 먼 섬으로 쫓아내는, 실로 물질적인 무언가, 무엇보다도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무언가, 그 환한 햇빛과 하얀 살들의 냄새는 영원히 끌어안지 못할 볕 아래의 삶이었고 그늘에서 자라난 그의 푸르스름한 낯빛과는 상이한 종류의 밝음이었다. 현은 그 따사로운 살 냄새로부터 내몰렸다. 빛에 속하지 못한 사람들만이 감지할 수 있는 비애한 양지의 냄새. 무심히도 자주 스쳐지나가는 살들에는 현만이 기억할 수 있는 냄새의 얼룩들이 배어 있었다. 간혹 애틋한 살의 감각에 살 속에서 치밀어오를 때 그에 대응하는 인상을 살 밖에서 발견하지 못할 때 현은 어떤 악몽을 꿈꾸며 잠들었을까.
옆 침상의 소년은 노트북을 보며 자판을 두드리는 현의 손가락이 누군가의 급소를 움켜쥐고 있다고 생각했다. 급류에서 헤엄치듯 불규칙적으로 움직이는 손가락의 모양이 오해를 불러왔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아니라면 노트북 화면에 비추어지는 숱한 죽음들에 대한 소년 특유의 편견이었을지도 모른다. 소년은 현에게 다가갔다. 좁은 공간 안에 가두어져 증폭된 어린 생명의 비린내가 훅 스며들었다. 무슨 게임을 하냐고 묻던 그는 흰 화면에 빼곡이 적힌 작은 잎사귀와도 같은 글자들을 보고 질린 듯한 눈빛으로 현을 쳐다보았다. 그애는 더 이상 말을 붙이지 않고 제 침대로 돌아갔다. 거뭇한 이파리들처럼 돋아있던 글자들의 군집이 위아래로 울렁거렸다. 흔들리는 글자들은 단어와 단어 사이의 여백을 가르고 아래로 아래로 미끄러져내려갔다. 아무것도 아니야. 현은 작은 소리로, 누구에게도 닿지 못할 음성으로 웅얼거렸다. 거뭇한 이파리들의 음습하고 절망적인 냄새, 환하고 비참한 얼굴들. 병원에는 거울 한 개도 없었다. 타인의 얼굴은 현의 얼굴, 양지에 들기 전에 땅 속에서 지레 다 타버린 이파리의 얼굴과는 달리 환한 바깥에서 희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병원의 실내 역시 일종의 바깥이었다. 해가 들고 생명이 파릇하게 피어나는, 삶의 비린내가 충만한 양지. 그림자를 내부에 간직한 광원은 야릇하고 서글프게 제 속을 비추어내고 있었다. 그 안쪽에서 현은 가질 수 없는 삶들의 살을 보았다.
장마였다. 우중충한 초록 하늘 아래로 비린 비가 내리고 있었다. 너희는 우산을 접은 채로 나란히 걸어갔다. 네 우산은 망가져 있었다. 끝단을 고정시키는 잠금고리가 망가져서 아무리 밀어내 보아도 헐겁고 초라하게 접혀지기만 했다. 현이 우산을 펼치지 않는 까닭은 알 수 없었다. 그애의 우산도 네 것처럼 망가졌기 때문인지도 몰랐고, 네가 우산을 펼쳐 그에게 씌워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더러운 물방울이 내려앉는 얼굴이 간지러웠지만 너는 손을 올리지 않았다. 집까지 걸어가는 길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춥고 서글픈 기분이 언제까지나 계속되었으면. 온몸이 비에 젖어 초라하고 비참한 이 순간을 그리워할 날이 끝내 도래하지 않았으면. 그렇지만 너는 초인종을 누르기도 전에 이미 그리워하고 있었다. 날개가 젖은 비둘기가 지붕에서 떨어져내렸다. 골목에 주차된 자동차 아래에 숨어 있던 고양이가 달겨들어 더러운 날개를 물어뜯었다.
집에 들어가서도 너희는 천장에서 떨어져내리는 비만을 바라보았다. 저건 내가 아는 여자의 피야, 하고 현이 불쑥 말했다. 너희의 이야기는 이렇듯 갑작스럽게 시작되곤 했다.
피?
응. 저기에,
하고 현이 곰팡이로 얼룩진 천장을 가리켰다.
나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공간이 있거든. 우리가 집을 비운 사이에 누가 너희 집 대문 앞에서 너를 기다리던 여자를 죽여서 저기에 숨겨 놓았어.
아무도 모른다고? 너는? 여자는? 범인은?
아무도 몰라. 연아. 모두 잊어버리고 말았어. 우리도 곧 잊어버릴 거야.
현이 말했다. 어조도 표정도 없이. 목소리도 얼굴도 없이. 현은 네 오른손을 맞잡고 있었다. 손은 땀으로 젖어 있었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물기는 너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너는 마른 왼손을 얼룩을 향해 들어보였다. 아무것도 닿지 않았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며칠째 메일이 오지 않았다. 너는 휴지통에 넣어 놓은 메일들을 괜스레 열어 보았다. 어휘들의 배열은 낯선만큼 익숙했고 익숙한 만큼 지루했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은 한 마디도 없었다. 그녀가 사용하는 모든 어휘를 문맥을 언어를 이해할 수 있었다. 범인은 어렵지 않게 잡히고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