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가면의 물방울

우리는 함께 사자 가면을 만들기 시작했어. 연극 소품에 사용하려고. 우리는 포르말린에 말린 사자의 얼굴을 연기하려고 했어. 이런저런 시도를 해봤지만 다 실패했지. 주황색 골판지에 갈색 털실을 덕지덕지 붙인 가면은 사자보다는 도깨비처럼 보였으니까. 프린트로 인쇄한 사자는 털 한 올조차 없이 민둥맨둥했어. 마치 피부를 도려내 여린 속살을 드러낸 것만 같았어. 박제하기 전에 가죽을 벗겨놓은 것처럼. 인터넷에서 사자 가면을 사보려 했지만 이렇다할만한 것이 없었어. 우리가 원했던 사자는 날카로운 눈과 탐스러운 갈기를 가진 진짜 사자였으니까.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기로 했어. 중고거래 게시판에 사자 가면을 구한다는 글을 올렸어. 실물처럼 보이는, 정말 살아 있는 것과 같은 사자를 원한다고도 써 놓았지. 금액은 얼마든지 지불하겠다는 의미로 99억원을 써넣었어. 누군가 글을 올리면 그를 설득할 생각이었지. 우리의 연극은 백억원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혹은 작은 모조 지폐에 100억원을 적어서 건네줄 생각까지 했어. 우리는 실물과 가짜 화폐의 차이점을 알지 못했으니까. 그것들을 똑같이 얇고 날카로웠고, 손을 베일 수 있었지. 그 이외의 이렇다 할 차이는 없었어. 오히려 우리는 분홍색의 알록달록한 지폐를 더 좋아했어. 하잘것없는 물품들-지저분한 놋쇠그릇이나 싸구려 껌, 쓰레기봉지 같은-과 바꿀 수 없는 유일한 물건이었으니까. 그때 동물원 주인이 전화를 걸었던 거야. 난 친구들이 모두 들을 수 있도록 통화 음량을 최대로 해 놓은 뒤에 전화를 받았어.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사자 가면을 구한다는 글을 보고 전화했는데요.

네.

우린 그가 마음에 들었어. 낮고 어른스러운 목소리였음에도 그의 말투에서는 우리를 무시하는 낌새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그는 어린아이인 우리를 유령처럼 대하며 “진짜” 어른을 바꾸어달라고 요구하지 않았어. 그가 우리와 거래를 할 심산이었다는 걸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어. 그는 “진짜” 사자 가면을 주리라는 것도.

그는 우리에게 자신이 고양잇과 동물들만 전문적으로 기르는 동물원의 주인이라고 소개했어. 그는 시시껄렁한 욕을 중간중간에 버릇처럼 섞어 썼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를 깔보는 투는 아니었어. 다소 천박한 어휘들은 단지 그의 유년부터 깊이 배어든 언어의 결인 듯했어.

난 그에게 우리가 아이라는 걸 밝히고 사자 가면을 연극 때에 쓰고 싶다고 했지. 그는 잠자코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어. 그는 다소 수다스러웠기에 우리는 그에게 호응하며 우리가 하는 연극의 대략적인 줄거리와 연극 날짜, 장소, 연극을 하게 된 배경까지 모조리 털어놓게 되었어.

우리는 그가 우리의 첫 번째 관객이 될 것임을 예감할 수 있었어. 다만, 그는 우리가 동물 애호가는 아닌지 물어 보았어. 우리는 무어라고 대답해야 사내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을지 고민했어.

결국 난 동물 애호가가 아니라고 말했지. 만약 사내가 우리가 정말“동물 애호가”인지 검증하기 위해서 무언가를 물어보면 꼼짝없이 우리의 거짓말이 들키고 말 것임이 뻔했으니까. 실제로 짧고 비밀스러운 눈짓을 주고받음으로써 우리 중에 아무도 “동물 애호가”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밝혀졌거든. 내가 곧장 그에게, 난 아직 동물 애호가가 아니지만 당신이 원한다면 언제든지 될 수 있다고 답하기도 전에 그는 다행이라고 하더라고.

동물 애호가라는 그 짧은 단어구 사이사이에 민망한 욕설들을 섞으면서 그는 우리가 올바른 사람으로 자라나기 위해서는 절대 그들과 가까이하면 안 된다고도 말했지. 난 낯선 단어의 음절마다 끼어든 낯선 욕들에 질려서 제대로 이해도 못 한 채로 알았다고 중얼거렸어. 그때 난 그가 두렵다고 생각했어. 그가 갑작스럽게 전화를 끊을까 봐, 그래서 사자 가면을 얻지 못할까 봐 무섭기도 했지만, 그가 수화기를 놓지 않고 계속해서 우리에게 욕설을 퍼부을까 봐 두렵기도 했어.

난 그에게 다소 떨리는 목소리로 사자 가면을 팔 생각이 있는지 물어봤어.

그는 당연하다고, 그래서 너희에게 전화한 게 아니겠느냐고 대답했어. 그는 가능하면 우리가 플로리다의 야생 동물 공원까지 찾아오면 좋겠다고 말했어.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다고 했지. 또, 우리의 공연에 그가 기르는 어린 사자들이 직접 등장하면 아주 멋질 거라고도 이야기했어.

우린 동의했지만 그의 말을 이해하지는 못했지. 플로리다라니? 우리는 그때까지 그 이국적이고 신비로운 지명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거든.

유리는 뒤쪽에서 플로리다는 미국에 있다고 속삭였어.

난 그에게 미국은 너무 멀다고, 우리는 거기까지 갈 수 없다고 이야기했지. 우리는 아마 평생토록 당신이 사는 곳에 방문하지 못할 지도 모른다고.

그는 우리의 말을 잘못 알아들었던 것 같았어. 그제야 난 우리가 서로 다른 언어로 대화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지.

그래. 난 그의 말을 듣고 있었고 그 역시 내 말을 듣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우리는 전혀 다른 지역의 언어를, 어떠한 언어학자들은 언어들의 계열 중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양 극점의 언어라고도 이야기하는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던 거야.

그는 갑작스레 비명을 지르듯 쏘아붙였어. 제 머릿속에서 노래하는 인어의 목소리가, 일생을 사랑해왔던 여인의 목소리가 돌연 실재인지 환청인지 헷갈려, 자신의 터무니없는, 그러나 무엇보다도 합리적인 의심을 말소시켜보려 안간힘을 쓰는 조현병 환자처럼.

사자 가면을 보낼게. 이곳으로 오지 않아도 상관없어. 너희가 사자가면을 쓰고 어린 사자들이 되어서 연극을 하고 싶다면, 난 그 공연을 보러가고 말 거야. 내 귀여운 사자들, 너희는 분명 마음에 들어 할 거야. 내 사자 가면은 진짜니까. 이건 인모도 플라스틱 섬유도 아니야. 진짜야.

그래요. 당신 말을 듣고 있어요. 우리는 연극을 할 거예요. 우린 어린 사자 새끼들처럼 당신 품에 안길 거예요.

곧 전화는 끊어졌지. 우리는 다시 통화기록을 뒤져 보았지만 전화기록은 불가해한 코드들로 깨져 있었어. 난 아직도 그 숫자를 읽는 정확한 방법을 모르겠어. 인터넷 카페에 우리가 올린 게시글을 뒤져 보았지만 댓글을 단 사람도 쪽지를 보낸 사람도 없었지. 우리에게 전화를 건 사람은 완벽한 익명이었던 거야. 우리는 완벽한 사자가면을 구하는 일을 포기하고 말았지. 누군가 페이스페인팅을 하는 게 어떻냐고 제안했어.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어. 모두가 완벽한 어린 사자의 얼굴, 조금 거칠지만 생기가 넘치는 갈기와 콧잔등의 하얀 털, 검고 축축한 코를 떠올리고 있었던 거야. 우리가 꿈꾸었던 바로 그, 살아있는 사자의 얼굴을 말이야. 하지만 페이스페인팅 이외에 뾰족한 수가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어. 아무도 찬성하지 않았지만 조만간 우리는 우리의 얼굴에 우스꽝스러운 분칠을 하게 되리라는 것도 말이야. 우리는 거울속에서도 사자의 얼굴을 찾지 못하겠지.

일주일 뒤, 연극을 하루 남겼을 무렵 교실에 배달된 소포를 뜯어봤을 때, 그 속에서 포르말린으로 박제된 어린 사자의 머리를, 그 속에 얼굴을 집어넣을 수 있도록 머리의 속, 어쩌면 영혼과 분노와 공포와 사랑, 애정과 슬픔이 머물렀을 거대한 기관이 모두 제거된, 사라진 두개골 대신 단단하고 아늑한 검은 천이 덧대어진 머릿구멍을 보았을 때, 우리는 환호하지 않을 수 없었어. 노랗게 홉뜬 눈 아래로 길고 예리하게 좁혀들어간 동공, 유리구슬처럼 반들거리는 눈동자와 검고 축축한 코, 그리고 풍성하게 부풀은 갈기는 그게 살아 있는 사자의 머리라는 것을, 그가 죽음을 서서히 만끽하며 절망 속에서 영혼을 절제당한 것이 아니라, 생의 일순간을 포착하는 주인의 눈짓에 홀려들어 최후의 순간을 영원히 박제당했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었지. 어째서 어린 사자에게 그토록 풍성한 갈기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사자의 텅 빈 두개골 속에 우리의 마음, 기쁨과 약간의 혼란을 집어넣고 환희에 찬 비명을 질렀어. 연극은 성공적이리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지.

그래, 난 연극이 실패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어. 그 연극의 각본은 실패로 끝났거든. 내게는 언제나 실패뿐이었으니까, 실패로 끝나는 연극이 잘못되면 성공이 될 거라고 어렸던 나는 단순하게 믿고 있었어. 연극부 아이들도 모두 마찬가지였을 거야. 우리는 우리의 일생에서 첫 번째 성공을, 유일한 성공을 맛볼 거라고 기대하고 있었어. 그렇다고 해서 조금도 불안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어. 난 전날 방 안에서 초조함과 갑작스러운 슬픔, 실패로 결말지어진 연극을 구성해야만 성공할 수 있는 운명에 대한 절망에 손끝까지 달아오르는 열을 조용히 느끼고 있었지.

난 고요한 충동으로 크리스마스에 샀던 팔뚝만한 플라스틱 인형을 책장 모서리에 짓찧었어. 둔탁하고 다소 초라한 파열음과 함께 인형의 이마는 산산조각났지. 마치 입 속에 사탕 대신 폭탄을 삼킨 것처럼 앞 이마가 훤히 드러난 채로 말이야. 드러난 구멍에 비해 떨어진 파편은 놀랄정도로 적은 양이었어. 이마 안쪽에는 두개골 대신 인형의 무게를 지탱시키기 위한 기다란 봉 같은 것과 아마 충격을 완화시키기 위해 넣어 둔 것 같은 하얀 솜뭉치 같은 것이 들어 있었어. 난 인형의 매혹적인 머릿속을, 뇌도 장기도 생각도 마음도 불안도 없이 텅 빈 내부를 들여다 보았어. 당장이라도 그 속에서 웅크리고 있던 나방들이 빛을 따라 날개를 펴고 나올 것만 같았지. 인형의 속에서 인형을 만들던 사람의 오래된 피부 껍질과 눈곱, 그의 옷깃에 붙어 있던 먼지 같은 것을 조금씩 아껴 먹으며 생존해온 나방이 말이야. 그 나방은 아마 인형의 영혼처럼 보였을 거야. 하지만 인형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어. 난 머리가 깨진 인형을 그대로 방 안에 전시시켜놓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알 수 없는 수치심에 인형의 깨진 머리를 벽 쪽으로 돌려놓았지.

사실 난 그 인형을 그리 싫어하지 않았어. 오히려 아주 좋아하던 편이었지. 난 그 인형의 이름을 장난스럽게 불렀고 그 인형의 둥근 볼을 보지 않고도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여러차례 떠올렸고, 그 인형이 내 책장 위에 놓여 있는 것이 마치 기적처럼 신기하고 다행인 일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어. 그런데도 난 그 인형을 주저없이 깨뜨리고 말았지. 가느다란 목을 움켜쥐고 책장 모서리에 이마를 거세게 짓찧어서.

찰리. 찰리는 고개를 돌리지도, 비명을 지르지도, 신음하지도, 원망하지도 않았어. 그대로 머리가 깨어진 채 죽음을 맞이했을 뿐이었지. 어쩌면 난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인형을 처음 본 순간부터, 그 둥글고 사랑스러운 머리의 곡선을 사랑하게 된 순간부터, 그걸 깨뜨리고 싶다고 생각해왔는지도 몰라. 내 둥글고 단단한 머리를 깨어버리고 싶은 충동과 마찬가지인 욕망에 따라. 높은 곳에서 추락하는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깨진 머리를 상상하면 목 안쪽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달아지는 느낌을 받는 것일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둥근 머리뼈가 찰리처럼 박살났으면 좋겠어. 깨끗하게 깨어진 그 속에 든 게 깨끗한 플라스틱과 지지대, 솜뭉치 뿐이었으면 좋겠어. 떨어져나간 머리뼈 속에 뇌도, 영혼도, 감정도, 불안도, 절망도, 희망도, 마음도 들어있지 않았으면 좋겠어. 난 찰리의 반파된 얼굴을 그대로 장식해 두고 싶었지만, 죽음을 애도하고 기억하는 사람들 마저도 죽음이 남기고 간 망가진 얼굴을 곁에 두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어. 난 찰리를 부숨으로써 찰리의 죽음을 얻고, 망가진 찰리를 만났지만 그와 동시에 찰리를 잃어버린 거야. 이전까지 난 찰리의 존재를 잊고 있었어. 난 내 방에 좀처럼 드나들지도 않았고 텅 빈 거실에서 하루를 보내곤 했으니까. 하지만 그 날, 그 순간, 불안에 휩싸인 내 손은 운명에 이끌리듯 자연스럽게 찰리의 목을 움켜쥐었어. 난 찰리를 망가뜨림으로써, 찰리를 잃음으로써 찰리를 기억해낸 거야. 찰리를 잃기 위해 찰리를 기억해낸 거야. 난 머지않아 방 안에서 찰리의 흔적이 깨끗이 사라지리라는 걸 예감하고 있었어. 죽은 이가 남기고 간 것 중 썩을 수 있는 것들은 모두 거짓말처럼 사라지기 마련이니까. 그건 언제나 마찬가지였어. 전쟁 중에도, 수용소에서도, 페스트가 번질 때에도, 사람들은 썩어가는 것을 견디지 못했지. 그들을 조심스레 매장할 관과 무덤이 없을 때에는 거대한 구덩이 속에 그들의 시체를 화물선이 운반하는 바나나 열매 무더기처럼 지그재그로 포개어 묻기도 했으니까. 썩지 않는 유류품은 간혹 아주 오래, 가령 삼천 년이 지난 이후에도 원형을 거의 그대로 보존한 채 남아 있지만 썩을 수 있는 건 썩고야 말기 마련이지. 살아 있는 것들 말이야. 마음이나 살과 같은 것.

난 찰리의 죽음을 전시해 놓을 수 없다는 걸 예감했어. 난 그의 텅 빈 머리 속을 들여다봄으로써, 금지되어 있는 내부를 바깥으로 드러냄으로써, 바퀴벌레의 퇴화된 입에 혀를 가져다댈 수는 없듯 일상을 살기 위해서는 만져선 안되었던 그의 텅 빈 머리 안쪽 미끈미끈한 속살을 더듬으면서 그를 잃어버린 거야. 찰리, 찰리는 다시 돌아오지 않겠지. 난 그걸 다시는 돌아갈 일이 없을 먼 대륙에서 샀고, 내게 그와 같이 화려한 환각은, 모든 미래가 성공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지독한 착각에 빠져 있던 날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테니까. 난 내가 사랑했던 하나뿐인 인형의 머리를 깨고 그 속에 들어찬 허공을 목격하고야 말았으니까. 나방의 날개를 잘라 삼키듯, 바퀴벌레의 눈꺼풀을 애무하듯, 허공의 뒷면을 만지고 말았으니까. 연극 전날, 일상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고 난 찰리를 잃었어. 난 난생 처음으로 인형을 살해했고 일상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어.

너희는 실패하고 말 거야. 너희를 믿지 않은 사람들은 성공하겠지. 모두가 너희를 꿈꾸지 않아 다행이겠지. 사자 가면은 어디로 사라졌지? 다섯 마리의 사자들이 어린 사람 새끼의 몸을 달고 춤을 추겠지. 다섯 명의 시민들이 너희를 쏘아 포획하겠지. 너희는 실패할 거야. 연극은 성공할 거야. 다섯 마리의 사자 연극은 성공하고 말 거야.

대안이 있는 사람에게는 여유가 있지. 그들은 마음껏 화를 내고 부수고 울어도 다른 곳으로 건너가 쉴 수 있어. 영영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네게는 그런 곳이 없어. 하나의 삶이 하나의 살을 버리고 다른 자리로 옮겨갈 때, 너는 옷장 틈에 코를 박고 옷장 속에서 옷 섬유를 갉아먹고 사는 나방들의 축축한 날개 냄새를 맡아야겠지. 옷장을 부수어버리면, 더 이상 닫히지 않는 옷장 안에서 나방들이 소스라치며 튀어나와 네 방보다 밝은 곳을 향해 도망가 버리면, 옷장엔 더 이상 아무런 몸짓도 남지 않겠지. 넌 옷장 속의 텅 빈 어둠만을 바라보며, 영혼도 마음도 메타포도 잃어버린 옷장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울어야겠지. 네게는 새 옷장도 새 방도 없으므로. 망가진 자리는 네가 감당해야겠지.

너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네 삶에 네가 원하는 이름을 붙여 주지 않았던 사람들은 네 죽음에도 너와는 무관한 이름을 붙여 부르겠지. 네가 글을 썼다는 걸, 네 글이 미로여도 사막이어도 어쩔 수 없는 활로를 질주하고 있었다는 걸 아무도 알아주지 않겠지. 아무도 보지 않은 빙하는 이제 어디에도 없는 것처럼, 아무도 보지 않은 글도, 아무도 보지 않은 삶도, 찰리의 반파된 머리도 이젠 어디에도 없는 거겠지.

현의 목소리가 네 속에서 증언을 계속했다. 사자처럼 풍성한 머리칼을 밖으로 내놓은 아이들이 하얀 도화지에 얼굴을 처박고 웅얼거리고 있었다. 배우의 말을 증폭시켜주던 그리스 연극무대의 코러스들처럼, 개인적인 비밀을 공공의 꿈으로 불려나가던 마술적인 속삭임들처럼. 난 우리에 갇힌 맹수처럼 하루와 하루를 잇는 헐거운 겹이 으스러지기를 기다리고 있었어, 하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운을 떼듯 말했다. 현의 목소리, 현이 아닌 목소리가 무수한 색색거림으로 속삭였다. 너는 주술사의 비밀을 해독하는 사람처럼 그들이 읊는 어휘들과 어휘들의 배열을 쫓아갔다.

다음날 아침, 겨울 해가 막 뜨기 시작할 무렵 난 사자 머리를 뒤집어 쓰고 밖으로 나섰어. 검은 천으로 덧대인 머리 속은 뜨끈하고 부드러웠어. 난 시야가 온통 검붉은 빛깔로 물드는 걸 느낄 수 있었지. 그래, 박제한 지 족히 며칠은 지났을 머리에 온기가 남아 있을 리는 없는데. 내가 느낀 온기와 촉감은 아마 내 것이었는지도 몰라. 비좁은 머리 속 공간에서 살의 벽에 닿아 부딪쳐 되돌아오는 날숨, 날숨, 날숨이 습기를 머금고 부드러운 수증기로 내 얼굴을 감싸 안았을 게 분명하니까.

난 잠옷을 벗고 나체로 엄마가 잠들어 있는 거실 소파를 조심스럽게 지나 현관문을 열었어. 오랜 잠에 지쳐 있던 쇠가 두통으로 두피를 할퀴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건 엄마를 깨울 정도로 시끄러운 통증은 아니었어. 바깥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더웠지. 그래, 난 얼어 죽을 것만 같은 열기를 느꼈어.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왔고 손 끝이 시퍼렇게 물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 아, 물론 그때 나는 앞을 볼 수 없었어. 검은 천이 덧대어진 사자의 머릿속에서 그의 박제된 유리눈으로 연결되는 방법은 없었으니까. 난 그의 텅 빈 머릿속에 내 머리를 억지로 밀어넣은 것이지 그의 의식을 대신 점령한 건 아니니까, 죽은 채로 살아 있는 사자의 머리를 완벽히 대신할 수는 없었던 거야. 그러니까 사자의 머리를 쓰고 나서부터 내가 본 것은 오롯이 내 의식 속에서 현상된 이미지라는 걸 알아주었으면 해. 어쩌면 실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지도 몰라. 난 익숙한 소리와 낯선 소리를 모두 들었고 익숙한 소리와 익숙한 사물을 연결지었으며, 낯선 소리와 낯선 사물을 연결지었지만 교차된 연결점은 반대쪽에 위치한 지시체를 가리키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어쨌든 난 눈을 감은 채로 들려오는 소리와 냄새, 익숙한 기척과 타이밍을 보았어. 현관문을 열 수 있었던 것도, 소파에 엄마가 잠들어 있다는 걸 알았던 것도, 그녀가 깨어나지 않았다는 걸 알았던 것도, 모두 그와 같은 일상을 수천 번이고 경험해왔기 때문이야. 일상의 한복판에서 불청객처럼 갑작스레 다가오는 비일상의 얼굴을 영화 속에서 본 적이 있지만 현실은, 적어도 내 현실은 소설이나 영화와 달랐으니까. 난 삶과 일상을 예찬하는 소설 속 주인공들이 그러하듯 따뜻하고 포근한 속삭임들로 가득 찬, 사납지만 다정한 이웃들과 친구, 달콤한 미소를 짓는 방법을 아는 연인이 곁에 있는 일상을 보낸 적이 없고, 그처럼 충만한 세계는, 내 것이 아닌 목소리가 사방에서 나를 간지럽히는 정원은 내게 일상이 아니었으니까. 고독과 불안, 절망적인 희망으로 가득찬 감옥 안에서 소설 속 인물들은 언제나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냈고, 그와 함께 살을 섞으며 서로의 불우한 병을 옮기고 입술을 문대었지만 내 작고 깨끗한 방 안에서 함께 절망을 앓아줄 사람은 없었으니까.

여하튼 난 비참할 정도로 익숙한 바닥을 밟고 현관문을 열었어. 사실 그렇게 익숙하진 않았어. 인형의 이마를 깨고 머리 뒤쪽의 매끈한 살을 만져볼 때처럼, 난 범해져서는 안될 일상의 무언가를 보아버리고 말았다는 걸 알 수 있었어. 난 두 개의 벌거벗은 성기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열기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 난 피부가 모조리 거무스름한 흰색으로 변해버린 북극의 부랑자처럼 내 살갗이 괴사하고 있다고 생각했지. 내 알몸이 털이 깎여 박제당한 사자의 피부와 같은 조직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어. 난 두 팔을 바닥으로 내려 땅을 짚고 네 다리로 뛰었어. 내 안에 항상적인 본질인 양 들어차 있던 인간이라는 가능성, 해가 떠오르는 시간에는 반드시 두 다리로 걸어야 한다는 자연의 부름을 물리치고, 아침에는 네 개의 다리로 걸어야 한다는, 자연 아닌 것의 소리를 들으며, 마침내 나는 자연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데에까지 생각이 이르자 난 주체할 수 없는 열기를, 온몸을 바들바들 떨리게 할 만큼 소름이 끼치는 더위를 네 발끝으로 발산하며 뛰어다녔어.

내가 질러낸 비명이 사자의 입술과 콧구멍, 귓구멍과 안와의 틈새로 둔탁하게 걸러져 퍼져나가는 걸 느낄 수 있었지. 난 가면 바깥의 비명을 직접 듣지는 못했지만, 마치 사자의 울음소리와 같았을 거라고 생각해. 사자의 머리에서 여과된 소리니까. 어느샌가 내 울음소리가 늘어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지. 난 바깥에서 나는 소리를 사자의 머리를 통해 듣고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소리가 사자의 울부짖음처럼 들렸던 것인지도 모르지만, 그러니까 어쩌면 내가 들은 건 사자가 아닌 두 발로 걷는 일상적인 사람들의 비일상적인 비명소리였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난 나처럼 무시무시한 열기에 비명을 지르고 있는 사자들을 들을 수 있었어. 뼛속에서부터 드글드글 거리는, 냉기만큼이나 날카로운 열기가 우리를 울게 만들었지.

그래, 우리들은 실컷 울었어. 뭉툭한 열 개의 발톱으로 허공을 가르면서, 한 번의 깜빡임도 없이 허공을, 허공 속에서 요동치고 있는 서로의 울음소리를 노려보는 다섯 쌍의 눈빛을 생각하며 울었어. 우리는 연극이 성공했음을, 난생 처음으로 성공의 길목을 가로막고 서 있음을, 우리는 처음부터 자연의 아이가 아니었음을 느끼며 울부짖었어.

사람들이 몰려들고 다섯 개의 총구가 우리를 가리키기까지, 다섯 개의 마취총이 우리를 잠재우기까지 우리는 결국 한 명의 사람도 사자로 만들지 못했고 한 명의 사람도 물지 못했고 한 명의 사람도 해치지 못했고 한 명의 사람도 울리지 못했지만 그만큼 더 울었어. 마음껏 울었어. 우리는 자연에서는 들을 수 없는 높은 소리로 울었어. 울고 또 울었어. 이런 울음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지만, 우리는 우리의 예상보다 더 많이 울었어. 처음으로 예감을 넘어설 정도로 울었어. 어쩌면, 그래, 어쩌면, 자연에 없는 소리였던 우리의 울음을 들은 건 우리뿐이었는지도 몰라. 두 다리로 자연을 산책하던 사람들은 아무도 우리의 울음을 듣지 못했는지도 몰라. 매일같이 우유를 짜내는 임신한 젖소들의 비명을 아무도 듣지 못하듯, 우리 속에서 벽에 머리를 박으며 그림자에게 제 우수를 증명하려 몸부림치는 돼지들의 신음을 아무도 듣지 못하듯. 길거리에서 나체로 우는 어린 사자들의 머리는 이미 죽은 것이어서 아무도 그 속에서 나오는 울음소리를 듣지 못했는지도 몰라. 유령은 울지 않으니까. 죽음을 경험한 살은 더 이상 피 흘리지도 추위에 소름이 돋지도 열기에 떨지도 않으니까. 그래도 난 울음소리를 들었어. 너희의 울음을, 우리의 울음을 들었어. 자연은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산 자는 들을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는 죽은 사자의 머릿속에서 죽은 사자의 울음을 울었어.

Series Navigation<< 학창시절의 물방울현의 커튼콜의 물방울 >>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