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내의 물방울

흉측하게 비어 있는 사내의 일상에 분주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침마다 사랑을 나누기 위하여 연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을 일도, 여린 속살을 간지럽히며 거리로 나가 병든 연인의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일상을 내다버리는 일도 그에게는 없었다. 사내의 얼굴을 자세히 지켜본 이는 없었지만 만약 그와 입을 맞추기 위해 그의 눈을 지긋이 응시한 이가 있었더라면 그는 끝이 뜯겨져나간 태엽장치처럼, 톱니와 톱니 사이의 간격이 지나치게 먼 미간이 기묘하게 삐걱거리는 소리를 들었을지도 모른다. 탯줄처럼 늘어진 네거티브 필름 속에서 울고 있는 사내의 얼굴이 웃는 듯 보이는 것처럼. 사내의 시계는 잔인하리만치 느리게 움직였다. 그러나 각자의 자연을 살아나가는 사람들은 사내의 시간이 기묘하게 비뚤어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펍으로 가는 길에도 그의 시간은 느긋한 걸음속도조차 따라가지 못한 채 그의 뒤쪽에서 헐겁게 새어나가고 있었다. 부드러운 볼을 한껏 올려붙인 채 웃으며 발치를 쏘다니는 어린아이들을 보며 탄성을 지르는 노인들이 보였다. 그들의 눈동자에는 호의만이 가득했다. 사내는 문득, 작은 머리에 캡모자를 눌러쓴 사내아이의 작고 여린 배를 걷어차고 싶다고 생각했다. 벤치에 앉아 하늘을,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넓게 벌어진 괴상한 구멍을, 금방이라도 헐거운 구멍 아래로 미끄덩하고 축축한 속살을 흘려버릴 것만 같은 불길한 세계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미소짓고 있는 여인의 부푼 배를 차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럼 그녀는 하혈을 하며 아픈 배를 잡고 문득 깨달을 것이다. 그녀의 아늑한 세상이 얼마나 소름끼치는 자연으로 변모했는지. 사내가 앓고 있는 하루가, 매 순간 턱과 입 안쪽을 톱날에 관통당한 채로 견디고 있는 생이 얼마나 절망스러운지. 그의 살과 속을 엉망진창으로 뭉개놓고 있는 날 하나 하나의 간격을 이제 그는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을 정도라고, 톱날에 묻어 있는 검은 핏자국과 싯누런 고름자국, 그 속에서 포옹하고 섹스하고 알을 낳고 부화하는 구더기들이 그의 상처 사이사이로 파고들어 톱날의 비명을 지르고 있다고, 그것들이 배운 톱날의 언어를 사내는 뜻도 모른 채 따라하고 있다고, 아마 그의 발음은 톱날의 모어를 사는 벌레들보다 정확할테지만 그럼에도 그는 그 뜻을 조금도 알아들을 수 없다고, 그래서인지 사내는 저를 아프게 하는 구더기들과 조금도 친해질 수 없었다고, 그에게 말을 붙이려고 하면 그것들은 언제 그의 속살에서 들끓었냐는 듯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만다고, 그러고 나면 기포가 사라지고 남은 용암의 땅처럼 비루하게 뚫린 구멍들이 시려서 견딜 수가 없다고, 그녀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그는 말할 것이다. 그는 그녀를 설득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할 것이다. 당신의 얼굴 위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새파란 하늘이 얼마나 더러운지. 당신이 방만하게 쐰 햇빛이 얼마나 흉측한 살인자인지.

그녀는 그의 설명을 이해할 것이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오줌과 피를 질질 흘리며 녹색 캡모자를 쓴 어린아이에게로 기어가 아이를 꾸짖을 것이다. 개미의 하반신을 뭉개고 상반신만으로 살아남은 불구의 생을 비웃은 죄에 대해, 잠자리의 두 날개를 찢어내고 습관에 따라 날아오르는 비참한 몸짓을, 여름 낙엽처럼 어수룩하게 빙글빙글 돌며 내려앉는 서글픈 추락을 방관한 죄에 대해, 비둘기의 내장을 먹는 고양이의 피묻은 얼굴이 사랑스럽다고 말한 죄에 대해, 원숭이의 목에 쇠로 만든 목줄을 달고 날붙이에 긁힌 그의 목이 짓물러가는 모양을 기뻐한 죄에 대해,

살아남은 죄에 대해.

여자는 아이의 사타구니를 물어뜯고 웃을 것이다. 아이도 웃을 것이다. 사내도 웃을 것이다. 유원지의 회전목마처럼 빙글빙글 돌아가는 세상에선 사내가 상상조차 하지 못한, 무참하고 다채로운 빛들이 사방을 적실 것이다. 모두 웃을 것이다. 이제는 아무도 죄를 짓지 않을 것이므로. 사내는 성공할 것이다. 그는 그 없이도 환하게 웃던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미소지으며 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내는 실패할 것이다. 그는 한 번도 타인을 설득하는 데에 성공해 본 적이 없다. 톱날의 언어는 그의 귀와 혀를 마비시켰다. 그는 세 살 무렵보다 더 어눌한 말투로 빈곤한 어휘만을 더듬더듬 내뱉을 정도로 전락하고 말았다. 임부의 앞까지 걸어가서, 저기, 저기요.

그리고 무얼 말하지?

그는 톱날의 비참한 언어를 묘사하는 데에 실패할 것이다. 구더기의 알처럼 득시글거리는 톱니들의 울음소리에 대해, 경계도 음절도 없는 기묘한 울음을 우는 사이 날은 저물고, 파란 하늘 아래에 가증스러운 흰 빛으로 쏟아지는 햇볕만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밤을 피해 돌아가고 말 것이다. 그들에게 투명한 빛은 더이상 빛이 아니기에. 그는 무언가를 죽이는 죄에 대해 설명하는 데에 실패할 것이다. 그는 무언가를 먹는 죄에 대해 설명하는 데에 실패할 것이다. 그는 살아가는 죄에 대해 설명하는 데에 실패할 것이다. 그가 살아가는 데에 실패하였듯. 그의 생은 언제나 실패로 정해져 있었다. 과정은 상관 없었다. 그가 하는 말의 내용조차 결과와는 무관했다. 그가 어떠한 글을 쓰든, 어떠한 울음을 울든, 어떠한 걸음을 걷든 그는 언제나 실패했다. 어쩌면 그의 운명, 실패뿐이라는 그의 미래는 그의 존재보다 과분한 신탁으로 내려진 것일지도 몰랐다. 그의 실패는 그의 삶, 그의 갈망, 그의 글, 그의 말, 그의 언어보다 중요한 것이었다. 실패는 부정하려 하면 할수록 가혹해졌다.

어렸을 적 그는 UFO의 꿈을 꾸었다. 저녁 뉴스가 끝난 후, 방에 들어가 잠을 자는 척 한 뒤 몰래 창문을 열고 화단으로 뛰어내린 뒤 주택 뒤쪽에 있던 공원의 쇠철봉 뒤쪽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해바라기 화원으로 가면 그보다 훨씬 키가 커서 얼굴조차 보이지 않는 어른이 있었다.

그는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잘 다녀오렴.

그러면 소년은 고개를 끄덕이고 눈을 감는 것이었다.

어른의 말이 신호였다. 곧 축축하고 어슴푸레한 광선이 그의 몸을 감싼 뒤 그의 작은 몸은 한없이 높은 곳으로, 이제는 어른의 얼굴이 너무도 낮은 곳에 있어 더는 보이지 않을 만큼 높은 곳으로 올라가곤 했다. 그건 소년의 자랑스러운 모험담이었기에, 어린아이가 흔히 그러하듯 그는 비밀을 오래 간직하지 못하고 기회가 될 때마다 어른들에게 은밀하게 털어놓곤 했다. 비밀의 정체를 암시하는 상징들은 사실 다시 생각해보면 놀라울정도로 적나라했다. 소년이 겪은 일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했다고 보아도 좋을 정도였다. 나, 매일 밤 외계로 올라가. UFO가 나를 끌어당기면 엄마도 아빠도 모르는 곳으로 올라가는 거야. 엄마 아빠는 그런 적 없지? 그렇지? 그의 부모는 소년의 말이 허풍이라고 생각했다. 부모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소년의 친구들 또한 소년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의례적인 감탄도 현실적인 비판도 하지 않았다.

결국, 소년은

나, 이젠 가지 않기로 했어. 우주인도 UFO도 다신 보지 않기로 했어,

하고 말했으나 아무도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는 조심스레 문을 닫고 불을 끈 뒤 창문으로 빠져나가는 노력도 하지 않고 한밤중 거실을 가로질러 현관문을 세게 여닫고 나갔다. 아무도 그를 붙잡지 않았다. 공원의 조화 해바라기 숲에서 소년은 얼굴이 보이지 않는 키다리 어른을 만났다.

날 기다렸어요?

하고 소년이 물었으나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평소와 같은 말을, 잘 다녀오렴, 자동인형처럼 내뱉었을 뿐이었다. 눅눅한 빛이 소년을 끌어당기고 소년은 눈부시게 조명된 어둠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사내도 UFO도 그를 다그치지 않았다. 그를 꾸짖지도 않았고, 그의 부재를 캐묻지도 않았다. 소년은 문득, 까마득한 아래에서 드글거리는 까만 머리통들을 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소년이 돌로 세심하게 찢어놓아 다리들이 모두 떨어져나간 채 검고 둥근 몸통만을 움찔거리며 엎드려 바닥만을 내려다보는 개미처럼. 개미와 개미, 다리 없이 서성이는 개미들. 까마득한 어둠 속을, 개미들처럼 시꺼먼 밤을, 밤의 밑바닥에 드글대는 개미같은 검은 머리통들을 굽어다보고 있는. 소년은 구역질을 했다. UFO에는 아홉 명의 심판관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역삼각형의 초록색 머리를 갖고 있었다. 사람과 비슷한 얼굴에는 네 개의 눈꺼풀이 달려 있었는데, 아래쪽에 수평으로 위치한 두 개의 눈꺼풀은 감은 채였고 위쪽 두 개의 눈꺼풀은 뜬 채였다. 그들은 눈 하나도 깜빡이지 않고 소년에게 선고했다. 너는 거짓말쟁이로구나. 사실 네게는 이런 법정도 과분하지만, 어쩔 수 없지. 네게 해 줄 말이 있단다.

초록색 머리통이 소년 쪽으로 기울며 속삭였다. 거짓말쟁이야. 아가야. 넌 실패할 거야.

소년은 네 개의 커다란 뜬 눈을 보았다. 네 개의 뜬 눈이 양옆으로, 뒤로, 앞으로, 위로, 아래로, 증폭되어가는 모양을 보였다. 서른 여섯 개의 뜬 눈과 두 개의 감은 눈. 소년이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뜨끈한 사타구니를 서럽게 오므리며 울었다. 침대 시트는 말갛고 더운 오줌으로 흥건했다. 그때는, 그런 비극이 그에게 과분한 일이 되리라는 것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나 타인을 유혹하는 데 실패하고 타인을 사랑하는 데 실패하고 타인을 미워하는 데 실패하고 타인을 듣는 데 실패하고 타인을 이해하는 데 실패하고 타인에게 이해받는 데 실패하고 타인에게 사랑받는 데 실패하고 타인에게 미움받는 데 실패하고 타인에게 들리는 데 실패하고 타인에게 읽히는 데 실패하고 타인에게 보이는 데 실패하고 나서,

타인을 설득하는 데 실패하고 나서, 그는 실패를 살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의 글과 소원, 불행과 갈망, 죽음과 삶보다도 우선하는 실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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