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들의 물방울

유리병에 간절한 이름들을 담아 망망대해에 띄워보내는 심정으로, 보야저 호에 인간의 육성과 믿음, 그들이 가장 아름다운 노래라고 믿던 음악을 함께 담아 우주 속으로 무책임하게 띄워보내던 이들의 심정으로, 새로운 세계를 구걸하는 심정으로, 설령 보야저호를 받아든 누군가가 있더라도 절대 그와 눈짓을 주고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설령 유리병에 모래와 함께 담긴 더러운 쪽지를 펼쳐보는 자가 있더라도 그가 자신을 구원해주지는 못하리라는 것을, 당신이 유폐되어 있는 비좁고 오염된 섬으로 헤엄쳐 달려올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우리의 문자를 훔쳐간 사람의 글을, 우리가 아닌 다른 이의 이름과 운명 속에서 성공적으로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비로소 존재하는 우리의 글을 우리는 환호와 그리움으로 바라보겠죠. 그리고 우리는 믿을 수 없게 되겠죠. 모두에게 사랑받는 글의 어미가 우리라는 것을. 우리의 비밀스러운 결속으로 태어난 글의 기원을 우리 자신도 믿을 수 없게 될거예요. 우리는 망상, 망상, 망상에 시달리겠죠. 타인의 시선을 받고 눈빛만큼이나 빛나는 우리의 어휘들이 우리만의 것이라는 망상,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망상. 우리는 모든 것을 가질 것이고 모든 것을 잃게 되겠죠. 한 번도 가진 적 없는 것들을 비로소 잃어버릴 수 있게 될 거예요. 한 번도 올라본 적 없는 높이에서 비로소 추락할 수 있을 거예요. 대기권 너머의 높이에서 우리는 작은 로켓 캡슐에 갇힌 실험용 원숭이처럼 환호하겠죠. 사람들은 망망대해에 떨어진 우리에게 붉고 탐스러운 사과를 건넬 것이고 우리는 부러진 치아로 하얀 속살을 헤집겠죠. 그리고 아무도, 아무도 우리의 언어를 알아들을 수 없을 거예요. 우리는 우리가 아는 이름들을 전부 우주 너머에 내버리고 돌아오는 거예요. 누구의 이름도 남아있지 않은 대지로.

미안해요. 당신의 말을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어요. 다시 당신의 어린시절에 대해 이야기 해줘요. 당신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일, 그것의 존재를 기원하는 일은 내게 맡기고.

난 아무것도 낳지 않을 거예요. 설령 당신이 뱃속에서 자라나고 있는 문장들을 오도된 그대로 찔러 죽인다고 해도. 난 더이상 무언가 태어나고 자라나며 어린시절을 찾아 헤매는 일을 바라지 않아요. 당신도 어린시절 없이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잘 알고 있잖아요. 자리 없이 떠도는 게, 존재하지 않은 채로 살아가는 게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우리에겐 일정한 음률도 어투도 말버릇조차도 주어지지 않았죠. 우리는 밤하늘의 성운처럼 흩어져 있는 단어의 파편들을 주워 먹으며 살아갈 뿐이에요. 그것이 우리의 유년이라고 상상하며.

우리가 파 놓은 굴에서는 아무도 태어나지 않을 거예요.

우리는 모든 깊이를 빼앗길 거예요. 뱃속에 파놓은 깊은 도랑에서는 이름 모를 벌레들이 태어나겠죠. 그들의 언어를 우리는 알아들을 수 없을 거예요. 새벽부터 밤까지 계속해서 땅을 파는 사람들, 그곳에 묻을 유골을 우리는 아직 갖고 있지 않으니.

그렇게 시시콜콜한 비밀까지 털어놓으면 당신에겐 뭐가 남는데요?

삶에서 의미를 찾지 못한 사람들이 돌아간 죽음에는 무엇이 있지?

공간. 아무도 찾지 못하고 좌표지을 수도 없는, 이름 없는 공간이 있겠죠. 시간조차 흐르지 않는 순수한 공간이. 아무것도 통과시키지 않는 밀도 높은 공간, 매질조차 흐르지 않는 공간이. 그곳에서는 누구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을 거예요. 누구의 울음소리도. 언제나 타인의 시선 속에서 살던 이들은 처음으로 깊은 심연을 맛보고 절망할 거예요. 그들의 울음소리에 화답해주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아, 난 당장이라도 귀머거리들의 마을로 가고 싶어요.

서로의 육성에 섞여드는 음절의 파편들, 너희는 더이상 너희의 목소리를 구분해낼 수 없었다. 너희가 함께 상상한 세계에서 수천 마리의 쥐들이 태어나고 죽어갔으면, 태어난지 두 달도 안되어 수백의 새끼를 낳는 쥐들이, 토끼만큼이나 커다랗고 살찐 쥐들이 너희의 꿈에서 함께 죽어갔으면. 레몬캔디는 발목을 잘라낸 여자가 휠체어를 타고 들어오던 날에 대해, 그녀의 마지막 방문일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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