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네킹의 물방울

초록 혹성이 불에 타 사라진 뒤 네 꿈은 정착할 곳을 잃었다. 산만한 이미지들이 고장난 만화경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며 너를 어지럽혔지만, 인격을 잃은 의식 너머언어의 파편들은 이미지들을 엮어 놓을 적합한 논리조차 갖추지 못한 채 잔상을 따라 흔들렸다. 여자는 마네킹이 늘어져 있던 진열대 안쪽에 짐승의 침처럼 미지근한 액체를 들이부었다.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지만 넌 그녀가 무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이제 그만 사라지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 곳으로.

넌 끝을 염원하고 있었잖아. 비극이 아닌 끝이라도.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끝이 오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어요. 당신도 알고 있잖아요.

죽음이 끝이 될 수 없듯 삶 역시 끝이 될 수 없다면, 너희는 끝을 속에 숨긴 채 헛구역질을 하며 우는 밤처럼 서로를 속일 수밖에 없는 것일까. 겨울 강 밑바닥에 숨겨진 작은 올가미를 갉아먹고 불어난 물고기들이, 독을 품고 자란 살들이 떠내려가는 곳, 그곳에도 죽음이 없다면. 죽음을 경험한 유령들이 입을 뻐끔거리면서 충고해주는 소리, 조상들의 모어는 더 이상 너희의 모어가 아니다. 그들의 입술은 더 이상 너희의 입술이 아니다. 그들이 열심히 뻐끔거리는 소리를 너희는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한다. 젊은이들의 건강한 귀에만 들리는 높은 주파의 소리처럼, 귀신이 우는 소리는 너무도 낮은 소리여서 너희의 귀에 닿지 못한다. 얕은 물성은 바스라지며 흐느낀다. 그들은 갑갑한 듯 너희의 둔한 감각을 욕한다. 육감 따위는 필요 없다고. 보고, 듣고, 느끼라고, 그들이 너희를 바라보듯 너희도 얼마든지 그들을 바라볼 수 있다고.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보지 않는 것뿐이라고, 듣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듣지 않는 것뿐이라고, 그들이 욕하는 소리를 너는 듣지 못한다. 그들의 일그러진 표정을 너는 보지 못한다. 타인에게 들리고 보이는 것이 당연하리라고 느끼는 사람들의 오만을 언젠가 경멸하는 날이 모두에게 찾아오리라는 예감에 조금 위로를 받을 뿐이다. 정확한 근거도 없이. 너를 불행하게 했던 예감이 때로는 타인 또한 불행하게 하리라는 사실에 기뻐하며. 언젠가는 모두가 E flat을 갈망하며 E flat만을 들으며 홀로 들리니, 들리니, 캐물으며 미쳐버렸던 사내의 메타포가 되리라는 사실에 설레하며.

그녀가 불을 붙이자 진열장 내부의 세계가 폭발하며 사라졌다. 폭발 이후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탄생 이후의 세계는 시작되어서는 안된다는 듯. 그녀는 오직 그녀 자신만을 위해서 그녀를 학대한다. 그녀는 그녀만을 위하여 희생한다. 마네킹들이 타들어가는 냄새, 달콤하지도 역겹지도 않은 냄새, 너는 아무런 냄새도 맡지 못하였고, 그녀는 네게 곧 꿈이 시작될 테니 어서 나가라고 고함을 지르고 있었고, 넌 그녀의 말을 믿을 수 없었기에, 아니, 그보다도 그녀의 존재를 믿을 수 없었기에,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기에, 너는 유령을 믿지 않는다고 그러니 유령의 예감도 유령의 지시도 너와는 무관한 거라고 스스로에게 속삭이며 뼛속으로 스며드는 예감을 부러 무시한 채 정승처럼 서 있었고, 그렇지만 너는 나가요, 어서, 나를 버리고, 나가요, 하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었고, 왜냐면 그건 오래전부터 네 속에서 들려오고 있던 소리였기 때문에,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네 목소리, 토성의 고리를 찾아 헤매며 몸에 힘을 빼고 눈을 감고 흐르는 눈물이 오물이라 믿고 애써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던 사내의 속에서 들려오던 목소리, 너는 토성의 고리가 될 수 없다는 목소리, 욕망을 담은 목소리, 모든 것이 타버리지 않을 거라는 목소리, 아무것도 폭발하지 않을 것이고,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을 것이라는 목소리, 네가 마주친 적 없는 목소리들이 서로를 엮고 이어나가며 너와는 무관한 세계를 짜내려가는 목소리, 너희를 반영하지 않는 아름다운 사막의 밤 속에 이물질처럼 끼어 있는 사내가 온전한 세계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비행기를 고치는 소리, 넌 그 모든 소리를 듣지 못하고, 아니, 들어도 어찌할 수 없이 흘려넘기며 잠을 잘 뿐, 꿈을 꿀 뿐이었다.

썩지 않았으므로, 마네킹은 죽은 것이 아닌가? 산 적이 없으므로, 마네킹은 죽은 것이 아닌가? 죽여도 법을 범하지 않는 살인이 있는가? 인적이 말소된 죄수들을 감금하는 감옥에서의 은밀한 사형처럼. 언젠가 사형대에서 단두대에 목이 잘리던 사형수를, 입장권을 사고 들어온 무수한 관객들 앞에서, 여왕과 정치인들, 재상과 왕자 앞에서 하얀 피를 터뜨리며 죽어가던 죄수를 떠올리며 그들을 질시하던 사형수의 죽음은 그다지 참혹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았다. 누군가의 손가락에 밀착한 버튼, 버튼에 연결된 선이 그를 지탱하고 있던 의자를 아래층으로 떨어뜨리면 그는 비상하지도 추락하지도 못한 채 애매한 허공에서 약 육 초 간 발을 허덕거리다가 죽어버릴텐데. 그의 죽음을 목격하는 사람은 그가 알지 못하는 극소수의 인물들 뿐일 것이라는 생각. 그들은 결코 사형수의 죽음을 기억하지도 기록하지도 그리지도 않을 것이라는 생각. 그의 죽음이라는 비밀은 영원히 지켜질 것이라는 생각. 그의 삶과 마찬가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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