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캔디의 물방울 – 여자의 다리수술

난 한 번도 내가 죄를 지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지금도, 마을사람들을 독살한 무시무시한 범죄를 저질렀다는 이야기를 들은 지금에도 그때의 내가 그리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설령 그들이 죽음을 원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우리는 타인을 해치면서 살아가잖아요. 헤집을 수 없는 속을 헤집고 상대에게 제 타액을 흘려넣어 감염시키는 일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부르지 않았던가요?

그게 아니야, 하고 레몬캔디의 극단적인 주장을 물리치며 그를 안쓰럽게 바라볼 눈빛은 이곳에 없었다. 사랑은 난장이 아니라 포옹이야, 하고 그를 꾸짖어줄 목소리는 이곳에 없었다. 너희는 한 번도 사랑을 해 본적이 없었으므로. 저기 봐, 그 애가 또 떨어지고 있어, 하고 중얼거리는 현의 목소리. 그 애들의 날갯깃을 자른 건 너야, 하고 대답해주고 싶었지만 현은 그 애들에게 닿을 수조차 없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넌 모르겠지만 유령들의 자리는 너무 부족해. 생명의 시작부터 이어져온 유구한 죽음의 역사에 비해 죽음이라는 개념 자체는 너무도 협소하니까. 사람들은 그다지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아. 그건 다른 동물들이나 식물들도 마찬가지야. 유령들이 생전의 악몽을 들이킬 때 몸이 조금 부푸는 것만으로도 주박과도 같은 경계가 얼마나 옥죄어오는지 넌 상상도 못할거야. 그래서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잊기로 했지만 잘 되지 않더군. 우리들은 경악스럽게도 가까이 있으니까.

너희가 앉아 있는 허공에도 귀신들이 앉아 있느냐고 묻자 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너와는 무관한 일이야. 그래. 나와는 무관한 일이지. 죽음의 세계로 자청하여 들어갈 만한 용기가 없는 사람들은 기차 위에 무력하게 실려 꼼짝도 하지 않고 수천킬로미터를 주행하는 승객들처럼 삶이 너희를 죽음의 방향으로 이끌어주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너희는 죽음을 애걸할 수도 죽음의 입구로 찾아들어갈 수도, 죽음의 내장에서 연인을 구해 나올 수도 없다. 그러한 비극은 죽음의 장막을 살아 있는 두 손으로 찢어낼 수 있는 사람만의 몫이므로. 벌써 다섯 번째 소년이 옥상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어찌된 일인지 너희는 옥상 위, 녹색 방수페인트가 칠해진 바닥에 걸터앉아서도 이카루스 소년처럼 머리부터 대양처럼 시꺼먼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소년들의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다. 하얗고 반들거리는 치아를 조금 드러내며 웃는 소년, 밀랍인형처럼 바닥만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소년, 검은 속눈썹의 그늘을 광대뼈까지 끌어내리며 눈을 감는 소년, 소년들은 모두 한쪽 날개가 부러지거나 뜯겨나간 상태였다. 그들은 헛된 날개짓조차도, 지극한 습관에 의한 몸부림조차도 하지 않았다. 순식간에 작은 모형처럼 줄어드는 그들의 몸은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도저한 심해로 추락하며, 물거품이 되며 웃었던 인어처럼 그들은 마침내 썩어가는 더러운 육신으로부터, 육신의 감옥으로부터 탈출해 눈송이처럼 부질없고 영원한 영혼을 얻게 되었는지도 몰라요. 영혼은 눈송이만큼이나 순식간에 녹아버리고 또 언제든지 다시 나타나는 법이니까요. 하고 레몬캔디의 목소리가 말했다.

미안, 하지만 난 너를 죽일 수 있을 만큼 사랑하지는 않는 것 같아.

그래도 죽게 내버려둘 수는 있죠.

현은 난간 쪽으로 다가갔다. 잔뜩 구부린 등에 날개는 달려있지 않았다. 너는 날개가 없는 그 애가 떨어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기이한 확신에 안심할 수 있었다. 하반신이 잘린 나비가 기어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듯.

난 너의 부재를 듣고 있어. 난 너를 듣고 있어.

비가 올 때에도 오지 않을 때에도 목소리는 침묵의 형태로 이곳에 있었다. 삶의 건너편으로 추락하는 소년들, n차원의 우주로 상승하는 영혼들을 배웅하는 유령들, 가까운 곳에서 빗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거울을 여러 겹 겹쳐 놓은 거울 미로에서는, 형상과 거울상을 한 번에 볼 수 있듯 여러 겹의 시간을 한 번에 확인할 수 있을까. 빛들이 서로를 닮아가는 거울의 세계에는 언제나 비가 내리고 있을까. 비가 내리지 않는 날은 비가 내리는 날을 닮아가고 당신이 부재하는 날은 당신이 현존하는 날을 닮아가게 될까. 하지만 네게는 한 줄기의 빗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날이 종종 있었다. 그런 날에는 지금처럼 불쾌하게 열린 틈새로 새어나오는 소리를 잠자코 듣고 있는 것이다. 귀신들이 푸른 입술로 흉내내는 빗소리를. 비처럼 하잘것없는, 그러나 비와는 달리 누구도 적시지 못하고 쏟아져내리는 빗소리를.

난 당신을 듣고 싶지 않아요.

응. 그래도 난 너를 듣고 있어.

당신이 떨어지는 걸 보고 싶어요. 날개가 없는 사람도 추락할 수 있다는 걸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그래도 당신은, 한 번 떨어져버린 당신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테니까 가지 말아요.

응.

이야기를 계속 할게요. 발목을 잘라낸 여자가 허벅지 안쪽까지 도려내는 수술을 받던 날이었어요. 여자는 홀가분한 표정으로, 오랜 수술 끝에 창백하게 질려버린 얼굴을 내게 맞추며 웃었어요. 그녀는 휠체어에 제대로 앉아 있지도 못하고 자꾸만 미끄러져내리며 입술을 세게 물고 있었어요. 핏줄이 불거져나온 하얀 턱에 침이 흘러내릴 정도로 그녀는 기진맥진해 있었어요.

난 더 이상 흉측하지 않아. 그렇지?

그녀의 얼굴이 당장이라도 졸도할 것처럼 보여서 난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채로 고개를 끄덕였어요. 그래요. 그래요.

다행이야. 어젯밤엔 지독한 악몽을 꿨거든. 글쎄, 분명히 잘라냈던 발이 뼈부터 다시 돋아나고 내 몸에 네 개의 발이 달려 있는 꿈. 난 다리가 많은 것들이 싫어. 징그러워서 생각만 해도 견딜 수가 없거든. 그런데 나한테 다리가 이렇게 많이 달려 있다니. 덥수룩한 수염에 뒤덮인 다리, 이미 죽어서 시꺼멓게 썩어가는 다리, 구더기들이 우글거리면서 파리들이 우글거리면서 제 다리를 맞비비는 다리, 더러운 다리, 썩어가는 다리, 그래, 난 이제 다리가 없어.

너는 다리뿐만이 아니라 광적인 말들을 주절거리고 있는 그녀의 혀와 입술, 부드러운 피부와 녹색 눈 모두 썩어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살아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썩어간다고 생각했지만 구태여 입밖에 내뱉지는 않았다. 다음 진료일에 여자가 눈을 도려내겠다고 찾아올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그보다 더 선뜩하게 느껴지는 일도 있었다. 대체 할아버지는 어디에서 수술을 했던 것일까? 당신에게도 말했지만 할아버지의 진료실은 내 기억과는 달리 훤하게 뚫려 있었어요, 하고 레몬캔디가 말했다.

섬모들이 돋아난 다리, 피부에 맞닿는 무엇이든 느낄 수 있는 다리, 발이 내디딘 더러운 바닥의 촉감을 기억하는 다리, 더 이상은 쓸모 없는 다리, 그녀를 어디에도 데려다주지 않았던 다리, 다리, 다리. 난 다리가 없어, 하고 수줍은 듯 속삭이던 소리.

그래요. 그녀는 수술을 한 적이 없어요. 그녀는 그저 그녀의 다리에 대해서 터놓고 이야기하면서, 그 징그러운 섬모 다발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그녀의 텅 빈 허공을 들여다보면서, 다리를 기억하면서 다리를 잊었던 것뿐이에요. 그녀는 처음부터 다리 없이 태어났어요. 말하자면 태아 때부터, 세상에 머리를 들이밀기 이전부터 그녀는 다리를 잘라냈던 거예요. 그런데도 그녀는 다리를 잊지 못했어요. 흉측한 다리, 혐오스러운 다리, 없어도 좋은 다리, 없어선 안될 다리, 다리, 다리들에 대해 그녀는 함부로 생각할 수조차 없었죠. 다리에 대해 생각하고 나면 다리를 원하게 되면 그녀는 더욱 절망스러워질 테니까. 그녀는 그녀에게 다리가 필요 없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그녀가 희고 곧은 두 개의 다리로 걸어들어오던 순간, 그녀의 잘려나간 발톱과 발에 대한 생각은 모두 기억이 행하는 숱한 왜곡에 의한 것일 뿐이라고 레몬캔디는 중얼거렸다.

다리를 잊고 나서 그녀는 정말 행복한 것처럼 보였어요. 모든 미련을 저버렸기 때문이겠죠. 삼촌도 목소리들을 잊어버렸다면 더 홀가분해질 수 있었을까요. 나도, 날개 없이는 추락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더라면, 망가진 날개조차 평생 매달 수 없으리라는 걸 깨달았더라면 좀 더 편안해질 수 있었을까요. 그래도요. 당신은 아마 내가 이기적이라고 할테지만 난 떨어져 보고 싶어요. 부러진 날개가 맞닿는 곳이 아늑하고 하얀 구름이 아니라 죽은 벌레들의 다리가 내동댕이쳐진 진창이라도 상관없어요. 하루만에 태어나 죽어갈 하루살이라도, 하잘것없는 날벌레라도 상관없어요. 입 없이 성기만을 가지고 태어나 죽어가는 하루살이라도, 누군가에게 약속을 전해줄 입맞춤조차 할 수 없어도. 날개를 가지고 떨어져보고 싶어요. 다리를 가지고 기어다니는 일은 언제라도 할 수 있으니까. 새끼 고양이의 발톱에 날개가 다 찢겨나가도 젖은 날개를 제대로 펴기도 전에 떨어져 죽어버린다고 해도. 난 오래전부터 날개에 대해 생각해 왔어요. 그래요. 여자가 다리에 대해 생각했듯. 그녀는 혼자서는 목을 매달 수도 없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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