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고 있었어요?
제목이 없는 메일이었다. 너는 미련없이 메일을 삭제하고는 생각했다. 이럴거면 처음부터 읽지 않고 버려도 상관없었을 텐데. 우스운 일이었다. 너는 매일 조금씩 늙어가는 사람들이, 너에게 닿지도 않는 궤도의 사람들이 어디에서 태어나 빛나고 사라지는지 조금도 관심이 없었으면서. 다만, 혹시 네게 도달하는 글자들이 네가 기다려온 미지에서 출발한 것일까 봐. 모든 불확실성 가운데서도 확실히 이루어질 수 없는 기적이, 이 기묘한 글자들과 연관되어 있을까 봐. 달리 거리낄 것은 없을 것이다. 현관문을 열고 나갔을 때, 발치에 길게 늘어뜨려진 사람의 목을 보았을 때에도 실핏줄이 터진 퍼런 눈꺼풀과 눈을 맞추었을 때에도 너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몰라.
파란과 불안, 죽음. 다만 공포가 없는. 더듬이처럼 길게 늘어뜨려진 목은 한때 사람의 것이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길었다. 지저분한 바닥 아래에서 네 발목을 휘감고도 남아돌 정도였다. 경동맥이 울퉁불퉁하게 부풀어올라 있었다. 검고 다리가 많은 지네들이 시체의 목을 따라 네 발목으로 기어올랐다. 다시 눈을 감았다 떴을 때에는 모든 것들이 사라져 있었다. 하얗고 깨끗한 천장과 적당히 눈부신 조명, 누군가를 더럽히지도 해치지도 않을 실내의 단정한 세계. 어딘가의 글자는 가라앉았고 어딘가의 글자는 떠오르고 있을텐데, 이곳은 한 점의 얼룩도 없이 깨끗하다.
거봐, 기다리고 있었잖아. 다녀와 봐요.
익숙한 말투였다. 범인이 누구인지는 너도 잘 알고 있을 것이었다. 구태여 확인하지 않은 것은 깨어나고 싶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고, 답을 알고 싶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다. 너희를 가두어 기묘한 농장을 꾸린 선생을 잡아낸다면 모든 비밀을 알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선생의 감실에서 무수한 음반들을 찾아낸 순간, 한결같이 둥글게 새겨진 궤도들을 발견한 순간, 그의 비밀은 너와 아무런 관련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너는 나날이 선생을 잊어갔다. 그의 버릇과 말투, 얼굴과 체격 모두. 초록 혹성에서 벌어졌던 일들은 오래전에 꾸었던 꿈처럼 나날이 휘발되어가고 있었다. 이제는 현의 얼굴마저 기억나지 않았다. 네게 남은 유일한 신비는 발신자의 이름이 없는 이상한 메일뿐이었다. 그마저 없이, 이야기가 무너진 세계에서 네가 버틸 수 있을까. 지극히 당연한 중력만이 아래로 쏟아져내리는 물리의 일상에서 너는 얼마나 오랫동안 똑바로 서 있을 수 있을까, 기지 않고 두 다리로 버틸 수 있을까. 당장이라도 깨끗한 바닥 아래 깊은 곳으로, 발목을 적시고 있는 더러운 눈보다도 검고 아득한 곳으로 추락하고 싶었다. 생을 구걸하듯 죽음을, 아니, 삶 이전의, 탄생 이전의 세계를 구걸하고 싶었다.
적당히 두툼한 외투를 걸치고 밖으로 나섰다. 검은 눈이 발목까지 차올랐다. 더러운 계단 너머 횡단보도에선 너를 제외한 사건들이 수직의 방향으로 교차되어 돌진하고 있었다. 너는 앙상하게 마른 여자가 불그스름한 허공을 뱃속으로 밀어넣고 방대편 인도로 달려가는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았다. 여자가 사라진 자리에는 현의 그림자가 있었다. 어느새 네 안에서 현은 모든 죽음이 되어 있었다. 얼굴도 마음도 없이 무엇도 썩지 않는 둥근 얼룩, 삶보다도 향기로운 찰나의 순간들.
기다리고 있었어.
너는 작게 떨리는 목소리로 그의 흉내를 내어 보았다. 그게 잘못이었다는 것은 말을 내뱉는 순간 깨닫고 말았다. 아, 이제는 현의 목소리마저 기억나지 않았다.
연아, 그거 알아? 귀신들은 얼굴을 아홉 개 가지고 있어. 한번 죽을 때마다 얼굴이 하나씩 사라지지.
그럼 아홉 번 죽고 나면 어떻게 되는데? 사라지는 거야?
글쎄. 그건 모르지. 아무도 아홉 번 죽고 난 귀신을 본 적이 없으니까.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사라져서 기억하지 못 하는게 아니고?
썩어버린 살은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귀신은 긴 목을 네 발목에 휘감고 너를 따라 기어오고 있었다. 어떤 특별한 원한도 없이, 사연도 없이 바깥으로 향하는 얼룩들.
메슥거리는 환상을 견디지 못하고 집으로 되돌아갔을 때, 너는 절전 상태에 있던 모니터가 홀로 깜빡이는 것을 보았다. 이건 어떤 종류의 기적일까. 발을, 뿌리를 찾지 못할 공포는 모두 빈곤하고 절망적인 부류의 신비인 것일까. 이런 기적이라도 차곡차곡 모아낸다면 현과 같은 미로를, 이야기를 써내려갈 수 있을까. 구불구불하고 다정한 문장들 속에서, 문장과 문장 사이의 기묘한 여백 속에서 그애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모니터에 비추어진 화면은 가장 마지막에 열어본 메일화면이었다. 또, 이름이 없는 네가 보낸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