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은 언젠가 그가 썼던 단편을 떠올렸다.
나치 부대가 생명정치로서의 우생학을 구현하기 위해 가련한 쥐들처럼 은밀한 구석자리에 숨어든 유대인들을 찾아 도시를 누비고 있을 때, 피아니스트는 청중의 부재를 의아해하고 있었다. 그가 어릴 적에는 이토록 주위가 한산하지 않았다. 그가 소나티네를, 쇼팽을, 베토벤을 매끄럽게 연주해내고 나면 누군가가 박수를 쳤고 박수 소리는 전염병처럼 순식간에 번져나갔다. 소년은 항상 열병과도 같은 연주와 박수의 불협 속에서 살았으며 그 불협을 끔찍이도 소중하게 여겼다. 언젠가부터 그는 같은 곡만, 같은 마디만, 같은 화음만, 같은 음만 연주하기 시작했지만 그를 비난하거나 책망하는 목소리는 없었다.
그는 일생을 피아노 앞에서 그 딱딱한 의자에 앉아 오로지 페달이라는 단단하고 차가운 지평만을 밟으며 살아왔다. 늘 같은 E flat, D도 A도 아닌 E flat. D #도 F bb도 아닌. 언젠가부터 박수소리는 들려오지 않았지만, 한결같은 E flat만이 지속되었지만 그는 그것이 영속적인 절망의 전조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하나의 곡이 끝나기 전까지 관객들은 결코 박수를 치지 않는 법이고 수준 높은 관객이라면 기침마저도 하나의 곡이 끝날 때까지 참아내는 법이므로 E flat 이외에는 어떠한 소음도 들려오지 않아도, 빗소리도 문을 열고 닫는 소리도, 피아노 건반을 누르는 물리적인 소리도 페달을 밟는 소리도 심지어는 제 숨소리마저 들리지 않아도 이상하게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오로지 그의 연주가 너무 완벽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하지만 육체를 잊고 살의 한계 너머를 떠도는 꿈의 무성적인 속삭임이 물러난 이후 그는 머리를 관통하는 날카로운 둔통에 시달리며 갑작스레 천둥의 무의미성을 깨달은 고대인처럼, E flat이 완벽함 이전에, 아름다움 이전에 무언가 과도한 상징을 내포하고 있음을 깨닫고 말았다.
그는 오래도록 하나의 건반만을 연속적으로 눌러왔던 손가락을 검은 건반으로부터 떼어냈다. 메시아적인 음율이 잦아들기까지, 완벽을 구가했던 연주가 순식간에 산산조각나 깨어지기까지의 한순간, 그는 다음 E flat을 연주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일생을 쌓아올린 화음, 정결하고 순수한 유리종과도 같은 음률을 그 스스로 깨뜨려야 한다는 사실을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믿을 수 없었다. 어째서 다른 누구도 아닌 그가, 치밀어오르는 열광과 박수, 기침을 초인적인 노력으로 참아내고 있는 관객들. 누구도 아닌 그 자신이 그의 단순하고 명징하며 그만큼 연약하고 아름다운 화성을 깨뜨려야 한단 말인가?
그는 자신이 모든 것을 망쳐놓기로 작정한 것을 이해할 수 없었으며 동시에 그 불가해한 결정을 잊을 수도 없었다. 돌이킬 수 없는 숙명과도 같은 파멸적인 행위로부터, 연주의 지연, 부딪힘의 유예로부터 벗어날 길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연주를 파기하는 자는 그 자신이었지만 누구보다도 그 자신이 아닌 자이기도 했다. 이 한결같고 매혹적인 E flat을 망가뜨리려는 자, 제 살 속 깊은 곳에 날카로운 칼을 박아넣고 장기를 찢어내며 자살하는 정결한 여인처럼, 그 여인이 고수하고 동시에 파기해야만 했던 순결처럼, 제 스스로 낯선 사물을 삽입하고 뭉그러뜨려 갈취하였던 붉고 연약한, 끔찍할 정도로 축축한 내부처럼. 그는 그가 가진 유일한 것, 그가 꿈꾸고 들을 수 있었던 유일한 음을 파괴해야만 한다는 사실로부터, 그러한 강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어째서, 어째서 E flat을 완성하면 안 된단 말인가, 어째서 E flat을 끝까지 연주하면-설령 끝이라는 게 없다고 하더라도, 지금 그가 직감하는 것처럼 E flat은, 완벽한 연주는 영원히 완성될 수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안 되는 것인지 그는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떨리는 손가락을 적합한 순간,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순간에 검은 건반에 가져다댈 수 없었다. 하지만 E flat은 사라지지 않았다. 언제나 한결같은 E flat, 잦아들지도 커지지도 않은 채 늘 같은 음량, 늘 같은 음폭, 늘 같은 높이에서 진동하는 E flat. 그는 E flat이 자신의 연주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의 손가락의 움직임과 언제나 정확한 순간에 맞추기 위해 금빛 페달 위에 얹혀진 발의 운동 사이에는 어떠한 연관관계도 없으며 실제로 그가 미동도 없이 가만히 있는 순간에도 이전과 같이 완벽하고 마술적인 E flat이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다는 사실을 절망적으로 자인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연주가의 행위와 피아노의 황홀한 음색, 작곡가의 구상과 오케스트라의 연주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선언하기 위해 짓무른 엉덩이를 들고 일어나 오래도록 망각하고 있었던 피아노 바깥의 세계를, 관중들을 돌아보려 했으나 그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정말이지 아무도. 모래 사장에 그려진 얼굴처럼 흐릿하고 부조리한 흔적조차도 없었다.
그제야 그는 아주 오래도록 혼자였음을, 그의 E flat은 글을 쓰는 자의, 시인의 영혼을 가지고 있음에도 시인일 수 없었던 가여운 부랑자의 작업처럼, 매일 저녁 여섯 시면 거울 앞에 서서 햄릿을 연기했던, 배우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음에도 배우일 수 없었던 배우의 무대처럼 고독한 음률이었음을 깨달았다. 관객 없이 배우는 배우일 수 없고 독자 없이 시인은 시인일 수 없으며 청중 없이 연주가는 연주가일 수 없었다. 그는 그제야 자신이 아주 오랫동안 연주를 쉬어왔음을, 아주 오랫동안 연주가가 아닌 채로 살아왔음을, 그가 한결같이 해왔던 연주는 거울 앞에서 독백하는 미치광이의 자폐적인 중얼거림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깨닫고, 깨닫고, 또 깨달으며 그는 돌이킬 수 없이 부서져버렸다. 그러나 아주 작고 엷은 유리를 깨는 미약한 소음조차 들리지 않았다. 세계는 한결같고 완벽한, 이제는 불온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E flat뿐이었다. 그의 팔도 그의 손목도, 그의 손가락도 그의 움직임도 그의 노력도 그의 인고도 없이, 소름끼치게 정확한 E flat. 그의 파멸과는 무관하게, 구름을 투과하는 별의 희고 냉혹한 광선처럼 비정하게 울리는 E flat. 그는 자유의지나 원죄, 숙명에 관한 이론들이 얼마나 허황된 것이었는지 깨달았지만 그가 구한 진실을 필요로 하는 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모두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언제나 열병처럼 번져간다고 생각했던 박수소리는 정말 처음부터 없었던 것인지, 그가 삶으로 내쫓기던 순간부터 그를 들여다보던 눈빛들은 끈적한 응시의 환통만을 남긴 채 그를 두고 온데간데 없이 떠나가 버린 것인지 물어볼 사람도 대답할 사람도 그곳엔 없었다. 침묵을 착취하지 않고, 피아노를 착취하지 않고, 울리지 않은 목소리들을 연민하지 않고, 피아노 바깥의 비명을 연민하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고민은 모두 무용한 것이었을까? 결국 E flat의 날카로운 음률에 살이 썰리고 투명한 내장을 게워내는 이는 그 혼자뿐이었는데. 아무도 듣지 못하는 연주가 대체 누구를 해칠 수 있단 말인가?
그의 연주가, 아니, 지금 절망적으로 깨달은, 그럼에도 아직 그 부조리를 이해할 수 없는 그의 비-연주가 상처주는 것은 오직 그 자신뿐이었다. 그의 청중일 수 있었던 자들은 모두 어딘가 그가 감히 상상도 못할 곳으로 끌려가고 말았고 피아노 앞에, 검고 매혹적인 E flat 앞에 남은 것은 그뿐이었다. 피아니스트는 기나긴 이명의 무성적인 음률이 그가 익히 들어왔던 불운과 같은 것임을, 침묵, 혹은 불구라고 불리는 그 흔하고 연속적인 생의 메타포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귀머거리였다. 처음부터, 혹은 처음이 아닌 언젠가부터. 그가 황홀한 첨단이라고 생각했던 E flat은 통속적인 질병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언제나 같은 자리에, 예언과도 같은 연을 짜고 정지해 있는 거미, 구석자리로 스며드는 무참한 햇볕을 식물처럼 탐닉하며. 그는 그의 눈앞에 오래전부터 현전해 있던 미래의 기호를, 운명적인 상징물을 읽어내야 했다. 의미관계는 인과적인 것이 아니라도 진부한 기호를 읽어낼 기회는 언제나 그의 눈앞에 존재하고 있었다. 가장 현재적이며 심지어는 과거적인 미래의 기호. 거울에 비친 쥐의 얼룩과 같이 사방에 도사리고 있던 운명적인 예감들.
행복한 운명은 처음부터 어디에도 없다. 불운한 운명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이 있을 뿐. 그러므로 그의 불운은 행운의 반대항도 행복의 결핍도 아닌, 지극히 당연한 운명의 한 단면일 뿐이었다. 절망은 운명의 본성이나 마찬가지이므로 운명을 살아가는 그가 절망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의 절망은 특별할 것도 애달플 것도 없는 절망이었다. 참혹할 정도로 범상한, 잔혹할 정도로 통상적인 운명. 범속한 좌절과 범속한 고통. 그럼에도 그는 그 범속성으로부터 헤어날 수 없었는데, 불가피함 역시-이미 잘 알려진 바대로- 운명의 속성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피아니스트는 피아노의 뚜껑을 열고 단단한 치아처럼 정렬된 해머들 위에 몸을 뉘었다. 해머들은 불가해한 초록빛의 곰팡이로 녹이 슬어있었고 작은 좀벌레들이 둥지를 틀고 한 건반에 세 개씩 연결되었어야 할 현을 갉아먹고 있었다. 피아니스트는 그제야 아무도 제 피아노 연주를 들어주지 않았던 까닭을, 그가 창문가에 앉아 아무리 큰 소리로 피아노를 연주해대도 그 누구도 불평조차 하지 않았던 까닭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오래전부터 귀가 멀었으며 오래 전부터 그의 귓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자동피아노의 연주만을 이명으로 듣고 살아왔고 그동안 그의 피아노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서 아주 작은 소리조차 내지 못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는 관의 뚜껑과도 같은 피아노 뚜껑을 닫고 절망적인 심정으로, 트릭의 원리를 깨달은 이후에도 떠나가질 않는 환청의 깊숙한 곳에서 연주자 없이, 그의 손가락 없이도 한결같은 소리로 사라진 현에 머리를 부딪혀대는 해머들의 몸짓을 음미해야 했다. 음악이라는 현상 속에 잠식된 채 지내는 세월 동안 그는 한 번도 세계를 바라볼 수 없었지만 그는 세계가 그를 소외한 채로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가 발견하지 못하는 세계, 그를 발견하지 못하는 세계.
피아니스트는 땅울림소리를 들었다. 폐허를 건설하는 몰락의 망치질 소리, 세계가 무너지는 소리, 규칙적인 절망의 소음이 그를 휘감고 들어올렸다. 어째서 이전까지는 듣지 못했는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음악이라는 것은 대체 무엇이였을까, 일생 동안 그는 벌어진 입 안에서 빛나는 흰빛을 그리기 위하여 노력했다. 눈부시게 하얀 눈밭에 추락하여 머리가 반파된 채 죽은 천사들을 그는 악몽 속에서 자주 보고는 했는데 그들의 벌어진 턱, 충격과 고통, 그에 따른 심각한 훼손 탓에 활짝 벌어진 턱 안쪽은 새벽 가장 처음 보이는 눈처럼 차갑고 새하얬다. 그는 밤이 새어 악몽이 서서히 희미해질 때까지 천사들의 옆자리를 지켰다. 벌어진 입은 그들을 죽음으로 내몬 끔찍한 광경을 누설하고 있는 듯했다. 천사들은 마녀와 공모하여 파문당하고 얼려죽인 이교의 새들처럼 보였다. 그들이 어떠한 죄를 지었는지 어떠한 죄악이 그들을 탐닉하였는지 그로서는 알 길이 없었지만 다물리지 않는 입속의 흰빛은 그대로 그의 머릿속에 침잠했다.
피아니스트의 E flat은 그 흰빛을 현상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처음에 그는 가장 간단한 진동, 전율만으로 흰빛을 포착해내려 노력했다. 이후에는 진동과 진동, 움직임과 움직임, 무형으로 존재하는 힘들을 엮어 관능을 만들고 그 관능으로 리듬을, 마침내는 흰빛을 현상해내려 했다. 일이 잘 진척된다면 화음과 불협을 섞어 E flat을 주축으로 한 색점들을 나비의 알처럼 작고 섬세한 음정들을 높은 밀도로 쌓아올릴 것이었다. 그러나 E flat, 그는 E flat을 넘지 못하였다. 단 한 개의 화성조차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대가들의 연주를 따라할 수는 없었다. 그들이 보고 있던 악몽의 색채는 그가 보던 무결하고 불온한 흰빛과는 전혀 달랐으므로. 천사를 죽여본다면, 그의 마지막 비명을 들어본다면 흰빛에 대응되는, 흰빛과 공명하는 소리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는 생각했지만 E flat에 골몰한 뒤부터 그는 오래도록 불면했으므로 악몽 속의 천사들을 다시 찾을 수는 없었다.
관중들은 흰빛의 장갑을 끼고 새처럼 퍼덕거리는 박수소리로 늘 그를, 거진 성공한 잠을 깨우고는 했다. 그는 관객들이 정확히 무엇을 듣고 있는지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도 계속해서 음악을 연주했다. 그는 흰빛으로부터, E flat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으나 언제든 도망갈 수 있다는 상상은 그가 도망칠 수 없도록 붙들었다. 그는 부글거리는 흰빛을 절개해 박제해 놓은 뼈들을 사람들에게 선보이고 분류하고 분석하고 흰빛을 구성하던 모든 성분에 일일이 이름을 붙이고 끝낼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피아노 연주는 그를 파멸로 이끌 것이었다. 피아노를 치면 그는 파멸할 것이었다. 그는 영원히 흰빛을 그 불온하고 히스테릭한 흰빛을 현상해내지 못할 것이고 그는 처참히 실패할 것이며 그의 죽음에는 망각과 착각의 여운만이 가득 드리울 것이다. 그러나 E flat을 흰빛을 그는 도저히 포기할 수 없었다. 포기하는 순간 그는 더 이상 그일 수 없었으므로. 불가능한 일, 애초부터 메워질 수 없었던 빛과 소리의 간극. 누구든 그의 음악에서 빛은 없었다고, 그건 어처구니 없는 망상일 뿐이라고, 공감각자들을 병자라고 부르듯, 병자들의 환각을 현실이라고 믿는 이는 없듯 누구라도 부정할 수 있을 기획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는 하염없이 E flat을 치던 손가락을 E flat과 E flat 간의 간극을 치밀하게 계산해내던 손가락을 떠올렸다. 차라리 귀가 먹으면 몰락을 알리는 망치질 소리가 완전히 조용해질까, E flat도 흰빛도 없는 곳에서 무한한 안식 속에서 죽어갈 수 있을까, 낮은 E flat의 땅울림소리는 계속해서 그를 들었다 내려놓고 있었다. 피아니스트는 끔찍하게 무력하게, 외부의 보이지도 않는 힘에 사로잡힌 그의 몸을 그의 앙상하고 그의 비참하고 그의 가벼운 몸을 느꼈다.
E flat과 결합되지 않은 몸, 감각, 생명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나 E flat이 곧 흰빛인 것은 아니야,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래, 아니지, 특정한 진폭의 E flat, E flat과 E flat의 고유한 겹침, 결코 섞여들지는 않는, 화음도 불협도 이루지 않는 미묘한 간격에의 중첩, 뭉그러지지는 않으면서도 구별불가능한, 와해되며 현시되는 흰빛을 현상하는 리듬이어야 해. 그는 그 일을 잘 할 수 있었다. 다른 누구보다도 잘 할 수 있다고, 완벽한 흰빛이진 못하더라도 적어도, 흰빛에 한없이 가까워지는 점근선을 그릴 수는 있다고 믿어왔다. 그러나 바깥에서부터 그의 내부로 밀고들어오는, 동시에 그의 내부에서 바깥으로 마구 뻗쳐나가는 비명과도 같은 힘의 갈등은, 몰락을 알리는 규칙적인 땅울림 소리는 정확하고, 파멸적이며, 착취적인 E flat, 천사들의 도래를 알리는 흰빛이었다. 천사들은 경멸적으로 비명하며 하늘에서 추락하고 그들의 벌어진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높은 소리, 지독한 고음의 음악을 아무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입 속의 흰빛, 그것만이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천상의 음악이었다.
사내는 새의 목을 꺾어 죽이듯 기묘한 동작으로 손을 뒤틀었다. E flat과 E flat, 너무 경박한 원호여서는 안 돼, 검은 건반을 두드리는 손의 동작은 천사의 날갯짓처럼, 아니, 아니지, 떨어지는 천사의 날개처럼 한없이 우아하고 가련해야 해, 경로는 치밀하게 계산된 잉여를 내포하고 있어야 해. 영원히 되어가는 경로. 끝도 없이 떨어지는 천사들처럼 그들의 날개뼈가 부러지는 소리. 목이 꺾이고 턱이 떨어져나가는 소리. 그 소리에 현혹되어서는 안돼, 오로지 흰빛, 그들 입 속의 불온한 흰빛, 침도 정액도 아닌 무언가 천상의 불결한 덩어리가 뭉글뭉글 새어나오는 그 흰빛을 기억해. 아 새를 한 마리 죽여본다면 알 수 있을 텐데. 한 마리만 죽여본다면, 영원히 다가드는 무형의 죽음을 힘을 포착해낸다면, 허공의 공명을 들어본다면, 움직임의 음악성을 그리고 부동의 음악성을 읽어낼 수 있다면, 세계의 리듬을 목격하며, 학대하고 학대받으며 목격하는 세 개의 리듬이 동시에 될 수 있다면, 한 번에 그 모든 중첩된 리듬을 현상할 수 있다면. 그래, 한 번에, 하나의 간격, E flat과 E flat 사이에 놓인 단 하나의 간격에 세계의 리듬을 끊임없이 증폭되는 복잡성을 연주할 수 있다면 그 심오한 수평성을 악보를 만들 수 있다면 좋을 거야. 치밀한 기호로 세계를 해석해내고 세계를 잠식한 불가해한 흰빛의 덩어리들을 보기좋고 읽기좋고 쉬기좋은 사회적 코드로, 어찌할 수 없는 코드로 번역해내는 숱하디 숱한 예술가처럼. 하지만 진정한 흰빛, 불온한 흰빛은 그래서는 안 돼. 하나의 익숙한 코드로도 함몰되어서는 안 돼. 누구도 이해할 수 없어야 해. 이해받지 않을 것, 영원히 파문당하고 고발당하고 불온하고 천박하고 조악할 것, 정당하지 않을 것, 그러면서도 완벽한 흰빛일 것.
악보는 그릴 수 없어. 해묵은 오선 위의 음표들은 E flat을 갉아먹고 부식하고 오염시키고 그래서 더는 불결하지도 불온하지도 않게 만들어버리고 말겠지. 순수하고 완벽한 화성, 화성의 궤도를 난 본능적으로 계산해내고 말겠지. 소용없는 일이지. 내가 드러내야 할 것은 기질, 완벽히 치우친 기질, 끝없이 편협한 기질 치명적인 중립성을 가진, 지독히 편파적인 중성의 백색이야. 천사들의 치우침, 천사들의 경향, 지상의 인간들에게는 끝없는 수평으로 보이는, E flat의 연쇄는 복잡하고 불가해하고 역겹고 거북해야 해. 탈주선을 와해시키고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손상시켜버리는 흰빛, 불가해를 독해하려는 비열한 관중들을 모두 피폭시켜버리는 흰빛, 그들의 배가 부풀고 머리가 부풀고 풍선처럼 부풀어오른 살이 터지고 깨지고 찢어져버릴 때까지 그들은 박수를 치겠지.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역겨움에 대해. 그래. 역겹지 않으면 아름답지도 않으니까. 그들은 단 한 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는 지독한 아름다움에 경의를 표하며 터져버릴 거야. 살점이 피아노 속에 들어가면 어쩌지? 비닐을 감아놓아야겠어. 물 속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작자들이 쓰는 방수비닐이 있을 거야. E flat의 울림을 가로막지 않을 비닐봉지, 관객들의 환성과 숨에 흔들려 오물과도 같은 소음을 묻히지 않을 비닐봉지. 아, 대체 이 망치질소리는 언제 끝나는 것인지.
그래, 내가 연주하고 있잖아. 손가락이 움직이고 있는걸. 어째서 다른 사람들은 피아노 내부에서도 연주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걸까. 관객들은 날 볼 수 있을까.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유령도 마술사도 아닌 내가 연주를 하고 있다는 사실, 아주 오래전부터 연주를 하고 있던 내가 계속 연주를 하고 있다는 걸 기억해낼 수 있을까. 어쩌면 잊었을지도 몰라. 이 도시의 관객들은 전부 모차르트를 사랑하고 베토벤을 경외하는 촌부들뿐이니까. 누군가 평균율을 영원히 파기했더라면, 평균율로 피아노를 조율하는 이들을 영원히 파문했더라면 평균율로 조율된 피아노를 도끼로 깨부수고 평균율로 조율하는 손들도 전부 깨부수었다면 그 빌어먹을 감상주의자들의 음악을 다시는 듣지 않아도 됐을 텐데. 내게 다시 없을 실수가 있다면 베토벤과 모차르트를 사랑하는 자들이 이처럼 드글거리는 도시에서 태어났다는 거야. 난 이 빌어먹을 촌티를, 몰상식한 감상성을 벗어버리기 위해서, 절대적인 해악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 음악적 저열함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끔찍한 노력과 인고의 시간을 견뎌내야 했지. 그 시간동안 E flat에 더 골몰했다면 하나의 단순한 전율, 진동으로부터 벗어나 수십 개, 아니 수백 개는 되는 진동들에 음을, 음에 형상을, 형상에 리듬을, 리듬에 관능을 얽어서 흰빛을 상연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수십 개, 수백 개나 되는 흰빛, 뭉그러지지도 않고 손상되지도 않은 완전한 불구의 흰빛, 하지만 베토벤과 모차르트, 슈베르트와 브람스로부터 벗어나는 데에 이십 년은 걸렸어. 그들의 음악에 매혹당한 천박한 사람들의 귀와 닮아가기 위하여 하릴없이 허비한 시간이 십 년, 그 치명적인 무의미함을 깨닫고 그들의 음악, 진흙처럼 내 예민한 흰빛을 부식시키던 조악한 얼룩을 벗겨내는 데에 또 십 년, 그러고 나서도 아직까지도 베토벤과 모차르트 슈베르트와 브람스의 멜로디가 머릿속에서 혼종적으로 뒤섞여 떠돌 정도니, 난 가끔 E flat을 연주하다가 그들의 기만적인 음악에 빠져들지 않기 위해 광고 카피와도 같은 그들의 조악한 멜로디에 젖어들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만 하지. 한없이 천박한, 한없이 세속적인 음악들, 그런 음악에 눈물을 흘리고 흐느끼는 사람들이란 말이지, 내 관객들은. 그들이 흰빛을, 이 부글거리는 심오한 흰빛의 분투를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그들은 진정한 절망을 몰라. 그저 상승하고 하강하며 쌓여가는 수학적 화성, 기실 치명적인 결함을 내포하고 있는 기만적인 세계에 빠져들어 울곤 하니까.
난 베토벤의 교향곡, 특히 9번 교향곡을 들을 때마다 치가 떨렸어. 가면 갈수록 처참해지는 화성의 으스러짐 끔찍할 정도로 정교한 조악함, 그런 수열들의 겹침, 체계가 심오하다고 믿는 작자들과는 상종하고 싶지도 않아 그 작자에게는 소외도 투쟁도 없어 정밀하게 계산된 음과 음의 대칭적인 대립은 모두 기만이고 환상일 뿐이지 9번을 듣고 흐느끼는 감상주의자들 옆에서 난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어.
좀 더 자라면, 세상을 알게 되면, 성장하면 너도 느끼게 될 거란다, 하고 누가 말했는지 기억나지 않는군. 어처구니 없는 말이지. 난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고 언젠가부터는 느낄 수 없다는 데에, 베토벤을 듣고 울 수 없다는 데에 아무런 수치도 느껴지지 않았어. 난 그 작자가 비열한 사기꾼이라는 걸 알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음악회에선 언제나 베토벤, 베토벤, 또 베토벤을 연주해댔지. 그들은 베토벤의 세계가, 그 황망하고 메마른 폐허가 음악의 최선이라고 믿는 것 같았어. 그렇다면 세계의 음악은 들리는 족족 파기해버리는 게 맞겠지. 그따위 벌집, 새까맣게 타들어간 죽은 벌집이 음악의 최선이라면 음악만큼이나 절망적인 미래를 담보하는 예술은 더 이상 없겠지. 할 수만 있다면 난 베토벤이 첫 곡을 쓰기 전에 그를 찾아가 목을 졸라 죽여버렸을 거야. 그가 음악을 망쳐놓았으니까. 그는 가장 치명적이고 악질적인 사기꾼이야. 그래, 악질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겠군. 그를 보완하려는 시도들, 그를 추종하고 그를 연주하고 그를 재독해하고 심지어는 그를 다시쓰려는 모든 시도들이 전부 나쁘다고 난 단언하겠어. 그런 삐걱거리는 계단들이 천국이고 천상이고 미래라면 그냥 욕조에 대가리를 박고 죽어버리는 게 낫겠어. 그 노망난 수학자가-그는 음악가가 아니야 현혹적이고 기만적인 방식에 매혹된 뒤틀린 수학자지-은근히 숨겨놓은 그 모든 낭만적인 멜로디들, 사람의 밑을 핥고 고양시키는 바이올린 선율, 그들이 들어가는 곳이 똥통인지도 모르면서 썩은 줄을 잡고 오르는 사람들. 난 우리 도시의 사람들이 아직도 베토벤을 듣고 베토벤을 연주하고 베토벤을 사랑한다고 말한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아. 오 천상의 지배자시여. 이 천박하고 비열한 시민들을 구원해주시기를. 반복되며 격양되는 모티브 모티브 모티브들 사람을 현혹시키고 꾀어내는 오르내림, 강박적인 대칭과 숫자놀음, 기울어진 미로에 어떠한 체계가 있다고 암시하는 그 모든 혀놀림, 파토스를 피아노와 바이올린의 수열로 환원시키려 하는, 인간의 감정을 계산하려 하는 그 비정한 계략에 놀아나는 촌부들, 그러나 미혹에 넘어가고 비렁뱅이를 위해 봉사한 이교도들을 하느님은 모두 용서하신다지, 그래, 용서하지 않는 자는 신일 수 없으니까. 그러니 내가 지상의 베토벤들을 모조리 불태우고 목조르고 도끼로 쳐부순대도 그는 용서하시겠지. 사물들의 복잡한 단순성을 단순한 복잡성으로 왜곡시키는 그 천박한 선율들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하지만 그를 기억하지 않겠어. 난 이미 그를 잊었으니까. 세계와 우주의 견고한 수학적 거리를 계산한 그 망측한 시도는 평균율을 순정률로 바꾸는 순간, 기울어진 지평을 보다 심오한 수평으로 조율하는 순간 모두 끔찍하게 으스러지고 말 텐데, 멍청하게도 현혹당했던 이들은 종말을 알리는 낙뢰 소리와도 같은 절망적인 끽끽거림을 듣고 백일몽에서 깨어나고 말 텐데.
물론 나도 베토벤을 쳤지. 한때는 베토벤을 듣고 베토벤을 연주하고 베토벤을 외웠어. 하지만 진정으로 베토벤을 믿었던 건 아니야. 아니고말고. 이 천박한 고장의 사람들이 하나같이 베토벤에 홀려들었기 때문에 어찌할 수 없이 베토벤을 연주했을 뿐이지, 난 완벽하게 이입하지도 않았고 정확히 말하면 조금도 이입하지 않았지만 감상적인 사람들은 내 연주에서 관조적인 파토스가 느껴진다며 열광했지. 관조적인 파토스라니. 난 그런 기묘한 말을 이전에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어. 아마 신이라고 해도 그런 부조리한 언어는 이해할 수 없을 거야.
콘서트를 마치고 집까지 걸어가는 날-아 제발 그 빌어먹을 팀파니를 치워버리면 좋겠어. 9번 9번 빌어먹을 9번-소풍을 나선 아이들을 마주쳤지, 난 그들이 베토벤의 후손이라는 걸 단번에 알아차렸어. 기묘하게 번득이는 날카로운 눈, 천박한 수학자의 눈, 체계담론의 정밀함을 정말로 믿는 것 같이 보이는 그 한없이 검고 단단한 눈, 아이들은 개나리와 진달래와 벚꽃을 꺾어 적장의 목처럼 한껏 들어올리며 자랑하며 낄낄거리리고 있었지, 난 베토벤의 후손들이 아직도 도시 곳곳을 어슬렁거린다는 사실, 그들이 자라나 베토벤의 소곡들을 연주하리라는 사실을 도저히 참아낼 수가 없었어. 난 끝까지 이 도시에 깊이 침잠한 베토벤의 망령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지,
물론 모차르트나 슈베르트, 브람스도 그와 마찬가지로 조악하고 감상적이지만 그들이 감상적이라는 데에 이견을 제시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 그들의 감상성은 보다 노골적이고 뚜렷하게 드러나지. 그러나 베토벤은 기묘한 방식으로 그 무참하고 천박한 감상적 멜로디를 감추고 있어. 그렇기에 한때는 추위에 단련된 냉혹하고 견고한 정신을 가졌다고 자랑하던 우리 고장의 사람들도 그에게 속수무책으로 현혹되어버리고 만 거겠지. 그가 웅장하며 대범하고 초월적이며 심지어는 남성적이라는 거야. 세상에, 남성적이라니. 그들이 가장 급진적인 의미로 그 어휘를 사용했다고 해도 난 그들을 이해할 수가 없어. 묵직한 화성 중간중간마다 아양을 부리듯 은밀하고 동시에 다시 없을 정도로 노골적으로 흘러나오는 바이올린의 교태에 완벽하게 넘어가버리지 않았다면 감히 그런 말을 할 수는 없겠지. 베토벤 음악이 남성적이라는 말은 모차르트 음악이 여성적이라고 하는 것만큼이나 어처구니 없는 헛소리야. 음악가 자신이 남성적인 남자였건 여성적인 남자였건 위대하고 보편적이며 초월적인 남자 음악가들이 전부 게이였던 게이가 여성적인 남자건 아니건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야. 그들 음악에는 목격자가 없다는 사실이지. 베토벤이건 모차르트건 다 마찬가지야, 그들의 음악에는 폭행하는 선율과 위로하는 선율이 있을 뿐, 그 모든 광경을 묵묵하게 바라보고 기다리며 중화할 수 없는 거대한 심연을 허공의 묵시를 남겨두는 신적인 응시, 목격자의 존재가 없어, 언제나 두 가지 종류의 화성, 공격하고 공격받고 강간하고 강간당하고 찢겨내고 찢겨나가는 음악뿐이지. 정과 반의 대립을 극복하고 고양되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그 기만적인 음악, 난 베토벤을, 그래, 특히 9번 교향곡을 들을 때면 그 위로하는 음색을 들을 때면 연주자의 대갈통을 깨버리고 입술을 찢어놓고 손가락을 전부 부러뜨려놓고 싶어. 그러면 관객들은 그 유령 같은 손가락이 만들어내는 시들한 세계의 연쇄, 완벽한 하모니의 강박적이며 천박하기 그지없는 환상이 아니라 찢어진 입 그 자체를 볼 수 있을 테니까. 물론 그놈의 입속에는 담배와 스모그에 찌들어 침착되어버린 더러운 누런빛밖에는 없겠지만 그래도 살랑거리며 위로하는 바이올린의 착취적인 위로보다는 나을 거야,
가장 견디기 힘든 건 3악장이지. 솜털로 만든 쥐새끼들도 그보다 더 알랑거리지는 못할 거야, 역겨운 감상성, 역겨운 멜로디, 역겨운 누그러뜨림, 9번 교향곡 3악장은 명백한 악이야. 학대자를 다독거리는 손놀림. 입안을 찢어놓는 손과 쓰다듬어주는 손을 구분할 수 없게 만드는, 멍청한 촌부들을 구제불능으로 망가뜨려버리는 음악. 왜곡된, 들끓는, 불결한 수억의 반사들을 일률의 부드러운 멜로디로 왜곡시키는 더러운 기만. 그 음악에서 아버지의, 신의 파토스를 느낀다고 지껄이는 이들로부터 끝내 벗어날 수가 없었지. 내 스타인웨이, 내 관중, 내 가엽고 멍청한 촌부들로부터, 모든 죄악, 모든 기만은 결국 목격하는 리듬의 부재로부터 발생한 참상이야. 난 베토벤이 얼마나 명민하게 그 리듬의 존재를, 신적인 백색 응시의 존재를 빼버렸는지, 세계가 학대하고 학대받는 두 가지 종류의 음률만으로 존재하는 것마냥 왜곡했는지 잘 알고 있어, 그 교활한 수학자가 두 개의 리듬과 두 종류의 화성으로 맞아떨어지지 않는 잔차를, 오차를 발견하지 못했을 리가 없지. 하지만 그는 아무에게도 그 오차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았어. 갑작스럽게 누그러진 바이올린 선율로 모든 불협을 감추고 달래고 껴안고 미혹하는 통에 아무도-나를 제외하고는- 그 명백한 균열을 알아차릴 수 없었던 거지.
3악장을 들으면서 난 몇 번이고 구역질을 했지만 빵 한 조각 토해낸 적이 없어. 아무것도 나오질 않았지. 내장이 불쑥 튀어나올 것처럼 꺽꺽대어도. 왜냐면 베토벤에게는 어떤 분투도 없었으니까. 그가 묘사한 투쟁과 불협과 갈등은 사실 치밀하게 계산된 협화일 뿐, 반드시 해소되고 말 투쟁, 고양과 상승, 지양이 예정된 세계를 두려워하는 이는 아무도 없어. 세계의 수복에 눈물을 흘리며 박수를 치는 이들은 그들 뒤에서 진짜 음악, 진짜 흰빛, 진짜 몰락이 망치질하는 소리를 까맣게 잊고 있지. 그래, 바로 이 소리, 본질도 사물도 아닌 매개된 관계들의 물질성 자체를 현현하면서 쿵쿵거리는 이 E flat의 치명적인 흰빛을, 세계가 부서지는 소리, 폐허를 건설하는 소리, 아무런 이득도 효용도 변화도 없는 불가해한 기생적 언어-비언어의 현시.
등뒤에서 세계가 무너지고 있는데도 그들은 눈앞에서 펼쳐지는 가상의 고양과 천국에 눈이 멀고 귀가 먹어 해소되지 않은 모든 갈등이 해결되었고 그들의 영혼, 항상 부동으로 더러운 객석 의자 위에 놓여 있던, 제 배설물 위에 혹은 아래에 혹은 한가운데에 웅크리고 있는 채 한 발자국도 떨어져나간 적이 없던 그 영혼이 끝 간 데 없이 비상하였다고 믿고 있었던 거야. 세계는 몰락하고 있는데. 우린 이미 끝의 시작을 죽어가고 있는데도 아직 베토벤을 듣다니. 우리 앞에 현현한 몰락, 영원한 다중성을 무시하고 베토벤을 그것도 9번을, 3악장을 듣다니.
베토벤을 연주할 때 난 역겨움을 참으며 베토벤을 치던 내 손가락을 부러뜨리러 올 선각자가 나타나기를 가만히 기다렸지만 아무도 내 목을 조르고 내 손가락을 칼날로 썰어버리러 나타나지 않았어, 연주가 끝나고 박수를 치는 그 희멀건 손들을 전부 부러뜨리고 싶었지. 그에게 박수를 보내던 그 손들이 언젠가 내가 반드시, 그래 반드시 구현해내고 말 치명적인 흰빛을 목격한 손들과 같은 기억과 같은 영혼, 같은 살에 접붙어있다는 생각만 해도 굴욕적이지만 언젠가 그들이 살 밖으로 존재 바깥으로 밀어냈던 역겨운 덩어리들을 몸속으로 받아들이고 그들을 응시하는 무형의 힘들에 치명적인 분투를 통해 고양시킨 찢겨진 입으로 그 입 속에 내재된 희미한 흰빛으로 엉겨들 때, 감상성에 취약한 그들의 기질은 묵은 때를, 영혼을 갉아먹는 우스꽝스러운 상승의 합창을 벗어내고 자살한 천사들의 입속을 그 투명하고 아름다운 흰빛을 과잉재현되어 말살된 균열, 흐르는 균열과 상처에 받아들인다면 베토벤의 야만적인 숭고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겠지. 그래, 베토벤으로부터 벗어나는 일. 흰빛을 현상하기 위해서는 그 악독한 재앙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해. 아직도 그 치밀하고 교활한 화성의 잔재가 내 안에 남아 있으니 그럴만도 하지. 난 베토벤을 듣고 연주하고 암기하고 또 들었으니.
특히 새해가 올 때마다 부모님과 음악교사는 날 데리고 베토벤 9번을 들으러 갔지. 바이올린과 첼로 위에서 지네처럼 기어다니는 무수한 손과 활을 보고 난 끔찍한 충격에 빠져 말을 잃었고 천국으로 가자고 지껄여대는 합창소리, 웅얼웅얼거리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는 그 천박한 아우성을 처음에는 한 마디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몇 해가 지나기 전에 그들이 얼토당토않은 신정론을 노래하고 있다는 걸, 그들의 노래가 신의 악행과 기만에 대한 용서라는 걸 이루어질 수 없는 용서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지. 그들은 천상과 지상의 환각적이며 현기증적인 울렁거림을 완전히 곡해하고 있었어.
천사들은 하늘을 뒤덮은 독가스를 견디지 못하고 지상으로 추락하여 반파된 머리로 제 흰빛을 고발하고 있는데, 그들은 천사들의 머리가 깨지는 소리를 치명적인 E flat을 뻔히 들으면서도 듣지 않기 위해 환희를 노래하는 꽥꽥거리는 고성의 비명들을 뒤뚱거리는 조악한 가짜 천사들을 무대 위에 세워 놓고는 환희니 빛이니 영웅이니 당치도 않은 언어를 부끄러움도 없이 비명하고 있으니. 순수한 존재가 아닌 순수한 탈존을 향해 추락한 천사들의 비참을 역행하는, 순전히 퇴화적인 숭고, 날카롭고 미묘한 불확정성을 신을 찬미하고 신을 용서하는 말도 안 되는 찬가로 격하시키는, 니힐리즘적인 절망만을 양산할 뿐인 위선적 기도. 인간은 결코 신을 용서할 수 없는데도, 천사들은 지옥으로 변해버린 천국에서, 백색의 가스에 잠식된 천상에서 단단하게 얼어버린 새처럼 지상으로 추락하고 있는데도, 천사들이 버리고 떠난 천국에는 아득한 공동과 공허만이 남아 있는데도, 다른 세계로의 메시아적 고상은 비틀린 망상에 불과한데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천사의 부드러운 흰빛에 한없이 미끄러지는 일뿐인데도 신을 용서하고 신을 끌어안고 신의 빛에 올라가겠다는 허황된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대고 있으니, 그들은 아직도 우리가 인간의 종말을 살아가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어. 신이 우리와 함께 유기한 폐허에는 승리도 환희도 아닌 패배와 절망만이 남아 있는데도, 죽음으로부터 영원히 방출된 천사들, 실패한 자살자들의 절망적인 흰빛이 아직까지 꿈틀대며 울어젖히고 있는데도, 구원도 미래도 아닌 종말을, 합창 뒤의 마지막 난장, 실패한 자살자들을 철저히 유린하고 모독하는 그 의도적이고 경박한 오독이 막을 내리고 난 뒤에도 지상으로 떨어지는 천사들의 쿵쿵거림은 계속되었지만 청중들은 박수를 쳤지.
박수를, 죽음의 실패를 사라짐의 실패를, 오로지 내적인 파괴와 와해만을 현상하는 정신의 타락을 조롱하듯 울려퍼지는 환호와 박수소리. 난 그보다 끔찍한 소음을 들어본 적이 없었어, 결국 현상을 상연하는 조악한 신체 그보다도 더 조악한 신체의 주름인 정신들은 베토벤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 사내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베토벤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것보다 완전히 부정하는 일이 훨씬 간단한 까닭은, 그는 스스로에게 되뇌듯 말했다. 그게 사실이기 때문이지, 모든 위대한 예술은 기만이니까.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가 갈급하게 익혀야만 했던 것, 그가 학습해야 했던 유일한 것은 오로지 체념뿐이었음에도. 설령 포기할 수 없었다 하더라도, 결국 편지를 쓰고 편지를 부치고 편지를 받기를 열망하고 누군가에게 들리기 위해 누군가가 그를 발견하기를 열망하며 무의미한 상상을 구현하려 애를 쓰더라도 체념 속에서, 오로지 체념 속에서 모든 작업 이전의 것들과 작업들이 이루어져야 했다. 스스로가 가장 유치하고 표면적이며 조악한 의미의 유령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소녀는 처음부터 완성될 수 없고 현존할 수 없으며 이해할 수 없고 분유할 수 없고 체험할 수 없고 체현될 수도 없는 덫이었다. 원형을 분유하는 체하지만 기실 아무것도 비추거나 재현하거나 의미하지 않는 거울 파편들과 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