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하루살이들 9회

그들은 실망한 기색조차 아니었다. 악수를 청하지도 않았다. 유년 이전의 세계에 대해 온전히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너는 두 개의 다리로 짐승들의 군내가 진동하던 등대의 다락에서 내려갔다. 찍찍, 찍, 찍 하는 쥐들의 울음이 너를 배웅했다. 너는 먼 곳까지 펼쳐진 등대 빛의 그늘에 주저앉아 날 비린내가 풍기는 살을 모두 게워내었다. 얼음도 모래도 없는 얼음사막에서 유리의 방까지 가는 길은 그리 길지 않았다. 너는 꿈에서 새벽으로 향하듯 주저없는 걸음으로 유리에게 돌아갔다.

물이 가득 들어찬 모래시계처럼 시간은 멀어지며 떠올랐고 가까워지면서 깊어졌다. 우리는 독 속으로 기어들어 울었다. 구석자리에만 넘실거리는 신음들은 어째서 시끄럽지도 못한 것일까. 너희는 일몰조차 미루어 두고 울었다.

유리, 너는 유리가 맞지?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방 안에서 하루를 보낸 존재는 푸르죽죽하게 변색되어 있었다. 배는 가스가 차올라 부풀었고 피부에는 어디선가 죽음의 냄새를 맡고 찾아든 파리들이 우글대고 있었다. 축축한 오징어가 썩어가는 고약한 악취가 진동했다. 죽어가는 것은 유리일 수 있었던 아이 뿐만이 아니었다. 유리를 담고 있어야 했던 방 전체가 하나의 울림도 가두지 못한 채 저물어 가고 있었다.

유리, 나는 너를 잊기로 했어.

뭐? 유리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언어로 중얼거렸다. 소리, 네가 들리지 않아. 그래. 너는 오랫동안 유리의 언어로 살았으니까.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없어. 제 사연을 표현할 어휘를 잃어버린 유령들은 사랑에 전염된 인어들처럼 물거품만을 뻐끔거렸다. 유리의 앞에서만 너는 시가 아닌 말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왔다. 어제를 모르는 유리만이 온전히 네 말에 귀기울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유리의 앞에서도 너는 시를 읊고 있었다. 유리는 너를 듣지도 않고 읽고 있었다.

유리, 잊히고 있어.

들리지 않아.

유리, 너는 꼭 잊는 대신 희박해져 가는 것 같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일에는 언제나 서툴지만 아마도 너는 나보다 많은 어휘들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 아닐까?

그건 모두 네가 가르쳐준 말들이라고, 감히 말할 수는 없었다. 어휘들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다른 어휘들을 끌어오는 소리의 목소리는 오늘 발생한 사건이 아니었다. 목소리로부터 떨어져나간 언어는 유리의 혀 속에 얼어붙어 있었다. 유리는 사탕을 녹여먹듯 무의식적으로 끈적하게 녹아내린 어휘들의 낯설고 익숙한 맛을 음미했다. 사탕, 한 번도 삼켜 본 적이 없는 사탕이라는 말처럼.

유리에게 너는 바깥의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린아이처럼 울면서 꺽꺽거린 말들을 유리는 한 마디도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의 대화는 서로의 귓바퀴를 스치며 둥글게 맴도는 바람과 같았다. 유리는 내 말에서 언어를 배웠으며 쉽게 익힌 언어를 내일은 잊어버리고 말 것이다. 유리는 어제를 아는 내가 사용하는 말들을 온전히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바깥을 논하는 내 말에서 어떤 냄새가 나는지도 모르면서 내 어휘들을 따라 말을 지어냈다. 우리의 언어는 자폐적이었다. 어쩌면, 우리가 지어내는 모든 말의 잎사귀들이 마찬가지인지도 모른다. 너희가 기억하지 못하는 날에 발명된 어휘들로, 너희가 본 적도 가 본 적도, 닿은 적도 없는 색채들로 너희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 살아본 적 없는 날의 말들로 너희는 너희를 진술하고 있는 것이었다.

몸에 속해 있던 마음이 몸으로부터 떨어져나가면, 마음은 어떻게 되는 걸까. 마음이 단지 기억에 불과하다면 유리의 마음은 더 이상 유리에게 깃들어 있지 않았다. 유리의 마음은, 유리의 어제와 내일, 지칭하는 말조차 가늠할 수 없는 그보다 더 먼 날의 기억들은 오롯이 소리에게만 속해 있었다.

너는 여자로부터 자신의 두 다리를 잘라낸 사람의 표정을 읽어낼 수 있었다. 제 살을 도려내는 사람들이 짓는 표정을 너는 함께 지을 수 있었다. 당신 다리는 누가 잘라낸 거죠?

여자는 흐느끼듯 웃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는 태어날 때부터 다리가 없었어. 그래도 너는 느끼고 있는 거지? 다리를 잘라낸 사람들만 짓는 표정같은 걸 말이야.

도저히 빗겨갈 수 없다고 생각했던 예감들은 온전한 언어가 되기도 전에 오해로 변해버렸다. 너는 여자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그래도 마찬가지일 거야. 태어나서 한 번도 자기 다리를 잘라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있겠니. 꿈속에서라도, 내일이라도.

여자에게서는 젖은 밤의 냄새가 났다. 차고 축축한 바깥의 냄새. 건초와 흙의 향기가 난다고 이야기하자 여자는, 너도 이제는 냄새를 잘 읽어낼 줄 알게 되었구나, 하고 말했다. 여자는 새벽이 떠오르자마자 의학박사 프란츠의 해부실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말했다. 그는 신원을 찾지 못해 이름조차 없는 위령들의 묘에서 오래도록 삭아 해골만 남은 뼈를 가지고 돌아오곤 한다는 것이다. 무덤 아래에 사람의 뼈 대신 개나 닭의 뼈를 몰래 바꾸어 놓고 흙을 덮고 나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다고. 적어도 그가 도굴을 시작하고 난 뒤로는 한 번도 들킨 적이 없다고 했다. 한밤중에 묘지에서 이름을 잃은 몸들을 뒤적거리고 있다 보면 박사는 그가 파헤치는 것이 자신의 묘일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기분이 들기도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도굴을 멈출 생각은 없었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박사님은 내게 다리를 붙여 주겠다고 했어. 아직은 열댓살 정도 된 아이의 무릎뼈밖에 구하지 못했지만. 다른 뼈들은 모두 삭아서 부서지고 말았거든. 곧 진짜 짐승의 살과 뼈를 붙여주실 수 있을 거야. 신경까지 이어줄 능력은 없다고 하셨지만 상관 없어. 중요한 건 걸을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때가 되면, 소리, 나는 기어서라도 밖으로 나갈 거야. 나도 너의 유리를 만나고 싶어.

그게 당신 소원인가요?

그래. 어쩌면 내 소원은 이제 낡아버린 건지도 몰라.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사물들의 이야기는 널려 있으니까. 우산이 나쁘다는 건 아니야, 내 말은, 그러니까. 모든 말은 부적절해. 이해하겠니?

두 다리가 없는 채로 당신일 수는 없는 건가요?

응. 나는 항상 두 다리를 달고 기어다니는 내 몸을 떠올려. 나는 더 이상 우산이고 싶지 않아.

그 박사가 우리 기억도 고쳐준 건가요? 하루를 살도록 태어난 우리들을 이어준 것도 그사람인가요?

그건 나보다 네가 더 잘 알고 있겠지. 나 역시 하루를 살고 있으니까.

그건, 아무래도 거짓말 같아요. 당신은 내가 알지 못하는 시간의 일까지 모두 기억하고 있는 걸. 그게 모두 오늘 일어난 거라고요?

나는 우산이니까. 살아 있지 않을 때에도 무언가를 할 수는 있단다. 가령 몸을 접었다가 펴는 일이라든지, 물기를 말리는 일 같은 거.

이해할 수 없어요.

너는 오만한 아이구나.

내가요?

그래. 가령 너는 이 방에 갇힌 하루살이들보다 네가 더 외롭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하루보다 긴 날들을 이해받지 못할 언어와 함께 지새워야 했을테니. 넌 기억으로부터 따돌림당하는 기분을 알고 있니?

스스로를 유리라고 지칭한 사내는 이 등대 안에서 아내와 함께 살았다고 이야기했다. 난 그녀를 사랑했고 그녀와의 삶이 완벽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만족하지 못했어. 그녀는 나에 대한 사랑을 그녀 자신에게 증명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다고 했어. 그때는 나도 진짜 별들을 관측하고 있었지. 달보다 희미한 빛만을 어렴풋이, 그러나 바퀴벌레만큼이나 끈질기게 우리가 가늠할 수도 없는 먼 곳에서 확실하게 전해오는 그 얼룩들 말이야. 내가 별들의 정확한 좌표를 기록하기 위해 골몰하고 있다는 걸 그녀도 알고 있었어. 물론 별들이 내 전부는 아니었지. 그건 게임이나 독서와 같은, 일종의 취미 생활에 불과했어. 생활의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필수불가결한 것은 아닌 활동이었지. 언제든지 다른 소일거리로 바꿀 수 있는 그저그런 취미생활일 뿐이었어. 난 별들을 바라보는 것보다 그녀의 새까만 눈동자를 들여다보는 쪽이 훨씬 좋았으니까. 그렇지만 그녀를 너무 많이 보고, 만지고, 맛보면 그녀를, 안그래도 가녀리고 희미한 그녀를 이루던 성분들이 조금씩 조금씩 소모되어 그녀는 신기루와 같은 흔적만을 남기고 구체적인 형상을 모두 잃어버릴 것만 같았어. 그만큼 그녀는 아름답고 신비로웠으니까. 마치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처럼. 마치 나를 속이고 있는 것처럼. 마치 이 세상을 속이고 있는 것처럼. 그러나 그녀는 그런 내 말이 거짓이라고 생각했어. 그녀를 충분히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그녀를 해치지 않는 거라고, 그녀가 그리 간절하지 않기 때문에 그녀를 망가뜨리지 않는 거라고. 그녀의 발가락을 빨면서도 그걸 베어물 생각은 하지 못하는 거라고 그녀는 울면서 호소했어. 난 그녀의 눈물을 핥았지만 그녀의 눈동자를 깨물어 터트리지는 못했어. 차마 그럴 수 없었어. 그녀가 역겹거나 거북스러웠기 때문은 아니야. 넌 이해할 수 있겠니? 난 차마 그녀를 먹을 수 없었어. 그녀가 온전하고 다소 건조한 상태로 내 곁에 끝까지, 썩지 않고 머물러 주기를 바랐던 거야. 하지만 그녀를 베어물고 그녀를 찢어발긴다면 그녀는 곧 지독하게 달콤한 악취를 풍기며 부패해버리겠지. 그건 그녀를 잃는 거야. 난 그녀를 죽일 수도 잃어버릴 수도 없었어. 그녀는 나를 사랑했고 영원히 나를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했으니까, 그녀가 정말로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녀를 믿었던 거야. 난 그녀가 얼마나 사랑을 갈망하는지 몰랐어. 그녀가 사랑에 광신적으로 매달리고 있다는 것도, 부족하고 어줍잖은 사랑을 하느니 사랑을 버리고 죽어버릴 정도로 사랑에 애달파 했다는 것도 나는 몰랐어. 그녀는 별을 바라보고 있는 내 귓가에 속삭였어. 나를 망가뜨려줘요. 나를 죽여줘요. 나를 사랑해줘요. 나를 여자로 만들어줘요. 그래. 믿어지니? 그녀는 그렇게 말했어. 나를 여자로 만들어달라고. 하지만, 여자라니? 난 그때까지 여자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어. 그녀와 같이 부드럽게 부푼 가슴과 매끄러운 배꼽, 촉촉하게 들어간 음부만으로 그녀는 여자인 것이라고 생각했지. 난 누구도 여자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어. 여자로 태어나는 사람들은 이미 여자이며, 남자로 태어나는 사람들은 이미 남자이므로, 그 누구도 다리를 바꾸어 달 수 없듯 성기의 형태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그녀는 아직 그녀 자신이 여자가 아니라고 했어. 그녀는 내게 자신을 착취해달라고, 침을 뱉고 모욕해달라고, 짓밟아달라고, 그렇게 자기를 사랑해달라고 했어. 난 그런 폭력은 사랑이 아니라고 했지. 날마다 우리는 같은 주제로 싸웠어. 난 그런 게 여자가 아니라고 했고, 그녀는 그녀를 여자로 만들어달라고 했지. 대체 누구가 그녀에게 그런 신념을 불어넣었느냐고 묻자, 그녀는 자연이라고 했어. 난 자연을 신뢰하면 안된다고 했어. 자연만큼이나 우리를 기만하는 건 없다고, 자연만큼이나 우리를 비참하게 만드는 건 없다고. 그녀는 괜찮다고, 자신을 비참하게 만들어 달라고 했어. 난 참지 못하고 그녀를 비웃고 말았어. 대체 여자라는 게 무엇이냐고, 당신의 여자는 미신일 뿐이라고 했지. 그녀는 날 이해할 수 없다고 했어. 목을 매고 배를 찢고 다리에 피를 흘리며 죽어간 여자들은, 그녀들의 비명은 무엇이냐고 했어. 그녀들은 여자가 되어 행복해하며 죽지 않았느냐고, 그건 어느 소설이나 연극, 오페라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풍경이라고 했어. 그렇다면 여자가 되어 행복하다고 했던, 그 비련의 여인들이 모두 거짓말쟁이냐고 했어. 난 그렇다고 물었어. 그녀들은 희생자일 뿐이라고, 그녀들의 사랑은 거짓이라고. 그녀들은 여자가 아니라고. 아니, 그녀들이 처음부터 여자였는지 여자가 아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들의 굴종이 그녀들을 아름답게 만들어 주는 건 아니라고 했지. 그건 사랑이 아니라고. 그녀는 아무런 말 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어. 그리고 우리는 함께 잠들었지. 그녀는 내 귀를 깨물고 내 성기에 입을 맞추었어. 난 그녀가 나를 용서했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착각이었어. 그녀는 나를 용서한 게 아니라 그녀에게 굴종한 거야. 그녀를 굴종시키지 않는 나를 두고 그녀는 그녀의 여자에게 입을 맞춘 거야. 그녀의 낮고 거북한 목소리. 마치 기계장치처럼 우수에 찬, 마치 짐승처럼 이성적인. 난 그녀의 여자가 되고 싶었어. 난 그녀에게 굴복하고 그녀에게 학대당하고 그녀에게 찢겨 가랑이를 벌린 채 구역질을 하며 울고 싶었어. 녹기 전에 추락한 눈송이처럼 산산조각난 몸으로 그녀에게 삼켜지고 싶었어.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으니까. 그녀가 죽기를 바라는 만큼 나 역시 그녀에게 살해당하기를 바라고 있었으니까.

어느 날 밤엔 그녀가 그러더군.

그래요. 이젠 당신 말을 이해했어요.

그래. 우린 평소처럼 서로를 안고 사랑하면 되는 거야. 당신도 나도 여자가 될 필요가 없어.

아니에요. 난 이해했어요.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이 세상에는 여자가 있다는 걸, 그렇게 사랑받고 여자가 된 사람이 있다는 걸 무시하고 있는 거예요. 여자가 되는 것과 사랑이 무관하다는 당신의 괴변은 모두 당신의 속내를 감추기 위한 거죠.

아니. 어째서 굴종하고 배를 가르는 게 여자가 되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어째서 배를 가르는 게 굴종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건,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지금도 여자가 되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어디에나 있는데, 무대 위에도 무대 밖에도, 노래 가사에도, 저 창 밖에도 총을 맞고 쓰러져 죽어가는 여배우들이 있는데, 아, 정말이지 어디에나 있는데. 난 당신을 이해할 수가 없어요. 날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렇다고 말해줘요. 그래도 난 당신을 사랑할 수밖에 없으니까.

당신 말이 맞다면 어째서 당신은 나를 여자로 만들지 않는 거야?

그 말만큼은 하지 말았어야 했어. 그녀는 눈을 부릅뜨더니 소리도 없이 울기 시작했어. 내가 당신을 학대한 적이 없다고요? 내가 당신을 여자로 만든 적이 없다고요? 내가 당신의 성기를 물어뜯고 머리칼을 쥐어뜯고, 양의 부드러운 뱃가죽을 가르듯 당신의 다리를 찢어내지 않았다고?

그래. 난 당신에게 학대당한 적이 없어. 당신은 나를 부드럽게 어루만졌고, 나를 아프게 하지도 않았어.

그럼 당신을 탑 안에 가둔 게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당신을 형체도 온기도 없는 별의 죽음 속에 묻어 놓은 게, 당신에게 사랑을 가르친 게 누구라고 생각해?

난 당신 없이도 당신을 사랑할 수 있어. 당신이 없었더라도 난 당신을 사랑했을 거야. 당신이 나를 물어뜯지 않았어도, 당신이 나를 이 등대 안에 가두어두지 않았어도.

여자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힘줄이 도드라진 팔이 사내를 향해 올라갔다가 힘없이 떨어졌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랑을 한 적이 없는 셈이군. 하고, 그녀는 깜짝 놀랄 정도로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사내는 그 말을 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랑을 한 적이 없는 셈이군.

그녀는 다음날 편지를 남기고 사라졌어. 당신이 사랑하는 별이 되겠어요. 그렇게 당신의 사랑이 되겠어요.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나는 당신을 사랑하겠어요. 난 당신을 위해 죽는 거예요.

작은 유리들이 그녀의 부고를 전했어. 그녀는 얼음 사막에서 가장 먼저 해가 떠오르는 남쪽 지역으로 걸어가 안온한 햇빛에 바스러진 얼음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고 하더군. 얼음 사막은 이제 누구나 한 시간 만에 영토의 외곽을 따라 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줄어들었기 때문에 그녀는 같은 날 오후에 발견되었어. 그녀는 오필리아가 되고 싶던 걸까? 그녀는 살인자가 되고 싶던 걸까? 그녀는 선택하고 싶었던 걸까? 그녀는 선택하고 싶지 않았던 걸까? 그렇다면 우리는 사랑을 한 적이 없는 셈이군. 그녀는 그리 많이 훼손되지도 않았다더군. 난 그녀의 소식을 더이상 듣고 싶지 않았지만, 그녀의 윤곽선이, 희미하게 반짝이던 흰 살이, 둥그스름한 눈꺼풀과 콧등이 어떻게 생겼는지, 그게 내가 생각하는 그대로인지 확인하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어. 어쩌면 오래전부터 그녀의 희미한 윤곽선은 그녀의 실종을 예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 내 예감은 틀린 적이 없거든.

유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도 그래요. 비슷한 사람도 알고 있고요. 그는 어렸을 때부터 실패만을 예감했대요. 언젠가부터는 예감조차 없이 실패했대요. 파블로프의 개를 아나요?

그래.

그 개처럼 말이에요. 턱 밑에 강제로 튿어져 벌려진 구멍으로 갈무리 되지 않는 침을 수치스럽게도 질질 흘려대며, 구멍을 닫아 보려고 그건 그의 의지가 아니라고 구속구에 얽혀든 몸을 발발거리며 컹컹거려도 입마개 아래로 턱 아래로 무언가가 흐르지 말아야 할 곳으로 새어나가서는 안되는 곳으로 생의 피부가 드러나버린 곳으로 수치스러운 타액을 질질대며, 무력감에 온몸을 바들바들 떨면서 종소리만으로 죽어가던 그 삼백 마리의 개들처럼요. 실패는 그의 존재보다도 앞서 있었죠.

어린 유리들은 모든 것을 이야기해 주었어. 여느 익사체와 달리 그녀는 찬물 속에서 놀랍도록 정교한 생김을 그대로 유지한 채, 마치 박제된 인형처럼 죽어 있었다고. 놀란 사람들이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인공호흡을 하려 할 정도로. 그러나 그녀의 심장은 이미 멈춘 지 오래였다고. 그녀의 단단한 피부, 새까만 입술과 날카로운 코끝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나자, 그녀의 희미하고 부드러운 피부, 붉은 입술과 둥근 코끝은 순식간에 거두어지는 겨울 안개처럼 사라지고 말았어. 난 더 이상 그녀의 얼굴을 떠올릴 수 없었어. 유리들이 이야기하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다른 여자처럼 생소했지.

그래, 그렇게 그녀는 여자가 되었어. 끝내 그녀를 난도질하지도 물어뜯지도 않는 나를 두고 그녀는 사랑을 위해 죽었어. 그녀는 그녀 스스로를 여자로 만들었어. 그래고 난 그녀의 여자가 되었어. 난 이제 헷갈려. 그렇다면 우리는 사랑을 한 적이 없는 셈이군. 그녀의 목소리라기에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낮은 음성, 그녀의 입술과 함께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던 음절들은 누구의 목소리였을까? 그건 내 목소리였을까? 그게 아니라면,

사내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랑을 한 적이 없는 셈이군. 하고, 사내는 깜짝 놀랄 정도로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너는 사내를 끌어안지도, 걷어차지도 않고 그의 흐느낌을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너는 언제든지 떠나도 좋아. 나를 여자로 만들어줄 필요도 없어.

얼굴이 붉은 여자아이가 네 작은 손을 잡고 어서 가자고 했을 때 네겐 어떠한 두려움도 없었다. 너는 스스로도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충만한 안도감을 느꼈다. 그녀의 손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차가웠고 그 냉기는 네가 살아 있음을 지지하고 있었으므로. 선뜩한 고통으로 네가 피부를 가지고 있음을, 너의 경계가 이곳까지임을 일러주는 고통처럼. 너는 소녀의 선뜩함으로 네 몸을 느끼며 그녀에게 몸을 맡기었다. 너희는 걷지도 않고 몇 개의 방을 가로질러갔다. 어린 관리들이 목을 매곤 하는 캐비닛들을 지나쳐 역병에 걸린 환자의 비명을 이기지 못해 그녀와 입을 맞추고 만 심약한 의사의 진료실을 지나쳐 몽중에 아이를 낳은 성모의 감실을 지나치고 너희들이, 아니, 너희들에게 도달한 것은 눈부시게 희고 축축한 사막이었다.

Series Navigation<< 내일의 하루살이들 8회내일의 하루살이들 10회 >>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