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유리를 대신할 수는 없어요.
그래. 그리고 누구라도 유리를 대신할 수 있지.
당신도?
아니. 이름 없는 사람을 대신 할 수는 없어. 아무도. 그게 유리라도.
우리는 영영 뒤집어질 수 없을 것이다. 추락과 비상, 중력과 부력은 반대항이 될 수 없다. 비틀린 것들은 기울어진 채로 떨어지고 있다. 그뿐이다. 사내의 팔목은 상처 하나 없이 깨끗했다. 우리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꿈 속에서 유리는 하얀 달을 등에 이고 방 안에 누워 있는 유리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희멀건한 눈 속에서 벌벌 떨고 있는 유리의 입술이 속삭였다.
내일, 나를 눈 속에 묻어줘. 눈과 함께 불태워줘. 결정마다 차오른 음절들이 언어로 흘러가버리기 전에.
안돼. 너는 거짓말쟁이잖아.
너희는 서로에게 유일하였으나 언제나 진실한 것은 아니었다. 유리는 유리에게 일러 주었다. 너는 내게 유일하지만 전부인 건 아니야.
이야기는 붕괴되고 있었다. 살과 살의 경계를 잃는 순간, 억지로 접합시키며 분리시켜 놓았던 끈을 잃어버리는 순간, 더 이상 살아남을 수 없는거야. 정오가 무엇인지 묻던 말을 기억해? 난 점의 시간과 선의 시간이라고 구분해. 정오는 존재하는 시간일까? 점을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정오를 겪을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 시간이라는 건 무수한 점들의 집합에 불과하니까. 선의 시간을 믿는다면 점은 존재하지 않는 허구에 불과할 거야. 선의 시간은 이어진 기간일 뿐이니까. 단 하나의 시점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추상적인 개념에 불과한 거지.
유리, 내게는 새로운 이름이 필요해. 너희들과 같은 이름으로 살아갈 수는 없어. 나는 더 이상 세계에 대해 무엇도 알지 못한 채로 끊임없이 흘러들고 흘러드는 유리 속에 갇힌 채로 죽게 되는 걸까? 이대로 모든 하루들이 거대한 유리의 방으로
흘러들게 되는 걸까?
그러면 무엇이 남을까. 유리, 기억해? 너는 얼음사막에서 태어난 아이야.
응.
유리, 유리,
사내는 유리의 어깨를 흔들며 소리쳤다. 유리, 일어나렴.
사내의 뒤편에는 다섯명의 아이들이 있었다. 안녕, 안녕, 안녕, 안녕, 안녕, 찍, 찍, 찍, 찍, 찍, 유리는 쥐의 머리를 매단 열 개의 다리들을 보았다. 각자 두 개의 다리로 머리를 지탱하고 서 있는 그들은 모두 사람이었다.
너는 유리야, 그렇지?
주먹만큼 튀어나온 주둥이에서 물음이 새어나왔다.
사람과 짐승의 차이는 뭘까? 우리가 속해 있는 부류가 사람이라는 거.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인간다운 행위는 짐승 역시 할 수 있는 일이다. 펭귄은 인간답게 자식을 돌보고 원숭이는 인간답게 장례를 치르며 개는 인간답게 사랑하고 늑대는 인간답게 증오한다. 소는 인간답게 오염시키고 돌고래는 인간답게 겁간한다. 펄펄 끓는 독성물질에서 일구어진 땅은 누구의 편도 들지 않는다.
그래, 그래도 사람이 특별한 건 살아있기 때문이야. 사람은 서로에게 기대고 하소연하고 서로를 들어주지. 우리는 서로의 곁에서 한가한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유일한 종일지도 몰라. 그렇지만 소리, 그것도 살아있어야 가능한 일이야. 삶을 포기한 사람들은 모두 바깥으로 쫓겨난단다. 누구도 그들을 들어주지도 안아주지도 않을거야. 어떠한 짐승도 네 편이 되어 주지 않을 거란다. 그러니 얼마나 멀리 나가든 꼭 돌아오렴. 생의 편으로.
멀어지며 가까워지는 건 어디에도 없다. 너는 한없이 멀어지거나 한없이 가까워지는 무언가를 좇아 살아갈 뿐이었다. 바깥의 세계 역시 마찬가지였다. 넌 내일 무엇이 일어날지는 정확히 알 수 없어도 무엇이 일어나지 않을지만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공중에서 아무리 아름다운 춤을 추어도 다른 나라로 건너갈 수 없었던 발레리나들처럼, 결국 낙하하지도 비상하지도 못했던 이름 없는 춤들처럼 아무리 기다려도 세계는 파래지지 않을 것이다.
돌아가야겠어요.
그래.
붙잡지 않을 건가요?
그래.
사내는 잠시 침묵한 뒤 조심스럽게 물었다. 들리니?
뭐가요?
무엇이든.
들려요.
사내는 서글프게 웃으며 말했다. 그럴 리가. 아무도 듣지 못한단다.
그럼 어째서 물어본 것이냐고 되묻기도 전에 사내가 말을 이었다.
그래도 계속 물어보게 되는구나. 갑작스러운 이야기지만 이젠 다시 대화할 기회가 없을 것 같으니 말하게 해 주렴. 난 연주자란다. 지금도 연주를 계속하고 있지. 오래 전에 함께 서커스에서 생활했던 친구가 귓속에 모래를 부어넣은 뒤부터 계속 같은 소리를 듣게 됐는데, 그걸 부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게 된 거야. 처음엔 그냥 흥얼거리기만 했지. 바이올린으로 연주를 해 보기도 하고. 그런데 그걸론 부족했어. 모두가 부르지 않으면 모두가 듣지 않으면 모든 게 망가져버릴 것만 같았어. 내게 매일같이 들리니? 들리니? 하고 묻던 친구의 말이 이해가 가더구나. 그애도 나랑 같은 걸 들은 거야. 난 그날부터 잠자는 애들의 귓속에 몰래 모래를 집어넣고 다닌단다. 모두 같은 걸 들을 수 있게. 너도 들리니?
아니요. 너는 작게 몸을 떨며 대답했다. 당장이라도 귓속에서 무언가가 폭발할 것만 같았다. 모든 소리가 당신의 울음으로 변해버리면 이제 유리의 이름을 어떻게 물어야 할까.
그래. 노래는 끝났어.
네?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지. 이곳은 더 이상 사막이 아니니까. 귓속에 아무리 많은 모래를 부어보았자 사막의 노래 같은 건 들리지 않는 거야.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까.
귓속이 간질거렸다. 소리는 불안한 마음에 귓바퀴를 매만지며 물었다. 춤을 추며 내리는 눈송이. 점멸하며 사라지는 안팎의 시간. 문이 없는 방들. 피아노 뚜껑 속에서 피어나는 곰팡이들, 퍼렇게 번져가는 꽃들. 무언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해요.
그래? 고맙구나.
유리의 귀에도 모래를 집어넣어도 될까요? 그애에게도 들려주고 싶어요.
괜찮겠니?
유리는 모든 걸 잊는걸요.
그거 부럽구나. 나도 잊고 싶은 건 먼지처럼 많거든.
어쩌면 유리와 함께한 시간은 추억이 아니라 강렬한 예감이었는지도 모른다. 멀어지는 것이 아닌 다가오는 것에 속해 있는 사건이었는지도.
바깥의 방보다 넓은 곳, 각자의 방을 서로로부터 숨기지도 않는 곳, 추억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유리의 방들보다도 많이 살아가는 곳, 소리나 유리와 같은 이름들이 하루보다 긴 세월을 살아내고 그 자취를 매장하는 곳이 있다는 사실 역시, 어쩌면.
사내는 바이올린 연주자였다고 했다. 한때 그의 신체와 가장 밀접한 장소에 맞붙어 있었던 악기는 언젠가부터 그의 몸인양 느껴졌다고 사내는 비밀스럽게 속삭였다.
그때부터는 악기를 다정하게 매만질 수도 섬세하게 그어낼 수도 없었지. 날마다 바이올린을 던져 깨뜨려버리고 싶은 충동이 덮쳐왔어. 실제로 몇 개의 바이올린을 부서뜨렸고, 아마 열 두 번째 바이올린을 사야 할 때에야 그걸 그만 두었던 것 같아.
바이올린을 망가뜨리는 일을요?
아니. 악기를 켜는 일. 나는 더 이상 내 몸을 만질 자신이 없었던 거야.
기적에 감사하며 흘렸던 눈물이 부끄럽게도 너에겐 아무런 기적도 일어나지 않았고 축제는 먼 곳에서 이름을 얻은 달처럼 아득하게 일렁일 뿐이었다.
우리는 너를 부러워하고 있어. 가장 생생한 유리를 가지고 있는 건 너 뿐이니까. 바깥으로 나오기 전까지 너는 유리와 함께 유리의 일몰을 지새웠지.
그건 당신들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글쎄. 우리는 오래전에 유리를 잃어버렸어. 우리는 유리라고 불리고 그래서 유리는 어찌할 수 없는 우리의 본질인데도 말이야. 너는 유리와 가장 가까이에 있었지.
유리들의 천문대에는 별들의 좌표처럼 보이는 숫자들이 사방에 적혀 있었다. 수줍고 대답하게 피어나는 검은 곰팡이처럼. 사내는 네 머리맡에서 망원경의 끝부분에 눈을 대고 네겐 보이지 않는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공포에 까무러치는 숱한 별들은 너희가 온 곳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장소 없이 서성이는 하루를 포착하지 못할 것이다. 너희가 발견하지 못한 별들은 너희를 응시하고 있지 않다.
사내가 중얼거렸다. 네가 온 곳 말이야.
유리의 방이요?
아니, 너와 같은 사람들이 모여들던 곳.
여기요?
아니, 그보다 이전에.
얼음사막이요?
아니, 그보단 이후에.
너는 그제서야 사내가 바깥의 방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곳을 알고 있나요? 그곳을 드나드는 사람들도?
사내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아는 건 내가 유리이기 전부터 그곳을 알던 여자가 있었다는 것 뿐이야.
넌 늙은 여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녀도 한때 사춘기를 보내듯 바깥을 경험했다던 말. 아직 굽지 않은 허리로, 구부러지지 않은 두 다리로 바깥을 쏘다녔다는 말, 아무도 그녀를 의심하지 않았다는 말, 영화배우였다던 그녀, 텅 빈 프레임 너머에서 일생을 속아 허우적거렸다던 그녀, 사랑하는 남자를 잃었다던 그녀, 약속을 잃었다던 그녀, 그래서 차라리 홀가분하다던 그녀, 결국 그녀의 좁고 퀴퀴한 바깥으로 되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고 말하던, 너는 여자의 청춘이 풍겼을 지독하고 풍만한 향기를 떠올렸다.
당신, 혹시 영화를 찍은 적이 있나요?
사내는 무언가를 예감한 듯 서글픈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의 피부에서 득시글거리던 쥐의 울음소리가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정체를 들켜버린 가면 속 개구리가 왕자로 변하듯 사내는 부드럽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유리, 넌 꿈을 꾸고 있어.
당신은 유리가 아니에요.
살점이 되어버린 가면은 오롯한 피부인가? 일생 동안 떼어내지 않는 가면은 불구인가? 비정형의 머리가 우주에 떨어진 물방울처럼 일렁거린다. 쥐의 울음은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네가 캐묻고 있었던 것은 너의 비밀도 사내의 비밀도 아니었는데. 어째서 이렇게 되어버린 것일까. 너는 더 이상 알고 싶지 않았다. 증명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야, 무언가를 정당화하려고 하는 순간 너희의 존재는. 거짓이 아닌 말을 꺼내려고 하는 순간 너희의 의미는. 너는 사내에게 애걸하듯 말했다.
괜찮아요. 다 이해했어요. 그만해요.
사내는 상냥한 목소리로, 자장가처럼 낮고 부드러운 언어를 내뱉었다. 우리는 유리가 아니라고. 우리가 간신히 매달려 있던 낯선 언어는 결국 우리의 것이 아니라고. 너는 신비롭고 매혹적인 바깥의 어휘들을 서서히 잊어간다. 내게 남은 것은 익숙하고 하잘 것 없는 내부의 언어뿐이다. 뱃속에 늘러붙은, 유치하고 지긋지긋한 언어의 찌꺼기뿐이다.
내가 올려다보던 별은 야광별이야. 자, 봐. 망원경 같은 게 없어도 얼마든지 볼 수 있어. 그건 어떤 약속도 아니고, 기원도 아니야. 먼 곳에서 죽음을 이겨내고 너에게 도달한 빛의 전설 같은 걸 믿을 나이는 지나지 않았어. 자, 봐. 이건 지금 실재하는 빛이야. 별은 죽지 않았고, 너 역시. 우리가 정확하게 같은 별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사내는 망원경을 돌려, 반대쪽 렌즈에 달라붙어 있는 야광별 스티커들을 보여주었다. 뭉그러진 끝, 어슴푸레한 빛, 손때가 타 거뭇한 표면, 접착제가 떨어져 나가 조금 접힌 경계선, 우리는 같은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의 눈 속에 자리잡은 표상에는 한 치의 오차도 없다는 것을 너는 알 수 있었다. 사내는 뱀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았다. 그에게서는 쥐떼들의 기묘한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지도 않았다. 그는 너와 같이 평범한 사람이었다. 어떠한 비밀도 숨기고 있지 않은. 우리가 동경하던 신비는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우리에게는 남에게 훔쳐온 어휘들을 가둘 지하실조차 없었다.
간신히 붙들고 있던 이상한 어휘들이, 너를 다른 세상으로 데려다주던, 아픈 향기를 풍기던 언어들이 사라져간다. 너희를 유리로 결속시켜주던 어휘들, 너희의 신비롭고 매혹적인 결속은 느슨하게 풀어지고 남은 것은 너희를 보잘 것 없는 야광별 스티커로 묶어주는 평범한 어휘들뿐이다. 일상조차 기록하고 싶지 않아 하는, 더는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더는 기억하지 않아도 기억할 수 있는 어휘들만이 너희들에게 주어진 절망적인 언어이다.
꿈 속에서 너는 유리의 마른 두 다리를 정성껏 잘라내고 입을 헤 벌린 여자를 끌어안았다. 입을 꼭 다문 여자에게 두 다리를 정성껏 매달고 말이 없는 유리를 끌어 안았다.
난 예뻐본 적이 없었어. 늙은 여자가 돌연 네게 말했다. 어두운 서재에서 책장에 등을 기대고 앉아 함께 잠들던 밤이었다.
괜찮아요. 나도 어린시절을 가져본 적이 없어요.
그건 다르지. 넌 나보다 훨씬 어리잖니.
넌 돌연 짐작하고 말았다. 그녀가 찍었던 영화는 누구의 눈에도 닿지 않았다고. 그녀는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와 약속한 남자가 유령이 되었다고 증언했지만, 기실 유령조차도 그녀를 바라보지 않았다고. 유령조차 바라보지 않을 정도로 여자는 볼품없었던 것이다. 넌 그녀가 묘사했던 빛나던 순간들, 아름다운 추억들이 모두 그녀의 꿈에 불과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는 꿈을 살 수 없었다. 그것은 너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그녀는 너와의 새로운 결속을 바라는 것인 지도 몰랐다. 거짓을 진실로 만들 수 없는 자들, 실패한 거짓말쟁이들의 결속을, 꿈을 살지 못하는 이상주의자들의 결속을.
너는 아직 유리와의 하루를 포기할 수 없었다. 얼음사막과 쥐떼들, 피리 부는 사내의 노래와 우주선, 외계와 우주, 은하와 야광별, 모든 어휘들을 잊더라도 아직 버릴 수 없는 꿈이 있었다. 너는 그녀에게 동조하지 않았고,
침묵이 번져갔다. 네가 그녀와의 침묵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습관을 버리지 못한 여자가 돌연 중얼거렸다. 네게 배신당할 것을 짐작한 듯 네 눈을 피해 어둠에 움푹 꺼진 책장을 들여다보며.
네게 어린 시절이 없듯, 내겐 젊은 시절이 없었지. 난 언제나 늙은 채로 살고 있었어. 그건 아무것도 찬란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는 뜻이야. 가장 절망적인 비극에서도 악취를 맡을 수 없었다는 뜻이야. 그렇다고 비참한 건 아니었어. 화려한 어휘들은 내게 어울리지 않았으니까, 설령 그게 절망을 수식하는 말이라고 해도. 찬란하지 않은 이십대를 보내면서도 나는 비참하다고 느낀 적이 없었어. 그저 남들과 함께 늙어가면 그만일 거라고 생각했지. 추억을 잃어버린 사람들과 나는 똑같아질 거라고. 조금만 참으면 모두 같아질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틀렸던거야. 모두가 과거를 돌아보며 몇 번이고 가장 아름다웠던 나이를 되사는 동안 나는 시선을 둘 데가 없었어.
그럼 당신은 미래를 살고 있나요?
아니, 소리. 어쩌면 진자처럼 하루를 몇 번이고 횡단하면서 걸어갈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 그게 제자리 걸음이라고 해도, 멈추지 않고 걸으면 앞으로 나아간다는 상상을 할 수도 있으니까. 그걸로 끝냈어야 했어.
소리는 여자의 말에 대꾸하는 척하며, 그와 같은 리듬으로 묵혀왔던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얼음사막의 이야기를 아나요? 난 그곳에 내 어린시절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매일 꿈속에서 얼음사막이라는 말이 맴돌았고 깨어 있을 때는 누군가가 내 귓속에 속삭였거든요. 너는 얼음사막의 아이라고.
내가 잘못한 걸까? 난 그저 남들 같은 추억을 가지고 싶었던 것뿐인데. 적당히 짧고 빛나는, 평범하고 찬란한 순간들 말이야.
유리를 만난 것은 아마 그 무렵이었을 거예요. 난 매일 그애에게 물어봤죠. 너는 어디서 왔냐고. 얼음사막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냐고. 넌 얼음사막의 아이가 아니냐고. 그 애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어요.
기억을 갖게 되고서야 알았어. 기억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해도, 찬란할 수 있었던 순간들은 모두 지나간 뒤였다는 걸. 난 이 어둡고 비좁은 서재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글자들만을 기억하며 살아가고 있는데, 이건 너무 초라하지 않니? 이건 추억이 아닌 것 같아. 난 밤의 그늘에 숨어 유성을 훔쳐보는 소녀처럼 이곳의 기억들을 어루만질 수 없어.
내가 살아왔던 모든 하루들을 포기했어요. 저물어가는 해들, 노을과 이별, 빈 자리와 사라진 약속 모든 것을 버렸어요. 그래도 괜찮았어요. 곧 미래를 갖게 될 테니까. 하루를 넘어 도달한 곳에는 얼음사막이 있을 테니까.
얼음사막?
응. 당신도 들어본 적이 있나요?
그래. 나도 그곳으로 나가 본 적이 있지. 예전에도 얘기한 적이 있지 않니? 여기에 모여드는 사람들은 모두 바깥을 경험해 본 적이 있다고.
당신도 유리들을 만났나요?
아니. 내가 나갔을 때, 그런 아이는 없었단다. 그곳에서 끝나지 않는 영화를 찍고 돌아왔다고 말하지 않았니? 감독은 죽어버렸고 그가 한 번도 촬영한 적 없는 영상들은 모두 흩어져 버렸다고. 더 이상 그 때 외웠던 대사들을 기억조차 할 수 없다고. 내가 경험한 모든 순간들은 모두 망가져버렸다고 말이야.
늙은 여자는 소리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나, 언젠가 방에 사는 사람들을 모두 데리고 연극을 하고 싶어.
연극이요?
응. 내가 배우 일을 했었다고 예전에 말했잖아.
한 명의 관객도 갖지 못한 여자를 배우라고 부를 수 있는지 되물을 정도로 잔인하지는 않았다.
이미지들이 떠올라. 별들처럼 반짝거리는 환영들이. 이 연극엔 배우들이 아주 많이 필요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