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는 사람이고, 너희들은 모두 유리고. 그래도 유리, 나는 아주 가까이에 있는 외로움, 불안, 서글픔처럼 단단한 감정들만 알고 있으니까. 이름이나 색, 향기를 표현하는 구체적인 어휘들은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 그래서 논리적으로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유리, 나는 내가 불안하고 외로운 만큼, 서글픈 만큼, 네가 유리로 있어줬으면 좋겠어. 너는 어제를 잊어도. 네게 어제는 영원히 사라져버렸어도, 그래도 유리를 기억해줬으면 좋겠어. 유리, 하는 부름으로, 그게 아니라도, 응, 하는 대꾸로라도. 유리, 우리는 어째서 두 개의 다리를 가지고 태어난걸까. 여자의 말처럼 너는 언젠가 두 개의 다리로 걸어서, 그게 아니면 기어서라도 방 밖으로 나서게 될까? 같은 바깥을 사는 이들의 자리에 함께 머무르면서, 너도 나를 무시하게 될까? 너와 내가 함께 보냈던 방들을 모두 잊고 새로운 바깥을 살게 될까. 소리, 모르겠어, 네가 하는 말은 도무지 하나도 이해할 수가 없어. 네가 말과 말을 엮어나가는 방식은 너무 독특해서 알아듣기가 힘들어. 뭐라고? 유리,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어? 누가, 오늘이 시작되기 전에 이곳에 들어온 적이 있어? 아니, 그런건 아니지만 그냥 알 수 있어. 언어를 배운 적 없이도 너와 같은 어조로 말을 할 수 있듯이. 네가 나를 유리라고 부르리라는 것을 어렴풋이 예감하고 있었듯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니?
글쎄, 네가 오기 전까지는 그냥 흙을 쓸고 있었어. 그런데 네가 내 이름을 불렀을 때, 그때 어쩌면 예전부터 네 말을 듣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어. 유리, 네 이름이 유리니? 하는 물음을 아주 오래 전부터.
소리는 유리의 길게 뻗은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유리는 몸을 움츠리며 어깨를 단단하게 굳혔다. 제 뒤쪽으로 다가오는 그림자를 맹수라고 여기고 파드득 도망치는 새들의 오랜 습성처럼. 두 다리 없이 사는 삶을 알고 있어, 유리. 소리는 늙은 여자의 곁에서 끄적거린 시구를 유리에게 건네었다. 물없이 잠기는 생도 있다. 누구도 훔쳐가지 않는 생이 있다. 추운 몸을 덮을 피부조차 없이 가만한 구석을 견디는 생이 있다. 차오르는 물의 정체를 알지 못하는 생도 있다. 이름 모를 병을 앓는 생도 있다. 이건 추억이야, 유리. 추억? 응. 어제보다 무서운 거, 내일보다 가깝고. 너희는 서로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숨과 살, 피와 물이 지나가는 가느다란 통로 근처에서 움틀거리는 맥박 소리가 들렸다. 유리는 소리의 머리칼을 쓰다듬고 있었다. 그녀는 한 번도 소리를 밀치지 않았다. 겁을 먹고 비명을 지르지도 않았다. 그녀의 말처럼, 언제까지고 소리가 이곳에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너를 끌어안았다.
늙은 여자가 건네주는 살을 받아먹으면서 소리는 나날이 살이 올랐다. 목 뒤와 겨드랑이, 허벅지 위쪽에는 덜 아문 상처처럼 붉고 여린 튼살자국이 가득했다. 생과 생의 경계에는 무엇이 있을까. 우산과 사람의 경계에는. 소리는 허벅지 안쪽의 튼살을 만져 보았다.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았다.
꿈속에서 너는 나선형의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경사가 비틀린 길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아래쪽으로 떨어지게끔 만들어져 있었다. 계단의 밑면에 갯벌레처럼 늘러붙은 여자들이 상반신을 밀며 기어가고 있었다. 여자는 바닥을 애무하듯 매만지며 몸을 움틀거렸다. 숱한 구석보다 비참한 밑면에서 여자는 흐느끼고 있었다.
바닥을 기어다니는 상상을 할 필요는 없어. 평생을 프랑스 군인으로 살아온 남자가 죽었을 때, 전우들은 폴란드인이 죽었다고 외쳤어. 그게 그 남자가 들은 마지막 속삭임이었지. 사실 사내는 프랑스인이었는데… 그런 생도 있는거야.
소리는 고개를 숙이고 바닥에 내려앉은 오랜 물기를 더듬거렸다. 물얼룩은 더 이상 축축하지도 않았다. 말라버린 물자욱이 거친 손가락 위를 둥글게 맴돌았다. 여자는 발갛게 달아오른 몸의 밑면을 보여주며 말했다. 나가려거든 나가렴. 두 발로 걸어서 나가. 아무도 너를 막지 않을 거야. 누구도 내 두 다리를 잘라내지 않은 것처럼 어느 누구도 너를 이곳에 가두지 않았으니까. 그럼 나는 왜 여기에 있는 건데요? 글쎄, 나는 어째서 너와 같은 언어를 쓸 수 있는 걸까. 사람이 아니라면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필요도 없을 텐데 말이야.
꿈속의 여자는 계단의 밑면에서 중얼거렸다.
여기는 진짜 바깥이 아니야. 여자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너는 오히려 좀 늦된 편이지. 누구나 한 번쯤은 바깥을 살다 온단다. 바깥에서 나는 배우였어. 나를 캐스팅한 감독은 내게 고백하듯 속삭였단다. 내 극본에는 등장인물도 별로 없고 이렇다할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답니다. 그래도 내 이야기를 살아주겠어요? 나와 함께 전개도 절정도 없는 시간을 보내주겠어요?
얼마나 오래? 당신은 나를 마주치기 전부터 이곳에 존재했나요?
소리, 그건 나도 기억하지 못해. 런닝타임은 정해지지 않았어. 그는 최대한 오랜시간을, 가능하면 평생을 담고 싶다고 했지.
그런데 왜 다시 돌아왔나요?
감독이 죽었거든. 영화 촬영에 들어간지 한 달도 안되어서 말이야.
여자는 울지도, 얼굴을 찡그리지도 않았다. 그저 긴 산문체의 대사를 외우듯 고저 변화 없는 톤으로 읊조릴 뿐이었다.
징집되어 끌려간 전쟁에서 죽었지. 그가 죽기 전에 내게 보냈던 편지를 그의 동료라는 사람이 가지고 왔어. 당신의 외국인 남편이 부친 거라고. 우스운 일이지. 그는 이 나라에서 나고 자라서 죽기까지 했는데. 평생 이곳에만 머물던 생이었는데. 그의 부모는 아프리카계 흑인이었거든.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추억이라는 건 대개 비슷하니까.
나도 바깥으로 나가면 당신처럼 이상한 일들을 겪게 될까요?
그렇게 이상할 것도 없어. 사실 자연스럽다는 건 모두 익숙해진 기적들 뿐이니까. 내가 하필 배우가 되었다는 것, 하필 그 사람은 만났고 하필 그 영화를 찍었고 하필 같은 곳으로 돌아와 너를 만난다는 것, 모든 사건들은 무수한 가능성들 중 단 하나의 양태에 불과하지. 상상을 해 봐. 더 많은 일들을 상상할수록 일어날 일들은 기적에 가까워진단다.
소리는 계단들을 내려다보았다. 올라가며 내려가는 계단들. 계단의 바깥은, 계단의 위쪽도 아래쪽도 아닐 것이다. 어서, 소리. 상상을 해 보렴. 계단 위에 올라서서 바라보는 계단은 계단의 밑면에 늘러붙어 감각하는 계단과는 다를 것이다. 층계도 길도 없이 펼쳐진 하나의 평면. 소리는 나선형의 바깥으로 뛰어내렸다. 검은 손톱들이 온몸을 세로 방향으로 할퀴었다. 소리는 상상의 영역 너머로 추락했다. 얼핏 여자의 치마 아래로 내려온 기다란 우산 손잡이를 본 듯 했다. 꿈에서 깨어난 소리는 미로의 길을 따라 돌진하는 대신, 벽을 있는 힘껏 내리쳤다. 스티로폼으로 만들어진 벽은 손쉽게 부서졌다. 하얀 먼지들이 빛의 입자가 되어 나풀거렸다. 빠져나온 바깥은 아득한 밤이었다. 소리는 정신없이 걸었다. 나무들마저 얼어붙어 동면에 들 만큼 추운 밤이었다는 것은 도주와 같은 걸음을 멈추고 난 뒤에야 깨달을 수 있었다. 콧등이 가려웠다. 얼굴을 긁어낸 손톱에서 뭉개져 죽은 하루살이가 묻어나왔다. 여기까지 걸어오는 동안 소리는 얼마나 많은 짐승들의 하루를 죽여온 것일까. 암흑 속에서, 소리의 발은 개미의 행렬을 짓누르고 살해했을지도 모른다. 소리의 상반은 짐작조차 못한 사이에. 소리는 신발을 벗고 맨발로 흙을 밟았다. 발이 견딜 수 없이 근지러웠다. 어두운 탓에 물린 자국은 보이지 않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생물들의 마지막 몸부림은 내일 벽이 밝기 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질지도 모른다. 작은 상처는 금세 낫기 마련이니까. 나무들 속에서 웅크리고 잠들어 있는 생들은 내일로 미루어진 삶의 영역을 미리 꿈꾸고 있을 것이다. 소리는 무엇도 건드리지 않으려 노력하며 숲 속으로 들어갔지만 얇은 거미줄 따위가 얼굴과 손에 달라붙는 것까지 어찌할 수는 없었다. 이잉, 이잉, 하며 멀어지는 울음소리가 도처에서 들려왔다. 소리는 신음을 흘렸다. 맹수들이 저를 피해 달아날 수 있도록. 같은 울음을 우는 사람들은 저를 도와주러 올 수 있도록. 누구라도 소리를 발견할 수 있도록. 다리도 팔도, 어떠한 동체도 없이 굳어 있는 나무의 속살을 파먹던 새까만 벌레가 파드득 날아오르며 소리의 시야를 가렸다. 벌레는 소리의 검지손가락만했다. 여러 층으로 쌓인 겹눈이 소리를 노려보았으나 소리는 너무 작은 얼굴에 담겨 있는 표정을 읽어낼 수 없었다. 소리와는 다른 풍경을 보고 있을 겹눈의 시점을 소리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너는 걸었다. 갈수록 희끄무레해지는 밤의 뒤를 쫓아 앞으로, 혹은 뒤로 걸어갔다. 발 아래 미끄덩하고 꿈틀거리는 불쾌한 감촉에 헛구역질을 하면서도 앞으로 걸었다. 능선에 올라오자 얼핏 말간 빛무리가 보이는 듯했다. 저 빛까지 다가가면 무엇이든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귀를 닫고 가장 감미로운 빛의 속살로 파고드는 한밤의 날벌레들처럼 소리는 빛을 따라 걸었다. 희미한 열과 빛을 발하는 소리의 몸 위로 달겨들어 죽어가는 벌레들의 존재를 잊었고, 발 밑에서 으무러지는 낯 모를 생들의 존재를 잊었으며, 양 손에 감겨든 거미의 흔적들을, 그늘을, 그림자를, 어둠을, 침묵을, 울음을 모두 잊었다. 빛은 갈수록 넓적하고 누렇게 변했다. 나뭇가지에 긁힌 종아리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을 때, 소리는 뜨끈한 빛을 정면으로 받으며 서 있었다. 빛의 그림자는 붉었다. 길게 퍼진 빛의 그림자가 손을 흔들 듯 소리의 몸을 따라 부드럽게 일렁였다. 등대 위쪽에서 단단한 굽이 바닥과 맞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계단을 내려온 사내는 소리의 손을 붙잡고 왜 이제야 온 거냐고 물었다. 유리, 우리가 얼마나 찾았는지 아니.
네? 유리요?
그래, 유리. 얼음 사막의 모든 사람들이 너를 기다리고 있었단다.
저는 유리가 아니에요. 유리는 아마, 다른 곳에 있을 거예요.
사내는 그을은 얼굴을 쓸어 마른 세수를 하며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니, 유리. 유리의 기억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건 너잖니. 어서, 유리. 우리는 너를 기다리고 있었단다. 사내는 길게 찢어진 입을 벌렸다. 눈매까지 늘어난 입 속에서 찍, 찍거리는 울음소리들이 쏟아져 나왔다. 마른 비늘이 튿어지며 떨어져나왔다. 지켜보고 있었어.
나는, 나는 잘 모르겠어요.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너도 알잖니. 유리는 얼음사막에서 온 아이야.
알아요.
그래, 그러니 너는 유리야.
당신은?
물론 나도 마찬가지지. 너만큼 오랫동안 유리인 건 아니겠지만.
이해할 수 없어요. 내가 유리의 방들을 아무리 많이 알고 있다고 해서, 그게 내 방인 건 아닌걸요. 유리가 알지 못하는 유리의 날들까지 기억하고 있다고 해서, 내가 그 애보다 더 유리에 가까운 존재인 건 아니잖아요.
유리, 사람은 기억이란다. 우리는 우리가 기억하는 존재로 불리는 거야. 안쪽에서는 어땠는지 몰라도 바깥에선 모두가 그렇게 살아간단다. 유리. 너는 네 이름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어.
뱀의 비늘 속에서 살을 파먹고 나온 쥐들은 바닥으로 떨어져 머리를 부딪히며 죽어갔다. 기겁을 하며 다시 사내의 살 속으로 파고들어가는 쥐들은 땅굴을 파듯 사내의 가장 깊은 곳까지 내려갔다. 소리는 사내가 지르지 않는 비명을 느낄 수 있었다. 사내의 사타구니에서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어서, 유리. 여기에는 너 말고도 많은 유리들이 살아가고 있단다. 다들 너를 기다리고 있었어. 누구보다도 오랫동안 유리를 알아온 너를 말이야. 더 이상 얼음도 사막도 아닌 얼음사막에서, 나무와 짐승, 수많은 생의 얼룩으로 더럽혀진 이곳에서 너를 기다렸단다.
유리는 밧줄처럼 얽은 사내의 손을 잡고 등대 위로 올라갔다. 작은 공간 안에는 성인 남자 한 명이 겨우 누울 수 있을 정도의 지저분한 침대와 탁자가 있었다. 탁자 위에는 부서진 비스킷과 찻잔이 있었다. 찻잔에서는 여직 부연 김이 나오고 있었다. 김이 올라가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들자, 누런 물얼룩이 군데군데 들어 있고 푸르죽죽한 곰팡이가 피어난 천장이 보였다. 등대 속 방은 지나치게 더러웠다. 유리는 밝게 빛나는 사물의 속이 이토록 지저분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해 본적이 없었다. 탁자 위에는 빛을 조종하는 용도로 보이는 계기판과 버튼들이 놓여 있었으나 소리는 그것들의 정확한 정체와 목적, 기능을 읽어낼 수 없었다. 그보다는 펼쳐진 노트 속에 웅얼거리는 음성처럼 작게 휘갈겨진 낙서에 더 관심이 갔다.
아저씨, 이게 뭐예요?
이거?
사내는 쑥스러운 듯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별들을 그린 거야. 여기에선 별들이 눈송이처럼 많이 보이거든.
천장이 뚫린 방 안에서 별들을 세며 잠들던 기억이 먼지처럼 일어나 목 안쪽을 간지럽혔다.
유리도 별을 좋아했어요.
사내는 짐짓 놀란 듯 말했다. 그렇구나. 눈을 좋아하듯이 별도 좋아했니?
네. 눈과 별이 함께 보이는 날은 거의 없었으니까요. 눈이 쌓여 있는 방 안에서는 눈을 가지고 하루를 보냈고 천장이 뚫려 있는 날에는 하늘에서 무언가 떠오르기만을 기다리다가 오늘을 마치곤 했어요.
그래.
당신도 유리라면 알고 있는 이야기 아닌가요?
사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우리는 같지 않단다. 우리가 모두 같은 유리라면 어떻게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있겠니. 언제나 같은 시간에 같은 말을 중얼거릴텐데. 우린 서로의 말을 들을 수조차 없을걸. 우리는 그러니까, 다른 방에서 살아간 유리들만큼이나 다른 존재란다. 그렇지 않다면 속엣말을 하는 걸로도 충분했을테지.
등대의 불빛은 너풀거리는 날개짓을 향해 뻗어나가고 있었다. 문드러지듯 엉겨붙은몸짓들은 이름도 소리도 없이 서로의 몸에 끈적한 빛을 덧칠하고 있었다.
우리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사라지는지를 당신은 알고 있나요? 죽기 전에 딱 한번 날개를 펼치는 구석자리의 생물이 찍, 찍하고 울었다. 무언가 애틋한 마음이 차올라서 유리는 눈을 감았다. 벌써 유리는 소리의 이름을 잊었다.
이제 더는 현, 너를 기다리고 있었어. 하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사내는 유리의 어깨를 매만졌다. 괜찮아. 누구도 너를 기억하지 못할 테니까. 누구라도 너를 기억할 테니까. 당신도 유리가 되어 줄건가요? 사내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유리는 알고 있었다. 우리는 입을 맞추었다. 다섯 마리의 쥐들이 사내의 입속에서 유리의 목구멍 속으로 떼를 지어 흘러가는 소리를, 찍, 찍찍, 찍, 들을 수 있었다. 유리는 끈적하고 뜨끈한 유리의 우리 속에서 숨을 내쉬었다. 누구라도 들을 수 있게. 누구도 들을 수 없게. 사내는 유리의 귓속에 등대의 비밀을 속삭였다. 이 등대는 0시 0분 0초를 포착해내기 위한 장치야. 너는 하루를 넘겨본 적이 있니?
네.
그래. 이곳의 유리들은 모두 마찬가지야. 세어본 적은 없지만, 나는 아마 만 번도 넘는 하루들을 지나오지 않았을까. 그런데 이상하지. 한 번도 하루의 경계를 마주한 적이 없는 것 같아. 너는 자정이 어떤 색과 냄새를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니?
아니요.
이상한 일이지. 어쩌면 우리는 단 한번도 자정을 넘겨본 적이 없는 것 아닐까? 우리는 읽어낼 수 없는 빈 시간들을 모두 잃어버리면서 살아온 것은 아닐까? 그걸 찍어보고 싶어. 잃어버린 순간을 잡아내면 거기에서 무언가 읽어낼 수 있을 것 같아.
마음대로 하루를 멈출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렇다면 0시 0분이 하루의 시작인지 끝인지 따위의 답 없는 고민을 하지 않아도 좋을텐데.
자살은 천재들만 할 수 있는 일종의 상징과 같은 거란다.
상징?
그래. 미로 속에 있는 유리들이 매일 죽음을 맞이하듯이.
제 손으로 귀를 자르고 머리를 깨트린 화가도? 그의 최후도 작품이었나요?
너, 그런 비유는 어디에서 배웠니?
책에서요. 늙은 여자를 아나요? 그녀가 안내해준 서재에는 내가 지새온 밤보다도 많은 책들이 있었어요. 그녀는 글을 읽지 못했지만 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풀잎을 뜯어내는 그녀의 곁에서 책을 읽어 주곤 했죠. 그 책에서는 자살한 화가의 귀를 잘라낸건 그의 손이 아니라 의사의 진단이라고 했어요. 그러고보니 그도 글을 썼지요. 그의 그림만큼이나 구체적이고 단단한 글을.
늘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시인 여자를 말하는 거라면, 그래 그녀는 나와 비슷한 시기에 여기로 나왔단다. 그때 우리는 아직 유리가 아니었지. 우리는 서로를 그저 당신, 이라고 부를 뿐이었단다. 유리라는 이름은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발명품이야.
당신의 말에는 아귀가 맞지 않는 구석이 있는 것 같아요. 잘은 모르겠지만.
어서 자렴. 내일은 오늘보다 많은 날들을 기억하면서 살아가야 할 테니까.
사내의 뱀과 같은 얼굴은 언젠가 꾸었던 꿈과 같이 미끄러웠다. 비늘은 부드럽진 않았지만 향기로운 흙냄새가 났다. 살아 있는 살의 움틀거리는 떨림이 느껴졌다. 당신은 0시 0분을 기다리고 있나요?
그래.
만약 영영 0시 0분을 포착해내지 못한다면 어쩌면 0시 0분이 없는 거라면
그럼?
그렇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시간은 모두 거짓인가요?
사내는 대답하지 않았다. 등대의 불빛을 푸르죽죽하게 밝혀진 구름으로 둥글게 펼쳐 바를 뿐이었다. 유리는 그의 곁에서 졸음의 전조조차 느끼지 못한 채 잠에 빠져들었다. 우리는 함께 죽어가고 있었다. 그 예감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사방이 어슴푸레했다.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 믿기 어려웠다. 얼음도 모래도 없는 곳이 어째서 얼음사막인 건지 한 번도 유리의 방안에서 잠들어 본 적이 없는 자들이 어째서 유리인 건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없었다. 유리의 이름으로 유리의 기억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유리인 것일까, 네가 알고 있던 유리는 그녀의 방 안에서 마지막 일몰을 맞이하고 있을텐데. 넌 그 방 안에서 어제도 내일도 모른 채 기억 없이 잠자코 사그라져가는 허물이, 기억 없이 죽어가는 그 몸만이 유리라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당신은 어째서 나를 기다려 왔나요.
잠이 오지 않니?
내일 우리는 어디로 갈 건가요.
얼음사막으로 갈 거야.
그리고?
더 바라는 게 있니?
아니요. 당신이 유리라면 다른 대답을 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유리라면 내일을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
유리, 우리는 모두 유리지만 그렇다고 네가 알고 있는 유리인건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