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하루살이들 5회

잘려나간 살점을 입 안에 넣고 짓씹었다. 시큼한 물이 입 속으로 배어들었다. 뜨끈한 체액은 역겹지 않았다. 살점은 누군가의 내부였을 것이다. 유리의 방, 유리의 몸, 유리의 오른팔이었을 것이다. 깨물린 자국이 듬성듬성 얼룩져 있는 유리의 팔목. 유리의 팔에서는 아무런 맛도 나지 않았지만, 오래도록 구워 양념이 되어 있는 살에서는 역하지 않은 비린내가 났다. 소리는 잇새로 끼어드는 살결을 우물우물 씹어 삼켰다. 누군가의 안을 제 안으로, 소리의 바깥을 안으로 삼키는 행위는 방 안쪽의 사람들이 잊어버리는 어제의 기억을 훔쳐내는 일과 비슷하게 여겨졌다.

입맛에 맞나 보구나. 다행이다.

늙은 여자는 애틋한 눈길로 소리를 바라보았다.

정말 다행이야. 네가 고기를 먹을 수 있어서.

고기를 먹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나요?

그래. 여기는 별의 별 사람들이 다 있으니까. 제 것이 아닌 살은 입에도 대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단다. 그런 사람들은 제 허벅지나 엉덩이 살을 조금씩 베어내서 먹기도 해. 날 것으로 한 입에 먹는 사람들도 있고, 공을 들여 훈제를 하거나 양념을 해서 요리해 먹는 사람들도 있단다. 본질적으로 큰 차이는 없을 거야. 대개는 오래도록 굶주린 사람들이 굽지도 않고 생 살을 그냥 물어뜯어 먹고, 아직은 여유가 있는 사람이 살을 음미하면서 먹는단다. 사실 너도 그런 부류일까봐 걱정했거든.

여자는 소리의 팔목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반팔 아래로 노출된 살에는 깨물린 자국이 가득했다.

이건, 먹으려고 한 게 아니에요. 그냥..

그래, 다행이다. 한번 제 살에 맛 들리면 그만둘 수가 없다고 하는데, 그런 작자들은 오래 살지 못한단다. 당연한 일이지. 제 안쪽을 덜어내서 안쪽으로 밀어낸다고 해도 새로 불어나는 건 없을텐데. 얼마나 버티겠니? 그런 작자들은 안팎으로 움큼움큼 뜯겨나가면서 뼈다귀가 되기 십상이지. 사람에게는 바깥이 필요한 거야.

바깥이요.

응. 바깥을 안으로 만들렴. 계속해서 밀어넣다보면 너도 바깥이 뭔지 알게 되지 않을까.

바깥은 이곳이라면서요.

그래, 그래도 너는 이해하지 못하잖니.

맞는 말이었다. 소리는 바깥으로 나온 후에도 바깥을 이해할 수도, 체감할 수도 없었다. 마치 꿈 속에 머물러 있는 듯했다. 개연적으로 느껴졌던 사건들이 물리 법칙의 끈으로부터 벗어나 원하는 방향으로 기어가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일 수 있는 꿈 속에, 소리는 깨어서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꼭꼭 씹어 먹으렴. 네 살은 그렇게 오래도록 깨물진 못했겠지만, 바깥은 아무리 씹어도 아프지 않을 거란다. 그게 네 안으로 들어가서 네 살이 되고 나면 견딜 수 없겠지만.

바깥은 아프지 않은가요?

그럼. 바깥은 가렵지도 않지.

함부로 해도 좋은가요?

늙은 여자는 주름을 당기며 나이프를 쥔 소리의 왼손을 어루만졌다. 그건 네게 달렸지. 바깥과 안을 정확하게 구분할 수 있다면, 뭐 그럴 수도 있겠지. 바깥을 쥐어 뜯어도 안은 아프지 않을 테니까. 그게 아니라면 조심하는 게 좋아. 넌 바깥과 안을 착각한 적이 없었니?

있었어요. 소리는 혀 위에서 움직이는 살점을 접시 위에 뱉어내고 더 큰 소리로 말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안쪽이 바깥이라고, 바깥이 안쪽이라고 생각했어요. 당신도 그런 적이 있나요?

사실 나는, 여자는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꺼내듯 나지막한 소리로 속삭였다. 지금도 헷갈린단다. 네 밖이 내 밖인지, 우리가 정말 같은 바깥을 공유하고 있는 건지.

그럼 당신은 바깥을 먹지 않나요? 그건 당신의 살일지도 모르는데요.

아니, 살은 역겹고 달지. 바깥을 안쪽으로 밀어넣지 않고서는 제 살을 베어먹으면서 움큼움큼 잘려나가는 뼈다귀들과 똑같은 최후를 맞을 수밖에 없단다. 나는 육식을 해. 고기가 없을 때는 식물의 이파리라도 뜯어서 씹어 먹지.

그럼, 그게 안이었다면 어떻게요? 안쪽이 바깥으로 돌아간다면, 바깥이 안이 되어버린다면.

많이 아프겠지. 견딜 수 없을 지도 몰라.

그래서,

그래서 나는 묻지 않는단다. 생각하지도 않고. 그냥 피부에 닿는 것들을 삼키고 볼 뿐이야. 다행히 안쪽보다는 바깥쪽이 더 차게 느껴지니까. 더 차가운 것들을 먹어치우는 거지. 안쪽으로 들어가서 안이 되면 따뜻해지거든. 그건 더 이상 먹지 않는 거야.

그게 단가요?

그래. 오래도록 생각해 봤자 달라질 건 없는 걸. 안도 바깥도 결국에는 안이나 바깥이 될 뿐이니까. 우산을 뒤집는다고 해서 살이 벗겨지지는 않지. 비가 그치지도 않고. 그래도 생각하고 싶거든 더 생각해 보렴. 네가 정답을 찾을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바깥에 적응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하니까. 무언가에 골몰하고 있으면 시간이 더 빠르게 지나갈지도 모르잖니. 그 반대일 수도 있지만.

여자는 소리가 씹다 뱉은 살덩이와 접시를 두고 부엌 안쪽으로 향했다. 소리는 검붉은 체액이 묻은 접시를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으무러진 살덩이를 다시 입 안에 넣고 씹어 삼켰다. 목 안쪽이 뜨끈해졌다.

하루가 지난 살점은 잿빛으로 변해 눅눅한 악취를 풍겼다. 더는 먹을 수 없는 것이다.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인지 소리는 알지 못했지만, 역한 냄새를 삼켜서는 안된다는 사실은 본능적으로 할 수 있었다. 체액은 더 이상 붉지 않았다. 메슥거리는 기분에 소리는 다시 덜 구워진 살점을 냉장고 안으로 미루어 두었다. 냉동될만큼 차지도, 썩어버릴만큼 덥지도 않은 미적지근한 온도에서 살점은 부패를 미룬 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미루어진 것들이 모여 있는 상자 앞에서 유리는 눈을 감고 사라져버린 허기가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렸으나 거북스러운 속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출출하니?

아니요. 소리는 고개를 저었다. 늙은 여자는 태연한 얼굴로 소리를 지나쳐 냉장고 문을 열고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저런, 고기가 상했구나. 이건 먹지 말렴. 여자는 쉬이 가시지 않는 악취를 다시 미루어 두고 소리를 돌아보았다. 뭐, 필요한 거라도 있니? 소리는 여자를 빤히 바라보며 말을 꺼냈다.

당신은 정말 기억하고 있군요. 내가 누군지 아나요?

늙은 여자는 웃으며 말했다. 그래. 너는 날이 저물기 전에 찾아왔지. 같이 저녁을 들었잖니.

이곳에 온 손님을 모두 기억하고 있나요?

그럴 리가. 늙은 여자는 철 없는 어린 아이를 상대하는 것처럼 굴었다. 이곳에는 손님들이 아주 많이 드나든단다. 대개는 내가 일어나기도 전에 사라지니까, 굳이 기억할 필요도 없지. 만약 네가 오늘 냉장고 앞에서 어제 먹은 고기를 뒤적거리고 있지 않았으면 너도 기억 못했을지 몰라. 사실 막 일어났을 때만 해도 너를 초대했다는 사실도 있고 있었단다.

정말요? 당신은 전혀 놀란 것 같지 않았는데요. 나를 처음 보는 것 같지 않았다는 말이에요.

그 고기는 냄새가 아주 고약하니까. 악취는 기억을 되살리는 특효약이지.

저, 이제와서 묻기는 그렇지만, 당신은 나와 같지 않은가요?

유리의 방에는 간혹 눈이 쌓여 있었다. 신발 위에 묻어 있던 눈이 걸음마다 묻어 흘렀다.

바깥의 방은 일종의 게스트하우스와 같았다. 소리가 안쪽의 하루를 마치고 돌아갈 때, 대개 서너명의 사람들이 테이블 위에서 늙은 여자가 차린 채소 혹은 고기를 먹거나 눈을 붙이고 있었다. 바닥은 저마다 다른 방의 일부를 묻혀온 사람들의 발자국으로 지저분했다. 하얀 눈이나 붉은 페인트, 흙과 물기로 어지러진 바닥은 원래의 색깔을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늙은 여자가 관리인 행세를 하고 식사를 대접하기는 했지만, 그녀조차 이곳의 주인은 아니었기 때문에 청소를 하는 사람은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몰랐다. 이곳은 바깥이고, 바깥은 누구의 공간도 아니었다. 누구도 바깥에서 살지는 않았다. 언제부터 여기에 살았어요? 하고 물었을 때, 늙은 여자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누구도 여기서 살지 않는다고. 그건 이곳이 바깥이기 때문인가요? 그래, 여기는 집이 아니니까. 그건 너무 쓸쓸하지 않나요. 나는 거의 매일같이 이곳으로 돌아오는데, 당신도 마찬가지잖아요. 그래, 그래도 이건 누구의 집도 아니야. 어째서요? 지붕이 없잖니. 지붕 없는 공간은 바깥이지 집이 아니란다. 천장은 있는걸요? 식탁에서 저마다의 구석자리에 코를 박고 앉아 있는 방문객들은 너희의 대화를 빤히 들으면서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무시로 일관했다. 싱크대 아래 배수관에서 끊임없이 배수되는 흥건한 물처럼 우리는 바닥을 깊은 물로 적시지도, 깨끗하게 말리지도 못한 상태에서 서로를 겉돌았다. 수십, 수백 번을 마주치면서도 너희는 서로의 이름을 묻지 않았다. 너희는 같은 바깥을 살면서도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다.

대화는 자주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시인 여자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돌아다니는 탓에-기실 그녀는 입술을 움직여서 제 소리를 들으며 생각하는 타입이었다- 조용할 틈은 없었다. 소리는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바깥에 대해서 물었으나, 늙은 여자처럼 성실하게 대꾸해주는 이는 없었다. 대개는 소리를 없는 사람 취급하며 물고 있던 살-또는 이파리-를 씹었고, 간혹 대답해 주는 사람은 그리 도움이 되지 않을 이야기들만 늘어놓았다. 바깥을 믿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느니, 여자의 안보다 머물기 좋은 곳은 없는데 또 어디로 나돌아다니려 하는 것이냐느니, 시시껄렁한 음담패설들이 대부분이었다. 소리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면 그들도 이내 흥미를 잃고 하던 일을 계속하기 일쑤였다. 그렇다고 해서 소리 역시 바깥의 방을 드나드는 이들을 무시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내일을 홀로 건너갈 때 목소리를 잃은 목 속이 얼마나 텅 비어가는지, 음성을 잃은 입안이 소리를 입은 귀 안이, 채우지 못한 몸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대를 잃은 목소리들은 차마 입 밖으로 새어나가지도 못한 채, 땅바닥으로 질질 흘렀다. 아무도 없을 때, 소리는 홀로 내일을 건너가는 희멀건 압박감을 견딜 수가 없어 말간 침과 함께 신음을 쏟아내고는 했다. 너와 함께 내일을 맞을 수 있어서 다행이야. 다행이야. 돌아오는 일 없는 메아리를 직접 울어내는 목이 얼마나 아픈지, 소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소리에게는 제 목소리가 아닌 소음이 간절했다. 제 소음으로 몸을 뒤척이는 귀들이 간절했다. 누구라도 너를 들어준다면 무엇이든 견딜 수 있을거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눈은 왜 하얀 걸까요.

늙은 여자는 웃으며 말했다. 모든 눈이 하얗지는 않아, 소리. 모든 소리에게 소리가 있지는 않은 것처럼. 해가 저물어 갈 때 노을이 내려앉은 눈은 붉단다. 본 적이 없니?

그런 눈 말고요.

그래? 그것도 마찬가지 아닐까. 눈이 하얀건 아니야. 어떤 눈이 하얀 것 뿐이지. 눈을 보는 눈도 그리 하얗지만은 않단다.

유리도 눈을 좋아해요. 눈 없이 시커먼 흙이나 하얀 바닥만 있는 날에는 눈을 찾지 않지만 방안 가득 눈이 쌓여 있는 날에는 꼭 눈을 만지고 놀거든요. 눈사람을 만들기도 하고, 손바닥 안에서 녹아가는 눈물을 바라보기도 하고요.

넌 정말 유리를 좋아하는 모양이구나. 만날 때마다 그애 이야기를 하니.

소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마, 그럴지도 모르죠. 하는 대답을 속으로 삼킬 뿐이었다. 사실 소리는 유리가 누구인지도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눈을 좋아하는 유리가, 눈을 그리워하지는 않는 유리가 어떠한 날의 유리인지 소리는 전혀 알지 못했다. 기실 매일의 유리들은 모두 다른 존재들인데도, 소리는 마치 유리라는 이름에 정확하게 대응하는 불변의 존재가 있다는 것마냥 이야기했다. 그렇지만 유리는 날이 저물 때마다 죽었고, 새로운 유리들은 이전의 유리와 같은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애들은 모두 다른 유리들이었다. 그럼에도 유리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소리의 말버릇과 관련 있을지도 모르겠다. 소리는 구체적인 감각들보다는 세목이 사상된 추상적인 말들을 즐겨 사용하고는 했다. “유리”도 마찬가지이다. 그 어휘에 대응하는 항구적인 인상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소리는 언제나 불안에 대해 논하듯 유리를 부르곤 했다. 그 이름에 대응하는 존재는 이미 그 밤을 마치고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허구적인 관념을 믿듯 소리는 유리에 대해 서슴없이 이야기했다. 유리는 조용하고 잘 우는 아이예요. 손톱이 동그랗고 손이 따뜻하죠. 손뿐만 아니라 가슴도 팔도 배도 얼굴도 전부 따뜻해서 눈을 만지면 금방 녹아버려요. 온종일 만든 눈사람을 끌어안고 잠들다가 눈사람이 금세 녹아버려서 펑펑 운 적도 있어요. 바닥으로부터 차오르는 물무늬 유리종의 멜로디를 들어본 적 있나요? 그애는 가끔 이렇게 구체적인 허상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는 하는데, 그래서인지 내 말도 전부 꾸며낸 이야기라고 믿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너는 꼭 책을 읊는 것처럼 이야기하는구나. 추상적인 말들만 하는 말버릇도 문어투인 말투랑 관련이 있지 않을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죠. 나는 대화보다 많은 책들을 읽으면서 자랐으니까요. 그러고보니, 이곳에는 책이 없나요?

늙은 여자는 간혹 책을 찾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하면서, 언제나 그렇듯 주인 행세를 했다. 이층의 서재까지 소리를 데려다 준 여자는 책에는 흥미가 없다는 듯 곧장 내려가 요리를 하겠다고 했다. 소리는 여자를 붙잡으며 글자를 읽을 수 없다면 소리내에 읽어주겠다고 말했다. 읽어줄게요. 어떤 책이든요. 원하는 게 있다면 뭐든 말해봐요. 내게는 언제나 듣는 귀가 간절하니까. 아마 이곳에서 당신만큼 나를 반겨주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다른 사람들은 꼭 내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구니까요. 같은 바깥에 머무면서도.

그건 당연한 거야. 소리, 바깥은 같이 머물 수 있는 장소가 아니란다. 바깥은, 장소가 아니야. 소리. 너희는 각자의 자리 위에 서 있을 뿐이지.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타인의 방안을 드나드는 거란다. 그게 제 것이 될 수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소리, 이곳에는 삶보다 많은 유리들이 있어. 알고 있었니?

아니요. 그래도 당신은 내 말을 들어주는걸요.

그건 네가 나와 같은 안을 공유하기 때문이지. 너, 다리가 없는 여자의 방에 들어간 적이 있지? 매일 우산을 만지작거리는.

그녀를 아나요?

그래. 나는 그애의 이름도 알고 있지. 첫 번째 내일을 맞이한 건 그녀의 옆이었으니까.

난 그녀의 이름을 알지 못해요.

아니, 너는 그애의 이름을 알고 있어.

그걸 어떻게 아나요? 당신이 틀렸어요. 그녀는 내게 끝까지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어요. 자기가 우산이라고요. 다리가 없는 건 사람이 아니라고요.

두 개의 다리를 가져야 사람이라고. 네 말이 맞아. 그녀는 우산이야.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요? 말을 하고 우산을 말리고 바닥을 기어다니는 그녀가 우산이라고? 저 스스로는 움직일 수도 없는 정물에 불과하다고?

자기 마음대로 다리를 접고 펼 수 없는 건 마찬가지라고, 속에 담긴 물을 제 멋대로 쏟아버릴 수 없는 건 매한가지라고, 그녀가 그러더구나. 어쩌면 똑같을지도 모르지.

우산이요? 아뇨, 그녀는 우산이 아니에요. 그녀에겐 그녀만을 특정지을 수 있는 유일한 이름이 필요해요. 그방에 널브러져 있는 색색의 사물들과는 다른 이름을 가질 자격이 있다고요.

그건 불가능하단다. 우리에게는 그렇게 특별한 어휘가 없어.

왜요? 유리만 해도,

유리도 마찬가지겠지. 너는 매일 유리를 부르지만, 유리들이 모두 같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잖니. 그애들은 전혀 다른 존재라는 걸. 그런데도 너는 유리들을 유리라고 부르지. 다른 말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지 않니?

우리는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으니까, 우리가 공유하는 어휘들의 수만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이제는 잘 모르겠어.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하얀 벽뿐인 세계에서도 모두가 새로운 날의 시작을 느끼고 있었다. 소리는 늙은 여자와 눈인사를 나누었다. 여자는 제 밑을 더듬으며 구역질을 하고 있었다. 여자는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다. 시큼한 비린내가 풍겼고 소리는 갑작스러운 이물감에 시달렸다. 속에 있는 무언가 제가 아닌 것을 게워내야만 할 것 같은 기분. 소리는 의미도 음절도 없는 신음을 흘렸다. 찍찍, 찍, 찍 거리는 뱀의 울음소리처럼. 여자는 소리의 입술을 쓰다듬으면서 속삭였다. 어서 가렴. 더 울어주지 않아도 괜찮단다. 이곳은 쥐의 집도 뱀의 집도 아니니까. 가렴, 어서. 소리는 이해할 수 없는 풍경들이 제 귓속에서 바즈락거리는 것을 느꼈다. 번데기도 치지 않고 죽은 피부를 꿰뚫고 나온 날벌레가 소리의 안쪽으로 더 깊은 곳으로 파고드는 소리. 소리는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미로로 향했다. 새벽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문 안쪽에서 누군가가 찍,찍찍 거리고 있을 지도 모르지만 바깥까지 새어나오는 소리는 없었다. 오른쪽 허벅지와 왼쪽 허벅지를 번갈아서 앞으로 내밀다 보니 하얗고 길쭉한 틈새가 소리의 눈 앞에 놓여 있었다. 소리는 틈 안에 손가락을 밀어넣고 몸 쪽으로 잡아당겼다. 입구가 새끼 짐승의 비명처럼 끼익하고 끌리는 소리와 함께 벌어졌다. 문 안쪽에는 아직 소녀인 채로 바닥을 더듬거리는 삶이 있었다. 유리, 네 이름은 유리야, 그렇지? 오늘을 죽을 때에도 그녀를 소리는 유리라고 부를 테지만, 그건 그녀의 이름이 아닐 것이다. 적어도 어제의 유리와 같은 발음으로 불려서는 안되는 삶이 그녀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소리는 유리를 유리라고 부른다. 유리가 아닌 여자는 유리로 살고 유리로 죽는다. 그런 삶도 어딘가에는 있는 것이다. 부조리가 이곳에 있다. 그것뿐이다. 맞지 않는 이름으로 불리고 부르는 우스꽝스러운 일은 다른 누구도 아닌 소리를 위한 것뿐이었다. 소리는 지나간 유리들을 기억하고 싶었고 유리라는 이름으로 살아갈 누군가가 필요했다. 정작 그녀는 어제와 그 전을 살아간 유리들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응, 나는 유리야. 유리, 하는 부름에 대답하는 그애의 부조리가 소리에게는 포기할 수 없을 정도로 다정하고 따뜻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유리, 응. 너는 유리가 아니야, 하고 이야기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너를 데리고 나갈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럼 너는 이제까지의 네가 너와 같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 말테니까. 더 이상 우리의 부조리에 어울려주지 않을 테니까. 유리. 응. 너는 이곳에서 비합리적인 부름으로 머물러주면 좋겠어. 언제라도 내가 사라진 유리의 이름을 부르면 대답할 수 있도록. 언제라도 돌아올 틀린 대꾸로. 유리. 나는 너무 멍청해서 네게 어떤 이름이 알맞은 건지 너를 어제와 같은 어휘로 불러도 괜찮은 건지 모르겠어. 어쩌면 우산을 접는 여자의 말이 맞는지도 몰라. 다리가 없는 그녀는 우산이고 다리가 두 개인 우리는 그냥 사람이라는 거, 그냥 그 뿐일지도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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